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류종지 제사 축문

ryu하곡 2019. 6. 1. 19:23

류종지(柳宗智) : 제문 류종지(祭文 柳宗智)

 

문산(文山) 류종지(柳宗智)는 삼가 맑은 술과 향기로운 과일을 차려놓고 공경한 마음으로, 근래에 돌아가신 통훈대부 행 홍문관 전한 오 선생의 빈소에서 제사를 올립니다.

, 애통합니다. 하늘의 뜻은 알 수가 없습니다. 공이 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연원이 있는 학문, 확실한 논리, 곧고 진실한 절개, 충성스럽고 우애 있는 행의, 미덥고도 겸손한 덕을, 어찌 이 세상에서 다시 볼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 우리 선사 남명 선생께서 은거하며 장차 세상에 행할 뜻을 구하여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학문을 마음으로 전했습니다. 저는 약관의 나이로 선사의 문하에서 공께 절하였으니 공은 남명 문하의 연세 드신 벗이었습니다.

위기지학에 힘쓰는 일, 시대를 인식하는 의리, 나아가고 물러나는 도에 대해 공은 말을 듣자마자 바로 깨달았습니다. 물러나와 혼자 있을 때를 살펴보니 공은 바야흐로 듣던 바에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변함없이 굳센 모습을 보고서 공이 보존한 것을 알았고, 격앙된 소리를 듣고서 공이 세운 뜻을 보았으며, 경계와 깨우침을 받들고서 공이 자득한 것에 감복하였습니다. 그것을 미루어 남에게 미치기에 충분하였으니 처음으로 선사의 문하에 이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십여 년간 곤궁과 영달에 차이가 나니 사람의 일도 거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저 태산북두처럼 우러러보기만 힘쓸 뿐 오히려 바로 알아보지 못해 탄식했는데 오늘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지난 임신년(1572)에 선사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공도 그해에 비로소 벼슬을 그만두고 집에서 지내셨습니다. 대들보가 꺾이는 아픔은 비록 서로 대할 때는 같았지만 나라와 개인을 위하는 마음이 공에게 있어서 유독 절실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공이 또 갑자기 하루 저녁에 이 지경이 될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또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공이 우리 선사를 애도하던 것처럼 하게 하십니까. , 애통합니다.

하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사문은 장차 누가 닦게 할 것이며, 선비의 기개는 장차 누가 진작시키겠습니까. 군자에게는 장차 누가 그들로 하여금 믿고 두려워하지 않는 바가 있도록 할 것이며, 소인에게는 장차 누가 그들로 하여금 두려워하여 하지 않는 바가 있도록 하겠습니까. 선사의 뜻을 또 장차 누가 드러나도록 하겠습니까.

저는 배움이 얕고 행실이 비루하여 늘그막에 의지하여 돌아갈 곳을 잃었는데, 다행히도 공이 동문의 의리로 돌보아 주셔서 뜻한 바가 비루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숨김없이 이끌어 주고 충고해 주는 덕을 입었고 또 부지런히 서신이 오고갔습니다. 이에 문하에서 학업을 마칠까 생각하여 어려울 때 지조를 꺾지 말 것을 기약했는데 공이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끝났습니다. 어찌하겠습니까. , 애통합니다.

하늘의 뜻은 알 수 없습니다. 유림에 화를 내리는 것이 어찌 그리 가혹한지요.

, 공이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수발을 들 수 없었고, 공이 큰 병에 걸렸지만 달려가는 것도 늦었습니다. 단지 이 술 한 잔으로 어찌 마음을 다하겠습니까. 영혼이 있으시다면 이 작은 정성을 흠향하시옵소서.

 

[-1] 류종지(柳宗智) : 1546(명종1)~1589(선조22).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명중(明仲), 호는 조계(潮溪)이며, 조식의 문인이다. 좌상공후 류성(柳誠)의 아들이다. 참봉(叅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기축사화(己丑士禍) 때 정여립(鄭汝立)의 당()으로 지목되어 금부(禁府)에 갇혔다가 장하(杖下)에 운명(殞命)하였다. 조계실기(潮溪實紀)21책이 전한다. 대각서원(大覺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경상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남명학연구소 | 양기석 김익재 (공역) |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