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하정공파 청계공 柳夢井 선조님 후손 거주지에 대한 오해

ryu하곡 2016. 4. 18. 14:31

하정공파 청계공 柳夢井 선조님 후손 거주지에 대한 오해

하정공파 청계공 柳夢井 선조님 후손 거주지에 대한 오해

1. 호는 청계(淸溪)이며 본관은 문화, 부제학 희저(希渚, 이하 선조 존칭생략함)의 손자이고 생원 진사시에 합격했고 유일(遺逸)로 집의를 지냈고 남원 부사로 있다가 기축옥사에 걸려서 송강정철의 모함으로 국문을 받고 경인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아들 호()가 소를 올려 신원되었습니다.

2. 구전으로 청계공할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후손들이 문화류씨 세거지인 영암군 신북면 모산리에 살지 못하고 모산리에서 쫏겨나 여수 구례 보성 등지로 가서 살았으며 당시 부자정승(약재 류상운 만암 류봉휘)인 형님 집안에서 모산에서 살지 못하게 하였다라고 하는데 이 내용은 사실과 다릅니다.

3. 족보를 보면 기축옥사는 1588(선조22)에 발생했고 영의정 류상운은 청계공 형님 손자로 1636(인조14)~1707(숙종33)년에 살으셨으며 기축옥사때는 태어나지 않으셨는데 어떻게 청계공할아버지 역모사건을 변론하겠으며 또 청계공 형님들도 말직으로 청계공보다 관직이 낮은 신분으로 변론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4. 청계공 아들 (), 손자 극효(克孝) 극제(克悌), 증손 지() ()의 묘가 모산 서당동에 있고, 고손 주신 세신의 묘는 금정면에 있습니다. 주신의 증손자까지 묘도 금정면에 있는데 금정면은 지금 서당동 옆에 있는 마을입니다. 즉 청계공 사후 8대까지 묘가 신북에 있었다는 것은 약 240년간 모산에 거주했다는 증거입니다. 청계공 둘째 아들은 보성고읍에 묘가 있어 당시 보성(낙안)으로 이주하였고 이후 후손들이 생활 터전이나 처가를 따라 모산을 떠난 것이지 역적 후손이며 형제들이 못 살게 하여 모산을 떠났다는 선조들의 구전으로 전해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5. 물론 숙종조 이후 부자정승 이후 약재 만암 3~8촌 친족들이 통덕량이 약 30여명 배출한 것으로 보아 청계공 형제들이 청계공을 핍박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으나 부자정승 일부후손들이 해방후 6.25를 거치면서 자유당 시절 가난하게 살던 친족을 조금 무시한 경우는 있으나 이것은 당시 사회상으로 보아야합니다.

6. 용공할아버지 아들 5명으로 몽벽(증형조참의) 몽익(증이조판서) 몽두(내금의장) 몽정(광주목사) 몽삼(죽산현감)인데 남제공 몽삼은 아들과 함께 한양에 살았고 손자 인남이 광햬군일파의 미움을 받아 모산으로 내려옵니다. 큰할아버지들과 당숙들은 화려한 관직을 보유하고 있는데 관직이 없는 손자가 모산에 와서 살면서 후손대접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다행히 인조반정으로 선전관이 되었으나 그 이후 남제공 후손들은 대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그런 관행이 없는 것처럼

7. 앞으로 모강공 용공할아버지 후손들이 화합하는 차원에서 근거가 없는 역적 후손이라 무시한다거나하는 말을 하지 말고 좋은 덕담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