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영팔정 현판 해설

ryu하곡 2023. 8. 1. 10:12

영팔정 자료

영팔정자료.hwp
3.08MB

영팔정(詠八亭)은 전남 영암군 신북면 하정길 8(신북면 모산리403)에 있는 정자이며 전라남도기념물 제 105호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하정(夏亭) 류관(柳寬 : 13461433)이 전라도관찰사를 지내면서 이곳 주위 경치에 감탄하여 아들 류맹문(柳孟聞)에게 명하여 1406(태종 6)에 모정(茅亭)을 건립하였다.

건립 당시 정자의 이름은 마을 이름인 모산(茅山)()’자와 류관의 호인 하정의 ()’자를 따서 모정(茅亭)’이라 하였다.

그 후 율곡(栗谷) 이이(李珥 : 1536~1584)가 이곳에 와서 류관의 학덕을 기리면서 주변 경관을 팔경시(八景詩)로 읊었으며 그 뒤에 고경명(高敬命 : 1533~1592), 남이공(南以恭 : 1565~1640) 류상운 등이 팔경시를 연작하였던 곳이라 하여 영팔정(詠八亭)’으로 정자명이 바뀌었다.

이후 여러 차례 중개수가 이루어지다가 현재 규모로 중창된 것은 1689(숙종15) 모산대동계(大洞禊)가 주관하고 류관 후손이자 당시 호조판서 류상운(柳尙運:1636~1707)이 주도적 역할로 영팔정 상량문을 지었().

영팔정은 조선 초기에 건립된 정자이지만 사정(射亭)으로서의 역할은 물론 학문수양의 장소 향약 집합소로도 이용되어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으며 마을민()의 구심체가 되었던 곳이다.

영팔정(詠八亭) 인근에 학업의 어려움을 참고 분발하여 정진하라.’는 뜻을 지닌 문화류씨 강학당인 분비재(憤悱齋,1643)와 죽봉사(竹峯祠, 류준 류상운 배향)가 있고 마을 어귀에는 류관 류몽정 류상운의 신도비가 있다.

 

1. 하정공 가문(家門)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류관의 본관은 문화(文化)로 자는 경부(敬夫) 몽사(夢思) 호는 하정이다. 고려 명종 때 정당문학(政堂文學) 류공권(柳公權)6대손으로 아버지는 삼사판관 류안택(柳安澤)이다.

1369(공민18) 성균시 급제라고 성균관에서 수학한 후 1371(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여 비서성 교감을 시작으로 전교부령(典校副令) 거쳐 고려 말에 봉산군수 성균사예(成均司藝) 성균관직강 지제교문과고시관 등을 역임하였다.

1392(태조1)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고 1397년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 성균관대사성 1398년에 형조전서겸 보문각직제학을 지냈다. 1401(태종 1) 사헌부대사헌으로서 불교 배척에 앞장섰으며 계림부윤(鷄林府尹)이 되었다. 이후 1405년 전라도관찰사 1406년 예문관대제학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세자좌빈객(世子左賓客) 형조판서 1409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를 겸하였으며 1410년 태조실록 편찬을 주관하였다. 그 뒤 참찬 찬성에 이어 1418(세종 즉위년) 다시 예문각대제학 이어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 1421년 다시 대제학 1423년 지춘추관사로 고려사개수에 참여하였다.

1424년 우의정이 되어 82세까지 지냈다. 세종 때 청백리에 녹선될 정도로 청렴하였으며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다.

류관 생전에는 문형(文衡)제도가 없었지만 문형보다 더 예우(禮遇)를 받는 것은 대제학 교시관 신록편찬을 하셨기 때문이다.

류관의 6대조 류공권(文簡公, 1132~1196) 5대조 류언침(尙書公, 1176 ~ 1228) 고조(高祖) 류순(밀직사공)에 이어 曾祖대에 조선 제일의 一家六封君로 대승공 10세 류성비(충성공, 하정공 증조) 류자성(문산군) 류성간(서령군) 류원비(선산군) 류양재(전성군) 류인비(진산군)으로 여섯분 증조가 삼한갑족으로 문화류씨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대승공 10세 류승(정신공)의 사위 권보(權溥,永嘉府院君)의 아들 준(,吉昌君) 종정(宗頂,廣福君) (,永嘉君) (,鷄林府院大君) (,福安府院君)의 다섯 아들과 사위인 이제현(李齊賢,金海君) 왕숙(王璹,順正大君) 왕순(王珣,蘂城府院大君)이 봉군(封君)을 받아 父子女 19封君으로 당대 최고의 가세를 떨쳤던 것은 하정공 가문의 一家六封君 이후 100여년후 일이다.

 

2. 영팔정 건물 구조

구조형식은 목조가구로서 평탄한 대지위에 약 3척 높이의 막돌 허튼층 쌓기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덤벙주초를 놓고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머리에는 주두(柱頭 : 대접받침) 없이 보머리를 상투걸이 기법으로 결구하였다. 보 밑에는 기둥 외부를 곧게 절단하고 내부에는 비스듬히 절단한 간결한 보아지를 두었다.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가구형식은 5량가(樑架)로서 전후 평주(平柱) 위에 대들보를 걸고 짧은 동자주(童子柱)를 세워 종보[宗樑]를 걸었으며 그 위에는 초각(草刻)된 판대공(板臺工)과 소로[小累]를 댄 행공첨차(行工檐遮)를 직교하여 짜서 종도리를 안정되게 받치게 하였다.

충량(衝樑) 위에는 외기(外機)가 직접 끼워지며 외기중도리 모서리기둥 밖의 왕지 부분에는 짧게 내린 달동자[懸童子]를 두고 있다.

영팔정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홑처마 팔작 지붕 건물로 내부는 방이나 벽체 없이 사방이 개방된 정사각형 평면이며 마루는 우물마루이다.

동측에만 간단한 평난간(平欄干)을 두었고 전면 기둥에는 주련(柱聯)을 걸었다.

 

3. 주련(柱聯)1)

大丞相杖屨之鄕(대승상장구지향)2) 영의정이 지팡이와 짚신을 신고 사는 마을(고향)

諸君子觴泳之地(제군자상영지지)3) 학식과 덕망이 높은 이들이 술잔을 두고 강론(講論)하는 곳(영팔정).

朱襕碧瓦淡斜日(주란벽와담사일)4) 붉은 예복입고 청기와에서 지는 해를 보고

大野平林撗翠煙(대야평림광취연)5) 큰 들판을 지나 멀리 보이는 푸른 숲이 안개처럼 보이는 곳.

4. 영팔정 현판과 주변 경관의 팔경시(八景詩)

영팔정에 걸린 현판은 명종조 대학자 율곡 이이선생, 선조조 의병장 재봉 고경명선생, 선조조 소북 거두 이조판서 설사 남이공선생, 숙종조 소론 거두 영의정 약천 남구만선생, 숙종조 영의정 약재 류상운선생, 영조조 소론4대신 좌의정 만암 류봉휘선생의 시판(詩板)과 현판(懸板) 주련(柱聯) 등 모두 13개가 있었는데 이중 율곡(栗谷) 재봉(霽峰) 설사(雪簑)선생은 영팔정 건립 이전 茅亭의 시판이다.

영팔정(詠八亭) 현판이 두 개가 걸려 있다. 앞쪽에 詠八亭현판은 약재(約齋) 류상운 친필의 현판이고 안쪽에 詠八亭현판은 약천(藥泉) 남구만(南九萬 : 1629~1711) 친필의 현판이다.

영팔정에는 제영문(題詠文) 기문(記文) 현판과 동계책(洞契冊)이 보관되어 있다.

동계책으로 모산동약(茅山洞約,모산대동계)이 영팔정(詠八亭)에 보존되어 있는데 영암 지역의 지방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1433(세종15) 하정이 세상을 떠난 뒤 하정선생의 학덕을 기리면서 율곡 이이가 모정(茅亭)에 들려 주변 경관을 팔경시로 남겼고 이 가운데 竹嶺明月斷橋尋春이 현전하고 나머지 6개의 시는 1597(선조30) 정유재란 때의 병란으로 없어졌다.

율곡선생의 팔경시(八景詩)에 이어 재봉선생 설사선생 약재선생께서 모산의 아름다운 팔경(八景)로 남겼다.

 

5. 율곡선생 모산의 아름다운 팔경시(八景詩)6)

(1) 여지승람7)

竹嶺明月(죽령명월) 죽령(죽봉)의 밝은 달
虎山落照(호산낙조) 호산의 저녁 햇빛

斷橋尋春(단교심춘) 단교에 찾아온 봄
秋郊晩望(추교만망) 가을 들녘을 바라봄
槐陰小酌(괴음소작) 느티나무 그늘 아래 작은 술잔
龜川釣魚(구천조어) 구천에 물고기 낚기
松坡射帿(송파사후) 송파에 활쏘기
南塘採蓴(남당채순) 남당에 순채캐기

(2) 현재 영팔정에 게시되어 있는 이이의 팔경시 2수 현판

右 竹嶺明月(죽령명월) 죽령의 밝은 달
蟾光射翠霞(섬광사취하) 달빛이 노을 같이 비치니
松嶺來虛室(송령래허실) 소나무 그림자가 빈집에 드는구나
淸露滿修篁(청로만수황) 대나무 숲은 맑은 이슬에 젖어 있고
山童和玉屑(산동화옥설) 산골 아이는 옥가루 처럼 맑구나.
右 斷校尋春(단교심춘) 단교에 찾아온 봄
香露濕芒屨(향로습망구) 향기로운 이슬에 짚신이 젖어서
尋春歸路迷(심춘귀로미) 봄을 찾느라 돌아오는 길을 해매고 왔다.
鶯鳴烟共遠(앵명연공원) 꾀꼬리 소리 먼 곳에서 흐미하게 들리고
獨立斷橋西(독립단교서) 외로이 단교의 서쪽에 서있네

 

6. 고경명의 모산팔경(茅山八景) 현판8)

右 竹嶺明月(죽령명월) 죽령에 밝은 달
灩灩金波上(염염금파상) 달빛이 금물결 위에 반짝반짝하고

泠泠玉露間(영령옥로간) 차고 찬 맑고 깨끗한 이슬이 흐르는구나 !

茅君淸不睡(모군청불수) 모산 사는 그대는 밝은 밤에 잠 못 이루네
鶴氅對損雲(학창대손운) 학은 깃털로 구름을 스쳐 나는구나

右 虎山落照(호산낙조) 호산에 저녁 햇빛
落景初含峀(낙경초함수) 지는 해가 산너머로 숨어 버리니
煙村更覺深(연촌경각심) 마을 저녁연기는 다시 깊어지네
獨歸林下逕(독귀림하경) 외로이 수풀 아래 길로 돌아가서
苔上靜篩金(태상정사금) 이끼는 마치 해 위에 금빛 같네

右 斷橋尋春(단교심춘) 단교에 찾아온 봄
何際春歸早(하제춘귀조) 어느 사이 벌써 봄은 돌아가고
幽人逸興牽(유인일흥견) 숨어사는 선비도 고상한 흥취에 끌리는구나!
行吟知不遠(행음지불원) 지금 가도 길은 멀지 않음을 알고
信脚過前川(신각과전천) 믿는 발걸음으로 앞 시냇물을 지났구나.

右 秋郊晩望(추교만망) 가을 들녘 바라봄
錯繡香粳熟(착수향갱숙) 메벼는 익어 수놓은 것으로 착각하고
溝睦一望平(구목일망평) 도랑이나 문덕이 모두 평평하게 보인다.
楓林聞社鼓(풍림문사고) 단풍 사이로 들리는 (곡식 신에게 올리는)북소리의
喜氣屬田更(희기속전갱) 기쁨은 전가(田家,농부의 집)로 돌아 갔구나!

右 槐陰小酌(괴음소작) 느티나무 그늘 아래 작은 술잔
晩酌槐陰下(만작괴음하) 저녁 늦게 느티나무 그늘에서 든 술잔은
田家老瓦盆(전가로와분) 농가노인의 오래된 기와 잔이로구나!
醉來圓小夢(취래원소몽) 술에 취하여 꿈이나 꾸려 하고
白首枕盤根(백수침반근) 흰머리를 소반(나무뿌리)으로 베개 하였네

右 龜川釣魚(구천조어) 구천에 물고기 낚기
釣石深難見(조석심난견) 낚시자리 돌은 물이 깊이를 보기 어려우니
靑竿尙岸高(청간상안고) 낚싯대를 앉은 언덕 높은 곳으로 옮기고
風絲時遠掣(풍사시원체) 바람에 움직인 낚싯줄을 먼 곳에서 당기니
斜日閃銀刀(사일섬은도) 석양에 은빛 고기가 따라 오네.

右 松坡射帿(송파사후) 송파에 활쏘기
松影搖棲革(송영요서혁) 소나무 그림자에 과녁이 멀어 흐리게 보이고
春沙錦樣鮮(춘사금양선) 봄 모래는 비단같이 아름답구나
手柔弓又燥(수유궁우조) 부드러운 손으로 활을 잡고 당기니
風外鼓鼘鼘(풍외고연연) 화살나는 소리는 바람결에 북소리 같구나

右 南塘採蓴(남당채순) 남당에 순채 캐기
淸曉南塘路(청효남당로) 맑은 새벽에 남당길을 가니
山臺矗醉籃(산대촉취람) 산처럼 많이 쌓인 대바구니에 순채를
氷絲擎滿掬(빙사경만국) 얼음실 같은 줄기를 떠받쳐 들어 올리니
至味謝肥甘(지미사비감) 지극한 그 단맛이 살찌고 단 것보다 더하여라.

 

7. 남이공 팔경시 현판

竹嶺明月(죽령명월) 죽령에 밝은 달
雨後淸陰漬(우후청음지) 비온 뒤 맑은 달빛은 그늘을 적시고

風前爽籟聞(풍전상뢰문) 상쾌한 바람소리 피리소리처럼 듣노라.

此時尤美景(차시우미경) 이때의 아름다운 경치 더하는 것은

月色好開雲(월색호개운) 달빛은 구름 속에서 나오는구나.

虎山落照(호산낙조) 호산에 저녁 햇빛
山虎咸池欲(산호함지욕) 산호랑이가 함지(서쪽의 큰 못)에서 먹감고

義輪漸轉深(의윤점전심) 인간 의로움 바퀴는 깊이 돌아가는데

暈赤沈如壁(운적심여벽) 붉은 구술 같은 해우리는 잠겼다가

迾紅煇似金(열홍휘사금) 황금 빛으로 변하는구나.

斷橋尋春(단교심춘) 단교에 찾아온 봄
淸嘵春眠覺(청효춘면각) 맑은 새벽 봄 잠에 깨어나

偸閒杖屨牽(투한장구견) 한가로이 지팡이와 짚신을 끌다.

新鶯歌後苑(신앵가후원) 어린 꾀꼬리는 뒷동산에서 노래부르고

嫩柳問前川(눈류문전천) 버들가지 새싹은 앞내를 찾는다.

秋郊晩望(추교만망) 가을 들녘 바라봄
豊高天氣肅(풍고천기숙) 하늘은 높고 바람은 산들산들한데

稻熟野光平(도숙야광평) 벼는 익어 들에 가득하도다.

望裡多秋興(망리다추흥) 바라 보이는 것마다 가을에 흥이 나고

霜鐘報曉更(상종보효갱) 시원한 종소리 새벽을 알리는구나.

槐陰小酌(괴음소작) 느티나무 그늘 아래 작은 술잔
樂風鳴土鼓(낙풍명토고) 풍악의 바람이 북을 울리고

謨醉屬匏樽(모취속포준) 뉘라서 표주박 동이 술에 취하는가?

田來經幾歲(전래경기세) 몇 해의 세월이 지났는지

生大老槐根(생대노괴근) 늙어간 느티나무 뿌리도 다 되었네.

龜川釣魚(구천조어) 구천에 물고기 낚기
香餌芉頭彈(향이간두탄) 향기로운 미끼 낚시대에 달아 던지니

引漁數仍高(인어수잉고) 높은 곳에서 고기를 끌어 올린다.

如遇潘溪獵(여우반계렵) 우연히 시내에서 고기 사냥을 하니

想無老鼓刀(상무로고도) 생각건데 낡은 칼을 쓸 생각이 없구나.

松坡射帿(송파사후) 송파에 활쏘기
微風因羽發(미풍인우발) 화살 따라 바람이 일어나고

紅旭照帿鮮(홍욱조후선) 아침 붉은 해는 과녁을 비추는구나

射以觀其德(사이관기덕) 쏘는 것으로 그 덕을 보고 있을 때

秉心乃塞淵(병심내색연) 그 마음 막힘없이 시원하네.

南塘採蓴(남당채순) 남당에 순채 캐기
採蓴歌未歇(채순가미헐) 순채 캐는 노래 쉬지 않고

兒女各携藍(아녀각휴람) 여자아이들은 바구니를 끼었구나.

滿豆需多品(만두수다품) 쟁반 가득 담은 음식이 많아도

登盤味謝甘(등반미사감) 소반에 오른 (순채)맛이 감미롭구나.

 

8. 류상운 팔경시 현판9)

右 竹嶺明月(죽령명월) 죽령에 밝은 달
枯筇尋社去(고공심사거) 낡은 대지팡이를 짚고 사원10)을 찾아가니

漁唱隔溪聞(어창격계문) 어부의 고기잡는 소리가 시내 건너에서 들린다.

天借茅亭月(천차모정월) 하늘은 모정의 달밤을 아끼고

風吹竹嶺雲(풍취죽령운) 죽령의 구름을 바람 불어 날려보내네.

右 虎山落照(호산낙조) 호산에 저녁 햇빛
虎距山勢矗(호거산세촉) 호랑이가 앉은 듯한 산세는 웅크리고

龍御海雲深(용어해운심) 물이 바다의 구름은 나르는 용이구나

靜影初沈壁(정영초심벽) 고요한 해는 그림자만 두고 잠기니

溪分萬道金(계분만도금) 시내는 나누어져 많은 길에 금빛 뿌리네.

右 斷橋尋春(단교심춘) 단교에 찾아온 봄
岸柳金初湧(안류금초용) 언덕에 버들은 노란 새순이 나오고

洲荇帶已牽(주행대이견) 물가에 노란어리연꽃는 이미 무성하다.

冠童攜手去(관동휴수거)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가니

春意在龜川(춘의재구천) 봄은 벌써 구암촌 시내에 와 있더라.

右 秋郊晩望(추교만망) 가을 들녘 바라봄
洞府心田濶(동부심전활) 마을 속이 환히 트이고

郊墟掌樣平(교허장양평) 가을걷이 들녘은 손바닥처럼 평평하게 보이네.

簾葭變霜露(염가변상로) 갈대발(염하)은 서리와 이슬에 색이 변하니

時氣屬新更(시기속신갱) 계절에 따라 기운이 새로 바꾸어지는구나.

右 槐陰小酌(괴음소작) 느티나무 그늘 아래 작은 술잔
槐陰成小集(괴음성소집) 느티나무 그늘에 몇 명이 모였는데

麥酒滿廮樽(맥주만영준) 보리술이 술항아리에 가득하구나.

長老休辭醉(장로휴사취) 나이 많은 어른이 술에 취해 있다가

扶持九節根(부지구절근) 구절초(仙母草) 뿌리를 붙잡고 있네.

右 龜川釣魚(구천조어) 구천에 물고기 낚기
持芉餘丈長(지간여장장) 한길(사람키) 넘은 낙시대를 가지고

收釣一肩高(수조일견고) 낚은 고기를 어깨 높이 들어 올리네.

穿去仍賖酒(천거잉사주) 고기 꿰어 들고 외상술 받아

燖來且洗刀(심래차세도) 고기를 익히려고 칼을 씻는구나.

右 松坡射帿(송파사후) 송파에 활쏘기
月引彎弓滿(월인만궁만) 달밤에 활을 힘껏 당기고 보니

雲開畵布鮮(운개화포선) 구름 없어지고 하늘은 열러 비단 같이 곱구나.

從容君子事(종용군자사) 차분하게 군자가 할 일이니

持敬似臨淵(지경사림연) 못에 다가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임해야 하니라.

右 南塘採蓴(남당채순) 남당에 순채 캐기
採彼蓴爲菜(채피순위채) 순채 새순을 따서 나물을 만들려고

流世竹作藍(류세죽작람) 흐르는 물이 씻어 대바구니에 담고

元辛齊丙穴(원신제병혈) 원래 매콤한 맛은 맛있는 고기와 한가지이니11)

名品勝辛甘(명품승신감) 명품 순채는 매운 단맛이구나.

8경시 현판에 있는 글

茅山之會社亭古也丙丁亂後吾先祖四矯堂寓居于亭之傍敎授鄕子弟設齋于亭之舊墟扁以憤悱及先生歿而諸生合辭豆之㯙齋之材移構于祠宇之側爲修所尢齋所以有莘莘之歎而亭因以廢過者咸咨嗟焉余以丙辰嵗離鄕十七年而歸亭始巋然廣其易以陶瓦踓侈奢觀冥矣亭壁舊有諸君子八詠之什而中經兵燹或逸成存今將謀楬舊梓以貴溪山以諸長老不佞知玆亭之興廢俾識其顛末遂列如右且用板上韻賦得八绝以寓今威返國之感云爾

嵗壬申暮春 山亭主人柳尙運悠久甫題

(모산지회사정고야병정란후오선조사교당우거우정지방교수향자제설재우정지구허편이분비급선생몰이제생합사두지철재지재이구우사우지측위수소왕재소이유신신지탄이정인이폐과자함자차언여이병진이향십칠년이귀정시규연광기역이도와유치사관명의정벽구유제군자팔영지십이중경병선혹일성존금장모갈구재이귀계산이제장노불녕지자정지흥폐비식기전말수열여우차용판상운부득팔절이우금위반국지감운이 세신모춘 산정주인류상운유구보제)

 

모산리(茅山里)의 회사정(會社亭)*12)은 옛날부터 있었다. 인조 병자호란13)후에 나의 선조 사교당께서 정자 옆에()14) 집을 짓고 마을 자제들을 가르치고 계셨으나 정자가 폐허(廢墟)되고 선생도 돌아가신 후에 제생(諸生)이 제사(俎豆)15)를 지내고 재목(材木)으로 사우(祠宇)옆으로 옮겨서 지었으나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지 않고 심신을 달련하지 않아 보는 이로 하여금 탄식(歎息)하고 또 정자 역시 더럽고 추하여 지나가는 사람마다 외면하였다.

고향을 떠난지 17년 숙종 병진년에 돌아와서 정자를 허물고 두기둥(兩楹)을 높이 세우고 기와(陶瓦)로 집을 덮으니 보는 이로 하여금 사치(奢侈)스럽고 어리석게 보였다.

정자의 벽에 제군자(諸君子) 열사람의 팔경시*16)가 있었는데 병란을 겪고 지나면서 혹은 없어지고 혹은 있기도하여 그 교목(喬木)의 옛 현판(懸板)을 거니 이 마을 어른들이 공경치 않아 이 정자의 내력을 처음부터 끝까지 사유를 열거하여 판자에 쓰고 입춘(八節)에 글()구절()을 붙이니() 이제 엄하게 나라일을 보고 돌아온 느낌이다.

임신(숙종18,1692)3월 산정주인17) 류상운, 유구(悠久,류상운)57세에 모산 8경시를 스스로 글을 짓다.

 

9. 藥泉 南九萬 詩(약천 남구만 시) 현판18)

與君拜去一程作(여군배거일정작) 그대와 더불어 인사하고 같은 길로 가서

莫接宣像且阻書(막접선상차조서) 마땅히 얼굴을 대하니 또한 편지가 없네

獨有分明前夜夢(독유분명전야몽) 전날밤 꿈에서 분명히 홀로 만나

共登江閣膾嘉魚(공등강각회가어) 강가 누각에 함께 올라 회 먹고 즐거웠네

 

歲壬午夏藥泉南先生謫牙山先君子謫稷山同罪也先生夢與先君子遊會津覺而有詩平素契許之深此可見今先生胤子鶴鳴送示手書草藁仍托板羅州茅山之詠八亭亭是吾家先舊居而會津亦好境也

癸巳 仲春

全羅道觀察使 柳鳳輝 謹識

(세임오하약천남선생적아산선군자적직산동죄야선생몽여선군자유회진각이유시평소결허지심차가견금선생윤자학명송시수서초고잉탁판라주모산지영팔정정시오가선구거이회진역호경야 계사 중춘 전라도관찰사 류봉휘 근식)

 

(한글번역)

해는 임오년(숙종28,1702) 여름 약천 남구만 선생은 아산으로 귀양 가시고 선군자이신 선군자(류상운)께서는 직산으로 귀양을 가셨다.

죄는 한가지이었다(장희빈을 유배 보내자고 주장한 죄). 선생(남구만)의 꿈에 선군자(류상운)와 나주 회진에서 놀으시고 꿈을 깨신후 지으신 시가 있으니 이재 선생의 맏아들 학명(鶴鳴)이 초고를 손수 써서 보내 보이면서 이내 부탁하기를 나주 모산 영팔정에 현판을 걸어 줄 것을 부탁하기에 영팔정은 우리 선대 집안이 사셨던 곳이고 회진도 또한 좋은 곳이다.

숙종39(1723) 2월에

전라도 관찰사 류봉휘(류상운 둘째 아들, 영조조 좌의정) 삼가 기록함

 

10. 詠八亭 上樑文(영팔정 상량문) 현판

 

錦城雄都 凡數百里內 大村中間

(금성웅도 범수백리내 대촌중간)

茅山舊社 爲第一名區 四時用酒

(모산구사 위제일명구 사시용주)

 

千岩黛色見李白畵裡之山

(천암대색견이백화리지산)

一帶晴川暎崔顥詩中之樹

(일대청천영최호시중지수)

 

扵焉暇目不必暮春之三

(어언가목불필모춘지삼)

畢至羣賢奚但竹林之七

(필지군현해단죽림지칠)

 

頃當河派之敎授 遂成鹿洞之藏修

(경당하파지교수 수성록동지장수)

鼓筐摳衣講絶學於將墜 浴近風舞樂春服之既成

(고광구의강절학어장추 욕근풍무락춘복지기성)

 

在爾子孫至今有晋鄙之俗

(재이자손지금유진비지속)

失吾師表終吉爲蕪草之場

(실오사표종길위무초지장)

 

溯餘風而莫攀空聸俎豆之所

(소여풍이막반공담조두지소)

願盛莚之難再久作鄕井之暵

(원성연지난재구작향정지한)

 

遂於梓澤旧墟 剏茲茅亭新舍

(수어재택구허 창자모정신사)

接其軆勢則南龜川而西虎丘 論其隩區則右楓亭而左梅寺

(접기체세칙남구천이서호구 논기오구칙우풍정이좌매사)

 

披三條之大道直走秦京

(피삼조지대도직주진경)

稱九州之上腴平臨蜀野

(칭구주지상유평림촉야)

 

閭閭撲地朝夕起萬竉之煙

(여려박지조석기만농지연)

戶繡依山風雲供四時之景

(호수의산풍운공사시지경)

 

園林自此增色 魚鳥爲之改觀

(원림자차증색 어조위지개관)

秋誦夏絃隳緒可繼於關洛 茂林修竹勝地不讓於山陰

(추송하현휴서가계어관락 무림수죽승지불양어산음)

 

乘興之黑客騒人有時而至

(승흥지흑객소인유시이지)

爭席之村翁野老無日不來

(쟁석지촌옹야로무일불래)

 

楬規窃附於廬陵 修禊每趁於燕社

(갈규절부어여능 수계매진어연사)

鄕党序齒不獨與父老同歡 親戚話情亦足叙天倫之樂

(향당서치불독여부로동환 친척화정역족서천륜지락)

 

惟前賢有樂於此 願吾黨盍歸乎來

(유전현유락어차 원오당합귀호래)

因舊制而新之所謂待時而復 由今視於昔者詎無興感之心

(인구제이신지소위대시이복 유금시어석자거무흥감지심)

 

謀諸鄕隣擧皆聞風而起 儼其棟宇果然不日而成

(모제향린거개문풍이기 엄기동우과연불일이성)

茲涓吉而擧樑 用假辭而紀美

(자연길이거량 용가사이기미)

 

兒郞偉抛樑東 竹峯山色入簾櫳

(아랑위포량동 죽봉산색입렴롱)

傾葵最愛朝曦上 對酒偏宜秋月中

(경규최애조희상 대주편의추월중)

 

兒郞偉抛樑西 禾黍油油滿野齊

(아랑위포량서 화서유유만야제)

記得年年秋後樂 家家白酒與黃鷄

(기득년년추후락 가가백주여황계)

 

兒郞偉抛樑南 月出峯○○○○

(아랑위포량남 월출봉○○○○)

何處相看雨不厭 ○○○○○○○

(하처상간우불염 ○○○○○○○)

 

兒郞偉抛樑北 修竹蘺邊巖逕典

(아랑위포량북 수죽리변암경전)

白髮蒼顔去復歸 誰爲主人誰爲客

(백발창안거복귀 수위주인수위객)

 

兒郞偉抛樑上 鷰賀新成飛雨雨

(아랑위포량상 연하신성비우우)

當年題壁至今博 雲物依然如夢想

(당년제벽지금박 운물의연여몽상)

 

兒郞偉抛樑下 草色煙光千里野

(아랑위포량하 초색연광천리야)

安識村居景像住 農謳漁唱時相和

(안식촌거경상주 농구어창시상화)

 

伏願上樑之後
(복원상량지후)
國家安而民生遂
(국가안이민생수)
風雨時而年穀登
(풍운시이년곡등)

 

士知向方與二三子同志 鄕稱善俗於千萬世相傳

(사지향방여이삼자동지 향칭선속어천만세상전)

是所禱於明神 非敢徼其淸福

(시소도어명신 비감요기청복)

 

崇政大夫 戶曹判書 柳尙運 撰

(숭정대부 호조판서 류상운 찬)

幼學 柳鳳長 書

(유학 류봉장 서)

都有司 柳景昌 柳榰

(도유사 류경창 류지)

別有司 柳相臣 柳筬 柳壽獜

柳重基 柳昌基 柳鳳朝

李厚栽 朴三圭 鄭一萬

(별유사 류상신 류성 류수린

류중기 류창기 류봉조

이후재 박삼규 정일만)

木手 李順山 崔世吉 李百生

(木手 이순산 최세길 이백생)

石手

(석수)

崇禎紀元後 己巳 丁月晦 上樑 卯坐酉向

(숭정기원후 기사 정월회 상량 묘좌유향)

 

此文今此補修之際於樑上始得發見於三百年之後祖先之手澤尙存不勝感愴欽慕而遂擖之于壁上以示來百云 光復後 乙丑 小春節 柳明烈 謹書

(차문금차보수지제어량상시득발견어삼백년지후조선지수택상존불승감창흠모이수갈지우벽상이시래백운 광복후 을축 소춘절 류명렬 근서)

 

詠八亭 上樑文(영팔정 상량문) 한글 번역

錦城雄都 凡數百里內 大村中間 茅山舊社*19) 爲第一名區 四時用酒20)

금성(나주 옛이름) 큰도읍 수백리안에 큰마을중 모산의 옛날 토지신 사당은 산수가 수려하여 이름난 장소로 사시사철 술을 사용하였다.

 

千岩黛色見李白畵裡之山21)

온갖 바위의 검푸른 빛은 이백(701-762)이 그린 산을 보는 것 같고

一帶晴川暎崔顥詩中之樹

길게 늘어진 냇물(청천,구암촌 냇물)에 비치는 그림자는 최호(381~450)의 시에 나오는 명산의 초목이다.

 

扵焉暇目不必暮春之三

알지 못하여 말하지 않지만 3월 늦은 봄에

畢至羣賢奚但竹林之七

많은 모이는 현재(賢才)들을 어찌 단지 중국나라 竹林七賢이라 하겠는가?

 

頃當河派之敎授 遂成鹿洞之藏修22)

마땅히 하파의 가르침을 받아 따라서 녹동에서 책을 읽고 학문을 열심히 해야 하는데.

鼓筐摳衣講絶學於將墜 浴近風舞樂春服之既成

장자의 북에 옷자락이 끌려 배움과 학문을 장차 하지 않고 봄에 옷을 맞추어 입고 춤바람에 빠져 즐거워하네

 

在爾子孫至今有晋鄙之俗

이제 자손들은 진나라의 비루한 풍속에 젖어 있고

失吾師表終吉爲蕪草之場23)

우리는 스승을 잃고 옛날의 풀이 무성한 황무지가 되었네

 

溯餘風而莫攀空聸俎豆之所

전해 내려온 풍속은 없어지고 공연히 제사 지내는 곳만 보니

願盛莚之難再久作鄕井之暵

전하건데 옛날의 성대한 자리로 다시 돌이킬 수 없으니 마을 정자가 되지 않네

 

遂於梓澤旧墟 剏茲茅亭新舍

마침 내고향 옛터에 이곳 모정에 새 집을 지으려고

接其軆勢則南龜川而西虎丘 論其隩區則右楓亭而左梅寺

지세를 살펴보니 남으로는 구천동마을이요 서로는 호산이며, 구역을 논하면 우측은 풍정이요 좌측은 매사로다.

 

披三條之大道直走秦京24)

세가닥 큰길을 헤치고 바로 진나라 서울까지 달릴 수 있고

稱九州之上腴平臨蜀野25)

아홉고을의 기름진 땅은 촉나라 들녘에 뒤지지 않는다.

 

閭閭撲地朝夕起萬竉之煙

마을은 서로 맛대어 조석으로 많은 부엌에서 연기가 일고

戶繡依山風雲供四時之景

아름다운 집들은 산을 의지하여 사시사철 좋은 경치 제공하네

 

園林自此增色 魚鳥爲之改觀

동산의 숲은 이제부터 빛을 더할 것이며, 물고기와 새도 보는 것이 달라진다.

秋誦夏絃隳緒可繼於關洛 茂林修竹勝地不讓於山陰

가을은 글 읽고 여름에 거문고 타며 가히 관락(關洛:性理學)의 추락한 학문의 기풍을 다시 이어나가는 곳이기를 따를 것이며, 무성한 대나무 숲은 경치좋은 산음에 뒤지지 않게 어어갈 장소()이다.

 

乘興之黑客騒人有時而至

시인 묵객들이 때로는 흥겹게 이르고

爭席之村翁野老無日不來

시골 늙은이(촌웅과 야노)가 서열을 다투지 않는 날이 없네

 

楬規窃附於廬陵 修禊每趁於燕社

종중의 규약은 여릉(언덕위 집)에서 해야하고, 수계(3初巳일 제사)는 언제나 연사(토지신에게 제사지낸 사당)에서 항상 가려야 한다

鄕党序齒不獨與父老同歡 親戚話情亦足叙天倫之樂

향당(마을 여러 사람)에서는 혼자만이 아닌 나이 순으로 함께 기뻐하고, 친척들의 화목은 역시 천륜(부모와 자식 간에 하늘의 인연으로 정해진 혈연적 관계)으로 즐겨하네

 

惟前賢有樂於此 願吾黨盍歸乎來

전에는 오직 어른 있어 이곳을 즐겼지만 원하건데 우리의 무리 어찌 아니 돌아올까

因舊制而新之所謂待時而復 由今視於昔者詎無興感之心

소위 옛제도에 인한 것을 새로 때 맞추어 다시 하니, 이제 옛것을 보면 흥감(재미있거나 신나는 느낌)된 마음이 없더라.

 

謀諸鄕隣擧皆聞風而起 儼其棟宇果然不日而成

고향에 풍문을 듣고 모두와 계략으로, 염숙히 집의 마릇대를 과연 며칠내로 이루었네

茲涓吉而擧樑 用假辭而紀美

이에 좋은 날을 가려 들보(기둥과 기둥사이 대들보)를 올리니, 좋은 말씀 빌어다가 아름답게 기록하네

 

兒郞偉抛樑東 竹峯山色入簾櫳

얼쑤! 들보를 동쪽으로 던지려 하니, 죽봉의 산 빛이 난간의 주렴 사이에 드려오네

傾葵最愛朝曦上 對酒偏宜秋月中

해바라기는 아침 햇빛을 가장 좋아 기울고, 술은 가을 달밤에 대하는 것이 마땅하다

 

兒郞偉抛樑西 禾黍油油滿野齊

얼쑤!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려 하니, 벼와 기장이 기름지게 들녘에 가득 차 있네,

記得年年秋後樂 家家白酒與黃鷄

해마다 풍년을 얻어 가을 뒤에 즐기면서, 집집마다 막걸리에 누런 닭을 함께하네

 

兒郞偉抛樑南 月出峯○○○○

얼쑤!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려 하니, 월출봉○○○○

何處相看雨不厭 ○○○○○○○

어느 곳을 서로 봐도 두곳 다 싫지 않으니 ○○○○○○○

 

兒郞偉抛樑北 修竹蘺邊巖逕典

얼쑤! 들보를 북쪽으로 던지려니, 대나무 밭 울타리 가는 바위길 뿐이네

白髮蒼顔去復歸 誰爲主人誰爲客

흰머리로 갔다가 젊은 얼굴로 다시 돌아오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가

 

兒郞偉抛樑上 鷰賀新成飛雨雨

얼쑤! 들보를 위로 올리려하니, 제비가 새로 지은 집 축하하며 쌍쌍이 가네

當年題壁至今博 雲物依然如夢想*26)

당년에 벽에 쓴 글 지금도 전해오니, 경치는 의연하여 꿈과 같은 생각이네

 

兒郞偉抛樑下 草色煙光千里野

얼쑤! 들보를 아래로 내리려 하니, 풀색과 연기 빛이 천리 들녘에 퍼지네

安識村居景像住 農謳漁唱時相和

마을에 살면서 경치 아름다움을 알고저 함은, 농부의 노래와 어부의 노래 때로는 서로 서로 조화로움이네

 

伏願上樑之後 國家安而民生遂
風雨時而年穀登

업드려 원하건데 상량을 한 뒤로는, 나라가 평안하면 백성은 이에 따르고, 바람과 비가 때 맞추어 해마다 풍년들게 하네

 

士知向方與二三子同志 鄕稱善俗於千萬世相傳

선비는 향방을 알아 두셋의 동지와 더불어, 고을에 좋은 풍속 천만세를 서로 전하게 하옵기를

是所禱於明神 非敢徼其淸福

이곳을 밝으신 신명에게 비노니, 감히 그 청복(좋은복)을 가리지 마옵소서

 

崇政大夫 戶曹判書 柳尙運 撰 *27)

幼學 柳鳳長 書

승정대부 호조판서 류상운 짓고 유학 류봉장이 쓰다.

 

都有司 柳景昌 柳榰

別有司 柳相臣 柳筬 柳壽獜

柳重基 柳昌基 柳鳳朝

李厚栽 朴三圭 鄭一萬

木手 李順山 崔世吉 李百生

石手

崇禎紀元後 己巳 丁月晦 上樑 卯坐酉向 28)

숙종15(1689) 기사 정월 그믐 상량, 묘좌유향(동좌 서향)

 

此文今此補修之際於樑上始得發見於三百年之後祖先之手澤尙存不勝感愴欽慕而遂擖之于壁上以示來百云 光復後 乙丑 小春節 柳明烈 謹書

(이글은 정자를 보수할 때 처음으로 들보 위에서 발견하였는데 지금부터 300년전에 조상(祖上)께서 지은 글과 글씨가 아직 남아 있기에 감모(感慕)함을 이기지 못하여 기쁜 마음으로 여기에 옮겨 써서 벽에 걸어두니 많이 보시기 바랍니다. 광복후 을축 1985년 음력 10월에 류명렬 삼가쓰다.)

상량문에 의한 모산 해설

류맹문이 지은 모정(茅亭,會社亭)있었고 병자호란후에 사교당께서 모정 옆에 분비재를 짓고 마을 자제들을 가르치고 계셨으나 모정이 폐허되고 사교당께서 돌아가신 후 책을 읽고 학문에 힘쓰지 않았다.

고향을 떠난 류상운이 숙종 15년에 돌아와서 모정을 허물고 영팔정을 지었으나 보는 이로 하여금 사치스럽고 어리석게 보였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탄식하고 더럽고 추하여 지나가는 사람마다 외면하였다.

숙종18년 열사람 팔경시중에 병란을 겪고 지나면서 남아 있는 현판을 걸고 영팔정의 내력을 열거하여 판자에 쓰고 붙이니 마을 어른들을 공경하고 학문에 힘써 분비재에서는 강학하고 영팔정에서는 강론하는 자제들이 많아 사미시(司馬試)에 급제하여 홍패(紅牌)교지를 제수 받고 붉은 예복을 입고 아침에 모산평야 안개를 보고 해 질 무렵에 청기와 낙조(落照)를 보면서 대과급제(大科及第)를 다짐하는 영팔정이 되었다.

 

11. 詠八亭重修記(영팔정중수기)

 

鄕相巨臣踵出扵一門之內而洞得以名

(향상거신종출어일문지내이동득이명)

焉者余於靈岩之茅山里見之矣洞舊属

(언자여어영암지모산리견지의동구속)

羅州文化柳氏世居焉洞之南有會社亭

(나주문화류씨세거언동지남유회사정)

古也而此地之有亭實自此始世變滄桑

(고야이차지지유정실자차시세변창상)

亭亦隨之而変易時之汙隆物之興替固

(정역수지이변역시지우융물지흥체고)

若是歟謹接丙子亂後四矯堂先生柳公

(약시여근접병자란후사교당선생류공)

浚寓居于亭之傍敎授鄕子弟設齋于亭

(준우거우정지방교수향자제설재우정)

之舊墟而扁之以憤悱興儒學敦禮俗矣

(지구허이편지이분비흥유학돈례속의)

殁後諸生建祠宇竹峰山下而俎豆之且

(몰후제생건사우죽봉산하이조두지차)

撤齋之材爲講堂亭固以廢過者咨嗟歲

(철재지재위강당정고이폐과자자차세)

丙辰領相柳公尙雲離鄕十七年而歸謨

(병진영상류공상운이향십칠년이귀모)

諸族及鄕鄰而重建于此舊墟扵是乎肄

(제족급향린이중건우차구허어시호이)

業有所絃誦不絶風詠有時群賢畢至而

(업유소현송불절풍영유시군현필지이)

扁之以詠八者亭壁舊有李栗谷高霽峰

(편지이영팔자정벽구유이율곡고제봉)

南雪簑諸軍子八詠之什而无迺因此而

(남설사제군자팔영지습이무내인차이)

然也歟柳公號約齋諡忠簡 肅宗朝三

(연야여류공호약재시충간 숙종조삼)

任領相三任領中樞以淸白吏著於世其

(임영상삼임영중추이청백리저어세기)

剛果之樑淸白之節昭載于肅宗大王實

(강과지량청백지절소재우숙종대왕실)

錄晚乃以野服葛巾逍遙林泉酣飮於山

(록만내이야복갈건소요임천감음어산)

光水色之中者是乃達人之高尙豈可與

(광수색지중자시내달인지고상개가여)

賤丈夫論哉重建後歲月滋久子姓之承

(천장부론재중건후세월자구자성지승)

襲修葺勢固然矣而今者逼經二百有九

(습수즙세고연의이금자핍경이백유구)

十六年之久且庚寅乱之四十年後風雨

(십육년지구차경인란지사십년후풍우)

滲漏瓦桷頺落修葺之加不容少緩今年

(삼루와각퇴락수즙지가불용소완금년)

春宗議詢同齊力義捐大加修葺棟宇重

(춘종의순동제력의연대가수즙동우중)

新洞壑增光第念亭者外也文也睦者本

(신동학증광제염정자외야문야목자본)

也實也今文化氏既重新其外且文者矣

(야실야금문화씨기중신기외차문자의)

則亦能重新其本且實者矣豈不韙裁登

(칙역능중신기본차실자의개불위재등)

斯亭者想必有興感而黙會于中曰重修

(사정자상필유흥감이묵회우중왈중수)

之役不徒修其棟宇楹桷而己實以修其

(지역불도수기동우영각이기실이수기)

敦睦家風矣則亭可與山水同其乆遠矣

(돈목가풍의칙정가여산수동기구원의)

盍勉旃裁扵是役也首尾賢勞者推進委

(합면전재어시역야수미현로자추진위)

員諸彦暨會長柳珍烈甫也云爾

(원제언기회장류진렬보야운이)

光復後乙丑重陽節靈光金太璟識

(광복후을축중양절영광김태경식)

 

영팔정 중수기 한글번역

鄕相巨臣踵出扵一門之內而洞得以名焉者余於靈岩之茅山里見之矣

정승이 한 문중에서 연하여 나는 곳을 나는 영암 모산리에서 보았다

洞舊属羅州文化柳氏世居

마을은 옛날에는 나주에 속하였는데 문화류씨가 살았다

焉洞之南有會社亭古也而此地之有亭實自此始

마을 앞에 옛날 회사장(모정)이 있는데 이곳의 정자가 이 때부터다.

世變滄桑

그 뒤 세월이 지나 상전벽해(桑田碧海)와 같이 세월이 변함에 따라

亭亦隨之而変易時之汙隆物之興替固

정자도 또한 여러번 변경이 되었으나 시대의 우융(汙隆,흥망성쇠)가 물질의 흥체(興替,흥하고 쇠퇴함)로 굳어지는구나.

若是歟謹接丙子亂後四矯堂先生柳公浚寓居于亭之傍敎授鄕子弟設齋于

삼가 기록을 살피면 병정란후 사교당선생 류공 준께서 회사정이 있는 근처에 사시면서 마을 자제들을 기르치셨고

亭之舊墟而扁之以憤悱興儒學敦禮俗矣

정자의 옛터에 집을 지어 분비재라 부르고 유학을 일으키고 예의범절에 관한 풍속을 돈독히 하였다.

殁後諸生建祠宇竹峰山下而俎豆之且

돌아가신 후에는 여러 유생들이 죽봉산 아래 사우를 짓고 제사를 모시면서

撤齋之材爲講堂亭固以廢過者咨嗟歲

분비재를 헐어 사우 옆으로 옮겨 지어 강당을 마련하므로 묘정이 없어짐에 지나가던 사람이 서운해 하더라.

丙辰領相柳公尙雲離鄕十七年而歸謨

숙종 병진년 영상 류공 상운은 고향 떠난 17년만에 돌아와서

諸族及鄕鄰而重建于此舊墟扵是乎肄

마을의 일가친족과 협의하여 이곳 옛터에 다시 지으니

業有所絃誦不絶風詠有時群賢畢至而

이로부터 이곳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어 시를 읊음이 끊어지지 않아군현(群賢)이 모여 들었다.

扁之以詠八者亭壁舊有李栗谷高霽峰

그런데 영팔이라 이름한 것은 정자벽에 옛날 이율곡 고제봉

南雪簑諸軍子八詠之什而无迺因此而然也歟

남설사(남이공)등 재군자 팔경 시가 걸림으로 해서 영팔이라 하였는데 열사람의 시가 없어졌다.

柳公號約齋諡忠簡

류공의 호는 약재이며 시호는 충간으로

肅宗朝三任領相三任領中樞以淸白吏著於世其

숙종조에 영의정을 세 번하고 영중추부사를 세 번하였으며 청백리로 세상에 알려졌으니

剛果之樑淸白之節昭載于肅宗大王實錄

그 강적한 지조와 청백한 절개는 숙종실록에 소개되었다.

晚乃以野服葛巾逍遙林泉酣飮於山

만년에 농부의 옷을입고 갈포로 만든 두건을 쓰고 임천(모산앞 냇가)에서 아름다운 산수속을 거릴면서

光水色之中者是乃達人之高尙豈可與賤丈夫論哉

빛나는 강물에 마음이 쏠린 취()한 달인의 고상한 큰 뜻을 어찌 천장부(언행이 속된 사내)들과 더불어 같이 논할 수 있으랴.

重建後歲月滋久子姓之承襲修葺勢固然矣而今者

중건한 후에도 세월이 오래동안 지남에 따라 자손들이 계승하여 오래되어 현재사람들이 보수 하였을 것은 물론이지만

逼經二百有九十六年之久且庚寅乱之四十年後

이미 오래전에 숙종15년 영팔정을 지은지 296년의 세월이 지나고 또 경인란(6,25전쟁)이 지난지도 40년 후라

風雨滲漏瓦桷頺落修葺之加不容少緩

바람과 비로 인하여 빗물이 새고 기와와 서까래(보에 걸쳐 지른 나무)가 무너지고 떨어져서 보수가 시급을 요하더니

今年春宗議詢同齊力義捐大加修葺棟宇重

금년 봄 문중회의에 찬동하여 모두 의연금을 내서 크게 보수를 하니

新洞壑增光第念亭者外也文也睦者本也實也

정자도 새로워지고 마을도 빛이 나구나. 돌이켜 보건데 정()은 외적인 문화물질이요 화목은 내적인 기본이념이다.

今文化氏既重新其外且文者矣

이제 문화류씨는 이미 그 외적인 문화 물질을

則亦能重新其本且實者矣豈不韙裁登

거듭 새로이(重新)하였으니 또한 능히 내적인 기본 이념도 중신할 터이니 등과(登科,과거급제)하는 아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斯亭者想必有興感而黙會于中曰重修

이 정자에 오른 사람이면 기필코 재미있고 신나는 기분이 되어서 이에 이 정자를 보수하는 것이

之役不徒修其棟宇楹桷而己實以修其

비단 동우(집의 마룻대와 추녀끝)와 영각(楹桷,기둥과 서까래)만을 수리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敦睦家風矣則亭可與山水同其乆遠矣盍勉旃裁扵

실제로는 돈목하는 가풍을 따른다는 것을 깨닫게 되리니 그러면 이 정()은 산수와 더불어 영구 보전하게 되니 어찌 아니 노력하지 않겠는가?

是役也首尾賢勞者推進委員諸彦暨會長柳珍烈甫也云爾

이역사에 시종현로(始終賢勞) 하는 분은 추진위원제위와 회장 류진영이다.

光復後乙丑重陽節靈光金太璟識

광복후 을축 19859월에 영광 김태경 지음

 

중수기에 대한 해설

19859월에 영팔정 중수을 완료하였다.

숙종15(1689)296년전 영팔정 상량문이 1985년 준공때 발견되다.

1950년 경인란(6.25 전쟁)으로부터 40년이 지나 문중회의에서 의연금을 내기로 결의하여 젊은이 늙은이 모두 참여하였고 추진위원회장은 류진열이다.

 

주석(註釋)

1 : 이하 모든 한자 글을 한글로 번역하는데 당시 정치 경제 사회상을 반영하도록 노력하였으나 필부(匹夫)의 능력부족으로 주관적인 부분을 해석이 있으니 참고로만 보시기를 바란다. 조선시대는 사용했으나 현재는 사용하지 않아 한자사전이나 옥편에 없는 한자를 원문 한자를 쓰려고 노력하였으나 잘 못 쓴 한자가 있을 수 있으니 양해바란다.

2 : “大丞相杖屨之鄕(대승상장구지향)”내용에 의하면 주련은 1600년대 이후 게시되었다.

3 : 영팔정에 시를 남긴 이이 고경명 남이공 등은 1500년대 분들로 약재(류상운) 대감이 태어나기 이전 학자들이며 강학인 분비재 1643(인조21)년 건립이후 사미시(생원진사)에 급제하면 성균관 입학자격이 주어지는데 사마시에 급제하신 선조들이 많았고 분비재는 강학(講學)을 영팔정은 강론(講論)을 하였으며 아침에 모산평야 안개를 보고 해 질 무렵에 청기와 영팔정에서 낙조(落照)를 보면서 대과급제(大科及第)를 다짐하다.

4 : 朱襕(주란) :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홍패(紅牌)교지를 제수 받고 붉은 예복을 입다.

5 : 大野平(큰 들판) : 영팔정앞에 보이는 들(평야)

6 : 영팔정 이전 류맹문께서 1406년에 건립한 모정 때 이율곡 시판(詩板)2편씩 4개의 시판이 있었고 병자호란때 3개 시판이 유실되었다.

7 : 竹嶺(죽봉,죽봉사뒷산) 虎山(신북 호산, 155.9m) 斷橋(현재 없으나 구암촌에 있는 다리, 상운 斷橋尋春 참조) 龜川(구천,龜岩촌 냇물), 영팔정에서 과녁이(射帿) 있는 松坡(송파,현 솔밖마을)에 활쏘는 풍경, 南塘(남당,남쪽 연못,현재 없음), 採蓴(순채,어항마름과에 속하는 수생식물 작은 늪이나 연못에 서식하며 나물로 어린 순을 반찬으로 먹음), 山亭(산정,류상운 모산에서 사용한 호)

8 : 제봉집(霽峯集)은 조선전기 문인 고경명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617(광해9)에 간행한 시문집에 팔경시가 수록되어 있다.

9 : 류상운 약재집 초고본(柳尙運 約齋集 草藁本,경기도유형문화재 제251)

柳尙運 約齋集 草藁本은 본집인 약재집” 5책과 약재연보” 1책 등 필사본 6책으로 구성되어 있는 초고본입니다. 저자가 직접 편집하여 후손에 전래된 유일본이다. 병자년 1636(인조14) 음력 122일 청태종은 45,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공하는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켰다.

16361214일 여진족이 도성을 침범하자 온 집안이 모산으로 피난을 가게됐었다. 약재는 16361222일 충북 제천현 구억산 묵계촌에서 태어났다.

피난 도중에 제천 구억산 아래서 분만을 하고 이곳에서 사흘을 머물렀다.

결국 인조는 1637130일 삼전도에서 항복한다.

류상운은 10살까지 나주 모산에서 성장했으며 그 이후에는 한양을 오가며 학업을 했다. 1660(24) 진사에 급제하고 1666(30) 문과 급제후 1667(31)에 벼슬을 하고 부사와 관찰사 등을 거처 도승지와 이조판서, 호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다.

숙종 22(1696) 영의정에 그리고 다시 1698(戊寅,숙종24) 1699(乙卯,숙종25) 영의정에 올랐다.

약재가 나주 모산촌에 계셨던 것은 10세까지와 25세 되던 현종2(1661)辛丑 9生親祖父 判官公(휘 준) 을 당하여 때와 38세 되던 현종15(1674,갑인) 아버지 의정공(휘 성오)상을 당하여 1675(乙卯,숙종1) 모산(茅山) 옛집(아버지 집)으로 와서 예제(禮制)이 따라 거상(居喪,3년 상중에 있음)하였고 53세 되던 1689년 영팔정 중수 때와 팔경시 현판을 게시하던 571692山亭집에 계셨고 1699(乙卯,숙종25) 영의정 퇴임 이후이다.

10 : 社院 : 신을 모시는 건물로 숙종22(1706)년 건립된 송산사와 영조2(1729)년 건립된 죽봉사가 아닌 토지신을 모신 會社亭은 모정이다.

11 : 丙穴(병혈, 잉어 맛이나는 가어(嘉魚)가 나는 중국 陝西 약양현 동굴이다.

12 : 모정(茅亭)과 회사정(會社亭) 관계 류맹문판서공께서 아버지 말씀에 따라 만들었던 모정을 회사정이라 표기한 것은 한양이나 각지방에 사직단 사직단(社稷壇)이 있어 토지()신과 곡신()신에게 제사를 지냈던 제단으로 모정을 회사정은 토지신에게 지역민이 모여 제사를 지낸 정자라는 것이며 이런 풍습이 전해져 현재 모산 마을에 천신단(天神壇)이 공봉(熊峰)아래 있으며 정월보름날 당산제롤 모시고 있다.

13 : 丙丁亂(병정란) : 병자호란(丙子胡亂)은 병자년 음력 128일부터 정축년 음력 130일까지(인조14~15) 이루어진 청나라의 침략 전쟁을 연려실기술에서는 병자노란(丙子虜亂) 병정노란(丙丁虜亂)으로 기록하였고 병정노란이라 표기는 호()나 노()나 오랑캐를 뜻하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14 : (곁방)=𠊓(곁방)현재 사용하지 않는 한자이다.

15 : 조두(俎豆), 는 고기를 담고 는 채소를 담은 제기(祭器)로 사당(祠堂)에서는 4() 4()로 진설한다.

16 : 영팔정 팔경시 : 열 사람의 팔경시가 있었다는데 현재 남아 있는 팔경시가 이율곡 고재봉 남이공 류상운 네사람으로 나머지 여섯분의 팔경시는 알 수 없다.

17 : 山亭主人(산정주인)은 산정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 류상윤이다. 모선12동네는 청용(靑龍) 송파(松坡) 산정(山亭) 천동(泉洞샘몰) 벽촌(碧村) 백동(栢洞) 구만동(九萬洞) 송내(松內) 춘교(春橋) 구암(龜岩) 이목동(梨木洞) 통산(桶山)이며 산정에 류상운이 살았고 8경시에 송파 구()천이 있다,

18 : 장희빈이 사사되자 류상운과 함께 장희빈을 유배를 보내자고 주장한 남구만은 1702년 충청도 아산현으로 유배되었고 류상운은 직산에 유배된다. 남구만 저서 약천집(藥泉集)에 류상운 묘갈명과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등이 수록되어 있다. 영팔정 남구만 시는 남구만 아들이 부탁한 것을 1723년 만암이 게시한 시판이다.

19 : 茅山舊社(모산구사) : 모정이며 1706(숙종32)년 건립된 송산사(松山祠)1729(영조5)년 건립된 죽봉사(竹峰祠)를 모산구사라고 하지 않는다. 송산사는 류용공(柳用恭)과 류몽정(柳夢井) 류렴(柳濂,原從勳) 류공신(柳公信,原從勳)을 배향하였으나 여수에 중건하면서 류공신은 빠졌으며 죽봉사는 류준 류상운 배향하고 있다.

20 : 用酒(용주) : 조선시대 가뭄 홍수 기근 전염병 등으로 수시 금주령이 내렸는데 국가행사(제사) 또는 교육용으로 금주령에서 제외된 술

21 : 千岩 晴川(천암 청천) : 9123차나주해전(덕진포해전) 때 왕건수군(해군)은 영암군(당시 나주) 신북면 모산리앞 마산에 주둔하였으며 현재 삼포천으로 군선이 입항하였기에 조선조에도 모산 앞 냇물은 큰 강(千岩 晴川)이었으며 수많은 바위 그림자가 비추고 있었다.

22 : 중국 하파에 유림(儒林)들이 녹동(鹿洞)에서 글을 외우고 학문하여 노나라(공자의 고국)로 되고 훌륭한 제자와 문하생이 많았던 것처럼 영팔정이 학문의 전당이 되다.

23 : 師表終(스승을 잃고) 사교당 류준께서 돌아가시고

24 披三條(피삼조) : 모산에서 한양가는 세갈래길이 있었는데(아래참조) 한양에서 제주로 가는 큰길이다.

조선시대 역참(驛站)과 역참 사이의 거리는 30(12km)였는데 옛날 '한 참()'이라 했는데 요즘 말로는 '한 정거장거리'란 말로 30리 거리이다.

모산에서 한양가는 3가지길

한양에서 제주로 가는 길목인 모산(영암모산영산포)

[이 길은 하정공께서 전라관찰사로 임명되어 전주감영에 근무하시던 1406년 모산에 경치에 감탄하여 아들 류맹문에게 모정을 짓게 했던 시기부터 하정공과 아들 판서공 그리고 현손인 영암공(류희정)5대손 모강공(류용공) 모헌공(류용강) 낙향조들이 한양으로 다녔던 길이다. 그리고 수많은 모강공 모헌공 후손들께서 모산에서 한양을 다니던 길이다.]

제주우수영(해남문내면)남리역(南利驛,해남황산면)해남현(海南縣)별진역(別珍驛,해남계곡면)석제원(石梯院,성전면)월남점(月南店,성전월남)영보역(永保驛,덕진영보)부소원(夫所院,신북이천리부선마을)모산하마비에서 가금법(呵禁法)에 의한 가갈(呵喝)을 멈추고 말에서 내려 걸어서 모산 앞을 지나감창흘원(昌屹院,영산포)오림역(烏林驛,봉황면오림리)청암역(靑巖驛,나주경현동)광리역(廣利驛,남평)경양역(景陽驛,광주역부근)선암역(仙巖驛,光州광산 황용강변)진원역(鎭原驛,장성진원면)으로 해서 한양을 가는데 국가에서 운영하는 역참(驛站)이 있고 원()은 역을 이용할 수 없는 민간 여행객들이 이용 대상이었으며 숙식을 제공하여 여행객의 이동을 원할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양사준(楊士俊)의 묘지명에 기록된 남정가(南征歌)인 영암성전투에 의하면 을묘왜변(乙卯倭變,1555명종10)錦城橫截茅山으로 도라드니 元帥府애 갓갑도다[금성을 횡단하여 모산으로 돌아드니 원수부에서 전라도 병마절도사 원적(元績) 장흥부사 한온(韓薀)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과 함께 달량포(현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로 출전했다는 내용에 모산의 길목을 알 수 있다]

금정쪽에서 한양 가는길(금정모산선애마을영산포)

장흥강진금정면 아천마을(조선시대 나주목 금마면)신북면 명동리 덕산마을옆오봉산 조리봉갈림길노루목재(신금로,용산리와 와운리 사이길)신지로길(나주힐스골프장옆)모산(하마비에서 내림)선애마을원금수마을예향로(나주 세지면 전남방직옆)창흘원(昌屹院,영산포)

선박()으로 한양 가는길(모산시종해창서해인천)

모산(하마비에서 내림)모산앞 마산(159.2m,덕진해전에서 왕건 주둔지)떨꾹재(이목동 냉천제위)행군봉(영암군 신북면 명동리)부소원(夫所院,구장터삼거리)호산(155.6m,왕건과 견훤 격전지)신북행정리 옥봉마을시종금성마을도포면해창포(군서면 해창리 원해창마을)배로 한양으로 감

25 : 구주(九州) 모산 9개 마을(조선 말기에는 모산이 12동네이었으나 숙종때는 9개 마을이었다.

*26 : 운물(雲物)=경물(景物로 시절을 따라 달라지는 경치)

근거 문헌 : 농가월령가-정월령-일부분에 平郊廣野雲物變(넓은 들과 벌판에는 경치가 변하기 시작하도다.)

27 : 숙종15년 영팔정 중수에 참여한 柳尙運(판서공증손,영의정) 柳鳳長(판서공현손,옥과현감) 柳景昌(남재공현손,통덕랑) 柳榰(청계공증손) 柳相臣 柳筬 柳壽獜(청계공후내손) 柳重基(참의공내손) 柳昌基(참의공내손) 柳鳳朝(판서공현손)이며 당시 모산에 살았던 함풍노씨 외손 영해박씨 후손과 하동정씨 후손과 경주이씨 후손인 朴三圭 鄭一萬 李厚栽 등이 모산대동계 임원이다. 모헌공(휘용강)처가(妻家)가 경주이씨이며 모강공(휘 용공)처가(妻家)가 하동정씨이다. 참고로 본인 후손 명칭은 자() () 증손(曾孫) 현손(玄孫) 내손(來孫) 순서이다.

모산리는 세종 초기에 함풍노씨가 터를 잡고 다음에 그의 외손인 영해박씨(박준미)가 입주하고 朴門의 취객이된 하동정씨가 거주하게 되고, 정씨문중의 취객인 경주이씨 인해의 자 흥손이 거주하었다.

그후 柳用恭(모강공)이 하동정씨 정효손(정의중의 손)의 따님을 맞아 몽벽(참의공) 몽익(판서공) 몽두(내금위장공) 몽정(청계공) 몽삼(남재공)을 두고 류용강(모헌공)도 경주이씨 이해의 따님을 맞아 항, 진 함을 두었다. 류상운이 1689(숙종15) 영팔정 중수때 모산대동계 도유사인 류경창조카를 이목동에서 자주만나 바둑을 두면서 성실한 생활을 권한다(三從叔約齋忠簡公曰吾門有號稱南州傑如何射家侄對局基及劣)

28 : 숙종15년 모산대동계가 있었고 도유사(현 종회장) 별유사(현 이사)는 재무 총무 감사 등 각자 임무가 있으며 현재 숙종33(1707)년 계원명단은 있으나 동계규약은 분실되었다.

현판사진 첨부파일에 자세하게 있습니다.

'문화류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암군 신북면 변천사  (0) 2023.09.04
약재공 아호와 집터  (0) 2023.08.01
종회 활동 자취  (0) 2023.06.02
류수원(柳壽垣)연보(年譜)  (4) 2023.05.29
23 하정공파 고양공중중 장학사업 안내  (0) 2023.0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