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안차씨의 주장에서 한가지를 더 소개합니다. 이글은 2000년대를 들어오면서 연안차씨종친회 중앙본부 회장과 부회장이 주축이 된 “연안차씨의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 을 하면서 나온 글이며 지금도 주장하고 있는 글 입니다. 밑줄부분은 제가 강조하기위해 줄 표기한 것입니다.
※출처 : 연안차씨종친회중앙본부/연안차씨유래/약사(pdf파일 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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Ⅸ.【柳車達】이란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나라 관례상(慣例上) 성씨(姓氏)에 이름대신 호(號)를 붙여서 호칭(呼稱)하며 기록(記錄)한 것이 많이 있다. 예(例)를 들면 본성명(本姓名)이 한호(韓濩)인데 한석봉(韓石峰)으로 호칭(呼稱)하며 그렇게 기록을 하였다. 그래서 조선조(朝鮮朝)에 글을 쓰는 분들이 이름과 호(號)를 혼돈(混沌)하여 류해(柳海)를 류차달(柳車達)로 기록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柳海』의 경우(境遇)는 일반관례(一般慣例)에 따라『柳車達』로 호칭(呼稱)하거나 기록할 수 없는 연유(緣由)가 아래와 같이 있다.
첫 째 : 차자(車字)는 우리 차류양문(車柳兩門)의 원조(元祖)이신 왕몽(王蒙)께서 신라태조(新羅太祖) 박혁거세(朴赫居世)로부터 차씨(車氏)로 사성(賜姓)을 받으신 차씨(車氏)의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로부터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33세 차승색(車承穡)에 이르러 신라(新羅)의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한 헌덕왕(憲德王)을 시해(弑害)하여 왕실(王室)의 기강(紀綱)을 잡을 도모(圖謀)가 누설(漏泄)되어 황해도(黃海道) 유주(儒州)로 둔적(遯迹) 모성류씨(冒姓柳氏)로 하고 이름을 백(栢)으로 피신(避身) 6세 류해(柳海 :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의 직계손자(直系孫子)이다에 이르러 모성류씨(冒姓柳氏)의 6세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復姓)하여 달자(達字) 사명(賜名)하였으며 득성조(得姓祖)로부터 대대손손(代代孫孫)이 이어 내려온 조상(祖上)의 혼지(魂志)와 충정(忠貞)이 담겨 있는 성자(姓字)로 가문(家門)을 상징(象徵)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손(子孫)이 성자(姓字)를 이름자로 쓸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성자(姓字)인 차자(車字)를 이름자로 쓴다면 이것은 조상(祖上)과 가문(家門)에 모욕죄(侮辱罪)를 범(犯)하는 불효행위(不孝行爲)로 불공(不恭)의 중죄(重罪)를 짓는 것이다.
두번째 :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족보(族譜)를 살펴보면 고려조(高麗朝)에 국조(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을 추숭(追崇)된 왕공도(王恭道)는 신라(新羅) 애장왕조(哀莊王朝)에 좌승상(左丞相)을 지낸 차무일(車無一)의 33세 손자(孫子) 차승색(車承穡)의 차자(次子)차공도(車恭道)로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의 변난(變亂)에 강남(江南)으로 피신(避身), 옛 원조(遠祖)의 성(姓) 왕씨(王氏)로 복성(復姓) 개성명(改姓名)을 왕공도(王恭道)한 것이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께서 고려개국(高麗開國) 후 국조(國祖) 및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始祖)로 추숭(追崇)한 왕건태조(王建太祖)의 증조(曾祖)로 본성(本姓)이 차씨(車氏)인데 증조(曾祖)의 본성(本姓)인 차자(車字)를 신하(臣下)인 대승공(大丞公)의 이름자에 차자(車字)를 내려 줄 수 없는 것이며, 공신(功臣)인 대승공(大丞公)이 원덕대왕(元德大王)의 본성자(本姓字)를 이름자로 사용하면 원덕대왕(元德大王)을 능멸(凌蔑)하는 역적(逆賊)의 죄인(罪人)이 되는 것이다.
셋 째 : 연안(延安) 차씨(車氏)의 득관조(得貫祖) 차효전(車孝全)의 친제(親弟)인 휘(諱) 효금(孝金)인데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고려를 개국(開國)한 후 모성류씨(冒姓柳氏)의 6세를 본성(本姓)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면서 대승공(大丞公)에게 복성명(復姓名) 차달(車達)로 내리고 휘(諱) 효금(孝金)에게 류씨(柳氏)로 사성(賜姓)하였는데 조상(祖上)과 가문(家門)을 상징(象徵)하는 차씨(車氏)의 위에 류자(柳字)를 올려 복성명(復姓名)인『車達』을 사명(賜名)으로 날조(捏造)하여『柳車達』이라 하는 것은 조상(祖上)과 종가(宗家)를 능멸(凌蔑)하고 친형(親兄)의 후손(後孫)인 연안(延安) 차문(車門)을 모욕(侮辱)하는 처사(處事)라 용납(容納)할 수 없는 것이다.
넷 째 :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류씨(柳氏)로 모칭(冒稱)한 류백(柳栢 :一云 柳穡)으로부터 류해(柳海)까지 조상(祖上)의 성(姓)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을 시키고 류해(柳海)는 고려개국(高麗開國)의 공신(功臣)이므로 사명(賜名)을 달(達)로 하여 성명(姓名)이 차달(車達)인 것을 고려(高麗)가 멸망하고 조선개국(朝鮮開國)한 초기(初期)에 하륜(河崙)이 운암공(雲巖公) 차원부(車原頫를 무고(誣告)하여 왕자(王子)의 난(亂)에 연루(連累)케 하여 역적누명(逆賊陋名)으로 차문(車門)이 적족피화(赤族被禍)로 차문(車門)이 합문몰락(闔門沒落)의 기화(奇禍)로 류문(柳門)에서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을『柳車達』로 날조(捏造)하여 대승공(大丞公)의 성(姓)은 류씨(柳氏)이며 사명(賜名) 차달(車達)로 고려태조(高麗太祖)가 내렸다 하여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유생(儒生)들이 글을 쓰면서 이렇게『柳車達』로 기록(記錄)하였다 사료(思料)되나 이것은 인륜사회(人倫社會)에 큰 오류(誤謬)를 범(犯)하는 처사(處事)이며 차문(車門)과 류문(柳門)의 선대조상(先代祖上)과 가문(家門)을 능욕(凌辱)하고 고려국조(高麗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숭(追崇)된 왕공도(王恭道)의 본성명(本姓名)이 차공도(車恭道)인데 원대왕(元德大王)의 본성차자(本姓車字)를 그 나라 공신(功臣)이 이름의 글자로 쓴다면 이는 원덕대왕(元德大王)과 고려조(高麗朝)를 능멸(凌蔑)하는 역적행위(逆賊行爲)가 됨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섯째 : 근대(近代)에 와서 우리 차문(車門)의 선대조상(先代祖上)의 행적(行蹟)을 기록한 문헌(文獻) 및 족보(族譜)를 살펴보면 우리 차문(車門)은 고려개국(高麗開國)의 공신후예(恭臣後裔)로 왕건태조(王建太祖)는 차문묘예(車門苗裔)인 인연(因緣)으로 교목세가(喬木世家)로 려말(麗末)까지 잠영세가(簪纓勢家)로 계승(繼承)하였으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조(高麗朝)가 멸망(滅亡)하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초(初)에 적족재화(赤族災禍)로 합문두적(闔門遯迹)하여 숨어 살면서 세인(世人)들은 이씨조선(李氏朝鮮)을 아조(我朝)라 불렀지만 우리 차문선대(車門先代)들은 이씨조선(李氏朝鮮)이라 호칭(呼稱)하여 온 것을 보아도 우리 차문후예(車門後裔)들은 고려조(高麗朝)를 능멸(凌蔑)하고 욕(辱)되게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복성명(復姓名)으로 성씨(姓氏)는 차씨(車氏) 휘(諱)는 달(達)로 사성명(賜姓名)한 차달(車達)을 사명(賜名) 차달(車達)이라 하여 대승공(大丞公)의 차자(次子) 효금(孝金)에게 왕건태조(王建太祖)가 사성(賜姓)한 류자(柳字)를 성씨(姓氏)하여【류차달(柳車達)】이란 성명(姓名)을 사용함은 불가(不可)함을 알면서 차문(車門)의 옛 보첩(譜牒) 및 문헌(文獻)에【류차달(柳車達)】로 기록된 것은 차문(車門)이 역적누명(逆賊陋名) 휘말려 조선조(朝鮮朝)에서 서인(庶人)으로 전락(轉落)하여 힘없이 숨어 살면서 시대적여건(時代的與件)에 따라 불가피(不可避)한 사정(事情)으로 선대(先代)들이 류문(柳門)의 보첩(譜牒)과 문헌(文獻)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 잘못된 내용(內容)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引用)하여 기록해 온 것은 문맥(門脈)을보존(保存)하는 차원(次元)에서 세상(世上)을 속이며 차문(車門)의 후예(後裔)들이 좋은 세상(世上)이 오면 왜곡(歪曲)돤 차문(車門)의 보첩(譜牒) 및 문헌(文獻)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보첩(譜牒)과 문헌(文獻) 등 여러 곳에 암시(暗示)하여 진실(眞實)들을 감
추어 기록(記錄)을 남겨 오늘날 까지 전하여 온 것에 차류양문(車柳兩門)은 유의(留意)해야 할 것이다. 이제 차류양문(車柳兩門)의 후예(後裔)들은 조상(祖上)과 가문(家門)을 욕(辱)되게 왜곡(歪曲)된 사적(史籍)을 바로잡는 일들을 근대(近代)에 주워진 사명(使命)으로 여기고 가문사(家門史)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며 특히 차문(車門)의 후손(後孫)들은 선대(先代)들이 알면서도 올바로 기록하지 못하고 왜곡(歪曲)된 기록을 인용(引用)해야 했던 시대적여건(時代的與件)의 수모(受侮)의 한(恨)을 풀어 지하(地下)의 선대(先代)들이 영면(永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찬문(車門)의 자존심(自尊心)을 짓밟고 모욕적(侮辱的)인 왜곡(歪曲)된 내용(內容)의 보첩문헌(譜牒文獻)을 과감(果敢)히 바로잡아 정리(整理)해야 하고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대승공(大丞公)에게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사명(賜名) 달(達)로 하였으니 성명(姓名)을 차달(車達)로 바로 고쳐 사용(使用)하고 모순(矛盾)된【류차달(柳車達)】은 사용(使用)하지 않아야 한다.
여섯째 :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대승공(大丞公)에게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내린 성명(姓名) 차달(車達)의 “차자(車字)는 성 차”로 곧 차자(車字)는 성(姓)이란 뜻이며, “달자(達字)는 연결할달”로 연결한다는 뜻이라 곧 차씨(車氏)로 연결한다는 뜻이 됨
으로 곧 이것은 대승공(大丞公)께서 본성(本姓)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연결한다는 뜻이 된다. 이것을 뒷받침 하는 내용은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선생이 기술(記述)한『車雲巖雪寃記』의 응제시편(應製詩編)을 살펴보면 이예장(李禮長)의 시주(詩註)에【언수운량지공이특증차달지호원기의즉불망상조본성지의야(言雖運粮之功而特贈車達之號原其意則不忘上祖本姓之義也)】라 한 구절(句節)을 번역하면 “말은 비록 양식을 운반한 공으로 차달(車達)이란 성명을 내렸다 하나 그 근본의 뜻은
곧 조상의 본성의 옳음을 잊지 않게 한 것이다.” 또【기자효전자위생자별사성씨불시타전의야이기장이승습상조지홍열야(其子孝全字爲生子別賜姓氏不是他全意也以其長而承襲上祖之弘烈也)】라 한 구절(句節)의 번역은 “그 아들 효전(孝全)은 글자를 생자(生字)로 특별히 성명(姓名)에 내리지 않고 이것을 다른 전(全)으로한 뜻은 그 맏이로 조상(祖上)의 홍열(弘烈)을 승습(承襲=承繼)케 한 것이다.” 여기에 승습(承襲)이란 두 글자는 승계(承繼)와 같은 뜻인데 이것은 시조(始祖)로부터 한 대(代)도 끊어짐 없이 이어감을 말하는 것이며 중간에 끊어진 사실이 있다면 이 승습(承襲)이란 말을 쓸 수 없는 것이니 이 승습(承襲)의 두 글자는 모성류씨(冒姓柳氏)의 6세는 본성(本姓)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차씨(車氏)의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함을 입증(立證)하고있음으로 대승공(大丞公)의 성명(姓名)은 차달(車達)이고【류차달(柳車達)】은 조작(造作)된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므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일곱째 : 1769년 영조(英祖) 45년 기축(己丑)에 간행(刊行)한 보첩(譜牒)의 서문(序文)을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홍문관대제학(行 弘文館大提學) 장수인(長水人) 황경원(黃景源)이 찬술(撰述)한 서문(序文)을 살펴보면【자승색오세지차달좌왕씨유대공복성차씨차달자효전(自承穡五世至車達佐王氏有大功復姓車氏車達子孝全)】이란 구절(句節)을 번역은 “승색(承穡)으로부터 오세(五世)에 이르러 차달(車達)은 왕씨(王氏)를 도우셔 큰 공(功)이 있어 차씨(車氏) 복성(復姓)하였고 차달(車達)의 아들 효전(孝全)”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句節)의 차달(車達)이란 것은 즉 복성(復姓)은 차씨(車氏)요 이름은 달(達)이며 그 차달(車達)의 뜻을 풀이하면 차씨(車氏)로 연결(連結=承繼)한다는 것이며 대승공(大丞公)은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승계(承繼)하라고 내린성명(姓名)이 차달(車達)이란 것을 확실(確實)하게 뒷받침 하고 있는 증거(證據)인데 대승공(大丞公)께서 남정(南征)할 때 향궤(餉饋)를 수레로 운반하여 영달(榮達)했다는 뜻으로 차달(車達)로 사호(賜號)했다고 주장(主張)을 하면서【유차달(柳車達)】라 기록(記錄)하고【류차달(柳車達)】이 류씨(柳氏)의 시조(始祖)라 하고 고려태조(高麗太祖)로부터 류씨(柳氏)로 사성(賜姓)을 받은 류효금(柳孝金)을 류씨이세(柳氏二世)라 하는 것은 류씨(柳氏)의 시조(始祖)인 류효금(柳孝金)을 모욕(侮辱)하고 역대조상(歷代祖上)과 가문(家門)을 능멸(凌蔑)하는 오류(誤謬)를 범(犯)하는 것이다.
여덟째 : 조선(朝鮮)에 단종(端宗)의 명(命)을 받아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인 취금헌(醉琴獻) 박팽년(朴彭年)이 기술(記述)한 기문(記文)과 유신(儒臣)들의 응제시(應製詩)를 모아서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께서 서문(序文)을 찬(撰)하여 편집(編輯)한【차운암설원록(車雲巖雪寃錄)】을 살펴보면【차달정려실수근지일효전당왕사미고지시여흥원진대지속수현릉정사지노국위이판출거승계량도운미정남특증기부이차위달세적지호(車達丁麗室輸勤之日孝全當王事靡盬之時輿興原賑貸之粟樹顯陵定社之勞國爲以辦出車乘繼良道運米征南特贈其父以車爲達世績之號)】란 구절(句節)의 번역은 “차달(車達)은 장정(壯丁)을 려실(麗室 : 고려 조정)에 나날이 운송(運送)하는데 도우고, 효전(孝全)은 왕사(王事)에 미고(靡盬를 당하였을 때 흥원(興原 : 구월산 주변)에 많은 속곡(粟穀)으로 진대(賑貸 : 구휼(救恤)를 배품)하였고, 현릉(顯陵 : 고려 시조 묘호(墓號))과 정사(定社 : 개국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정함의 공(功)임)의 공(功)을 세웠고, 타라를 위하여 수레를 판출(辦出 : 변통하여 갖추어 냄)하여 계량(繼粮 : 한 해에 농사지은 곡식으로 한 해 동안 양식을 이어 감)을 실어서 미곡(米穀)을 정남(征南 : 남쪽을 침)에 옮김을 실행하여서 특별히 그 아버지에게 차(車)와 달(達)로 한 것은 세적(世績 : 세계를 이어감)의 성명(姓名)으로 내린 것이다.” 라 하였는데 이 또한 차달(車達)은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이름은 달(達)로 내린 것이 확실(確實)한데 조상(祖上)과 가문(家門)을 상징(象徵)하는 성씨(姓氏)인 차자(車字) 위에 류자(柳字)를 올려놓고 류차달(柳車達)이라 하는 것은 조상(祖上)을 능멸(凌蔑)하는 불공(不恭)의 중죄(重罪)를 범(犯)하는 만고(萬古)에 불효(不孝)이다.
맺는 말
차문(車門)은 신라조(新羅朝)의 시조(始祖)인 박혁거세(朴赫居世)로부터 사성(賜姓)을 받으신 득성시조(得姓始祖)이신 차무일(車無一)로 시작하여 34세 휘(諱) 공숙(恭叔)이 이르러 애·헌(哀·憲)의 국난(國亂)을 만나 득성조(得姓祖)의 33세 휘(諱) 승색(承穡)·34세 휘(諱) 공숙(恭叔)등 부자(父子)는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밑에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으로 둔적(遁迹)하여 신라조(新羅朝)의 좌상공(左相公) 휘(諱) 승색(承穡)은 피신(避身)의 목적(目的)으로 본성명(本姓名)을 감추고 할머니 군부인(郡夫人) 양씨(楊氏)의 성(姓)을 따라 양씨(楊氏)로 모칭(冒稱)한 후 다시 양자(楊字)와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모성류씨(冒姓柳氏)로 좌상공(左相公)의 6세인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公臣)대승(大丞) 휘(諱) 해(海) 선조(先祖)까지 109년간을 모성류씨(冒姓柳氏)로 내려온 것을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로부터 모성명(冒姓名)인 류해(柳海)까지 6세를 본성(本姓)인 구성차씨(舊姓車氏)로 복성(復姓=還姓)하여 차달(車達)로 성명(姓名)을 내린 것이며,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의 사자(嗣子)인 차효전(車孝全)은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의 39세로 애·헌(哀·憲)의 국난(國亂)으로 물락(沒落)한 차문(車門)의 문벌(門閥)을 고려개국(高麗開國)의 수공자(首功者)로 벼슬 대광(大匡)에 귀족(貴族)의 칭호(稱號)인 백작(伯爵)의 작위(爵位)에 피봉(被封)되고 태조왕건(太祖王建)이 차씨(車氏)의 묘예(苗裔)인 연유(緣由)로 차효전(車孝全)은 왕실(王室)의 종적(宗籍)에 입적(入籍)한 후 식읍천호(食邑千戶)를 염주(塩州)로 하사(下賜)를 받아 문벌(門閥)을 다시 일으켜 세운 충시조(中始祖)로 그의 후손(後孫)들 식읍지(食邑地)를 관향지(貫鄕地)로 삼았는데 이곳 염주(塩州)가 연안(延安)으로 개칭(改稱)함에 따라 처음으로 연안차씨(延安車氏)로 호칭(呼稱)을 하면서 득관조일세(得貫祖一世)하여 연안군(延安君)으로 추촌(追尊)하고 있으며,【차운암설원기(車雲巖雪寃記)】를 살펴보면【차씨이기장이승습상조지홍열야(車氏以其長而承襲上祖之弘烈也)】라 한 구절(句節)의 번역은 차씨(車氏)의 맏이로서 조상(祖上)의 홍열(弘烈)을 승습(承襲)이라 한 것은 득관조(得貫祖)이신 차효전(車孝全)께서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로부터 한 세대(世代)도 끊지 말고 모성류씨(冒姓柳氏)의 6세를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득관조(得貫祖) 차효전(車孝全)까지 계승(繼承)하였다는 말인데 득성조(得姓祖)의 34세 차공숙(車恭叔)에 이르러 차문(車門)이 없어지고 대승공(大丞公)이 류씨(柳氏)를 창성(創姓)하여 장자(長子)인 효전(孝全)은 차씨(車氏)로 사성(賜姓)을 받아 분성분가(分姓分家)하고차자(次子)인 효금(孝金)이 류씨(柳氏)로 부계(父繼)한 것 같이 말하는 자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옛날부터 우리나라 관례(慣例)에 장자(長子)가 부계(父繼)하여 사자(嗣子)가 되고 차자(次子)는 분가(分家)하는 것이 상례(常例)인데 이는 역사(歷史)와 관례(慣例)의 상례(常禮)잘 모르고 하는 말이며 이는 선조(先祖)에 대한 불공(不恭)의 범죄행위(犯罪行爲)가 되는 것이다.
이상(以上)과 같은 연유(緣由)로 대승공(大丞公)은 복성차씨(復姓車氏)하여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차달(車達)로 성명(姓名)을 내린 것이며 득관조(得貫祖) 차효전(車孝全)은 차문(車門)의 문벌(門閥)을 다시 부흥(復興)시킨 중시조(中始祖)로 관향(貫鄕)을 연안(延安)으로 한 득관조(得貫祖)이며 사성(賜姓)을 받은 시조(始祖)가 안이다. 우리 차문(車門)의 사성(賜姓)을 받은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께서 차씨시조(車氏始祖)임을 다시 밝혀 두는 바이다.
【차운암설원기(록)(車雲巖雪寃記(錄)】와 차문(車門)의 보첩(譜牒) 및 문헌(文獻)들은 차문(車門)이 신라조(新羅朝) 및 고려조(高麗朝)에 잠영문벌(簪纓門閥)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기술(記述)한 서적(書籍)이며 타문(他門)을 위해서 만들어진 서책(書冊)이 아닌 만큼 선대(先代)들이 기록한 사적(史籍)의 내용(內容)에 대하여 보는 시각(視覺)에 따라 번역(飜譯)을 달리 할 수도 있으나 문중(門中)에 위상(位相)의 제고(提高)를 위하여 그에 합당한 번역(飜譯)이 타당(妥當)한 것이라 생각하며 특히 지난날의 역사에 오기(誤記)와 오역(誤譯)이 있다면 반드시 고쳐 정리(整理)하는 것이 발전(發展)된 내일의 역사(歷史)를 위해 필요한 작업(作業)이요 과제(果題)라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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