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문화류씨 선계 고찰

ryu하곡 2011. 5. 26. 23:13

문화류씨 선계(先系) 고찰

- 채하 류주환 (彩霞 柳朱桓, 대승공 36세손)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신소재공학부 교수

 

요약

    지금까지 문화류씨 시조 대승공 류차달의 선계에 대해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黃帝)에서 비롯되었다는 황제 연원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황제 연원설의 핵심은 문화류씨와 연안차씨가 같은 근원에서 나왔다는 류-차 동원설이다. 이 황제 연원설은 임진왜란 전에 등장한 후 지난 400여년동안 사실로서 믿어져 왔는데, 내용 상 크게 세 가지 계보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차원부설원기”에서 나온 계보이며 둘째는 류지원의 글에서 나온 류용수의 계보이며 셋째는 차헌기가 전한 왕배조의 강남보이다. 이들은 그 핵심이 류-차 동원설인데, 차씨가 내려오다가 류씨로 성을 바꾸었고 대승공에 이르러 그 맏아들이 다시 차씨가 되고 둘째 아들은 류씨로 내려왔다는 내용이다.
    세 계보 중 강남보가 가장 완벽하며, 현재의 문화류씨 계보는 강남보를 답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강남보는 19세기의 조작임이 확실히 증명되어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다. 그리고 류용수의 계보는 강남보와 같이 그 세상에 드러난 과정이 모호하여 신빙성이 떨어지고, 차원부설원기는 문헌비평을 통해서 고찰하면 최소한 후대에 변경된 문헌임을 증명할 수 있다. 다만 세 계보의 핵심인 류-차 동원설에 대한 고려시대의 문헌들이 설원기에 언급되고 있어 주목되는데 설원기가 쓰일 당시에도 그 존재가 불투명했음이 드러나며 그 내용을 알 도리가 없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전무하다.
    한편 이들 계보들을 역사적 관점에서 고찰하면 최소한 정사(正史)와 어긋나지 말아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또한 대승공의 사적을 살펴보면 현존하는 여러 고려시대 금석문과 사료들을 통해서도 그 역사적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측면이 있는 판국에 대승공 사후 5-600년 이후에 세상에 나타난 출처가 모호한 문헌들이 명확히 대승공 선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아 명백히 후대의 조작이라 생각된다.
    여기서는 가능한 한 많은 기본 사료들을 제시하고 엄밀하게 그것들에 입각해서 황제 연원설을 비판하고 대승공과 그 선계에 대해 고찰하여 보았다. 그리고 연안차씨들이 대승공 관련하여 주장하는 바들을 반박하였다.
    이러한 사료를 바탕으로 한 실증적인 역사적인 관점에서 얻어진 종합적인 결론은 황제 연원설과 류-차 동원설의 확실한 부정이다. 곧 대승공 류차달의 선계는 논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사료가 존재하지 않으며 대승공의 아들은 류효금 한 사람 뿐이며 차효전은 문화류씨와는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목차

    0. 서론
    I. 문화류씨 상계에 대한 설들
        1. 황제 연원설
        2. 대승공 시조론
    II. 문헌의 검토
        1. 류공권 묘지명   2. 류보발 묘지명   3. 권부 처 류씨 묘지명   4. 류돈 묘지명   5. 흥률사갑자중수양상소기서   6. 조선왕조실록, 류량의 졸기   7. 영락보 서문   8. 고려사   9. 차원부설원기   10. 충장공림묘지문   11. 신증동국여지승람   12. 대승공차달묘갈문   13. 문화류씨 세보 “가정보”   14. 대동운부군옥   15. 묵방사 완복문   16. 류지원의 글   17. 차식의 신도비명   18. 씨족원류   19. 묘갈개수문   20. 차헌기의 기록   21. 신도비명   22. 기타
    III. 원파록 검토와 황제 연원설 비판
        1. 원파록 내용 종합
        2. 기사보(류처후)의 토론
        3. 현재의 원파록 기자의 추가 토론
        4. 지금까지 나온 계보들에 대한 종합 검토
        5. 원파록 비판
            (1) 총론   (2) 강남보 위조설   (3) “차원부설원기”와 “대동운부군옥” 등의 문헌 관련
    IV. 역사에서 본 문화류씨 선계 문제
        1. 대승공의 존재 - 개국공신; ‘차달’이라는 이름
        2. 대승공 이야기의 변천
        3. 대승공
        4. 대승공의 선계
        5. 대승공의 후계
    V. 연안차씨들의 주장과 반박
    VI. 결론

 
0. 서론

성(姓)이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핏줄이란 여성을 생각하면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필자는 그래서 성이란 무형의 어떤 가치를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불충분하지만 과거와의 연결고리이며 천의 드러나는 씨실이다. 여성들이 드러나지 않게 날실로 짜서 이루어내는 천이 바로 세상이다. 성(姓)의 불완전성은 지금으로서는 극복하기에 쉽지 않아 보이지만 결국 보다 합리적인 방향으로 바뀌어 갈 가능성도 있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존재하기 때문에 성(姓)도 존재한다. 그러나 성(姓)이 인간을 지배할 수는 없는 일이며, 그 어떤 혈연과 관계의 개념도 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데 있어 도움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역사적 사실 혹은 진실은 참으로 파악하기 어렵다. 누군가가 당시에 살아서 글을 남겼고 그 글이 그 사람이 쓴 진본임이 밝혀진다면, 이 경우에도 역시 그 기술(記述)에 왜곡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되겠지만, 그래도 나은 편이다. 어떤 권위를 갖고 쓰인 역사서나 문서들도, 이 경우 역시 왜곡의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지만, 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정사(正史)에 기록될 만한 사건들은 그 숫자에 있어서 제한이 있었고 그 기록들 역시 그 상세함에 있어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역사는 정사라 해도 그 사료(史料)와 재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집안의 역사는 정사의 기록에 도움을 받는 것이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가승(家乘: 직계조상에 대한 간단한 기록), 족보, 비문(碑文), 집안에 내려오는 자료들과 여기저기 문헌들에 들어있는 내용들을 간추려서 역사로 삼는다. 그런데 이런 기록들은 대부분 당시에 쓰인 경우보다 한참 후대에 내려와서 쓰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옛날 기록이라는 것들은 대개 손으로 직접 쓴 것들이 많아서 이본(異本)들이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목판이나 활자로 찍어낸 문헌들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과거에 집안의 내력이나 족보나 집안의 기록들을 부풀리거나 조작하는 일도 많이 자행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고려시대 전만 해도 성씨가 별로 없었다가 지금은 모두 성씨가 있고, 조선 초기에 양반이 전국민의 몇 %에 지나지 않았다가 조선 말기에 대부분이 양반에 속했다. 성씨의 변경을 포함한 신분의 변경이 조선시대 말기까지 심하게 이루어져 왔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옛 문헌들을 살필 때는 여러 사항들을 감안하여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면 문화류씨는 가문사(家門史)가 비교적 잘 유지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고려사의 열전에도 나오는 역사적 인물인 류공권(1132-1196; 대승공 7세손)과 그의 손자인, 무신정권에서 왕권을 회복시킨 류경(1211-1289)에 이르러 대단한 문벌(門閥)을 이루어 이것이 조선시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진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찍이, 지금은 서문만 남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인정받고 있는 영락보(永樂譜, 1423년 세종 5년)와 그 다음의 문화류씨 족보인, 사계(斯界)에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가정보(嘉靖譜, 1562년 명종 17년; 10권 2204 페이지)가 만들어져 가문의 역사가 정립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여러 성씨들의 가계의 기록들이 있었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본격적인 체재를 갖춘 족보로서의 효시는 영락보라고 인정받고 있다.)

여기서는 우선 문화류씨 상계에 대해 대립되는 두 설을 요약하고, 상계에 대해 기술되어 있는 내려온 문헌들을 시대에 따라 살펴본 다음, 그 각각의 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결론을 내어 보았다. 이하에서 문화류씨의 시조 류차달을 대승공으로 호칭했다.

 
I. 문화류씨 상계에 대한 설들

문화류씨 상계에 대한 설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 다음 두 설로 모아진다. 여기서 우선 다음 논의를 위해 간단하게 그 내용을 알아본다.

1. 황제 연원설(黃帝 淵源說)

현재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 황제 연원설이다. 곧 문화류씨가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黃帝)에서 시작되었으며, 그의 성씨인 희(姬)씨에서부터 사([女以])씨-왕(王)씨-차(車)씨를 거쳐 류씨가 되었으며, 대승공이 두 아들이 있어 그 첫째 아들이 연안차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400여년전 임진왜란을 전후해 문화류씨들에게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한 설이며, 따라서 태생적 한계가 큰 주장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유학적인 사고방식과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가 강화되면서 믿음의 수준으로 성장했다. 여기에는 문화류씨 뿐만 아니라 연안차씨와 개성왕씨의 선계에 대한 주장이 포함되어 있어 그들에게도 받아들여져 왔으며, 또한 조선시대 후반에 사문서뿐만 아니라 관에서 제작한 문헌들에도 사실로서 수록되기에 이르렀다.

2. 대승공 시조론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대승공에 관한 기술(記述)에 대해서도 그 역사적 진실에 대한 논란이 있을 수 있다. 더구나 대승공의 아들로 알려진 효금(孝金)과 그 아래 몇 분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럼에도 대승공의 실재를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도 확실히 존재한다. 이런 사실들은 현재 역사적으로 그 실체를 희미하게나마 파악할 수 있는 가장 윗대의 선조가 대승공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황제 연원설은 실질적 시조를 황제로 설정하는 것인데, 그에 반해서 대승공 시조론은 문화류씨의 가문사의 기록이 대승공에서만 시작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것은 보다 엄밀한 문헌비평적 방법론에 입각한 묘사를 준다. 그리고 대승공 이상의 선조에 대한 사항은 추정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만들며, 또한 연안차씨의 시조 차효전이 대승공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비록 기록에 남지 않았다 해도 시조의 조상은 반드시 있었을 것인데, 그에 대해 정황적인 논의들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실제 계보를 이을 수 있는 경우로만 국한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II. 문헌의 검토

현재 문화류씨 족보에는 원파보(元派譜)가 실려 있는데, 류처후(柳處厚; 대승공 21세손)가 편찬한 기사보(己巳譜, 1689년, 숙종 15년)에 처음 등장한 원파보에 19세기 전반에 등장한 강남보(江南譜, 1812년)라는 것이 합해져서 형성된 것이다. 기사보의 원파보는 다시 차원부설원기의 내용과 류용수의 계보가 합해져 있다. 여기서 이들을 포함하여 대승공과 그 선계를 다루고 있거나 관련이 있는 문헌과 사료들을 가능한 한 연대순으로 살펴본다.

1. 류공권(柳公權) 묘지명

* 년대: 명종 26년, 1196년
* 소재: 국립중앙박물관
* 류공권: 1132-1196. 고려시대의 문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름.
* 지은이: 미상.
* 발췌: 공은 이름은 공권(公權)이고, 자는 정평(正平)이며, 성은 류씨(柳氏)로, 시령(始寧) 사람이다. 증조 노일(盧―)은 검교대장군 행산원(檢校大將軍 行散員)이고, 조부 보춘(寶春)은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이며, 아버지 총(寵)은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이며, 어머니는 쌍□현대군 이씨(雙□縣大君 李氏)이다.
    公諱公權字正平姓柳氏始寧人也 曾祖諱盧―檢校大將軍行散員
    祖父諱寶春檢校少府少監 考諱寵檢校少府少監 비曰雙□(*1)縣大君李氏
    *1. 족보에 城으로 나옴. 비 = [女比]

2. 류보발(柳甫發) 묘지명

* 년대: 충혜왕 1년, 1340년
* 출처: “가정집(稼亭集) 11”
* 류보발: 1304-1340. 대승공 12세손.
* 지은이: 이곡(李穀, 1298-1351). 호 가정(稼亭). 이제현의 문인.
* 발췌: 유주류씨(儒州柳氏)로 (고려)개국의 위업을 도와 준 이가 있는데 그 후 복록이 이어지고 덕이 펴져서 대대로 어질고 훌륭한 사람이 나왔다. ...
    명(銘)하여 이른다. 류씨(柳氏)의 흥성은 나라와 함께 하였으니 그 근원은 아득하고 복은 흘러 끊어지지 않도다.
    儒州柳氏有佐命開國(*1)者其後延慶食德代生賢哲 ...
    銘曰柳氏之興與國竝焉源其遠矣流慶綿綿
    *1. 開國이 "가정보"에는 閥闕(여기서는 ‘공적’의 뜻)로 나와 있음.

3. 권부(權溥) 처 류씨(柳氏) 묘지명

* 년대: 충목왕 1년, 1344년
* 소재: 국립중앙박물관
* 권부: 1262(원종 3)∼1346(충목왕 2).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 류씨부인: 류승(柳陞, 1248-1298. 고려의 문신. 대승공 10세손)의 딸.
* 지은이: 이제현(李齊賢, 1287-1367). 고려시대의 문신.학자. 권부와 류씨부인의 사위.
* 발췌: 시령류씨(始寧柳氏)는 국초(國初)로부터 이름난 성(姓)이다. 대승(大丞) 차달(車達)이 태조(太祖)를 도와 공을 세웠다.
    始寧柳氏自國初爲著姓有大丞車達佐 太祖有功

4. 류돈(柳墩) 묘지명

* 년대: 충정왕 1년(1349)
* 소재: 대전 문화류씨대종회(탁본소장)
* 류돈: 1273-1349. 대승공 11세손. 벼슬이 도첨의찬성사 예문관대제학(都僉議贊成事 藝文館大提學)에 이름.
* 지은이: 안진(安震). ?∼1360(공민왕 9). 고려 말의 문신.
* 발췌: 공의 이름은 돈(墩)이고, 자는 백구(伯丘)이며, 성은 류씨(柳氏)인데, 첫 이름은 인화(仁和)이다. 문화현(文化縣) 사람이다. 그 선조인 차달(車達)은 태조(太祖) 대의 공신이다. 아직 벼슬하지 않았을 때, 그 현(縣)을 지나가는데 큰 호랑이가 으르렁대며 길 한가운데에 엎드려 있었다. 소리를 들어보니 병이 들었음을 알고,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어 목구멍 안에 걸려 있는 것을 뽑아내었는데 바로 은비녀였다. 호랑이는 껑충 뛰어 오르며 사라졌다. 그 날 밤에 꿈을 꾸었는데 신이 와서 말하였다. "나는 구월산(九月山)의 주인이오. 어제 저녁부터 목이 아파 고생하였는데 다행히 공의 도움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9대에 평장사(平章事)가 나게 하여 주겠소."
    公諱墩 字伯丘 姓柳氏 初名仁和 文化縣人也 其先車達 太祖功臣
    微時過本縣 巨虎 咆哮 當路而 伏聞聲而知病 擘其口抽喉中橫刺乃銀釵也
    虎躍而去 其夜夢有神曰我主九月山昨구喉病幸賴公活其報在九代平章事乎
    *구 = 만날 구; 構에서 木부가 아니라 책받침 부

5. 흥률사갑자중수양상소기서(興栗寺甲子重修梁上所記書)

* 년대: 1356년(공민왕 5년)?
* 설명: 신비로운 표현들로 이루어진 글이다. 믿을 수 있는 글인지 판단이 요구된다. 글의 제목은 “흥률사를 갑자년에 중수하다가 대들보 위에서 발견한 기문(記文)의 글”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갑자년은 1564년(명종 19년)인데, 그 글 속에는 1356년(공민왕 5년) 4월에 쓰인 글이라고 밝혀져 있다. 흥률사는 구월산에 있는 절이다.
* 줄거리: 흥률사의 기원에 대한 언급을 한 후에 그 동네의 한 촌락이 있어 56호가 거주하고 있는데 그곳은 신비한 동네라는 묘사가 이어진다. 그런데 그곳에 한 신인(神人)이 살고 있었다. 하루는 홀연히 ‘푸른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나서 왕장군(왕건을 의미)이 군량이 떨어졌다고 알렸다. 신인은 하루 밤에 수레 천 대의 군량을 꾸렸는데 그 수송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때 흥률사의 부처가 신군(神軍) 천여명을 내어 잠깐 사이에 운송하였다. 그리하여 전공을 크게 세워 삼한을 통합하였다. 그리하여 사명(賜名: 이름을 내려줌)하여 류차달이라 하였다(因其錫名柳車達). 따라서 이 절의 영험이 아니었다면 왕장군이 삼한 통합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생략했지만 신인의 묘사가 아주 훌륭하다. 여기서 왕건이 '류차달(柳車達)'이라는 이름을 내려준 것으로 되어 있고, 왕건은 주로 왕장군이라 불리고 있다.

6. 조선왕조실록, 류량(柳亮)의 졸기(卒記)

* 년대: 태종 16년, 1416년
* 발췌: 문성부원군 류량(柳亮)이 졸(卒)하였다. 류량의 자(字)는 명중(明仲)이요, 문화(文化) 사람이다. 밀직사(密直使) 류계조(柳繼祖)의 아들로서 그 선대에 류차달(柳車達)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고려 태조(高麗太祖)에게 공이 있었으므로, (삼한(三韓)을) 통합할 때 ‘삼한 공신(三韓功臣)’이라 사호(賜號)했다. 자손이 대대로 달관(達官: 높은 벼슬이나 관직)이 되었다.
    文城府院君柳亮卒 亮字明仲 文化人也 密直使繼祖之子
    其先有車達者有功於麗祖統合之時 賜號三韓功臣 子孫世爲達官

조선조의 기록이다. 류량(柳亮, 1354-1416)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동안 우의정에 이른 분이다. 여기서 사호란 왕이 명칭을 내려주는 것을 말한다. 실록을 살펴보면 호(號: 본명이나 자(字) 이외로 쓰는 이름)뿐만 아니라 사당의 이름, 공신의 칭호, 지명 등의 사호의 예가 있다.

7. 영락보 서문

* 연대: 1423년
* 편찬자: 류영(柳穎, ?-1430), 조선 전기의 문신. 대사헌, 관찰사, 예조참판 역임.
* 설명: 영락보는 현재 서문만 전하는데, 최초의 족보로 인정받고 있다. 서문에는 부족하지만 류효금의 사적이 암시되어 있고 대승공에 관해서도 언급되어 있다.
* 발췌: 어떤 사람은 "문화류씨의 후손이 번창한 것은 좌윤공(효금을 말함)이 호랑이를 살려준 것에 대한 음덕(陰德: 남이 모르게 행한 덕)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 우리 류씨는 고려의 초에 일어나 ... 대승공이 재산을 기울여 임금을 도우심...이 그 시작이며 ...
    或曰文化柳氏後嗣之蕃左尹公救虎活命陰德使然也 ...
    我柳氏起於高麗之初 ... 厥初大丞之傾財補主 ...

영락보의 서문은 전체가 대승공의 아들 류효금(柳孝金)의 사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오래 전부터 그의 얘기가 전해져 왔음이 암시된다.

8. 고려사

* 년대: 1451년 완성.
* 저자: 김종서, 정인지 등
* 설명: 1421년 1차 완성하였고, 중간에 편찬자들이 임의로 쓴 부분도 있는 "고려사전문"(全文)으로 발간되기도 했으나 세종은 김종서, 정인지 등에게 명령을 내려 내용을 충실하게 하면서 잘못을 고치도록 했고, 문종 1년(1451년) 완성했다. 열전에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가 내려져 있어서 비판이 거셀 것을 우려하여 보관하고 있다가 1454년 10월에 비로소 널리 반포되었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세우려는 측면에서 기술된 부분들도 있지만 역사성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고 객관성과 주체성도 지키고 있다. 개별 인물에 대한 평가는 이전부터 있던 자료들을 이용하여 비교적 공정하게 쓰고 있다.
* 발췌: 류공권의 자는 정평(正平)이며 유주(儒州) 사람이다. 그의 6대조는 대승(大丞) 차달(車達)인데 태조를 보좌하여 공신으로 되었다.
    柳公權字正平儒州人 六世祖大丞車達佐太祖爲功臣

고려사의 열전(列傳)에 나오는 기록이다. 류공권(柳公權, 1132-1196)은 고려 명종 때 활약한 분으로서 관점에 따라서는 문화류씨의 실질적 시조라 해도 될 분이다. 류공권은 종2품의 벼슬까지 이르렀는데, 그의 손자 류경(柳璥, 1211-1289)은 고종 45년인 1258년 무신정권을 이어가던 최의를 제거하고 왕권을 회복시켜 나라를 좌지우지한 대단한 인물이었고, 이듬 해 나라에서는 유주(儒州: 황해도 구월산 남쪽의 옛 지명)를 그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로 바꾸고 현으로 승격시켜 보답을 표시했다. 류경 역시 고려사 열전에 나오는데, 조부 류공권에 그 선조가 밝혀져 있어 "정당문학(정부의 최고기관인 중서문하성의 종2품 벼슬 이름) 공권의 손자"(政堂文學公權之孫)라고만 나온다.

9. 차원부설원기

* 년대: 1456년 (실제는 미정)
* 저자: 박팽년 등 (실제는 미정)
* 내용: 이 책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차원부설원기 비평”을 참조할 것. 여기서는 류-차 관련만 기술한다. 설원기에는 연안차씨의 상세한 내력이 밝혀져 있다. 본문에서는 그 시조인 차효전이 류차달의 맏아들이며 공적을 세워 대광지백(大匡之伯)이 되고 1000호의 식읍을 받았고, 그 후손들 역시 문벌을 이루어왔다고 말하고 있다. 류씨와 차씨가 같은 뿌리라는 소위 ‘류-차 동원’(同源)의 내용을 포함한 족보가 해주(海州) 신광사(神光寺)에 있었는데 하륜이 불태워버렸다고 한다. 주석에는 차씨 성을 하사한 이유, 차효전이 참언에 연루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류씨와 차씨의 큰 계통 혹은 신라 본계(本系) 등이 서희(徐熙)의 "가사(家史)" 혹은 서희의 "찬집여사(撰集餘史)"["찬집여사"가 제목인지 혹은 "여사"가 제목인지 분명치 않음], 정지상(鄭知常)의 "서경야사(西京野史)" 혹은 "서경잡기(西京雜記)"[이상 두 사람의 작품은 제목이 혼동되어 나옴], 김방경(金方慶)의 "초당일기(草堂日記)", 그리고 김사형(金士衡), 김균(金[묶을 균]) 등이 편찬하여 정종에게 보고한 계보에 나온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이예장(1406-1456)의 응제시와 주석에서는 다음 내용이 주어져 있다.
   - 신라 미추왕(味鄒王, ?-284, 신라 제13대 왕, 재위 262-284) 때의 '승상'인 차제능(車濟能)에서 시작해서 차승색(車承穡)과 차공숙(車恭淑)까지, 모두 해서 18명의 차씨 계보가 제시되어 있다. 이들 18명 중 14명이 '승상'이었다.
   - 승색과 공숙은 신라 헌덕왕(憲德王, ?-826, 신라 제41대 왕, 재위 809-826; 본명 김언승金彦昇) 때 그에게 살해당한 전왕(前王)의 원수를 갚고자 하다가 탄로 나서 도망쳐서 이름을 각각 류백(柳栢)과 류숙(柳淑)으로 바꾸었다.
   - '車達'의 호(號)가 주어졌으며, 그 아들에게 조상의 위대함을 이어가도록 별도로 성씨를 하사했다.
   - 류차달의 처음 이름은 해(海)였다. "공숙-진부-무선-보림-해"로 이어졌다.
   - 이예장은 자신을 차상도(차원부의 손자)의 처 김씨의 이성(異姓) 5촌 조카라고 밝혔다.

설원기의 내용은 16세기 말부터 당시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에 실리는 등,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차식의 신도비명(1619년)에도 나왔는데, 여기서는 이들도 살펴볼 가치가 있어 아래에 따로 다루었다.

10. 충장공림묘지문(忠莊公臨墓誌文)

* 연대: 1525년
* 류림: 14세기 후반 인물. 증(贈) 병조판서.
* 지은이: 류경조(柳敬祖). 16세기 전반 인물. 당시 영월군수. 류림의 증손자.
* 발췌: 공의 이름은 림(臨)이고 ... 대승 류차달의 후손이라.
    公諱臨 ... 大丞柳車達之後也

11. 신증동국여지승람

* 년대: 1530년 완성.
* 내용: 황해도 문화현의 항목의 ‘인물’란에 여러 류씨가 소개 되어 있는데 그 처음 두 사람이 대승공과 그 아들 류효금이다. “고려” 인물에 들어 있다.
    류차달: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할 때 차달은 수레를 많이 내어 곡식을 실어 날라 공을 세워 대승의 벼슬과 삼한공신의 호칭을 받았다.
    太祖征南時車達多出車乘以通粮道以功拜爲大丞號三韓功臣
    류효금: 차달의 아들이다. 일찍이 구월산에 유(遊)하다가 길에서 큰 호랑이를 만났는데 입을 벌리며 눈물을 흘렸다. 입 속에 흰 물건이 끼어있어 효금이 말하기를 “네가 나를 해치지 않으면 그것을 꺼내주겠다”고 하니 호랑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아듣는 행동을 하였다. 그래서 꺼내니 은비녀였다. 밤에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말하였다. “나는 산신령인데, 어제 성당리(지명)에서 부녀자 한 명을 잡아먹었는데 물건이 목에 걸려 고생하는 것을 공이 나를 구해주었다. 공의 자손은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될 것이다.” 효금은 벼슬이 좌윤에 이르렀다.

12. 대승공차달묘갈문(大丞公車達墓碣文)

* 년대: 1543년
* 지은이: 홍춘경(洪春卿). 1497(연산군 3)-1548(명종 3). 당시 황해도 관찰사. 대승공의 외(外)후손.
* 발췌: 공의 이름은 차달이요 성은 류씨라, 가세(家勢)가 큰 부자러니 고려 태조가 남정(南征)할 때 수레를 많이 내놓아 군사의 위엄을 떨치게 하니 그 공으로 대승(大丞)이란 벼슬을 하고 돌아가시니 문화 구월산에 장사 지냈다. 대승공이 효금(孝金)을 낳으니 벼슬이 좌윤(左尹)에 이르고 좌윤이 금환(金奐)을 낳으니 벼슬이 대장군(大將軍)에 이르렀다.
    公諱車達姓柳氏 家鉅富高 麗太祖南征時 多出車乘以脹軍威 以功拜大丞 卒葬文化
    大丞生孝金官至左尹左尹生金奐官至大將軍
    * 묘갈: 무덤 앞에 세우는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석.

13. 문화류씨 세보(世譜) "가정보"(嘉靖譜)

* 년대: 1562년 (명종 17년)
* 편찬자: 류희잠(柳希潛), 대승공 20세손.
* 설명: 가정보는 10권 2204 페이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현존하는 문화류씨 최고의 족보이며, 족보사(史)에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서자의 기록을 하지 않아 적서의 편견이 없고, 내외손(內外孫)을 차별 없이 동격(同格)으로 취급하고, 류씨들도 성과 이름을 다 썼으며, 4만 2천명이 등재되어 있는 가운데 오히려 류씨들은 3% 정도 밖에 차지하고 있지 않은 만성보(萬姓譜) 성격의 족보이며 그 기록의 정확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정보는, 한국 최초의 본격적인 족보이나 지금은 서문만 전하고 있는, 1423년(세종 5년)에 편찬된 "영락보(永樂譜)" 다음에 만들어진 문화류씨의 두 번째 족보이다. 그런데 그 서문이 바로 가정보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보면 가정보는 영락보의 모체가 되었음이 확실하다. 가정보 속에는 또한 영락보의 편찬자 류영(柳穎; 知禮曹事)이 지은 경기체가 “구월산별곡”이 들어 있는데, 물론 한글이 들어 있을 뿐만 아니라, 한자들도 모두 한글로 토가 달려 있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대승공을 포함한 윗대의 선조들에 대한 기록은 영락보의 것을 답습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실제 1423년 이전의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앞에 실린 내용들의 대부분이 여기 실려 있다. 그 종합으로서 다음과 같은 대승공에 대한 묘사가 맨 처음에 나온다.
* 전문:
    시조 삼한공신 대승공 류차달
    공은 삼국시대에 유주에 살았고 아주 큰 부자였다.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할 때 공이 많은 수레를 내어 곡식을 운반하였다. 태조는 공에게 대승의 벼슬을 내렸고 삼한공신이라는 호칭을 내려주었다. 아들을 두었으니 좌윤(관직명) 효금이다.
    始祖三韓翊贊功臣大丞柳車達 시조삼한익찬공신대승류차달
    公三國時居儒州甚豪富 공삼국시거유주심호부
    高麗太祖征南公多出車乘以通粮道 고려태조정남공다출거승이통량도
    太祖拜公爲大丞號三韓功臣 태조배공위대승호삼한공신
    生子左尹孝金 생자좌윤효금

14.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 년대: 1589년
* 편찬자: 권문해(權文海, 1534-1591), 조선 중기의 학자, 문신. 선조 때 사간(司諫) 벼슬을 함.
* 설명: 일종의 백과사전인 이 책은 많은 책들을 바탕으로 지어졌는데 그 목록 안에 “차원부설원기”가 들어 있다. 차원부가 하륜, 정도전 등의 모함을 받아 일가족이 화를 입었다는 내용과 태종이 문하시중의 벼슬을 내리고 시호를 문절(文節)로 했다고 나온다.
* 내용: 문화류씨 선계 문제 관련으로 “류차달” 항목에는 “문화현 사람으로 왕 태조가 남정할 때 (류)차달은 수레를 많이 내어 곡식을 운반하여 대승의 벼슬을 내렸다.”고 되어 있고 그 바로 아래에 “그 아들 효금”의 항목에 구월산에서 호랑이를 만나 구해주고 축복받은 얘기가 적혀 있다.
    차승색의 항목 등에 설원기의 내용을 대략 반복하고 있고, 다음과 같은 내용이 추가로 나온다.
    - 혁거세 때에 차몽일(車蒙一)이 있었는데 차씨가 변하여 류씨가 되고 고려초에 대승 류차달의 아들 효금*에 이르러 옛 성을 회복하여 차(車)를 성으로 삼았다. (*원문에 ‘孝金’이라고 나옴.)
    - 차승색과 차공숙이 변한 이름은 각각 류색(柳穡)과 류숙(柳叔)이라 함. (설원기와 다른 표기.)
    - 정지상이 지은 “보음록”(報陰錄)을 보면 ‘고려태조 왕건은 바로 왕수긍의 13세손인 왕몽의 제3자 식시(式時)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문화류씨 원파보는 ‘차몽일’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차무일’(無一)이라고 나온다.

15. 묵방사 완복문(墨坊寺 完復文)

* 년대: 1585년
* 저자: 류희림(柳希霖, 1520(중종 15)∼1601(선조 34))
* 내용: 묵방사는 대승공 묘소 앞에 있는 건물로서, 원래 절이었는데 재실(齋室: 제사를 지내는 집)로 쓰고 있다고 한다. 1585년에 류희림이 황해도 관찰사로 가서 그곳을 찾아보고 묵방사를 중수(重修: 다시 고침)하자는 주제의 글인 "묵방사 완복문(完復文)"을 썼다.
    그런데 거기에 흥미로운 내용이 나온다. 근처에, 구월산에 흥률사라는 절이 있는데, 그곳에서 14세기 중엽에 어떤 중이 지은 글이 나왔다는 것이다. 류희림은 그 속에 이해할 수 없는 내용도 있다고 말하면서, 그렇다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글에서는 류희림은 흥률사의 글에서 신비적인 요소를 제외한 기본적인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는데, 곧 대승공이 신라 말에 전쟁에서 수레를 출동시켜 양식을 조달하여 삼한통일에 공을 세우고 사람들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고 쓰여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는 그런 문서가 증거가 없어 아쉽다고 말하며 그런 내용이 들어있는 확실한 문서들이 내려왔다면 얼마나 좋을까 탄식하고 있다.
    류희림의 글에는 흥률사에서 나온 글이 무엇인지 설명이 나와 있지 않지만, 그 글의 제목은 바로 앞에서 다룬 "흥률사갑자중수양상소기서"이다.

16. 류지원의 글

* 년대: 광해조(1609-1623)
* 내용: 류처후가 쓴 기사보의 원파록에는 류지원의 글이 나온다. 거기에는 ‘류용수의 계보’가 입수된 경위와 함께 설명되어 있다. 글의 중간에 그 저술 시기에 관한 단서가 몇 개 나오며, 이들을 종합하면 광해조(1609-1623)에 쓰인 글로 나타난다. 그 시대적 배경은 임진왜란인데, 대승공 20세손(충경공파)으로 나오는 류지원(柳智源)이라는 사람이 의병을 모집하러 다니다가 결성현(結城縣,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의 일부)에서 류용수(柳龍壽)라는 사람을 만났다. 류용수는 중국 출신으로 난을 피해 그곳으로 피해 있었는데 대승공의 후손이라고 했다. 류용수는 류지원에게 대승공의 내력을 이야기해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류씨의 시작은 황제(黃帝)이다.
   - 그 후손 하후씨(夏后氏)의 13세손이 왕조명(王祖明)이다.
   - 왕조명은 유루(劉累; 인명)와 함께 용(龍)을 키우다 실수하여 피신하여 조선 평양의 북쪽 일토산(一土山) 아래에 정착하였다.
   - 왕조명의 후손이 왕수긍(王受兢)이다. 왕수긍은 기자(箕子)의 스승이 되었다.
   - 왕수긍의 33세손이 왕몽(王蒙)이다. 당시에 "一土山草者家王"이라는 참언이 돌았는데 (一土=王의 파자, 草家=蒙의 파자; 이것은 "왕몽" 혹은 그 집안사람이 왕이 된다는 뜻임) 이로써 목숨의 위협을 느껴 피신했다가 세 번 성을 갈아 차씨가 되고(王-田-申-車) 이름은 무일(無一)로 바꾸어 차무일이 되었다. 한편 왕몽의 셋째아들이 왕식(王式)인데, 왕식의 후손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라서 참언은 적중했다.
   - 왕몽의 일곱째아들 왕림(王琳)은 차신을(車神乙)이다.
   - 차신을의 31세손이 류색(柳穡)이다. 당시 애장왕을 죽이고 헌덕왕이 왕위에 오르자 복수를 하려다 탄로나 유주(儒州)로 도망쳐서 이름을 바꾼 결과였다. 할머니의 성 양(楊)씨를 본떠 柳씨가 된 것이었다.
   - 류색의 5세손이 류차달이다. 태조 왕건을 도와 크게 가문을 일으켰다. 장자(長子)는 연안차씨, 차자(次子)는 문화류씨로 봉하였다.

여기서, '듣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류씨가 아니면 알기 어렵다'는 말이 나오며, 류지원은 류용수의 글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세계(世系)를 과장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류용수라는 사람이 류씨이고, 글로 기록된 것이며, 계묘(癸卯)년(1603년, 선조 36년) 류덕신(柳德新: 광해군의 장인이었던 류자신의 아우)도 그런 얘기를 동료였던 권문해(權文海)라는 사람에게 들었음을 들어 수용하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권문해는 위에 나온 “대동운부군옥”의 저자이며, 그 책에 왕수긍과 왕몽의 관계, 차몽일의 존재, 차승색의 행적, 대승공에서 류효금과 차효전이 갈라짐 등의 내용이 나오는 것을 보면 그 틀은 이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17. 차식(車軾)의 신도비명

* 년대: 1619년
* 작자: 류몽인
* 내용: 차식(1517-1575; 호 이齋[이?=턱 이])은 문과에 급제하여 당시 한미했던 차문(車門)을 비로소 일으킨 사람이다. 아들에 유명한 문장가인 차천로(車天輅, 1556-1615)가 있다. 차식의 신도비는 류몽인(柳夢寅, 1559-1623)이 지은 것으로 되어 있다. 차천로의 작품집인 오산집(五山集, 1791년 간행)의 부록에 차식의 글 모음 뒤에 "부신도비명(附神道碑銘)"(신도비명을 부록으로 덧붙여 놓았다는 뜻)이란 제목으로 붙어 있고, 후손이 유고를 모아 간행한 류몽인의 "어우집"(1832년)에도 나온다.

류몽인은 고흥류씨인데, 문화류씨가 아니어선지 모르겠지만 차씨와 류씨의 관계에 대한 평가는 없으며, 류차달은 전혀 등장하지 않고 류효전이 고려 태조에게 공을 세워 차씨 성을 하사받았다고만 설명하고 있다. 이 글은 신도비명인만큼 차식과 그 선조 및 후손들에 대한 내용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들어있다.

   - 신라 미추왕 때 승상 차제능(車濟能)이 있었는데, 정지상이 지은 "서경야사"에는 '차제능은 유루(劉累)의 후예'라고 나온다.
   - 기자(箕子)가 조선에 올 때 차제능의 선조도 데리고 왔다.
   - 차제능 17세손 승상 차승색(車承穡)과 18세손 사공(司空) 차공숙(車恭叔)에 이르렀는데 이들 18대 중 승상에 오른 사람이 14명이었다.
   - 애장왕을 살해하고 헌덕왕이 들어서자 차승색 부자는 그 복수를 갚으려다 탄로되어 유주로 피신했고, 할머니 楊씨를 본떠서 柳씨로 변성하고, 차승색은 류환(柳桓), 차공숙은 류숙(柳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류숙에서 5세 지나 류효전에 이르러 고려 태조의 남정(南征)을 도와 수레를 내어 양식(糧食)을 조달하여 큰 공을 세워 옛날 성을 복원하여 차씨가 되고, 그로 인하여 연안이 본관이 되고 식읍 천 호에 대광백(大匡伯)을 봉했다.
   - 차효전의 자손 열거, 차원부로 이어짐. 설원기의 내용이 요약됨. 문종 때 박팽년에게 설원기를 짓게 했음. [*현재의 설원기는 세조 때 왕명으로 지었다고 나옴.]
   - 차식의 내력.
   - 차식의 후손.
   - 이 글(신도비명)을 쓰는 류몽인의 겸손의 말.
   - 명(銘: 운문으로 찬양한 글).

류몽인은 그의 작품집인 "어우야담"에서 차식에 대해 몇 번 언급하고 있고 나이도 서로 비슷해서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류몽인은 광해군 때 북인(北人)에 가담했으나 폐모론(인목대비를 폐하자는 주장)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척당했다. 실록에는 1618년 직에서 해임된 것으로 나오며, 그 후 은거(隱居)했다. 이로 인해 1623년의 인조반정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었는데, 같은 해에 광해군의 복위를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아들과 함께 사형당하고 말았다. 차식의 신도비명은 1619년 기미(己未)년에 쓰였다고 나오며, 당시 역신(逆臣)의 글이라 하여 실제 비석에 새기지는 않았었다고 한다.

18. 씨족원류(氏族源流)

* 년대: 1652년
* 편찬자: 조종운(趙從耘, 1607-1683)
* 설명: "씨족원류"는 통합족보인데, 학식이 뛰어난 집안에서 태어난 조중운은 실전(失傳: 전하여 오던 사실을 잃어버림)한 자신의 선대의 세계(世系)를 회복하고자 노력하다가 다른 성씨들의 계보에까지 깊이 매달리게 되어 그 결과로 탄생된 책이라 한다. 여기에는 17세기 중반까지의 조선의 중요한 성씨들이 망라되어 있는데 약 540개의 성관(姓貫: 성과 관향)이 수록되어 있다.
    자녀는 대개 출생순에 따라 수록되어 있고, 본성과 외파를 거의 차별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당시의 다른 유사한 통합보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통합보의 결정체였으며, 사람들이 자신들의 족보의 기록의 정확성을 이 책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우도 많은, 객관성이 높은 족보이다. "씨족원류"의 문화류씨 "류차달" 항목을 보면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고려 태조 통합삼한 벽상 개국공신 중대광 대승
    고려 태조가 남쪽을 정벌할 때 공이 많은 수레를 내어 곡식을 운반하여 공을 세워 대승의 벼슬을 내렸다. 묘는 문화면 묵방리에 있다.
    麗祖統合三韓壁上開國功臣重大匡大丞 려조통합삼한벽상개국공신중대광대승
    麗祖征南公多出車乘以通粮道以功拜大丞 려조남정공다출거승이통량도이공배대승
    墓在文化面墨坊里 묘재문화면묵방리

'벽상'이란 말은 벽 위에 화상을 그려 넣었다는 뜻이고 고려시대 초기의 관제는 혼란스럽지만 대략 '중대광'은 고려 시대의 1품에 속했고 ‘대승’은 3품에 속했다. 여기서 보면 여러 급의 품계가 혼동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 말고는 가정보 등의 묘사와 동일하다. 일견 후손들이 흔히 범하던 조상들의 벼슬을 올려주는 인플레가 일어나 있는 듯이 보이지만 여기서도 결국 대승이라는 벼슬로 귀착되는 것을 보면 일관성을 잘 유지하고 있는 편이다.

그리고 "씨족원류"에서는 대승공의 아들로서 류효금만을 들고 있다. 효금의 항목에는 ‘좌윤’의 벼슬이 붙어 있으며, 호랑이를 구해주어 축복을 받은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 있다. 그 글의 끝이 호랑이의 말로서 "‘...공의 자손이 반드시 대대로 경상(높은 벼슬아치)가 되리라’ 하고 말했다."(公之子孫必世爲卿相云)는 구절이다. 한편 '좌윤'이라는 벼슬 이름 아래 "세전공(世傳公)"이라는 칭호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전'은 '대대로 전한다'는 뜻인데, 바로 그 호랑이의 말에서 유래한 "대대로 복록(福祿)을 후세에게 전한 분"을 뜻하는 칭호로 판단된다. 족보에서는 나오지 않고 여기서만 나타나는 흥미로운 칭호이다.

“씨족원류”는 이하 8페이지를 문화류씨에 할애하고 있다. 그럼 이 "씨족원류"에서는 연안차씨를 어떻게 기술하고 있을까. 웬일인지 그곳을 보면 단 5명만 나온다. 차식(車軾)과 그 아들들 4명이 그들이다. 그 기록도 극히 간단해서 차식에게 평해군수라는 직함만이, 그리고 세 번째 아들 운로(雲輅)에게 언제 알성시(謁聖試: 일종의 비정규적인 과거시험)에서 장원했다는 말 등이 적혀 있을 뿐이다.

19. 묘갈개수문(墓碣改竪文)

* 연대: 1678년
* 지은이: 류상운(柳尙運). 당시 황해도 관찰사.
* 발췌: 고려 태조가 남쪽의 백제를 정벌할 때 공(公)이 수레를 내어 통일의 공(功)을 능히 이루니 공을 벽상공훈(壁上功勳)에 책봉하고 벼슬은 대승을 내리었다.
    麗祖之南征百濟也公出車乘克成統一之功策公壁上勳位大丞

20. 차헌기의 기록

* 년대: 1812년
* 내용: 이 기록에서 왕배조의 강남보가 도입되었다. 그 입수 시기는 "崇禎紀元後四壬申秋"이라고 되어 있다. 숭정은 중국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의종(毅宗) 때의 연호(1628-1644)인데,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조선은 청나라 연호를 쓰기를 꺼려해서 이 연호를 썼다고 한다. 곧 숭정 기원(1628년) 후 네 번째 임신년 가을이 되는데, 첫 번째 임신년은 1632년이고 거기에 3번의 임신년, 곧 180년을 더하면 1812년이 된다. 차원부설원기의 계보와 류지원의 글에 나온 류용수의 계보, 그리고 이 왕배조의 강남보가 합해져서 현재 문화류씨, 연안차씨, 그리고 강남왕씨의 원파보를 이룬다.
   이 기록에 따르면 차헌기(車憲基)라는 연안차씨 사람이 가승(家乘: 직계 조상을 중심으로 기록한 책)을 만들고 있을 때 한 노승(老僧)이 찾아와서 그것을 보더니 왕씨의 세계(世系)가 있다고 말하였다. 그 내용은 왕조명 이하의 계보였으며, 다음 내용이 들어 있었다.
   - 신라 애장왕 때의 좌승상(左丞相) 차승색이 그 아들 사공(司空: 벼슬 이름) 차공숙과 더불어 애장왕의 원수를 갚으려 하다 탄로 나서 유주로 망명하여 류씨로 변성함.
   - 차공숙의 아우 사공(司空) 차공도(恭道)는 중국 강남으로 망명하여 옛 성인 왕씨로 회복하여 그 자손이 그곳에 거주함.

그리고 그 노승은 보첩(족보책)을 얻게 된 내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 자신의 이름은 도연(道演)임.
   - 8도를 유람하다가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도사공(都沙工: 뱃사공의 우두머리)인 왕배조(王排助)라는 사람을 만남.
   - 왕배조는 그 보첩을 해남(海南)의 이진(梨津: 전라도의 지명)에 정박하고 있는 강남조선(江南棗船: 강남(중국 지명)의 대추나무 배라는 뜻인 듯) 주인에게 전해달라고 말하고 숨을 거둠.
   - 노승이 왕배조를 장사 지내고 이진으로 가보니 배는 이미 떠나버린 후였음.

이 차헌기의 기록에 따르면 보첩은 기본적으로 왕씨의 내력을 밝힌 것이며, 왕씨였다가 차씨로 변한 후 다시 왕씨가 생겼다는 내용이다. 류처후는 왕배조의 왕씨를 강남왕씨라 부르고 있다. 그리고 이 왕배조의 강남보는 위조라는 글이 연안차씨 족보 중 하나에 실려 있다.

21. 신도비명(神道碑銘)

* 년대: 1863년 이후.
* 지은이: 남병철(南秉哲). 1817-1863. 조선 후기의 문신, 과학자. 벼슬이 판서, 대제학에 이름.
* 발췌: 공의 성은 류(柳)요 이름은 차달이니, 문화인이라. 처음 이름은 해(海)이고, 자(字)는 응통(應通)이요, 아사(鵝沙)는 그 호(號)이다. 고려 태조가 남으로 신라와 백제를 정벌할 때에 수레를 많이 내어 군사의 위엄을 떨쳐 통일을 도와 이루니 벽상2등훈(勳)에 책봉되고 벼슬은 대승이 되고, 개국공(開國公)에 봉해졌다. ... 삼가 가승(家乘)을 참고하니 멀리 헌황(軒皇) 때로부터 우리나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번 성을 고치어 오더니, 뒤에 차씨가 되었다가 또 류씨로 다시 고치었다. 류색(柳穡)이 신라에서 벼슬하여 벼슬이 좌상(左相)에 오르고, 5세에 대승공이 나시었다. 공의 아버지의 이름은 보림(普林)이니 월흑산장(月黑山長)이요, 조부의 이름은 무선(茂先)이니 해평산장(海平山長)이요, 증조의 이름은 진부(振阜)인데 덕을 숨겨 나타나지 아니하고(벼슬이 없고), 고조의 이름은 숙(叔)이니 벼슬이 사공(司空)이요, 사공의 아버지는 곧 좌상공(류색)이니 사람들이 예양(豫讓, 중국 전국시대의 진(晉)나라 의사(義士). 섬기던 왕이 복수를 최후까지 도모하다가 죽음)과 같은 국사(國士: 나라의 뛰어난 선비)의 풍모가 있다고 말했다. 당 헌종(憲宗, 당나라의 제11대 황제, 재위 805-820) 때에 유주에 거주하였고, 그에 따라 본관을 정했다. 대승공이 신라왕 알지(閼智)의 후손(곧 경주김씨) 균(묶을 균)의 딸과 결혼하여 2남을 낳았다. 장자는 효전이니 연안백(延安伯)이고 옛 성 차씨를 계승하고, 차자는 효금이니 벼슬이 좌윤이다. 6세에 공권(公權)이 있으니 ...
세상에 전하기를 대승공의 아들 좌윤공이 아사달산(阿斯達山)을 지날 새 호랑이의 목에 걸린 은비녀를 뽑아주니 산신령이 꿈에 나타나서 사례하길 "공의 후손이 마땅히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하였기에 류씨의 번성함이 실로 이 때문이라 한다. ...
    公姓柳諱車達文化人也 初諱海 字應通 鵝沙其號也
    當麗祖之南征羅濟 多出車乘以脹軍威贊成統一 策壁上勳官大丞封開國公 ...
    謹按家乘 遠軒皇時기俄東累改姓氏後爲車氏又改柳氏
    有諱穡仕新羅官至左相五世而生大丞公
    公之考諱普林月黑山長 祖諱茂先海平山長 曾祖諱振阜皆陰德不耀
    高祖諱叔官司空 司空之考卽左相公 世稱有豫讓國士之風
    唐憲宗之時居 儒州因爲貫焉 大丞娶新羅王閼智后孫균女
    生二男 長孝全延安伯襲舊姓車氏 次孝金官左尹六世諱公權 ...
    世傳大丞之胤左尹公遊阿斯達山爲虎拔익中之釵
    山精謝於夢曰公之後當世爲卿相柳氏之盛實由此
    * 기 = 旣 아래 旦; 이르다 / 익 = [口益] / 균 = 묶을 균

22. 기타

18세기∼현재의 기록들
현재 문화류씨나 연안차씨의 내력에 대해 대부분의 문헌들에서 황제 연원설에 입각하여 설명하고 있다. 최소한 300년 이상을 문화류씨 족보, 연안차씨 족보, 증보문헌비고, 각종 성씨들을 다루는 서적들, 등등 허다한 문헌에서 받아들여져 왔다. 어떤 책에서 성씨의 기원이나 내력에 대한 설명을 할 때는 그 성씨의 집안의 견해, 곧 족보의 기록을 존중해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황제 연원설은 문화류씨 족보에서 1689년 기사보(己巳譜)에 소개가 된 이후로 그 다음에 1765년에 나온 족보인 을유보(乙酉譜)부터는 완전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므로, 일찍이는 17세기의 문헌들, 그리고 18세기 이후의 문헌들에서 같은 설명이 이루어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아마 가장 중요한 예 중 하나가 “문헌비고”라는 책일 것이다. 이것은 원래 1770년 홍봉한에 의해 “동국문헌비고”라는 이름의 책으로 옛날부터 조선말에 이르기까지 문물제도를 총망라하여 분류 정리한 책이다. 1908년에 “증보문헌비고”로 총정리되었다. 여기에는 황제 연원설에 입각한 문화류씨와 연안차씨의 유래가 들어 있다. 이런 국가적 편찬사업에서도, 비록 그 기록의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그 내용을 일일이 고증하고 검증한 것은 아닐 것이다. 특히 성씨의 유래 같은 것은 그 내용이 완전한 거짓이라고 알려져 있지 않는 한 단순히 개개의 족보의 내용을 발췌해서 넣어놓았으리라고 추측된다. 따라서 이런 책은 무슨 성씨의 유래를 단정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어떤 사항의 확대재생산이다. A라는 책에 어떤 다소 의심스러운 사실, 혹은 추측이 쓰여 있다고 하자. 이것을 B라는 책에서 이용하면서 그 의심의 부분이나 추측의 측면을 약화시킨다. 더구나 거기에 새로운 추정이나 다른 알려진 사실을 가미할 수도 있다. 그런 다음 A가 A'의 책으로 확대 개편되거나 새로운 버전 C로 변하면서 B의 내용을 받아들이며, 자기주장의 근거로 삼는 것이다. 과학논문에서조차 추정이 몇 번의 논문을 거치면서, 그게 사실이라는 증명이 되지 않은 채, 사실로 둔갑해 버리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더구나 세월이 흐르며 책들이 재간행되고 원본이 사라지는 등의 복잡한 일들이 일어나면 그 선후도 파악할 수 없게 되어, 이런 과정이 조금만 진행되면 아무리 황당한 이야기도 사실로 성립되어 버릴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사실을 추적할 때는 가능한 한 이런 일들을 크게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황제 연원설에는 류씨와 차씨뿐만 아니라 왕씨들도 관여되는데, 실제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은 아닐까.

시기 혹은 출전 미정의 기록들
(1) 묵방사의 기문: 현재 전하는 원파보 혹은 대승공 사적의 말미에 "묵방사의 기문"의 기록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묵방사의 기문(墨坊寺記; 記文=기록한 문서)에 이르기를 공(대승공)의 초명(初名: 처음 이름)은 해(海), 자(字)는 응통(應通), 호(號)는 아사(鵝沙)이며, 고려 태조가 ‘차씨의 홍렬(弘烈: '위대함' 정도의 뜻)을 잊을 수 없다’고 말하고, 또 이르기를 ‘류씨로 행세(行世)한 지 5세가 되었은즉 역시 폐하지 못하리라’고 하고, 장자 효전으로 하여금 그 수공(首功: 으뜸되는 공)을 드러내고 윗 조상의 옛 성인 차씨를 승습(承襲: 이어받음)하고 연안을 관향으로 하게하고, 차자 효금으로 하여금 류씨를 잉위(仍爲: 그대로 계속함)하게 하였다고 한다.”
    모두 “묵방사의 기문”에 나온 내용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따라서 좀 길지만 한 문장으로 해석해 보았다. 그런데 묵방사의 기문이란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혹시 앞에 살펴본 “흥률사갑자중수양상소기서”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거기엔 전혀 저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한편 여기서 ‘류씨로 행세한 지 5세가 되었은즉’(柳氏之行世者五世則)의 부분을 어느 글에서인가는 ‘류씨가 그간 모칭(冒稱=가칭 假稱)한 것도 폐할 수 없어’(這間柳氏之冒稱)이라는 구절로 나와 있는 듯하다. 차원부설원기의 이예장의 시주(詩註)에도 “류백(柳栢=차승색)이 그 할아버지...의 처 양(楊)씨의 성을 모(冒)하여 류씨로 변하여 내려왔다.”(柳栢冒其祖...妻楊姓變柳氏以來也)라고 되어 있다. [이 부분은 연안차씨들이 주장하는 바가 있어 뒤에 따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위의 내용은 현재 대부분의 문화류씨 족보(대동보, 파보 등)에도 그대로 실려 있어 믿을 만한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조사를 해보니 원문에 "謹按車氏譜曰墨坊寺記云...."이라고 되었고, 그 글 말미에 "...云故因其說以備參考"라고 되어 있다. "살펴보니 차씨의 족보에 말하기를, ‘묵방사의 기문에 이르기를 ...’이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그 설(說)을 참고하라고 실어놓는다."는 뜻이다. 묵방사의 기록이라는 것이 후대의 문화류씨 원파록 편찬자들도 볼 수 없어 그 내용을 살펴서 자신들이 소화해서 평가하지 못하고 그냥 언급해 놓은 것이라 생각된다. 대개 기록이란 이렇게 문제가 있게 마련이다. 이상하지만 한번 참고하라, 하고 소개해 놓은 글에서 그런 경계의 말은 없어지고 원문만 제시되며 그것이 사실인 듯 주장되는 것이다. 차씨 대동보를 조사해 보았으나 위와 같은 구절만 나왔다. 그리고 차씨 족보는 최초의 것이 19세기에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이렇게 보면 언제 누가 어떤 근거로 어떤 내용을 썼는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글에서 나온 글일 뿐인 듯하다.

(2) 대승공의 사적 중에는 “동사(東史)”라는 곳에 이런 얘기가 있다고 나온다. 곧, 공이 삼한 시에 유주 땅에서 큰 부호로 살고 있었다. 신라말기에 견훤이 적도(敵徒: 적의 무리)를 모집하여 ... 후백제라고 자칭하며 남방백성을 잔학하므로 고려 태조가 정벌하려 할 때 군량이 넉넉히 공급되지 못함을 근심했다. 장수들은 모두 “남방은 옥토라서 민가에 곡식이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대승공은 ‘백성을 약탈하면서 어찌 포악한 자를 베어버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저의 집에 쌓아놓은 곡식이 있으니 청컨대 그것으로 군사들에게 제공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하고 말했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천 대의 수레의 양식을 마련하고 수송하여 넉넉히 군대가 승리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논공행상을 하는 날 그 힘써 수송하였다는 뜻을 취하여 이름을 내리고 작위(爵位)를 내렸다는 것이다.

여기서 “동사”(東史)가 “동사강목”(東史綱目, 안정복 安鼎福, 1778년) 같은 책 제목의 약자인지 아니면 그대로 “동사”(東史, 이종휘 李鍾徽, 1803년)를 말하는 것인지 확인되지 않지만, 저 이름이 들어간 책들을 대략 조사해 보니, 필경 18세기 이후의 책이라 짐작된다.

(3) 족보에는 대승공의 배(配: 아내)가 신라왕 김알지의 후손인 김균(金[묶을 균]: 우연히 조선 초의 문신인 김균과 한자가 동일함)의 딸이라 나오는데, 그 출처를 알 수 없다.

(4) 흥미로운 것은 파평윤씨와의 관련이다. 원파보에는 파평윤씨의 시조인 윤신달(尹莘達)이 나오며, 대승공과 매제(妹弟) 혹은 매형(妹兄)의 관계에 있는 것으로 나온다. 둘이 우연히 이름이 達자로 끝난다. 그리고 그 근거로서 파평윤씨 족보를 보라고 나오는 족보가 있다. 그런데 파평윤씨의 족보에는 한 술 더 떠서 왕건의 부인, 신숭겸의 부인, 그리고 윤신달의 부인이 모두 류차달의 누이들이라고 나온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사실이 자신들 일가와 문화류씨 가정보에게서 나왔다고 쓰여 있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가정보에는 전혀 그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문화류씨 족보의 원파보에서 다시 그 주장을 받아서 기록해 놓고는 그 사실이 파평윤씨 족보에 나와 있다고 써 놓고 있다. 실상 족보에서는 지금까지 이런 식의 부조리한 일이 자주 일어나왔다고 생각된다.

(5) 족보 중에는 대승공의 사주팔자를 적어놓은 것이 간혹 보인다. 이에 따르면 대승공은 880년 출생이라 한다. 이것은 문화류씨 지후사공(祗候使公)파보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주팔자까지는 근거가 없다고 생각되고, 출생년도에 대한 논의는 뒤에 하였다.

 
III. 원파록 검토와 황제 연원설 비판

1. 원파록 내용 종합

현재의 원파록은 1812년에 일어났다는 차헌기의 이야기를 포함하고 있어 갑자보(1864년, 류승기柳昇基 편찬) 때 혹은 그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 짐작된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재의 원파보는 크게 다음의 세 부분의 자료를 근거로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은 그냥 자손이라고 나오는 부분이고 이름들은 주어져 있지 않는데 원파록에서만 이렇고 원파보에는 이름들이 일부 혹은 모두 주어져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 }은 필자의 코멘트이다.

(A) 류용수의 계보: 황제-...-왕조명-...-왕수긍-...-왕몽(=차무일; 셋째 아들 왕식의 한참 아래 후손이 왕건; 7째 아들이 차씨로 이어짐)-...-차승색(=류색)-...-류차달-류효전(=차효전)/류효금

(B) 이예장의 계보: 차제능-...-차승색(=류백)-차공숙(=류숙)-...-류차달-류효전(=차효전)/류씨 {*류효금의 이름은 나오지 않음.}

(C) 왕배조의 강남보: 왕조명 이하의 계보가 자세히 나옴; 왕조명-...-차승색(=류씨)-차공숙(=류씨; 공숙의 아우 차공도는 중국 강남으로 망명, 옛날 성인 왕씨를 회복함.)

여기에 잠깐 차식의 신도비명(류몽인 지음)이 언급된다. 이것와 관련하여 원파보에는 유루에 관한 언급만 들어 있지만 참고로 신도비명에 나온 계보는 다음과 같다.
(D) 류몽인의 계보: ...-유루-...-차제능-[15명의 이름]-차승색(=류환)-차공숙(=류숙)-...-류효전(=차효전) {*왕조명 대신 유루가 나옴. 대승공 뿐만 아니라 류효금은 전혀 나오지 않음.}

그리고 권문해가 잠깐 언급된다. 그의 “대동운부군옥”에도 계보에 관한 사항이 들어 있는데 원파록에는 직접 언급되지 않지만 뒤의 참고로 여기 적는다.
(E) 권문해의 계보: 왕수긍-...-왕몽(=차몽일; 왕수긍의 13세손)-...-차승색(=류색)-차공숙(=류숙)-...-류차달의 아들 류효금*에 이르러 차성 회복.

2. 기사보(류처후)의 토론

현재의 원파록에는 류처후의 글이 그대로 들어 있다. 우선 류처후의 토론을 살펴본다.

    - 차제능 이하 21대의 계보: 서희, 정지상, 김방경 세 사람의 야사(野史)에 나타났고, 설원기 중 이예장의 시주(詩註)에 기록되어 있어 의심할 여지가 없음.
    - 차보전(차제능의 아버지) 이상 차무일까지의 16세의 계보는 이름의 글자들이 다른 것이 많고, 그 기록의 출처를 알 수 없음.
    - 차무일 이상 왕수긍에 이르기까지 책마다 대수(代數)가 같지 않음.
    - 한편(류지원의 글 등)에서는 차제능이 왕조명의 후손이라고 나오며, 다른 한편(류몽인이 인용한 정지상의 야사)에서는 유루의 후손으로 나온다. 이 두 설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다.
    - 비록 류씨의 본원(本源)이 가장 오래되었으나 우리나라에는 문헌이 적어 착오가 없을 수 없음. 고려 이전의 실록은 중국으로 들어갔고, 류-차 족보를 4얼이 불태운 일도 있고 해서, 비록 김사형과 김균이 겨우 일부 기록을 남겼으나, 부족함이 있을 수밖에 없음.
    - 그래도 기록이 없어지지 않고 여러 책에 나와 있음.
    - 그런데 류희잠이 펴낸 가정보(1562년)에는 전혀 문화류씨 선계가 나타나 있지 않는데, 그것은 아마도 류희잠이 강남보를 보지 못한 때문일 것임. 만일 너무 옛날 일이라서 기록하지 못했다면 잘못이다. 아무리 먼 옛날 일이라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임.
    - 따라서 "믿는 것은 믿는 대로, 의심나는 것은 의심나는 대로 전하기 위해" 여기 기록함.

3. 현재의 원파록 기자의 추가 토론

무엇보다도 왕배조가 갖고 있던 강남왕씨의 계보 곧 강남보를 신뢰하고 있다. 강남보에 대한 기자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 차씨, 류씨, 강남왕씨 모두 대승공 류색(柳穡)의 후손이고 같은 근원에서 나옴.
    - 차씨들의 족보 편찬을 계기로 계보(1812년의 강남보를 의미)를 찾게 되어 천우신조임.
    - 계보의 기록들을 대조하니, 대보(大譜: 기사보에 있는 계보를 의미)에서는 왕수긍에서 왕염(王廉)까지 47세라 하고, 강남보에서는 29세라 함. ⇒ 왕수긍이 기자 때 사람인 사실 등을 감안하면 900여년전이므로 29세로 나온 강남왕씨의 계보가 타당함. 또한 강남보에서는 왕조명에서 이어져 내려온 자손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음.
    - 류몽인이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차식의 비명(碑銘)을 지을 때 “서경야사”의 내용을 들어 “차제능은 유루의 후손이라” 하였는데, 이대로라면 차씨와 류씨가 유루의 후손으로 될 것이다. 강남보를 보니 그런 주장이 큰 잘못임을 알 수 있었다. (기사보에서는 차제능이 왕조명의 후손인지 유루의 후손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는데 여기서는 강남보에 입각해서 유루의 후손이 아니라고 단정하고 있다.)
    - 다시 한번 왕배조와 승려 도연에 의해 강남보가 전해진 것은 천우신조임을 강조.
    - 왕배조의 시를 소개함.

결국 현재의 원파록의 기자는 여러 책과 문헌들, 곧 서희, 정지상 및 김방경의 야사(野史), 김사형과 김균의 계보, 차원부설원기, 류지원이 전한 계보, 차헌기가 전한 강남보 등을 들어 황제 연원설을 믿고 있고, 특히 강남보에 의해 모든 계보가 공백 없이 완전히 밝혀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강남보는 위조되었음이 논증되어 있다.

4. 지금까지 나온 계보들에 대한 종합 검토

위에 정리한 계보들은 차승색이 류씨로 변하고 그 후손에서 다시 차씨가 갈라져 나온 것으로 보는 측면에서는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세세한 부분에 들어가서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 이미 언급되었듯이 차제능의 선조, 곧 중국에서 동쪽으로 온 사람이 유루라고 하기도 하고 왕조명이라고 하기도 한다. 기사보 기자(이하 ‘A 기자’)는 알 수 없다고 하고, 현재의 원파록 기자(이하 ‘B 기자’)는 유루라는 것이 말도 안 된다고 펄쩍 뛰는 형국이다. 후자의 경우 B 기자는 ‘류몽인이 어떤 자인지 알 수 없거니와’, ‘4얼의 족보 불사른 일이 거짓인지 참인지 분별할 수 없고’ 등의 표현을 쓰고 있어 ‘차제능이 유루의 후손’이라고 쓴 것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유루이건 왕조명이건 그 주장의 근거는 모두 미약하거나 없다.
    유루로 보는 경우와 왕조명으로 보는 경우는 천양지차이다. 예를 들어 劉씨들이 유루를 그 계보의 설명에 넣고 있다. 유루로 볼 때에는 왕씨와의 관련을 상정할 수 없다. 문제는 류몽인의 글에서 ‘차제능이 유루의 후손’이라고 하는 말을 그냥 써 놓은 것이 아니라 정지상의 “서경야사”에 그렇게 나온다고 명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 류용수의 계보는 차승색 이상은 몇 사람의 이름만 주어져 기록되어 있었고 왕배조의 강남보에서는 모든 선조들의 이름이 일일이 나열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B 기자에 의하면 류용수의 계보에서는 왕수긍에서 왕렴까지가 47세로 나오며 강남보에서는 29세로 나왔다 한다. B 기자는 연대 추정을 통해 후자가 맞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계보들에 상이점이 있을 때는 그곳에 함께 기록된 내용들도 의심하여 진실 여부에 대한 검토를 해야 하는데 그런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한편 원파보 이외의 자료인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에 나온 계보에서는 왕몽이 왕수긍의 13세손이라고 하고 있다. 강남보에 따르면 왕몽은 왕렴의 고손자인데, 류용수의 계보는 물론이고 강남보와도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
    - 왕건에 대한 묘사는 류용수의 계보에서는 왕몽의 3자 왕식(王式)의 먼 후손(약 40세손)으로 나오며, 현재의 원파록(아마도 강남보 자체)에서는 차승색의 아들 차공도가 중국으로 피신하여 왕씨 성을 복구하여 왕공도가 되었다고 나온다. 따라서 현재의 원파보 자체가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 어떤 근거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왕공도의 증손이 왕건이라는 주장이 더해지기도 한다. 이 경우는, 왕공도가 왕몽의 7자 왕림(王琳=차신을)의 후손으로 나와서 서로 다른 두 갈래의 왕건의 유래가 충돌한다(왕식의 자손 對 왕림의 자손).
    어떤 설이건 왕건의 조상은 누구라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은 고려사만 한번 들춰봐도 문제점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고려사는 설원기의 그 상세한 주석을 달았다는 최항이나 신숙주, 이석형 등도 수사관(修史官=사관,史官)에 포함되어 있으며 서문을 썼다는 신석조도 포함되어 있는 그런 책이다. 고려사에는 그 처음에 "고려세계(高麗世系)"라 하여 왕건의 선계(先系)에 대해 자세히 논하고 있다. 고려사가 고려말의 사건 특히 왕통에 관해 왜곡했다는 심증이 크지만 왕건의 조상에 대해서는, 그 기록을 보면 용왕이나 용녀(龍女)가 나오는 신비스런 얘기들도 그대로 소개하고 있고 나름대로 이성적인 논리를 세워 추정하고 있는 등, 특별히 왜곡하고 있다고 볼 이유는 없다. 그런데 고려사의 왕건 선계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분명히 여기 원파록의 내용과는 전혀 합치되지 않는다. 이것은 원파록의 신빙성을 상당히 떨어뜨린다.
    구체적으로, 고려사에 이제현의 글이 인용되어 있는데, “다른 얘기에는 왕건의 증조부가 어떤 중국귀인(황족을 암시)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아마 귀인 자신이 아니라 그 아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중국귀인이라는 것은 어떤 중국의 황제 혹은 황족을 암시하는데 그런 사람은 중국을 떠날 수 없었기에 아들이라고 한 것이다. 또한 이제현은 왕씨가 왕건이 시작한 것이라는 설(기장 설화)을 반박하고 있다. 어쩌면 중국귀인의 성씨가 왕씨라는 의미 같은데, 실상 당시의 당나라 황족이라면 李씨였을 것이기에 맞지 않는다. 만일 설화에서처럼 왕건이 왕씨를 시작한 것이라면 공도와의 연결은 말조차 꺼낼 수 없게 된다.
    한편으로는 원래 ‘건’이 존경어인데 (이제건, 작제건 등의 건은 모두...) 이름으로 삼은 것이라고 말한다. 실상 왕건의 조상 伊帝建, 作帝建, 龍建(融) 등의 이름은 후대 사람들이 붙인 듯한 작위적인 냄새가 나지만, 어쨌건 그게 진짜 이름이었다면 성씨를 쓰지 않은 것이 되어 당시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역시 왕건이 성을 쓰기 시작한 것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고려사를 편찬한 사관들은 자세한 문헌의 고찰을 한 다음 왕건의 증조부가 누구인지 결론을 내리지 않고 그 사람이 누구이건 그저 ‘원덕대왕’이라 부르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다.
    조선 초에 고려사를 편찬한 사람들이 고려의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왕건의 선계에 대해 조선 초에 그냥 쓴 것이 아니라 고려 초기에 쓰인 글들까지 모두 자세히 검토한 것이 나타나 있다. 그것을 19세기(1812년)에 나타난 글인 강남보가 대치할 수는 없다는 것이 타당한 결론이라 생각된다. 물론 고려사에서 어떤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어서 무언가 일이 일어난 것은 확실하다. 그 틈을 비집고 강남보 같은 계보가 나타났는데, 고려사에서도 그냥 모르겠다고 한 것이 아니고 자세한 검토 후에 그런 결론을 내리고 있어 단순한 이름들의 나열과 한두 가지 모호한 이야기를 넘어선 확실한 다른 증거가 있지 않는 한, 그 계보가 사실일 확률보다 조작되었을 확률은 아주 크다. (실제 강남보가 위조되었음을 주장하는 글이 존재하는데 아래에 자세한 내용을 다루었다.)
    - 차승색 부자의 이름(한자)이 경우마다 다르게 주어져 있다. 차승색의 경우 류백, 류색, 류환으로 나오며, 차공숙의 경우 류숙의 한자가 淑, 叔으로 나온다.

5. 원파록 비판

(1) 총론

현재의 문화류씨 원파록은 황제 연원설에 입각한 것이다. 역사란 실제 일어난 일을 의미하기에 그 증명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일반적인 경우 고고학적 증거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문의 역사에 있어서는 그런 것이 있기 어렵고, 혹 있다면 비석의 글, 곧 금석문이 있을 수 있으며, 여기에 관련 사실이 적혀 있는 내부 및 외부 문헌들이 전부일 것이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는 그러한 글 및 문헌들의 신뢰성이며, 또한 그것들이 얼마나 외적인 역사적 사실들과 부합하느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원파록의 비판을 중심으로 논의하고 앞에 제시한 문헌들의 검토를 포함한 보다 포괄적인 논의는 뒤에 진행한다.

원파록의 성립 자체가 혼란스러운 것은 앞에서 이미 보였다. 그런데 그들을 종합하여 하나로 만들어 놓은 현재의 원파록의 사실들 자체도 많은 모순을 갖고 있다. 곧 원파록의 기사들은 거의 대부분 역사와 부합되지 않는 사항이나 증명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사항들이다.

예를 들어 여러 선계에 대한 기록의 배경 중 하나를 이루는 기자의 동래설(東來說)은 그 역사적 존재가 현재 학계에서 대개 부정되고 있다. 왕수긍의 존재나 사적 역시 의심받고 있다(민족문화대사전). 또한 차식의 신도비명이나 설원기의 이예장의 글에서는 신라시대 때 차제능으로부터 차승색까지 18대에 14명이 승상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신라에는 승상과 사공 같은 직책은 아예 없었다. 그리고 승상이 정승 같은 최고의 벼슬을 뜻하는 의미로 쓰인 명칭이라 해도, 차씨가 대대로 그런 극히 높은 직위를 대대로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는 말인데, 실제 역사에는 이런 사실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혹자는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무대라고 주장하는데, 그래도 마찬가지이다.) 또 애장왕과 헌덕왕 때의 차승색의 일 역시 역사에 나오지 않는다. 차승색이 그 ‘승상’이라는 고위직을 했다고 하기에 사건이 있었다면 필경 기록되었을 것인데, 헌덕왕 때의 사건들이 삼국사기에 비교적 소상히 나오며, 두 번의 반란 사건도 기록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원파록에서 왕건에 대한 주장도 중요한 배경을 이루고 있다. 어차피 왕씨와 연결되는 계보는 왕씨가 비중이 있기 때문에 후대에 주장되었을 것이다. 우선 유루와 왕조명에 대한 불명확성 때문에 왕씨와의 연결이 아예 부정될 수도 있다. 왕건 관련해서는 이미 앞에서 자세히 다루었지만, 요컨대 후대에 확실한 사료의 발굴이 있기 전에는 그 존재도 의심이 가고 그 내용도 알 수 없는 몇 마디 말들로서는 고려사 집필자들의 고찰과 판단을 바꿀 결론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성적으로 판단해도 문제가 되는 경우도 많다. 성씨의 발생이 고려 건국을 전후해서 급격하게 이루어진 우리나라에서 명확한 증거가 없이 성씨를 중국의 전설상의 존재인 황제(黃帝)까지 연결시키거나 그 이야기에 용(龍) 같은 것을 등장시키는 계보는 신앙이나 설화의 대상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올바른 역사관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여러 성씨의 시작 설화에는 이런 요소가 많지만 설화로서 끝나야지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들을 특수하다고 생각한다거나 어떤 역사를 바꾸려 한다면 비이성적인 행태일 것이다.

황제로부터 수 세대, 하후우로부터 약 10 세대, 왕씨로 약 60 세대, 차씨로 약 30 세대를 내려왔다는 계보는 대부분 한 줄로 이어져 있으며, 이야기를 끼워 맞추기 위해서 같은 세대에 두세 사람 정도 열거되어 있는 경우가 간혹 있을 따름이다. 예를 들어 역사적 사실에는 합치되지 않는 어떤 사람이 어떤 다른 역사적인 인물의 아들로 나올 때 같은 경우이다. 물론 옛날에는 기록이 포괄적이지 않고 기록하기도 어렵고 기록 자체의 보관도 어려웠고, 현재의 족보의 개념은 나중에 만들어졌기 때문에 계보가 남아 있다면 바로 직계 조상들만 적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런 것을 감안해서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시대가 떨어지는 두 사람의 이름만 가지고 어느 후손인가가 그들을 자기 조상에 적절히 끼워 넣으며 그 사이의 사람들 이름을 적당히 끼워 넣었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그들 둘이 성이 서로 같다는 사실 이외에는, 서로 같은 혈통이라는 증거가 없고, 그들이 자신의 조상이라는 객관적인 증거도 없이 혈통을 창조해 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물론 언급된 많은 이름들 중에 역사적으로 실존이 확인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계보가 조작되었다면 당연히 역사적 사실에 끼워 맞추었을 것이기에 그런 사실 몇 가지 때문에 인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또한 반대의 입장에서 몇 개가 맞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부정하는 것도 반드시 올바른 태도는 아니다. 가장 합리적인 태도는 그런 주장도 있음을 인정하되, 그것이 확실한 사실로 드러나기 전에는 진실이라 믿지는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오래 전의 일들이라 현재 확실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경우엔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상태로 남을 확률이 높다.

(2) 강남보 위조설

류용수의 계보와 왕배조의 강남보는 모두 중국이 그 기원으로 되어 있다. 류용수의 계보를 소개한 류지원의 글에서는 중국 출신의 류용수라는 사람이 전한 내용이, 강남보를 소개한 차헌기 관련 글에서는 명확하진 않지만 중국 강남 출신으로 보이는 왕배조라는 사람이 도연이라는 노승을 통해 전한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다. 우선 차헌기의 글의 경우는 전체적으로 객관성이 완전 결여되어 있어 심히 모호하다.

강남보에 대해서는 다름 아닌 연안차씨 족보 하나에 그 거짓을 논증하는 글이 실렸다. 그것은 1987년에 간행된 "연안차씨강렬공파보(剛烈公波譜)"에 수록된 "강남왕계변위록(江南王系辨僞錄)"이라는 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812년, 곡성(谷城: 지명) 차헌기가 일가들을 속여 이익을 챙길 계책(計策)을 교묘하게 꾸며 왕계(王系: 왕씨의 계통) 57세를 위조하고, 선세(先世)에 근거 없는 사적을 억지로 갖다 붙여 덕오(德五: 사람 이름인 듯; 차덕오)의 가승(家乘)에서 나왔다고 함.
    - 또 차헌기는 그 아우 차형기(車衡基)와 류진하(柳震夏), 류형순(柳馨淳)과 함께 도연과 왕배조의 얘기를 꾸며내었음. (내용은 위에 소개됨.)
    - 이런 거짓된 계보인 강남보를 150여권 제작하여 영호남 지방에 판매함.
    - 1830년, 하동(河東: 지명) 차덕륜(車德輪)이 오천(鰲川)서원의 임원으로 영호남을 다니다가 그 위조의 흉계를 알고 "僞系辨破錄“을 지음. 이 안에는 강남보의 증거가 없음을 언급하고 공자를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의 옛사람들은 근거가 없을 때엔 함부로 꾸미지 않았으며, 성씨가 같다고 그 이전의 사람을 조상이라 끌어대지 않았다는 말이 들어 있었음.
    - 1879년, 초계(草溪: 경남 합천의 지역)에서 전에 시종령(侍從令: 벼슬이름)을 했던 차석호(車錫祜)가 장단(長湍: 지명)의 차재철(車在轍)과 서천(舒川)의 차기보(車冀輔)와 함께 그 위조를 자세히 살펴 경상감영에 공소(控訴: 항소)하여, 예조(禮曹)의 공안(公案: 공식 문건)으로 등재됨.
    - 1907년에 수보(修譜: 족보제작)할 때 바로잡았으나 차씨와 류씨들 간에는 와전된 계통을 믿는 사람들이 있어 통탄할 노릇임.
    - 최동주(崔東洲)가 편찬한 "오백년기담"(박문서관, 1913)에 보면 차헌기가 왕배조의 작품이라고 말한 시가 실은 인조 때 유구국(琉球國)의 세자(世子)의 시라 함. 그가 제주도로 표류해왔는데, 제주목사 이기빈(李箕賓)이 가서 신문하니 말이 통하지 않아 시를 한 수 지어 바친 것이 바로 그 시라 함. [유구국은 류우쿠우이며, 일본 남쪽 북위 26도 지역에 있는 오키나와 제도의 섬을 말한다.] 이로써 차헌기 등이 외국인의 시를 몰래 쓴 것임을 알게 되었음.

제주목사 이기빈의 일은 왕조실록에 보면 광해군 때의 일이다. 이기빈은 광해2년(1610) 2월∼광해3년(1611) 9월 동안 제주에 부임해 있었고, 그 일은 1611년 3월경에 일어났다. 표류해온 배에 탄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그 재화를 나누어 가졌는데, 유구국 왕자가 안색을 변하지 않고 조용히 해를 당해 모두들 안타깝게 여겼다 한다. 다른 기록에는 스무 대여섯살의 사신이라고도 나오지만 왕자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문사(文辭)가 제법 능숙하고, 이기빈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글이 매우 비장했다고 되어 있다. 이기빈은 이 일로 귀양을 갔다. 차헌기의 글에 왕배조의 시라고 나오는 것 역시 기개와 비장함이 느껴져서 최동주의 설명과 잘 합치된다. 이상을 보면 이 변위록에서는 강남보를 철저히 위조된 것으로 낙인찍고 있으며, 사족이 필요 없을 듯하다.

(3) “차원부설원기”와 “대동운부군옥” 등의 문헌 관련

원파록의 기자들도 원파록을 신뢰하는 근거로서 문헌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고 생각되며, 문헌은 역사의 파악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설원기 자체도 일견 문헌적 비중이 높아 보이며, 설원기의 주장에서처럼 차제능 이하 신라에서의 차씨들의 계보나 차승색(류색)에서 시작된 류씨와 차씨가 같은 뿌리라는 얘기 등이 서희(942-998), 정지상(?-1135), 김방경(1212-1300)의 고려시대 당시에도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자세히 고찰해 보면 이들 문헌은 거의 설원기에만 근거하고 있고, 설원기는 조작의 요소가 분명하여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 모르는 문헌임이 밝혀진다.

류지원의 글의 경우 그 진위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는 비록 역사적인 인물로서 류덕신과 권문해라는 두 사람뿐이지만, 권문해의 경우는 단순하지 않다. 바로 “대동운부군옥”을 쓴 작자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차원부설원기”를 공개한 최초의 글이라 여겨지며, 차원부설원기나 대동운부군옥 모두 문화류씨 계보 관련하여 여러 문헌을 언급하고 있다. 류몽인의 차식의 신도비명도 문헌을 언급하고 있으나 이들과 중복되며, 그 내용 또한 중복된다. 이러한 직접 및 간접 문헌들은 원파록에 객관성을 부여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그런데 차원부설원기 자체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자세히 논했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고 문화류씨 선계에 관한 부분만을 다루었다. 다만 여기서 “차원부설원기”는 그 책에 나온 1456년에 쓰인 것이 아닌 증거가 책 안의 곳곳에서 발견되어 후대의 첨삭이 가해진 책임이 확실하다는 것만 언급한다. 한편 설원기에 나오는 계보에 대한 소개와 비판은 이미 이 글의 앞에서 이루어졌다.

설원기 본문의 본론이 시작되는 곳에서 차원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소개가 주어진다: “사간원 좌정언 차원부는 문성인(文城人) 류차달의 첫째 아들 대광지백 효전의 후예이다.” 여기서 우선 고려시대의 금석문에서까지 밝히고 있는 고려태조 삼한공신 류차달은 이름만 나오고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효전이라는 인물이 모든 정사(正史)에 반해서 대광지백이라는 호칭으로 등장한다. 고려사를 집필했던 인물들도 참여하고 고려사에 누구보다 정통했을 박팽년이 본문을 썼다는 설원기의 기록으로서는 전혀 맞지도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 구절이라 생각된다. 더구나 차효전에게 부여된 호칭인지 관작인지 모호한 대광지백이란 단어는 성립할 수 없는 단어이다. 곧 대광은 벼슬 이름이고 백은 관작제도인데, 그 둘이 혼합되어 있는 이해할 수 없는 단어인 것이다. 설원기는 또 차효전이 공적을 세워 식읍 1000호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 말은 그 공적이 찬란했고 그 벼슬이 실질적이었다는 뜻이 되는데 역시 차원부설원기 전체의 문제점과 동일하게 정사에서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일 따름이다. 더구나 참언 운운하며 그에 관한 기록들이 역사에서 사라졌음을 방어막으로 치고 있는데, 오히려 이것 또한 아무런 증거가 없어 그 진위에 대해 더욱 의심이 가게 만든다.

설원기는 그 자체가 왕명을 받고 박팽년 등의 명망 있는 신하들이 제작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고 (1) 서희, (2) 정지상, (3) 김방경의 책들, 그리고 (4) 김사형과 김균이 정종에게 보고한 계보가 언급되고 있다. 우선 이들은 현존하는 것이 하나도 없어 문제가 된다. 그리고 이중 (4)는 김균이 정종이 왕이 되기 조금 전에 죽어 보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과 (2)는 책 이름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도록 언급할 때마다 다르게 그 제목 혹은 호칭이 불리고 있다. 이중 정지상의 책은 류몽인의 글과 대동운부군옥에도 등장한다. 설원기에서는 “서경잡기”와 “서경야사”로, 류몽인의 글에서는 “서경야사”로 나오는데, 대동운부군옥에서는 왕수긍에 대한 설화를 소개하면서 정지상의 책을 중복인용(책 A에서 인용했다고 책 B에서 인용한 것을 다시 책 C에서 인용하고, 마지막으로 그것을 책 D에서 인용함) 하고 있는데 결국 저자를 모르는 “서경잡록”이라는 책 제목이 등장하고 정지상의 책으로는 “보음록”(報陰錄)이라는 것이 등장한다. (곧 A=보음록, B=동방설원, C=서경잡록, D=대동운부군옥.) 이를 보면 설원기와 류몽인의 글에서 “서경..”은 “서경잡록”의 오기(誤記)이고 실제로 정지상의 작품은 “보음록”이라 해야 맞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설원기의 저자들이 실제 정지상의 책을 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심증을 갖게 한다. 대동운부군옥의 내용에 따르면 “보음록”에는 고려태조 왕건의 선계에 대한 명시적인 언급도 있는데 문제는 고려사의 저자들도 그런 내용에 관해 전혀 암시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태조에 관계되는 묘사이기 때문에 고려나 조선 시대에 누구나 한번 들으면 기억할 만한 내용임이 분명한데도 그런 내용이 고려사의 저자들도 모르게 세상에 드러나지 않다가 비로소 대동운부군옥에 나타났다는 것도 의심해 볼 대목이다.
    더구나 주목할 점은 책들이 모두 주석에서만 언급되어 있고 직접 인용이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다만 신도비명에서는 “정지상의 서경야사는 제능을 유루의 후예라 칭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 역시 직접적인 인용이라 보기 어렵다. 신도비명은 설원기를 요약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이런 판단을 돕는다. 또한 원파록에서도 이런 문헌들을 본 듯이 표현하는 부분도 있으나 앞뒤를 자세히 검토 비교하면 설원기의 주석을 인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여러 번 언급된 정지상의 책마저 실제 존재했었는지도 의문이 갈 수 있으며, 더구나 모든 책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이었으며 얼마만큼 신빙성을 갖고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이상을 보면 문화류씨 선계에 관해 다루고 있는 이상의 문헌 혹은 자료들은 그 실재 여부까지도 의심받을 정도로 사료로서의 자격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해 더 이상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심한 경우 그런 문헌을 등장시킨 것이 특히 “차원부설원기”의 조작일 수도 있고 그 정반대일 수도 있다는 판단 외에는 내릴 수 없다.

한편 참고로, 1619년에 쓰였다는 류몽인의 차식 신도비명에 쓰인 내용은 앞에 자세히 소개했는데, 이것은 다음의 몇 가지 차이점만 제외하면 설원기를 옮긴 듯이 보인다.
    - 살해된 숫자를 81명으로 기술. 설원기는 70여명.
    - 차원부를 방석의 어머니의 종조뻘로 기술. 설원기는 정종 비의 종조뻘로 나옴.
    - 차원부의 아들이 자살한 시점을 차원부 살해 바로 다음으로 설정함. 설원기는 태종에 의해 벼슬이 내려진 다음에 다시 모함을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함.
    - 문종 때 박팽년에게 설원기를 짓게 했다 함. 설원기는 세조 때.

그리고 백보 양보해서, 아무리 고려시대에 어떤 글들이 존재했었다 해도 아무 글이나 역사적 사실로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님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앞에 소개한 것들을 포함한 많은 문헌들이 황제 연원설과 류-차 동원설을 받쳐주지 않고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포괄적으로 다루었다.

 
IV. 역사에서 본 문화류씨 선계문제

여기서는 지금까지와 각도를 달리해서 문화류씨의 선계문제에 접근을 해보기로 한다. 그러니까 확실하다고 믿을 수 있는 자료들만을 바탕으로 문화류씨의 시초에 대한 묘사를 하는 것이다. 개연적 사실에 입각한 논의만이 진실에 접근할 수 있기에 구체적인 선계의 묘사는 그에 대한 사실적 연결고리가 있어야 구성이 가능할 따름이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소설적 창작에 불과할 것이다.

대저 한 성씨의 시조란 말 그대로 처음 시작이다. 후손들이 그 위의 내력을 알 수 없는 가장 윗분을 시조로 삼는 법이다. 따라서 시조 위에 또 조상이 밝혀져 있다면 어불성설이다. 황제 연원설에서 말하듯, 대승공이 류색으로 성과 이름을 바꾼 차승색의 계통에서 나왔다면 류색이 류씨 시조가 되어야 하며 그 5대손이라는 대승공을 시조라 부르는 것은 경우에 닿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선계가 불확실한 점이 있거나 어떤 사정에 의해 시조의 선조가 존재하는 채로 유지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만약 시조의 선계가 확실하게 밝혀져 있다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새로 족보를 구성하는 것이 타당한 일이라 생각된다. 만일 시조의 내력이 자세하다면 그 선계도 밝혀져 있을 확률이 높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조의 내력은 불충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억지로 선계를 만들어 붙이기보다 그대로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앞에 제시된 문헌들을 살펴보면 대승공 이상의 선계와 류-차 동원의 주장이 차원부설원기의 시기부터 나오며 1589년의 대동운부군옥에서 설원기의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설원기가 쓰였다는 1456년 이후에도 1562년의 현존하는 문화류씨 최고의 족보 “가정보”나 심지어 만성보로서의 획기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1652년의 “씨족원류” 등에까지 선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을 보면 설원기의 내용(여기서는 선계에 관한 사항에 국한함)이 가정보의 1562년 이후에 설원기에 끼어들어간 것이라 추측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누차 얘기해왔지만, 사대주의가 국시였던 조선에서 자신이 중국의 황제의 자손이라는 말을 들었다면 당장 그것을 밝히지 않았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설원기에서 마치 문화류씨의 선계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문헌이 있는 것처럼 쓰여 있지만 고려사의 “고려세계”나 당대인 고려시대의 여러 문헌과 사료에 그러한 사실이 전혀 기술되지 않은 것을 보면 설원기에서 조작을 한 것으로 결론 내리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대승공에 대한 사항들을 자세히 검토해 보면 대승공 자신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몇 개 되지 않는 판국에 그를 둘러싼 명확한 주장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임을 느낄 수 있다.

1. 대승공의 존재

문화류씨의 시조는 대승공(大丞公) 류차달(柳車達, 880?-?)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시기에 사신 분이다. (이하 대승공이라 부름.) 이 분의 존재에 대해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것일까.

대승공은 현존하는 고려의 역사서에 그 행적이 직접 나오지는 않는다. 고려사에 간접적으로 나오는데, 고려사는 1421년 1차 완성하고 1451년에 최종 완성된 역사서이지만 고려시대의 사료들을 종합 정리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내용적인 시대는 훨씬 앞서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고려사는 어떤 근거로 대승공에 대한 묘사를 했을까.

앞에 문헌 소개에서 다루었지만, 고려사에 “류공권의 자는 정평(正平)이며 유주(儒州) 사람이다. 그의 6대조는 대승(大丞) 차달(車達)인데 태조를 보좌하여 공신으로 되었다.”고 나오는데, ‘대승’이라는 타이틀과 류차달이라는 이름, 그리고 태조를 보좌하여 공신이 되었다는 추상적인 묘사만 나온다.

우선 '대승'은 고려 초기에 일찍부터 사용된 관호(官號: 관직의 호칭)이다. 이것은 중앙의 관리의 벼슬을 의미할 수도 있고 지방에 있던 관리 곧 향리(鄕吏)들에게 주어진 벼슬을 의미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고려 초기에 후삼국 통일에 협조한 지방 사람들에게, 그리고 각지에서 귀부(歸附)해온 자들에게 각종 벼슬을 내렸다. 대승은 향직(鄕職: 지방의 향리에게 주던 벼슬) 9등급 가운데 셋째 등급으로 정해졌다. 최상의 벼슬은 아니며 개국공신이었다면 받을 만한 그런 벼슬이라 생각된다.

필자가 입수할 수 있었던 가장 오래된 금석문인 류공권 묘지명(1196년)에는 대승공이 나오지 않는다. 대승공이 언제 사망했는지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 후 250여년은 흐른 때이다. 증조까지만 밝혀져 있는데, 유사한 시기의 금석문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증조까지 조상을 밝히고 있는 것이 추세였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드물게 선조 중 개국공신이 있음을 밝히고 있는 묘지명도 있어 일괄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최유청(崔惟淸, 1095-1174, 문신)의 경우에도 같은 상황으로서 그의 묘지명에는 개국공신인 6대조 최준옹(崔俊邕)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고려사에는 그가 ‘태조를 도와 공신이 되었다’고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다음은 류공권의 묘지명이 작성되고 나서 144년 후에 만들어진 류보발의 묘지명(1340년)이다. 여기서,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인 1344년과 1349년에 제작된 권부 처 류씨의 묘지명과 류돈의 묘지명에서도, 대승공의 묘사가 주어져 있다. 류보발의 경우에는 “(고려)개국의 위업을 도와준 이가 있는데”라는 간접적인 표현을 쓰고 있고, 류씨부인과 류돈의 경우에는 “대승 (류)차달이 태조를 도와 공을 세웠다”와 “그 선조인 (류)차달은 태조 대의 공신이다”라고 명시되어 나온다. 앞의 두 개는 당대의 명문장가였던 이제현과 그의 문인인 이곡이 쓴 것이라 더욱 의의가 크다. 이때는 고려의 후삼국 통일(936년)에서 따지면 400여년 후이다. 류공권(1132-1196)은 과거 급제로 관(官)에 진출해서 높은 벼슬까지 오르고 그 손자 류경(1211-1289) 때에 이르러서는 나라의 최고 실력자가 되고 막대한 부를 누렸다. 류경의 손녀가 위의 류씨부인이고 손자가 류돈이다. 비록 대승공의 시기로부터 수백 년 떨어진 자료들이지만 같은 고려시대에 이런 명확한 사료들이 있었기에 고려사에서는 류차달의 존재를 인정하며 ‘대승’이라는 관직명과 ‘태조를 보좌하여 공신이 되었음’의 두 가지를 명기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여기서 본격적으로 대승공의 실재에 관한 논의를 전개할 시점이 된 듯하다. 고려사는 과거의 기록들을 나름대로의 진위와 비중을 따져가며 사료로 삼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거기서 대승공이 태조를 보좌해 공신이 되었다고 기록할 때는 어떤 증거 위에 그렇게 했을까. 단순히 누군가의 비석에 쓰여 있는 내용이고 타당성이 없는 주장이라면 단 한 줄이라도 섣불리 쓰이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정확성을 기하려고 중간에 편찬자들을 교체하기까지 한 고려사의 편찬 경위를 고려하면 고려사의 집필 시점에서 왜곡되었을 가능성은 없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조선의 정통성을 주장하려고 고려 말의 역사를 왜곡한 점은 인정된다.) 만에 하나 후손들이 선조 중 한 사람을 개국공신으로 둔갑시킨 것이거나 아예 존재하지도 않은 사람을 개국공신으로 만들어낸 것이라면 조선 초가 아니라 류경의 시대 전후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확한 증거가 있지 않는 한 주장할 수 없는 가정에 불과하다.

고려사 자체를 들여다보면 고려사의 기록의 정확성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류공권은 고려사 제99권에 나오는데 거기에 18명이 올라 있다. 이중 선계의 기록이 없는 사람이 10명이고 아버지를 언급한 것이 3명, 그리고 나머지 5명(최유청, 이공승, 왕세경, 함유일, 류공권)의 조상(5-8대조)은 태조 때의 공신으로 나온다. 게다가 그 공신들은 고려사에 다른 기록이 없다. 다른 13명이 이들 5명 보다 그 직책이나 비중이 낮았다고 볼 수 없을 것임을 생각해 보면 이들이 조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증거도 없어, 조작되지 않았다는 주장에 맞설 수 없다. 또 예를 들어 왕식렴의 아버지는 고려 최고의 관직인 삼중대광으로 나오는데 그 사람조차 고려사에 왕식렴의 아버지로서 단 한번 언급될 뿐이다. 고려사가 조선조에 와서 지어졌지만 정당한 사료(史料) 없이는 그 내용을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씨 왕조의 정통성을 부여하려고 고려의 후대의 역사를 조작했다는 등의 의혹도 있기는 하지만 공신들의 경우 고려사 편찬자들이 특별히 높이거나 낮출 이유가 없었을 것임을 생각하면 그 기술의 정확성을 의심할 수는 없다.

류차달이라는 사람의 존재는 의심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그 무덤이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곳은 그 지방 사람들이 류릉(柳陵)이라 하여 숭상하던 곳이었고, 후대의 문화현의 지도와 지방지에도 명기되어 나오는 곳이다. 또한 그곳이 길지(吉地)로 알려져 있어 조선 중기에 해주(海州) 사람이 근처에 몰래 무덤을 쓴 일까지 있었다. 물론 무덤이 있다 해도 확실하게는 고고학적 증거가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실상 그런 증거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이런 것만으로도 충분한 증거가 되고도 남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의 행적에 대한 증거는 어떨까. 과연 개국공신이었을까. 언제 어떤 일을 했을까. 실상 가정보까지의 개념에 의하면 대승공은 실상 개국공신이라는 사실과 그 공적이 수레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개국공신의 측면에서 고찰해 보면 좋을 것이다.

개국공신
가정보에는 “통합삼한익찬공신질”(統合三韓翊贊功臣秩)이 실려 있다. 개국공신의 명단인데, 1등 5명, 2등 12명, 3등 10명, 그리고 4등 2명 중에, 대승공은 2등공신으로 나온다.

    1등: 최응,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2등: 유금필(庾금弼), 김선평, 장길, 류차달, 이도(李棹), 함규, 김선궁, 홍규, 왕희순, 김훤술, 윤신달, 박윤웅
    3등: 왕식렴, 진평, 견권(堅權), 박희술, 능식(能寔), 권신(權愼), 염상(廉湘), 김락(金樂), 연주(連珠), 마난(麻煖)
    4등: 김홍술, 박수경

이 명단이 파평윤씨(시조 윤신달)과 전의이씨(全義李氏, 시조 이도) 족보에도 나온다. 족보에는 "동사"(東史)라는 곳에도 나온다고 되어 있는데, 이 자료는 가정보보다 후기 자료라고 생각된다.

고려사의 태조 원년(918) 곧 고려가 개국하던 해의 기록에 다음과 같이 상을 내리고 있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 등을 제1등으로 하여 금은 그릇과 비단 침구와 능라(綾羅), 포백 등을 차등 있게 주라. 견권(堅權) 능식(能寔), 권신(權愼), 염상(廉湘), 김락(金樂), 연주(連珠), 마난(麻煖) 등은 제2등으로 하여 금은 그릇과 비단 침구와 능(綾), 백(帛) 등을 차등 있게 주라. 그리고 제3등 2천여 명에게는 각각 용, 백, 곡식들을 차등 있게 주라!"

이 기록과 비교하여 앞의 공신질의 1등공신에는 최응이 추가되어 있을 뿐 동일하다. 그런데 고려사에 2등공신은 7명인데 모두 공신질의 3등공신으로 들어가 있다. 이를 보면 고려사의 918년의 명단을 기초로 해서 적절히 변경한 것이 공신질인 것으로 느껴져 그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 같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간혹 사학자들 중에도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개국공신이란 명칭은 고려사 918년의 명단에게 붙인 것은 아니고, 후에 사용된 것이다(경종 2년 977년에 처음 사용되었다 함). 실제 고려 918년의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공신들에게도 개국공신이란 명칭을 붙이고 있다. 공신 관련으로는 918년에 공신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상을 주고 있으며, 명시적인 기록은 없지만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상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940년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고 공신당(功臣堂)을 설치하여 삼한공신들을 벽에 그리고 무차대회(無遮大會: 신분귀천과 고하를 차별하지 않고 여는 대법회)를 1주일 동안 열었다.

공신의 호칭에는 여럿이 있다. 개국공신, 태조공신, 삼한공신, 배향공신 등이다. 삼한공신 중에는 일반 공신과 벽상공신의 두 등급이 있었다. 940년의 고려사 기록에는 누가 벽상공신이었는지 구체적인 사항은 나와 있지 않다. 태조 대의 공신 중에 고려사에 벽상공신이라고 명기되어 나오는 사람은 한 사람뿐인 듯하다. 성종 13년(994)에는 배향공신이 제정되었고 후에 그 명단에 변동도 있었다. 918년에는 상을 받은 사람이 2000여명으로 나온다. 이후 문종 8년(1054) 12월에 태조 때의 공신 3200명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조선과는 달리 고려는 장기간의 전쟁을 통해 건국이 되었기 때문에 그에 관련한 공신들의 숫자가 상당히 많을 수밖에 없었다.

공신의 종류도 여럿이었다. 전쟁에 직접 참여한 경우, 왕을 보좌한 신하, 지방 호족 등의 신분으로 귀속되어 들어오거나 도움을 준 경우, 태조와의 혼사로 공신이 된 경우 등이었다. 공신의 명단은 정사에서는 제한적으로 드러나 있으나 고려시대의 다양한 금석문과 기록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공신으로 명기되어 있다. 그 숫자는 한 조사에 따르면 60명 쯤 된다(“나말여초의 호족과 사회변동 연구”, 김갑동,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0). 이 연구에는 류차달은 삼한공신으로 나오며 그 근거는 “고려사”, “익재난고(益齋亂藁) 7”, “신증동국여지승람 42”로 주어져 있다. 첫 번째와 세 번째는 앞에 소개 되었고 두 번째 자료는 익재가 이제현의 호로서 역시 소개된 “권부(權溥) 처 류씨(柳氏) 묘지명”을 의미한다. 여기에 앞에 소개된 고려시대 금석문 두어 가지가 그 근거로서 더 추가될 수 있다.

918년의 공신은 2000여명이 되지만 그곳에 포함된다면 3등에 속해 있었다고 해석될 수밖에 없으며 삼한공신질을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삼한공신질에 2등공신으로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개국시보다는 930년 전후와 936년의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4등공신으로 나와 있는 김홍술(홍술)은 929년 견훤이 의성부(義城府)를 침범한 견훤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는데 태조가 슬피 울며 “내가 두 팔을 잃었다”고 말한 사람이다. 김선평과 장길은 930년에 견훤과의 싸움에서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리고 936년은 견훤의 아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를 토벌하여 삼한 통합을 완수한 역사적인 해인데, 이해 9월의 전쟁의 기록에 많은 사람들 이름이 등장한다. 이중 918년의 공신 명단에 들어 있는 홍유, 배현경(이상 1등), 견권, 연주(이상 2등)의 이름이 들어 있으며, 공신질에 들어 있는 유금필과 박수경도 가담하고 있다. 2등공신인 이도는 왕건이 견훤을 정벌하고자 남하하여 금강에 도착했을 때 강물이 범람하자 태조를 도와 무사히 건너게 해주었으므로 태조가 도(棹)라고 이름을 하사(下賜)하고 공신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대승공 역시 간단한 표현만 남아 있지만 항시 남정(南征)이란 말이 빠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런 분위기를 감안하면 대승공 역시 삼한공신으로서 918년의 공신 보다는 후기의 공신인 것으로 생각된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개국공신은 고려의 초기에 건국에 기여한 사람들을 폭넓게 지칭하는 명칭이기에 918년의 개국에서 공을 받지 않았다 해도 삼한공신을 개국공신으로 부르는 데는 무리가 없다. 태조 조 공신 중에는 아예 그 구체적인 사적을 알 수 없는 사람들도 많다.

그리고 성씨가 쓰이기 시작하고 역사적인 기록이 금석문이나 문헌 등을 통해 많이 남았기 때문에 태조 공신이 그 시조인 경우가 30여 건이나 된다. 이런 것을 감안하면 대승공의 경우도 공신이라 불리고 있거나 시조로서 받들어지고 있는 것이 독특한 상황이 아니라 일반적인 경향을 따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편 대승공이 벽상공신인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삼한공신 2등이면 벽상공신인 것이 당연한 측면도 있고, 고려시대 금석문에는 벽상공신이라고 명기되어 나오지는 않고 대략 후대의 “씨족원류”와 그 이후에 나오는 것으로 보여 후대의 추가라고 보이는 측면도 있다. 하여간 지금의 족보는 벽상공신임을 명기하고 있다. 그리고 관작으로서 원래부터 ‘대승’을 받은 것인지, 그보다 낮은 품계였는데 문종 8년(1054)에 추증되어 그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없다. 앞에 소개한 자료 중에는 “씨족원류”에 ‘중대광’이라는 대승보다 높은 품계가 나오는데, 다른 자료에는 한결같이 ‘대승’이라고 나온다. 이로 보아 ‘대승’만이 믿을만한 벼슬이름이라고 생각된다.

대승공이나 전의(全義)이씨의 시조가 된 이도의 경우는 유사한 점이 많다. 전쟁에 직접 참가하여 싸운 것이 아니라 전쟁 수행을 간접으로 도와서 공신이 된 점이 그렇고 그 공(功)과 관련한 이름을 받았다는 얘기가 있는 것도 같다. (이도의 경우는 초명이 치(齒)였다고 한다.) 이런 전승을 보면 그 공이 제한되어 보이지만 전쟁에서 식량의 공급(대승공)이나 군대의 이동(이도)은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패배는 물론 심할 경우 전멸을 가져올 수 있는 일이라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태조 12년(929)과 13년(930), 그리고 18년(936)에는 견훤 혹은 그의 아들 신검과의 싸움이 크게 일어났는데 그 무대가 경상도와 전라도이다. 특히 929년과 936년에는 경상도가 주 무대로 등장한다. 흥미로운 사료는 “난중잡록”(亂中雜錄, 의병장 조경남 趙慶男의 야사)에 나온다. 임진년(1592) 5월에 실린 세 번의 격문에 ‘차달’이라고 이름으로 언급되고 있다. 격문의 저자도 당시 전라감사 이광(李洸, 1541-1607), 영남 초유사(招諭使: 난리 중에 백성을 타일러 경계하는 일을 맡아 하던 임시 벼슬) 김성일(金誠一, 1538-1593), 그리고 경상도 안동의 전(前) 검열(檢閱) 김용(金涌, 1557-1620)이었다. 임진왜란을 중심으로 수록한 자료가운데는 주로 “경상순영록”(慶尙巡營錄)이 출처로 밝혀져 있는데, 세 개의 글도 모두 거기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중 이광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웃사람을 친애하여 그를 위해 죽어도 좋다는 각오를 하며, 대의를 무기로 앞장서서 장수를 목베고 깃발을 뽑아 적의 수레바퀴 한 쌍까지도 돌아가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이 어찌 일대에 공이 높았던 충갑이나 먼 후손에까지 은택을 미치게 했던 차달만 못하다 하겠는가.”
    (親上死長 伏大義而 先登斬將건旗 使雙輪之不返 豈特충甲功高一代 抑亦車達澤流耳孫)
    [*건=蹇의 足 대신 衣; 충=얼음 빙 부에 中]
    원문에는 ‘충갑’ 아래에 “성은 원(元). 고려 때 사람인데 필부로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함)하여 큰 난리를 평정함.”, 그리고 ‘차달’ 아래에 “성은 류(柳). 고려 때의 문화 사람임. 난에 임하여 양곡이 모자라자 차달이 수레를 가지고 개인의 양곡을 운반해다 군에 보급해 주었음. 난이 평정된 후 차달이라고 이름을 내리고 녹훈(錄勳: 공훈을 기록하거나 내림)함.”이라고 주석이 달려 있다.
    또한 김성일의 글에도 역시 차달과 충갑이 나온다.
    “부유한 백성은 차달의 곡식을 운반해다가 군사들의 식량을 보급해주고, 용맹한 군사는 뛰쳐 일어나 충갑의 군사가 되어 왜적을 죽이라.”
    (富民則運車達之粟以贍軍 勇士則奮충甲之兵以?賊)
    마지막의 김용의 글에도 ‘차달의 곡식’(車達之粟)이란 말이 나온다. 원충갑은 원주의 별초(別抄)에 들어가 있다가 1291년(충렬왕17) 합단(哈丹)이 침입하여 원주성을 포위하자 전후 10차에 걸쳐 적을 무찔러 적의 예봉을 꺾음으로써 성을 고수하였고, 그의 공로로 원주는 익흥도호부로, 다시 1308년(충선왕 1) 원주목으로 승격되어, 잘 알려진 인물이다. 이런 구절들을 보면 대승공의 ‘차달’이라는 이름이 자발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군사들에게 곡식을 공급하는 사람의 대명사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필자는 그런 격문이 쓰인 지방이 전라도와 경상도임을 주목한다. 그만큼 그 지방에서는 식자들이 알만한 공적이 되었던 것임을 의미하며, 대승공의 공적이 앞에 언급한 929, 930, 936년 중에 한 번 혹은 지속적으로 일어났음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이상을 종합하면 류공권의 묘지명에 대승공이 등장하지 않지만 증조까지 표기하는 것이 당시의 관습일 수도 있고 근처에 다른 조상의 비석에 기록이 있어 중복을 피했을 수도 있는 등, 사적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대승공의 사적의 부재의 증거로 볼 수는 없으며 같은 상황이 다른 사람(최유청)에게서도 발견된다. 비석이 세워졌을 것임이 확실하고도 남는 류경이나 그 바로 전후의 대의 금석문은 남아 있지 않고 현재 내려오는 족보 등의 기록에는 대승공의 기록이 모두(冒頭)에 나오므로 그들의 기록 속에는 반복되지 않기에 지금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비록 고려의 후기이긴 하지만 저명한 문장가들이었던 이제현이나 이곡이 쓴 금석문, 그리고 고려시대의 사료를 바탕으로 쓰인 고려사 등이다. 이들에 확실히 대승공이 명기되어 있고, 이것을 부정하는 고려시대의 기록이 있을 수 없어 그 사적을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차달’이라는 이름
앞의 자료들 중 고려시대의 마지막 자료로 볼 수 있는 것이 흥률사의 기록이다. 여기서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대승공의 이름 ‘차달’에 관한 것이다. 대승공이 수레와 관련된 공적을 이룬 것은 분명해 보인다. 고려시대 금석문들은 ‘태조를 도와 공을 이루었음’만을 언급하고 있고 구체적인 그 공적을 기술하고 있지 않는데, 일찍이 1423년의 영락보 서문에 ‘재산을 기울여 임금을 도움’이라는 구절이 나오고 있고 동국여지승람(1530년 완성)과 가정보(1562년)에 ‘수레를 많이 내어 곡식을 실어 나름’이 그 공적의 내용으로 확실하게 명기되고 있다. 분명 집안의 전승으로 내려오고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이름에 그 공적의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세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1) 고려 말에서 조선 초쯤 대승공의 공적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었는데 이름이 ‘차달’(車達)이라서 차(車:수레)와 달(達: 다다름, 통달함, 통함)의 뜻에서 전승이 만들어졌다. (2) 우연 혹은 필연으로 이름과 공적의 내용이 일치한 것이다. (3) ‘차달’은 왕건이 공적을 기념하여 내린 이름이다. 여기서 이상의 여러 정황 증거상 공적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1)의 가능성도 완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면 삼한공신이라는 것도 의심해야 할 지경이라, 우선 배제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머지 중에 (2)는 대승공의 이름이 처음부터 ‘차달’이었다는 것을 가정하고 (3)은 처음 이름은 다른 것이었음을 상정한다. 곤란한 점은 고려시대 금석문, 고려사, 가정보, 그리고 “씨족원류”까지 대승공 성명을 ‘류차달’로 제시하고 이름에 대한 것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가정보에서는 대승공이 거부였으며 수레와 관련된 공적을 세웠음을 명기하면서도 ‘차달’이라는 이름이 사명(賜名)되었다는 얘기를 하지 않고 있다. 흥률사의 기록에서는 명확하게 ‘석명’(錫名)으로 나와 있는데 이것은 사명과 같은 뜻이라서 만일 이 기록을 인정한다면 사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그렇지 않으면 사명의 주장은 필자가 그 작성 시기와 출처의 신빙성을 크게 의심하는 “차원부설원기”의 기록과 그것을 인용하고 있는 “대동운부군옥”(1589년)이 시초가 된다. 하여간 본격적으로 류용수의 계보(17세기 초), 왕배조의 강남보(19세기 초) 등을 지나면서 황제 연원설 및 류-차 동원설과 관련되어 실상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먼저 (3)번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면, 만일 사명이라면 가정보까지 문화류씨 자손들이 자신의 시조의 원 이름도 모르고 지내왔다는 뜻이 된다. 류공권과 류경의 시대를 지나 고려시대에 이미 대단한 문벌로 성장한 문화류씨 집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심히 의심스럽다. 현재의 원파보를 이루는 기록들에서는 차씨 성을 하사했다는 얘기와 함께 ‘차달’이 호(號)로 내려졌다고 말한다. 이들 기록의 의심스러움은 이미 앞에서 자세히 피력했지만, 또한 “증...호”(贈...號)의 표현을 주로 사용하고 있어 名(이름)과 명확히 구별되는 것도 ‘차달’을 사명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호는 고려 후기에 쓰이기 시작한 조선시대의 유행물이라는 사실도 호를 주장하는 문헌들이 후대의 기록들이라는 사실과 연관되어 의심을 주며, 이때는 더구나 후손들이 이름을 호로 대치하여 이름으로 불러왔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한편 (2)의 이름과 공적이 일치할 가능성은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름이 그 집안의 직업을 반영하고 지어졌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고려사의 태조 조의 기록을 살펴보면 많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며 그중 달(達)로 끝난 이름은 8개가 나오는데 모두 성이 없이 이름뿐이고 그중 공달(功達)이란 사람은 견훤이 태조에게 이 사람을 보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바치게 했다(920년). 역시 장인(匠人)임을 느끼게 된다. 성달(城達)이란 사람은 명지성(命旨城: 경기 포천)의 장군으로 나와 성(城)을 쌓는 것과 관련이 있음을 상상케 한다. 따라서 수레와 양식을 공급하는 역할을 한 사람의 이름이 차달(車達)이었다면 그렇게 이상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그런 가정도 해본다. 곧 대승공은 처음에 이름만 갖고 있었고 그것은 ‘차달’이었다. 물론 이때 ‘차’는 수레를 뜻하는 것일 뿐 차씨와는 상관이 없다. 그러다가 성씨를 갖게 된 것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고려사의 ‘홍유’ 항목에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이 처음에는 이름이 달랐음을 밝히고 있다. 곧 홍유는 홍술(洪術; 김홍술 곧 홍술과 우연히 같은 한자임), 배현경은 백옥삼(白玉衫), 신숭겸은 능산(能山), 그리고 복지겸은 사괴(砂?)였다. 삼국사기에는 각각 弘述, 白玉, 三能山, 卜沙貴로 표기되어 있다. 한자 표기가 다른 것을 보면 어쩌면 처음엔 아예 한자 이름도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사는 시작부터 이들을 나중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성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이름들이 태조 조의 나중까지 나온다. 참고로, ‘차달’이 성씨였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것이 이름이건 호건 한 개인에 주어진 것이었을 뿐 한 집단에 주어진 것이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어 맞지 않는 주장이다.

성씨에 대한 최초의 종합적인 정보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얻을 수 있다. 이것은 학자들이 고려 태조 23년(940) 전후에 만들었다고 추정하는 “고적”(古籍)이라는 문헌(현재 전하지 않음)과 중앙에 보고된 지방의 성씨 자료(“關”이라는 이름이었다 함)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에서 대략 고려 태조 때의 성씨에 대한 정보를 간접적으로나마 얻을 수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문화현의 항목에 류씨가 내성(來姓)으로 분류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성은 이주해온 성을 말한다. 고려시대 때 개국공신과 중앙관료로서 문벌을 이룬 집단은 모두 토성(土姓)이었는데, 류씨만은 내성으로 나타나 있어 흥미롭다. 본관제는 고려의 통치 방법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데, 토성은 군현성이라고 불리는데 군현의 구획 초기부터 토착해 각각의 군현명을 본관으로 한 군현의 지배성단(姓團)이며 중앙관료의 공급원이었다. 그러면 언제 ‘토성’이라 불릴 수 있는 성씨들이 형성되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대략 신라 말-고려 초로 추측을 하는데, 기본은 고려 건국 이전의 신라 말에 형성되었다고 생각된다.

고려사의 태조 23년(940) 3월에 “주.부.군.현의 명칭을 개정했다”고 나온다. 문화 지역은 본래 고구려의 궐구(闕口)였는데 유주(儒州)의 명칭으로서 주(州)로 승격된 것이 이때라고 믿어진다. 당시는 성씨나 지역의 행정단위도 공과 벌에 따라 정해지는 예가 많았다(반란을 일으킨다하여 천한 성을 내린 예는 유명하다). 940년은 후삼국이 통일된 지 4년 후이며, 새로운 나라의 체제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 때의 행정구역 명칭들의 변경과 더불어 성씨들이 토성인지 내성인지 등을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류-차 동원설에서 주장되듯 대승공의 5대조라 하는 류색(차승색)에서부터 류씨가 사용되었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110년 이상을 류씨로 살아온 것이 된다. (헌덕왕의 재위기간이 809-826년이며 이때 언젠가 승색 부자가 도망쳐서 류씨로 되었다고 하므로 826년에서 940년까지는 114년이 된다.) 그리고 나중의 신증동국여지승람 같은 지리지들을 보면 실질적으로 류씨 집안이 문화현을 지배했음을 느낄 수 있다. 대부분의 성씨들이 신라 말-고려 초에 겨우 시작되었는데 과연 무려 100년 이상의 역사가 있었다는 이런 성씨를 내성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역시 류-차 동원설이 허구임이 느껴진다. 류씨가 문화의 내성이었다는 사실과 대승공의 공적을 감안하고 대승공의 나이를 추정하면 가장 타당한 설명은 대승공 자신이 문화에 정착하면서 부(富)를 일으키고 그 부를 바탕으로 공을 이뤄 삼한공신이 되었고 그 결과 문화 지역은 유주로 승격된 것이라 생각된다.

성씨 성립에 대한 한 가지 추정은 나말여초 언젠가 지방의 유력 혈연집단들에게 일괄적으로 적절한 성씨를 분정(分定)했다는 것이다. 왕이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특별한 연유가 있어 성을 내려주는 사성(賜姓)과는 달리 통치의 수단으로 이루어진 행정 집행을 말한다. 이런 일이 있지 않고는 토성(土姓)의 개념이 고려 초에 바로 등장할 수 없기 때문에 타당성이 있는 추정이라고 생각된다. 이때 사람에 따라서 중국성을 모방해서 성씨들이 만들어졌다(중국성씨의 모칭(冒稱))는 견해와 중국성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연원(淵源)에 따라 성씨가 만들어졌다는 견해가 있다. 혹자는 940년에 바로 이 성씨의 분정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李樹健, “韓國中世社會史硏究”). 그러나 이렇게 보면 ‘내성’이란 말을 쓸 시간이 확보되지 않는다. 물론 성을 부여하면서 당시 토착해 있던 혈연집단에 부여된 성은 토성이라 부르고 최근에 와서 정착한 집단의 그것은 내성이라 불렀을 가능성도 있지만 이랬다면 토성-내성 등의 명칭보다 더 적절한 명칭을 사용했을 것이다. 내성이란 어디까지나 어떤 성의 존재가 먼저 가정되고 그 성씨가 이주해 온 것을 말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골격은 이미 그 전에 이루어져 있었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대승공은 이미 류씨 성씨를 갖고 문화 지방으로 이주해왔을 것이다. 여기서 당시의 다른 류씨, 곧 정주류씨나 전주류씨 등과의 관련도 전적으로 배제할 수만은 없는 일임을 느끼게 된다.

600년 이상을 대승공의 이름을 류차달로 기록해 온 것을 보면 ‘차달’을 사명(賜名)이나 사호(賜號)로 볼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초명이 해(海)라는 주장도, 같은 이유도 포함되지만, 또한 이 주장에 대한 직접적인 근거가 제시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면 전혀 받아들일 수 없다. 흥률사의 기록은 그 안에서 1356년에 쓰인 것으로 밝히고 있다. 불교의 이야기에서 불교와 관련된 사적을 부처의 영험과 연관지어 신비롭게 표현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어 글 자체를 의심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쓰인 시기를 인정한다면 대승공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로 공을 세웠는지를 설명하는 첫 번째 글이 된다. 그러나 글의 내용을 검토하면 삼한을 통합한 후에 즉위를 한 것으로 되어 있고 대승공의 공적이 왕건의 즉위 전에, 곧 왕건이 아직 장군일 때 이루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고려 개국 즉 왕건의 즉위(918년)와 삼한 통합(936년)은 시기적으로 많이 달라서 이 글이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반영하는지에 대한 신빙성은 떨어진다. 사명 부분도 “因其錫名柳車達”이라 표현하고 있어 ‘류차달’이라는 성과 이름 모두를 내린 것으로 해석될 여지도 있다. 글 전체에서 수레(車)가 간접적으로 암시만 되어 있을 뿐 그 글자(車)가 저 이름 속에 한번 나온 것을 제외하고는 직접 등장하지 않는 것도 흥미롭다. 역시 ‘차달’이라는 이름과 그 공적이 통하기 때문에 고려 말기쯤부터 문화류씨 이외의 사람들은 그 이름이 사명된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이 흥률사의 기록도 대승공 시대에서 400여년 후의 기록이라는 점도 주목할만한 점이다. 곧 흥률사의 영험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대승공의 전승을 불교식으로 신비롭게 표현하면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바탕으로 글을 쓴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이 글에서 한 가지 보이는 사실은 그 기록에 의하면 흥률사는 헌덕왕이 도의선사(道義禪師)를 시켜 절터를 물색해서 지은 것이라 한다. 그런데 그 헌덕왕 때 차승색이 문화로 피신해 왔다고 하는데, 시기와 지역이 같아서 이런 사실을 이용해서 차승색의 얘기가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2. 대승공 이야기의 변천

고려시대(고려사의 기록 포함)를 지나면 다음은 조선왕조실록의 태종 16년(1416) 항목에 나온 류량(1354-1416)의 졸기(卒記)인데, 좀더 명확하게 ‘삼한공신’으로 칭함을 받았음을 명기하고 있다. 류량은 류경의 5대손인데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활동했으며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다. 앞에서 논의했듯이 공신은 여러 종류가 있고 개국공신과 삼한공신이라는 칭호가 의미가 겹치는 부분이 있는데, 대승공이 공신이었다면 삼한공신이라는 칭호가 더 적합하기에 공신을 더 높인 것은 아니다.

다음의 영락보 서문(1423년)에서는 ‘재산을 기울여 임금을 도움’이라는 구절이 들어가서 대승공이 부호였음과 그 재산을 가지고 공을 세웠음이 기술되어 있다. “차원부설원기”에는 그 선계가 미추왕 때의 차제능이란 사람으로부터 시작해서 한 대도 빠짐없이 대승공과 그 아들들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비판은 앞에서 했기 때문에 생략한다. 다만 아들들에 대한 고찰은 중요하기에 아래에 따로 다루었다.

중요한 점은 설원기 자체는 그 주장대로 박팽년이 기록했다면 역적의 글이었기 때문에 공개가 금지되었을 것이지만 그 내용은 비밀을 적은 것이 아닌데 알려지지 않았다면 이상한 일이다. 곧 류-차 동원설이나 차원부의 설원 자체는 박팽년과 무관한 사항들이기 때문에 설원기의 창작이 아니라면, 게다가 이미 고려 시대 때의 문헌에도 나와 있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거기에 명확히 기록된 대로 알려져야 했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홍춘경의 대승공차달묘갈문(1543), 가정보(1562), 류희림의 묵방사 완복문(1585), 씨족원류(1652), 류상운의 (대승공의) 묘갈개수문(1678)에 이르기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반복되는 주장이지만 조상에 대한 중요하며 황제와 연관되어 성씨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사항들을 듣기만 했으면 기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1589)과 류지원이 전한 류용수의 계보(16세기 초), 류몽인의 차식의 신도비명(1619)에서 비로소 황제 연원설과 대승공의 선계와 아들들에 대한 자세한 기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더구나 설원기는 그 맏아들이라는 차효전을 대승공보다 훨씬 더 큰 인물로 그리고 있다.

여기서 가정보의 가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현재 남아 있는 문화류씨 최고의 족보이며 그 기록은 1423년의 족보인 영락보의 내용을 반영하고 있으며, 방대함과 정확함과 평등과 진보성과 만성보의 성격 등의 특징을 지닌 것으로 정평이 나 있기 때문이다. 가정보의 대승공에 관한 묘사는 그 문헌록에 여러 차례 나오는데, 모두 가정보의 맨 처음에 나오는 기록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고려사의 내용과 비교해보면 고려태조가 남쪽지방을 공격할 때 많은 수레를 내어 양식을 보급했고, 그 공로로 대승(大丞)이라는 관직을 내렸다고 조금 더 보충 설명이 되어 있다. 익찬(翊贊)이란 말은 '도왔다'는 뜻이라 있거나 없거나 별 차이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대승공의 아들로서 류효금(孝金) 한 분만 기록되어 있고, 장자(長子)라고 하는 차효전은, 실제 일어났다면 대승공의 공(功)과도 관련되고, 대승공보다 더 큰 활약을 해서 더 큰 벼슬과 식읍까지 받았다고 하기에 그 언급이 빠질 수 없을 터인데,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대승공 선계의 황제(黃帝)나 왕씨 혹은 차씨에 대한 구절은 일언반구도 없는 것이다. 대승공에 대한 이런 묘사는 다음의 족보인 기사보(己巳譜, 1689)에서도 변함없이 반복된다. 다만 기사보에서는 설원기와 류용수의 계보를 받아들여 선대를 따로 기록하고 있다.

“차원부설원기” 이후에 여러 문헌에서 황제 연원설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문화류씨 족보 자체가 그러했으므로 당연한 일이라는 말은 이미 했다. 그러면서 대승공에 관한 다양한 각색이 이루어졌다. 예를 들어 앞에 내용을 소개한 “동사”(東史)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각색은 어느 부분이 사실이고 어느 부분이 덧붙인 것인지 아는 사람에게는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다른 사실로 비추어질 수도 있고, 그것이 한두 번만 반복되면 원형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주객이 전도될 수도 있어 주의가 요망된다. “동사”에서는 전쟁의 상황이 구체적으로 설정되어 있으며(견훤, 후백제 등), 대승공의 역할이 군량미를 백성들에게서 받아내는 것을 막은 적극적인 행위로 변했고 결국 대승공의 덕이 왕건에게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까지 미쳤다는 것으로 확대되어 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사실 자체를 왜곡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씨족원류”(1652)에서는 문화류씨가 대성(大姓) 중 하나라서 그 조사에 소홀할 리가 없는데도 당대의 보학에 그토록 뛰어났던 조중운도 연안차씨가 대승공에게서 나왔다는, 만일 사실이라면 중요했을 그 주장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실제 조중운은 가정보를 바탕으로 문화류씨 항목을 정리한 느낌이 들며, 설원기는 차치하고라도 당대의 백과사전이었던 대동운부군옥을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책에 성씨에 관한 많은 내용이 들어 있어 정말 그랬을지 심히 의심스럽다. 또한 그 작성 과정에서 조중운이 류씨들이나 차씨들을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은 할 수 없다. 혹시 그는 류차 동원설에 대해서 듣고도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근거가 없다고 판단한 것은 아닐까. 차씨 항목이 너무 부실한 것도 고려해야 한다. 추후 대동운부군옥과 씨족원류를 상호 검토하는 일도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3. 대승공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대승공 류차달은 신라말-고려초의 인물로서 황해도 구월산 지역에서 큰 부(富)를 지녔던 지방 호족(豪族)이었고, 그 부를 기반으로 왕건의 삼한 통일을 도울 계기가 있어 고려의 공신으로 된 분이다. 그 공으로 대승이라는 벼슬을 받으셨고 공신이 되었는데, 구체적인 공신 이름은 삼한공신이며, 삼한공신은 넓은 의미의 개국공신에 포함된다. 공(功)의 내용은 수레와 곡식을 내고 운송하여 왕건의 남정(南征)을 도운 것이다. 이야기 상 후백제의 견훤 혹은 그의 아들 신검을 공격할 때의 일인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런 사실들 외에 류차달의 선계에 대한 이야기와 류차달 자신에 관한 다른 사실들은 후세에 지어진 것들이라 생각된다. 예를 들어 대승공의 장자로서의 차효전의 존재는 전혀 없으며, 문화류씨는 왕에게 사성(賜姓) 받은 적이 없으며(대승공 당시의 류씨들의 상황은 아래에 추가로 논했음), 대승공이 이름(‘차달’)을 사명(賜名) 받았다는 주장 역시 후세에 추가된 몇몇 구절들을 바탕으로 한, 그리고 그것도 한문해석을 잘못한 결과로서 생긴, 오류라고 생각된다. 그와 더불어 처음 이름이 해(海), 자(字)가 응통(應通), 호(號)가 아사(鵝沙), 시호(諡號)가 문도(文悼)라는 것 등도 역시 근거가 없는 후세의 첨가가 아닐까 한다. 고찰해보니, 예를 들어 아사(鵝沙)는 대승공이 묻히신 부근의, 구월산(953 m) 정상 정남쪽에 있는 688 m의 산인 아사봉의 이름이다. 호는 고려시대 전기에는 대개 사용되지 않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후대에 후손들이, 너도 나도 호를 갖고 있는데 시조가 없어서야 되겠느냐는 짧은 생각에 적절히 호를 지어 올리면서 아사봉의 '아사'를 딴 것으로 보인다.

대승공의 처음 이름(初名)이 ‘해’였다고 하는 주장은 나중에 왕건에게서 ‘차달’이라는 이름을 받았다는 주장을 만들어내다 보니 뭔가 처음 이름이 존재해야 될 필요가 생겨서 적당히 붙인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시호란 후대에도 주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내려주는 주체가 있는 것인데, 어떤 왕이 언제 내려준 것인지조차 알 수 없어 믿을 수 없다. 가정보에도 호나 시호 등의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음을 보면, 임진왜란 전후(前後) 무렵부터 강화된 유교적인 관념에 따라 호나 시호쯤은 있어야 행세한다고 생각하여 그때 쯤 만들어진 후대의 명명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대승공의 이름이 그의 직능(職能) 혹은 재능(才能)과 관련하여 ‘차달’이었는데, 필연적으로 공적 역시 수레와 관련된 것이었기에 사명(賜名) 운운의 얘기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확실한 것은 사명의 얘기는 문화류씨들에게는 16세기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덧붙여 마침 그 이름에 車자가 들어 있어서 차씨와 연결되는 얘기들이 지어지는 소재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4. 대승공의 선계

대승공의 선계는, 차씨들과 연관이 없다고 한다면 그럼 무엇일까 하는 의문을 던질 수 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왕건(계속 태조를 예를 드는 것은 다만 대승공과 같은 시기에 살았고, 서로 연관되어 좋은 예가 되기 때문임)도 고려사에서 그 선계에 대한 얘기가 분분해서 3대 정도만 받아들이고 있다. 옛날 역사는 알고 싶어도 밝혀진 것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는 그 상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다.

물론 정황적인 추측은 가능하다. 우선 명확한 증거나 사료가 없는 한 추측은 추측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대승공 당시 이미 류씨들이 활약하고 있었다. 신하들이 왕건을 왕으로 추대할 때 망설이는 그를 재촉하고 분위기를 이끈 여장부였던 그의 부인이 바로 류씨였다. 고려사에 정주(貞州)류씨라고 나온다. 정주류씨는 지금은 거의 없지만 고려사에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들 말고도 고려사에 류씨들이 상당수 나오는데, 필자가 관향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 정주, 유주, 서주, 전주였다. 따라서 고려 시대에 개성 지역(정주), 구월산 지역(유주), 서산 지역(서주), 전주 지역 등지에 류씨들이 다수 살고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고려사에 나온 사람들이 얼마만큼 대표성을 갖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한두 사람만 나와도 그 뒤에 같은 관향의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제법 있었을 거라고 추정할 수는 있다. 지역이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 지역까지 걸쳐 있는 점, 그리고 관향이 나오지 않는 류씨들도 포함해 고려사에 류씨가 상당히 나오는 점, 왕비도 여러 명 있던 점 등을 고려하면 류씨는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당시의 관향은 대개 세거(世居: 한 고장에 대대로 사는 것)한 지역을 붙이는 것이었을 따름이기 때문에 당시의 류씨들이 서로 연결되었을 가능성도 있으며 물론 아닐 가능성도 있다. 한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성씨가 몇 개 나오지 않고, 높은 관직에 있던 이들도 성씨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류씨가 나오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이렇게 고려사에 고려시대의 초기부터 등장한 류씨들의 내력은 지금으로서는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성씨란 것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닌 이상(가끔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꾸미는 경우도 있지만), 기원이 있을 것이다. 곧 기존의 성씨가 어느 지방에 세거(世居)해서 본관(관향)을 새로 붙였다든지, 다른 성에서 변했든지 아니면 누군가 창조하든지 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신라 말-고려 초기에 사회가 커짐에 따라 효과적인 국가의 통치를 위해 자연스레 성씨의 필요성도 커졌으며 그에 따라 여러 성씨들이 생겨났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성씨를 가지지 않았던 사람들도 어느 시점에서인가 기존의 성씨로 편입할 수도 있고, 기존의 성씨를 쓰면서 본관만을 달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새로운 성씨를 만들어 썼을 수도 있다. 성씨를 만들 때는 중국을 모방했을 확률도 높고 그저 한자에서 자신들을 지칭하던 어떤 음이나 이미지와 맞는 적당한 글자를 골라 썼을 수도 있다. 본관만 해도 조상을 잃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남들이 본관을 쓰니까 적당히 자기들이 오래 살고 있던 고장을 본관으로 한 경우도 많았을 것이다. (지금도 다른 본을 쓰고 있다가 조상이 같음을 확인하고 같은 본을 쓰기 시작한 예가 있다.) 여기서 여러 시나리오가 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기록이 없으면 모두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측하는 사람은 100% 확신한다 해도 결국은 확실한 증거란 있기 어렵기에 추측으로 끝나버린다.

그 가능성 면에서 본다면 류씨는 중국에서 들어온 성씨일 수도 있고(직접 중국인이 와서 시작한 것일 수도 있고, 한국 사람이 성씨만 딴 것일 수도 있음), 아예 처음부터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한반도 자생 성씨인데 우연히 중국에도 그런 성씨가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필자는 성씨의 분정(分定)이 나말여초의 어느 시기 또는 두 번 이상의 시기에 행정구역의 재편과 더불어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비교적 타당한 추정에 입각하여 마지막의 경우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이때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흔한 버드나무 때문에 만들어졌을 것임이 확실하다. 예를 들어 유구한 역사를 지는 도시 평양은 버드나무로 유명해 류경(柳京)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그리고 고려사 등은 더 이상 들려줄 이야기가 없어, 이들 문헌들 이외의 옛날 기록을 찾아내기 전에는 추측은 여기서 멈춘다.

과거에는 우리나라나 중국의 왕족에 뿌리를 대고 싶어 하는 욕구가 컸을 것이며, 그 때문에 몇 사람은 직접,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심정적, 간접적으로 황제 연원설 같은 신화 만들기에 동참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대승공 이상의 이야기는 미지의 세계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인가. 문화류씨는 유주(현재 황해도 구월산 지역)에 세거하고 있던 류씨 일족들 가운데 고려 건국에 기여한 공적으로 이름을 역사에 남기신 류차달의 자손이라 보면 충분할 것이다.

5. 대승공의 후계

문화류씨 족보를 들여다보면 대승공의 아들 류효금의 사적은 호랑이에 관계되는 설화와 벼슬이 좌윤이었다는 것뿐이다. 더구나 그 아들이라는 금환(金奐, 대승공 3세)은 문화류씨 기록 외에는 출처가 없고, 4∼6세는 류공권의 묘지명에 그의 증조부∼부로서 그 관명과 이름만 나와 있다. 가정보의 문서에 대승공 2세(효금)에서 7세 류공권까지 모두 독자(獨子)로 기록되어 있다. 벼슬은 각각 좌윤(2세), 대장군중윤(中尹)(3세), 검교(檢校)대장군행(行)산원(散員)(4세), 검교소부(少府)소감(少監)(5-6세)이다. 고려시대의 벼슬을 고찰해보면 2세는 향직(鄕職)이며 3-4세는 군직(軍職)이고, 5-6세는 국창(國倉: 나라의 창고) 관리(官吏)였다. 2-6세가 한결같이 아무런 형제자매가 없고, 2세의 경우의 호랑이에 관계되는 일화를 제외하고는 2-5세는 벼슬 이름 외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고, 심지어 묘지나 부인의 기록조차 없다. 부인의 기록이 없는 것은 실제적으로 대승공도 마찬가지라고 보아야 한다. 류공권 때에 와서야 비로소 집안이 일어나서 겨우 그의 직계조상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내려온 결과로 추측된다.

효금의 호랑이 관련 사적도 의심스러운 점이 발견된다. 곧 류돈의 묘지명(1349)에는 대승공이 공신이었음을 밝히고 난 후 ‘아직 벼슬하지 않았을 때’라고 말문을 꺼내고 호랑이 얘기를 잇고 있다. 이대로는 대승공의 사적이라 해석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는 호랑이를 구해준 보답으로 9대에 걸쳐 평장사(여러 종류가 있는데 대개 정2품 벼슬임)가 나게 해주겠다는 축복을 듣는다. 그런데 이것이 곧 이어 1423년의 영락보나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에서부터는 한결같이 효금의 사적으로 기록되고 있고, 영락보의 서문은 아예 전체가 효금이 호랑이의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글이다. 이로 미루어 류돈의 묘지명에 효금의 사적이 구별되지 못하고 실수로 대승공의 사적처럼 표현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전승이 상당히 신빙성 있게 전달되어 온 것을 보면 실제 일어났던 일이라고 생각된다.

효금의 아들로 나오는 금환(金奐)은 가장 취약하다. 선조나 왕들의 이름을 피하는 기휘(忌諱) 풍습은 중국에서 시작되어 신라와 고려에서도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한자가 똑같은 경우에는 말할 나위 없고, 발음이 같아도 피했다. 그런데 효금(孝金)의 아들이 금환(金奐)으로 나온다. 전하는 과정 중에 누군가 옛 가승을 잘못 읽었거나 오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대승공 7세인 류공권께서 1123년생이고 만일 대승공이 880년생이라면 한 세대가 약 40년이다. 혹시 중간에 한 사람 쯤 더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도 가능해진다. 그러나 대승공의 탄생년도가 더 후대로 될 수도 있고 평균 40세에 자식을 낳았다는 것도 누군가 한 두 사람이 아주 늦게 자식을 보았다면 그렇게 이상한 얘기도 아니다. 참고로 류공권의 손자 류경은 1211년생이라 류공권과 그 아들 류택이 평균 44세에 아들을 낳았다.

효금은 대승공의 아들로서 기록이 되어 있으니 제외하더라도, 3-6세의 경우는 형제자매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류씨들이 과거에는 140여개의 본까지 존재했다고 하며, 현재 50여개의 본이 존재하고 있다. 이 중 구성원이 1000명 정도 이하인 본이 절반쯤 되고 10,000명 이상인 본이 6개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본관이라고 하는 것이 그 의미가 엄밀하지 않아서 본관이 다르다고 하여 반드시 핏줄이 다르다고 볼 수 없으며, 또한 성씨 변천사를 통해 보면, 엄밀히 말해 현재 같은 본을 쓰고 있다 해서 조상이 다 같다고 볼 수도 없다. 물론 같은 본과 성을 쓰고 있을 때는 그 핏줄이 같을 확률이 높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이런 것을 모두 감안해서, 류씨들이 고려사의 초기부터 같이 등장한 정주류씨가 현재 거의 남지 않은 것을 고려하면(2000년 통계에 남한에 몇 백 명 살고 있는 것으로 나옴), 현재의 류씨들 중 거의 대부분은 대승공과 같은 핏줄을 공유하고 있거나(대승공 역시 어딘가 다른 곳에서 류씨 성을 갖고 유주로 이주해 왔다고 추정되기 때문) 아예 대승공의 3-6세에서 분파된 자손들일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된다.

류공권 이후는 확실한 가문의 기록이 이루어지고, 높은 벼슬을 하는 큰 문벌을 이루기 시작했고, 몇 개의 본(이론(異論)이 있을 수 있어 문화류씨로 합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됨)과 14개파로 나뉘게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류공권을 실질적인 문화류씨의 중흥시조라 부를 수 있을 듯하다.

대개 과거의 기록이란 이런 식인데, 갑자기 구체적으로 차효전이란 인물이 등장하고 고려 태조에게 공을 세워 대승보다 더 높은 실질적 관직을 받고 식읍(食邑)까지 받았다고 하여, 경우에 따라서는 대승공을 완전 배제하고 그의 공적까지 가로채는 기록이 등장한 것은 아무리 해도 이해하기 어렵다. 또 한 가지, 차효전이 실제 효금의 형으로 존재했었다고 하면, 효금은 과연 왜 그렇게 실질적인 사적이 남아 있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생긴다. 효전이 아버지를 따라 큰 공을 세워 최고직의 벼슬을 받을 정도였으면 나이가 제법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때 필경 동생도 무슨 역할인가는 했을 것이라는 것이 타당한 논리일 것이다.

 
V. 연안차씨들의 주장과 반박

연안차씨들은 2003년에 발간된 최신 대동보에서 류-차 동원설에 입각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류색’(차승색)에서 ‘류해’(대승공)까지 모두 실제로는 차씨인데 류씨를 가칭(假稱)하고 있던 것이라 하며 원 성씨라는 차씨로 밝혀 적고 있다. 대승공 이상은 필자는 소설이라고 주장하고 있기에 뭐라고 언급할 마음이 없지만 대승공은 다름 아닌 문화류씨의 시조이다. 연안차씨들이 남의 시조를 갖다가 성을 갈아버린 결과가 되어 버렸다.

그들의 주장은 요약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1) 사성이 아니면 성으로 인정받지 못했는데, 차씨는 신라태조에게 사성받았고, 차승색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류씨로 변성명하고 살다가 왕건 덕분으로 차씨 성을 다시 찾았으니 차씨 성은 왕권에 의해 보증 받은 진짜 성이고 류씨도 왕건에게 사용을 허락받았으니 그때부터만 진짜 성이다.
(2) (1)에 모든 주장이 다 들어 있어 중복되지만, 또 근거로 언급되는 구절이, 언제 어느 곳에 실린 원파보에 들어 있는 것인지 모르겠으나 “這間柳氏之冒稱又不可廢也”이다. 곧 여기서 모칭(冒稱: 남의 성을 가칭(假稱)함)이란 말이 명확히 들어 있다는 것이다. (설원기에는 효금에 대한 것이 전혀 나오지 않음.)
(3) 왕건이 차씨 성을 하사할 때 “承襲上祖之舊姓車氏”라 하여 선조의 옛 성인 차씨를 ‘승습’하라고 명령을 내렸는데, 여기서 승습은 끊임없이 이으라는 뜻이라서 중간의 류씨로 바뀌었던 것들도 모두 차씨로 바꾸라는 뜻도 포함된다. (설원기에는 “承襲上祖之弘烈也”로 나옴.)

필자는 위에서 대승공이 고려의 개국공신임을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 어떤 자료에서도 대승공보다 더 큰 업적을 세우고 식읍을 천 호까지 받았다는 대승공의 아들에 대한 기록은 철저히 아무데도 없다. 또한 고려사에는 간혹 식읍을 내려준 기록은 있으나 918년의 개국시의 포상에도 물건들만 내려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실제 여러 기록들을 따져 연구한 결과를 보면 60여명의 공신들 중 식읍을 받았다는 표현은 간혹 쓰이나 실제로 식읍을 받았다고 판단되는 경우는 안동부를 받은 권행(權幸)이고 나머지 6명은 실질적으로 전(田)을 받았다고 한다(김갑동). 어쨌든 땅을 받은 것은 모두 해야 7건뿐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차효전이라는 인물이 식읍을 받았다는 것은 역사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라 생각된다. 따라서 류-차 동원설은 그 뿌리부터 부정되며 연안차씨들의 주장에 대답을 하면 사상누각의 논의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만만에 하나, 류-차 동원이 사실이라 가정해도 연안차씨들의 주장은 억지로 이루어져 있다. 우선 차씨가 그 출처가 무엇인지도 모를 원파보의 한 줄 기록 외에 신라 태조에게 사성을 받았다는 외적 증거가 있는지 묻고 싶다. 또한 차제능과 차승색 역시 실제 존재했으며 정말 핏줄이라는 믿을 만한 외적인 증거가 있는지 궁금하다. 차씨는 그래도 원파보에 혁거세가 사성했다는 구절이라도 있지만, 왕조명은 스스로 일토(一土)산 아래 산다 하여 왕씨가 되었다고 하는데 왕씨는 사성 받은 적이 없으므로 가짜 성이었는가. 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첫째, 사성 관련하여, 사성 받지 않으면 가짜 성이라는 주장을 세상에 내놓으면 어떤 반응이 나올지 상상이나 해보았는지 궁금하다. 실제 사성의 기록은 많지 않다. 증보문헌비고의 “고려” 항목에 나온 내국인에게 사성한 예는 왕씨가 가장 많고, 권씨, 차씨, 짐승의 성 4개, 어씨 등뿐이다. 게다가 이중 지금 필자는 차씨의 사성은 잘못된 기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 이외에는 아마도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왕족과 연관되는 성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가짜 성이며 그게 지금까지 그렇다는 말이 된다. 더구나 류씨 자체에서도 확실한 반박을 할 수 있다. 바로 왕건의 첫째 부인인 류씨이다. 정주류씨인데,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며, 왕건에게는 정주류씨 부인이 또 하나가 있는데 첫째 부인이 후사를 보지 못해 같은 일가를 들였을 거라고 추측된다. 그만큼 강력한 류씨 집안의 존재를 느끼게 만든다. 이 정주류씨는 유주(문화)류씨처럼 사성된 적이 없다. 과연 왕건의 부인이 가짜 성을 갖고 있던 사람이라 누가 말할 수 있을까. 필자가 보기엔 자신의 주장을 하기 위해 우리나라 성씨의 기원과 발달에 관해 철저히 무식을 가장하고 사성을 받지 않으면 가짜 성 운운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모칭’ 관련하여, 우선 어떤 주장을 하려면 그 근거를 명확히 대기를 권하고 싶다. 류-차의 관계에 대해 족보에 최초로 기록한 기사보의 원파보는 설원기를 인용하고 있을 따름이며 설원기에는 그 구절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冒其祖父丞相儉夫妻楊姓變柳氏以來也”
    (그(승색)의 할아버지 승상 검부의 처 양씨를 모칭(冒稱)하여 성을 류씨로 바꾸어 내려온 것이다.)
    ‘冒’자를 쉽게 ‘본 따서’라는 식으로 해도 되는데 일부러 모칭이란 단어를 사용해서 번역해 보았다. 다른 구절들은 이 말을 후대의 기록자들이 나름대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설원기는 효금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기사보 원파록의 근간 중 하나인 류지원의 글에는 왕건이 ‘장자 효전을 연안차씨로 차자 효금을 문화류씨로 봉하였다’고 나온다. 이것을 후대 사람들이 마치 왕건이 말한 것처럼 꾸며 “這間柳氏之冒稱...” 운운한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 상황에서는 내용상 별 차이가 없지만 한문 한 구절의 해석이 올바르지 않아 엉뚱한 결론에 이를 수도 있으므로 주의를 요하는 것이다.
    하여간 여기서 모칭(冒稱)이라는 말은 가칭(假稱)과 같은 말이라서 임시로 성을 칭한 것을 의미한다. 확실히 ‘성을 거짓으로 꾸며댄다’는 뜻이다. 류-차 동원설의 관점에서 보면 하등 이상한 단어가 아니다. 원래 차씨였다는 사람들이 위험을 피해 신분을 속여 류씨로 스스로를 칭한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음이 구절과도 연관되어 한꺼번에 논하기로 한다.

셋째는 승습이란 단어와 관련한 것이다. 우선 이것도 왕건이 직접 한 말은 아니지만 그런 것처럼 후대 사람들이 표현하고 있는 구절이다. 하여간 이것도 위에서처럼 내용상으로는 차이는 없다. 여기서 한번 따져 보기로 하자. 차승색이란 사람이 스스로를 류색인지 류환인지 류백인지 모르겠지만 류씨로 바꾸었고 그 아들 차공숙도 류숙(한자는 두 종류)으로 바꾸었다고 하자. 그리고는 숙의 아들 진부에서 고손자 류차달, 그리고 그 아들 류효전과 류효금까지 한 세대를 30년으로 따지면 150년 정도를 류씨로 살아왔다. 그들이 문화로 피한 후 길어야 15년 정도 이내에 자신들의 생명을 노리던 헌덕왕이 죽었으며 나중에는 신라 자체도 망했다. 왜 차씨로 돌아가지 않은 것인가. 과연 그들이 가짜 성을 쓰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왕건이 150년 이상을 써온 성씨의 내력에 대해 과연 무엇을 알고 무슨 생각을 가져 차씨 성을 주며 류씨 성은 그대로 써라, 라고 말했을 것이며, 무슨 악한 마음이 있어서 한 가족의 성을 쪼갠단 말인가. 그 가장(家長) 곧 대승공에게 너 수레 잘 만들어 공을 세웠으니 자랑스러운 차씨 성이 되거라, 했다면 이해가 된다. 사성이란 한 개인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집안에 주는 것이기 때문에 족장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수여되었다면 말이 된다. 그러면 모두 차씨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현재의 원파보에 대략 30세 이상 거의 한 줄로 내려온 차씨의 계통에서 과연 차씨가 승색의 세대에 승색 한 사람에만 존재했었는지 궁금하다. 참고로 2000년 통계를 보면 차씨는 전체 18만여명인데, 그 중 연안차씨가 16만1천여명으로 대부분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도 문화류씨는 내성(來姓)인데 차씨는 이미 촌락성으로 되어 있다. 아무리 봐도 연안 지방에 차씨들이 류씨가 유주(문화)에 정착하기 전에 이미 다수 살고 있던 증거가 된다. 대승공 집안의 기반이 문화였는데 대체 어떤 연고로 인해 그 아들이란 사람이 연안을 식읍으로 받았다는 것인가. 식읍의 부분은 의심스럽지만 어쨌든 연안이 언급되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차효전이 그곳에 연고가 있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봐도 대승공의 아들이 거기 가서 비로소 시작하여 차효전 11세까지 독자로만 이어진 것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나말여초의 수많은 성씨들이 그러했듯 연안 지방에 살았던 일족이 차씨 성씨를 분정 받으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과연 무오공신 제1위의 류경(1211-1289) 덕분에 유주지방이 문화현으로 승격되었듯이 연안지방은 역시 무오공신인 차송우(車松祐) 덕분에 지복주사(知復州事)로 승격된 적이 있었다.

또 백보 양보해서 차씨 성을 류효전에게 내려주면서 “옛날 차씨 성이 위대했으므로 승습하라”하면서 연안차씨를 봉했다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더욱 관향과 성이 일체가 되어 하나의 성씨를 이루므로 새로운 성씨을 만들어준 것이다. 새로운 시작이므로 중간에 류씨였건 왕으로서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성을 내려주면서 조상들 성까지 바꾸라고 명령한다는 것은 왕이건 누구건 간에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승습은 학풍 같은 것을 이어받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백 년 전에 학풍이 끊어졌다가 그것을 다시 살려 이어간다면 역시 승습이라 할 수 있다. 반드시 물리적으로 해석한다면 너무나 자의적인 해석이다. 스스로 류씨를 유지해왔고 여전히 류씨인 사람들에게 소급 적용할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아닌 것이다.

또 궁금한 것 중 하나는 설원기의 본론이 시작되는 첫머리가 “사간원 좌정언 차원부는 문성인(文城人) 류차달의 첫째 아들 대광지백 효전의 후예이다.”이라는 선언이다. 여기까지는 그 어떤 해석에 있어서도 류효전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류차달’이란 이름을 확실히 하고 있다. 설원기의 어디에 대승공이 차씨라는 말이 있으며 차씨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가. 저 첫머리만 보아도 설원기는 그 배경으로서 문화류씨의 문벌에 기대고 있음은 명확하다. 이것은 또 이 다음 구절을 보면 류차달은 류효전(사성 받기 전)에 비해 그 공로가 호 하나만 받을 정도의 공을 세웠고, 류효전은 대체 어떤 공인지 모르겠지만 천 호의 식읍을 받을 정도의 공을 세웠다고 나오기 때문에 류차달을 아예 빼버리고 차씨만으로 이야기를 구성했어도 충분한 부분이었다. 곧 류몽인의 차식의 신도비에서 실제 그런 것처럼 차라리 별 볼일 없는 아버지를 아예 제외하고 “... 차원부는 대광지백 효전의 후예이다. 효전은...”이라고 말하는 것이 백 배 적합한 구절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설원기는 분명 그러지 않았으며 특히 주석에서 끈질기게 류-차 동원설에 기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래서 필자가 설원기는 그 배경으로 류차달의 ‘류’씨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설원기는 류씨와 차씨를 함께 언급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류차(柳車)로 하고 있다(최소한 가장 오래되었다고 평가되는 필사본 설원기는 그렇다). 설원기는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면서 왜 가장 명백한 구절들은 무시를 하고 순전 지엽적인 구절들을, 그것도 2차 3차 후대인들에 의해 뉘앙스가 변하여 표현된 구절들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 하나 궁금한 것은 설원기의 다음 구절이다. “其子孝全全字爲生字別賜姓氏...” 물론 앞 구절에서처럼 차효전이라는 이름이 명기되고 있어 별 문제 삼을 일은 아닌 듯하지만, 이곳의 ‘爲’는 그 앞에 ‘贈’과 뒤의 ‘賜’를 보면 마찬가지로 사역의 뜻을 갖고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곧 이렇다면 저 구절의 해석은 “그(류차달의) 아들은 효전인데 全자를 生자로 하게 하였고 별도로 성씨를 내려...”가 된다. 여기서의 내용상 주어는 왕건이다. 이렇다면 왕건이 류효전에게 내린 것은 차씨의 성만이 아니라 차효생이라는 성명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차효전을 일명 효생이라고 주석을 단 부분은 있어도 왕이 내린 차효생의 이름을 앞에 내세운 기록을 보지 못했다. 후손들의 불찰일까. 필자의 관심 밖의 일인데도 이것을 언급한 것은 전체적인 맥락을 망각한 자의적인 해석과 부정확한 해석이 가져다주는 폐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차제에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이 있다. 최초의 족보 문제이다. 설원기에는 차원부가 제작했다는 족보가 언급된다. 실은 서문이나 본문만 보면 차원부가 제작했는지 어떤지 명확치는 않다. 그런데 족보는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중 하나가 가승(家乘)이다. 가승 수준의 족보는 고려시대에도 흔히 존재했는데 이것은 집안의 내력을 기록한 당시의 묘비명들의 내용만 보아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통상 족보라고 하면 그 체제와 내용에 있어 본격적인 족보로서 인정을 받을만한 것을 일컫는다. 그런 의미의 현존하는 족보는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성화보(成化譜, 1477년)와 문화류씨의 가정보(嘉靖譜, 1562년)가 시초이고, 현존하지 않지만 추정을 통해 최고의 족보로 인정을 받는 것은 문화류씨 영락보(1422년)이다. 비록 설원기에 차원부가 만들었다는 족보(나중에는 보판이라고 말이 바뀌지만 설원기는 족보라고만 부르고 있다)가 언급되지만, 일부의 주장처럼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라고 단정할 근거는 실상 없다고 보아야 한다. 조선 초기에 족보가 언급되었다는 사실만 가지고는 그것이 문화류씨나 안동권씨 족보처럼 인정받을만한 족보의 체제를 갖추고 있었는지 파악할 수 없다. 그 체제와 내용이 정확히 어땠는지를 최소한 추정할 수 있어야만 최초의 족보이었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문화류씨 영락보의 경우는 성화보에 가정보에 끼친 영향에서 그 실체를 쉽게 추정해 낼 수 있으며 관련 연구 글도 나와 있기에 아쉽게 현존하지 않지만 주저 없이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로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간접적이라도 증명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가 있기 전에는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VI. 결론

과연 문화류씨 선계에 관해 어떤 시나리오를 그려볼 수 있을까. 문화류씨 족보인 가정보를 보면 대승공을 포함해서 류공권의 아버지 대까지 6대의 기록은 실상 많지 않다. 모두 부인의 기록이 없고, 대승공에게 간략한 공신 기록이, 그리고 효금에게 설화적인 이야기가 붙어 있을 뿐, 실제로는 모두 이름 자체와 벼슬명만 기록되어 셈이다. 이것은 고려사의 류공권 항목의 간략한 기술과도 일치한다. 그리고 류공권에서부터는 가히 큰 문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시의 성씨의 사용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이렇게 기록 없음 혹은 부족함이 오히려 자연스런 일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씨가 고려 초기에 다수 나오는 사실을 고려하면 대승공이 역사에 모습을 보인 시기와 상황 등이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대승공은 류차달이란 이름, 공신이라는 사실, 대승이라는 벼슬 이름, 그리고 효금이라는 이름의 아들이 하나 있었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는 상태로 최소한 가정보의 시대, 곧 16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또한 그런 분위기는 씨족원류의 시대, 곧 17세기 중반까지도 이어졌다. 그런데 임진왜란 전후(前後)로 문화류씨와 차씨와의 관련설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단지 류씨-차씨만이 아니라 왕씨까지 포함시키고, 나아가서 중국의 전설상의 존재인 황제(黃帝)까지 등장하는 큰 그림의 얘기였다. 이것을 필자는 황제 연원설이라 불렀다. 여기에 “차원부설원기”가 가세한다. 설원기는 1456년인 세조 2년에 쓰였다고 주장되지만 필경 그보다 몇 년 전인 문종 때쯤 쓰였으며, 후세, 아마도 그 100년 사이에 첨삭이 이루어졌을 것이라 믿어진다. 이것은 설원기가 대개 여러 정황상 정사(正史)와 정반대이거나 증명될 수 없는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변경이 이루어졌음은 확실하며, 일개 가문을 위한 사문서화(私文書化)되어 있기 때문이다. 첨삭의 내용 자체는 출처가 어디인지 모르지만 류지원의 글에 중국 출신 류용수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문화류씨 자신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가능성도 있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류씨들이 전혀 설원기에 쓰인 내용, 나아가서 황제 연원설을 모르고 있었음은 확실하다. 이로 미루어 설원기는 실제 쓰인 때가 언제일지라도 류씨와 차씨의 관련한 부분들은 임진왜란 전의 몇 십 년 사이에 만들어져 첨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설원기의 이야기와 류용수의 계보는 사소한 이름들의 차이 같은 것은 있지만 차승색의 부분을 중심으로 실제 일치하고 있다. 차원부설원기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면 그것을 기본으로 하여 황제까지 잇는 계보를 조작해 내는 일은 쉽게 이루어졌을 듯하여 류용수의 계보는 설원기를 근간으로 만들어진 버전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류용수의 계보를 소개한 류지원의 글에도 권문해가 등장하고 권문해는 그의 작품 “대동운부군옥”에서 설원기의 내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따라서 황제 연원설의 진원지는 바로 차원부설원기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1619년에 쓰였다는 차식의 신도비명에서는 박팽년이 지었다는 설원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설원기에서는 나오지 않는 황제(皇帝)를 다루고 있다. 현존하는 문헌 가운데서 황제가 등장하는 것은 류지원의 문헌이 시작이다. (참고로 차식의 신도비명은 연안차씨들은 물론이지만 문화류씨들까지 모두 劉씨의 자손으로 만들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설원기의 류-차 동원설이 근간이 되어 거기에 살이 붙어 황제 연원설이 만들어졌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실상 임진왜란 전후에는 “씨족원류”가 반영하듯 차씨 집안은 당시 한미하던 가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가문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있는 현재의 형태의 설원기가 그들에게 중요한 자료일 것임은 자명하다. 그러나 단적으로 얘기하면 전체 내용이 왕명으로 이루어진 것일 수 없는 책이다. 그만큼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설원기에서 류-차 동원설에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점은 그 주장들의 근거로서 내세우고 있는 문헌들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 문헌에서 직접 인용한 것이 보이지 않으며, 문헌들이 주석에서만 언급되고 있는 점, 어떤 자료는 성립할 수 없다는 점 등의 문제점들을 갖고 있어 실제 존재가 의심스러운 측면도 있으며 실제 존재했었다 하더라도 현재는 물론이지만 설원기의 작성 시기 당시에도 설원기의 주장들을 응원하거나 반박하는데 있어 아무런 사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여기에 더욱 조작된 것이 확실한 차헌기의 강남보가 19세기 초에 합세하여 설원기, 류지원, 그리고 차헌기의 내용들이 모여져서 현재의 원파록을 구성하고 있다. 그 내용은 조선시대의 사대주의 모화사상의 정신 사조와 맞물려서 아주 빠른 속도로 퍼져가서 지금은 400여년의 연륜을 지닌 일종의 신앙의 대상으로까지 되어 버렸다.

문화류씨의 족보에서조차 희미한 선계에 나타나서 아버지의 공적까지 아들이라는 사람의 공적으로 기술하고, 때에 따라서는 아예 아버지를 배제하고 홀로 드러나게까지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역사에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있다. 필자는 이 모든 이야기를 임진왜란 전후로 구별하면 편리하다고 생각한다. 임진왜란 전에는 아무리 벼슬이 높고 학식이 깊은 류씨라 해도 황제 연원설을 듣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다. 그리고 임진왜란 후에는 류씨와 차씨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그것이 그만큼 확실한 진실이었기 때문에 그랬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정상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신라와 고려의 역사, 아니 조선의 역사에서까지도 철저히 정사와는 다른 주장들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동안 류-차 동원설을 다각도로 고찰하면서 우리 역사의 하나의 비극을 보고 있다는 참담한 심정마저 들었다. 옛글이라 하여 혹세무민의 요소가 명약관화한데도 아무런 비평 없이 받아들이고 허식(虛飾)과 명분에 매달려 사실이라 믿어버린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겨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런 거짓을 만들어낸 당사자들이 반드시 있었을 것인데, 혹시 그들도 누구를 속이려는 마음에서 그런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사회 풍조가 그런 범죄를 저지르도록 강요하지 않았는지 하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 사실이란 자연과학적 사실이 아니고 인간적 가치를 반영하고 있을 때엔 정형(定形)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는 관점에 따라 사실이 달라질 수도 있고 심지어 반대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리라. 그래서 역사는 언제나 재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이 글은 400년 이상의 역사를 부정하는 글임에 틀림없다. 차원부설원기를 무조건 받아들인 사람들과, 서로 연관이 있으며 황제를 직계 선조라 믿어왔던 류씨, 차씨, 왕씨들에게 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부족한 사료와 부족한 지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졌지만 이성적으로 필자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결론이었다. 필자는 이것이 대승공과 선조 누구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그러나 또 이 결론을 수정하거나 부정할 수 있는 더 명확한 사료와 논리가 있다면 언제든 그럴 준비가 되어 있다. 독자의 질정(叱正)을 간곡히 당부하는 바이다.

 
2005. 1. 21.

채하 류주환 (대승공 36세손)
충남대학교 공과대학 신소재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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