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독우로서
사량국을 정벌할 때 상장을 하였다. 동사에 사량국은 지금의 상주인데 첨해왕1년(247년)에 정벌하였다 한다. 즉 한후제 연희10년
때이다.
16
세
아들
보전
輔(보)자는
甫(보)자로도 쓴다. 배필은 석씨로 우노의 따님이니 내해왕의 손녀이다.
17
세
아들
제능
아들
제안
能(능)자는
張(장)으로도 쓴 곳도 있다. 미추왕2년(262년)에 대승상으로서 국정을 바로 잡았다.
18
세
아들
등국
아간
벼슬을 하였다.
19
세
아들
은보
아들
세보
甫(보)자는
夫(부)로도 쓰며, 승상을 지냈다.
아간
벼슬을 하였다.
20
세
아들
연광
승상을
지냈다고도 하고 아우 벼슬을 했다고도 한다. 배필은 김씨로서 실성왕의 공주이니 알지의 후손이다. 눌지가 실성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니 공은
그 부당함을 강력히 간하다가 눌지의 노여움을 사서 피살되었다. 동사에는 실성왕16년(417년) 즉, 진나라 안제 의희13년에 눌지가 왕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21
세
아들
미만
曼微(만미)라고도
하고 曼徽(만휘)라고도 한다. 승상을 지냈다. 공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왜(일본)왕 협이 항복받고자 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아 피살되었다.
동사에는 당시 삽량주 박제상과 함께 왜왕에게 피살되었다고 한다.
22
세
아들
인
아들
지
아들
의
승상을
지냈다.
지아(智阿)라고도
한다.
이손(伊飱)
또는 승상을 지냈다고도 한다.
사공 벼슬을 하였다.
23
세
아들
온백
아손과
승상을 지냈다. 배필은 명성복씨로서 문감걸의 따님이다.
24
세
아들
욱
翰(한),
植(식), 楯(순) 등으로 쓴 곳도 있다. 승상을 지내고 선비를 모아 날마다 유교의 도를 강론하였다.
啓(계)자는
階(계)로 쓴 곳도 있으며, 대상을 지냈다. 선덕여왕 때 들어와서 병으로 사직하고 숨어서 나오지 않았다.
28
세
아들
개식
改(개)자는
段(단)으로 쓴 곳도 있으며, 대상을 지냈다. 신문왕2년(682년)에 국학의 설립을 상소하였으며, 설총을 모시어 예를 세우고 스스로 자주
가르침을 받았다.
29세
아들
헌
승상을
지냈다. 경덕왕이 공을 촉에 사신으로 보냈다. 동사에 의하면 당나라 천보15년(756년)에 현종이 안록산의 난을 피하여 촉에 가서 있었는데
공에게 손수 지은 십운시와 편지를 주어 현종에게 보낸 것이다.
30
세
아들
제강
아들
도강
이손을
지냈다.
江(강)자는
康(강)으로 쓴 곳도 있다. 전의사를 지냈고 김양상이 혜공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르니 공이 이를 막다가 피살되었다. 동사에 의하면 당나라
고종원년(780년)에 양상이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고 하였다.
31
세
아들
검부
승상을
지냈다. 상소하여 학교를 세우고 과목을 정하여 인재를 뽑았다. 배필은 익원양씨로서 상장군 인방의 따님이다. 동사에 의하면 원성왕4(788)년에
독서출신과를 설립하였다.
32
세
아들
건신
申(신)자는
信(신)으로 쓴 곳도 있으며, 승상을 지냈다. 소성왕 때 노신으로 소성왕이 주공의 고사(주공이 성왕을 업고 조회에 참석하여 여러 제후에게 본을
보인 일)를 들어 어린 태자를 친히 부탁하였다. 소성왕이 죽고 12세로 애장왕이 즉위하니 공은 보상(섭정하는 재상)으로서 국정을 돌보셨으나 공이
별세하니 애장왕은 백관에게 명하여 왕과 같은 예로 장사지내고 소성왕묘에 배향하였다. 묘는 경남 양산군 기장읍 만화동에 남향으로 있는데
주위의 숙사에도 돌을 깔고 비석들 세웠으며, 세상사람들은 차릉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