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대전 시립 박물관 특별전 관람

ryu하곡 2016. 11. 23. 13:53

문화류씨대종회 추계총회에 갔는데 점심 때 류용환 관장님을 만나 대전시립박물관으로 갔다. 관장님께서 안동권씨와 양반의 역사전시회 설명을 자세하게 들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안동권씨중에 1344년 권부(權溥) (대승공10세 류승 딸) 묘지명에 대승공 류차달이야기가 나오기에 혹시 서문이 전시되어 있는가? 보았으나 볼 수 없었다.

권부의 처 묘지명이 중요한 이유는 1340년 대승공12세 류보발 묘지명에 대승공이 등장한 4년후에 안동권씨 가문에서 류차달을 기록했다는 점이 대승공 활동시기에서 약 400년후 이야기입니다.

20171 30일까지 안동권씨특별전을 한다고 하니 며느리나 어머니가 안동권씨 이신분은 대동하여 한번 가 보십시오.

성화보

  설명하신 류용환 관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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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부처류씨묘지명(權溥妻柳氏墓誌銘)

 

변한국대부인 류씨(卞韓國大夫人 柳氏 : 1265~1344)의 본관은 시령(始寧 : 지금의 황해도 신천군 문화면)으로, 아버지는 지첨의사사(知僉議司事) 정신공(貞愼公) ()이고 어머니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홍진(洪縉)의 딸이다.

13세에 시집와서 영첨의사사 영가부원군 국재공(領僉議司事 永嘉府院君 菊齋公) 권부(權溥)의 부인이 되어 67년 동안 해로(偕老)하였다. 1344(충혜왕 복위5)에 별세하니 변한국현신화숙대부인(卞韓國賢信和淑大夫人)이라는 시호를 특별히 하사하였다. 슬하에 54녀를 두었다. 묘지는 사위인 추성양절좌리공신 삼중대광 판삼사사 영예문관사 상호군(推誠亮節佐理功臣 三重大匡 判三司事 領藝文館事 上護軍) 이제현(李齊賢)이 지었고, 증손인 선무장군 합포진변만호부만호 봉익대부 우상시(宣武將軍 合浦鎭邊萬戶府萬戶 奉翊大夫 右常侍) 권용(權鏞)이 글씨를 썼다

 

 

변한국대부인 류씨(卞韓國大夫人 柳氏) 묘지명 및 서문

 

자서(子壻) 추성량절 좌리공신 삼중대광 판이동사 영예문관사 상호군(推誠亮節佐理功臣三重大匡判二同事領藝文館事上護軍) 이제현(李齊賢)이 찬()하고, 증손(曾孫) 선무장군 합포진변 만호부만호 봉익대부우상시(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府萬戶奉翊大夫右常侍) 권용(權鏞)이 전자(篆字)로 썼다.

시령 류씨(始寧柳氏)는 국초(國初)로부터 저명한 성씨가 되었다.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이 있었는데 태조(太祖)를 도와 공이 있었고, 그의 7세손 문간공(文簡公) 공권(公權)은 문학으로 대정(大政)에 참여하였고 우복야(右僕射) ()을 낳았으며, 복야공이 시중 문정공(侍中文正公) 휘 경()을 낳았으며, 문정공이 지첨의사사(知僉議司事) 정신공(貞愼公) ()을 낳았는데,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홍보()의 딸에게 장가들어 대부인을 낳았다.

13세에 권씨(權氏)에게 시집가서 지금 영첨의사사 영가부원군(領僉議司事永嘉府院君) 국재공(菊齋公)의 아내가 되었다. 구고(舅姑)에게 효도하고 친척에게 인후하며 자손을 예의로 가르치고 비첩(婢妾)을 의리로 부리며, 얼굴에 분()을 바르지 않고 몸에 비단옷을 입지 않았으며, 무당여승비는 일 등을 드물게 말하고, 원금과 이자 계산하는 것을 마음에 부끄럽게 여겼으며, 국재공과 동거(同居)한 지 67년 동안 시종 조그마한 거역도 없이 화열(和悅)하였다. 지정(至正) 4(1344) 8월에 병을 얻어 임술일(壬戌日)에 훙()하였는데, 왕이 부음(訃音)을 듣고 유사에게 명하여 장사를 돕게 하매 국재공이 사양하니, 왕이 특별히 변한국 현신화숙대부인(卞韓國賢信和淑大夫人)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그해 9월 갑진일(甲辰日)에 덕수현 발송원(德水縣鉢松原)의 북쪽에 하관(下棺)하니 예에 따른 것이다.

아들 준()은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이요, 종정(宗頂)은 출가하여 조계종 도총섭대선사(曹溪宗都摠攝大禪師)가 되었고, ()는 지첨의사사(知僉議司事), ()는 계림부원대군(鷄林府院大君)인데 덕릉(德陵)이 양자로 삼아 종부시(宗簿侍)에 부적(附籍)하였고, ()은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세 아들이 모두 원 나라의 조서(詔書)를 받아 준과 겸은 모두 만호(萬戶)가 되었고 후는 군공(郡公)이 되었다.

 

맏딸은 밀직 우부대언(密直右副代言) 안유충(安惟忠)에게 시집갔고, 둘째딸은 판삼사사(判三司事) 이제현(李齊賢)에게 시집갔고, 셋째딸은 종실(宗室) 순정대군(順正大君) 왕도(王璹)에게 시집갔고, 넷째딸은 종실 회안대군(淮安大君) 왕순(王珣)에게 시집갔다. 세 사위 또한 원 나라의 조서를 받아 안유충은 만호요 이제현은 단사관(斷事官)이요 왕도는 몽고의 한림학사(翰林學士)이다. 내외의 모든 손자와 증손자가 남녀 모두 1백여 명이므로, 매양 세시(歲時)에 모일 때면 수레와 일산이 문을 메웠고 주자(朱紫 관리의 등급을 나타내는 옷의 빛깔로 고관을 가리킨다)가 뜰에 가득하였으며, 현손들이 부인의 앞에서 채화(綵花)를 희롱하는 일이 있기에 이르렀다. , 성하도다! 어찌 선을 쌓은 보람이 아니겠는가? 명은 다음과 같다.

내가 권공(權公)의 문생일 뿐만 아니라, 공을 장인이라 부르고 공은 나를 사위라 하는도다. 변한국 대부인이 훙하매 공이 나에게 명하여 명()을 지으라 하였도다. 느끼어 생각나는 회포를 이 글에 붙였으니 친혐(親嫌)을 스스로 헤아리지 않았도다. 그러나 부인은 능히 구고(舅姑)에게 효도하고 남편에게 온순하여,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같이 하면서 함께 팔순(八旬)을 살았고, 위의(威儀) 있는 자손이 수없이 많도다. 살아서는 작명(爵命)을 받았고 죽어서는 시호(諡號)를 받았도다. 일생의 애환(哀歡)이 곽분양(郭汾陽)과 같았으니, 나의 글이 아니라도 으레 끝없는 세대에 꽃다운 이름을 전하리라.

 

卞韓國大夫人柳氏墓誌銘 幷序

子壻推誠亮節佐理功臣三重大匡判三司事領藝文館事上護軍李齊賢曾孫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府萬戶奉翊大夫右常侍權鏞書篆

始寧柳氏自國初爲著姓有大丞車達者佐太祖有功其七世孫文簡公諱公權以文學參大政生右僕射諱澤僕射生侍中文正公諱璥文正生知僉議司事貞愼公諱陞娶同知樞密院事洪諱縉之女是生大夫人年十三歸權氏爲今領僉議司事永嘉府院君菊齋公之室孝舅姑仁親戚敎子孫以禮使婢妾以義不御鉛華不服文綉巫尼卜祝罕言於口子母利息恥計於心與菊齋公居六十七年終始無小忤雍雍如也至正四年甲申八月感疾壬戌薨王聞訃命有司襄葬事公辭焉則特贈諡卞韓國賢信和淑大夫人其年九月甲辰窆于德水縣鉢松原之北禮也男曰準吉昌府院君曰宗頂出家爲曹溪宗都摠攝大禪師曰皐知僉議司事曰煦雞林府院大君德陵養爲子附籍宗簿寺曰謙僉議贊成事三子受元朝宣命謙皆爲萬戶煦郡公女適密直右副代言安惟忠次適判三司事李齊賢次適宗室順正大君王璹次適宗室淮安大君王珣三壻亦受宣命惟忠萬戶齊賢斷事官璹蒙古翰林學士內外諸孫及曾孫男女一百有餘人每歲時內集軒蓋塡門朱紫盈庭至有玄孫之戲綵于前者嗚呼盛哉豈非積善之報也銘曰

予於權公匪惟門生謂公曰舅公謂我甥卞國之薨公命作銘感念之懷得寓斯文自不計於親嫌之倫也然其克孝於姑克順於夫相敬如賓偕登八旬兒孫棣棣百十其麗爵命其膺諡策其承哀榮終始女中汾陽微予之辭固足以歷世而流芳者矣

至正四年九月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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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부는 정신공 류승 사위, 안동권씨 12세 단()의 아들, 안동권씨 족보가 없어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지만 권단(權㫜, 1228~ 1311)권부(權溥)(), , 권근(權近)으로 이어지는 성리학 대가로 보의 사위, 사위 이제현으로 고려말 성리학 도입에 앞장섰다고 한다.

 





출처 :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글쓴이 : 夏谷류재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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