차천로의 묘에 대하여
경기도 과천시 문원동 산35-1번지 속칭 별왕리 입구 우측 산자락에 매우 화려하게 치장한 묘가 하나 있다. 오산 차천로(1556~1615)의 묘라고 하는데 1968년 조성하고 宋在晟이 지은 비문이 빽빽이 뒷면을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차례로 읽어보니 상부에 언급된 연안차씨 선대를 다음과 같이 모두 설원기를 따라 적었다.
‘소전으로부터 당(唐)ㆍ우(虞)ㆍ하(夏) 제왕의 계통을 거쳐 어룡씨(御龍氏)ㆍ시위씨(豕韋氏)와 기자(箕子)가 동방으로 건너올 때 수행한 사사공(士師公), 신라의 승상공(丞相公)이 있고, 여기에서 미루어 내려가면 신라와 고려 사이에 명공(名公)과 대신(大臣)이 세대마다 배출되어 끊이지 않았는데, 연성군(延城君)으로부터 간의공(諫議公)에 이르기까지 그 사이에 18명의 재상이 나왔다. 간의공의 이름은 차원부(車原頫)인데, 왕씨(王氏)가 망하려고 하자 운암(雲巖)으로 가 은거하였다.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이 찾아가 치국의 방도를 물으니, 공로가 있는 사람을 우선으로 삼아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그 뒤에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으니, 태조가 말하기를 “오늘날의 엄광(嚴光)이다.” 하였다.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송경(松京)에 이르렀을 때 흉측한 무리들이 명분을 꾸며 죽이는 화를 당하였다. 정종조(定宗朝)에 좌찬성(左贊成)의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세종조(世宗朝) 초기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세조조(世祖朝)에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에게 명하여 《설원기(雪冤記)》를 편찬하게 하였다.’
위에 언급된 차천로의 선대는 모두 근거 없는 허구이다.『차원부설원기』는 차천로의 천박한 글재주로 조작한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연구자들의 보편적인 견해이기 때문이다. 차천로는 문재가 있다하나 그 문재는 귀감이 되지 못하였고, 행실 또한 너무나 보잘 것 없기 때문에 허풍과 같다 할 것이다. 한 사람의 행위는 그 언행이 일치 되었을 때, 그 문장과 인격은 존중되어 진다.
차천로는 대리 과거를 봐주는 부정행위를 저지르는가하면, 왜구에게 몸을 더럽혔다하여 본처를 돌보지 않고, 왕실 첩녀를 취처하여 선조대왕으로부터 강상을 어지럽힌 패륜으로 지탄 받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차천로는 재주가 있다하여 없는 사실을 꾸며 조상을 부풀려 자신을 높이고, 무관한 사람을 서얼로 만든 파렴치 한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였다는 것이 여러 논문에서 밝혀졌다. 곧『차원부설원기』라는 위서를 지어서 정도전 등 3인을 서얼로 조작하고, 그들이 연안차씨를 죽었다고 누명을 지우고 자손들에게는 깊은 원한을 심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정도전이다. 차천로는 실제 정도전의 6대손 정원호의 외손녀를 후처로 삼았다. 그녀의 어머니는 성종대왕의 종실 금천정 이보의 첩이다. 곧 정원호의 딸이다. 이 사실이 선원록39권과 봉화정씨족보 2권 515쪽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차원부설원기의 기술은 사실을 확인 할 수 없는 조작이라고 판명되었지만, 차천로가 왕실 첩의 딸을 후처로 맞은 것은 명백히 드러난 사실이다. 그것도 16세 연하의 서얼 녀를 취한 것이다. 진짜 서얼은 정도전이 아니라, 그의 아들 차전곤과 그 후손들이 정도전의 서얼일 개연성이 짙다.
그런데 그들은 이 사실을 어떻게 기록하였을까? 족보는 물론 행장에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전주 이씨인데, 아버지는 금천정(錦川正) 이보(李俌)이고, 할아버지는 안남군(安南君) 이수금(李壽錦)이며, 외할아버지는 현감(縣監) 재령이씨(載寧李氏) 이은려(李殷礪)이다.’ 라고 기록하여 사실을 숨기고 왕실계보의 적통임을 내세우고 있다. 차천로 처의 외할아버지라고 기록한 재령이씨 이은려는 금천정 이보의 본처 아버지이다. 그들은 자신을 낳아준 사람이 첩이라는 이유로 외조모로 기록하지 않고, 낳아주지도 않은 이보의 본처를 외조모라 칭하여 사실을 애써 숨기고 있다. 이와 같이 그들의 외조모의 존재를 무시한 패륜과 사실을 은폐한 작태를 통하여 그들의 인간 됨됨이가 위선과 가식으로 가득함을 알 수 있다.
이 묘는 차천로의 실제 무덤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조선말에 이면주(李冕宙, 1827∼1918)가 쓴 차천로의 다음 행장 기록에서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공의 묘소는 과천(果川)의 동쪽 별앙리(別央里)에 있다고 하는데 산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니, 한스럽다.
이것은 이 당시에 차천로의 묘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봉분 앞에 세운 또 다른 작은 비문을 살펴보니, 현제의 봉문은 1968년도에 조성하였고, 당시 그의 14세 후손 종량이 ‘옷과 신발만 묻었다.’ 라고 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봉분은 차천로의 실제 묘가 아니라 허묘인 것이다. 후손들이 차천로의 묘가 과천 별앙리에 있었다는 인지된 사실만으로, 현재 위치(별왕리 산35-1번지)에 옷과 신발만 새로 장만하여 묻은 시신 없이 조성한 허묘인 것이다. 이러한 형태를 정확히 말하자면 추원단, 또는 제단이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명칭이라 할 것이다.
그들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참으로 어설프고 부끄러운 작태를 통하여 한편, 조상을 위한다는 미명아래 겉으로 나타내어 신분상승을 꾀하고자는 욕망과 대리만족, 또는 보상심리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하겠다.
묘는 실제 사자의 시신이 안치된 곳을 이른다. 족보는 한 가문의 역사이고 행장은 한 사람의 기록으로서 사실대로 정확하게 기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생명력 있고 소중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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