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영암군 신북면 변천사

ryu하곡 2023. 9. 4. 20:40

A. 비음면(非音面) 유래 해설 자료

본해설은 정조이전 모산선조의 뜻을 모르니 해설자의 주관적인 견해로 해설함

1. 분비재(憤悱齋) : “분하더라도 흥분하여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분해도 말하지 아니할 수 밖에 없으니 자신 되돌아보기와 학문에 더욱 정진하라는 깊은 뜻

논어술이(述而)편에 불분불계(不憤不啓)와 불비불발(不悱不發)은 계발(啓發)이란 말이 있다. ()은 마음을 통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상태를 말한다. ()는 드러내려 하지만 제대로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2. 金剛經 六祖大師口訣의 일부분

[滿耳非音 聞箇甚麽 廓然無我 聞底是甚麽

만이비음 문개심마 확연무아 문저시심마]

귀에 가득한 것이 소리가 아니거늘 듣는 것이 무엇이며 확연한 내가 없거늘 듣는자는 누구인가?(돈황본 단경, p95,장경각)

3.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 나주벽서사건(羅州壁書事件)

광해군 때 남재공 손자들이 인목대비를 패서인하였던 이이첨이 체포하려하니 한양을 떠났고 숙종 때 약재 만암 부자정승 당시에도 당파싸움에 파직되고 귀양가기를 여러번 했는데 1721(경종1)때 영조를 왕세제 책봉을 강력히 반대한 만얌의 사건으로 망가진 모산 선조들이다.

윤지는 1724년에 발생한 김일경의 옥사에 관계되어 귀양을 갔고 20여 년의 귀양살이 동안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끌어 모아 1755(영조31) 1월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써서 나주 객사에 붙였다. 5월 윤지의 일파인 심정연이 또 조정을 비난하는 글을 써서 체포되었으며 이 사건으로 소론 명문은 거의 몰락했다.

소론가문인 모산 하정공 후손들은 듣고 본 것을 말하지 않아야 했다.

4. 非音面(소리 없이 조용한 고을)에서 숨죽이고 살며 소리 없이 학문에 전진하고 가문의 내력도 소리 내지 말고 도원향(桃源鄕) 같은 이상향(理想鄕) 비음면에서 천세만세 영원하라.

非音面의 비(, 아닐비)글자와 憤悱齋의 비(, 표현 못할 비)로 한자는 다르지만 음과 의미는 같다.

 

B. 영암군 신북면 변천사

1. 고려 조선초 나주군과 영암군

신라 경덕왕16(759) 통의군을 금산군(錦山郡, 혹은 錦城郡)으로 개칭

고려 태조23(940)년 금산군을 나주로 개칭

고려 성종2(983) : 전국 12목을 설치하면서 전주목 나주목, 목사 파견함.

고려성종4(995)년 낭주군(朗州郡)에서 현종9(1096)년 영암군으로 변경.

태종13(1413) : 나주목

고종32(1895): 목을 없애고 나주부로 변경하고 나주부 영암군이 됨.

2. 나주목 : 고려 현종9(1018)년 나주목()이 되어 이후 조선 말기까지 거의 변화 없이 남부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나주속군 : 무안 남평 담양 낙안 곡성 5

나주 속현 : 철야 회진 반남 안로 복룡 원율 여황 창평 장산 진원 화순 11.

3, 고려 현종9(1018)년 영암군

속군 : 황원군(黃原郡 : 해남군 황산면 일대), 도강군(道康郡 : 강진군)

속현 : 곤미현(昆湄縣 : 영암군 미암면 일대), 해남현(海南縣), 죽산현(竹山縣 : 해남군 마산면 일대), 완도 청해진 일대, 가흥현, 첨탐현, 임회현, 진도현

고려 충정왕 2(1350) 왜구 침입으로 모든 주민이 내륙으로 피난을 하여 월악(현 영암군 시종면 월악리), 명산(현 영암군 시종면 구산리)과 금산(현 해남군 삼산면)으로 피난을 하여 본도에 돌아오지 아니함으로 80년간 진도에 행정기관을 설치하지 아니하였다.

류희정(柳希汀, 대승공17, 1472-1528) 영암군수 역임(중종20) 15253101번째 기사에 영암군수 류희정 기록)

4. 비음면 기록

비음 인구 수 : 1789(정조13) 호구 총수(戶口總數)를 보면 나주목 비음면에는 275862(남자 392, 여자 470), 영암군 북이종면에 159, 656(남자 327, 여자 329)의 주민이 살았다.

인조때부터 정조13년까지 3년마다 인구조사를 했는데 정조때 비음면(마을)은 당시는 현()인데 나주에 비음현은 없었으니 나주목 직활 구역이다.

나주목 비읍면 인구수 ; 한국사료총서제20 “여지도서 하(與地圖書 下)”, 19731225일 발행, 대한민국교육부국사편찬위원회 편찬발행 : 고종8,1871년 비음면 40(16km) 247948(405, 543)의 주민이 살았다(20235월 신북면 인구수 : 3536) 아래 그림참조

5. 조선 말 나주군과 영암군

고종33(1896)13도 설치하면서 전라남도 영암군이 되었다.

고종43(1906)년 영암군은 나주 관할인 금마면, 원정면 비읍면 종남면 편입. 영암군의 옥천면 송지시면 송지종면 북평시면 북평종면을 해남군으로 이관

1906년에 비음면이 나주에서 영암으로 변경되고 1914년 신북면으로 변경됨.

6. 신북면 관련된 나주 영암 통패합

191441일 군면 폐합으로 비음면(非音面) 북이종면은 신북면으로, 마면 원면은 금정면으로, 군시면 군종면은 영암면으로, 북이면 명산면 남면은 시종면으로, 서종면 서시면은 군서면으로 통합하고, 북일시면 북일종면 곤일시면 곤일종면 곤이시면 곤이종면은 그대로 유지한다.(1910년부터 일제가 통치하지만 고종이 정하고 임면한 행정구역이나 관리들은 19143월까지 그대로 유지)

1917년에 곤일시면을 미암면으로, 곤일종면을 삼호면으로, 1929년에 북일시면을 덕진면으로, 1930년에 곤이종면을 서호면으로, 1932년에 북일종면을 도포면으로, 곤이시면을 학산면으로 개칭했고, 1979년에 영암면이 읍으로 승격한다.

7. 신북면(新北面) 탄생:

191441일 일제(日帝) 행정구역의 통폐합에 따라 북일종면(北一終面)의 탑동(塔洞), 호산(虎山) 2마을과 종남면(終南面)의 복용동(伏龍洞) 일부와 나주군에 속하였던 비음면(非音面)의 갈곡(葛谷), 종오(終吾), 우정(牛亭), 신월(新月), 연곡(蓮谷), 학동(鶴洞), 연동(連洞), 양계(兩溪), 백우(白羽), 금계(金溪), 서동(西洞), 유곡(酉谷), 모산(茅山), 방축(防築)14개 마을과 반남면(潘南面)의 평촌(坪村), 성덕(成德), 하촌(下村)의 일부, 그리고 세화면(細花面)의 황계(黃溪)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신북면(新北面)이라 개칭하여

1914년 이전 까지 모산 12동네 : 청용(靑龍), 송파(松坡,솔밖언덕,신일씨사는 곳), 산정(山亭), 천동(泉洞샘몰), 벽촌(碧村,근채씨,근팔씨집부근), 백동(栢洞,벽촌지나 산넘어), 구만동(九萬洞), 송내(松內,구암과 구만동 사이 웅씨집,부열씨부근), 춘교(春橋,모산뒤로 동창가는 길에 주막있고 경지정리전에 다리 있었음), 구암(龜岩구암촌), 이목동(梨木洞, 현재 이목동 아래동네), 통산(桶山, 현재 이목동 윗동네, 이목동회관마을)

갈곡(葛谷), 학동(鶴洞), 양계(兩溪), 모산(茅山), 금수(金水), 유곡(酉谷), 장산(長山), 명동(明洞), 이천(梨泉), 월평(月坪), 행정(杏亭), 월지(月池)12개 법정리를 관활하다가 197371일 대통령령 제 6542호로 금정면에 속하였던 용산(龍山)리를 신북면으로 편입하여 13 개리를 관할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1914년 전남 영암군 신북면 주변 행정구역(비음면 북종이면 신북면)

비음면 : 갈곡 종오 우정 신원 연곡 학동 연동 양계 백우 금계 서동 유곡 모산(이목동포함) 방축(14개 마을)모두 신북면으로

북이종면 : 금수리 장산 명동 신덕동 천동 월평리 간은정 옥봉 송암 화산 유호정 광암 중촌 백옥동 칠거리 덕림정모두 신북면으로

북일종면 : 탑동 호산 도포면(원항 봉호 덕화 영호 구학)2개마을 신북면으로

종남면 : 복용동 도포면(도포리) 조감 목우동 용동 방축암 안풍리복용동만

8. 비음면의 현재 마을 :

모산리(구암, 산정, 송파, 천동샘몰, 벽촌, 구만동, 송내, 산애마을)

금수리(화정리, 만년리)

유곡리(닥실 문곡 옥정 용덕 수량, 성덕, 하촌의 일부지역)

갈곡리(길동촌, 종오리, 신평리, 치리리, 우정리)

학동리(긴월리, 연곡리, 연동, 태산리)

양계리(백우, 금계, 서동, 남산점, 대갑리, 반남 평촌),

장산리(산장산, 수현리, 신동리, 대월촌, 가막산, 서당동, 기정리, 행군동, 주암리, 호암리)

명동리(선인정, 옥정, 묵지동, 와우동, 백동, 덕산, 난두리)

용산리(백용산(군산천), 잣골, 작동, 척동 신흥, 암석, 서당, 용계, 기동 마을 일부와 금마면 서천)

이천리(남계리 신덕동, 천동, 월평리일부, 탑동, 호산리, 이목동, 통산)

월평리(간은정, 병정, 안정, 호산점, 여동, 수양리 일부, 모산리 일부. 반남면의 하촌리 일부)

행정리(행정, 옥봉, 송암, 조동, 화산, 광산리, 유호정)

월지리(중촌리, 백옥동, 호동, 칠거리, 덕림정 일부, 종담면의 북룡동 일부, 비음면의 방축)

 

C. 영암군 비음면 변천사

1. 나주목 비음면 인구수

자료 출처 : 이책은 한국사료총서제20 “여지도서 하(與地圖書 下)”, 19731225일 발행, 대한민국교육부국사편찬위원회 편찬발행 : 고종8,1871년 비음면 40(16km) 247948(405, 543)의 주민이 살았다.

2. 비음면 마을 : 비음면관문(官門)에서의 거리

35리내 마을(15km이내) 학동, 신학 신월, 전계, 금동.

40리내 마을(16km 이내) 금수, 기동, 천동, 풍정, 신사, 유곡, 중정, 종오, 갈동(갈곡), 최음, 송정, 양지 하갈.

45리내 마을(19km 이내) 산정, 송지, 송내, 수만, 당산, 구산,

3. 비음면 여지도(고종81871) : 죽봉사(竹峯祠)가 보임

'문화류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극 공연 안내  (0) 2023.11.07
대동사 만월괘서  (1) 2023.10.30
약재공 아호와 집터  (0) 2023.08.01
영팔정 현판 해설  (0) 2023.08.01
종회 활동 자취  (0) 2023.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