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서울권종친회 류영렬회장님 기사를 소개합니다.
출처 : http://www.sisanewsmaker.co.kr/sub_read.html?uid=6112
진정성있는 사회 공헌활동으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하며
도덕사회의 참 리더, 어른 [도산 류영렬 회장]
차정윤ㅣ 기사입력 2014/10/12 [17:35]
도덕사회의 참 지도자
[시사뉴스메이커 차정윤 기자]지난 4월 29일 600년 교육의 현장이자 우리 정신문화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유림의 중심인 성균관에서 제30대 성균관[관장 서정기] 부관장 취임식이 있었다. 이날 부관장(조선시대직제로 종3품의 부사성에 해당)으로 선임된 도산 류영렬 부관장은 도덕부흥운동과 사문진작에 앞장서온 이시대의 정신적 숨은 지도자다. 그는 일찌기 지역사회 봉사를 통하여 옛 시흥군(고려시대의 금주(衿州) 지역인 한강 이남의 금천현지역 향토문화사적을 발굴 문헌적 고증을 통해 향토사를 바로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향토사사적비를 여려곳에 세워 올바른 향토사를 알려 내고장의 우수성을 인식하게 하여 애향심과 긍지를 일깨우는 일에 앞장서왔다. 뿐만아니라 복잡하고 다양한 농산물 유통문제를 농안법개정을 통하여 개선운동에 헌신하였고 숭조목종의 종친운동을 통해 충효정신을 고취시켜온 문화류씨 가문의 종문지도자이며 공맹사상을 숭앙하는 유학계의 중진이다. 뿐만 아니라 임란공신충의선양회회장을 맡아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지켜낸 임란공신 1만2천명의 충의를 선양하는 호국공원을 만들어 호국정신을 후세에 심어주려 노력을 하고 있다. 도산옹은 현대시,시조,한시의 세 장르를 구사하는 보기드문 시인이기도 하다. 틈틈이 동네에 공원이나 골목길, 등산로 등에 꽃을 심고 국토해양부와 서울시의 지원을 받아 시를 적은 액자, 또는 벽화를 그려 문화마을 만들기에 앞장서온 새마을지도자이기도 하다. 그의 걸어온 길를 살펴보니 때로는 빛이 되었고 때로는 소금같은 역할을 한 이시대의 참 지도자요 존경받는 학덕을 겸비한 어른이었다. 다양한 경력과 직함을 가진 류 회장의 살아온 날들이 궁금해 따뜻한 가을 햇살이 비치던 날 그의 집을 찾았다.
시,서,화의 향이 배인 도산옹
이상하게 일이 꼬여 약속시간인 오전 11시를 조금 넘겨서야 류 회장의 집에 도착했다. 몇일 전부터 취재를 하고 싶다고 전화로 인터뷰를 청하였으나 “늙은이의 얘기라 별로 재미있을 것도 없고 유익한 얘기거리도 안된다”며 에둘러 사양하는 그에게 기자는 ‘그럼 차 한잔 얻어 마실 수 없겠냐’며 애써 잡은 약속이었는데 정작 지각을 하였던 것이다. 늦은 것이 민망해 겸연쩍게 웃으며 류 회장을 뵈니 그는 괜찮다는 표정으로 기자를 편안하게 맞으며 서제로 안내했다. 그의 다양한 직함과 사회적 지위에 지레 겁을 먹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산재 일층에는 “도산시화갤러리”가 입구에 자리 하였고 자작 시 작품이 여러점이 걸려 있었고 공들여 가꾼 많은 꽃들이 잘 어우려져 오가는 행인들의 발걸음을 잡는다.“꽃보며 시읊으니 술병들고 님이 앉네. 시화의 향기속에 청한을 즐기려니 어느새 동산 명월이 잔가를 거닌다” 시조 한수가 먼저 시선을 잡는다.
세상에 ...건물 옥상에 이런 화원이
옥내 계단으로 오르려니 곳곳에 놓아둔 화분과 액자들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의 취미가 꽃을 가꾸는 것이라 들었기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집 구경을 좀 해도 되겠냐 물었다. 화분을 유심히 보던 나를 눈치 챈건지 류 회장은 나를 위층으로 이끌었다. 류 회장의 집은 건물의 4층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가 안내한 5층 옥상에 꽤 넓은 터에 꾸민 정원은 그의 취미를 한껏 살려 멋스러운 화단에 온갖 꽃들이 늦은 가을 햇살을 담뿍 받으며 활짝 피어 맑은 향기와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사면의 벽에는 아침에 새로 핀 나팔꽃들이 생글거리며 나를 반기는 듯 하였다. 동리사람들은 그를 “나팔꽃 할아버지”라 부른다. 등산로, 골목길에 나팔꽃을 많이 심어 화향과 꽃의 아름다움을 동네 분들과 함께 나누는 정있는 노인이기에 붙여준 애칭이리라. 도산옹은 돈안드리고 하는 자선사업으로 제격이라 말한다.
때로는 동리 어린이 집, 유치원 어린이들이 꽃 구경하러 단체로 찾아오기도 하고 가끔 방송국에서 취재하여 가기도한다고 설명한다. 쓸모없는 공간인 옥상공터에 꽃이나 채소를 가꾸는 일은 도시의 마화와 탄산까스 정화에 유익하고 시민정서 순화에 도움이 되기도 한다. 이는 정부의 권장사업이기도 한 화단 가꾸기를 류 옹은 20여년전부터 이런 일를 꾸준히 하며 살아왔다. 또 다른 문을 열어 안내한 곳은 묵향이 가득한 서예작업실이었다. 나는 류 회장은 시,서,화를 즐기는 여유가 인격에 배어있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가 가꾼 꽃들을 보고 있자니 혹여나 실수하지 않을까 긴장했던 마음들이 풀어져 류 회장의 집을 방문한 목적을 잊을 뻔 했다.
그는 나를 4층의 서재로 안내했다. 사회 전반에서 다양한 일을 하고 있는 지식인답게 서재에는 온갖 서적과 자료들이 빼곡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윽한 고서의 서향이 풍기는 서재는 동서 고전들로 채워져 있었다. 희귀한 고서들도 보여주었다. 책상 위에는 컴퓨터도 한 대 놓여져 있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다. 내 부모님도 그렇지만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팔순을 바라보는 노령에도 컴퓨터를 사용할줄 아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한 탓에 놀란 눈으로 컴퓨터도 사용하시느냐 물으니 “요즘 젊은 사람들처럼 능수능란하지는 못해도 필요한 일을 작업할 수 있다”며 대수롭지 않은 일로 말한다. 그는 문화류씨포럼,금천문화포럼 등 홈페이지 2건, 카페 5건 등을 개설 운영하고 있는 신세대 할아버지이다. 녹차를 우려낸 차 한 잔을 사이에 두고 그와 마주 앉으니 어느새 녹차의 향기가 나를 조금 편안하게 하여 부드러운 대화를 할수 있었다.
성천 류달영 선생의 큰 가르침 ‘호학(好學), 친교(親交), 위공(爲公)’
우선은 그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궁금했다. 도산 선생은 어려서부터 고향에서 집안 당숙어른(도은 류근태상생)이 차리신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초등학교,중학교를 다니며 틈틈이 천자문 동몽선습 등 초학을 거쳐 중용,대학,맹자 등 동양고전을 15세 전에 읽었다. 새시대 신사조에 적응하려면 학교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판단 생각을 바꿔 한문공부를 접어두고 현대 학교교육에 전념하였다. 원래 대학교수가 꿈이던 청년 도산은 밤낮으로 틈만 있으면 책을 가까이 하였다. 주상야학(晝商夜讀) 그는 호학(好學)의 천성이 있었던건가?
하지만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인생이 더 재미있다고 누가 말 했던가. 병역을 마친 그는 양평 중고등학교에서 근무 사회생활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에게는 서울의 진출이 꿈이었다. 또다른 변화를 찾으려 상경, 한일 유리섬유주식회사에 입사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서울에의 객지생활은 경제적 안정이 우선이라 생각했다. 삼남매를 둔 가장에게 박봉으로는 생활 안정이 어려웠다. 장래가 안보였다. 돈 버는데는 장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사가 빠르겠다고 판단한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상업계에 도전했다. 영등포에서 농산물유통사업을 시작 성원상회를 차렸다. 운이 좋아서인지 성실해서인지 장사는 잘되었고 동류업계에서 손꼽히는 성공 상업주가 되었다. 영등포중앙청과시장 회장, 전국농협중도매인 연합회장등을 거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CEO의 길을 착실하게 걸었다. 그렇게 어려운 시장경쟁에서 안정된 자리를 잡고 보니 나이는 훌쩍 흘러 류 회장이 40대에 접어들었다. 40세가 넘어부터 좋은 강의를 따라다니며 청강하였고 동서인문고전을 두루섭렵하였다.
그는 항상 종친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차류대종회 사무총장에 취임 성천 류달영 선생을 모시게 된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인연을 만난 것이다. 류 회장의 말을 빌자면 성천 류달영 선생은 참으로 훌륭한 인격을 지닌 학자이자 국민운동가 중 한 사람이었다. 류영렬 회장과 같은 문화류씨 종친으로 문중의 큰 지도자이기도 했던 류달영 선생을 모시고 류 회장은 종친회의 사무총장을 맡아 활동하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곁에서 많은 가르침도 얻었다고 한다. 성천아카데미에 나가 동서양의 고전이나 현대·미래 강좌들을 들으며 늦게나마 다시 배움의 즐거움을 누렸던 것도 그즈음이다.
사람은 만남으로 자란다.
성천 선생은 “인생은 만남으로 자란다. 좋은 스승을 만나면 좋은 인격을 길러 잘 자라고 좋은 사람을 만나면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 크게 발전한다”며 항상 호학(好學), 친교(親交), 위공(爲公)을 강조했다. 그는 성천아카데미부회장,성천아카데미동문회부회장을 지내며 성천선생을 도왔다. 이미 고인이 됐지만 9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그 분의 말씀을 듣고자 저명한 인사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어, 강의를 하는 강당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비곤 했다니 그 명성을 알만 하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다. 나면서부터 가족, 이웃,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살아가게 된다. 모두가 저마다의 역할을 가지고 태어나기에 이 세상에 필요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 내 오랜 생각이다. 나는 아직도 나의 역할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지는 못하였지만 지금도 여전히 성천 류달영 선생님의 호학과 위공정신을 실천하고 사회를 위해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려고 노력 중이다. 또한 문화류씨 종친회 사업을 통해 나의 뿌리이고 근본인 조상을 모시는데 모자람이 없이 자손의 기본 도리를 다 할 수 있다면 나에게 주어진 역할의 절반은 잘 해내었다고 스스로를 위안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그의 말에서 류영렬 회장이 성천 선생에게 큰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청천 병력의 날벼락 위암선고
그것은 새로운 인생출발을 알리는 신호
지금은 누구나 인정하는 지위에 있는 류영렬 회장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잘나가던 58세때 어느 날 검진이나 받아볼까 해서 들렸던 병원에서 청천벽력 같은 위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것이다. 당시 속설은 수술하면 암은 자꾸 번진다고 하여 3년간 수술을 않고 민간요법으로 치료하며 버텨왔다.
병원은 수술뿐이라지만 수술이 싫어 민간처방이 권하는 약을 썼다. 권하는 약은 많기도 하였다. 그러나 류 회장 내외만 알고 있기로 하고 본인이 암환자라는 사실을 주변에 퍼트리지 않고 태연하게 일상대로 살았다. 류회장이 머지않아 죽을 것으로 알고 있는 가족들은 한이라도 풀어드릴 겸 한갑잔치도 하여 주었다. 한갑잔치가 사라진지 오래다. 주변에선 칠순잔치도 안하는 판인데 웬 한갑잔치냐 하고 의아해하기도 했다. 다행히 류 회장의 2남1녀 자식들이 모두 류회장의 한갑전에 성혼을 했을 때였다.
암환자의 고통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나이인 61세, 류 회장은 고생줄 인생을 벗어나 여유를 즐길 노후인데 인생끝장이라 생각하면 운명의 장난은 더욱 야속했다. 35년의 숙원사업인 사단 법인 전국농협중도매인 연합회를 설립등기하고 2000년 3월15일 축제속에 전국총회를 열었다. 숙원 성취의 회원들 분위기는 뜨거웠고 애써 더 격려를 했다. 그는 숙원사업을 성취하고 무사히 임기를 채웠으니 회장을 그만하겠다고 사임한다고 했다 그렇게 어려운 조건속에서 사단법인을 해놓고 그만둔다는 것은 말도 안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받아 주지 않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모든 일을 박수로 가벼이 끝장을 쳤다. 그때 도산은 2000년 5월3일 수술일자를 받아놓은 상태였다. 앞이 캄캄했다. 암이 걸렸다고 말할수도 없고 두달후 수술받는다고 이야기하기도 싫었다. 도산은 화장실에 가서 실컷 울었다. 그리고는 다시 회의장으로 들어와 수락 연설을 했다. 그리고 5월3일 수술을 했고 그해 7월 임시총회를 열어 연합회장직을 중도 사임했다.
60평생 앞만 보고 달리며 인간답게 살려고 노력한 류 회장은 벌려놓은 일도 많았다. 모성재 준공, 8대10위 궐향선조 봉안, 김제에 벌려놓은 정신공 장경공제단 공사, 전국중도매인 연합회 사단법인 설립 완결 등 손을 땔 수 없는 중요한 일이다. 포기해서도 않될 소중한 일들이었다. 그가 흠모하는 문간공 할아버지의 지방을 써 벽에 붙여놓고 “할아버지 저좀 살려주십시오. 저에 맡겨진 일을 기어이 마치도록 보살펴 주십시오”하고 조석으로 벽안기도를 올렸다.
기복을 싫어해 천주교계통의 중학교를 다녔지만 세례를 받지 않은 그였지만 죽음앞에선 그렇게 약해졌다. 그러나 숙명앞에는 장사가 없다. 아내의 간곡한 권고대로 2000년 5월3일 그는 위암 절제수술을 아산병원에서 받았다.
구멍 뚫린 술잔
시인 류 영 렬
소양강변을 달리는 기차에서
구멍 뚫린 술잔에 술을 따른다
한잔 술 모자라서 강물 떠서 잔을 채우고
어느새 비운 잔에 푸른 하늘 또 따른다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붉은 단풍 띄워 놓고 마시는 가을
한잔 두 잔 수 삼배인데
아직도 흰 머리털 붉지 않으니
허무를 마신 건가
잃어버린 허상(虛像)을 가득 그린 잔
허무(虛無)를 삭이던 산달이 잔가를 거닌다
암을 이겨낸 비법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지금은 전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차고 건강해보이는 그이기에 병마와 싸워 이긴 비법을 살짝 물었다. 그는 “처음 병명을 듣고 며칠간은 우울증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모든 의욕을 잃고 지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인생은 60부터라 했다. 나는 고작 새로운 한살이었고, 아직도 내 앞에 남은 날이 많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 바깥 활동은 잠시 접어두고 먼저 위암 수술을 받았다. 나는 아내의 간곡한 권고로 암의 큰 덩어리를 잘라내고 암의 잔병(殘兵)과의 싸움이 시작한 것이다. 주변에서 누군가가 암을 이기려면 3가지를 변화 시켜야 한다고 했다. 식생활, 환경 그리고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사업도 정리했다. 나는 아내가 싸준 도시락과 빛깔 바랜 흘러간 시집 한권을 배낭에 넣고 이 산속 저 물가를 옮겨다니며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과 친해지었다. 봄이면 꽃향기를 따라 여름이면 우거진 녹음을 따라 가을이면 흩어진 낙엽을 밟으며 자연의 숨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힘이 들면 주저앉아 가방 속에 든 시집을 꺼냈다. 좋아하는 시를 몇 번이고 읽고 나면 요동치던 마음도 진정되고 거친 숨도 가라 앉곤 했다. 꽃을 가꾸노라면 잠시 모든 잡념을 잊기에 족하다. 심심풀이로 습작도 해보고 큰소리 내어 읊기도 하며 이렇게 자연에 취한 시인이 되어 버렸다.”며 자연 속에서 시와 함께 몸과 마음을 다스렸음을 털어놓았다. 그는 투병을 하면서도 조금도 하던 일을 포기하지 않고 일을 마무리해 냈다고 말했다.
위암이 시인을 만들었다.
류 회장이 그렇게 써내려간 시들이 한편 두편 모여 얇은 연습장을 채울 때 쯤 우연찮게 제주도 여행 중에 쓴 ‘억새꽃 춤추는 들녘’을 예술세계(사)에 투고한 것이 당선되어서 그는 시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위암과의 싸움에서 이긴 내게 세상이 주는 선물과도 같은 사건”이라는 그의 말처럼 운명이 이끌어 준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도산은 ‘달을 놓인 새벽 별’ 등 수권의 시집을 냈다. 시비도 몇곡에 서있다. 그는 현대시, 시조, 한시의 벽을 넘나들며 시의 세계를 종유(從遊)한다. 열상시사회장 성균관 한시수련원 부원장을 역임했고 현 한시협회이사이기도 한 도산옹은 한시계의 중견 작가의 위치에 있다. 지난 10월5일 서울시주최 조선조과거재현전국백일장에 고선관으로 활약했고 지방주최 백일장에도 자주 참여한다. 도산옹은 백일장에 지어 낸 찬조시 한편을 보여 주었다.
願道德復興
道山 柳暎烈
禮義之邦本我東
漸衰道德慨歎中
人倫輕視西風染
聖訓勤修古俗崇
物質超然天性守
孝忠勸獎大明通
願言紀序回興極
弘益精神萬歲充
예의의 나라는 우리가 근본인데
쇠퇴하는 도덕에 무두가 개탄하네
인륜을 경시하다 서풍에 물들었고
성훈을 근수하는 옛풍속 숭앙하세
물질에 초연하여 천성을 지키리요
효충을 권장하면 대명으로 통하리라
원컨대 기서의 회복에 힘을 쓴다면
홍익의 큰 정신이 만세에 충만하리
덤으로 사는 인생을 세상과 나누는 열두가지 이름을 가진 어떤 시인
암수술은 그로부터 벌써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는 “앞으로 얼마나 더 주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덤처럼 주어진 그 시간들을 가족과 이웃과 정을 나누며 의미있는 인생사를 꾸미려고 노력해왔다”고 덤덤하게 말하는 선생에게는 그 결과라고 말하기는 뭣하지만 지금 열 개가 넘는 또 다른 직함들이 따라 다닌다. 임란공신충의선양회 회장, (사)전국농협중도매인연합 명예회장, (사)숙모회이사 ,류씨서울권종친회장, 동양문화연구소 상임고문, 성균관유도회고문, 한국성씨연합회고문, 고려역사선양회 이사, 성균관 한시수련원 부원장, 대한민국원로서예가 협회회원, 난정필회 회원, 열상시사회장, 청시회장, (사)한국한시협회 이사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독산동을 문화 마을로 가꾸다.
그는 그가 살고 있는 독산동을 문화가 숨 쉬는 살고 싶은 마을을 만들고저 하는 바램에 주민들과 호흡하며 스스로 앞장서 문화마을추진협의회를 조직 오늘까지 이끌고 있다. “뒷동산을 만수천공원으로 만들고 벽화거리도 조성하는 등 동민이 즐겨찾는 휴식과 건강을 다지는 안식처로 잘 가꾸어 놓았다. 그뿐인가 옛날부터 전해오던 당제(堂祭)를 {산사랑 물사랑 축제}로 새롭게 각색 자연에 감사하고 동리 안녕을 비는 행사로 변형하여 동민화합과 친목을 다지는 연례행사로 자리매김하여 수백명이 모여 즐기는 잔치날이 되었다. 체육공원에 독산동 향토문화사적비를 세웠고 시흥대로 독산동고개에 반유구화역유래바를 세웠는가하면 도산의 시비, 도산소장 아름다운 고서노상전을 구청에서 설치하여 주었다. 이렇게 회원과 만든 도시공원조성사업이 높이 평가되어 서울시에서 1등, 국토해양부 평가에서 전국 2등을 하는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이렇게 변화된 마을을 볼 때마다 보람도 두 배가 되고 기쁨도 두배가 되었다.”고 말하고 그것이 암 투병에 큰 약효를 발휘했다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이렇듯 들으면 웃음이 나는 이름이 있는가 하면 일이 안풀려 고민하는 일도 있다. 그는 임란공신충의선양회장이다. 30만 왜군을 무찌르고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호국하신 임란공신의충혼을 기리는 임란공신호국공원 조성을 하려는 일이다. 여러 기관을 찾아 건의하였고 국회에 입법청원도 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지금 청와대에 청원을 준비중이다. 류회장은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인식을 심어주고 건전한 호국정신을 심어 주어야 하는 시대적 사명감에 무거운 어깨로 열정을 쏟고 있다.
독립기념관 규모의 임란호국공원의 설립운동
류 회장은 “국가는 3.1독립운동과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하신 애국지사들은 보훈의 예를 갖추면서 최대국란인 임진왜란을 승전으로 호국하신 1만2천명의 임란공신은 420년(7주갑)이 넘도록 향화를 받들려 노력하지 않고 있음을 선영앞에 송구스럽게 여겨야 한다.”며 “30만 왜적을 물리친 위대한 공적은 몇몇 명장과 충신들만의 힘으로 이루어 진 것만은 아니다. 역사 속에 묻혀버린 무수한 임란호국용사가 있었기에 斥日勝戰은 가능했다. 그래서 1만2천명의 호국영령을 한자리에 모시고 향화를 올리며 추모하려는 것이 우리들의 꿈이다. 당시 임진왜란을 평정하지 못했다면 식민통치는 그때부터 시작됐고 오늘의 위대한 조국은 있을 수 없었다. 선현의 피와 고난으로 지켜낸 자랑스러운 조국이다. 현행 보훈 법에서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을 하신 분까지는 국가 유공자로 보훈 법에 의해 보호 받지만 같은 왜적을 물리친 임란공신은 보훈 법에서 제외되어 있다.”고 피력했다.
어려운 때에 성균관은 600년전통을 되살려야
또 그가 가진 수많은 이름 중 가장 최근에 얻은 이름은 바로 ‘성균관 부관장’이다. 유교는 곧 인륜(人倫)과 인(仁)을 중시하는 철학으로 우리민족문화의 근저(根底)이다. 우리 전통문화의 뿌리는 유교에서 시작하였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정신문화의 밑바탕에는 유교의 충효사상이 박혀있다. 심경(心經)은 경(經)과 의(義)를 생활의 요체로 강조한다. 즉 경이직내(敬以直內)와 의이방외(義以方外)가 그것이다. 항상 안으로는 공경하는 마음을 법으로 하고 밖으로는 신의를 중시함을 행동의 법으로 하라고 가르쳤다. 성균관이 한때 어려움이 들리던데 요즘은 잘되어 가느냐고 물으니 그는 기자에게 부관장으로 국민과 유학계앞에 부끄럽고 민망하게 생각한다고 말하고 모든 종교계가 그렇듯이 발전하는 과정의 한 진통으로 보아 달라고 했다. 그는 금년 5월에 취임했다.
근 600년을 이어온 성균관의 3대 기능으로는 “석전대제를 통한 유풍진작, 명윤강설을 통한 인재양성, 알성시를 통한 인재등용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알성시가 복원되지 않았다.”고 설명하며 알성시 백일장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귀띰했다.
지금 성균관은 어렵다. 일부지도들의 도를 잃은 처신으로 국가와 사회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있다. 이성을 되찾아 슬기로움을 발휘할 때이다. 동양고전에 밝고 맑은 시성을 가진분으로 전학과 전의를 두루 거친 시인 전통 유학자인 도산 부관장의 역할이 기대된다.
류 회장은 우리의 정신문화의 근간인 유교를 중요시해 성균관 출입을 즐겨하는 편이었는데 그 와중에 시인으로써도 한시에 관심이 많아 한시협회의 임원직도 지내게 되었다. 우리의 전통 사상과 문화의 계승·발전에 조금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과, 속에서 우러나와 배우고 즐기고자 마음이 있어 가까이 하였는데 덜컥 부관장이라는 자리까지 맡게 되었다는 그는 “부담감은 내려놓고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좋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한다”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든든함에 우리 유림문화의 발전된 미래를 기대해 본다.
노인의 항해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둘 사이 놓인 찻잔의 녹차는 이미 식은 지 오래 되었다. 류 회장에게 아직 궁금한 이야기는 많았지만 이런 저런 질문들을 뒤로하고 마지막으로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행복하냐고 물었다. 그는 겸연쩍게 웃으며 “남들을 위해 사회를 위해 봉사하며 살고 싶다 열심히 얘기했지만 정작 나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한 노인”이라 대답했다. 마지막까지도 예상했던 답안을 피해가는 그다.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그이기에 남을 위한 어떤 활동 중의 하나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누구나 꿈꾸는 평범하면서도 사회생활의 기본이 되는 핵심을 파고드니 또 다시 감탄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여전히 곁을 지켜주는 아내와 2남1녀의 자녀와 3남4녀의 손자손녀들이 모여 한 달에 한번식 식사자리를 가진다. 봉사할 때도 물론 크나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지만 그 시간이 주는 행복에 비할 수는 없을 것 같다.”며 노부부만 사는 조용하던 집안이 북적북적 활기가 넘쳐흐르는 시간, 이러한 시간을 통해 나는 자랑스러운 아버지, 할아버지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할 용기를 얻는다는 그의 말에서 끝없이 도전하고 베푸는 그 마음속 힘의 원천이 보이는 듯 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류영렬 회장과 마주 앉은 시간이 내게도 내일을 살아가는 힘이 될 것 같다. 아직도 넘치는 열정과 믿음이 가득한 그의 인생은 지금부터 또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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