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류씨본관

ryu하곡 2008. 11. 5. 11:06
본관은 문화(文化)·진주(晉州)·전주(全州)·서산(瑞山)·풍산(豊山)·선산(善山)·고흥(高興) 등이 있다. 일반적으로 유씨는 문화유씨를 대종(大宗)으로 하는 동원분파(同源分派)로 알려져 있다. 유씨는 고려 초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 유차달(柳車達)을 시조로 한다. 그는 고려 창업 당시 왕건(王建)을 도와 벼슬이 대승(大丞)에 올랐다. 조상이 차씨(車氏)에서 변성(變姓)한 사실을 안 태조가 차씨와 유씨의 대를 잇게 하기 위하여 유차달의 큰아들인 효전(孝全)에게 조상의 옛 성인 차씨를 계승케 하고, 둘째아들 효금(孝金)에게는 유씨를 계승케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유씨와 차씨는 같은 시조에서 갈라진 동족이성(同族異姓)으로 서로 통혼하지 않는 것이 관습이다. 1990년 경제기획원에서 실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50만 9077명, 12만 887가구로 총 274개 성 가운데 제19위였다.

고흥유씨
시조는 유영(柳英)으로 고려 문종 때 호장(戶長)을 지냈다. 그의 상계(上系)와 출생연대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지만, 7세손 청신(淸臣)이 고려 고종 때 활동한 것으로 미루어 문종 초의 인물로 추정된다. 시조 유영이 흥양(興陽;지금의 高興)에서 터를 잡고 살았으며, 고흥을 본관으로 삼게 된 것은 6세손 시중(侍中) 유승무(柳升茂)를 비롯하여 7세손 청신이 고려 충선왕 때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을 지낸 뒤 고흥부원군에 봉해짐으로써 굳어졌다. 조선 선조·광해군 때 문필로 이름을 날린 유몽인(柳夢寅), 고종 때 의병장인 유인석(柳麟錫), 3·1운동 때 순국한 유관순(柳寬順) 등 중요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전라남도 나주(羅州)·영광(靈光), 전라북도 정읍(井邑), 충청남도 천안(天安), 강원도 춘천(春川) 등에서 후손들이 세거한다. 시조 이상의 상계는 문헌 등이 없어서 알 수 없다. 따라서 유차달을 원조(遠祖)로 하는 문화유씨와는 계통을 달리한다. 인구수 6만 4465(1985).

문화유씨
고려 개국공신 유차달을 시조로 한다. 본관을 문화로 삼게 된 것은 유차달의 8대손으로 고려 고종 때 문신인 유경이 위사공신(衛社功臣) 1등이 되고, 그 공으로 그의 고향인 유주(儒州)를 문화현으로 승격시키자 후손들이 관향으로 삼았다. 문화유씨의 분파는 고려 말, 조선 초에 활약한 인물들인 유차달의 11세·13세·14세손을 파조(派祖)로 하여 14개파로 나누어진다. 7세조 유공권(柳公權)에게는 언침(彦沈)·택(澤)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후손을 각각 갑파·을파라 한다. 갑파는 시랑공파(侍郎公派)·문숙공파(文肅公派)·하정공파(夏亭公派)·장령공파(掌令公派)·곤산군파(崑山君派)·문평군파(文平君派)가 있으며, 을파에는 지후사공파(祗候使公派)·좌상공파(左相公派)·검한성공파(檢漢城公派)·정숙공파(貞肅公派)·판사공파(判事公派)·수사공파(水使公派)·부윤공파(府尹公派)·충경공파(忠景公派)가 있다. 문화유씨는 고려, 조선조에 걸쳐 상신(相臣) 9명, 대제학 4명, 문과급제자 134명, 무과급제자 279명, 생원·진사합격자 542명, 음사(蔭仕) 728명을 배출하였다. 유명인물로는 조선개국공신으로 태종 때 예문관대제학·우의정을 지낸 유량(柳亮), 청백리 유관(柳寬),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성원(柳誠源), 조선 후기 실학의 비조(鼻祖)인 유형원(柳馨遠),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 실학의 선구자인 유수원(柳壽垣), 북학파의 학자로 발해사 연구에 업적을 남긴 유득공(柳得恭), 독립운동가인 유동열(柳東說) 등이 있다. 인구수 25만 5632(1985).

  배천(白川)유씨
시조는 유인경(柳仁景)으로 세계(世系)나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후손들이 고려 때 좌우위보승랑장(左右衛保勝郎將)을 지낸 유인경을 시조로 하고, 배천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202(1985) .

부평(富平)유씨
시조는 유흥정(柳興廷)이다. 전해오는 문헌이 없어 세계나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고, 유흥정이 고려 때 낭장(郞將)을 지냈다고 알려져 있다. 인구수 9856(1985).

서산유씨
문화유씨에서 분적된 성씨로, 서령유씨(瑞寧柳氏)라고도 한다. 문화유씨의 시조인 유차달의 9세손 유성간(柳成澗;일명 成梓)을 시조로 한다. 고려 명종 때 벼슬이 금자광록대부 참지정사 정당문학(金紫光祿大夫參知政事政堂文學)에 이르렀고, 서령부원군에 봉해졌다. 유명인물로는 고려 때 추밀원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지낸 유숙(柳淑), 밀직부사상의(密直副使商議)를 지낸 유실(柳實) 등이 있고, 조선 성종 때 대사간·돈녕부도정(敦寧莩正)을 지낸 두시(杜詩)의 대가 유윤겸(柳允謙), 중종 때 승지를 지낸 유사(柳泗) 등이 있다. 인구수 9856(1985).

선산유씨
중시조는 유지비(柳之庇)이다. 그는 유순(柳淳)의 아들로 선산군(善山君)에 봉해졌는데, 후손들이 문화유씨에서 분적, 선산을 관향으로 삼아 계대(繼代)하고 있다. 인구수 2423(1985).


약목(若木)유씨
시조는 사직단직(社稷壇直)을 지낸 유하(柳夏)이다. 약목은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에 있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대목현(大木縣)이다. 문헌이 없어 세계나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다. 인구수 16(1985).

  연안(延安)유씨
시조는 유종규(柳宗揆)로 조선 정종(定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를 지냈다. 본관의 유래는 문헌이 없어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연안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인구수 344(1985).

  영광(靈光)유씨
시조는 유자택(柳資澤)으로 전라감사를 지낸 뒤 남원(南原)에 정착하였다. 《신해보(辛亥譜)》 서문에 보면 영광유씨는 진주유씨에서 분파되었는데, 유자택은 진주군 유유(柳洧)의 손자이며, 유혜방(柳惠芳)의 아들이라 하였다. 남원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유명한 인물로는 유자황(柳子晃)·자광(子光) 형제를 들 수 있다. 인구수 964(1985).

  육창(陸昌)유씨
시조는 유세영(柳世英)으로 고려 때 호장(戶長)을 지냈다고 한다. 문헌이 없어 세계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육창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본관지인 육창은 전라남도 영광군에 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의 아로현(阿老縣)이다. 인구수 843(1985).

인동(仁同)유씨
시조는 유한(柳瀚)이다. 인동은 경상북도 칠곡군(漆谷郡)에 있는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사동화현(斯同火縣)이다. 시조 성명만 전해올 뿐 문헌이 없어 세계와 본관의 유래 등은 알 수 없으나, 《조선씨족통보》에 의하면 인동유씨는 군수를 지낸 유봉명(柳鳳鳴)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다. 인구수 737(1985).

전주유씨
문화유씨에서 분적된 성씨로 문화유씨 시조인 유차달의 9세손 유양재(柳良梓)를 시조로 한다. 전성군(全城君)에 봉해진 까닭에 후손이 전주를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크게 충숙공파(忠肅公派)·장령공파(掌令公派)·현감공파(縣監公派)의 3파로 나누어진다. 고려의 인물로는 현종 때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를 지낸 유방헌(柳邦憲)과 부자간에 평장사에 오른 유광식(柳光植)·유소(柳韶)가 있다. 조선시대 인물로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을 비롯하여 이조참판 유의손(柳義孫), 관찰사 유숭조(柳崇祖), 대사헌 유경창(柳慶昌)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1930년 무렵에는 전라북도 완주군(完州郡)·김제군(金堤郡)·순창군(淳昌郡) 등지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 인구수 4만 7383(1985).

  정주(貞州)유씨
시조는 고려 덕종(德宗) 때의 명신인 유소(柳韶)로 고려 때 태위문하시랑평장사(太尉門下侍郎平章事)를 지냈다. 문헌이 없어 세계는 알 수 없으나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정주(지금의 開豊)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유명한 인물로는 고려 숙종비 명의왕후(明懿王后)의 아버지로 선종(宣宗)의 묘정에 배향된 유홍(柳洪)과, 역시 예종(睿宗)의 묘정에 배향된 정간공(貞簡公) 유인저(柳仁著) 등이 있다. 인구수 129(1985).

  진주유씨(移柳-문화유씨계)
시조는 유차달의 8세손인 유언침(柳彦琛)으로 밀직사를 지낼 때 공을 세워 본관을 진주로 분적하였다. 고려시대의 주요인물로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를 지낸 유택(柳澤),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른 유익정(柳益貞) 등이 있으며, 조선에 와서는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중종 때 정국공신(靖國功臣) 유순정(柳順汀) 등 역사적 인물이 많다. 시조묘는 황해남도 신천군(信川郡)에 있고, 1423년(세종 5)의 《영락보(永樂譜)》를 비롯하여 1986년 《병인보(丙寅譜)》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족보가 간행되었다. 인구수 7만 2827 (1985) .

진주유씨(土柳)
고려 중기에 금자광록대부에 올라 좌우위상장군(左右衛上將軍)을 지낸 진강부원군(晉康府院君) 유정(柳挺)을 시조로 한다. 그는 진주에서 오래 살아온 사족(士族)이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은 문화유씨계에서 옮겨온 이유계(移柳系)와 구분하여, 토유(土柳)라 한다. 진주유씨는 5세조 유유와 유부를 파조로 하여 양화공파(良和公派)·총랑공파(摠郎公派)로 분파되었고, 그 후손 중에서 다시 몇 개의 파로 나누어졌다. 1930년 당시 경기도 시흥군(始興郡)·이천군(利川郡)·용인군(龍仁郡) 등, 층청북도 청원군(淸原郡)·중원군(中原郡) 등과 경상북도·경상남도·황해남도 일원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다. 인구수 7만 2827(1985) .


풍산(豊山)유씨
시조는 고려 초에 호장을 지낸 유절(柳節)이다. 7세조 유종혜(柳從惠)가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오르면서 알려지기 시작하였고, 이때에 주거지를 풍산에서 하회촌(河回村)으로 옮겼는데 오늘날까지 풍산유씨의 세거지(世居地)를 이루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하였고 영의정을 지낸 유성룡(柳成龍), 그의 형 운룡(雲龍), 고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유후조(柳厚祚) 등을 들 수 있다. 인구수 1만 1657(1985).
출처 :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서~~~
글쓴이 : 어름산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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