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시조를 찬탈당하는 불효
하곡 류재균
차례 |
A. 문화류씨 시조를 찬탈하고 있는 차문 B. 문화류씨 대종회의 대응 사례 C. 차문종회 글에 대한 반론 D. 차문종회의 류문에 대한 글 |
A. 문화류씨 시조를 찬탈하고 있는 차문
1. 찬탈(簒奪) 사전의 뜻은 임금의 자리나 국가 권력 정권 등을 반역하여 빼앗은 것을 말하는데, 연안차씨의 일부 차문은 대승공을 자기들의 선조 한분으로 격하시키면서 문화류씨 시조(류차달)를 찬탈하려는 과정을 소개합니다.
2. 어떤 명분을 붙여도 역사 속에서 왕위(정통) 찬탈 과정은 일종의 패륜적 행위로 볼 수 있는데 차문은 교묘한 문구의 확대 생산과 해석으로 문화류씨 정통인 시조 대승공을 찬탈하고 있는 과정을 막으려는 류문을 무시하는 형태를 소개합니다.
3. 일부 류문은 2008년 무자보에서 원파록을 폐기하였기에 아버지가 없는 대승공이 있을 수 있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대승공의 아버지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차문이 원파록으로 만들어준 대승공의 아버지 보림과 할아버지 무선은 아니기에 우리가 더 연구하여 바른 이름을 찾을 때까지 대승공 아버지 이름을 모르는 상태로 지내자는 것이 원파록 파기의 뜻이고, 대승공 아들은 류효금이며 차효전이 장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4. 차문은 류문과 화합하기 위해 차문유래비문에서 “가성”을 “변성”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연안차씨유래비(2001.6.14 대전뿌리공원)에서 “둘째아들 효금은 류씨로 명사(命賜)하여 류씨의 시조가 되었다.”를 고치지 않았으며, 평택 의덕사에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을 “연안차공 달”로 위패를 만들었는데 그 위패를 류차달로 바꾸었다고 거짓말을 하며, 2004년 연안차씨 대동보에 “둘째 아들 효금은 류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연안차씨 유래를 영어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불어 러시아어로 배포하였는데 발행 배포한 족보를 회수하여 폐기하였다고 또 거짓말을 하며, 파주 고려대전에 대승공류차달을 “대승문도공연안차달선생” 이라고 “문도공” 시호까지 조작하여 위패를 모셨는데 고치라는 류문의 요구를 무시하고 있으며. 류문과 화합차원에서 류교수를 고발하여 재판을 하려다가 안하고 있다고 꼼수를 하고 있습니다.
젊은 교수, 역사학과 교수가 아닌 지방대 교수가 대호하루책으로 두 종중을 이간질 하고 있다고 류교수를 비하 발언을 하는 일부 류문이 있는데 대한민국에서 보통 사람들이 미국에서 100대 지식인에 선정된 사람을 비하 할 수 없으며 차문이 화합하려고 하는 행동들이(차씨유래비 고치는 일, 의덕사 차달 위패 없애는 일, 차문대동보 회수하여 패기한 일, 고려대전 차달 위패 없애는 일 등) 차문 홈페이지에 한번도 언급이 없는데 차문이 반성을 하고 있어 두 종중이 화합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일부 종친 특히 젊은 종친들은 역사교수가 아니면서 우리가 모르는 종사를 알게 해준 류교수는 문화류씨의 보배이며 만약 류교수가 없었다면 꼼짝없이 차문의 꼼수에 걸려 류문은 말 한마디 못할 것이며, 차문이 류교수 논문(대호하루)을 고발하면 논문에 참고 문헌으로 나오는 학자들이 재판장에서 차문의 거짓 내용을 말할 것이며 언론에 보도 될 것이 두려워 고발을 못하면서 류교수를 봐 주고 있어 고발하지 않는다고 거짓 말을 옮기는 류문들은 류교수가 있어 감사함을 알아야 한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5. “구월청풍”에 의하면 우리 선조들은 족보를 발행할 때 지혜롭게 종사와 종통을 구별하여 약 300여년전에 나온 원파록을 종사에 썼으나, 종통에는 류차달의 아들은 류효금 분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36년전 1976년 병진보를 만든 분들이 연안차씨 족보를 그대로 옮겨 류차달 장자에 차효전을 넣어 종통을 류차달 종손으로 차효전을 등재하는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 종원은 차문과 천년 동족이니, 300년 동족이니하며 병진보 이전 선조의 지혜를 무시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 부끄러움을 범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차효전이 장손으로 등재됨으로 환부역조(煥父易祖)의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슬프게 합니다.
6. 아래 차문의 글 출처를 밝혀 제가 조작된 글로 류문과 차문을 이간질 하고 있다는 오해를 없도록 합니다. 긴 차문의 글 중간 중간을 생략하였으니 원문을 보시려면 원문 주소를 클릭하여 보십시오.
출처 : http://cafe.daum.net/jamorl
출처 : http://cafe.daum.net/jamorl/AKsB/18?docid=1Msbu|AKsB|18|20110205161504&q=%BF%AC%BE%C8%C2%F7%BE%BE%C0%AF%B7%A1%BA%F1%B9%AE
B. 문화류씨 대종회의 대응 역사
1. 1964년 광주 대동사에서 차류대종회 창립하여 1999년 해체
2. 2000년 차기탁부회장과 차화준회장의 문화류씨는 가성이며 문화류씨 시조는 좌윤공(류효금)이며 대승공은 차달이며 가정보는 위보(僞譜)라는 주장을 합니다.
3. 2001.6.14 대전뿌리공원의 연안차씨유래비에서 “류씨는 가성이다”와 “둘째아들 효금은 류씨로 명사(命賜)하여 류씨의 시조가 되었다.”를 비문에 세깁니다.
3. 300여년간 모르고 지냈던 일이며 대승공의 장자 종손으로 등재된 것은 36년 전 이야기인데 천년 동조이성이라는 등으로 오해하여 인천 광주 울산 부산에서 차류종회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4. 대종회에서 대책회의를 수차 열었으며 2004년 8월 확대임원회의에서 “차류는 동조이성이 아니다”라는 결의문을 채택하게 됩니다.
5. 2005년 1월 18일 대동보편수위원회에서 원파록 등의 등재에 관하여 논의된 바 더 연구 해보기로 보류하였습니다.
6. 2005년 11월 24일 추계총회에서 “근래 차문에서 그들의 선조 차효전이 대승공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한편 고려개국공신이니, 연안군이니 운운하는데 다만 차문의 족보 외에는 어떤 공가문헌에도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대승공 류차달의 아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공인하는 고려 개국공신 어느 누구도 군호가 전하지 않는데 유독 차효전에게만 봉군되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는 글을 종회장 이름으로 발표합니다.
7. 1689년 기사보에 “왕명차원부설원기에 근거한 원파록 기사가 망매(흐리 멍명하여 확실하지 않음)해서 알 수 없어 여기 원문을 실어 두어 후일 고구(무엇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따져 봄)에 대비한다(구월청풍 창간호 113쪽 참조)고 하였으며 1976년 병진보에서 종통에 대승공의 장자로 처음으로 차효전을 공식적으로 등재시켰습니다. 종사에는 차효전이 있었으나 종통은 1976년 이전까지 차효전을 대승공 장자로 인정하지 않고 종통을 지켜왔습니다.(구월춘풍 창간호 132쪽 참조)
우리 선조들은 기사보에 원파록을 소개한 이후 1742년 경신보, 1765년 을유보, 1803년 정사보, 1864년 갑자보, 1926년 병인보의 수 차례 족보를 만들면서 차효전은 종사편에 소개하였으나, 대승공 아들로 등재하지 않는 지혜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부터 36년전 1976년 병진보에서 차효전을 대승공 장자로 등재하여 종손으로 인정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차효전이 황제의 후손이라고 하니 대승공 장자로 인정하는 오점을 남겼는데,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합니다.
C. 차문종회 글에 대한 반론
※ 이글(D)에서 지적한 부분은 빨간 글자로 표기하였으며 긴 문장은 중간 중간 생략하였습니다.
1. 연안차씨 유래비문에 문화류씨 류색부터 류차달까지는 “가성”이란 부분은 “변성”으로 수리하였다고 합니다.(류쥬환 교수 확인) 그러나 문화류씨 시조 류효금이라는 부분은 그대로 고치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문화류씨 시조는 차문이 말한 류효금이 아니며 류차달입니다.
2. 의덕사의 사지(史誌)에 차달(차는 성씨이며 달이 이름임)의 거짓 이름(모성명)은 류해다.--문화류씨 족보에 一諱海字應通號鵝沙는 후대에 만들어진 내용이며 가정보에 없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차문족보(http://www.cha.or.kr/person.htm연안차씨종친회중앙본부홈/연안차싸유래/인물소개/3쪽)에는 38世 諱 達에는 “묵방사기에 말하기를 공은 모성 류씨로 휘는 해요, 자는 응통, 호는 아사이며 배부인은 신라조의 알지의 후손 김균의 딸이며 생이남 생일녀 하였으니 맏아들 효전 둘째아들 효금이며 딸은 고려조의 벼슬 삼중대광이며 통합삼한 익찬벽상공신 윤신달에게 출가하였다.”로 되어 있습니다.
류해 응통 아사 配는 연안차씨 족보에 있는 내용을 류문이 옮겨 사용한 것이며 파평윤씨 족보에 윤신달이 대승공 사위라는 내용이 없고, 가정보에는 대승공 류차달의 부인이나 자매나 동서 등의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조선으로 넘어와서 사용되기 시작한 “호”를 고려초 대승공이 사용 한다는 것은 후손이 만든 것입니다.
※주1 : 묵방사기--구월청풍 창간호 47쪽 묵방사완복문(류희림 誌)에 차문족보 내용이 없습니다.
3. 왕씨.차씨.류씨의 분파도는 원파록 내용이며 원파록을 차문 족보에서 문화류씨가 옮겨 쓰고, 개성왕씨는 조선조에서 족보를 만들면서 문화류씨 족보에 왕차류 분파도를 왕씨 족보에 넣었으며 다시 연안차씨는 개성왕씨 족보에 “왕차류”가 뿌리가 같다고 했으니 개성왕씨 연안차씨 문화류씨는 한 뿌리라고 하였습니다.
4. 의덕사에 배향봉안 된 祖님들의 약력을 보면 33세 승색, 34세 공숙(숙), 35세 진부, 36세 무선, 37세 보림, 38세 달로 위패를 의덕사에 102분을 모셨습니다. 차승색(류백) 차공숙(류숙) 차진부 차무선 차보림은 차문에서 원파록으로 만든 이름이기에 차씨로 하든 류씨로 하든 상관이 없으니, 류차달을 “연안차공 달”로 위폐를 모신 것은 상식 이하의 일입니다.--차문족보(http://www.cha.or.kr/person.htm연안차씨종친회중앙본부홈/연안차싸유래/인물소개/2, 3쪽)
5.【柳車達】이란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는 말은 “車는 姓, 達은 사명(賜名)” 이라는 것입니다. 사명은 공이 있는 신하에게 임금이 지어준 이름인데 왕건이 당시 이름이 제대로 없던 백옥삼을 배현경이란 사명을 주어 경주배씨의 시조가 되게 하였고, 사괴를 복지겸의 사명으로 면천복씨 시조가 되게 하였고, 능산에게 신숭겸이란 사명을 내렸지만 류차달은 사명을 하사하기에 너무 큰 해상 세력이었으며 왕건에게 군량미를 지원해 주기 전부터 류차달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왕건은 자신의 주군인 궁예를 축출하였기에 고려 건국 후 공신들도 믿을 수 없어 혼인동맹으로 지방 호족을 포섭하였습니다. 류천궁의 딸을 신혜왕후로 류덕영의 딸을 정덕왕후로 맞이하는 등 29명의 부인에게서 25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을 얻었으며 아들 딸 3촌 4촌 5촌 6촌 등 가족끼리 혼인을 시켜 왕가의 기반을 굳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고려 초 많은 류씨 중에 전주와 유주(문화류씨)를 제외하고(대호하루 355쪽) 현재 자손의 흔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류천궁은 경기 북부 지역의 부호였으며 류차달은 황해도 해상세력으로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류천궁은 가족과 부를 보호하기 위해 왕건과 혼인을 하였으나, 류차달은 류천궁과 인물됨이 달랐습니다. 당시 점령지역에서 군량미를 현지 조달하였습니다. 류차달은 왕건에게 군량미를 주면서 점령지역 주민의 식량을 사용하면 백성의 지지를 얻지 못하니 자기가 조달해준 군량미로 천심을 얻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 견훤에게 등을 돌린 후백제 지역민의 도움으로 전쟁에서 승리를 하였기에 왕건이 사명을 줄 여건이 아니며, 류차달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무순 사명을 내린다는 말입니까?
대승공은 호족이면서 백성을 사랑하는 문화류씨 시조인데, 차문에서 찬탈하여 자기 시조의 38세이며 왕건이 이름을 하사했다는 등 류문을 능멸하는 처사를 행하고 있습니다.
6. 假姓 柳氏라고 부르는 理由는 태조 사성(賜姓) 받기 이전 류씨는 가성이라 하는데, 연안차씨종친회중앙본부홈/연안차싸유래/인물소개/2, 3쪽을 보면 류차달 이전 이름은 가공 인물임으로 차씨나 류씨나 상관이 없으나 차승색은 류색에서 태조의 특명으로 109년만에 차씨로 복성하였고, 차공숙은 류숙에서 태조의 특명으로 차씨로 복성하였고, 차진부는 태조의 특명으로 차씨로 복성하였고, 차무선은 태조의 특명으로 차씨로 복성하였고, 차보림은 태조의 특명으로 차씨로 복성하였다면서 모두 가성류씨에서 본성차씨로 복원케 되어 성명을 바로 잡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에 신라의 성씨를 제외하고 모든 족보가 고려초 이전의 상계는 알 수 없는데 차문은 류문을 끌어들여 가성이다, 복원이다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가 말한 것은 류색 류숙 류진부 류무선 류보림(부산 기장에 5대단 선조들)은 가공인물이기에 가성과 복원에 아무 의미가 없으나 류차달 대승공은 류문의 시조이기에 안되고 분통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차문이 말하는 신라 승상이 역사에 없는 벼슬이며, 차효전이 고려 공신록에 없다고 누차 이야기 하여도 이해를 못하는 일부 류문이 문제이며, 파주 고려대전은 고려 왕과 고려 충신을 모시는 사당인데 고려 공신인지 충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차효전 위패를 모신 것은 류문이 시비를 할 필요가 없는데, 류차달을 차문 충신으로 위패를 모신 것은 비난의 대상입니다.
D. 차문종회의 류문에 대한 글
차문 카페(자모동 사람들) 글 모음 | |
차문의 문화류씨 시조 찬탈 사례 |
주요 쟁점 내용 |
1. 연안차씨 유래비문 |
아들 효금이 류씨의 득성시조 |
2. 의덕사의 사지(史誌) |
대승공 차달(車達 = 冒姓名 柳海) |
3. 왕씨.차씨.류씨의 분파도 |
車承穡 車恭叔 車振阜 車茂先 車普林 車達 |
4. 의덕사에 배향봉안 된 祖님들의 약력 |
연안차공 달 위패 |
5.【柳車達】이란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
車는 姓, 達은 사명(賜名) |
6. 假姓 柳氏라고 부르는 理由 |
태조 사성(賜姓) 받기 이전 류씨는 가성 |
1. 연안차씨 유래비문(由來碑文)|연안차씨
머무는바람 | 조회 13 |2011.02.05. 16:15 http://cafe.daum.net/jamorl/AKsB/18
연안차씨유래비문(由來碑文)
황제(黃帝)의 후손인 사신갑(姒辛甲)께서 고조선 평양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살면서 성을 왕씨(王氏)로 하고 이름은 조명(祖明)이라 하였다. 고조선 말 그의 후손 왕몽(王蒙)이 기자조선 준왕(準王)의 모함을 받아 7남 왕림(王琳)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어서 살게 되었다. 이때 몽(蒙)은 자손번창을 이유로 왕씨(王氏) 성자(姓字)를 전자(田字). 신자(申字). 차자(車字)로 고쳐 성을 차씨(車氏)로 하고 이름은 무일(無一)이라 하였다. 신라태조가 계림(鷄林=慶州)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울 때 차무일(車無一)께서 공훈(功勳)을 세워 시중벼슬에 오르고 왕으로부터 차씨성을 받게 되어 차씨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다. 차무일의 32세인 건갑(建甲)께서 신라39대 소성왕 때 승상벼슬에 있었는데 소성왕께서 태자를 잘 보살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승상께서 왕의 유언에 따라 12세로 보위(寶位)에 오르신 애장왕을 보필 하시다가 아들 승색(承穡)에게 다시 왕을 보필할 것을 부탁하고 별세 하시니왕께서 왕례로서 기장 만화동에 예장케 하였다. 이때부터 차능(車陵)이라 칭하게 되었으며 기장현도 차성(車城)이라 불렀다. 또 신위도 소성왕 종묘에 배향 하였으며 왕의 숙부인 김언승(金彦昇)이 반역하여 왕위를 빼앗아 스스로 헌덕왕이라 하였다. 차승색(車承穡)께서는 충성심에서 아들 차공숙(車恭叔)과 더불어 헌덕왕(憲德王)을 암살하려다 누설되어 아들을 데리고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 가성류씨(假姓柳氏---나중에 변성류씨로 바꾸었음)로 모칭(冒稱)하고 이름을 백(栢)으로 하고 아들은 숙(淑)으로 개명(改名)하고 살았다. 둘째아들 차공도(車恭道)는 강남으로 피신하여 구성(舊姓) 왕씨(王氏)로 복성 하였는데 이분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증조(曾祖)이신 원덕대왕(元德大王)이시다. 이러한 인연으로 차씨는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고려조의 차씨는 왕씨와 똑 같은 왕족 대우를 받았다.
고려태조 왕건께서 후삼국을 통일할 때 가성(假姓) 류씨(柳氏) 6세인 류해(柳海)께서 장정을 수송하여 통일에 기여 하였으므로 삼한통합벽상2등공신에 봉(封)하고 조상의 성을 따라 본성 차씨(車氏)로 복성하여 이름은 달(達)로 사명(賜名)하였고, 가성(假姓) 류씨(柳氏) 6세는 본성 차씨로 복성된 것이다. 큰 아들 차효전(車孝全)은 통일에 필요한 향궤(餉饋)를 헌납 하였기에 개국 수공자로 대광(大匡)의 벼슬을 제수하고 귀족(貴族)의 작위(爵位)인 백(伯)에 봉(封)하고 왕실종적(王室宗籍)에 입적(入籍)한 후 염주(塩州:延安)에 식읍천호(食邑千戶)를 내렸고 그 후손들은 연안군(延安君)으로 추존(追尊)하며 득관조(得貫祖)로 받들고 있다.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 차효전은 조상의 홍렬(弘烈)을 승습(承襲)하고 종적을 연안(延安)으로 하여 연안차씨 득관조(得貫祖)가 되었고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의 둘째 아들 효금(孝金)은 고려 태조의 명(命)으로 류씨(柳氏)로 사성(賜姓)되어 류씨의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다. 이때부터 두 형제분이 차. 류 두성으로 분성(分姓) 되었다. 차문은 신라, 고려조에 수많은 문무장상(文武將相)이 대를 이어 배출된 교목세가(喬木世家)의 명문(名門)이다. 고려 공민왕 때 군부판서 용산군(龍山君) 차포온(車蒲溫)은 고려가원(元)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때 국방 및 외교로 뛰어난 활약을 하신 고려의 명신이며 차문의 자랑스러운 현조이시다. 또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고려 말 성리학의 대가이시며 고려조 간의대부(諫議大夫)이신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께서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와 하륜 등 사얼(四孼)들의 모략으로 억울하게 추살(椎殺)되시고 차씨 문중도 적족지화(赤族之禍)를 당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태조의 질책(質責)으로 태종이 잘못을 뉘우치고 공(公)의 영혼을 위로하는 치제(致祭)를 명하고 아울러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벼슬을 추증했고 그 후 가증 문하시중(門下侍中)과 문절(文節)이란 시호(諡號)도 내렸다. 다행히 세조2년에 왕명으로 박팽년(朴彭年)의 기문(記文)에 최항(崔恒)외 4인의 주석문(註釋文)과 유신석학(儒臣碩學) 48인의 응제시(應製詩)를 모아 예조참판 하위지(河緯地)의 서문을 지어 엮은 차운암 설원기(車雲巖 雪寃記)에 의하여 억울한 사실이 소명되어 광명을 찾기는 하였으나 차씨 문중에 대한 수난은 계속되었으며. 차씨 문중에는 세조13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창의(倡義)하여 순절(殉節)하신 강열공(剛烈公) 차운혁(車云革), 임진왜란 시 평양성 수복의 로포문(露布文)으로 명나라를 놀라게 한 천하문장 오산공 차천로(車天輅)와 같은 명조 현조님들이 많이 계셨다.근대에는 포우단(砲牛團)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신 차도선(車道善), 대동공보(大同公報)를 창간, 독립운동을 하신 차석보(車錫甫),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큰 활약을 하신 차이석(車利錫)외 많은 독립유공자에게 정부 건국 훈장이 수여 되었으며 이분들이 차씨 문중을 빛내고 있다. 차씨 문중은 절개 굳은 충신. 공신. 의사와 열사가 유달리 많은 종문이며 명문 갑족다운 긍지를 잃지 않고 자자손손(子子孫孫) 계승(繼承)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해(註解)교목세가(喬木世家) : 여러대에 걸쳐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한 집안 연안차씨 종친회중앙본부 (1999-2001)
2. 의덕사(懿德祠)의 사지(史誌)|연안차씨
머무는바람 | 조회 23 |2011.02.05. 23:55 http://cafe.daum.net/jamorl/AKsB/20
의덕사(懿德祠)의 건립취지(建立趣旨)와 목적(目的)
연안차씨(延安車氏) 종친회(宗親會)는 전국에 종원제위(宗員諸位)의 열성어린 협조를 얻어 경기도(京畿道) 평택시(平澤市) 장안동(長安洞)산 285-1번지에 길지(吉地)로 선정(選定)하고 선조(先祖)님을 배향(配享)할 사우(祠宇)를 건립(建立)하게 된 것이다.
연안차씨(延安車氏)의 득관조(得貫祖) 차효전(車孝全)은 고려조(高麗朝) 개국(開國)의 수공자(首功者)로 벼슬 대광(大匡)을 제수(除授)하고 고려왕실(高麗王室)의 종적(宗籍)에 입적(入籍)한 후 식읍천호(食邑千戶)를 염주(塩州)로 하사(下賜)하여 귀족(貴族)의 칭호(稱號)인 작위백(爵位伯)에 봉록(封錄)하신 선조(先祖)님을 주벽(主壁)으로 봉안(奉安)하고 고려조(高麗朝)에 역대(歷代)의 작위선조(爵位先祖)와 각 종파(宗派)의 파조(派祖) 및 명현(名顯)의 현조(賢祖)와 이곳 합동묘역(合同墓域)에 4위를 배향(配享)으로 봉안(奉安)하고 사당(祠堂)의 이름 의덕사(懿德祠)라 칭명(稱名)하고 1996년 5월 12일자로 준공전례(竣工典禮)를 하였으며 음력(陰曆) 10월 2일에 시제(時祭)로 매년(每年) 경향각지(京鄕各地)의 일족(一族)이 운집(雲集), 성대(盛大)히 봉향(봉향)을 하여왔다.
2004년 7월 14일 운영이사(運營理事) 및 문헌(文獻). 보첩편찬(譜牒編纂) 심사위원(審査委員) 등 연석회의(連席會議)에서 승인(承認)을 얻어 차씨(車氏)의 득성(得姓祖)이신 신라조(新羅朝)에 벼슬 시중(侍中)차무일(車無一) 시조(始祖)님을 주벽(主壁)으로 봉안(奉安)하여 득성조(得姓祖)의 38세 손자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 = 冒姓名 柳海) 선조(先祖)님까지 전조고조비(全祖考祖妣)와 연안차씨(延安車氏)의 득관조(得貫祖)이신 고려개국(高麗開國)에 수공자(首功者)인 정사일등공신(定社一等功臣) 대광지백(大匡之伯) 차효전(車孝全) 선조(先祖)님부터 고려말(高麗末)의 득관조(得貫祖)의 20세 손자까지 전조고조비(全祖考祖妣).득관조(得貫祖)의 21세 손자 고려조(高麗朝)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綠大夫) 광주병마사(廣州兵馬使) 상주국(上柱國) 상장군(上將軍) 차안기(車安耆) 선조님, 조선조(朝鮮朝)의 적개공신(敵愾功臣) 연천군(延川君)강렬공(剛烈公) 차운혁(車云革) 선조님. 임난(壬亂)에 명(明)나라 도독(都督)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성(平壤城)의 수복(收復)에 대한 공적(功績)의 노포문(露布文)을 찬(撰)하여 천하문장(天下文章)으로 들난 오산공(五山公) 차천로(車天輅) 선조님 등 102위의 선조(先祖)님 위패(位牌) 배향봉안(配享奉安)하고 봉사(奉祀)하는 규모(規模)와 위풍(威風)을갖춘 면모(面貌)의 사당(祠堂)으로 발전(發展)하였다.---------이하 생략----------------------
3. 왕씨(王氏).차씨(車氏).류씨(柳氏)의 분파도(分派圖)|연안차씨
머무는바람 | 조회 6 |2011.02.05. 23:54 http://cafe.daum.net/jamorl/AKsB/19
|
|
|
|
|
|
|
|
|
|
|
|
|
|
|
|
|
|
|
|
|
| |||
|
得姓一世 |
|
二世 |
|
三世 |
|
四世 |
|
五世 |
|
六世 |
|
七世 |
|
八世 |
|
九世 |
|
十世 |
|
| |||
|
車無一 |
|
神乙(琳) |
|
夫起 |
|
惟典 |
|
茂正 |
|
介修 |
|
復 |
|
祖英 |
|
适 |
|
仁相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十一世 |
|
十二世 |
|
十三世 |
|
十四世 |
|
十五世 |
|
十六世 |
|
十七世 |
|
十八世 |
|
十九世 |
|
二十世 |
|
| ||
|
|
甲乘 |
|
自開 |
|
武基 |
|
升閣 |
|
公乃 |
|
輔傳 |
|
濟能 |
|
登國 |
|
殷甫 |
|
延廣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二一世 |
|
二二世 |
|
二三世 |
|
二四世 |
|
二五世 |
|
二六世 |
|
二七世 |
|
二八世 |
|
二九世 |
|
三十世 |
|
| ||
|
|
徽曼 |
|
智 |
|
溫伯 |
|
楯 |
|
烚 |
|
婁漢 |
|
盾階 |
|
段式 |
|
憲 |
|
渡江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三一世 |
|
三二世 |
|
三三世 |
|
三四世 |
|
三五世 |
|
三六世 |
|
三七世 |
|
三八世 |
|
三九世 |
|
|
|
| ||
|
|
儉夫 |
|
建甲 |
|
承穡 |
|
恭叔 |
|
振阜 |
|
茂先 |
|
普林 |
|
達 |
|
孝全(延安車氏得貫祖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孝金(文化柳氏得姓祖)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恭道 |
|
不傳 |
|
隆 |
|
王建(高麗 太祖) |
| ||||||||
|
|
|
|
|
|
|
|
|
|
|
|
| ||||||||||||
(開城王氏 始祖 元德大王) |
|
|
|
|
|
|
|
|
|
|
|
|
|
|
|
|
4. 의덕사(懿德祠)에 배향봉안(配享奉安) 된 득성조(得姓祖)님들의 약력(略歷)| 연안차씨
머무는바람 | 조회 10 | 2011.02.06. 00:03 3 http://cafe.daum.net/jamorl/AKsB/21
1 世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 :
공(公)의 본성명(本姓名)읕 황몽(王蒙)으로 중국(中國)의 옛 하(夏)나라에서 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亡命)하여 평양(平壤) 일토산(一土山) 아래 정착(定着)한 사신갑(姒辛甲)은 성(姓)을 왕씨(王氏)로 바꾸어 이름은 조명(祖明)으로 개명(改名)하고 단군조(檀君朝)에 치민장(治民長)을 역임(歷任)하신 왕조명(王祖明)의 58세 손자이시다.
----이하 중략------------
33 世 휘(諱) 승색(承穡) :
벼슬은 당(唐)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4년 기축(己丑 :서기809년). 즉(卽) 신라 40대 애장왕(哀莊王) 10년에 승상(丞相)이 되어 선고(先考)이신 승상(丞相)의 유지(遺志)에 따라 애장왕(哀莊王)을 극진(極盡)히 보필(輔弼)하였으며 배부인(配夫人)은 우씨(禹氏)이다. 왕숙(王淑)인 김언승(金彦昇)이 애장왕(哀莊王) 10년 기축(己丑 : 서기 809년)에 반역(返逆)하여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하고 김언승(金彦昇)은 자립즉위(自立卽位)하여 신라 41대 헌덕왕(憲德王)이 되었다. 그러나 좌상(左相) 차승색(車承穡)은 왕(王)로인정(認定)하지 않고 왕(王)을 시해(弑害)한 역적(逆賊)이며 친질(親姪)을 죽인 패륜아(悖倫兒)라 하며 헌덕왕(憲德王)을 시해(弑害)로 나라에 원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법통(法統)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공(公)의 큰 아들 벼슬 신라 사공(司空) 차공숙(車恭叔)과 함께 동지(同志)들과 모의(謀議)하여 예양(豫讓)의모략(謀略)을 본받아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이 수렵(狩獵)의 떠남을 엿보아 다리 밑에 복병(伏兵)한 궁수(弓手)로 시해(弑害)하고자 하였으나 이 계략(計略)을 아는 자가 헌덕왕(憲德王)에게 밀고(密告)함으로 이 계책(計策)이 누설(漏泄)되었다. 이에 헌덕왕(憲德王)이 공(公)의 부자(父子)를 체포(逮捕)하기 위하여 나라에 체포령(逮捕令)을 내리고 병리(兵吏)를 풀어 찾으니 공(公)의 부자(父子)는 요동백(遼東伯) 김반전(金盤傳)의 아들 김생(金生)인 생질(甥姪)의 집으로 둔적(遁迹)하여 피신(避身)하였다.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
彦昇)은 공(公)의 부자(父子)가 체포(逮捕)되지 못 함으로 이 부자(父子)를 체포(逮捕)하기 위하여 현상(懸賞)으로 금(金) 천근(千斤)과 식읍만호(食邑萬戶)를 걸어 놓고 공(公)의 부자를 찾으니 공(公)의 생질(生姪) 김생(金生)은 현상금(懸賞金)을 탐하여 외숙부자(外叔父子)를 밀고(密告)하고자 하였다. 김생(金生)의 충복(忠僕)이 김생(金生)의 계략(計略)을 미리 공(公)의 부자(父子)에께 알려 그날 밤 위험을 벗어나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아래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으로 둔적(遁迹)하여서 조모(祖母)의 성(姓)인양씨(楊氏)로 모칭(冒稱)하며 피신은거(避身隱居)하였다. 공(公)은모성(冒姓) 양씨(楊氏)의 양자(楊字)를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가성(假姓)으로 류씨(柳氏)라 정(定)하고 이름은 잣나무 숲에 깊이 은신(隱身)한다는 뜻을 담아 백자(栢字)를 택(擇)하여 백(栢)으로 개명(改名). 가성명(假姓名) 류백(柳栢)으로 하여 유주(儒州) 고을에 부두가(富荳家)로 이름 난 집에 고용(雇傭)살이로 피신(避身)하여 천명(天命)을 보존(保存)하게 된 것이다. 신라 34대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 : 서기 918년)에 왕건(王建) 태조(太祖)께서 고려조(高麗朝)를 개국(開國)한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고려태조(高麗太祖)의 특명(特命)으로 본성차씨(本姓車氏)로 109년만에 복성(復姓)을 한 것이다.
34 世 휘(諱) 공숙(恭叔)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사공(司空)이시며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의 변난(變亂)에 아버지이신 신라 좌상(左相) 차승색(車承穡)과 함께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한나라의 원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법통(法統)을 바로 세울 계략(計略)이 누설(漏泄)로 실패(失敗)하고 아버지와 함께 황해도(黃海道)로 둔적(遁迹)하여 아버지를 따라 본성명(本姓名)을 감추고 임시로 성명(姓名)을 류숙(柳淑)이라 하며 피신(避身)을 하게된 것이며, 공(公)의 친제(親弟)이신 차공도(車恭道)는 신라조(新羅朝)의 벼슬 사공(司空)이며 호(號) 미도(彌道)는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의 변(變亂)에 강남(江南= 고려의 강남도(江南道 : 지금평양남도)를 말함)에 들어 가 피신(避身)하면서 구성왕씨(舊姓王氏)로복성(復姓) 왕공도(王恭道)로 살게 되었으며 그의 증손(曾孫)이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은 고려개국(高麗開國)한 후 증조(曾祖)이신 왕공도(王恭道)님을 추숭칭호(追崇稱號) 고려국조(高麗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이라 하여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 : 서기918년)에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고려조(高麗朝)를 개국(開國)한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고려태조의 특명(特命)으로 가성명(假姓名) 류숙(柳淑)은 본성(本性)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본성명(本姓名)을 복원(復元)하였다.
35 世 휘(諱) 진부(振阜) :
본성씨(本姓氏)를 감추고 가성명(假姓名) 류진부(柳振阜)로 세상(世上)을 속여 사는 처지(處地)라 은사(隱士)로 유주(儒州)에서 가성류씨(假姓柳氏)를 3세(世)로 이어 받아서 성명(姓銘)을 류진부(柳振阜)로 세상(世上)을 등지고 살았으며 배부인(配夫人)은 조씨
(趙氏)이며 생일남(生一男)하였으니 이름 무선(茂先)이시다. 서기 918년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에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나라를 세운 후 특명(特名)으로 가성류씨(假姓柳氏)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復姓)케 하여 가성명(假姓名) 류진부(柳振阜)로 세상을 살아오신 분을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復姓)하게 되어 차진부(車振阜)로 성명(姓名)을 바로잡게 된 것이다.
36 世 휘(諱) 무선(茂先) :
공(公)은 해평산장(海平山長)이라 칭(稱)하며 가성류씨(假姓柳氏)를 4세(世)로 이어받아 성명(姓名)을 류무선(柳茂先)이라 하며 세상을 살았으며 배부인(配夫人)은 유씨(劉氏)이며 생일남(生一男)하였으니 이름 보림(普林)이시다. 그 후 서기 918년 신라 54대 경
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에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나라를 세운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태조(太祖)의 특명(特命)으로 가성류씨(假姓柳氏)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케 하여 가성명(假姓名) 류무선(柳茂先)으로 세상을 살아오신 분을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케 되어 차무선(車茂先)으로 성명(姓名)을 바로잡게 된 것이다.
37 世 휘(諱) 보림(普林) :
공(公)은 월흑산장(月黑山長)이라 칭(稱)하며 가성류씨(假姓柳氏)를 5세(世)로 이어받아 성명(姓名) 류보림(柳普林)으로 세상(世上)을 살았으며 배부인(配夫人)은 길씨(吉氏)이며 생일남(生一男)을 하였으니 휘(諱)는 해(海)이시다. 서기 918년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에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나라를 세운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태조(太祖)의 특명(特命)으로 가성류씨(假姓柳氏)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케 되어 차보림(車普林)으로 성명(姓名)을 바로 잡게 되었다.
38 世 휘(諱) 달(達) :
묵방사기(墨坊寺記)에 말하기를 공(公)은 모성류씨(冒姓柳氏)로 휘(諱)는 해(海)요 자(字)는 응통(應通) 호(號)는 아사(鵝沙)이며 배부인(配夫人)은 신라조(新羅朝)의 알지(閼智)의 후손(后孫) 김균(金稛)의 딸이며 생이남(生二男)과 생일녀(生一女)를 하였으니 맡아들 효전(孝全), 둘째 아들 효금(孝金)이며 딸은 고려조(高麗調)의 벼슬 삼중대광(三重大匡)이며 통합삼한.(統合三韓)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 윤신달(尹莘達)에게 출가(出嫁)하였다.
공(公)의 5대조(代祖)이신 신라(新羅) 애장왕조(哀莊王朝)의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께서 신라 39대 애장왕(哀莊王) 10년 기축(己丑 : 서기809년)에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의 변난(變亂)에 헌덕왕(憲德王)을 시해(弑害)로 나라의 원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법통(法統)을 바로 세울 모의(謀議)가 누설(漏泄)되어 실패(失敗)하고 둔적(遁迹)하여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아래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에 들어 가 조모(祖母)의 성(姓)을 딸아 모성양씨(冒姓楊氏)라 하며 은거(隱居)하였다.
그 후 양자(楊字)와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모성류씨(冒姓柳氏)로 6세를 전(傳)하여 공(公)에 까지 이어받게 된 것이다. 이때 공(公)은 삼한(三韓)의 제일호부(第一豪富)이며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께서 남정(南征)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 조선조(朝鮮朝)의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선생께서 조선 6대 단종왕(端宗王)의 어명(御命)을 받아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등 제현(諸賢)들과 함께 기술(記述)한
『차운암선생설원기』의 기록(記錄)에『차달(車達)은 장정(壯丁)을 려실(麗室)에 날로 헌납(獻納) 도하여 도웁고. 효전(孝全)은 왕사(王事)이 어려움을 당(當)하였을 때 흥원(興原)에 많은 속곡(粟穀)을 진대(賑貸)하였고 현능(顯陵)과 정사(定社)에 공(功)을 세웠고 나라를 위(爲)하여 수레를 판출(辦出)하여 계량(繼粮)을 싫어 남쪽 정벌(征伐)에 곡식의 운반(運搬)을 행하였더니 특별히 그의 아버지에 차씨(車氏)로서 세대(世代)를 이어라 달(達)로 이름을 하였다.』하였고,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은 나라를 세워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태조(太祖)께서는 차달(車達)에게 대승(大丞)을 제수(除授)하시고 통합삼한(統合三韓) 익찬벽상이등공신(翊贊壁上二等功臣)에 봉(封)하시고 특명(特命)의 말씀이『〔옛 차씨(車氏)를 생각하면 원래의 홍렬(弘烈)을 가히 잊을 수 없고. 근간(近間 =저간(這間))에 류씨(柳氏)로 모칭(冒稱=모성(冒姓))한 것을 또 그만두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시며 모성류씨(冒姓柳氏 =假姓柳氏)의 6세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하여 공(公)의 사성명(賜姓名)은 차달(車達)로 하시고 공(公)의 장자(長子)인 효전(孝全)은 조상(祖上)의 홍렬(弘烈)을 승습(承襲)케 하여 본성차씨(本姓車氏)를 계승(繼承)케 하시고 공(公)의 차자(次子) 효금(孝金)은 태조(太祖)의 특명(特命)으로 류씨(柳氏)로 사성(賜姓)하여 형제분(兄弟分)이 차류양성(車柳兩姓)으로 분성(分姓)하게 된 것이다.
-------------------------------------------------------
1 世 득관일세(得貫一世) 휘(諱) 효전(孝全) : (大丞公 車達의 長子)
자(字) 양운(良運) 호(號) 강촌(江村) 시호(諡號) 무열(武烈)이시며 벼슬은 대광(大匡)에 귀족(貴族)의 작위(爵位) 백(伯)이시며 고려개국(高麗開國)의 수공자(首功者)로 정사공신(定社功臣)에 봉(封)하고 태조왕건(太祖王建)은 차씨(車氏)의 묘예(苗裔)라 휘(諱) 효전(孝全)은 왕실종적(王室宗籍)에 입적(入籍)한 후 식읍천호(食邑千戶)를 염주(塩州 : 연안부(延安府))에 하사(下賜)를 받았다. 공(公)은 연안차씨(延安車氏)의 득관조(得貫祖)이시며 공(公)의 초휘(初諱)는 효생(孝生)인데 대승(大丞) 차달(車達)의 장자(長子)로 조상(祖上)의 홍렬(弘烈)을 승습(承襲)하고 생자(生字)에 한 획(劃)을 가(加)하여 전자(全字)로 하여 휘(諱) 효전(孝全)으로 하였다. 전자(全字)를 파자(破字)로 인왕(人王)이 되는 고(故)로 사인(邪人 : 사심(邪心)을 품은 사람)의 참설(讒說 : 거짓 꾸며서 남을 헐뜯는 말)로 화(禍)를 입었고 또 인왕(人王)의 불행(不幸)으로 참사(讖史 : 뉘우친 사기(史記))에 그의 행적(行跡)이 소멸(消滅)하였으나 현재(現在) 내사(內史) 서희(徐熙)가 찬집(撰集)한 가사(家史)에 지난 말을 바로 말 하였고, 복성(復姓)의 상세한 까닭은 정지상(鄭知常)이 찬집(撰集)한 서경야사(西京野史)에 있다. 조선(朝鮮) 단종(端宗)의 어명(御命)을 받아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이 기문(記文)을 찬술(撰述)하고 이 기문(記文)에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 보한재(保閒齋) 신숙주(申叔舟),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등 제현(諸賢)들이 교령(敎令)을 받들고 주해(註解)를 붙이고 유신석학(儒臣碩學)의 48인(人)의 응제시(應製詩)를 모아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선생께서 서문(序文)을 찬(撰)하여 엮은【차운암선생설원록】에 이르데 차달(車達)은 려실(麗室=高麗朝)에 장정(壯丁)을 날로 헌납(獻納)하여도우며 효전(孝全)은 왕사(王事)에 미고(靡盬)를 당하였을 때 흥원(興原=구월산 주변 지명)의 뭇 사람에게 식량(食糧)을 진대(賑貸 :재물을 베풀어 구제함)하였고 현능(顯陵)과 정사(定社)에 공(功)을 세웠고 나라를 위하여 수레를 판출(辦出 : 갖추어 구해냄)하여 계량(繼粮)을 싫어 곡식을 남쪽 정벌(征伐)에 운반(運搬)을 행하였더니 특별히 그의 아버지에게 차씨(車氏)로 세대(世代)를 잇게 하고 이름을 달(達)로 내렸다. 현능(顯陵)이란 고려시조 무덤의 이름이요 정사(定社)란 것은 나라를 세우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정함의 공(功)이다 신(臣) 최항(崔恒)은 교령(敎令)을 받들어 주석(註釋)함이라고 되어 있다.---------이하 생략---------
5.【柳車達】이란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연안차씨
머무는바람 | 조회 12 |2011.02.06. 02:17 http://cafe.daum.net/jamorl/AKsB/25
우리나라 관례상(慣例上) 성씨(姓氏)에 이름대신 호(號)를 붙여서 호칭(呼稱)하며 기록(記錄)한 것이 많이 있다. 예(例)를 들면 본성명(本姓名)이 한호(韓濩)인데 한석봉(韓石峰)으로 호칭(呼稱)하며 그렇게 기록을 하였다. 그래서 조선조(朝鮮朝)에 글을 쓰는 분들이 이름과 호(號)를 혼돈(混沌)하여 류해(柳海)를 류차달(柳車達)로 기록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柳海』의 경우(境遇)는 일반관례(一般慣例)에 따라『柳車達』로 호칭(呼稱)하거나 기록할 수 없는 연유(緣由)가 아래와 같이 있다.
첫 째 : 차자(車字)는 우리 차류양문(車柳兩門)의 원조(元祖)이신 왕몽(王蒙)께서 신라태조(新羅太祖) 박혁거세(朴赫居世)로부터 차씨(車氏)로 사성(賜姓)을 받으신 차씨(車氏)의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로부터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33세 차승색(車承穡)에 이르러 신라(新羅)의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한 헌덕왕(憲德王)을 시해(弑害)하여 왕실(王室)의 기강(紀綱)을 잡을 도모(圖謀)가 누설(漏泄)되어 황해도(黃海道) 유주(儒州)로 둔적(遯迹) 모성류씨(冒姓柳氏)로 하고 이름을 백(栢)으로 피신(避身)
6세 류해(柳海 :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의 직계손자(直系孫子)이다)에 이르러 모성류씨(冒姓柳氏)의 6세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復姓)하여 달자(達字) 사명(賜名)하였으며 득성조(得姓祖)로부터 대대손손(代代孫孫)이 이어 내려온 조상(祖上)의 혼지(魂志)와 충정(忠貞)이 담겨 있는 성자(姓字)로 가문(家門)을 상징(象徵)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손(子孫)이 성자(姓字)를 이름자로 쓸 수 없는 것이다. 만일 성자(姓字)인 차자(車字)를 이름자로 쓴다면 이것은 조상(祖上)과 가문(家門)에 모욕죄(侮辱罪)를 범(犯)하는 불효행위(不孝行爲)로 불공(不恭)의 중죄(重罪)를 짓는 것이다.
두번째 :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족보(族譜)를 살펴보면 고려조(高麗朝)에 국조(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을 추숭(追崇)된 왕공도(王恭道)는 신라(新羅) 애장왕조(哀莊王朝)에 좌승상(左丞相)을 지낸 차무일(車無一)의 33세 손자(孫子) 차승색(車承穡)의 차자(次子)차공도(車恭道)로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의 변난(變亂)에 강남(江南)으로 피신(避身), 옛 원조(遠祖)의 성(姓) 왕씨(王氏)로 복성(復姓) 개성명(改姓名)을 왕공도(王恭道)한 것이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께서 고려개국(高麗開國) 후 국조(國祖) 및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始祖)로 추숭(追崇)한 왕건태조(王建太祖)의 증조(曾祖)로 본성(本姓)이 차씨(車氏)인데 증조(曾祖)의 본성(本姓)인 차자(車字)를 신하(臣下)인 대승공(大丞公)의 이름자에 차자(車字)를 내려 줄 수 없는 것이며, 공신(功臣)인 대승공(大丞公)이 원덕대왕(元德大王)의 본성자(本姓字)를 이름자로 사용하면 원덕대왕(元德大王)을 능멸(凌蔑)하는 역적(逆賊)의 죄인(罪人)이 되는 것이다.
셋 째 : 연안(延安) 차씨(車氏)의 득관조(得貫祖) 차효전(車孝全)의 친제(親弟)인 휘(諱) 효금(孝金)인데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고려를 개국(開國)한 후 모성류씨(冒姓柳氏)의 6세를 본성(本姓)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면서 대승공(大丞公)에게 복성명(復姓名) 차달(車達)로 내리고 휘(諱) 효금(孝金)에게 류씨(柳氏)로 사성(賜姓)하였는데 조상(祖上)과 가문(家門)을 상징(象徵)하는 차씨(車氏)의 위에 류자(柳字)를 올려 복성명(復姓名)인『車達』을 사명(賜名)으로 날조(捏造)하여『柳車達』이라 하는 것은 조상(祖上)과 종가(宗家)를 능멸(凌蔑)하고 친형(親兄)의 후손(後孫)인 연안(延安) 차문(車門)을 모욕(侮辱)하는 처사(處事)라 용납(容納)할 수 없는 것이다.
넷 째 :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류씨(柳氏)로 모칭(冒稱)한 류백(柳栢 :一云 柳穡)으로부터 류해(柳海)까지 조상(祖上)의 성(姓)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을 시키고 류해(柳海)는 고려개국(高麗開國)의 공신(功臣)이므로 사명(賜名)을 달(達)로 하여 성명(姓名)이 차달(車達)인 것을 고려(高麗)가 멸망하고 조선개국(朝鮮開國)한 초기(初期)에 하륜(河崙)이 운암공(雲巖公) 차원부(車原頫)를 무고(誣告)하여 왕자(王子)의 난(亂)에 연루(連累)케 하여 역적누명(逆賊陋名)으로 차문(車門)이 적족피화(赤族被禍)로 차문(車門)이 합문몰락(闔門沒落)의 기화(奇禍)로 류문(柳門)에서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을『柳車達』로 날조(捏造)하여 대승공(大丞公)의 성(姓)은 류씨(柳氏)이며 사명(賜名) 차달(車達)로 고려태조(高麗太祖)가 내렸다 하여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유생(儒生)들이 글을 쓰면서 이렇게『柳車達』로 기록(記錄)하였다 사료(思料)되나 이것은 인륜사회(人倫社會)에 큰 오류(誤謬)를 범(犯)하는 처사(處事)이며 차문(車門)과 류문(柳門)의 선대조상(先代祖上)과 가문(家門)을 능욕(凌辱)하고 고려국조(高麗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숭(追崇)된 왕공도(王恭道)의 본성명(本姓名)이 차공도(車恭道)인데 원대왕(元德大王)의 본성차자(本姓車字)를 그 나라 공신(功臣)이 이름의 글자로 쓴다면 이는 원덕대왕(元德大王)과 고려조(高麗朝)를 능멸(凌蔑)하는 역적행위(逆賊行爲)가 됨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섯째 : 근대(近代)에 와서 우리 차문(車門)의 선대조상(先代祖上)의 행적(行蹟)을 기록한 문헌(文獻) 및 족보(族譜)를 살펴보면 우리차문(車門)은 고려개국(高麗開國)의 공신후예(恭臣後裔)로 왕건태조(王建太祖)는 차문묘예(車門苗裔)인 인연(因緣)으로 교목세
가(喬木世家)로 려말(麗末)까지 잠영세가(簪纓勢家)로 계승(繼承)하였으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조(高麗朝)가 멸망(滅亡)하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초(初)에 적족재화(赤族災禍)로 합문두적(闔門遯迹)하여 숨어 살면서 세인(世人)들은 이씨조선(李氏朝鮮)을 아조(我朝)라 불렀지만 우리 차문선대(車門先代)들은 이씨조선(李氏朝鮮)이라 호칭(呼稱)하여 온 것을 보아도 우리 차문후예(車門後裔)들은 고려조(高麗朝)를 능멸(凌蔑)하고 욕(辱)되게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복성명(復姓名)으로 성씨(姓氏)는 차씨(車氏) 휘(諱)는 달(達)로 사성명(賜姓名)한 차달(車達)을 사명(賜名) 차달(車達)이라 하여 대승공(大丞公)의 차자(次子) 효금(孝金)에게 왕건태조(王建太祖)가 사성(賜姓)한 류자(柳字)를 성씨(姓氏)하여【류차달(柳車達)】이란 성명(姓名)을 사용함은 불가(不可)함을 알면서 차문(車門)의 옛 보첩(譜牒) 및 문헌(文獻)에【류차달(柳車達)】로 기록된 것은 차문(車門)이 역적누명(逆賊陋名) 휘말려 조선조(朝鮮朝)에서 서인(庶人)으로 전락(轉落)하여 힘없이 숨어 살면서 시대적여건(時代的與件)에 따라 불가피(不可避)한 사정(事情)으로 선대(先代)들이 류문(柳門)의 보첩(譜牒)과 문헌(文獻)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 잘못된 내용(內容)을 탓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引用)하여 기록해 온 것은 문맥(門脈)을 보존(保存)하는 차원(次元)에서 세상(世上)을 속이며 차문(車門)의 후예(後裔)들이 좋은 세상(世上)이 오면 왜곡(歪曲)돤 차문(車門)의 보첩(譜牒) 및 문헌(文獻)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보첩(譜牒)과 문헌(文獻) 등 여러 곳에 암시(暗示)하여 진실(眞實)들을 감추어 기록(記錄)을 남겨 오늘날 까지 전하여 온 것에 차류양문(車柳兩門)은 유의(留意)해야 할 것이다. 이제 차류양문(車柳兩門)의 후예(後裔)들은 조상(祖上)과 가문(家門)을 욕(辱)되게 왜곡(歪曲)된 사적(史籍)을 바로잡는 일들을 근대(近代)에 주워진 사명(使命)으로 여기고 가문사(家門史)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며 특히 차문(車門)의 후손(後孫)들은 선대(先代)들이 알면서도 올바로 기록하지 못하고 왜곡(歪曲)된 기록을 인용(引用)해야 했던 시대적여건(時代的與件)의 수모(受侮)의 한(恨)을 풀어 지하(地下)의 선대(先代)들이 영면(永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찬문(車門)의 자존심(自尊心)을 짓밟고 모욕적(侮辱的)인 왜곡(歪曲)된 내용(內容)의 보첩문헌(譜牒文獻)을 과감(果敢)히 바로잡아 정리(整理)해야 하고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대승공(大丞公)에게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사명(賜名) 달(達)로 하였으니 성명(姓名)을 차달(車達)로 바로 고쳐 사용(使用)하고 모순(矛盾)된【류차달(柳車達)】은 사용(使用)하지 않아야 한다.
여섯째 :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대승공(大丞公)에게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내린 성명(姓名) 차달(車達)의 “차자(車字)는 성차”로 곧 차자(車字)는 성(姓)이란 뜻이며, “달자(達字)는 연결할 달”로 연결한다는 뜻이라 곧 차씨(車氏)로 연결한다는 뜻이 됨으로 곧 이것은 대승공(大丞公)께서 본성(本姓)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연결한다는 뜻이 된다. 이것을 뒷받침 하는 내용은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선생이 기술(記述)한『車雲巖雪寃記』의 응제시편(應製詩編)을 살펴보면 이예장(李禮長)의 시주 (詩註)에“말은 비록 양식을 운반한 공으로 차달(車達)이란 성명을 내렸다 하나 그 근본의 뜻은 곧 조상의 본성의 옳음을 잊지 않게 한 것이다.” 또 “그 아들 효전(孝全)은 글자를 생자(生字)로 특별히 성명(姓名)에 내리지 않고 이것을 다른 전(全)으로 한 뜻은 그 맏이로 조상(祖上)의 홍열(弘烈)을 승습(承襲=承繼)케한 것이다.” 여기에 승습(承襲)이란 두 글자는 승계(承繼)와 같은 뜻인데 이것은 시조(始祖)로부터 한 대(代)도 끊어짐 없이 이어감을 말하는 것이며 중간에 끊어진 사실이 있다면 이 승습(承襲)이란 말을 쓸 수 없는 것이니 이 승습(承襲)의 두 글자는 모성류씨(冒姓柳氏)의 6세는 본성(本姓)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차씨(車氏)의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함을 입증(立證)하고 있음으로 대승공(大丞公)의 성명(姓名)은 차달(車達)이고【류차달(柳車達)】은 조작(造作)된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므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일곱째 : 1769년 영조(英祖) 45년 기축(己丑)에 간행(刊行)한 보첩(譜牒)의 서문(序文)을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홍문관대제학(行 弘文館大提學) 장수인(長水人) 황경원(黃景源)이 찬술(撰述)한 서문(序文)을 살펴보면 “승색(承穡)으로부터 오세(五世)에 이르러 차달(車達)은 왕씨(王氏)를 도우셔 큰 공(功)이 있어 차씨(車氏) 복성(復姓)하였고 차달(車達)의 아들 효전(孝全)”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句節)의 차달(車達)이란 것은 즉 복성(復姓)은 차씨(車氏)요 이름은 달(達)이며 그 차달(車達)의 뜻을 풀이하면 차씨(車氏)로 연결(連結=承繼)한다는 것이며 대승공(大丞公)은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승계(承繼)하라고 내린 성명(姓名)이 차달(車達)이란 것을 확실(確實)하게 뒷받침 하고 있는 증거(證據)인데 대승공(大丞公)께서 남정(南征)할 때 향궤(餉饋)를 수레로 운반하여 영달(榮達)했다는 뜻으로 차달(車達)로 사호(賜號)했다고 주장(主張)을 하면서【류차달(柳車達)】라 기록(記錄)하고【류차달(柳車達)】이 류씨(柳氏)의 시조(始祖)라 하고 고려태조(高麗太祖)로부터 류씨(柳氏)로 사성(賜姓)을 받은 류효금(柳孝金)을 류씨이세(柳氏二世)라 하는 것은 류씨(柳氏)의 시조(始祖)인 류효금(柳孝金)을 모욕(侮辱하고) 역대조상(歷代祖上)과 가문(家門)을 능멸(凌蔑)하는 오류(誤謬)를 범(犯)하는 것이다.
여덟째 : 조선(朝鮮)에 단종(端宗)의 명(命)을 받아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인 취금헌(醉琴獻) 박팽년(朴彭年)이 기술(記述)한 기문(記文)과 유신(儒臣)들의 응제시(應製詩)를 모아서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께서 서문(序文)을 찬(撰)하여 편집(編輯)한【차운암설원록】을 살펴보면“차달(車達)은 장정(壯丁)을 려실(麗室 : 고려 조정)에 나날이 운송(運送)하는데 도우고, 효전(孝全)은 왕사(王事)에 미고(靡盬)를 당하였을 때 흥원(興原 :구월산 주변)에 많은 속곡(粟穀)으로 진대(賑貸 : 구휼(救恤)를 배품)하였고, 현릉(顯陵 : 고려 시조 묘호(墓號))과 정사(定社 : 개국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정함의 공(功)임)의 공(功)을 세웠고, 타라를 위하여 수레를 판출(辦出 : 변통하여 갖추어 냄)하여 계량(繼粮 : 한 해에 농사지은 곡식으로 한 해 동안 양식을 이어 감)을 실어서 미곡(米穀)을 정남(征南 : 남쪽을 침)에 옮김을 실행하여서 특별히 그 아버지에게 차(車)와 달(達)로 한 것은 세적(世績 : 세계를 이어감)의 성명(姓名)으로 내린 것이다.” 라 하였는데 이 또한 차달(車達)은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이름은 달(達)로 내린 것이 확실(確實)한데 조상(祖上)과 가문(家門)을 상징(象徵)하는 성씨(姓氏)인 차자(車字) 위에 류자(柳字)를 올려놓고 류차달(柳車達)이라 하는 것은 조상(祖上)을 능멸(凌蔑)하는 불공(不恭)의 중죄(重罪)를 범(犯)하는 만고(萬古)에 불효(不孝)이다.
6. 假姓 柳氏라고 부르는 理由|연안차씨
머무는바람 | 조회 11 |2011.02.06. 09:43 http://cafe.daum.net/jamorl/AKsB/26
우리 차류(車柳) 양문(兩門)의 역사(歷史)를 올바르게 시정(是正)하고 정리(整理)하여 우리 후손(後孫)에게 물려주는 것이 조상(祖上)을 올바르게 모시는 도리(道理)라 생각한다.
우리 차문(車門)은 고려(高麗)가 망하면서 멸족지화(滅族之禍)의 수난(受亂)을 당(當)하고 모든 문헌(文獻)이 소실(燒失)되어 사적(史蹟)의 소멸(消滅)로 인하여 차류 양문(車柳 兩門)의 역사(歷史)가 많은 부문(部門)에서 왜곡(歪曲)되어 오늘날까지 전(傳)하여 왔다.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면서 조선조(朝鮮朝)에 역적(逆賊)으로 몰려 서민(庶民)으로 전락(轉落)되었으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모든 수모(受侮)를 참으면서 살아왔다.
일부 몰지각(沒知覺)한 자들이 역사(歷史)를 왜곡(歪曲)하여 오늘날까지 전(傳)하여 오고 있다. 그러나 우리 차문(車門)의 선조(先祖)들께서는 좋은 세상(世上)이 오면은 우리의 문사(門史)를 바로 잡으라고 암시(暗示)하는 선대(先代)들의 정신(情神)이 우리 문헌(文獻) 곳곳에 담겨 있다.
우리는 이것을 근거(根據)로 하고 차원부 설원기(車原 雪寃記)와 설원록(雪寃錄)을 참고(參考)로 하여 우리의 역사(歷史)를 바로 잡고 고려(高麗) 시대(時代)의 우리 가문(家門)의 위상(位相)을 회복(回復)하고 조상(祖上)을 올바로 모시는 도리(道理)를 다하여야 한다.
우리 모두는 사심(私心)을 버리고 공정(公正)한 마음으로 우리 양문(兩門)의 역사(歷史)를 바로 잡아 후손(後孫)에게 전(傳)함이 조상(祖上)을 올바로 모시는 일이다. 이러한 마음으로 고서(古書)의 문헌(文獻)과 사가(史家)들의 말을 인용(引用)하여 가성(假姓) 류씨(柳氏)라고 한 이유(理由)를 설명(說明)하고자 한다.
첫째 우리 나라 사가(史家)의 말에 의하면 옛날 신라(新羅) 고려(高麗) 시대(時代)는 국법(國法)에 왕(王)이 성(姓)을 하사(下賜)하지 않으면 성(姓)으로 인정(認定)하지 않았으며 나라에 공(功)을 세우고 벼슬을 하게되면 나라의 왕(王)이 성(姓)을 하사(下賜)하여 인정(認定)을 받기 때문에 옛날 이 시대(時代)는 성(姓)없는 백성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 차씨(車氏)는 신라(新羅) 태조(太祖)로부터 차씨(車氏)의 성(姓)을 사성(賜姓)받아서 내려 오다가 신라(新羅) 애장왕조(哀莊王朝)의 좌상(左相)이신 차승색(車承穡)께서 애장왕(哀莊王)을 살해한 김언승(金彦昇 : 헌덕왕(憲德王)을 죽이려다 계략(計略)이 누설(漏泄)되어 헌덕왕(憲德王)이 시상(施賞)으로 금천근(金千斤)과 식읍만호(食邑萬戶)를 내 걸고 체포령(逮捕令)을 선포(宣布)하니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께서 유주(儒州) 구월산(九月山)으로 둔적(遁迹)하시어 조모(祖母)의 성(姓)인 양씨(楊氏)를 스스로 모칭(冒稱 : 남의 성(姓)을 자기 성(姓)으로 거짓 꾸며 쓰는 것을 말함)하던 것이 가성(假姓) 류씨(柳氏)로 변(變)하여 내려 오면서 차승색(車承穡)께서 본 성명(本 姓名)을 감추고 가성명(假姓名) 류백(柳栢「穡으로 한적이 없음」)으로 사용(使用)하시면서 살아 온 것이 6세(世)인 해 선조(先祖)까지 가성(假姓)을 사용(使用)한 것이다.
류백(柳栢)으로 가성명(假姓名)을 사용(使用)하면서 류해(柳海)까지 내려와도 나라에서 사성(賜姓)받은 사실(事實)이 없음으로 이 성(姓)은 가성(假姓)이라 하는 것이며 고려(高麗) 태조(太祖)로부터 효금(孝金) 선조(先祖)께서 사성(賜姓)을 받은 문화(文化) 류씨(柳氏)를 가성(假姓)이라 한적이 없다. 류백(柳栢)으로부터 류해(柳海)까지는 가성(假姓)임이 옳은 표현(表現)이다.
두 번째 고려(高麗) 태조(太祖)께서 논공책록(論功策祿)하던 날 가성(假姓) 류해(柳海「本姓 車海」)선조(先祖)에게 조상(祖上)을 잊지 말라고 차달(車達)이란 호(號)를 하사(下賜)하시면서 특명왈(特命曰)
“念昔車氏之弘烈旣不可忘也요 這間柳氏之冒稱又不可廢也라”
번역하면 “특별히 명하여 말씀 하시기를 옛 차씨(車氏)를 생각하면 원래의 홍열(弘烈 : 조상들이 쌓아 놓은 공덕을 말함)을 가히 잊을 수 없고 그간 류씨로 모칭(冒稱 : 가성(假姓)과 같은 남의 성(姓)을 거짓꾸며 써오는 것을 말함)한 것을 또 폐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하시면서 장자(長子) 효전(孝全)은 조상(祖上)의 구성(舊姓) 차씨(車氏)로 승계(承繼)하고 차자(次子) 효금(孝金)은 잉위(仍爲) 류씨(柳氏「그대로 류씨로 하라」)라 하시면서 류씨(柳氏)로 명사(命賜)하였다. 비로소 류씨(柳氏) 성(姓)이 이 세상(世上)에서 인정(認定)을 받고 존재(存在)하여 내려오는 것이 문화(文化) 류씨(柳氏)이다. 이 이전(以前) 류백(柳栢)으로부터 류해(柳海)까지는 사성(賜姓)받지 않았으니 가성(假姓)이 확실(確實)하다.
세 번째 우리 문헌(文獻)과 문화(文化) 류씨(柳氏)의 문헌상(文獻上) 장자(長子) 효전(孝全)은 조상(祖上)의 구성(舊姓) 차씨(車氏)로 승습(承襲)하라 하였는데 이 승습(承襲)은 승계(承繼)하라는 말이며 승계(承繼)라 하는 것은 처음부터 끊어지지 않게 이어 가라는 말이며 중간(中間)에 끊어지면 이것은 승계(承繼)라 할 수 없는 것이므로 이 승계(承繼)란 말은 가성(假姓)을 사용(使用)한 류백(柳栢) 선조(先祖)로부터 류해(柳海) 선조(先祖)까지 구성(舊姓)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라는 뜻인데 문화(文化) 류씨(柳氏)의 문헌(文獻)이 이론상(理論上) 전후(前後)가 맞지 않는 논리(論理)로 꾸며져 있다. 그리고 차자(次子) 효금(孝金)은 잉위(仍爲) 류씨(柳氏)라 하였는데 이것은 가성(假姓)을 써 오던 것을 없앨 수 없으니 그대로 류씨(柳氏)로 하라 한 것인데 이것을 오역(誤譯)하여 승계(承繼)란 용어(用語)를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잉(仍)”자를 승계(承繼)란 뜻으로 풀이 하여 문헌(文獻)과 문중사(門中史)를 왜곡(歪曲)하고 똑같은 조상(祖上)인데도 가성(假姓)을 사용(使用)한 류백(柳栢) 선조(先祖)로부터 보림(普林) 선조(先祖)까지는 조상이 아닌 것처럼 하고 마지막 가성(假姓)을 사용(使用)한 류해(柳海) 선조(先祖)를 류차달(柳車達)로 기록(記錄)하여 문화(文化) 류씨(柳氏)의 시조(始祖)라 하는 것과 또 조상(祖上)의 성자(姓字)를 자손(子孫)이 이름자로 하는 것은 조상(祖上)에 대한 불효(不孝)한 행위이며 큰집인 차문(車門)을 무시한 처사라고 볼 수밖에 없다. 고려(高麗)의 개국(開國)의 공신(功臣)인 원덕대왕(元德大王)의 본성(本姓)이 차씨(車氏)인데 차자(車字)로 이름 자(字)로 쓴다면 이것은 원덕대왕(元德大王)을 욕되게하는 불충(不忠)의 결과(結果)가 되는 것이니 당연히 시정(是正)되어야 한다.
다시는 이러한 오류(誤謬)를 범(犯)하지 마시고 시정(是正)하여 같은 혈통간(血統間)에 정감(情感)을 기원(祈願)한다.
끝으로 고려(高麗) 태조(太祖)로부터 사성(賜姓)을 받기 이전(以前)의 류씨(柳氏) 성(姓)을 가성(假姓)이라 한 것이며 고려(高麗) 태조(太祖)께서 사성(賜姓)한 문화(文化) 류씨(柳氏) 성(姓)을 가성(假姓)이라 한 적이 없음을 재삼(再三) 강조(强調)한다.
'문화류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원부설원기 문제 (0) | 2012.08.10 |
---|---|
[스크랩] 문화류씨 통사(文化柳氏 通史) (0) | 2012.08.08 |
연안차씨 신라시대 족보탐색 : 그리고 문화류씨를 동원으로 엮은 근거 탐색 (0) | 2012.07.25 |
차효전이 등재된 최초 류문 족보 1976년 병진보 (0) | 2012.07.14 |
하정공파 광주종보 7월호 (0) | 2012.07.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