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Re:차서(次序)문제 토론

ryu하곡 2008. 10. 12. 21:48

♧ 토론의 한 과정으로 저의 생각을 제시합니다.

1. 영락보 서문에 관과 사눌이 나오는데, 가정보 공권의 행장에는 관은 없고 택과 직계손이 나온 이유를 알듯합니다. 그러나 저는 묘지가 확실한 증거라 해도 언침이 무관으로만 재직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 할아버지들이 해온 것처럼 족보 내용의 순서로 마음이 갑니다.

2. 어느 문헌에서 언침의 진주에 식읍을 받아 관향을 진주라고 했는데 자녀들이 언침 사후에 진주가 아니고 문화라고 하여 문화류씨로 남았다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문헌의 뒷받침할 자료가 충분하지 못하던 차에 2007년 충주에서 비문에 진주라고 쓴 것을 정정하라고 柳門에서 항의하여 정정하기로 했던 일이 있었습니다(저는 정정했는지 확인은 못했으나) 그때 제가 진주라고 쓴 것도 타당성이 있을 수 있으니 확실한 증거로 정정을 요구하라고 저의 집안 어르신(항의 할 때 참여 하신 분)에게 말했다가 버릇 없고 무식한 者(놈)이라고 꾸중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언침공에 대하여 더 연구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주류씨 부분도 우리 할아버지들이 해온 것처럼 족보 내용으로 믿고 따라야 현재 제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3. 공권의 아들 순서에 대한 한눈에 알아 볼 수 있게 정리해준 점 감사드립니다. 일부에서 충분한 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어느 특정부분의 자료를 가지고 차서(次序)문제를 이야기하였으나 여러 가능성을 이야기 해주어 감사드립니다.

4. 족보와 1923년 발행한 鐘德誌(編輯兼發行者 柳興世, 發行所 柳氏宗務所 京城府南大門通四丁目六八番地, 創刊有司 漢鼎 翼南 錫永 程河)에 채하남이 제시한 비문을 보았으나 이제야 정확한 이해를 하였습니다.

5. 채하님의 의견을 잘 알았습니다. 다른 분의 의견과 자료를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바라는 자료는 묘지명과 고려사 보다는 우리 할아버지들이 만들었던 자료입니다. 묘지명과 고려사는 확실하게 나타났지만 당시 우리 할아버지들의 생각을 어떠했는지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