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Re:Re:휘 공권(諱 公權)의 양자 차서(兩子 次序)에 대한 반증(反證)

ryu하곡 2008. 9. 29. 19:33

고려사 99권 열전 12

류공권〔류택(柳澤)의 기사 첨부〕

  류공권의 자는 정평(正平)이며 유주(儒州) 사람이다. 그의 6대조는 대승(大丞) 차달(車達)인데 태조를 보좌하여 공신으로 되었다. 류공권은 어려서부터 공부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초서(草)와 예서(隸)를 잘 썼다. 과거에 급제하고 익양부 녹사(翼陽府 錄事)로 되었다가 명종 초년에 직사관(直史館)으로 되고 여러 번 승직되어 병부 낭중(兵部郞中)으로 되었으며 후에 예빈경(禮賓卿)으로서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만춘절(萬春節)을 축하하였는데 금나라 사람들이 그가 예절을 잘 알았다고 칭찬하였다. 후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임명되었고 우산기상시 지주사(右散騎常侍知奏事)로 승진되었는데 그가 직무 수행에서 왕의 의도를 잘 체득하여 국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까지 승진되었다가 25년에 병으로 퇴직할 것을 요청하니 왕이 그의 학문을 사랑하여 내보내지 않으려 하면서 말하기를 조정에 덕망이 높은 사람이 있는 것은 국가의 복인데 그대는 왜 그리 빨리 물러가려 하는가?󰡓라고 하였으나 류공권은 세 번이나 글을 올려 퇴직을 간청하였으므로 허락하였다. 1년이 지나 그가 병을 앓게 되자 친척들이 약을 권하니 류공권이 󰡒죽고 사는 것은 명(命)이다󰡓라고 말하면서 약을 먹지 않았다. 병이 위중하게 되니 왕이 특별히 정당문학 참지정사(政堂文學 參知政事)로 임명하였다. 향년 65세로 죽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류공권은 청렴하고 공평하며 직무에 충실하였다.

  아들은 류택(澤), 류언침(彦琛)인바 류언침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이었다. 류택은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이 상서 우복야 한림학사 승지에 이르렀었다.

  고종(高宗)이 일찍이 선경전(宣慶殿)에서 장경회(藏經會)를 베풀었는데 류택이 지은 소문(疏)에 이르기를 전하가 아무리 독실히 근면한 생각을 가지고서 혹이나 태만하고 안일할세라 노력을 하고 있으나 불행히 다난한 때를 당하였는지라 하부를 능히 제어하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간의대부 박현규(諫議大夫朴玄圭)가 말하기를 이른바 능히 제어하지 못한다는 대상자는 틀림없이 진강공(晋康公)을 의미한 문구이다라고 하고 사람을 시켜 최충헌(즉 진강공)에게 통보하였으므로 최충헌이 즉시로 류택을 불러서 질문한즉 류택은 태연 자약한 태도로 크게 웃었다. 이것은 박현규가 류택과 숙감(宿憾)이 있었으므로 이 일로써 최충헌을 경동시킨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류택의 아들은 유경(璥)인데 따로 전기가 있다.

 

문화류씨하정공파보 권1(2003년 발행)

23쪽(자녀에 대한 부분 발췌)

文簡公 諱公權史蹟

生子尙書彦沉僕射澤

두 아들을 두셨으니 상서공언침과 복사공택이다.


24쪽

政堂文學叅知政事判尙書禮部事文簡公墓誌

生子男二人長男今爲入內侍試戶部郎中兼太子內直郞 次男今爲內侍精勇攝別將 女適天水子今爲工部郎中知制誥

2남 1녀를 낳으시니 장남은 今에 內侍試戶部郎中이 되고 太子內直郞을 兼하고, 차남은 今에 內侍精勇攝別將이 되고, 女는 천수자에 출가하니 今에 工部郎中知制誥가 되었다.


※ 史蹟 墓誌 글 쓴이 미상임


28쪽

文簡公 諱公權墓碣文

公有二子長彦沉禮部尙書上將軍次澤大提學右僕射一女適尹威禮部侍郎孫淳翰林(王+敬)太學士諡文正曾成庇

공이 二子가 있으니 長은 언침이니 예부상서상장군이요, 次는 택이니 대제학우복야요, 一女는 尹威에 適하니 禮部侍郎이요, 孫은 淳이니 翰林이요, 경은 太學士니 諡는 문정이요, 증손에 성비는.........

※葬後七百二十一年 丙辰 八月 十三日 立, 二十四代孫通政大夫前秘書院丞兼掌禮院掌禮 寅哲 謹撰

(1916년 8월 13일 掌禮院의 掌禮 寅哲이 글을 짓다)


 

※ 고려대 박용운 교수의 논문은

1. 고려사 99권 열전 12와

2. 文簡公墓誌를 중심으로 류공권의 큰아들이 택이며 작은 아들이 언침이라고 하며

   문화류씨 족보에는 언침이 장자로 되어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