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전문기자의 종교건축 이야기](19)‘딱 하나뿐인 한옥 성당’ 익산 나바위성당 |
젓갈 마을로 유명한 강경 읍내에서 23번 국도를 타고 익산 방향으로 2㎞쯤 차를 달리다 보면 ‘나바위성지’라 쓴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표지판을 끼고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이내 야트막한 화산(華山) 중턱에 앉은 성당 하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한옥에 뾰족탑을 올려 세운 외양이 언뜻 보기에도 여느 성당과는 사뭇 다른 성당. 개화기에 세워져 10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인 천주교의 유일한 한옥성당 나바위성당(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 1158·사적 제318호)이다. 외래종교의 토착화를 보여주는 희귀한 교회란 점에 더해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한국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유서깊은 곳. 한국 천주교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성지로 순례객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우암 송시열이 산세에 반해 ‘아름다운 산’이란 이름을 붙였다는 화산(華山). 나바위성당은 이 화산에 있는 광장처럼 너른 바위(나바위)에서 이름을 땄다고 한다. 본당 설립 때는 ‘화산본당’이라 불렸지만 성당이 건립되고 성지로 조성되면서 지금의 나바위로 바뀌었다. 멀찌감치서 보면 마치 화산을 우산처럼 받치고 선 모습. 거대한 팽나무 옆, 팔작 기와 지붕을 인 목조 한옥에 치켜세운 고딕 종탑의 본당과 바로 이웃한 사제관이 연출하는 조경이 잘 꾸며진 정원 못지않게 빼어나다. 성당 양쪽 벽 바깥에 회랑을 두른 것도 이 성당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이다.
중국 상하이 김가항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돛배 라파엘호에 몸을 싣고 서울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 용수리 포구까지 밀려갔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서울로 올라오던 중 배에 물이 차오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배를 댄 곳이 바로 강경 황산포구에서 조금 떨어진 화산이다. 당시 라파엘호에는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다블뤼 신부, 그리고 김 신부 사제서품식에 참석했던 조선 신자 11명이 함께 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제물포, 부산과 함께 3대 어시장으로 꼽혔던 황산포구는 매일 100여척의 배가 드나들 만큼 번창했던 곳이라 포졸들이 항상 진을 치고 있었다. 포졸들의 눈을 피해 인근 화산에 상륙한 김 신부와 신자들은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에게 상복을 입혀 상주로 변장시킨 후 신자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상경했다.(김대건 신부는 상경 11개월 후인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순교했다.)
김대건 신부가 한국 땅을 밟은 것을 기념해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가 1897년 이곳에 설립한 것이 바로 ‘화산본당’. 호남권 본당으로선 전동·수류·고산성당에 이어 네번째로 설립됐지만 옛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성당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초대 주임으로 파견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베르모렐 신부가 당시 돈 4000원을 주고 화산과 농경지를 사들여 1906년에 성당 건물을 세웠다. 설계는 서울의 약현성당(현 중림동성당)을 설계했던 프와넬 신부가 맡았고 벽돌공과 목공일은 모두 중국인들이 했다. 화산에서 30리 떨어진 임천군 지저동 뒷산에서 베어낸 소나무들을 뗏목으로 날라 건축 목재로 썼는데, 터 다지기며 목재 운반 같은 힘겨운 일은 모두 조선 신자들의 몫이었다고 한다.
처음 지어졌을 때의 성당은 흙벽, 기와지붕에 나무로 만든 종탑과 마루바닥의 순 한옥 목조건물. 종탑에는 프랑스에서 제작해 들여온 종이 설치됐는데 이 종은 나중에 성당 입구쪽 강당에 종탑을 새로 들여 옮겼다. 종 소리의 울림에 건물 균형이 틀어지는데다 종탑에 벼락을 맞아 어쩔 수 없이 종을 옮겼다고 한다. 이후 1916년에 목조벽을 벽돌조로 교체하고 고딕식 벽돌 종각을 올려 지금의 한국식과 서양식 건축양식이 혼합된 독특한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이다. 성당 앞면의 수직종탑과 아치형 출입구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전통 목조 한옥 형태의 지붕과 벽면은 성당의 것으론 아주 생소하다. 기와 지붕 아래에는 중국 인부들의 손길을 탄 팔각 채광창 68개가 사방으로 나 있고, 모든 처마 위엔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성당 뒤편 야외 제대와 성모동산을 지나 ‘십자가의 길’을 따라 화산 정상에 서면 ‘김대건 신부 순교기념비’와 ‘망금정(望金亭)’이 눈에 들어온다. 순교기념비는 김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의 규모와 같은, 높이 4m50㎝의 크기로 지어졌다. 순교 기념비 왼쪽으로 금강 황산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망금정’은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와 교구 사제 피정소로 사용되던 곳. 망금정 바로 아래까지 금강 강물이 넘실거렸지만 일본인들이 둑을 쌓아 농토로 만들었고 지금은 주민들이 수박, 토마토를 키우는 비닐하우스 단지로 변했다.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서북지방의 공소 24개를 관할하며 1929년 무렵엔 신자수 3200명에 전국 최대의 본당으로 우뚝 섰던 나바위성당. 전국에서 최초로 신사참배 거부 사태를 일으킨 ‘계명학교’를 운영한 바로 그 성당이며 일제기와 6·25전쟁 중에도 미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 유일한 성당이기도 하다. 지금은 신자 800명이 교적에 올라있고 망성면 지역 주민 180명 정도가 미사에 참여하는 작은 교회. 그러나 성당 입구에 그대로 남아 있는 이름 ‘화산성당’이 한때 ‘전국 최대의 본당’이었던 옛 위상을 웅변하고 있다.
■ 성당 안에 들어가면
유일한 ‘한옥 천주교성당’에 걸맞게 내부 구조와 제대 등 성물들은 모두 현대 건축양식의 성당에선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들이다. 우선 성당의 가장 성스럽고 중요한 공간인 제단과 제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개혁 이전의 모든 성당이 그랬듯이 사제가 신자석에 등을 돌린 채 벽을 보고 미사를 봉헌하던 옛 제대가 그대로 보존돼 있다. 초대 주임이었던 베르모렐 신부가 프랑스와 중국에서 부품을 몰래 들여와 직접 조립했다고 한다. 제대 위 예수 성심상과 촛대, 감실 등도 성당을 처음 지었을 때 들여왔던 그대로다. 중앙 제대 양 옆에는 소제대가 옛 모습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오른쪽 소제대 감실에는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목뼈)가 봉안되어 있어 신자들의 예배가 집중된다. 옛 제대 앞 신자석 쪽을 향해 새로 제대를 놓아 모두 4대의 제대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기록으로 보면 제단과 신자석 사이를 구분하는 성체간이 있었지만 언제 철거되어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중앙 통로 한가운데에는 8개의 목조 기둥이 일정 간격으로 서 있는데 이 기둥들은 남녀 신자석을 구분하는 경계였다고 한다. 많은 초창기 교회와 성당에서 천 등으로 칸막이를 쳤지만 아예 기둥을 세워 남녀석을 구분한 것은 이례적이다. 출입문을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초창기 그대로의 낡은 목조 성수대도 독특하다. 바닥은 맨 마루바닥. 처음 지어졌을 당시에 깔았던 나무 그대로의 것인데 오랜 세월 신자들이 드나들어 반질반질하다. | |
나바위성지(성당)
이 세상 어딘가에 비밀의 방 하나가 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영화 <잠입자>였을 것이다. 잠입자가 안내하는 그 방은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방이다. 입으로 이야기한 소원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이 품은 진짜 소원을 들어주는 곳이다.
자기 때문에 죽은 형의 소생을 그 방에서 이야기한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형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는 엄청난 부자가 되어 있었다. ‘발설한 소원’이 아니라 자기 안의 내밀한 소원을 확인한 그는 목을 맸다. 그 방 앞에서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진짜 소원이 이뤄질까봐.
나바위성지를 바라보는 느티나무와 성모상이 겨울 햇빛에 눈이 부시다. -.-
한옥을 얹은 기와와 고딕식 첨탑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화산성당.
한옥 기와를 얹은 성당이 고딕식 첨탑과 어우러진 풍경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스테인드글라스 대신 온화한 한지로 바른 창문들도 고요하게 마음에 안겨 든다.
전에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해서. 남자, 여자를 갈르고 기둥에다 커튼을 달았다 한다. 기도하며 잡념이 들어간다하여 신부님만 쳐다보라고. 지금은 기둥만 있다. 남녀칠세부동석? 이제는 흘러간 옛 이야길뿐.
한국,중국, 프랑스 세나라의 합작 건물이다. 기와에 총총이 달려있는 고드름 얼마만에 보는것일까?
이 담을 돌아 들어가면 김대건신부님의 순교비와 ‘망금정(望錦亭)’을 만난다.
누군가 우리보다 먼저 다녀갔나보다. 좀 처럼 보기드문 눈사람을 만들어 놓아 우리를 반겨주었다.
성당 발치에 있는 화산리 화남마을 사람치고 화산성당 신자가 아닌 이는 드물다 했다.
이 땅에서 가톨릭이 가장 어려웠던 1929년에도 신도수 3200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큰 본당이었던 화산성당.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는 역경 속에서 지역민들의 어려움을 껴안아 왔던 화산성당은 1907년 계명학교를 세워 1947년 폐교될 때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교육에 힘을 기울였고 1949년부터는 간이진료소라 할 수 있는 시약소를 설립하여 1987년 폐쇄될 때까지 가난한 농민들의 건강을 돌보아왔다.
그로부터 1년 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순교했던 김대건 신부를 기리기 위해 1897년 장약실(베르모레) 신부에 의해 이곳에 최초로 교회가 세워졌다. 현재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318호)로 지정돼 있는 화산 성당(나바위 성당이라고도 한다)은 1906년 건립된 것으로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것. 한국천주교회에서는 이곳을 김대건 성인이 처음 전도한 곳으로 한국 기독교의 첫걸음이 시작된 곳이라 하여 성지로 지정하고 있다.
순교비가 있는 언덕으로 오르는 길. 예수의 고난을 돌에 새긴 열 네 개의 부조가 놓여 있다.
나바위 성당에서 순교비가 있는 언덕 위까지에는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형장으로 올라가던 고난의 순간들을 돌에 새긴 열 네 개의 부조가 놓여 있다. 천주교 박해 당시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곳임을 잊지 않으려는 뜻이다.
뉘라도 고개 숙여 제 안을 들여다보게 되는 숲길. 제 안의 헛된 바람들을 그만 내려놓고 싶어지는 숲길이다.
언덕 위에 있는 김 신부의 순교비는 1955년 당시 김 신부가 중국에서 타고 왔던 돛단배의 실제 크기와 똑같은 높이로 만들어져 고난의 항해를 되새기게 하고 있다.
그 옆으론 ‘복자 안드레아 김신부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의인은 향나무처럼 치는 도끼에 향기를 묻히나니…> 그분라면 능히 그러했을 것이다.
그 길의 끝에서 만나는 건 ‘망금정(望錦亭)’이라는 현판을 건 정자. 바닥도 앞도 뒤도 온통 너럭바위에 앉혀진 이 정자에 들면 이름 그대로 들판 너머 하얀 설화속 은빛으로 반짝이며 누워 있는 금강이 바라보인다
나바위 위에 자리한 망금정 너머 멀리 금강이 바라다보인다. 많이 찍은 사진들을 다 올리지 못함이 못내 서운하다.
순교비 언덕까지 예수 고난의 순간들 새긴 14개 부조.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그런 이름을 얻었을까. 우암 송시열이 ‘화산(華山)’이라 이름한 산.
사발을 엎어놓은 듯한 이 작은 산이 어디서든 눈에 드는 것은 너른 평야 한가운데 솟아 있는 까닭이다. 이 산의 줄기가 다하는 지점에 펼쳐진 너른 바위가 나바위(羅巖).
배의 이름은 라파엘호. 상해를 출발한 지 42일 만이었다. 15세의 어린 나이로 고국을 떠나 중국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가 그 배 안에 있었다.
외래 종교에 대한 수모와 박해 속에서 특히 평등사상을 앞세운 기독교는 조선 후기의 계급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했던 까닭에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신부가 된 앙드레아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이 곳에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1845년(헌종 11년) 10월12일 밤의 일이다.
이곳에도 작은 눈사람을 만들어 놓았는데 만든분이 진심이 어린듯 입모양, 눈모양까지 정교하게 조각 해놓았다
조선시대엔 국가의 긴급한 소식을 전하던 봉화대가 이곳에 있었고 정부미를 실어 나르던 창고가 있어서 "나암창"이라고도 하였던 곳이다.
지금은 논밭이지만 왜정 때 금강둑 쌓기 전에는 금강물이 화산 절벽 아래 찰랑찰랑 했다고 한다. 나바위 발끝 아래 닿았던 배 한 척을 아스라히 생각해본다.
피정의 길을 한바퀴 돌아내려 오시는 우리 선생님들의 얼굴엔 행복이 가득하시다.
위에서 내려다본 마을이 편안해 보인다.
나바위성지
전북 익산시 망성면 화산리에 자리하고 있다.
화산(華山)이라는 산이 있는데
나바위성지는 이 산 내에 있으며,
산이 너무 아름다워 우암 송시열이 붙여준 이름이다.
이 산의 줄기가 끝나는 지점에 넓은 바위가 있는데
이를 ‘나바위’라고 한다.
이곳 화산은 1845년(헌종 11년) 10월 12일 밤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신부가 사제 서품을 받고 입국,
첫발을 내디딘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1836년 12 월 15세의 어린 나이로 고향인
경기도 용인의 골배마실을 떠나 7개월 만인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한 뒤,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천신만고 끝에
국경을 넘어 조선에 입국하는데 성공하였다.
3개월 뒤인 1845년 4월 11명의 교우들과
작은 목선 라파엘(Rapael)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나 6월 4일 상해에 도착한다.
상해 인근의 금가항 성당에서 8월 17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고
한국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그 후 김대건 신부는
조선에서 함께 출국했던 교우11명과 함께
페레올(Ferreol)주교, 다블뤼(Daveluy) 신부를 모시고
상해를 떠나 조선으로 향했는데,
도중에 폭풍을 만나
망망대해를 표류하며 갖은 고생 끝에
제주도를 거쳐 42일만에
1845년 10월 12일 밤
이곳 황산포구 나바위 기슭에 상륙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바위 성당은 김대건 신부일행이
한국 땅을 밝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베르모렐(Vermorel)신부’가
1897년에 설립해
1906년에 성당 건물을 완공하였다.
한국문화 특성에 맞게
한옥 목조 건물에 기와를 얹은 나바위성당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본당내부는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한국풍속을 따른 듯 남녀 교우가 서로 구별하여 앉고
남녀 입구가 다르고 앉는 곳도 칸막이로 막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나바위 본당
설립 100주년(1997년)기념 사업으로 완공된
피정의 집은 연건평 740평,
수용인원 300명 정도이고
피정의 집 뒤뜰에는
야외 수영장도 갖추고 있다.
출처 : 광산김씨 전북 종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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