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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의덕사(懿德祠)에 배향봉안(配享奉安) 된 득성조(得姓祖)님들의 약력(略歷)

ryu하곡 2016. 6. 22. 06:32

1 世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 :
공(公)의 본성명(本姓名)읕 황몽(王蒙)으로 중국(中國)의 옛 하(夏)
나라에서 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亡命)하여 평양(平壤) 일토산(一土
山) 아래 정착(定着)한 사신갑(姒辛甲)은 성(姓)을 왕씨(王氏)로 바꾸
어 이름은 조명(祖明)으로 개명(改名)하고 단군조(檀君朝)에 치민장
(治民長)을 역임(歷任)하신 왕조명(王祖明)의 58세 손자이시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준왕(準王) 때 참언(讖言)의 글에『일토초가
자위왕(一土草家者爲王)』이란 말이 동요(童謠)로 세상에 퍼지니 기
자준왕(箕子準王)은 이 참언(讖言)이 두려워서 일토산(一土山) 아래
사는 왕씨(王氏)를 박살(撲殺)함으로 왕몽(王蒙)께서 황급(遑急)히 일
곱째 아들 왕림(王琳)과 함께 남쪽 지리산(智異山)으로 둔적(遁跡)하
여 십여년(十餘年)을 은거생활(隱居生活)로 피신(避身)하게 되었다.
어느날 신인(神人)이 왕몽(王蒙)의 피신고뇌(避身苦惱)에 감응(感
應)하여 나타나 큰 소리를 내어 말하기를『너에 성(姓)인 왕자(王字)
를 세 번 글자를 고쳐서 세 번째 글자로 성(姓)으로 정(定)하면 이
변난(變亂)을 피하고 자손(子孫)이 창성(昌盛)할 것이다.』함으로 왕
몽(王蒙)께서 성(姓)인 왕자(王字)를 동서(東西)를 막아 전자(田字)로
전자(田字)의 중획(中劃)을 상하(上下)로 이어 신자(申字)로 신자(申
字)에 천지(天地)에 각각일획(各各一劃)을 더하여 차자(車字)로 하여
성(姓)을 차씨(車氏)로 정하고 이름은 무(無)에서 처음 다시 시작한
다는 뜻으로 이름은 무일(無一)이라 개명(改名)하고 아들 왕림(王琳)
은 신인(神人)이 예시(豫示)할 때 두 번째 사람이다 해서 이름을 신
을(神乙)로 개명(改名)하고 지리산(智異山)의 은신생활(隱身生活)을
끝내고 계림(鷄林=지금 慶州)으로 이거(移居)하였다.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西紀前57年)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는 그 당시 부족국가(部族
國家)로 구성(構成)된 육촌(六村)의 촌장(村長)들이 왕(王)으로 추대
(推戴)함에 부족국가(部族國家)를 통합(統合)하여 신라(新羅)를 개국
(開國)하고 왕(王)으로 즉위(卽位)하여 도읍지(都邑地)를 계림(鷄林)
으로 천도(遷都)할 때 차무일(車無一)께서 큰 공훈(功勳)을 세웠기에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차무일(車無一)에게 벼슬
시중(侍中)을 제수(除授)하고 차씨(車氏)로 사성(賜姓)함으로 차씨(車
氏)의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다.


2 世 휘(諱) 신을(神乙) :
본성명(本姓名)은 왕림(王琳)이다. 참언(讖言)의 동요(童謠)로 인
(因)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 준왕(準王)의 박멸(迫滅)을 피하여 아
버지를 따라 지리산(智異山)에 둔적(遁跡) 하여 피신(避身)하고 신
인(神人)의 예시(豫示)에 따라 아버지와 함께 성(姓)을 차씨(車氏)로
하고 이름은 신인(神人)이 예시(豫示)한 두 번째 사람이란 뜻을 담
아 신을(神乙)로 개명(改名)하고 아버지와 함께 계림(鷄林)에 이거
(移居)하여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섬기어 벼슬
승상(丞相)을 역임(歷任)하였다.


3 世 휘(諱) 부기(夫起)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에 승상(承相)을 역임(歷任)하였으며 조부
(祖父)로부터 3대를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 임금을
섬기었다.

4 世 휘(諱) 유전(惟典)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다. 공(公)은 그 당시 신라
조(新羅朝)의 명현(名賢)으로 나라 사람들이 봉사(奉祀)하였다.


5 世 휘(諱) 무정(茂正) :
일운(一云) 무정(戊正)이라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사공
(司空)이며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하였다.


6 世 휘(諱) 개수(介修)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사공(司空)이며 배부인(配夫人)은 박씨
(朴氏)이며 신라조(新羅朝) 2대 남해왕(南解王)의 딸이다.


7 世 휘(諱) 복(復)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대승상(大丞相)이시며, 음변국(音汴國 :
東史의 기록에 지금 慶州에 屬한 安東縣 脫解王 乙丑(서기65년),漢明帝 永平8年에 征伐
함)의 정벌(征伐)에 큰 공훈(功勳)이 있으며. 배부인(配夫人)은 박씨
(朴氏)이며 신라조(新羅朝)의 5대 파사왕(婆娑王)의 딸이다.


8 世 휘(諱) 조영(祖英) :
일운(一云) 조영(祖永)이라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에 상주
국(上柱國)이시다.


9 世 휘(諱) 괄(适) :
일운(一云) 괄(括)이라 하며 신라조(新羅朝)의 대승상이시다.


10 世 휘(諱) 인상(仁相)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며, 호(號) 인의상(仁義相)
인 연고로 인상(仁相)으로 사명(賜名)하였다.


11 世 휘(諱) 갑승(甲乘) :
일운(一云) 갑승(甲承)이라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
(丞相)이시다.


12 世 휘(諱) 자개(自開) :
일운(一云) 자개(子開)라고도 하고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
상(丞相)이며 배부인(配夫人)은 가인(哥仁)의 딸이다.

 

13 世 휘(諱) 무기(武基) :
일운(一云) 무기(武奇)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대
승상(大丞相)이시다.


14 世 휘(諱) 승각(升閣)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며 감문국(甘文國 : 東史의
기록에 지금의 開寧府인데 신라 11대 助賁王 2년 辛亥(西紀231年) 卽 漢 後帝 建興9
年에 征伐함)을 정벌(征伐)할 때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5 世 휘(諱) 공내(公乃)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통독(統督)으로 사양국(沙梁國 : 東史의
기록에 지금의 尙州이며 신라 12대 沾解王 丁卯(西紀247年) 卽 漢後帝 延熙10年에 征
伐함)을 정벌(征伐)할 때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16 世 휘(諱) 보전(輔傳) :
일운(一云) 보전(甫前)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집주(執奏)이며 배부인(配夫人)은 석씨(昔氏) 우로(于老)의 딸로 신
라 10대 내해왕(奈解王)의 손녀(孫女)이시다.


17 世 휘(諱) 제능(濟能) :
일운(一云) 제장(濟張)이라고 하며 벼슬은 신라 13대 미추왕
(味鄒王) 원년(元年) 임오(壬午 : 서기262년)에 대승상(大丞相)이 되
어 국정(國政)을 바로 잡았다. 고려조(高麗朝)에 벼슬 기거랑(起居
郞)을 지낸 정지상(鄭知常)이 찬술(撰述)한 서경야사(西京野史)에
유루(劉累)의 후손(後孫)과 사족(四族)이 기자(箕子)와 함께 동쪽
으로 왔는데 차제능(車濟能)의 선대(先代) 황제(黃帝) 희헌원(姬軒
轅)의 후손(後孫)도 그 중의 한분으로 왔다 하고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선생이 찬술(撰述)한『車雲巖先生 雪寃錄』의 세계
편(世系編)을 보면 차제능(車濟能)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어 일
세(一世)로 기록되어 있다.


18 世 휘(諱) 등국(登國)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아간(阿干)이다.


19 世 휘(諱) 은보(殷甫) :
일운(一云) 은부(殷夫)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
상(丞相)이시다.


20 世 휘(諱) 연광(延廣) :
벼슬은 구보(舊譜)에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 일운(一云)
아간(阿干)이라 기록하고 있다. 배부인(配夫人)은 김씨(金氏)로 신
라조(新羅朝) 18대 실성왕(實聖王)의 딸이며, 알지(閼智)의 후손(后
孫) 눌지(訥祗) 그에 임금 실성왕(實聖王)을 죽이고 신라조(新羅朝)
의 19대 왕으로 자립(自立)함으로 공(公)께서 극간(極諫)에 눌지
(訥祗)는 노(怒)하여 공(公)을 죽였다. 동사(東史)에 진안제(晋安帝)
의희(義熙) 13년 정사(丁巳) 즉(卽) 실성왕(實聖王) 16년 정사(丁
巳 : 서기 417년)에 눌지(訥祗)가 죽였다.


21 世 휘(諱) 휘만(徽曼) :
일운(一云) 만미(曼微), 또 일운(一云) 미만(微曼)이라고도 한다.
벼슬은 (新羅朝)의 19대 눌지왕(訥祗王) 때 승상(丞相)이시다. 눌
지왕(訥祗王)의 부왕(父王)인 내물왕(奈勿王)의 동생인 실성왕(實聖
王)이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는 내물왕(奈勿王)의 장자(長
子) 눌지(訥祗)를 도외시(度外視)하고 내물왕(奈勿王)의 둘째 아들
복호(卜好 :눌지왕의 동생)는 고구려(高句麗)에 인질(人質)로 보내고
내물왕(奈勿王)의 셋째아들 미사흔(米斯欣)은 왜국(倭國)에 인질(人
質)로 보내 버렸다. 이에 박제상(朴提上)이 주축(主軸)이 되어 신
자천(申自天). 배중량(裵仲良) 등이 실성왕(實聖王)의 부당(不當)한
처사(處事)를 거론(擧論)하여 실성왕(實聖王)이 눌지(訥祗)에게 왕
위(王位)를 양위(讓位)하게 되었다. 서기 417년 정사(丁巳)에 눌
지왕(訥祗王)이 즉위(卽位)한 후 왜국(倭國)에 인질(人質)로 가 억
류(抑留)된 동생 미사흔(米斯欣)이 그리워서 왜국(倭國)에 사신(使
臣)을 여러 차례 보내어 귀환(歸還)을 요구(要求)하였으나 번번이
거절(拒絶)을 당하였다. 승상(丞相) 차휘만(車徽曼)은 박제상(朴提
上)과 함께 왜국(倭國)에 사신(使臣)으로 들어 가 미사흔(米斯欣)의
숙소(宿所)의 경비(警備)하는 왜인(倭人)들이 잠이 들은 틈에 미사
흔(米斯欣)을 구출(救出)을 하기 위하여 선박(船舶)으로 신라조(新
羅朝)로 귀환(歸還)하고 왜왕(倭王)에 이 사실을 감추었다. 이 사
실(事實)이 밝혀져 왜왕(倭王)이 승상(丞相) 차휘만(車徽曼)과 박제
상(朴提上)에게 재물(財物)의 욕심으로 항복(降伏)을 받으니 승상
(丞相) 차휘만(車徽曼)과 박제상(朴提上)은 굴(屈)하지 않고 마침내
왜왕(倭王)에게 죽임을 당하여 왜국(倭國)에서 순절(殉節)하였다.
동사(東史)를 살펴보면 박제상(朴提上)과 함께 왜왕(倭王)에게 죽
었다고 기록이 있다.


22 世 휘(諱) 지(智) :
일운(一云) 지아(智阿)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이손(伊飱) 또는 승상(丞相)이시다.


23 世 휘(諱) 온백(溫伯)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아손(阿飱) 또는 승상(丞相)이라 하며
배부인(配夫人) 명성(明城) 복씨(卜氏)이며 문감흘(門監乞)의 딸이
시다.


24 世 휘(諱) 순(楯) :
일운(一云) 륜(輪) 또 일운(一云)에 식(植)이라 하고 또는 일운
(一云) 욱(栯)이라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承相)이며.
공(公)은 사인(士人)의 명습자(明習者 :똑똑하고 분명하게 익히는사람)를
취(取)하여 날로 유도(儒道)를 강론(講論)하였다.


25 世 휘(諱) 엄(渰) :
일운(一云) 엄(弇)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상대
등(上大等)이다.


26 世 휘(諱) 루한(婁漢) :
일운(一云) 루한(婁翰)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사공(司空)이시다.


27 世 휘(諱) 순계(盾啓) :
일운(一云) 순계(盾階)라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대승상
(大丞相)이시다. 공(公)은 신라 27대 여왕(女王) 선덕왕조(善德王
朝)에 벙(病)으로 물러나서 은거(隱居)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28 世 휘(諱) 단식(段式) :
일운(一云) 개식(改式)이라고도 하고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대승상(大丞相)이시며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 2년 임오(壬午 : 서
기682년)에 상소(上疏)로 청(請)하야 국학(國學)을 세우니 설총(薛聰)
과 고질(高秩) 등은 예절(禮節)을 물으며 공(公)을 곧 스승으로 섬
기게 되었다.


29 世 휘(諱) 헌(憲)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시며, 신라 35대 경덕왕
(景德王)은 승상(丞相) 차헌(車憲)을 촉중(蜀中)에 사신(使臣)으로
보냈다. 동사(東史)를 살펴보면 당(唐)나라 천보(天寶) 15년 병신
(丙申)에 현종(玄宗)이 록산(祿山)의 난(亂)을 피하여 촉(蜀)으로
행차한 연고로 조정(朝廷)에서 차헌(車憲)을 보내어 현종(玄宗)을
알현(謁見)하니 현종(玄宗)은 친(親)히 지은 십운시(十韻詩)와 수찰
(手札)을 차헌(車憲)에 부치어 경덕왕(景德王)에게 내렸다.


30 世 휘(諱) 도강(渡江) :
일운(一云) 도강(渡康)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전의(典儀)시다. 김양상(金良相)이 그에 임금 신라 36대 혜공왕(惠
恭王)을 죽이고 자립(自立)하고자 함으로 차도강(車渡江)은 김양상
(金良相)을 죽여 막을 것을 공(公)은 스스로 도모(圖謀) 하였으나
실패(失敗)하였다. 동사(東史)를 살펴보면 당(唐)나라 덕종(德宗)
건중원년(建中元年) 경신(庚申 :서기 780년)에 김양상(金良相)은 왕
(王)을 죽이고 자립(自立)하였다. (※김양상(金良相)은 신라 37대 선덕왕(宣
德王)이다.)


 

31 世 휘(諱) 검부(儉夫)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시다. 승상(丞相) 차검부
(車儉夫)는 상소(上疏)로 학교(學校)에 과목(科目)을 설립하여 인재
(人材)를가려 뽑았다. 배부인(配夫人)은 익원양씨(益原楊氏)이며 상
장군(上將軍) 양인방(楊仁芳)의 딸이다. 동사(東史)를 살펴보면 신
라 38대 원성왕(元聖王) 4년 무진(戊辰 : 서기 788년). 당(唐)나라 덕
종(德宗) 정원(貞元) 4년에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립하였다.

 

32 世 휘(諱) 건갑(建甲)
일운(一云) 건신(建信)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承相)이며 신라 39대 소성왕조(昭聖王朝)의 원로신(元老臣)이
며 배부인(配夫人)은 신라 4대 왕 석탈해니사금(昔脫解尼師今)의
후예(后裔)인 국성석씨(國姓昔氏)이다. 소성왕(昭聖王)은 친(親)히
주(周)나라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엎고 제후(諸侯)와 조
회(朝會)하는 그림 한 폭을 주시며 공(公)에게 어린 태자(太子)를
부탁함은 애장왕(哀莊王)이 어린 까닭이다. 소성왕(昭聖王)이 서거
(逝去)한 후 소성왕(昭聖王)의 유언(遺言)에 따라 12세에 즉위(卽
位)하신 애장왕(哀莊王)의 보상(輔相)이 되시어 애장왕(哀莊王)을
보필(輔弼)하시고 나라의 정사(政事)를 섭정(攝政)하시어 대훈공(大
勳功)을 세우시고 별세(別世)하시니 애장왕(哀莊王)은 만조백관(滿
朝百官)에 왕례(王禮)를 갖추어 예장(禮葬)하고 공(公)의 신주(神
主)는 소성왕묘(昭聖王廟)에 배향(配享)케 하명(下命)하고 공(公)의
묘역(墓域)을 기장현(機張縣) 만화동(萬化洞 :일운(一云)에 만화동(滿花冬)
이라 함) 측록(側麓)의 자좌원(子坐原)에 매장(埋藏)하고 사포숙석(四
舖宿石)의 비갈(碑碣)이 있어 세인(世人)들이 차능(車能)이라 말하
며 오늘 날까지 보존(保存)되고 있다.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서
기826년~836년)은 기장현(機張縣)에는 소성왕조(昭聖王朝)의 로신
(老臣)이며 애장왕(哀莊王)의 보상(輔相)의 묘역(墓域)을 세인(世
人)들이 능(陵)으로 칭존(稱尊)하는 차능(車陵)이 있는 지방(地方)
이라 하고 현명(縣名)을 승격(陞格)하여 차성(車城)으로 개칭(改稱)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 날에 기현군(機張郡)의 고호(古號)
차성(車城)인 것이다.


33 世 휘(諱) 승색(承穡) :
벼슬은 당(唐)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4년 기축(己丑 :서기
809년). 즉(卽) 신라 40대 애장왕(哀莊王) 10년에 승상(丞相)이 되
어 선고(先考)이신 승상(丞相)의 유지(遺志)에 따라 애장왕(哀莊
王)을 극진(極盡)히 보필(輔弼)하였으며 배부인(配夫人)은 우씨(禹
氏)이다. 왕숙(王淑)인 김언승(金彦昇)이 애장왕(哀莊王) 10년 기
축(己丑 : 서기 809년)에 반역(返逆)하여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
하고 김언승(金彦昇)은 자립즉위(自立卽位)하여 신라 41대 헌덕왕
(憲德王)이 되었다. 그러나 좌상(左相) 차승색(車承穡)은 왕(王)로
인정(認定)하지 않고 왕(王)을 시해(弑害)한 역적(逆賊)이며 친질
(親姪)을 죽인 패륜아(悖倫兒)라 하며 헌덕왕(憲德王)을 시해(弑害)
로 나라에 원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법통(法統)을 바로 세
우기 위하여 공(公)의 큰 아들 벼슬 신라 사공(司空) 차공숙(車恭
叔)과 함께 동지(同志)들과 모의(謀議)하여 예양(豫讓)의모략(謀略)
을 본받아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이 수렵(狩獵)의 떠남을
엿보아 다리 밑에 복병(伏兵)한 궁수(弓手)로 시해(弑害)하고자 하
였으나 이 계략(計略)을 아는 자가 헌덕왕(憲德王)에게 밀고(密告)
함으로 이 계책(計策)이 누설(漏泄)되었다. 이에 헌덕왕(憲德王)이
공(公)의 부자(父子)를 체포(逮捕)하기 위하여 나라에 체포령(逮捕
令)을 내리고 병리(兵吏)를 풀어 찾으니 공(公)의 부자(父子)는 요
동백(遼東伯) 김반전(金盤傳)의 아들 김생(金生)인 생질(甥姪)의 집
으로 둔적(遁迹)하여 피신(避身)하였다.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
彦昇)은 공(公)의 부자(父子)가 체포(逮捕)되지 못 함으로 이 부자
(父子)를 체포(逮捕)하기 위하여 현상(懸賞)으로 금(金) 천근(千斤)
과 식읍만호(食邑萬戶)를 걸어 놓고 공(公)의 부자를 찾으니 공
(公)의 생질(生姪) 김생(金生)은 현상금(懸賞金)을 탐하여 외숙부자
(外叔父子)를 밀고(密告)하고자 하였다. 김생(金生)의 충복(忠僕)이
김생(金生)의 계략(計略)을 미리 공(公)의 부자(父子)에께 알려 그
날 밤 위험을 벗어나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아래 유주(儒
州) 묵방동(墨坊洞)으로 둔적(遁迹)하여서 조모(祖母)의 성(姓)인
양씨(楊氏)로 모칭(冒稱)하며 피신은거(避身隱居)하였다. 공(公)은
모성(冒姓) 양씨(楊氏)의 양자(楊字)를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
꾸어 가성(假姓)으로 류씨(柳氏)라 정(定)하고 이름은 잣나무 숲에
깊이 은신(隱身)한다는 뜻을 담아 백자(栢字)를 택(擇)하여 백
(栢)으로 개명(改名). 가성명(假姓名) 류백(柳栢)으로 하여 유주(儒
州) 고을에 부두가(富荳家)로 이름 난 집에 고용(雇傭)살이로 피신
(避身)하여 천명(天命)을 보존(保存)하게 된 것이다. 신라 34대
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 : 서기 918년)에 왕건(王建) 태조(太祖)
께서 고려조(高麗朝)를 개국(開國)한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
日)에 고려태조(高麗太祖)의 특명(特命)으로 본성차씨(本姓車氏)로
109년만에 복성(復姓)을 한 것이다.

 

34 世 휘(諱) 공숙(恭叔)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사공(司空)이시며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의 변난(變亂)에 아버지이신 신라
좌상(左相) 차승색(車承穡)과 함께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한
나라의 원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법통(法統)을 바로 세울
계략(計略)이 누설(漏泄)로 실패(失敗)하고 아버지와 함께 황해도
(黃海道)로 둔적(遁迹)하여 아버지를 따라 본성명(本姓名)을 감추
고 임시로 성명(姓名)을 류숙(柳淑)이라 하며 피신(避身)을 하게
된 것이며, 공(公)의 친제(親弟)이신 차공도(車恭道)는 신라조(新羅
朝)의 벼슬 사공(司空)이며 호(號) 미도(彌道)는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의 변난(變亂)에 강남(江南= 고려의 강남도(江南道 : 지금
평양남도)를 말함)에 들어 가 피신(避身)하면서 구성왕씨(舊姓王氏)로
복성(復姓) 왕공도(王恭道)로 살게 되었으며 그의 증손(曾孫)이 고
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은 고려개국(高麗開國)한 후 증조(曾
祖)이신 왕공도(王恭道)님을 추숭칭호(追崇稱號) 고려국조(高麗國
祖) 원덕대왕(元德大王)이라 하여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始祖)
가 되었다.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 : 서기918년)에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고려조(高麗朝)를 개국(開國)한 후 승음수
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고려태조의 특명(特命)으로 가성명(假姓
名) 류숙(柳淑)은 본성(本性)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본성
명(本姓名)을 복원(復元)하였다.


35 世 휘(諱) 진부(振阜) :
본성씨(本姓氏)를 감추고 가성명(假姓名) 류진부(柳振阜)로 세상
(世上)을 속여 사는 처지(處地)라 은사(隱士)로 유주(儒州)에서 가
성류씨(假姓柳氏)를 3세(世)로 이어 받아서 성명(姓銘)을 류진부
(柳振阜)로 세상(世上)을 등지고 살았으며 배부인(配夫人)은 조씨
(趙氏)이며 생일남(生一男)하였으니 이름 무선(茂先)이시다. 서기
918년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에 고려태조(高麗
太祖)께서 나라를 세운 후 특명(特名)으로 가성류씨(假姓柳氏)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復姓)케 하여 가성명(假姓名) 류진부(柳
振阜)로 세상을 살아오신 분을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復姓)하
게 되어 차진부(車振阜)로 성명(姓名)을 바로잡게 된 것이다.


36 世 휘(諱) 무선(茂先) :
공(公)은 해평산장(海平山長)이라 칭(稱)하며 가성류씨(假姓柳
氏)를 4세(世)로 이어받아 성명(姓名)을 류무선(柳茂先)이라 하며
세상을 살았으며 배부인(配夫人)은 유씨(劉氏)이며 생일남(生一男)
하였으니 이름 보림(普林)이시다. 그 후 서기 918년 신라 54대 경
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에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나라를 세
운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태조(太祖)의 특명(特命)으로
가성류씨(假姓柳氏)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케 하여 가
성명(假姓名) 류무선(柳茂先)으로 세상을 살아오신 분을 본성차씨
(本姓車氏)로 복원(復元)케 되어 차무선(車茂先)으로 성명(姓名)을
바로잡게 된 것이다.


37 世 휘(諱) 보림(普林) :
공(公)은 월흑산장(月黑山長)이라 칭(稱)하며 가성류씨(假姓柳
氏)를 5세(世)로 이어받아 성명(姓名) 류보림(柳普林)으로 세상(世
上)을 살았으며 배부인(配夫人)은 길씨(吉氏)이며 생일남(生一男)을
하였으니 휘(諱)는 해(海)이시다. 서기 918년 신라 54대 경명왕
(景明王) 2년 무인(戊寅)에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나라를 세운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태조(太祖)의 특명(特命)으로 가
성류씨(假姓柳氏)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케 되어 차보
림(車普林)으로 성명(姓名)을 바로 잡게 되었다.


 

38 世 휘(諱) 달(達) :
묵방사기(墨坊寺記)에 말하기를 공(公)은 모성류씨(冒姓柳氏)로
휘(諱)는 해(海)요 자(字)는 응통(應通) 호(號)는 아사(鵝沙)이며 배
부인(配夫人)은 신라조(新羅朝)의 알지(閼智)의 후손(后孫) 김균(金
稛)의 딸이며 생이남(生二男)과 생일녀(生一女)를 하였으니 맡아들
효전(孝全), 둘째 아들 효금(孝金)이며 딸은 고려조(高麗調)의 벼슬
삼중대광(三重大匡)이며 통합삼한.(統合三韓) 익찬벽상공신(翊贊壁
上功臣) 윤신달(尹莘達)에게 출가(出嫁)하였다.
공(公)의 5대조(代祖)이신 신라(新羅) 애장왕조(哀莊王朝)의 좌
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께서 신라 39대 애장왕(哀莊王) 10년
기축(己丑 : 서기809년)에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 김언승
(金彦昇)의 변난(變亂)에 헌덕왕(憲德王)을 시해(弑害)로 나라의 원
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법통(法統)을 바로 세울 모의(謀議)
가 누설(漏泄)되어 실패(失敗)하고 둔적(遁迹)하여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아래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에 들어 가 조모(祖
母)의 성(姓)을 딸아 모성양씨(冒姓楊氏)라 하며 은거(隱居)하였다.
그 후 양자(楊字)와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모성류씨(冒姓
柳氏)로 6세를 전(傳)하여 공(公)에 까지 이어받게 된 것이다. 이
때 공(公)은 삼한(三韓)의 제일호부(第一豪富)이며 고려태조
(高麗太祖) 왕건(王建)께서 남정(南征)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 조선
조(朝鮮朝)의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
彭年) 선생께서 조선 6대 단종왕(端宗王)의 어명(御命)을 받아 태
허정(太虛亭) 최항(崔恒),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매죽헌
(梅竹軒) 성삼문(成三問) 등 제현(諸賢)들과 함께 기술(記述)한
『차운암선생설원기』의 기록(記錄)에『차달(車達)은 장정(壯丁)을

 려실(麗室)에 날로 헌납(獻納) 도하여 도웁고. 효전(孝全)은
왕사(王事)이 어려움을 당(當)하였을 때 흥원(興原)에 많은 속곡(粟
穀)을 진대(賑貸)하였고 현능(顯陵)과 정사(定社)에 공(功)을 세웠고
나라를 위(爲)하여 수레를 판출(辦出)하여 계량(繼粮)을 싫어 남쪽
정벌(征伐)에 곡식의 운반(運搬)을 행하였더니 특별히 그의 아버지
에 차씨(車氏)로서 세대(世代)를 이어라 달(達)로 이름을 하였다.』
하였고,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은 나라를 세워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태조(太祖)께서는
차달(車達)에게 대승(大丞)을 제수(除授)하시고 통합삼한(統合三韓)
익찬벽상이등공신(翊贊壁上二等功臣)에 봉(封)하시고 특명(特命)의
말씀이『〔옛 차씨(車氏)를 생각하면 원래의 홍렬(弘烈)을 가히

잊을 수 없고. 근간(近間 =저간(這間))에 류씨(柳氏)로 모칭

(冒稱=모성(冒姓))한 것을 또 그만두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시며 모성류씨(冒姓柳氏 =假姓柳氏)의 6세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하여 공(公)의 사성명(賜姓名)은 차달(車達)로 하시고 공
(公)의 장자(長子)인 효전(孝全)은 조상(祖上)의 홍렬(弘烈)을 승습
(承襲)케 하여 본성차씨(本姓車氏)를 계승(繼承)케 하시고 공(公)의
차자(次子) 효금(孝金)은 태조(太祖)의 특명(特命)으로 류씨(柳氏)로
사성(賜姓)하여 형제분(兄弟分)이 차류양성(車柳兩姓)으로 분성(分
姓)하게 된 것이다.

 

 

 


 

출처 : 자모동사람들
글쓴이 : 머무는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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