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문화류씨 후손이 자기 시조의 휘와 근원을 살피는 글.(펌)

ryu하곡 2011. 2. 14. 20:07

아래 글은 문화류씨 후손이 시조의 이름(휘)를 고찰하는 진솔한 글입니다.

문화 류씨의 시조 연원은 고려사절요에 기록이 있을 만큼 그 出自가 분명한 성씨이며

그 문중은 영락보(세종5년 1423.영락21). 성화보(중종17년 1565.가정2년).라는 가장 오래된 족보를 가진 성씨인데

그 시조가 연안 車씨와 관련되어 근자에 설왕설래한 일이 있습니다.

이 성씨 후손이 시조의 성과 이름을 고찰한 아래 글을 보면 타산지석으로 볼만한 것입니다. 

 

대승공의 초휘(첫이름) 문제|메인
채하 | 조회 70 | 08.09.23 15:00 http://cafe.daum.net/moonwharyu/2i2D/331 
//

이 문제는 조금 넓히면 대승공의 성과 이름을 왕건이 하사했는지 하는 문제가

됩니다. [이 글에서는 표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성을 왕이 내려준 것은 '사성',

성이 아닌 이름을 내려준 것을 '사명', 둘 다 내려준 것은 '사성+사명'으로

표기하겠습니다.]


일반론은 복잡하므로 자제하겠습니다.


가정보(1565년)에는 성이나 이름 모두 사성, 사명 기록이 전무합니다.

이는 영락보(1423년)도 동일하다고 추정됩니다.

 

2008 대동보(戊子보)를 참조하면, 초휘(초명) 海, 자 應通, 호 鵝沙가

나오며 차달의 사명을 받았다고 나오는 것이 갑자보(1864년)입니다.


흥률사 기록(글 안에 1356년 기록이라 쓰여 있음)은 태조가 '류차달'의

이름을 내렸다(因其錫名柳車達), 라고 되어 있습니다.


대동보에 실린 대승공에 관한 다른 기록을 더 확인하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 류希霖의 묵방사완복문(1585년): 흥률사 기록을 언급하나 그 평가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입장만 취하고 있음. 대승공의 사적은 설명하는데 사명의 언급은

없음. 


- 홍춘경(洪春卿, 1497(연산군 3)∼1548(명종 3))의 대승공 묘갈문(1543년):

"拜大丞賜號三韓功臣"(벼슬을 대승으로 내리고 삼한공신의 호를 내려줌)의

기록만 있음.


- 류상운(柳尙運, 1636(인조 14)∼1707(숙종 33))의 대승공 묘갈개견문(1681년):

사명, 사호 언급 없음.


- 남병철(南秉哲, 1817(순조 17)∼1863(철종 14))의 대승공 신도비명:

초휘, 자, 호 명기. 黃帝에서 유래한 것으로 설명하고 사성, 사명 등의 언급은

없음. 대승공 부인 명기. 아들은 효금만 기록.



이렇게 보면 흥률사 기록(1356년?)이 사성+사명을 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며

[이 기록은 어디까지 믿어야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류희잠의 태도나 그 후에

일관되게 사성 혹은 사명이 없는 것으로 기록된 가정보, 홍춘경의 글, 또한

류상운 선조님의 글까지 보면 왕건이 대승공께 사성, 사명을 했다는 인식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병철의 신도비명에서는 류차동원설(설원기)에 입각해서

유래를 설명하고 있어 류씨가 오래전에 저절로 생긴 것이기에 사성의 설명은

붙을 수가 없습니다(왕건이 효금에게 류씨 성을 내렸다는 것은 근자에 차씨들이

설원기조차도 부풀려 조작해낸 설명입니다). 그리고 그 시기쯤에 누구나 자나

호를 갖는 사회 분위기 상 대승공께 그런 것들을 적절히 만들어 붙인 정황을

뚜렷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갑자보에 그대로 반영이 되어 있는 것이고요. 이름의 경우는 초휘를

명기한 것은 설원기에 나온, 왕건이 '이차위달'이라는 호를 내렸다는 기사를

'차달'이라는 이름을 내린 것으로 보통 해석하는 것을 받아들여 '차달'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다면 뭔가 처음 이름이 있었어야 하기에

적절히 만들어 붙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물론 당연한 얘기지만 이런 것은

남병철께서 혼자 붙인 것이 아닌, 당시 문화류씨 집안의 일반적인 기록과

인식을 옮긴 것임에 분명합니다.


정리하겠습니다.


대승공의 초휘는 필경 뭔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순우리말이름이었을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차씨들 주장에 이름이 원래 '차해'라는 것은 더 이상

논할 가치가 없고, '류해'였다가 류차달로 바뀌었다는 주장도 대승공께서 이미

한문이름을 갖고 있었다는 말이고, 이것은 또 한문성씨를 갖고 있었다는 해석을

낫습니다. 그런데 문화류씨 성씨가 생긴 것은 대승공께서 직접 혹은 나라에서

성씨를 정해서(이것을 왕이 특정한 개인에게 내린 사성으로 부르기는 곤란함)

생긴 것이라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그래서 이미 한문성씨인 류씨였다는

가정을 하고 있는 '류해'라는 초명은 성립할 확률이 희박합니다.


고려초기의 홍술(弘述), 백옥(白玉), 삼웅산(三熊山), 복사귀(卜沙貴) -->

홍유(洪儒),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의 이름 변화 예가

"고려사"에 잘 나와 있습니다. (원래 이름도 한자가 아닌데 적절히 소리를

따서 표기한 것이겠지요.) 이것을 후대 사람들은 왕건이 성씨를, 또 간혹

이름까지도, 이들에게 내려주었다고 설명하는데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자발적인 변화일 수도 있습니다. 한성을 쓰면서 한글이름을 그대로

둘 리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흥률사의 사성+사명 기록도 이런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충분할 것입니다. 흥률사의 기록을 본 것이

분명한 선조분들께서 그 기록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가정보 시대까지 전혀

사성, 사명 기록을 하지 않으신 것이 가장 확실한 근거라 하겠습니다.


'해'라는 초휘가 자 및 호와 동시에 출현한 것도 후대에 만들어졌다는 좋은

증거가 될 것입니다.


족보 기록은 2008년의 무자보를 보더라도 알 수 있듯이, 이미 앞에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 굴곡된 기록들이 비석글이나 前代의 족보에 들어가 버린

것들을 후대의 족보가 어쩌지 못하고 그냥 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동보의 신도비의 黃帝 운운은 그 앞부분의 원파록삭제변 등의 강한 주장과 완전

상반되는 기록입니다. 그렇다고 족보에 그 신도비 글을 변형해서 실을 없는

법입니다. 한편 '좋은 게 좋다'고, 수사학적 수식(修飾)으로 붙은 표현 등은

문제를 삼을 이유가 전혀 없을 것입니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 대승공에 대한 묘사는 가정보의 설명을 따라서 쓰는 것을 원칙으로 함.


- 사성, 사명은 실제 있었던 일일 가능성도 있고 있지 않았던 일일 가능성도

있으니 때에 따라 적절히 쓰되, 가정보에는 그런 기록이 없음을 유의함.


- 초휘, 자, 호, 부인, 생몰년도 등은 사용할 경우 후대(19C 이후)의

기록임을 명기함.



의견, 토론 기대합니다.


출처 : 廣州 安 씨
글쓴이 : 안택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