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조(世宗朝)의 상신
이원(李原) 무신생이며, 15세에 진사가 되었다.
이원은 자는 차산(次山)이며, 호는 용헌(容軒)이고,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고려 말 을축년에 급제하였으니, 나이가 18세였다.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이 되었다. 무술년에 정승이 되어 벼슬이 좌의정 겸 수문전 대제학(修文殿大提學) 판이병조사(判吏兵曹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헌공(襄憲公)이고, 62세에 죽었다.
○ 공은 난 지 넉 달 만에 아버지 이강(李岡) 호는 평재(平齋)니 행촌(杏村) 이암(李嵒)의 아들이다.
자부(姊夫) 권근(權近)이 가르치기를 아들과 같이 하여 학문이 날마다 진보되었다. 권근이 매양 그와 의논하였는데, 뛰어남이 짝이 없었으므로 권근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우리 장인은 영원히 돌아가신 것이 아니다.” 하였다.
○ 기해년(1419)에 사은사(謝恩使)로 명 나라에 갔을 때, 그의 풍채가 좋고 의젓하여 만인 중에서 우뚝하니, 문황제(文皇帝)가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이르기를 “누런 수염 재상은 후에도 다시 오라.” 하였다.
《사가집(四佳集)》에 있는 공의 비문
○ 을사년(1425)에 명 나라 선종(宣宗)이 등극하니, 명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축하하였다.
○ 공을 미워하는 자가 애매한 일로 모함하였을 때에, 태종이 친히 변명하여 주었다. 태종이 돌아가신 뒤에 공을 미워하는 자가 전날의 사감을 가지고 사헌부에 사주하여 공을 죽이려 하였다. 세종은 그가 죄가 없는 줄을 아나, 사헌부의 청을 어기기가 어려워 여산(礪山)으로 귀양보냈으니, 곧 병오년(1426) 봄이었다.세종은 그의 옛 공훈을 생각하여 전과 다름없이 돌보아 주었으며, 매양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반드시 이르기를, “철성(鐵城)이 있었더라면 반드시 처리했을 것이다.” 하였다. 얼마 안되어 불러서 다시 정승을 삼으려 하였으나 그를 질투하는 자의 저해를 입었으며, 기유년(1429) 여름에 병으로 죽었다. 《사가집(四佳集)》
정탁(鄭擢)
정탁은 자는 여괴(汝魁)이며, 호는 춘곡(春谷)이고,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고려 말에 급제하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개국 정사 공신(開國定社功臣)으로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이 되었고, 임인년(1422)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치사하였으며, 시호는 익경공(翼景公)이다.
○ 공양왕 때 병조 좌랑으로 있을 때에 김초(金貂)가 불교를 배척하다가 죄를 얻어서 장차 극형에 처하게 된 것을 정탁이 글을 올려서 변론하였다. 그 글에 이르기를, “《서경》에 이르기를, ‘선왕(先王)이 이루어 놓은 법을 보면 길이 허물이 없으리라.’ 하였습니다.이른바 이루어 놓은 법이라는 것은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에 지나지 않는데 불씨(佛氏)가 이에 모두 배치되니, 이것은 김초가 선왕이 세운 법을 허문 것이 아니라 곧 전하께서 스스로 허무는 것입니다.” 하였다.
대언 등이 왕의 노여움을 두려워하여 감히 아뢰지 못하였는데, 정몽주(鄭夢周)가 글을 올려 아뢰어서 마침내 김초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동국통감(東國通鑑)》
유관(柳寬)
유관은 자는 경부(敬夫)이며, 처음 이름은 관(觀)이고, 자는 몽사(夢思)이며, 호는 하정(夏亭)이고,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고려 말에 급제하여 벼슬이 판비서(判秘書)에 이르렀으며, 조선에 들어와서 형조 판서를 거쳐 갑진년(1424)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치사하였고,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공이 죽자, 세종이 흰옷을 입고 백관을 거느리고 울었다.
○ 공의 온량(溫良)하고 돈후(敦厚)한 성품은 태어날 때에 얻은 천성이었다. 공조 총랑(工曹摠郞)이 되었을 때에 나이가 열아홉 살이었는데, 이해에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운검(雲劍)의 책임을 맡아서 좌우에서 떠나지 않았다. 공은 자질이 밝고 민첩하였으며, 풍채가 빛나 네 임금을 연달아 섬겼으되 모두 사랑을 받아서 그보다 더 사랑받은 자가 없었다.
태조가 돌아가신 뒤에는 특별히 공에게 명하여 능을 지키게 하였다.
○ 기축년(1409)에 길주도 안무 절제사(吉州道安撫節制使) 영길주목(領吉州牧)이 되어서 북방을 지킬 때, 야인이 침입하자 그 괴수를 죽이고 격퇴시켰으므로 그 위세가 북방에 진동하였다. 태종이 사신을 보내어 술을 내리고, 이어 그곳에 머물러 두어 교화를 펴게 하였다.
○ 공이 우의정이 되었을 때에 글을 올려서 당 나라 한유(韓愈)가 지은 <태학생탄금시서(太學生彈琴詩序)>를 인용하고, 또 송 태종(宋太宗)이 대포(大酺)를 하사하던 옛일을 인용하여 3월 3일과 9월 9일을 명절로 삼아 대소 관료들로 하여금 경치좋은 곳을 골라서 놀며 즐겨, 태평의 기상을 표현하도록 할 것을 청했는데, 세종이 옳게 여겼다.
공이 나이 많아서 치사하니, 명하여 제사과(第四科)의 녹을 주어 일생을 마치도록 하였다. 《동각잡기》
○ 공은 청렴하고 방정하여 비록 가장 높은 벼슬에 올랐으나 초가집 한 간에 베옷과 짚신으로 담박하게 살았다. 공무에서 물러나온 뒤에는 후생을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아 제자들이 모여들었는데, 누구라도 와서 뵈면 고개를 끄덕일 뿐, 그들의 성명도 묻지 않았다. 집이 흥인문(興仁門) 밖에 있었는데,때마침 사국(史局)을 금륜사(金輪寺)에 설치하였으니 그 절은 성안에 있었다. 공이 수사(修史)의 책임을 맡았는데 간편한 사모에 지팡이를 짚고 걸어다니며 수레나 말을 쓰지 않았다. 어떤 때는 어린 아이와 관자(冠者) 몇 사람을 이끌고 시를 읊으며 오고가니 사람들이 모두 그의 아량에 탄복하였다.
○ 초가집 두어 간에 밖에는 난간도 담장도 없어, 태종이 선공감(繕工監)에 명하여 밤중에 울타리를 그의 집에 설치하여 주되 공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했고, 또 어찬(御饌)을 끊이지 않게 내렸다.
○ 어느 때 장마비가 한 달 넘게 내려서 집에 새는 빗발이 삼줄기처럼 내릴 때, 공이 손에 우산을 들고 비를 피하면서 그 부인을 돌아고 말하기를, “이 우산도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견디겠소.” 하니, 그 부인이 말하기를, “우산 없는 집엔 다른 준비가 있답니다.” 하자, 공이 웃었다. 《필원잡기》
○ 손님을 위해서 술을 접대할 때는 반드시 탁주 한 항아리를 뜰 위에다 두고 한 늙은 여종으로 하여금 사발 하나로 술을 바치게 하여 각기 몇 사발을 마시고는 끝내 버렸다. 공이 비록 벼슬이 정승에 이르렀으나, 제자들을 가르침에 게을리하지 않았으므로 학도가 매우 많았다.매양 시향(時享)에는 하루 앞서 제생(諸生)을 예의를 갖추어 돌려보내고, 제삿날에는 제생을 불러 음복(飮福)을 시켰는데 소금에 저린 콩 한 소반을 서로 돌려 안주를 하고, 이어 질항아리에 담은 주를 그가 먼저 한 사발 마시고는 차례로 좌상에 한두 순배를 돌렸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공의 벼슬이 정승이 되었으나, 그의 행동은 일반 사람과 다름없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찾아오면 겨울에도 맨발에 짚신을 끌고 나와서 맞이하였고, 때로는 호미를 가지고 채소밭을 돌아다녔으나 괴롭게 여기지를 않았다. 《용재총화》
○ 공은 총명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평소에 한번 배운 글을 종신토록 잊어버리지 않았고, 매양 밤중에 그 글을 외우며 뜻을 생각하고 항상 민생을 건질 것을 마음 먹었다.그리하여 교량(橋梁)이나 원우(院宇)를 지으려 하는 자 있으면 비록 중들에게라도 곧 돈과 베를 시주하였고, 또 남에게 주기를 좋아하였으나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남에게서 취하지는 않았다. 항상 말하기를, “친구 사이에는 으레 재물을 서로 나누어 쓰는 의리가 있다 하나, 아예 요구하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조연(趙涓)
갑인생조연은 자는 여정(汝靜)이며, 처음 이름은 경(卿)이고,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한산백(漢山伯) 조인벽(趙仁璧)의 아들이고, 환조(桓祖)의 외손이다. 그는 무인이었으므로 과거에 응하지 않았는데, 13세에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좌명 공신(佐命功臣)으로 한평부원군(漢平府院君)에 봉해졌고 병오년(1426)에 우의정이 되었으며, 시호는 양경공(良敬公)이다.
○ 공이 우상으로 있을 때에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 연사종(延嗣宗)ㆍ병조 판서 조말생(趙末生) 등과 더불어 송사 중에 있는 노비를 받고 힘을 써서 이기게 하였더니, 사헌부에서 이를 적발하여 공 등을 모두 중도 부처(中道付處)하였다. 《조야첨재(朝野僉載)》
황희(黃喜)
황희는 자는 구부(懼夫)이고, 처음 이름은 수로(壽老)였으며, 본관은 장수(長水)이고, 호는 방촌(厖村)이다.
고려말 기사년(1389)에 급제하여 조선에 들어와 병오년(1426)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고, 나이 여든에 치사하여 임신년(1452)에 죽으니 나이가 아흔이었다. 제사(諸司)의 이서(吏胥)와 노예들이 모두 치제하였으며 시호는 익성공(翼成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은 14세에 음관(蔭官)출신으로 복안궁 녹사(福安宮錄事)가 되고, 소년에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였으며,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습유 우보궐(拾遺右補闕)이 되었는데, 성격이 곧아서 바른 말을 과감히 하였다. 《조야첨재》
○ 고려 말에 적성훈도(積城訓導)가 되었다. 《경훈전고(警訓典故)》에 상세하다.
○ 태종조(太宗朝)에 이조 판서로서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위하는 것을 간하였더니, 태종이 크게 노하여 공조 판서로 좌천시키고, 또 평안도 도순무사(平安道都巡撫使)로 내보냈다가 무술년에 양녕이 폐위되어 서인이 되자 그를 교하(交河)에 좌천시켰다. 대신과 대간들이 모두 그에게 죄를 주기를 청해 마지 않았으나,태종은 공의 생질 오선(吳致善)을 공이 있는 교하로 보내어 이르기를, “경이 비록 공신은 아니지만 나는 경을 공신으로 대우하여 하루라도 좌우를 떠나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대신과 대간들이 경에게 죄 주기를 청해 마지 않으니, 양경(兩京 개성 서울) 사이에는 둘 수 없다.
경의 본관(장수(長水))에 가까운 남원(南原)으로 옮기게 할 것이니 경은 어머니를 모시고 편하게 같이 가라.” 하였고,또 사헌부에 명하여, “그가 갈 때에 관리가 압송하지 말라.” 하였다. 오치선이 복명(復命)하자, 태종이 묻기를, “황희가 무어라 하던고.” 하니, 치선이 아뢰기를, “‘살과 뼈는 부모께서 주신 것이지만, 의식이나 쓰는 것은 모두 임금의 은혜였으니, 신이 어찌 은덕을 배반하겠습니까. 실로 다른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고는 울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습니다.” 하였다.
○ 4년 임인에 태상왕이 명하여 공을 불렀다. 공이 이르러 통이 높은 갓을 쓰고 푸른 색 거친 베로 만든 단령(團領)을 입고 남색 조알[條兒]을 띠고 승정원에 들어왔는데, 막 시골에서 왔으므로 몸체만 큼직할 따름이어서 사람들이 특이하게 여기지 않았다.태상왕이 세종에게 이르기를, “황희의 전날 일은 어쩌다가 그릇된 것이니, 이 사람을 끝내 버릴 수 없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이 사람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고는 곧 예조 판서로 제수하였다. 때마침 흉년이 들어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 그는 마음이 넓고 모가 나지 않았으며,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에게 한결같이 예의로써 대하고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전례를 잘 지켜 고치고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소문쇄록(謏聞瑣錄)》
○ 계묘년(1423)에 강원도에 크게 흉년이 들었다. 세종이 걱정하여 특별히 공을 관찰사로 삼았는데, 정성을 다하여 제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크게 괴로워하지 않았다. 세종이 크게 가상이 여겨서 숭정대부(崇政大夫) 판우군부사(判右軍府事)에 제수하고, 을사년(1425)에는 찬성사로서 대사헌을 겸직시켜 소환하였다. 《조야첨재》에는 이르기를, “공이 돌아온 뒤에 관동 백성들이 그의 은덕을 사모하여 울진(蔚珍)에서 그가 행차를 멈추었던 곳에다 대를 쌓고 소공대(召公臺)라 이름하였으며, 남곤(南袞)이 글을 짓고 송인(宋寅)이 글씨를 써서 비를 세웠다.” 하였다.
○ 공이 아버지의 상사를 당했는데, 판강릉부사(判江陵府事) 군서(君瑞)이다. 때마침 나라에 일이 있어 공을 기복(起復)시키니, 굳이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좌상이 되었을 때에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또 기복시키니,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곧 나와 일을 보았다. 《조야첨재》 《동각잡기》에 이르기를 “어머니 상사를 당하여 몇 개월이 지난 뒤에 기복되었다.” 하였다.
○ 그때에 세자가 장차 명 나라로 떠날때 공으로 수행하게 하니, 공은 간곡히 사양하였으나 허락을 얻지 못하였다.
명 나라에서 칙서(勅書)를 보내어 세자는 반드시 들어올 것이 없다 하니, 그는 또 글을 올리기를, “세자께서 이미 명 나라에 조회하지 않기로 되었고, 또 국가에 일이 없으니 삼년상을 마치게 해 주소서.” 하였다.세종은, “대신을 기복하는 것은 선왕 때에 이미 이룩된 법이다.” 하여 윤허하지 않고, 이어 글을 내리기를, “옛날에는 나이가 60이 되면 비록 상복을 입었어도 고기를 먹는 법인데, 이제 황희는 이미 기복도 하였으려니와 나이가 60이 넘었으니 어찌 소찬을 하면서 일을 보리요. 정원에서 그를 불러 고기 먹기를 권고하라.” 하였다.그가 빈청(賓廳)에 나아갔더니 지신사 정흠지(鄭欽之)가 임금의 명령을 전달하고 고기 먹기를 권하였다. 공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말하기를, “신이 마침 병이 없으니 어찌 감히 고기를 먹겠습니까. 청컨대, 이 뜻을 잘 아뢰어 주시오.” 하였다. 흠지가 감히 그렇게 아뢸 수 없다 하니, 공이 그제서야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고기를 먹었다. 《동각잡기》
○ 공이 정승이 되었을 때 김종서가 공조 판서가 되었다. 일찍이 공처(公處)에 모였을 때에 종서가 공조로 하여금 약간의 주과(酒果)를 갖추어 드렸더니, 공이 노하여 이르기를, “국가에서 예빈시(禮賓寺)를 정부의 곁에 설치한 것은 삼공(三公)을 접대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시장하다면 의당 예빈시로 하여금 장만해 오게 할 것이지 어찌 사사로이 제공한단 말인가.” 하고는, 종서를 앞에 불러 놓고 준절히 꾸짖었다.정승 김극성(金克成)이 일찍이 이 일을 경연에서 아뢰고, “대신이란
마땅히 이러해야 조정을 진정시킬 수 있습니다.” 하였다. 《동각잡기》
○ 그때에 김종서가 여러 차례 병조ㆍ호조의 판서가 되었는데 한 가지 일이라도 실수한 것이 있을 때마다 공이 박절할 정도로 꾸지람을 하되 혹은 본인 대신 종을 매질하기도 하고 때로는 구사(丘史)를 가두기도 하였다. 동렬(同列)들이 모두 지나친 일이라 하고 종서 역시 매우 고달펐다. 어느날 맹사성(孟思誠)이 묻기를, “김종서는 당대의 명경(名卿)인데 대감은 어찌 그렇게도 허물을 잡으시오.” 하였더니, 공은 말하기를, “이것은 곧 내가 종서를 아껴서 인물을 만들려는 거요.종서의 성격이 고항(高亢)하고 기운이 날래어 일을 과감하게 하니 뒷날 우리의 자리에 있게 되어 모든 일을 신중히 하지 않는다면 일을 허물어뜨릴 염려가 있으니,미리 그의 기운을 꺾고 경계하여 그로 하여금 뜻을 가다듬고 무게있게 하여 혹시 일을 당해서 가벼이 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지, 결코 그에게 곤란을 주려 함이 아니오.” 하니, 사성이 그제야 심복하였다.
그뒤에 공이 물러가기를 청할 때 종서를 추천하여 자기의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식소록(識少錄)》
○ 형조 판서 서선(徐選)의 아우 서달(徐達)은 공의 사위이다. 서달이 일찍이 사람을 죽였는데, 공과 우상 맹사성 역시 이 일에 관련되어 의금부에 갇히게 되었다. 이튿날 보석되어 다만 파직되었으나 후임을 내지 않았다가 열흘이 지나자 복직을 시켰다.
○ 공이 좌상이 되었을 때에 사헌부에서 공이 감목(監牧) 태석구(太石鉤)의 죄를 완화시키려고 대관(臺官) 이심(李審)의 아들 백견(伯堅)에게 청탁하였다 하여, 파면시켜서 앞으로 청탁을 받고 법을 굽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답하기를, “대신이란 가벼이 죄를 줄 수 없다.” 하다가, 뒤에는 사헌부의 청을 윤허하여 그를 파면시켰다.
그러나 후임을 내지 않고 있다가 이튿날 다시 복직시켰다. 사간원에서 소를 올리기를, “황희는 일찍이 의정(議政)이 되어 대체를 돌보지 않고 친한 자를 사사로이 돌봐주기 위하여 사헌부에 청탁하였으니, 다만 그 직만 파면하였음은 황희로 보아서는 큰 다행입니다. 또 교하(交河)의 둔전을 이양받으려고 청하였으니, 이것은 옛날 직부(織婦)를 내쫓고 집안에 심은 채소를 뽑아버렸던 일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그런 지 한 해가 채 못되어 갑자기 백관의 수반(首班)에 제수하자, 임명을 받아 엄연히 부끄러운 줄을 알지 못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여 이르기를,
“모든 일에 대하여 시비를 숨김없이 모두 진술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러나 국정을 맡은 대신을 너희들의 말을 듣고서 가벼이 거절할 수 없다.” 하였다.
○ 그때에 사간원에서 논박하기를, “영의정 황희가 교하수(交河守)에게 둔전을 청하여 사사로이 농장을 삼으려 하였으니, 백관의 수반인 정승의 자리에 둘 수 없습니다.”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안숭선(安崇善)에게 이르기를, “황희는 국정을 맡은 대신이고,또 태종께서 신임하시던 사람이니, 내 어찌 경솔히 끊어 버리겠는가. 태종께서 일찍이 나에게 이르기를, ‘양녕(讓寧)이 세자가 되었을 때에 종수(宗秀)의 무리가 그에게 아부하여 많이들 불의를 행해서 양녕으로 하여금 도리어 어긋나게 하였을 때에,황희에게 묻기를 어떻게 처리하였으면 좋을까 하였더니, 황희가 대답하기를, 세자는 나이가 어리고 또 그의 과실이란 사냥을 좋아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당시에는 황희가 중립하여 사태를 관망한다고 생각하였으나, 이제 생각하니, 황희는 실로 죄가 없다.’ 하시고, 또 사단(史丹)의 일을 인용하여 해명해 주시면서, 이내 눈물지으며 말씀하던 것이 아직도 내 귀에 남아 있으니, 내 이제 어찌 함부로 신진 간신(新進諫臣)의 말을 들어서 그를 끊어 버리겠는가.” 하였다. 《국조보감》
○ 태학(太學) 유생이 길에서 그를 만나자 면박하기를, “네가 정승이 되어 일찍이 임금의 그릇됨을 바로잡지 못한단 말이냐.” 하였으나, 공은 노여워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였다. 정암(靜菴)의 <연주(筵奏)>
○ 공이 상부(相府)에 있은 지 27년이나 되어, 조종(祖宗)때에 이미 이룩된 법을 힘써 따르고, 변경하기를 기뻐하지 않았으며, 일을 처리함에는 이치에 따라서 하고 규모는 원대하였으며, 인심을 진정시키는 도량이 있어서 대신의 체모를 얻었다. 태종으로부터 세종에 이르기까지 신임이 매우 두터워,세종이 매양 황희의 견식과 도량이 크고 깊어서 큰 일을 잘 판단한다고 칭찬하면서 그를 점치는 시구(蓍龜)와 물건의 중량을 다는 권형(權衡)에 견주었다. 더러 옛 제도를 변경하려고 의논하는 자가 있으면, 그는 반드시, “신이 변통하는 재능이 부족하니, 무릇 제도의 변경에 있어서는 감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평시에는 의논을 너그럽게 하였으나, 큰 일을 당해서는 맞대고 그 자리에서 시비를 가려 의연(毅然)히 굽히지 않았다.
나이 팔십에 비로소 치사를 허락하였고,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에는 임금이 반드시 근시(近侍)로 하여금 공에게 나아가 자문한 뒤에 결정하였다. 나이가 구십이 되어서도 총명이 조금도 쇠퇴하지 않아서, 조정의 전장(典章)이나 경사자집(經史子集)에 대해 마치 촛불로 비추는 듯이 산 가지로 세는 듯이 하여, 비록 기억 잘하는 장년도 감히 따르지 못하였다.
우리 조선의 어진 정승을 논할 때는 반드시 공을 제일로 삼았으며, 공의 훈업(勳業)이나 덕량을 송 나라의 왕문정(王文正)과 한충헌(韓忠獻)에 견주었었다. <묘비(墓碑)>○ 공은 평시에 거처가 담박하였고, 비록 아손(兒孫)과 동복들이 앞에서 울부짖고 희롱하여도 조금도 꾸지람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수염을 뽑는가 하면 뺨을 치는 놈까지 있어도 역시 제멋대로 하게 두었다. 일찍이 아래에 있는 신료들과 함께 일을 의논할 때, 바야흐로 붓을 풀어 글을 쓰려 하는데 종의 아이가 종이 위에 오줌을 싸도 그는 아무런 노여워하는 빛이 없이 다만 손으로 훔쳤을 뿐이었다.공이 일찍이 남원(南原)에서 귀양살이할 때에 7년 동안을 문을 닫고 단정히 앉아서 찾아오는 손님도 맞이하지 않고 다만 운서(韻書) 한 질을 갖고 거기에만 눈을 대고 있었을 따름이더니, 그뒤 비록 나이가 많아서도 글자의 획이나 음이나 뜻에 대해서는 백에 하나도 틀리지 않았었다. 《필원잡기》
○ 공은 나이가 많고 벼슬이 무거워질수록 더욱 스스로 겸손하여, 나이가 구십여 세나 되었는데도, 늘 고요한 방에 앉아서 종일토록 말없이 두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며 글을 읽을 따름이었다. 창 밖에 늦복숭아가 무르익어서 이웃 아이들이 다 따는데, 공은 나직한 소리로,“다 따먹지 말아라. 나도 좀 맛보자.” 하고 조금 있다가 나가서 보니, 나무에 가득하던 열매가 다 없어졌다. 매양 아침 저녁으로 밥먹을 때에 아이들이 모두 모여들어 그가 밥을 덜어서 주면 지껄이며 먹기를 다투곤 하였는데 공은 다만 웃을 뿐이었다. 《용재총화》
○ 공은 기쁨이나 노여움을 일찍이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고, 종들을 은혜로 대우하여 일찍이 매를 대지 않았으며, 그가 사랑하는 여종이 작은 종과 희롱하기를 지나치게 하였으나 공은 볼 때마다 웃었다.
일찍이 이르기를, “노예도 역시 하늘 백성이니 어찌 함부로 부리리오.” 하고는,그 뜻으로 훈계하는 글을 써서, 자손들에게 전하여 주기까지 하였다. 어느날 홀로 동산을 거닐 때, 이웃에 살고 있는 버릇없는 젊은이가 돌을 던지니, 무르익은 배가 돌에 맞아 땅에 가득 떨어졌다. 그가 큰 소리로 시동(侍童)을 부르자, 그 젊은이가 놀라 달아나 숨어서 가만히 들어본 즉, 시동을 시켜 그릇을 갖고 오게 하여 배를 담아서 그 젊은이에게 주되, 끝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정언 이석형(李石亨)이 뵈러 갔더니, 그가 《강목(綱目)》과 《통감(通鑑)》을 내어서 책 표지에 제목을 쓰게 하였다.
얼마 안되어 추하게 생긴 여종 한 사람이 약간의 안주를 갖고 공의 의자에 기대고 서서 이석형을 내려다 보며 공에게 묻기를, “곧 술을 올릴까요.” 하니, 공은 조용히 “조금 있다가.” 하였다.여종이 한참 기다리다가 고함을 치면서,
“어쩌면 그리도 꾸물거리누.” 하니, 공은 웃으면서, “그럼 드려오렴.” 하였다. 술상을 들에오니, 아이들이 모두 남루한 차림에다 맨발로 들어와서 혹은 공의 수염을 잡아당기기도 하고, 더러는 공의 옷을 밟고 안주를 다 집어 먹고 공을 두들기곤 하였는데 공은 “아야 아야” 하였다. 그 아이들은 모두 노비의 자식들이었다. 《청파극담(靑坡劇談)》
○ 그의 정자인 반구정(伴鷗亭)이 임진강 하류에 있었다. 파주읍(坡州邑) 서편 15리에 있다. 자손이 그곳에 집을 짓고 이내 반구라 이름하였다. 《미수기언(眉叟記言)》
맹사성(孟思誠)
맹사성은 자는 성지(誠之)이며, 본관은 신창(新昌)이다. 한성윤(漢城尹) 맹희도(孟希道)의 아들이고,
최영(崔瑩)의 손자 사위이다. 고려 병인년(1386) 문과에서 장원하였고, 정미년(1427)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다. 치사하여 신해년(1431)에 죽으니, 나이가 72세였다. 세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곡하였다.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다.
○ 공의 아버지 희도는 전교부령(典校副令)인데 공양왕 때에 효행으로 정려(旌閭)하였다. 정계가 어지러움을 보고는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온양 오봉산(五峯山) 밑에 살면서 호를 동포(東浦)라 하였다. 태 때에도 역시 정려하였다.
○ 공의 천성이 지극히 효도하고 청백하였다. 그가 살고 거처하는 집은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였으며 매양 출입할 때에 소타기를 좋아했으므로, 보는 이들이 그가 재상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 공은 청결하고 검소하며 고아하여 살림살이를 일삼지 않고, 식량은 늘 녹미(祿米)로 하였다. 어느날 햅쌀로 밥을 지어 드렸더니, 공이 “어디에서 쌀을 얻어왔소.” 하고 물었다. 그 부인이 답하기를, “녹미가 오래 묵어서 먹을 수 없기에 이웃 집에서 빌렸습니다.” 하니, 공은 싫어하며 말하기를, “이미 녹을 받았으니, 그 녹미를 먹는 것이 당연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빌렸소.” 하였다. 《무인기문(戊寅記聞)》
○ 공은 청결하고 검소하며 단정하고 후중해서 상부(相府)에 있을 때에 대체를 지녔었다. 공은 경자생이면서 장난삼아 계묘계에 들었다. 어느날 세종을 모시고 있었는데 세종이, “공은 나이가 몇이요.” 하여, 공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물러나온 뒤 계묘계 중에서 동갑이 아니라 하여 제명되어 한때에 웃음거리가 되었었다.공은 음률을 잘 알아서 항상 피리를 갖고 다니며 날마다 서너 곡조를 불었다. 문을 닫은 채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하지 않다가 공무에 관한 일을 여쭈러 오는 자가 있으면 문을 열고 맞이하였는데, 여름이면 소나무 그늘에 앉고 겨울이면 방 안 포단(蒲團)에 앉되,좌우에는 다른 물건이 없었으며 일을 여쭌 자가 가고 나면 곧 문을 닫았다. 일을 여쭈러 오는 자는 동구에 이르러서 피리 소리가 들리면 공이 반드시 있음을 알았다. 《필원잡기》
○ 공은 온양에 근친(覲親)하러 오갈 때에 각 고을의 관가에 들리지 않고 늘 간소하게 행차를 차렸으며, 더러는 소를 타기도 하였다. 양성(陽城)과 진위(振威) 두 고을 원이 그가 내려온다는 말을 듣고 장호원(長好院)에서 기다렸는데, 수령들이 있는 앞으로 소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므로 하인으로 하여금 불러 꾸짖게 하니,공이 하인더러 이르기를 “너는 가서 온양에 사는 맹고불(孟古佛)이라 일러라.” 하였다. 그 사람이 돌아와 고했더니, 두 고을 원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언덕 밑 깊은 못에 인(印)을 떨어뜨렸다. 후대의 사람들이 그곳을 인침연(印沈淵)이라 이름하였다.
○ 공의 집이 매우 협착하였기 때문에, 병조 판서가 일을 여쭈러 찾아 갔다가 마침 소낙비가 내리는 바람에 곳곳에서 비가 새어 의관이 모두 젖었다. 병조 판서가 집에 돌아와 탄식하기를, “정승의 집이 그러한데, 내 어찌 바깥 행랑채가 필요하리요.” 하고는, 마침내 짓던 바깥 행랑채를 철거하였다.
○ 공이 온양으로부터 조정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비를 만나서 용인(龍仁) 여원(旅院)에 들렀는데, 행차를 성대하게 꾸민 어떤 이가 먼저 누상에 앉았으므로 공은 한쪽 모퉁이에 앉았었다. 누상에 오른 자는 영남에 사는 사람으로 의정부 녹사(錄事) 취재(取才)에 응하러 상경하는 자였다.
을 보고 불러서 위층에 올라오게 하여 함께 이야기하며 장기도 두었다. 또 농으로 문답하는 말 끝에 반드시 ‘공’ ‘당’하는 토를 넣기로 하였다. 공이 먼저 묻기를, “무엇하러 서울로 올라는공.” 하였더니, 그가 “벼슬을 구하러 올라간당.” 하였다. 공이 묻기를 “무슨 벼슬인공.” 하니, 그가 “녹사 취재란당.” 하였다. 공이 또, “내가 마땅히 시켜주겠공.” 하니,
그 사람은 또, “에이, 그러지 못할 거당.” 하였다.뒷날 공이 정부에 앉았는데, 그 사람이 취재차 들어와 뵈었다.
공이 이르기를, “어떠한공.” 하니, 그 사람이 비로소 깨닫고는 갑자기 말하기를, “죽었지당” 하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그 까닭을 얘기하니, 모든 재상이 크게 웃었다. 드디어 그 사람을 녹사로 삼았는데, 그는 공의 추천을 입어서 여러 차례 고을 원을 지내게 되었다. 후인들이 이를 일러, ‘공당 문답’ 이라 하였다.
권진(權軫)
권진은 자는 희정(希正)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고려 조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신해년(1431)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을묘년(1435)에 죽었는데, 나이가 일흔 아홉이었다.
세종이 백관을 거느리고 곡하였다.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 공이 다스린 고을마다 좋은 성적을 내었다. 조선에 들어와서 합주(陜州) 원으로 나갔다가, 정종(定宗) 경진년(1400)에 조박(趙璞)의 옥사에 연루되어 영해(寧海) 축산도(丑山島)에 귀양살이 갔는데 얼마 안되어 사면되어 돌아왔다.
최윤덕(崔潤德)
《해동잡록(海東雜錄)》에, ‘공의 자는 백수(伯修)요, 본관은 통천(通川)이며 양장공(襄莊公) 운해(雲海)의 아들이다.’ 하였다.
최윤덕은, 자는 여화(汝和)이며, 본관은 흡곡(歙谷)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갑인년(1434)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정렬공(貞烈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의 아버지 최운해(崔雲海)는 국초의 명장이었다. 그가 태어난 뒤에 어머니가 죽었는데, 운해는 변방을 지키느라고 《명신록(名臣錄)》에 이르기를, “공의 아버지가 합포(合浦)를 지켰다.” 하였다.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같은 이웃에 살고 있는 양수척(楊水尺)의 집에 맡겨져서 자라났다. 점차 자라서는 힘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센 활을 잘 쏘았는데, 때로는 수척을 따라 사냥하러 나가서 많이 잡기도 하였다.
어느날 산중에서 마소[馬牛]를 먹이다가,범이 별안간 숲 속에서 뛰어나오자 마소들이 흩어졌다. 공이 말을 타고 화살 하나로 을 쏘아 죽이고는 돌아와 수척에게 이르기를, “아롱진 무늬를 가진 큼직한 것이 무슨 짐승인지 나오기에 내가 쏘아 죽였다.” 하여 수척이 가서 보니, 큰 호랑이었다. 수척이 윤덕을 기이하게 여겼다.서미성(徐彌性) 거정(居正)의 아버지이다. 이 나가서 합포(合浦)를 지킬 적에 수척이 공을 데리고 가서 뵙고 공을 기려 마지 않았더니, 미성이 이르기를,
“한번 시험해 보겠다.” 하였다. 함께 사냥을 할 때 공이 좌우로 달리며 쏘아 맞히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구경하는 사람이 모두 칭찬하였다.미성이 웃으면서 이르기를, “이 애가 비록 손이 빠르긴 하나 아직 법을 모르니, 이 애의 기술은 사냥꾼의 기술에 불과하여 옳은 기술이라고 볼 수 없다.” 하고는 이내 활쏘기와 말달리는 방법을 가르쳐서 마침내 명장이 되었다. 《필원잡기》
○ 운해(雲海)는 벼슬이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 승추부사(承樞府事)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양장공(襄莊公)이다.
○ 태조가 해주(海州)에 거둥하여 강무(講武)할 때, 가까운 길을 취해 큰 냇물을 건너고자 하였더니, 공이 아뢰기를,
“신이 먼저 물의 깊이를 알아가지고 오게 해주소서.” 하고는, 말을 타고 곧 물 속에 들어가 고삐를 잡고 목을 움추리고 거짓으로 그 몸을 기울이니 물이 안장에 미쳤다.곧 돌아와서 아뢰기를, “물이 깊어서 건너지 못하겠으니 전하께서 이 내를 건너시려는 것은, ‘큰길로 가고 지름길로 가지 말며, 배를 타고 가고 헤엄치지 말라.’는 옛말의 뜻과 어긋납니다.
” 하니, 태조가 그 말을 옳게 여겨 건너는 것을 중지하였다. <행장(行狀)>
○ 과거에 태안군(泰安郡)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 그가 찼던 화살통에 쇠로 장식했던 것이 헐어 떨어지자, 공인(工人)이 관가의 쇠로 기워 고쳤는데, 곧 명하여 기웠던 쇠장식을 도로 떼어 내었으니, 그 청렴함이 이러하였다. <행장>
○ 공이 이상(貳相 의정부의 좌우찬성을 달리 이르는 말)으로 평안도 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 판 안주 목사(判安州牧使)를 겸임하였는데, 공무가 끝나면 공청 뒤 빈 땅을 경작하여 오이를 심고 손수 매어 가꿨다. 소송하러온 자가 누구인지 모르고 묻기를, “대감께서 지금 어디에 계신지요.” 하자, 그가 속여 말하기를, “아무 곳에 있다.” 하고는,
들어가서 옷을 바꿔 입고 판결에 임하였다. 시골에 사는 한 지어미가 울면서 이르기를, “호랑이가 제 남편을 죽였습니다.” 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 너를 위해서 원수를 갚아 주겠다.” 하고는 범의 자취를 밟아 손수 쏘아 죽인 후 그 배를 쪼개고 뼈와 고기와 사지를 꺼내어 의복으로 싸서 관을 맞추어 매장하여 주었더니, 그 지어미가 슬피 울었다. 그 고을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사모하기를 부모와 같이 한다. 《청파극담》
○ 안주(安州)를 다스릴 때에 버드나무 수만 그루를 고을 남쪽에다 심어서 고을의 터를 보호하고 수해를 막으니, 사람들이 감당(甘棠)에 비하여 감히 베지를 못하였다.
○ 살고 있는 집 남쪽에 못 두 곳을 만들어 연꽃을 그 가운데다 심고 꽃나무와 아름다운 풀을 그 곁에다 심어서, 매양 공무에서 물러나온 뒤에 노인들을 청해 술상을 차려 놓고 그 사이에서 담소하였으니, 산야(山野)의 취미가 있었다.
노한(盧閈) 병진생
노한은 자는 유린(有鄰)이며, 본관은 교하(交河)이고, 민제(閔霽)의 사위이다. 16세에 벼슬하여 을묘년(1435)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계해년(1443)에 죽었는데 나이가 68세였다. 시호는 공숙공(恭肅公)이다.
○ 태종 계미년(1403)에 판합문사(判閤門事)로 하삼도(下三道)에 염문사(廉問使)로 갔는데, 때마침 바닷가에 전선(戰船)을 만들기 위한 오랫 동안의 역사가 끝나지 않았으므로 복명하는 날 소대(召對)해서, 역졸(役卒)들의 괴로운 실상을 극력 진술했다. 태종이 얼굴빛이 변하면서 이르기를, “진시황(秦始皇)과 수양제(隨煬帝)의 포악한 것에 비해서 어떠한가.” 하였다. 공이 갓을 벗고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신이 명을 받들어서 삼도를 두루 시찰하였는데, 변방 백성의 괴로움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었으므로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한 것입니다. 또 진시황과 수양제는 배를 만든 일은 있었으나, 어찌 백성이 곤경에 빠질 것을 걱정하여서 사신을 보내어 물은 일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더니,
태종이 웃으면서, “경은 갓을 쓰라. 그리고 사과하지 아도 좋다.” 하였다.
○ 임자년(1432)에 우찬성이 되었을 때에 명 나라에서 보내온 환관(宦官) 창성(昌盛)과 윤봉(尹鳳) 등이 매년 연달아 나와서 청구하고 토색함이 그지 없었는데,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문득 모욕을 주었다. 세종이 공으로 하여금 관반(館伴)을 삼았더니, 공이 얼굴을 온화하게 하고 안색을 바르게 하여 한 마디 말을 할 때에도 법도가 있었으므로, 비록 미친듯이 위세를 부리던 창성과 윤봉도 망녕되이 함부로 하지 못하였다.공의 어머니 왕씨(王氏) 부원군(府院君) 수(琇)의 딸가 나이 이미 80에 병이 있으므로 공이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가 봉양하기를 힘껏 청하였다. 세종이 이르기를, “명 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일은 경이 아니면 불가하다.” 하고, 명하여 낮에는 사신을 접대하고 밤이면 돌아가 어머니를 모시게 하였.
○ 우의정으로 병조 판서를 겸하게 되자, 민부인(閔夫人)이 들어와 사은하니, 세종이 이르기를, “나의 사사로운 은혜가 아니라, 곧 태종께서 남긴 말씀에 의한 것이요.” 하였다.
허조(許稠)
허조는 자는 중통(仲通)이며, 호는 경암(敬菴)이고, 본관은 하양(河陽)이다. 고려 말 경오년(1390)에 급제하였고, 조선에 들어와 무오년(1438)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태종조에 공이 대간으로서 일을 논하다가 전주 판관(全州判官)으로 좌천되었는데, 이조 정랑의 자리가 비게 되어 태종이 관안(官案)을 검열하다가 이르기를, “이 사람이 이 직에 알맞다.” 하고는 곧 제수하였다. 《동각잡기》
○ 공은 대범ㆍ엄숙ㆍ방정ㆍ공평ㆍ청렴ㆍ근신하여 매양 닭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관디를 차리고 바로 앉아서 종일토록 게으른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그는 정성껏 나라의 일을 생각하여 사사로운 일은 말하지 않았으며,국정을 의논할 때는 홀로 자기의 신념을 지켜서 남들에게 맞추어 오르내리지 않았다. 가법(家法)이 몹시 엄하여 자제에게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한 다음 벌을 내리고, 노비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다스렸다.공은 어릴 때부터 깎은 듯이 여위어서 어깨와 등이 굽은 듯하였다. 일찍이 예조 판서로 있을 때에 상하 관원의 복색을 마련하여 제도가 분명하였으므로, 시정의 경박한 자식들이 공을 매우 미워하여 ‘수응 재상(瘦鷹宰相)’이라 별명을 지었다. 《필원잡기》
○ 공은 마음가짐이 맑고 바르며, 집 다스림이 엄하고 법도가 있었으며, 자제를 가르치되 털끝만큼이라도 잘못이 있을까 싶어 삼가게 하였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은 음양(陰陽 부부관계)의 일도 알지 못할 것이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음양의 일을 몰랐다면, 저 후(詡)와 눌(訥)이 어디에서 나왔단 말인가.” 하였다. 《용재총화》
○ 창기(娼妓)에 관한 제도를 고치지 않았음은 전고(典故)에 실렸다.
○ 공은 매양 부모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반드시 그의 모부인(母夫人)이 손수 지은 어릴 때에 입던 푸른빛 작은 단령(團領)을 입고 눈물을 흘리며 치재(致齋)하였다.그의 형 허주(許周)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서 치사하였는데, 공은 매양 정부에서 합좌(合坐)할 때마다 닭이 울면 반드시 형에게 가고, 갈 적에는 반드시 하인들을 동구에 떼어 두고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갔다. 허주도 역시 공이 반드시 찾아올 것을 짐작하고 밤마다 의관을 바로 하고 등불을 켜고 자리를 베풀어 몸을 안석에 기대고 기다렸는데,공이 오면 반드시 작은 술상을 차렸다. 공이 조용히 묻기를, “오늘 정부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하면, 허주는 대답하기를, “내 의견에는 마땅히 이러해야 될 것 같네.” 하였다. 공은 기뻐하여 물러나와 말하기를, “옛말에 ‘사람은 어진 부형이 있음을 즐거워한다.’ 하더니, 이를 두고 이름이다.” 하였다. 《청파극담》
허주는, 시호가 간숙(簡肅)이고, 성격이 준엄하여 가법이 있었다. 제사는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가례(家禮)를 따랐다. 자제에게 허물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에 고하고 벌을 주었다. 일찍이 병이 들어 제사에 참여할 수 없어서 동생 허조에게 대행하도록 했더니, 전의 제도를 다소 변경하였다.허주가 이르기를, “작은 아들이 종가에서 옛 제도를 함부로 변경하였으니, 이것은 종자(宗子)를 무시한 것이다.” 하고는 노하여 보지도 않고, 또 문지기로 하여금 문에서 거절하게 하였다. 공이 황공하여 새벽에 그 문에 이르렀으나, 밤이 깊도록 들어가지 못하였다. 여러 날이 지나서야 겨우 접견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
○ 공이 책상 앞에 단정하게 앉아 있을 때에, 밤중에 도둑이 그 집에 들어와서 물건을 모두 가져 가는데, 공은 졸지도 않으면서 마치 진흙으로 만들어 놓은 인형처럼 앉아 있었다.도둑이 간 지 오래 되어서 집안 사람이 비로소 이를 알고 쫓아갔으나 잡지 못하여 분통해 하니, 공이 말하기를, “이보다 더 심한 도둑이 와 마음 속에서 싸우고 있는데, 어느 겨를에 바깥 도둑을 걱정하리오.” 하였다. 《정암집(靜菴集)》
○ 선배의 극기의 공[克己之功]이 이와 같았다.
○ 조선의 어진 정승으로 황희(黃喜)와 공을 첫째로 꼽는데, 다만 두 사람은 모두 고려조에 과거에 올랐던 사람들이었으므로 청의(淸議)를 주장하는 자는 이 때문에 그들을 부족하게 여겼다. 《병진정사록》
신개(申槩) 기해생. 경오년 생원(生員)ㆍ진사(進士)
신개는 자는 자격(子格)이며, 호는 인재(寅齋)이고, 또 다른 호는 양졸당(養拙堂)이다. 태조 계유년(1393)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기미년(1439)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궤장(几杖)을 받고 을축년(1445)에 죽으니 나이가 72세였다.
시호는 문희공(文僖公)이고, 종묘에 배향되었다.
○ 공은 어렸을 때부터 어른과 같았으며, 일찍이 외조모 원씨(元氏)에게서 컸다. 나이 겨우 세 살이었는데, 창벽 사이에 그림을 그리고 더럽힌 자가 있거늘 외조모가 아이들을 모아 놓고 힐책하니, 아이들이 다투어 변명하였으나 공은 홀로 말하지 않고 제 키를 가리키는데, 과연 키가 그림 그린 벽에 한자 남짓 미치지 못하였다. 외조모가 기특하게 여겨 말하기를, “반드시 이 아이가 우리 집을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 《해동잡록》
○ 평소에 말을 빠르게 하지 않았고 당황한 얼굴 빛을 짓지 않았으며, 종들에게 죄가 있어도 매를 때리지 않았다. 《해동잡록》
○ 한원(翰苑)에 있을 때에 태조가 실록을 보고자 하였는데, 공이 소를 올려서 불가함을 논하니, 태조가 그만두었다. 《사가집(四佳集)》 <묘비(墓碑)>
○ 성격이 강직하여 여러 차례 글을 올려서 대신의 잘못을 꺾었으므로 시론(時論)이 갸륵하게 여겼다. 태종이 일찍이 이르기를, “신개는 간신(諫臣)의 기풍이 있다.” 하였다. 을사년(1425)에 강음(江陰)에 좌천되었다. 《사가집》 <묘비>
○ 일찍이 언충신(言忠信)ㆍ행독경(行篤敬)ㆍ소심익익(小心翼翼)ㆍ대월상제(對越上帝) 등 열네 글자를 써서 세 아들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사군자(士君子)의 마음엔 마땅히 이것으로 목표를 삼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귀령(李貴齡)
시호는 강호(康胡)이다. 《조야기문(朝野記聞)》과 <상신고(相臣攷)>에 기록되었다.
혹은 검교정승(檢校政丞)이 되었다고 하였다.
하연(河演) 아들 셋이 있었는데, 내외 증손(曾孫)이 백여 인이나 되었다.
하연은 자는 연량(淵亮)이며, 호는 경재(敬齋)이고,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태조 병자년(1396)에 생원ㆍ진사를 거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을축년(1445)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고, 궤장을 받고 치사하였다.
단종(端宗) 계유년(1453)에 죽으니 나이는 78세였다. 시호는 문효공(文孝公)이며, 문종(文宗)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정유년에 동부대언(同副代言)이 되었는데, 태종이 그의 손을 잡으면서 이르기를, “경이 이 자리에 오른 이유를 아는가.” 하자, 공이 “모릅니다.” 고 대답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전일 경이 사헌부에 있을 때 능히 헌직(憲職)을 감당했으므로, 내가 그때에 경을 알았다.” 하였다.
○ 공은 평상시에 늘 검은 사모를 썼는데, 그 뿔은 빼어 버리고 향을 태우며 고요히 앉아서 종일토록 읊조렸다. 공의 시는 기벽(奇僻)하여 옛시의 격조에 가깝고 필법이 굳세어 체를 얻었다. 일찍이 춘방(春坊)에 있을 때에 시를 지어 손수 쓰니, 하륜(河崙)이 감탄하기를, “하문학(河文學)이 시를 지어서 하문학이 썼으니, 역시 인간 보물이다.” 하였다. 《필원잡기》
○ 공이 일찍이 경상도의 안사(按使)가 되었을 때에 남지(南智)가 아사(亞使)가 되었는데, 공이 매우 중히 여겨 하관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일찍이 진주에 이르러 아름다운 산천의 경치를 찬탄하였으니, 공이 진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남지가 얼굴빛을 고치면서 말하기를,“산수는 비록 아름다우나, 품관(品官)은 몹시 좋지 못합니다.” [이것은 진주 출신인 하연을 가리킨 것임] 하니, 공이 크게 웃었다. 사람들이 공의 아량에 심복하였더니, 뒤에 공은 남지와 함께 정승에 올랐다. 《필원잡기》
○ 공은 평안하고 검소하며 강직하고 명철하며 풍채가 단아하였다. 효도를 다하여 어버이를 섬겼고, 종족간에 매우 화목하였으며, 옛친구를 버리지 않고 경조사에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살림살이에는 힘쓰지 않고 기첩(妓妾)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규문(閨門)이 엄숙하였다.닭이 울면 일어나서 의관을 바로하고 대궐을 향하여 앉는데 좌우에는 도서(圖書)뿐이었다. 그에게 시를 청하는 사람이 있으면 흔연히 곧 붓을 잡고 쓰니 시상(詩想)이나 필법이 늙을수록 더욱 절묘하였고, 천성이
옛 도리를 좋아하여 일마다 모두 옛사람을 자기의 목표로 삼았으며, 사대부를 예법으로 대우하여 문에서 오래 기다리는 손님이 끊일 적이 없었다.오랫동안 이조에 있었으나 사사로운 청탁을 좋아하지 않았고, 정승이 되었을 때에는 법을 좇아 흔들리지 않고 시종 여일하게 근신하였으니, 그는 태평 시대의 문치(文治)를 이룩한 재상이었다. 또 학문이 정하고 깊고 문장이 법도 있고 우아하여 일세의 우러름을 받았다. 공이 죽은 뒤, 유명(遺命)에 따라 불사(佛事)를 짓지 않았다.
○ 공은 부모를 섬기는데 몹시 효도하였다. 두 어버이의 나이가 모두 80이었는데, 어버이 마음을 기쁘게 할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구경당(具慶堂)을 짓고 설날이나 명절이 되면 반드시 잔을 들어 수(壽)를 올리니, 사대부들이 영광으로 여겨서 시를 지어 찬송하는 이들도 있었다.구경당은 초가로 지어 해마다 새로 이엉을 하였는데, 어버이가 돌아가시자, 영모(永慕)로 편액을 고쳤다. 자질들이 기와로 바꾸기를 청하니, 공이 탄식하기를, “선인(先人)이 거처하시던 곳을 어떻게 고치겠는가. 역시 그대로 두어, 후대의 사람으로 하여금 선인의 검소함을 본받게 하여라.” 하였다.
황보인(皇甫仁)
황보인은 자는 사겸(四兼) 또는 춘경(春卿) 이며, 호는 지봉(芝峯)이고,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태종 갑오년(1414)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묘년(1447)에 정승이 되어 영의정에 이르렀으며, 문종(文宗)의 유명을 받아서 단종(端宗)을 돕다가, 계유년(1453)에 김종서(金宗瑞)와 함께 죽었는데, 숙종조(肅宗朝)에 관작이 회복되었고 시호는 충정공(忠定公)이다.
○ 공은 일찍이 차원부(車原頫)의 원통함을 간절히 논하느라고 사모가 거꾸로 쓰여진 줄을 몰랐더니, 원부가 그로 인하여 특별히 신설(伸雪)되었었다. 그때 사람들이 그를 사모를 거꾸로 쓴 시종이라 일컬었다. 《해동잡록》
○ 공의 무덤이 파주(坡州) 천참(泉站) 서편 발흥(勃興) 큰 길 가에 있었는데, 그 묘표(墓表)의 글에는 커다랗게 ‘영천 황보공지묘(永川皇甫公之墓)’ 라 새겼고, 또 작은 글씨로, ‘공 휘 인 노산조 수상 경태 계유 정난시 병 이자 일손 피화(公諱仁魯山朝首相景泰癸酉靖難時幷二子一孫被禍)’ 라는 스물 두 글자를 새겼고,또 ‘정덕 기묘 이월 입석 거 피화 위 육십 칠년(正德己卯二月立石距被禍爲六十七年)’ 이라 새겼는데, 수장(收葬)한 이나 그 무덤에 표석을 세운 이의 이름은 모두 나타내지 않았다. 《미수기언(眉叟記言)》
남지(南智)
남지는 자는 지숙(智叔)이며, 본관은 의녕(宜寧)이고, 영상 남재(南在)의 손자이다. 음사로서, 기사년(1449)에 정승이 되어 좌의정에 이르렀고, 시호는 충간공(忠簡公)이다.
○ 공은 낮은 벼슬에 있을 때부터 담력과 뜻이 있었다. 사헌부 지평이 되었을 때에, 도승지 조서로(趙瑞老)가 간음을 하였다는 비방이 있었으나 감히 먼저 발언하는 자가 없었는데, 내가 하겠다고 공이 말하였다.
어느날 일찍 조회에 들어가면서 소유(所由 사헌부의 이속) 20여 인으로 하여금 먼저 이르러 조서로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그의 구사(丘史)를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묶어오게 한 뒤,곧 조방(朝房)에서 국문하기를, “너의 주인이 아무날 어느 곳에 갔으며 어느 집에서 잤느냐.” 하니, 구사들이 모든 것을 실상대로 말하였다. 또 간음한 집의 심부름하는 노파를 잡아서 국문하더니 숨기지 못하였다. 세종이 그때 간음법(奸淫法)을 중하게 여겼기 때문에 조서로를 곧 서인으로 삼았다. 《소문쇄록》○ 하연(河演)이 경상도 감사로 있을 때에 공이 새로 경상도 도사로 임명되어 온단 말을 듣고 걱정하기를, “이 사람은
나이 젊고 문벌이 높은 집의 자제여서 필시 직무를 옳게 보지 못할 것이니, 내 장차 어찌할꼬.” 하였다. 그가 처음 이르러서 뵈러 들어올 적에,하연이 시험삼아 판단하기 어려운 공문서를 주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이를 처결해 오라.” 하고 공이 물러간 뒤에 사람을 시켜서 엿보게 하니 그가 장중(帳中)에서 손님과 술을 많이 마시고 있었다. 하연이 탄식하기를,
“과연 나의 추측과 틀림없구나.” 하였더니, 공이 이튿날 술이 깨자 일어나 그 문서를 한 번 훑어보고는 손톱으로 그어 표시를 하여 하연에게 드리면서 말하기를,“아무 글자는 빠졌으니 아마 그릇된 것 같고, 아무 일은 그릇되었으니 분변하여야겠습니다.” 하므로 하연이 자기도 모르게 깜짝 놀랐다. 그뒤부터 특별히 간곡하게 대우하였다. 그뒤 하연이 정승으로 있을 때에 공도 정승이 되니, 하연이 이르기를, “감사가 발이 빠르지 못했더라면 거의 도사에게 밟힐 뻔하였구나.” 하였다. 《소문쇄록》
○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공과 더불어 혼인하기를 청하니, 공이 이르기를, “내 여식이 있으나 얼굴이 못생겨서 귀댁의 며느리가 되기엔 어려우니, 한번 간선을 해 보시오.” 한 즉, 안평이 말하기를, “신부의 선을 직접 보는 것은 궁중의 일이니, 내 어찌 감히 참람한 짓을 하리요.대감은 어찌하여 이런 말을 하오. 신부의 잘 나고 못난 것을 나는 개의치 않소.” 하였다. 공이 또 말하기를, “늙은 여종 하나를 보내어 내 딸을 보시오. 후회가 있을까 걱정됩니다.” 하니, 안평이 듣지 않았다.
공은 그대로 술을 마시다가 취하자 일어나면서 말하기를, “한 가지 일이 있으니 다시 여쭈려 합니다.마침 하양(河陽)에 사는 소경 김학로(金鶴老)를 만났습니다. 그는 점을 잘 치는데, 우리 집의 길흉을 말한 것이 다 맞았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댁의 두 딸이 다 운이 좋지 못해서 일생을 잘 지내기 어렵다.’ 하였는데, 혹 이것이 누가 될까 염려됩니다. 맏딸은 임영대군(臨瀛大君)에게 시집갔는데, 지금 홀로 살고 있고, 이 딸은 둘째입니다.” 하니,안평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감은 어찌 무당과 점장이의 말을 믿습니까. 대인(大人)이 요망스런 말을 물리치는 뜻에 어긋나는가 합니다.” 하였다.
이에 공이 곧 말하기를, “그러면 승낙합니다. 우리 같은 한족(寒族)이 종실과 혼인하는 것은 실로 다행입니다. 다만 박복한 딸이고, 얼굴도 잘 생기지 못하여 뒷말이 있을까 염려했더니,이제 대군의 뜻이 확고하니 어찌 감히 사양하여 피하겠습니까.” 하였다. 이해에 안평의 아들 우직(友直)이 공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다음해 임신년에 공이 풍병(風病)을 얻어 세상일에 상관을 못했다. 또 그 다음해에 안평이 죄를 입었는데, 공이 사돈이면서도 연루되지 않은 것은 병이 났기 때문이었다. 《소문쇄록》
○ 임영대군의 부인 남씨(南氏)는 아들을 못 낳았기 때문에 쫓겨났다.
○ 공이 죽은 후 사위 우직 때문에 시호를 얻지 못하더니, 성종(成宗) 기유년(1489)에 그의 손자 남흔(南忻)이 소를 올려서 청하자, 대신에게 의논하여 시호를 충간(忠簡)이라 하였다. 《소문쇄록》
[주D-001]운검(雲劍) : 의장(儀仗)에 쓰는 큰 칼을 차고 임금의 거둥에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무사
[주D-002]대포(大酺) : 임금이 백성에게 주식(酒食)을 나누어 주고, 마음껏 놀게 하는 것.
[주D-003]소공대(召公臺) : 주(周)의 소공(召公)이 자기 관내(管內)의 백성에게 은덕을 베풀었으므로 백성들이 그의 행차가 감당(甘棠)나무 밑에서 멈추었다가 떠난 후 감당나무를 보호하고 시를 지은 일이 있다.
[주D-004]구사(丘史) : 관원이 출입할 때, 모시고 다니는 하인.
[주D-005]직부(織婦)를 내쫓고 : 노상(魯相) 공의휴(公儀休)가 자기 집에서 베를 잘 짜는 부인을 내쫓으면서 “내집에서 베를 짜면 민간의 부인이 무슨 직업을 가지겠느냐” 하였다는 고사에서 온 것.
[주D-006]사단(史丹)의 일 : 한대(漢代)의 사단(史丹)이 태자를 바꾸도록 간한 사실을 말한다.
[주D-007]양수척(楊水尺) : 사냥을 하거나 버드나무로 그릇 등을 만들어 팔았던 천민.
[주D-008]강무(講武) : 열병(閱兵)을 겸한 사냥.
'문화류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류-차 문제 스크랩 자료 (0) | 2013.11.25 |
---|---|
[스크랩] 한글은 얼마나 우수할까, 위대할까? (0) | 2013.11.21 |
[스크랩] Re:거짓은 또다른 거짓을 낳는 차씨들의 주장 모음글 (0) | 2013.10.10 |
[스크랩] 왕건의 혈통(이중재씨 주장입니다.) (0) | 2013.10.10 |
[스크랩] 왕씨 (王氏) (0) | 2013.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