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권극중

ryu하곡 2018. 7. 31. 18:56

이글은 영암군 신북면 모산촌과 관련 있는 글이기에 소개합니다 원문글 를 대법원 성씨표기 예규 개정으로 로 표기하였습니다.

새만금문화권의 변혁 에너지(3) : 시대의 이단아들

 

새만금 이야기 l 2009.07.24 18:44

정여립의 난을 거치며 중앙에 진출할 기반을 상실한 이후, 호남의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서로 다른 두 갈래의 풍조가 생겨났다. 한편에서는 중앙의 세도에 빌붙어 하급직 벼슬이라도 따내려는 세속적 분위기가 대두했다. 현세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사족들이 서울의 권력변화에 이리저리 휩쓸렸다. 이중환이택리지에서 "예전에는 남인과 북인이 많았으나 지금은 노론과 소론이 많다"고 한 것은 이런 시류를 반영한다.

 

남궁두와 권극중 : 새만금 지역이 낳은 시대의 이단아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입신출세와 담을 쌓고, 자유로운 사상과 학문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한 예로 16세기가 되면서 성리학에서 이단으로 배척하던 신선술(仙道)을 닦는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남궁두(南宮斗, 1526~1620)이다. 그는 전북서부지역을 주 무대로 활동하며, 허균 등의 인물과 교류해 우리나라 문화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남궁선생전홍길동전등의 출현을 가져온다.

17세기 전반에 이르면 고부 사람인 권극중(權克中, 1585~1659)이 단학 수련의 일가를 이룬다. 같은 시기, 만경에서 태어난 진묵(震默, 1562~1633)은 민중 속으로 들어가 피폐해진 호남의 민심을 어루만지며 대중들에게 대자유의 삶을 가르친다. 17세기 후반에는 류형원(柳馨遠, 1622~1673) 같은 이가 찾아들어 생명력을 다해가는 성리학을 대체할 혁신적인 경세론을 구상해 이른바 '실학'의 물꼬를 튼다. 뒤이어 신경준(申景濬, 1712~1781)과 황윤석(黃胤錫, 1729~1791) 등의 실학자들이 이 지역에서 활동한다.

조선 중엽부터 조선 말엽까지, 전북서부 지역을 무대로 활동해 이름을 남긴 학자와 사상가들의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당시의 지배담론이었던 성리학의 이념틀에서 벗어났고, 기존의 학맥에 구애받지도 않았으며, 대단히 자유로운 활동을 펼쳤다. 심지어 정여립과 허균의 경우처럼, 서얼·무사·승려·천민 등 사회적으로 소외된 세력을 규합해 혁명을 도모하기도 했다.

또한 당시 성리학에서 이단시하던 신선술(仙道) 내지는 단학(丹學) 수련의 기풍이 크게 번진 것이 이례적이고, 유불선을 넘나드는 사상적 교섭이 활발했던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조선 중후기에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 지역만의 독특한 사상·학술적 조류였다.

 

허균과 류형원 : 새만금 지역을 찾아든 시대의 이단아들

무엇보다 이 지역 출신이 아니면서도 이 지역을 찾아와 학문·사상적 활동을 펼친 인사들의 행적이 흥미롭다. 허균과 류형원이 그 대표적 인물들인데, 이들은 모두 당시의 주류 담론에 구애받지 않았다.

특히 허균은 조선 최고의 천재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으나, 자유로운 언행과 파격적인 사상 편력으로 양반사회의 기피인물이 되었다. 그는 함열과 부안 등지에서 노닐면서 남궁두를 만나 도술을 배우고,홍길동전을 썼으며, 또한 서얼·승려 등을 규합해 혁명을 도모하다가 끝내 저자거리에서 처형당하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허균이 변산에서 저술한 <홍길동전>

류형원 역시 스스로 관직에 진출하기를 포기하고, 농민을 구제할 수 있는 방안을 연구하고자 전북 부안에 내려와 은둔생활을 한 간단치 않은 인물이다. 그 또한 성리학에 구애받지 않고, 선도(仙道)는 물론 역사·지리·병법·언어학·문학 등에 두루 관심을 가졌다.

 

지식과 사상의 해방구

그런데 이런 인물들, 조선조의 사상적 이단아들이 어째서 지금의 새만금 언저리에 모여 지배담론으로부터의 이탈을 꿈꾸고 변혁을 도모했던 것일까? 거기에는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새만금지역은 당쟁과 학맥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정여립의 난 이후에 구조화된 호남 소외가 오히려 사상의 분방함을 가져왔다. 조선사회는 정치권력과 학맥이 하나로 결합된 총체적 권학유착(權學癒着) 사회였다. 당파가 곧 학맥이었고 학맥이 곧 당파였다. 그러므로 호남이 중앙의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은, 곧 당시의 지배적 학맥으로부터도 유리되었음을 의미한다. 학맥의 기반 없이는 중앙의 벼슬길에 나가는 것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던 사회에서, 입신출세를 꿈꾸었던 사람들에게 이것은 분명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러나 어느 시대나 권력을 혐오하고 틀에 박힌 사고를 거부하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이 있게 마련이다. 이들의 시각에서 보면, 중앙의 학맥과 당파로부터의 소외는 결함이 아닌 축복이었다. 틀에 박힌 이념과 당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이후 당쟁이 심화되고 성리학적 이념이 경화되어가던 조선사회에서, 지금의 새만금지역은 일종의 '사상적 해방구'가 되었다.

이곳에서의 활동이 벼슬을 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로운 학문과 사상을 펼치기에 더 적합한 지역도 없었다. 호남평야의 경제적 풍요도 지식인들이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로운 활동을 전개하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허균이 부안 우반곡에 들어와 큰형인 허성(許筬)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이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아우(허균)는 마침내 탈 없이 파직되어 아주 원하던 대로 되었습니다. 즉시 서울 도성으로 돌아가서 형님과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잠을 자는 즐거움을 누려야 마땅하겠습니다만, 구설 때문에 너무 많이 곤란을 겪은 터라 먼 곳으로 숨어 들어가서 그 곤액을 없애볼까 생각합니다. 남행을 결심하고 북쪽을 바라보니 마음이 더욱 슬퍼집니다. 변산 남쪽 기슭에 우반곡(愚蟠谷)이 있습니다. 그 안이 기름지고 평탄하여 물과 바위의 풍취가 아름답습니다. 두 사람의 이씨를 데리고 가서 집터를 정해 놓으니 소나무와 대나무가 울창하고 시내와 계곡이 말쑥하여, 실로 은거하는 사람이 살 만한 곳입니다. 지역이 바닷가라 물고기나 조개의 생산이 풍부하고, 소금을 굽고 곡식을 심으면 아무리 흉년이 들더라도 사람이 죽을 리 없습니다."

 

호민(豪民)의 땅, 징개맹개

새만금지역에서 변혁적인 사상이 제기된 다른 이유는, 이곳에 소외된 민중의 고단한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엽 이후 이 일대에 이름을 남긴 지식인들은 당시의 권력과 지배이념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관료와 사대부들이 도학과 예의를 운운하면서 정작 정치권력에만 관심을 두고 백성을 가혹하게 수탈하는데 분개했다.

이들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피폐해진 조선의 현실에 고뇌했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할 사회변혁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한 예로 허균은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것은 오직 백성뿐이다"라고 하며, 은연중 백성들의 저항의식에 기대를 걸었다. 그는 백성을 순종적인 '항민(恒民)' 원망하기만하고 저항하지 못하는 '원민(怨民)' 현실의 불만을 응축하고 있다가 시기를 만나면 분연히 일어나는 '호민(豪民)'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말한다.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이 두려워할 줄 모르고 우리나라에 호민이 없다고 여긴다"고 경고했다.(성소부부고』「호민론)

서얼과 승려 등 소외된 세력을 규합해 혁명을 준비하던 허균이 호남에 자주 머문 것은, 그가 이 지역을 호민(豪民)의 땅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전북서부의 드넓은 평야에는 민초들의 저항에너지가 어느 지역보다 강렬하게 응축되어 있었다. 허균은 바로 이 지역에서홍길동전을 저술하고, 동지들과 돌려 읽으며 부당한 차별과 탐학에 대한 저항의식을 나누었다고 추정된다. 훗날 혁명에 실패해 심문을 받을 때, 허균의 동지들은 그가 부안에 머물면서 많은 추종자들을 끌어들었다고 자백했다.

비록 허균처럼 혁명을 도모하지는 않았지만, 류형원이 부안을 찾은 이유도 이곳이 도탄에 빠진 농민들의 삶터였기 때문이다. 그는 농민들의 현실을 몸소 겪으며, 조선사회를 근원으로부터 개혁할 방도를 모색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모두 책상물림이기를 거부하고 현장으로 들어간 비판적 지식인들이었던 셈이다.

 

글쓴이 김성환 교수

현 군산대학교 철학과 교수. 군산대학교 문화사상연구소장과 새만금문화연구센터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범한철학회 편집위원장, 인문콘텐츠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저서로는 회남자, 개벽과 상생의 문화지대, 새만금문화권(공저), 한국인의 생사관(공저) 등 십여 권이 있다.

출처: http://jbgokr.tistory.com/79


위 글에서 언급된 기축옥사(己丑獄事, 정여립의 난, 1589)1755(영조 31) 소론 일파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나주 객사에 영조와 노론을 비방하는 내용의 괘서가 내걸린 나주괘서 사건이후 모산촌의 피해가 컸습니다. 정여립의난, 나주괘서사건 모두 정적 제거 목적으로 조작된 사건인데 모강공4남 청계공이 정여립아버지 제사날 쌀을 주었다는 죄목으로 희생되고 모강공 고손 상운이 숙종때 영의정, 그 아들이 영조때 우의정 좌의정을 한 만암류봉휘선조가 실각되기 전까지는 좋은시절이였으나 모강공 고손이후 소론가문으로 실학자 류형원 류수원 선조등이 등장합니다.

사학계에서 고부 권극중을 비중있게 보는 것은 진사급제하고 관직이 내시교관 세자익위사세마이며 학문에만 힘썼고 입신출세와 담을 쌓고 성리학에서 배척하던 신선술(仙道) 단학 수련의 일가를 이루어 유불선을 넘나들던 사상가인 권극중이 류준을 동향인으로 천거한 글을 남겼고 반계 류형원이 영암 모산에서 권극중과 단법을 논하고 고부 달천에 류빈을 문인으로 두였고 류빈은 류용공의 아들 류몽삼의 증손자로 선대 류용공과 류준의 묘비를 찬한 류준 문하생입니다.

약재공 2남 좌의정 봉자휘자 만암은 융희2(1908)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 건의로 복권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의 시대로 서원배향이 어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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