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할아버지(할머니) 오류 내용
신화국은 4남 3여를 두었는데 자녀 순서는 신지향(申芝香, 1538 ~ 1622), 신잡(申磼, 1541 ~ 1609), 신급(申礏, 1543 ~ 1592), 신립(申砬, 1546 ~ 1592), 신할(申硈, 1548 ~ 1592), 신단향(申檀香, 1550 ~ ?), 신계숙(申季淑, 1553 ~ ?)로 인터넷에 돌아다니는데 수정할 부분이 있어 여기 기록합니다.
신지향은 구사맹(具思孟)에게 시집갔는데, 구사맹의 딸이 선조와 인빈 김씨의 아들 정원군에게 시집가 인조를 낳았습니다. 훗날 인조는 인조반정을 일으켜 즉위했고, 자신의 친부모를 '원종'과 인헌왕후로 추숭했습니다. 즉 신잡 신급 신립 신할은 인헌왕후 구씨(구사맹 딸)의 외삼촌이 되고 구사맹의 막내아들(구굉)이 신립의 아들 신경진과 인조반정을 주도했으며 역시 조선 후기 평산 신씨와 무반 요직을 독차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립은 선조의 아들 신성군의 장인이며 신립의 아들 신경진이 인조반정의 공신으로 신립이 영의정 평양 부원군으로 추증되었습니다.
2녀 신단향은 죽산인 첨지 安景(氵庶)이며
저의 선조인 대승공 20세 휘 약(瀹, 사복시 정)은 을묘 1555년 5월 17일생이며 무진 1628년 12월 13일 74세로 돌아가시며 할머니(配)는 신계숙(申季淑, 갑인 1554년 8월 9일생이며 을축 1625년 1월 15일 72세로 돌아가십니다.
대승공 20세 할머니 이름이 신계숙이라는 자료입니다.
왕실 족보는 선원록 종친록 유부록 3가지가 있는데 선원록이나 유부록에는 사가 족보나 다른 왕실 족보에는 전혀 기록되지 않은 여성의 이름과 출생년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 전기 가족사를 재구성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선원록은 숙종 때 처음 간행하여 새 임금이 즉위할 때마다 보완하다가 1897(고종 34)년에 모두 합쳐서 간행하였다는데 신화국 가족은 1600년대초에 머물러 있습니다.
위 사진은 선원록에 있는 1녀 2녀 3녀 사위 이름입니다. : 약할아버지 딸 3명으로 1녀 柳訓伊(류훈이, 朴恒吉혼인 당시는 泰吉) 2녀 류혜완(柳惠婉, 權克正) 3녀 류난이(柳蘭伊, 原州人 元淙, 족보에는 없음)이며 선원록에서 대승공21세 고모할머니 함자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선조 이신 휘 인남 휘 의남 휘 신남(혼인당시 孝男이름이 小科에 信男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에 입학함)께서 외가에서 자랐기에 외사촌 동생인 신립의 사돈인 이이첨(사위 이대엽 아버지)은 광해군 때 폐모살제(廢母殺弟)로 인목왕후의 폐모론으로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과 오빠, 남동생들, 아들 영창대군을 모두 죽였으며, 겉으로는 대북의 폐모론에 반대하는 척하면서 대비를 폐할 생각이 없는 척 하면서 반대하는 이들은 귀양 보냈고, 강경책을 편 이들은 벌하지 않았고 폐모론을 주장하는 대북파 영수입니다.
외가집 잔치날에 이이첨에게 애미없는 자(者)라고 했다고 하인준이 고변하여 인남선조는 나주모산으로, 의남선조는 고부로 신남 선조는 공주로 피신합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3905026_004 (인남 선조 무관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oa_10911025_003(의남 선조 폐비기사)
https://sillok.history.go.kr/id/kob_10912010_010(신남 선조 폐비기사)
인조반정후 외사촌 신경진과 이종사촌 구굉의 부름으로 휘 인남 선조는 선전관으로 복귀하려고 한양에 가던길에 동생 의남집에서 병으로 돌아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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