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류차 선계 분재믜 제문제

ryu하곡 2019. 5. 9. 19:06

車柳先系 紛爭의 諸問題

柳氏釜山宗親會 副會長

前車柳公報社 社長 柳 宗 鉉

1. 머리말

우리는 1689년의 文化柳氏 己巳譜 이후 車氏와 柳氏가 같은 조상에서 분적(分籍)된 동족이성(同族異姓)으로 알고 350여 년을 살아왔다. 그리고 거기에 실린 원파록(源派錄)의 기록을 그대로 믿고 姬氏-氏-王氏-車氏로 변성(變姓)된 사실과 신라 애장왕(哀莊王)조의 ‘김언승(金彦承)의 난’ 때 급박한 사정으로 柳氏로 다시 변성하여 5대를 지내다가 대승공(大丞公:柳車達)께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삼한통합에 공을 세워 익찬공신(翊贊功臣)이 되시고 두 아드님 중에서 장자 효전(孝全)은 車姓을 복성(複姓)하게 하고 차자 효금(孝金)은 柳姓을 그대로 사성(賜姓)하니 이로부터 車柳 양문(兩門)이 형제의 의(誼)를 다지며 지내 온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지난 2001년에 대전(大田)에 있는 “뿌리공원”에 延安車氏宗親會에서 <延安車氏由來碑>를 세우면서 비문(碑文)에 柳氏를 가성(假姓)이라고 기록하여 모든 柳氏 종원(宗員)들의 항의가 빗발치고 급기야 선계(先系)에 대한 새로운 고증(考證)이 필요하다는 논의가 일어났다.

거기에다 2004년에 발간한 <延安車氏大同譜>의 기록이 여기에 불을 부쳤다. 이 대동보의 <延安車氏의 由來> 항목에서 다시 “차승색(車承穡)께서는 충성심에서 아들 차공숙(車恭叔)과 더불어 헌덕왕(憲德王)을 암살하려다 누설되어 아들을 데리고 황해도 구월산으로 피신, 가성류씨(假姓柳氏)로 모칭(冒稱)하고 이름을 백(栢)으로 하고---“ “고려태조 왕건께서 후삼국을 통일할 때 假姓 柳氏6세인 류해(柳海)께서 장정을 수송하여 통일에 기여하였으므로 공을 삼한통합벽상이등공신에 봉(封)하고 본성이 車氏이기에 조상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하여 차달(車達)이라는 호를 내렸다.” 운운하였다. 또 “큰 아들 孝全은 개국(開國) 수공자(首功者)로 대광지백(大匡之伯)의 벼슬이 제수되었으며 연안군(延安君)에 피봉(被封)되어 식읍(食邑) 천호(千戶)를 받고 옛 성 車氏로 복성(複姓)케 되고 종적(宗籍)을 연안으로 하니 연안차씨 득관시조(得貫始祖)가 되었고 둘째 아들 孝金은 柳氏의 시조가 되었다. 이때부터 두 형제 분이 차씨와 류씨로 각각 분성(分姓)되었다.”라고 기록해 놓았다.

그리고 손록(孫錄)에는 대승공의 휘(諱 : 돌아가신 분의 이름)를 <海>라고 기록하고 방주(謗註)에 “公之冒姓柳諱海字應通賜號車達自號鵝沙本姓車氏也公之五代祖左相車承穡而哀憲之變亂憲德王弑害爲圖報君讐事泄失敗逃入儒州九月山墨坊洞冒稱祖母之姓楊氏其後楊字如意爲變柳字冒姓柳氏于傳也“ 운운하고 차자 孝金의 기록에는 “高麗太祖承蔭之日冒姓之柳氏六世舊姓車氏爲複姓長子諱孝全而舊姓車氏上祖之弘烈爲承襲次子孝金冒姓柳氏不棄而仍爲柳氏之命賜姓姑孝金以此爲文化柳氏得姓始祖一世也始故但文化柳氏而兄弟之間車柳兩姓分姓之爲”라 하였다.

이상 연안차씨종친회에 의하여 작성된 <연안차씨 유래>와 대동보에 기록된 문헌들에 대하여 그 내용을 분석 해 보고자 한다.

2. 冒姓과 假姓

위선 이상 기록에서 계속 거론된 모성(冒姓)과 가성(假姓)에 대하여 논(論)해 보자.

한글 ‘표준어대사전’에는 ‘冒姓 ㅡ 남의 성을 거짓으로 일컬음’이라 하였고 假姓에 대하여는 낱말조차 없다. 즉 터무니 없는 조어(造語)라는 것이다. 보학(譜學)에서도 모성이나 가성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단어이다. 그도 그럴 것이 사기 등 범죄를 저지르기 위하여는 이름, 또는 성명을 모칭(冒稱)할 수는 있겠지만 그 외에는 ‘성을 바꾸는 것이 제일의 욕(辱)으로 생각하는 우리가 구태여 남의 성을 거짓 말 할 경우는 없을 것이며 갑오경장(甲午更張) 이전의 천민(賤民)으로 성이 없던 시절이 아니라면 가짜 성을 쓸 필요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용례(用例)도 없고 단어 자체도 없는 冒姓, 假姓이란 단어를 가지고 비석에 새기고 족보에 기록하여 柳門에 모멸감(侮蔑感)을 주고 비하(卑下)를 한 <연안차씨종친회>의 행위는 비난 받아 마땅할 것이다.

비석과 족보에 冒稱이라고 기록한 근거는 車承穡 부자가 헌덕왕(憲德王)을 시해하려다가 누설되어 구월산에 숨어들어가 신분을 숨기기 위하여 성을 柳氏로 모칭하였다는 설에 근거한 것인데 이는 모칭을 한 것이라는 뜻이지 冒姓이라 한 것은 아니며 이를 한 술 더 떠서 “가짜 성”이라는 뜻으로 假姓이라고 폄하한 것은 많은 어폐(語弊)를 가져왔다고 할 것이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는 이제 냉정한 심정으로 엄격하게 따져 보아야 할 일이 있다.

이상 여러 사실들은 350여 년 전 족보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는 사실들인데 조선 숙종 15년(1689)에 류처후(柳處厚)라는 분이 썼다는 원파록(源派錄)에 의하여 文化柳氏의 기사보(己巳譜)부터 족보에 기록된 것이다. 즉 그 이전에는 車柳가 이성동족(異姓同族)이라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류씨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고의 족보요 국보적(國寶的) 가치를 지닌 가장 정확하고 오래된 文化柳氏 嘉靖譜(1562년 刊)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원파록에 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없으며 大丞公 휘 ‘車達’의 아드님으로는 좌윤공(左尹公) 휘 ‘효금(孝金)’ 뿐, 長子라는 ‘車孝全’은 없다. 그렇다면 역사적 고증도 안 된 사실을 가지고 현재 車柳 兩門간에 허무한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源派錄의 진위를 따져 가면서 이 문제를 짚어 보자.

3. 源派錄의 眞僞와 考證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원파록의 출처와 사실관계가 지금도 명확하지 못하다.

위선 원파록의 기사(記事)는 필자가 적의(適宜)하게 작성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논외로 하더라도 본문(本文)은 동양사(東洋史)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엄청난 사실을 담고 있기 때문에 내용의 사실여부를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고증은 고도의 학술적, 역사적 식견과 상당한 연구과정이 필요한 만 큼, 시간관계로 차후로 미루고 여기서는 대략적인 것만 거론하고자 한다.

(1) 원파록의 기록 중, 1세 황제(黃帝)는 중국의 개국조(開國祖)인 황제 헌원(軒轅)을 말한다. 중국사에서도 황제에 대한 기록은 있는데 원파록의 기록과 별로 다르지 않으므로 문제 될 것이 없겠으나 그 이후 요제(堯帝), 순제(舜帝), 하후우(夏后禹)를 거쳐 공갑(孔甲), 신갑(辛甲)에 이르기 까지 19世가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현재 중국사에서도 다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만약 원파록 기술이 신빙성이 있다면 350여 년 동안 이에 대한 반론도 고증도 없는 것은 결국 믿을만한 근거도 없고 연구할만한 가치도 없다는 것일 것이다.

(2) 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亡命)하여 변성명(變姓名)하였다는 ‘왕조명(王祖明)’을 비롯하여 59세까지의 기록도 실제 역사와 비교 고증할 수도 없는 부분이라 과연 고증가치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다만, 수긍(受兢), 예(禮), 림(霖), 흘(屹) 등 몇 분만이 동사(東史)에 이름이 보일 뿐이며 그 외는 실제 인물임을 증명할 수도 없다.

(3) 소위 車氏의 득성조(得姓祖)라고 할 수 있는 차무일(車無一)이 신라 개국 초에 박혁거세왕(朴赫居世王)으로부터 좌상(左相)의 벼슬을 받고 車氏를 사성(賜姓)했다고 하였는데 이미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당시에는 성씨가 없었으니 사성제도도 없었고 특히 좌상이란 관직도 존재하지 않았다. 원파록에 의하면 신라에서 車氏가 34세를 내려 오면서 좌상, 승상(丞相)의 관직을 가진 분이 20여명이나 나오는데 승상, 좌상이란 신라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벼슬이고 백 보를 양보하여 중국 당(唐)나라의 관제를 모방하여 썼다고 하더라도 좌상, 승상이 세습직(世襲職)이 아닌 이상 대를 이어 동일 관직을 가질 수도 없으며 승상, 좌상이라면 신라 관직 중 육두품(六頭品)의 1~2품에 속하는 이벌찬(伊伐L), 이찬(伊L) 등의 벼슬인데 이 정도의 관직이라면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 등에 어떤 업적이든 그 기록이 보일 것이나 현존하는 신라사(新羅史)의 어디에도 단 한 분의 차씨(車氏)가 보이지 않는다.

(4) 원파록에 의하면 신라 소성왕(昭聖王) 때 승상을 지낸 차건신(車建申)이 왕이 운명시에 태자이던 애장왕(哀莊王)의 후일을 부탁하여 고명신하(顧命臣下)가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어린 애장왕의 보상(輔相)으로 있다가 운명(殞命)하니 왕예(王禮)로서 장사를 지내고 기장 만화동에 안장하니 곧 지금의 차능(車陵)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기(史記)의 어느 곳에도 왕숙(王叔) 김언승(金彦承)의 섭정(攝政) 사실만 기록되었을 뿐, ‘차건신’의 보상에 대한 기록은 없으며 차승색(車承穡) 부자(父子)의 헌덕왕(憲德王) 시해(弑害) 도모사건에 대한 기록도 전혀 없고 ‘차건신’ ‘차승색’ ‘차공숙’에 대한 기록도 찾아 볼 수 없다. 역사를 기록함에 각 왕조(王朝)별로 사적, 사실, 사건, 주요 인물 등을 골고루 기록하는 것은 기본인데 이러한 주요 사실과 사건, 인물들의 기록이 없다는 것은 원파록의 진위를 가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이에 원파록 발견 이후 지금까지 차류(車柳) 양문(兩門)의 인사들 외에 어느 역사학자도 원파록에 귀를 기울여 준 사람도 없고 이를 연구한 사람도 없고 주의를 해 준 사람도 없고 눈을 돌려 준 사람도 없다. 즉, 학자들의 눈으로 볼 때, 원파록은 완전한 하나의 허구적(虛構的) 기록일 뿐이라는 것이다.

(5) 이상 몇 가지 이유를 들었지만, 그 밖에도 원파록을 믿지 못할 이유는 많다. 그 중에서도 역사의 기록과 전혀 부합되지 않고 사실과 틀리는 점이 허다하며 그만한 자료가 그때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나 희한한 일이고 특히 족보(族譜)의 종주국(宗主國)인 우리 나라에서 가장 정확하고 세밀하면서도 오래 된 文化柳氏 嘉靖譜에 원파록 내용에 나오는 어떤 부분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대승공의 묘비문(墓碑文), 문간공(文簡公), 문정공(文正公) 등 어느 현조(顯祖)의 행장(行狀)이나 묘비문에도 그 흔적을 발견 할 수 없다. 그 대신 원파록이 세상에 나타난 이후에 찬술된 기록부터 그 내용이 첨가(添加)되는 것으로 보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는 어려우며 특히 대승공의 아드님으로 좌윤공 <孝金>만 기록되고 소위 장자라는 대광백(大匡伯) 孝全은 기록되지 않았음은 연안차씨의 선계(先系)에 대한 중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4. 延安車氏의 주장에 대한 의혹

연안차씨에서 柳氏에 대한 冒姓, 假姓論을 비롯한 모든 주장은 원파록과 소위 <차원부설원기(車原+雪寃記) : 일명 車雲巖先生雪寃記>의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파록은 그 사실적(史實的) 가치를 입증할 수 없는 입장이고 차원부설원기는 어떤 기록인지 살펴 볼 필요가 있겠다.

이미 <柳州春秋 제13집 : 2005년도>에서 밝힌 바와 같이 <차원부설원기>는 의문 투성이의 기록이요 역사와 부합되지 않은 점이 많다. 그 점을 개략이나마 몇 가지 거론해 보자.(※주1-柳州春秋는 儒州春秋의 오기)

(1) 단종(端宗)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양위(讓位)한 뒤에 박팽년(朴彭年)에게 명하여 편찬하였다고 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어디에도 이 사실이 기록된바 없으며 박팽년에 관한 기록에도 그가 설원기를 찬술(撰述), 또는 편찬(編纂)했다는 기록도 없다. 또한 설원기에서 그 근거로 인용한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의 봉교(奉敎) 주(註), 서희(徐熙)가 찬집(纂集)하였다는 야사(野史), 정지상(鄭知常)이 지었다는 서경잡기(西京雜記), 김방경(金方慶)의 초당일기(草堂日記), 이예장(李禮長)의 시(詩) 등은 그 유무를 가릴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는 설원기의 기록에만 있는 책들이다.

(2) 설원기가 발견되기 얼마 전에 나타난 원파록과의 기록이 상이하여 그 진위를 가리기가 더욱 어렵다.

(3) 연안차씨의 보사(譜史)를 보면 현존 최고(最古)가 숙종34년(1708년)에 간행된 평산보(平山譜)인데 이는 원파록이나 설원기 이후 출간이니 그대로 인용했을 것으로 보이나 그 이전의 차씨 족보는 없는지? 만약 존재한다면 이번에 이를 공개하여 과연 차씨의1세조인 ‘車孝全’이 대승공의 장자인지 밝혀야 할 것이다.

5. 結語

이상 보는 바와 같이 지난 1~3년간에 전개된 車柳兩門의 先系에 대한 분쟁은 350여년을 이어 오면서 종친회까지 함께 하면서 다져온 異姓同族의 의(誼)를 송두리째 뭉개버렸다. 그런데 이것이 연안차씨 문중에서부터 촉발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매우 유감으로 생각한다. 차씨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들이 ‘큰집이라느니’, ‘형님계통이라느니’ ‘류씨들도 차씨들처럼 마땅히 대승공을 시조(1세조)로 할 것이 아니라 좌윤공 ‘孝金’을 시조로 해야한다느니’ 하면서 柳氏에 대한 성세(姓勢)의 약점을 만회하려 노력하여 왔다. 그러던 중에 이를 문헌적으로 반증하기 위하여 종친회 내에 계보연구 전담부서를 두고 여러 방면으로 연구하고 계획하여 그 결과물로 나온 것이 차씨유래비와 대동보의 柳氏에 대한 冒姓과 假姓으로 표현한 폄하(貶下) 기록이다. 이것이 차씨들로서는 그 동안의 콤플렉스를 푸는데 일조가 될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해악이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 올 가능성이 있으며 타문(他門) 국민들에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보학(譜學)을 아는 사람은 물론이요 일반 국민들도 널리 알고 있는 車柳同宗이라는 상식을 우리 스스로 허무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 얼마나 부끄럽고 황당한 일인가!

車柳 兩門은 이 문제를 하루 빨리 정리하고 해결하여 혼돈에 빠진 양문의 종원(宗員)들에게 올바른 선계를 고지하여 숭조(崇祖) 돈목(敦睦)과 자손 훈육(訓育)에 차질이 없도록 해 주시기를 당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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