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류릉(柳陵)의 모습 (2008. 10.)

ryu하곡 2014. 2. 12. 02:06

 

류릉(柳陵)의 모습 (2008. 10.)

 
류릉 관련 몇 가지 상세한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제가 류릉 위치에 관해 열심히 추정에 추정을 거듭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새로 알게 된 사항들을 종합하면 추정 위치는 약간 어긋나 있었습니다. 이번에 3일에 걸쳐서 시간 나는 대로 위치를 찾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아마도 정확한 위치를 찾아낸 듯합니다. 이 이야기는 따로 하겠습니다.

 
2. 류기환 선생(9월 26일 류릉 참배)께서 대종회에 전해주신 동영상이 몇 개 있는데 거기서 몇 장면 캡쳐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흔들리는 장면도 있고 질도 저하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류릉 주변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집 몇 채가 있는 산길 입구에서 류릉까지 야산을 올라가듯 올라갑니다. 그다지 험하지 않고 30여분쯤에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로 보입니다.

- 다음은 산길 입구에 들어선 장면입니다. 중앙 집 뒤편으로 보이는 것이 2002년에 벼락에 맞았다는 은행나무입니다.
       

- 가까이서 본 은행나무입니다. 두 사람 이상이 에워싸야 할 정도의 굵은 나무이며, 나무에는 낙서(이름들)가 가득 새겨져 있습니다. 당국에 의해 무슨 보호수 같은 것으로 지정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손대지 못한다고 합니다. 옥수수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은행나무 앞에 신도비가 2개 있습니다.
       

- 은행나무 앞의 신도비입니다. 앞에 있는 것이 은행나무 가까이 있는 것이고, 편의상 신도비A로 부르고, 멀리 있는 것은 신도비B로 부르겠습니다. 신도비A는 갓이 없고 B는 갓이 있습니다. 짐작이지만 최근 이 부근이 모두 옥수수가 재배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류기환 선생의 방문에 맞추어 땅을 고르고 정리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동영상에서 현지 주민에게 신도비가 여기 계속 있었느냐고 질문하니 어떤 분이 대답을 하는데 거의 말이 분간하기 어렵지만 '돌들도 그대로'라며 긍정적인 대답을 하는 것으로 들립니다.
       

- 신도비A의 확대사진입니다. 헌원->왕->차->류의 내력과 왕조명, 차승색의 이름이 보입니다. 전형적인 류차동원설에 입각한 유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가 쓴 글인지 현재 정보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족보에도 이런 식으로 쓴 신도비는 없어서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 신도비B의 확대사진입니다. 족보의 것(남병철 찬)과 동일합니다. 비석 옆면에는 28대손 장균(章均)의 이름이 나오던데, 동영상에서 비석을 읽고 해설을 해주는 조희승 박사(이번에 도움 말씀을 주려고 동행함. 평양에 있다고 함)가 말하는 소리에는 '감독'을 한 사람이라는데, 확인이 필요합니다. 그 면에는 재산목록이 나오는데 조 박사는 묘지기를 위한 재원이라고 하더군요. 28세 류장균은 족보에 2명이 나오던데, 관련성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 은행나무가 있는 곳에 재실이 있었던 것이 확실해 보입니다. (아래에 이에 관한 얘기가 있습니다.)

- 다음 두 장의 사진은 은행나무 있는 곳에서 바라본 류릉 방면의 모습과 거기서 출발한 지 몇 분 후의 모습(흔들림)입니다. 병풍처럼 펼쳐진 곳의 상부에 류릉이 있습니다. 눈에 바로 보이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 산길은 눈으로 보는 것만큼 가깝지 않고 오르는데 시간도 걸립니다.
       
       

- 일행이 류릉으로 올라가는 장면입니다. 북한 관리들, 주민들, 류기환 선생 일행들입니다. 주민 중에는 류서열(70세, 대승공 32세)가 있어 이번에 여러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현재 근처에 류씨들은 전쟁 등의 이유로 모두 흩어져서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 다음은 류릉 주변의 모습입니다.

류릉의 왼쪽: 비석 2개가 보입니다. 뒤로 보이는 산은 '비산'이라고 판단됩니다. 비석 2개 중 대승공 무덤 전면에 있는 것은 비석C로, 왼쪽 앞쪽으로 있는 것은 비석D로 부르겠습니다. 다음 사진들은 류릉의 왼쪽에서 아래쪽까지의 모습들입니다.
       
       
       
       

제사상 차린 모습 및 류릉의 뒤쪽:
       

류릉의 오른쪽에서부터 앞쪽까지:
       
       
       
       
       

손에 잡힐 듯 은행나무와 산 아래 집들이 보입니다. 산 아래 멀리 보이는 푸른 동산들은 달천리의 당간부 별장 등이 있다는 곳입니다. 항공사진에서도 뚜렷이 볼 수 있습니다.

- 비석D의 앞면에는 “高麗大丞文化柳公車達之墓”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음은 뒷면의 확대사진입니다. 이 비석은 묘지석이고, 류기영(28세손)의 글입니다. 저는 이 글을 본 적이 없었으나 대종회에서는 알고 계시더군요. 조 박사가 이 글을 옮기고 번역/주석해서 자료로 제공했습니다.
       

- 비석C(무덤 정면의 비석)의 앞면에는 “高麗大丞柳公之墓”라고 되어 있습니다. 비석과 신도비 모두 제목이 “고려”로 시작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비석C의 뒷면은 거의 읽기 어려웠습니다. 돌버섯도 많이 끼어있고, 동영상이라서 그랬습니다. 제가 읽은 몇 글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征羅濟也公出車乘克成統一之功策壁上勳位大丞卒文化九月山公柳氏諱車達

이것만으로는 글자 일부와 순서가 다르지만 비석D의 내용과 동일합니다.

 
3. 동영상에서 조 박사는 헌원씨 등의 내력 설명이 믿을 수 없는 것이라 말하고 있는데, 류기환 선생이 가져온, 조 박사가 준비해준 자료에 있는 “조선성씨유래34: 류씨에 대하여”(1997년)라는 그가 쓴 글에도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여기에서는 류차달 이전의 일들이 모두 력사적 사실과 전혀 맞지 않으므로 일소(一笑)에 붙인다.”

조 박사는 비석이 아래(은행나무 옆)에도 있는 점, 무덤 앞의 비석이 비교적 최신(100년쯤 되었다고 판단; 실제 류기영의 글은 1861년에 쓴 것임)임 등을 근거로 무덤이 은행나무 있는 곳에 있다가 이장된 것은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습니다. 두어 번 그런 언급이 나오는 것을 보면 즉흥적인 발상은 아닌 듯했습니다. 그러나 이장 관련 얘기가 전해온 것이 전혀 없으며, 조 박사가 '비석'이라고 부른 것은 모두 신도비로서, 무덤 바로 앞에 비석처럼 세우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자리가 넉넉한 경우의 일로서, 신도비는 통상 동네 어귀 등에 세우는 것이 보통입니다. 지형상 신도비를 그 아래 세운 것은 당연한 일이고, 제 추측으로는 재실이 '묘하'에 있었다는 일관된 기록으로 보아 그 위치쯤에 있었을 것입니다. 재실의 사진을 보면 집 뒤에 큰 나무가 보이는데 그게 은행나무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동영상에서도 은행나무에서 '재실이 있었던 곳'이라는 말이 있고, 북한 관리인 듯한 분이 신도비 앞쪽을 가리키면서 “여기에 큰 당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전쟁 중에 다 불탔다고 그러고... 헌당(?) 집이 있었다고 그럽니다.”라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정도면 제 추측은 확신이라 해야겠네요.) 따라서 신도비가 있던 곳이 무덤이었을 가능성도, 이장이 있었을 가능성도 없습니다.

그런데 전해오는 말에 “영락보”가 재실의 들보에 걸쳐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혹시 재실이 있으면 그 안에 영락보가 보관되어 있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는데 그것은 불가능하게 되었고, 혹시 근처 사람들에게나 도서관 같은 곳에 보관되어 있을 가능성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동영상을 유심히 보니 가파르게 올라가다가 무덤이 두어 개 보이고 그 위로 올라서면 갑자기 약간 평평한 지역의 류릉이 나타납니다. 아래에서 보면 그런 게 있을 성 싶다가 올라서면 널찍한 곳이 홀연 나오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류릉 아래 무덤에서 올라설 때 흙으로 몇 개의 계단을 조성해 놓았는데 옛날에는 그 위치에 석축이 계단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맨 아래 부분에 해당하는 석축이 동영상의 장면에 얼핏 지나가는 모습으로 그대로 보였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대승공의 무덤임이 확실한 또 하나의 증거라고 생각되었습니다.

 
2008. 10. 7.
채하 류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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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文化柳氏 尙書公 靑年會 새해 福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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