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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차원부 설원기 해제(解題)

ryu하곡 2015. 3. 14. 08:36

  이 「설원기(雪寃記)」는 고려말의 충신이요 성리학의 대가였던 운암공(雲巖公) 차원부(車原 )의 억울한 죽음을 씻어 주기 위하여 조선왕조 집현전 출신인 박팽년(朴彭年)공이 어명(御命)에 의하여 찬술한 기록이다.

  운암공(雲巖公)은 고려말인 1320년(忠肅王 七年)에 태어났다. 자는 사평(思平), 호는 운암(雲巖), 그리고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여러 요직(要職)을 두루 거쳐 문하부(門下府)의 간의대부(諫議大夫 : 從三品)에 이르렀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어 경사(經史)에 두루 통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성리학의 핵(核)인 정통(正統)의식 및 대의명분(大義名分) 의식에 투철하여 당대의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야은(冶隱) 길재(吉再) 등의 후배들과 교유하였으며 또한 무장(武將) 세력을 대표했던 이성계(李成桂) 등과도 친명대의(親明大義)라는 면에서는 서로 뜻을 같이 하기도 하였다. 그림에도 능하여 특히 매화(梅花)를 잘 그렸다고 한다.

  고려말기는 원(元) 명(明) 교체의 과도기적 국제정세속에 나라의 정치기강이 해이해지고 이인임(李仁任) 임견미(林堅味) 등의 탐학(貪虐)한 무리들이 사실상의 실권을 장악하고 원(元) 명(明)을 넘나들면서 국정을 어지럽히자 공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평산(平山)의 수운암동(水雲巖洞)으로 들어가 은거하고 자연과 벗삼았다.

  그 동안 고려 조정은 친명 친원의 갈등속에서 우왕(禑王)과 최영(崔瑩)이 짝하여 요동정벌(遼東征伐)을 단행하려 하였다. 이때 공을 찾아온 이성계(李成桂)에게 그 옳지 못함을 일깨워 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의 정통 국가인 명에 대한 생각까지는 운암공도 이성계(李成桂) 등과 궤(軌)를 같이 하였다.

  그러나 이성계 등이 나라를 뒤엎고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려고 한 역성혁명(易姓革命)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이후 이성계 계열인 조준(趙浚) 이양우(李良祐) 등이 공신(功臣)으로 책정하려 하였을 때 『비록 다섯 말의 초(醋)를 마실지언정 공신녹권에 참여할 수 없다』고 단호이 거절하여 고려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켰다. 뿐만 아니라 위화도회군 뒤 이성계 등이 차문(車門)의 외손(外孫)이며 후배였던 당대 성리학의 대가인 포은공(圃隱公)마저 격살하는 참화가 일어나자 친명정책에 궤(軌)를 같이 하였던 야은(冶隱) 길재(吉再) 등 고려 구신(舊臣)들은 이성계 등의 계열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공도 그들과 궤(軌)를 같이 하였다.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개창한 이성계는 정치 운용의 경험이 부족한 정도전(鄭道傳) 등 신진(新進) 소장(小壯)들만으로는 나라를 운용할 수 없어 정치 경험이 풍부한 고려 구신들을 포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끝내 조선왕조에는 협력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조현(不朝峴)의 고사(故事)를 남겼고 두문동(杜門洞) 72인(人)을 몰살하는 우(愚)를 범하기까지 하였다. 공도 이들과 마찬가지로 끝까지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켜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던 것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죽음을 면하고 흩어진 고려 구신 가운데 가장 원로이며 선배인 운암공을 잊지 못하여 혹은 벼슬로 혹은 이른바 조서(詔書)를 여러 차례 보내어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태조의 부름이 하도 간절하여 옛날 국가 정책에 궤(軌)를 같이 하였던 태조와의 정의(情誼)를 생각하며 1398년(태조7년) 초의(草衣)로 태조를 방문하고 그의 문객(門客)으로 궁중에 머물렀다. 이때 특히 왕위(王位) 계승 문제 등이 화제가 되었는데 공은 난세(亂世)에는 개국에 공이 가장 많은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여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당시 공이 제일 컸던 방원(芳遠)을 은근히 추천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실로 하여 차문(車門)에서는 자기를 왕위 계승자로 추천한 은인을 원수로 갚았다고 나무라고 있기도 하다.

  이와 같이 궁중에 머물면서 태조와 벗하였으나 벼슬만은 끝내 거절하고 고려의 유신(遺臣)으로서 남았다. 그러나 이 해 8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는 사실상 주모자였던 방원이 차문(車門)의 서외손(庶外孫)의 한 사람인 하륜(河崙) 등과 짝하여 방번(芳蕃) 방석(芳碩) 등의 이복(異腹) 동기간(同氣間)을 살해하는 처참한 사건이었다. 공은 그 해 9월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이른바 정몽주의 당류란 누명을 쓰고 개성 근교 송원(宋元) 마원(麻原) 사이에서 방원과 하륜이 보낸 자객(刺客)에 의하여 일문(一門)70여 명과 함께 추살(椎殺)당하는 참화를 입어 신라 고려 이래의 명문(名門)인 차문(車門)은 거의 멸문(滅門)의 지경에 이르렀다. 뿐만 아니라 이 뒤 차문(車門)의 각종 문헌과 목판이 불태워졌다.

  당시는 성리학 체계에 의한 유교주의적 윤리 질서를 확립하려는 과도기적인 시기로 차문(車門)의 4얼(孼), 즉 정도전(鄭道傳) 조영규(趙英珪) 함부림(咸傅霖) 하륜(河崙) 등의 서얼(庶孼)들이 적파(嫡派)를 형성하기 위하여 차문(車門)의 각종 문헌을 모두 불태워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뒤에 태종이 된 방원도 왕자의 난 때 왕조실록(王朝實錄)에서 방번 방석을 여러차례 서자(庶子)라는 이름을 쓰면서 「적장자(嫡長子) 왕위계승」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특히 당시 중신(重臣)의 반열에 있던 하륜(河崙)으로서는 가문(家門)을 적통(嫡統)으로 꾸며 출세(出世)의 길잡이로 삼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운암공의 억울한 죽음은 당시 살아 남았던 차문(車門)의 후손들까지도 갖은 탄압과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운암공의 처참하고 억울한 죽음과 멸문지화를 입은 차문(車門)의 억울함을 씻어주고 이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설원기(雪寃記)」이다. 이 「설원기」가 완성된 것은 세조 2년(1456) 5월이었다. 그러나 「설원기」편찬에 참여하였던 하위지(河緯地) 박팽년(朴彭年) 성삼문(成三問) 등이 다음 6월에 단종복위(端宗復位)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처형됨으로써 간행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숙종(肅宗)때 단종이 복위되고 이른바 사육신(死六臣) 등이 신원되면서 「설원기」는 활판(活版), 혹은 목판(木版)으로 간행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판본(板本)으로 기록된 것은 숙종 34년(1708) 무자(戊子)의 평산활판(平山活版), 영조(英祖) 45년(1768) 무자(戊子)의 금천판(金川版), 정조(正租) 5년(1781) 신축(辛丑)의 서흥판(瑞興板), 정조 15년(1791) 신해(辛亥)의 순천판(順天板), 그리고 이들을 종합하여 만들었다는 초계판(草契板) 등이 있다. 요 근래 1984년에는 이들 판본을 종합 감정(勘正)하여 「운암차선생설원록번역간행위원회(雲巖車先生雪寃錄飜譯刊行委員會)」에서 「운암차선생설원록(雲巖車先生雪寃錄)」이라하여 국역(國譯) 단행본(單行本)으로 간행한 바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위에 보이는 여러 판본들은 출판하는 주체에 따라 그 내용이 약간씩 다르다. 이른 「설원기」가 간행되지 못하고 세간에 필사본으로 전해졌기 때문에 판본을 만들 때마다 그 시대적 여건에 따라 첨삭(添削)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차문(車門)에서는 과거 판본의 대본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필사본(筆寫本)을 적극적으로 검색한 결과 국립중앙도서관(國立中央圖書館)에 소장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 내용은 뒤의 각종 판본들과 그리 다르지 않고 때로 정리되지 못하여 문맥(文脈)이 잘 통하지 않는 곳이나 오자(誤字) 혹은 탈자(脫字) 및 차문세계(車門世系)의 잘못들이 더러 있으나 뒤의 판본에서 보이는 첨삭이 거의 없어 차문(車門)에서는 이를 원본 필사본으로 추정(推定)하고 1980년 11월 차문문헌편찬위원회(車門文獻編纂委員會)에서 영인(影印)발간하였다. 이와 같은「설원기」를 이번에는 본문을 영인함과 동시에 다시 이를 우리말로 쉽게 풀이하여 「국역설원기(國譯雪寃記)」로 발간하게 되었다.

  필사본 「설원기」는 기왕의 여려 판본들과 마찬가지로 상 하(上下) 2권(卷)으로 되어 있다. 상권(上卷)에는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출신인 박팽년공(朴彭年公)이 설원(雪寃)의 기사(記事)를 쓰고 신숙주(申叔舟)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공(公) 등 당시 40세 전후의 소장 학자(少壯學者)들이 봉교주석(奉敎註釋)하였고, 서문(序文)은 69세의 원로였던 하위지(河緯地)공(公)이 썼다.

  상권의 기사 내용은 다음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려말의 국내외 정세와 탐관오리의 탐학에 의한 국강(國綱)문란을 비관하여 운암공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게 된 사실, 그러면서도 최영 중심의 요동 정벌이 대의(大義)에 어긋난다고 이성계에게 충고한 사실,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왕조(朝鮮王朝)를 개창하면서 공신녹권이나 벼슬로 출사(出仕)할 것을 강권하였으나 끝내 이를 거절하고 대의 명분(大義名分)을 지켜 고려 유신으로 남았던 고고한 지조(志操), 태조 이성계가 구의(舊誼)를 잊지 못하여 여러 차례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나 그의 부름이 너무나 간절하여 태조(太祖) 7년에 초의(草衣)로 그를 방문하여 문객(門客)으로 지내면서 왕위 계승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였던 사실, 그리고 궁중에서 운암공이 평산으로 돌아가다가 하륜 등의 모략으로 그들이 보낸 자객(刺客)에 의하여 일문과 함께 고향인 송원과 마원에서 추살당하고 멸문의 화를 입었던 사실, 1차 왕자의 난에서 사실상 실권을 장악한 방원이 곧 운암공을 신원하였으나 다시 모함을 입어 운암공의 후손은 물론, 차문(車門)이 흩어져 고난을 겪던 삶의 현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세종(世宗) 때에 여러 중신들이 운암공의 설원을 탄원하여 세종을 움직이고 이에 세종은 적극적으로 전교(傳敎) 무위서(撫慰書) 등을 보내어 결국 설원한 사실과 문종 단종 세조에 걸치면서 「설원기(雪寃記)」를 쓰게 된 경위 등이 기록되어 있다.

  1차 왕자의 난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소장학자들에 의하여 쓰여지고 주석(註釋)되었기 때문에서인지 그 내용이 왕조 실록(王朝實錄)과는 사뭇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차문(車門)에서는 태종이 된 방원과 4얼(정도전 조영규 함부림 하륜)이 짝하여 차문(車門)을 멸문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이 「기」에서는 주로 4얼 중에서 하륜(河崙)이 주동으로 태종을 움직여 이루어 진것으로 되어 있다. 다라서 하륜은 차문(車門)을 멸문 시킨 것을 기화로 1 2차 왕자란에 정사(定社) 좌명(佐命)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책정되었으며 태종(太宗)의 묘정(廟廷)에 배향되는 부귀를 누렸다.

  그리고 태종이 차문(車門)에 대하여 적극적인 탄압을 가하였던 때는 「기」에도 있듯이 하륜이 차문은 왕씨(王氏)의 분파(分派)라는 기록이 있으므로 왕씨(王氏)에 대한 강경책을 써 왕씨족(王氏族)도 멸문의 화를 입었던 만큼 그 분파인 차씨족(車氏族)도 그들의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음직하다.

  하권(下卷)에서는 당시 고관(高官) 석학(碩學) 48명의 응제시 72수(首)가 칠언절구(七言絶句)로 담겨져 있으며 「기(記)」와는 다르게 자기가 지은 시구(詩句)안에는 당시의 미묘한 정치적 상황과 태조 태종의 부자 갈등, 강비의 애환 등 신하로서는 언급하기 어려운 사건들을 바탕에 깔고 하나같이 운암공의 고매한 지조와 인격, 자연을 벗삼아 은거한 은사(隱士)의 모습을 우의적(寓意的)으로 표현하고 그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추모의 정을 담고 있다.

  공교롭게도 올해 1998년은 운암공이 돌아가신지 600돌을 맞이하는 해로 「설원기(雪寃記)」를 번역 출간하게 됨에 공에 대한 추모의 정이 더욱 간절하다. 그러나 고인(古人)은 『수원(讐怨)을 막결(莫結)하라』 하였다. 오늘 「설원기」를 번역 출판하는 것은 600년전의 일에 대한 원수갚음을 하기 위하여서가 아니다. 다만 그 내용이 거의 왕조실록(王朝實錄) 등에서 볼 수 없는 역사적 사실 등을 담고 있어 또 하나의 역사적 사료(史料)로서 가치가 있음이 높이 평가되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감히 출판을 기획한 것이다.

  그리고 요사이 세간에는 출세나 부귀의 명리(名利)를 쫓아 지조를 버리고 우왕좌왕(右往左往)하는 인사(人士)들이 판을 치고 있는 한탄스러운 세태를 연출하고 있다. 이러한 세태에 비록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여러 가지 핍박과 유혹에도 대의(大義)를 저버리지 않고 끝내 그 소신대로 고려조의 유신(遺臣)으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지조를 지켜 고고한 생을 마친 운암공의 선비정신을 차문(車門)은 물론이려니와 모든 이들의 표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이 「설원기」의 번역 출판의 의의를 찾고자 한다.

1998년 6월 15일

차문문헌편찬위원회(車門文獻編纂委員會)

委員長     車 文 燮

출처 : 자모동사람들
글쓴이 : 머무는바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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