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차원부설원기 모호한 이야기 모음

ryu하곡 2016. 4. 17. 18:41

♧ 2016년 3월 19일 문화류씨가 대동사에서 대승공 향사를 지냈는데 아무관련이 없는 일부차문에서 남의 시조 향사를 3월 23일(음 2월 15일) 대동사에서 향사를 지내고 대동사소유권 등기 이전 소송을 해오는 현실에서 문화류씨는 계속 대승공 향사를 지내게 되는 당위성을 알리기 위하여 차문의 조작된 내용을 알려야 하기에 이번에는 차원부설원기 이야기를 알립니다. 첨부파일 본문원본이 너무 길어 여기에 줄여 올립니다. 읽고 댓글 주시면 수정하겠습니다.

첨부파일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hwp



차원부설원기 이야기 모음


대승공 33세 夏谷류재균


1. 서론
  문화류씨 광주전남종친회가 창립된 후 광주 대동사 대승공 류차달 시조(이하 선조 존칭 생략함) 사우에서 지난 3월 19일 문화류씨 주관으로 대승공 향사를 모시면서 많은 종친을 만나본 결과 차원부설원기와 원파록 내용을 문화류씨 宗史에 나오는 내용이라고 오해하는 분이 아직도 많은 현실에서 젊은 종원으로부터 차원부설원기 국역(국역 차원부설원기 발간위원회, 1998. 6.15 발행) 책을 중고 서점에서 소개받아 읽어 보았습니다. 이하 차원부설원기 쪽수 표기는 위책 쪽수입니다.
  2016년 3월 19일 문화류씨가 대동사에서 대승공 향사를 지냈는데 아무관련이 없는 일부차문에서 남의 시조 향사를 3월 23일(음 2월 15일) 대동사에서 향사를 지내고 대동사소유권 등기 이전 소송을 해오는 현실에서 문화류씨는 계속 대승공 향사를 지내게 되는 당위성을 알리기 위하여 차문의 조작된 내용을 알려야 하기에 이번에는 차원부설원기 이야기를 알립니다.
  차원부 설원기 내용 중에 차승색이 애장왕을 섭정한 이야기와 구월산으로 피난간 것과 이성계가 차원부를 찾아간 이야기, 그리고 차원부가 이성계에게 방원을 왕으로 하라고 했는데 방원이 오해하여 차원부를 죽였다는 이야기는 삼국사기와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다른 사람이 한 것으로 나옵니다. 읽어 보고 각자 판단하고 틀린 부분이 있으면 댓글 주십시오. 그러면 수정 보완하겠습니다.
2. 애장왕 헌덕왕과 차승색
①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
애장왕[哀莊王] 편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三國史記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
시대명 신라, 재위기간 800년~809년, 연도 800년~809년 

  애장왕(哀莊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청명(淸明)이며, 소성왕(昭聖王)의 태자이다. 어머니는 김씨 계화부인(桂花夫人)이다.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13세로, 아찬 병부령 언승(彦昇)이 섭정하였다.
  哀莊王立 諱淸明 昭聖王太子也 母 金氏桂花夫人 卽位時 年十三歲 阿飡兵部令彦昇攝政

2년(서기 801) 봄 2월, 임금이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태종대왕(太宗大王)과 문무대왕(文武大王)의 두 묘는 별도로 세우고, 시조대왕 및 임금의 고조부 명덕대왕(明德大王), 증조부 원성대왕, 조부 혜충대왕(惠忠大王), 아버지 소성대왕을 5묘라고 정하였다.
병부령 언승을 어룡성(御龍省) 사신(私臣)으로 삼았다가 얼마 되지 않아 상대등으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二年 春二月 謁始祖廟 別立太宗大王文武大王二廟 以始祖大王及王高祖明德大王曾祖元聖大王皇祖惠忠大王皇考昭聖大王爲五廟 以兵部令彦昇 爲御龍省私臣 未幾爲上大等 大赦 夏五月壬戌朔 日當食 不食 秋九月 熒惑入月 星隕如雨 武珍州進赤烏 牛頭州進白雉 冬十月 大寒 松竹皆死 耽羅國遣使朝貢

10년(서기 809) 봄 정월, 달이 필성(畢星)성좌를 범하였다.
여름 6월, 서형산성(西兄山城)의 소금창고에서 소리가 났는데, 소가 우는 소리와 같았다.
벽사(碧寺)에서 두꺼비가 뱀을 잡아 먹었다.
가을 7월, 대아찬 김육진(金陸珍)을 당에 보내 은혜에 감사하고, 동시에 토산물을 바쳤다.
크게 가물었다.
임금의 숙부 언승이 그의 동생 이찬 제옹(悌邕)과 함께 병사를 이끌고 궁중에 들어가 반란을 일으켜 임금을 시해하였다. 임금의 동생 체명(体明)이 임금의 시체를 지키고 있다가 함께 살해당했다. 임금의 시호를 애장(哀莊)으로 추증하였다.
十年 春正月 月犯畢 夏六月 西兄山城鹽庫鳴 聲如牛 碧寺蝦蟆食蛇 秋七月 遣大阿飡金陸珍 入唐謝恩 兼進奉方物 大旱 王叔父彦昇與弟伊飡悌邕 將兵入內 作亂弑王 王弟体明侍衛王幷害之 追諡王爲哀莊
[네이버 지식백과] 애장왕 [哀莊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② 헌덕왕[憲德王] 편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三國史記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
시대명 신라, 재위기간 809년 ~ 826년, 연도 810년 ~ 826년

헌덕왕(憲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언승(彦昇)이며, 소성왕(昭聖王)의 친동생이다. 원성왕(元聖王) 6년(서기 790)에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가 대아찬의 직위를 받았고, 7년에 반역한 신하를 처형하여 잡찬이 되었고, 10년에 시중이 되었고, 11년에 이찬으로서 재상이 되었고, 12년에 병부령이 되었으며, 애장왕(哀莊王) 원년(서기 800)에 각간이 되었고, 2년에 어룡성 사신이 되었고,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상대등이 되었다가 이때에 와서 왕위에 올랐다. 왕비는 귀승부인(貴勝夫人)으로 각간 예영(禮英)의 딸이다. 이찬 김숭빈(金崇斌)을 상대등으로 삼았다.
憲德王立 諱彦昇 昭聖王同母弟也 元聖王六年 奉使大唐 受位大阿飡 七年 誅逆臣 爲迊飡 十年爲侍中 十一年 以伊飡爲宰相 十二年爲兵部令 哀莊王元年爲角干 二年爲御龍省私臣 未幾爲上大等 至是 卽位 妃貴勝夫人 禮英角干女也 以伊飡金崇斌爲上大等

14년(서기 822) 봄 정월, 왕의 친동생 수종(秀宗)을 부군(副君)으로 삼아 월지궁(月池宮)에 들어오게 하였다.[수종은 혹 수승(秀升)이라고도 한다.]
2월, 눈이 다섯 자나 내리고 나무가 말랐다.
3월, 웅천주(熊川州) 도독 헌창(憲昌)이 그의 아버지 주원(周元)이 임금이 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반역을 일으켜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 원년이라 하고, 무진ㆍ완산ㆍ청주ㆍ사벌 네 주의 도독과 국원경ㆍ서원경ㆍ금관경의 사신들과 여러 군과 현의 수령들을 위협하여 자기 부하로 삼았다.
청주 도독 향영(向榮)이 추화군(推火郡)으로 도망가고, 한산주ㆍ우두주ㆍ삽량주ㆍ패강진ㆍ북원경 등의 여러 성은 헌창의 역모를 미리 알아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지켰다. 18일, 완산주 장사 최웅(崔雄)과 조아찬 정련(正連)의 아들 영충(令忠) 등이 서울로 도망쳐서 역모를 알렸다. 임금은 즉시 최웅에게 급찬의 직위와 속함군(速含郡) 태수의 벼슬을 주고, 영충에게는 급찬의 직위를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장군 8명을 뽑아 서울의 8방을 지키게 하고, 그 후에 군사를 출동시켰다. 일길찬 장웅(張雄)이 먼저 출발하고, 잡찬 위공(衛恭)과 파진찬 제릉(悌凌)이 뒤를 따랐으며, 이찬 균정(均貞)과 잡찬 웅원(雄元)과 대아찬 우징(祐徵) 등이 삼군을 이끌고 출정하였다. 각간 충공(忠恭)과 잡찬 윤응(允膺)은 문화(蚊火)의 관문을 지켰다. 명기(明基)와 안락(安樂) 두 화랑이 모두 종군을 요청하여, 명기는 여러 낭도들과 함께 황산(黃山)으로 가고, 안락은 시미지진(施彌知鎭)으로 갔다. 이때 헌창은 그의 장수를 보내, 요충지를 차지하고 관군을 기다렸다. 장웅이 적병을 도동(道冬) 고개에서 만나 격파하였다.
위공과 제릉은 장웅의 군사와 연합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을 공격하여 이기고, 속리산(俗離山)으로 진군하여 적의 병사들을 쳐서 없앴다. 균정 등은 성산(星山)에서 적과 싸워 격멸시켰다.
十四年 春正月 以母弟秀宗爲副君 入月池宮[秀宗或云秀升] 二月 雪五尺 樹木枯 三月 熊川州都督憲昌 以父周元不得爲王 反叛 國號長安 建元慶雲元年 脅武珍完山菁沙伐四州都督 國原西原金官仕臣及諸郡縣守令 以爲己屬 菁州都督向榮 脫身走推火郡 漢山牛頭歃良浿江北原等 先知憲昌逆謀 擧兵自守 十八日 完山長史崔雄 助阿飡正連之子令忠等 遁走王京告之 王卽授崔雄位級飡 速含郡太守 令忠位級飡 遂差員將八人 守王都八方 然後出師 一吉飡張雄先發 迊飡衛恭波珍飡悌凌繼之 伊飡均貞迊飡雄元大阿飡祐徵等 掌三軍徂征 角干忠恭迊飡允膺 守蚊火關門 明基安樂二郞 各請從軍 明基與徒衆赴黃山 安樂赴施彌知鎭 於是 憲昌遣其將 據要路以待 張雄遇賊兵於道冬峴 擊敗之 衛恭悌凌合張雄軍 攻三年山城 克之 進兵俗離山 擊賊兵滅之

17년(서기 825) 봄 정월, 헌창의 아들 범문(梵文)이 고달산(高達山)의 도적 수신(壽神) 등 백여 명과 함께 모반하여 평양(平壤)에 도읍을 세우고자, 북한산주(北漢山州)를 공격하였다. 도독 총명(聰明)이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그를 잡아 죽였다.
十七年 春正月 憲昌子梵文 與高達山賊壽神等百餘人 同謀叛 欲立都於平壤 攻北漢山州 都督聰明率兵 捕殺之
[네이버 지식백과] 헌덕왕 [憲德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③ 흥덕왕[興德王] 편
삼국사기 제10권 신라본기 제10(三國史記 卷第十 新羅本紀 第十)
시대명 신라, 재위기간 826년 ~ 836년, 연도 826년 ~ 836년

흥덕왕(興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수종(秀宗)인데, 후에 경휘(景徽)로 바꾸었다. 헌덕왕(憲德王)의 친동생이다.
興德王立 諱秀宗 後改爲景徽 憲德王同母弟也
[네이버 지식백과] 흥덕왕 [興德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 8. 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④ 차원부 설원기 내용
 차원부설원기 58쪽에 의하면 “차원부는 문성인 류차달의 첫째아들 대광지백 효전의 후예이다.”
 59쪽 “차달은 고려의 병력을 수송하는 일에 열심히 근무하였으며 효전은 임금을 섬김에 있어 곡식이 없을 때에 흥원에서 구제의 곡물을 실어나름으로써 현릉의 정사에 공로를 세웠다. 나라를 위하여 실을 수 있는 수레와 양곡을 변통해 줌으로써 남쪽을 정벌할 때에 쌀을 수송하였다고 하여 특히 그의 부친에게는 차로서 달성하였다는 의미의 차달이란 세적지호를 주었으며 별도로 차씨로 나타내기 위하여 효전의 수공으로 차씨의 성을 주고 식읍 천호와 이어 연안을 관향으로 하도록 하였다”
 여기서 모순점은 차원부가 류차달의 아들 효전의 후예라는데 차문은 2000년 역사바로세우기운동을 하면서 류차달을 차달로 이름을 바꾸고 차무일의 38세로 격하시켰다. 그리고 차원부설원기에서 류차달의 공로를 효전에 한 것으로 변형시켰는데 식읍천호를 받았다면 고려개국공신록에 올라야 하는데 효전은 개국공신록에 없고 개국공신록에 올라 있는 류차달은 왕건이 차달이란 호를 내린 것이 아니며 왕건을 도와준 개국공신 이전에도 이름은 류차달이었다.
⑤ 신라의 왕, 국무총리급의 관직, 반란사건
 ㉠삼국사기 신라본기 애장왕편에 의하면 애장왕은 800년 13살에 왕위에 올랐고 병부령 김언승이 섭정을 했다.
  김언승은 상대등(현 국무총리 급)이고 김수승(42대 흥덕왕)이 시중이란 관직명이 나옵니다..
※주1-상대등은 귀족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신라 상대(박혁거세-무열왕), 신라 하대(선덕왕-경순왕)때의 현재의 국무총리격이며, 시중은 왕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신라 중대(문무왕-혜공왕)때의 현재의 국무총리격임
애장왕10년(809) 숙부 김언승이 병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임금(애장왕)을 시해하는데 차문이 말하는 차승색(신라승상, 류색)은 헌덕왕(재위: 809∼826) 시해를 실패하여 구월산으로 피신하였고 차공숙(류숙)→류진부→류무선(대승공 조부)→류보림(대승공 부)→류차달로 이어졌다고한다.
 신라 관직명에 현재 국무총리격에 승상이란 관직명이 없고 신라는 골품제도에 의하여 귀족이 아니면 상대등 각간 시중 등 최고 관직을 할 수 없는 나라이며 김언승이 애장왕 섭정한 것을 승상 차승색이 섭정하였다고 한다. 차마 상대등이나 시중 차승색으로 하지 않고 승상이란 관직을 만들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편에 의하면 헌덕왕은 809년 왕위에 올랐고 822년 최웅과 영충이 역모를 알려 군사를 출동시켜 이기고 속리산으로 진군하여 적을 없앴고 825년 범문이 고달산에서 모반하여 평양에 도읍을 세우고자 공격하였으나 총명이 법문을 죽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편에 의하면 흥덕왕(김수종)은 826년 왕위에 올랐다.
 ⑥ 차문은 차승색이 헌덕왕때 승상으로 헌덕왕을 시해하려다가 발각되어 구월산으로 피신하였다고 하는데 신라본기에 의하면 헌덕왕때 속리산과 고달산에서 반란이 나는데 구월산은 나오지 않는다.
3. 차원부의 죽음
① 조선왕조실록 : 배극렴을 설득시킨 이성계
  배극렴(裵克廉 1325~1392)은 조선조의 개국공신으로,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진주, 상주의 목사를 역임하고 이후 이성계와 함께 여러 차례 왜구를 토벌하였습니다.
  고려 공민왕으로부터 총애를 받던 배극렴은 왕의 시역 사건이 일어나자 정사에 뜻을 버리고 부인과 함께 충주 고을로 낙향하였습니다.
  이성계가 왕실을 한 손에 휘어잡게 되고, 자신의 정권을 위한 명분으로 고려 중신이었던 우현보, 이색, 정몽주, 배극렴과 같은 사람들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는 마음으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을 고집하자 우현보와 이색은 하옥하였고, 정몽주는 격살하였습니다.
  이성계는 배극렴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팔도 수령 방백에게 찾아내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연히 배극렴이 충주 고을에서 은거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직접 찾아갔으나 첫 번째, 두 번째는 못 만나고 세 번째 가서야 동굴 속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배극렴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성계는 앞으로의 집권 계획을 밝히고 협조해 줄 것을 간청하자 배극렴은 숙고 끝에 다시 정사에 나서 개국공신으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입니다.
♧태조실록 2권, 태조 1년 11월 26일 계묘 1번째기사 1392년 명 홍무(洪武) 25년
◎문하 좌시중 성산백 배극렴의 졸기
然不學無術, 無所建白, 至於建儲之議, 乃阿上意, 請立幼孼, 自以爲功, 識者歎之。 卒年六十八, 諡貞節。 無子.
세자를 세우는 의논에 이르러서도 이에 임금의 뜻에 아첨하여 어린 서자를 세울 것을 청하고는 스스로 공(功)으로 삼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탄식하였다. 졸(卒)하니 나이 68세였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아들이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1책 2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1책 36면
  ② 조선왕조실록 : 조준
♧태종 5년(1405 을유 / 명 영락(永樂) 3년) 6월 27일(신묘) 1번째기사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평양 부원군(平壤府院君) 조준(趙浚)의 졸기
  강씨가 개국에 공이 있다고 칭탁하여 이를 세자로 세우려고, 준(浚)과 배극렴·김사형·정도전·남은 등을 불러 의논하니, 극렴이 말하기를,
“적장자(嫡長子)로 세우는 것이 고금을 통한 의(義)입니다.”
하매, 태상왕이 기뻐하지 아니하였다. 준에게 묻기를,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준이 대답하기를,
“세상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먼저 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이 있는 이를 먼저 하오니, 원컨대, 다시 세 번 생각하소서.”
하였다. 강씨가 이를 엿들어 알고, 그 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리었다. 태상왕이 종이와 붓을 가져다 준(浚)에게 주며 이방번의 이름을 쓰게 하니, 준(浚)이 땅에 엎드려 쓰지 아니하였다. 이리하여, 태상왕이 마침내 강씨의 어린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삼으니, 준 등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③ 왕자의 난
  제1차 왕자의 난은 1398년 왕위 계승권을 에워싸고 일어난 왕자간의 싸움으로 방원의 난으로도 불리며 1398년(태조 7) 음력 8월 정도전·남은·심효생 등이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이유로 여러 왕자를 궁중으로 불러들인다. 이방원은 이를 정도전 등이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으로 해석하여,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분을 세워 10월 5일(음력 8월 25일) 이방의, 이방간 등 여러 왕자들을 포섭하고 이숙번, 민무구, 민무질, 조준, 하륜, 박포, 이지란 등 휘하 부하들을 시켜 군사를 일으켰다.
  정도전 남은 박위 류만수(좌상공파조), 장지화, 이근, 심효생을 살해하였고 세자 이방석은 폐위하여 귀양 보내는 도중에 살해하고, 이방석의 동복형 이방번도 함께 죽여 버렸다.
 ④ 차원부 설원기 7쪽에 “방원도 왕자의 난 때 왕조실록에서 방번 방석을 여러차례 서자라는 이름을 쓰면서 적장자 왕위계승을 주장” 이라하고 6쪽에 “1398년 초의로 태조를 방문하고 그의 문객으로 궁중에 머물렀다. 이 때 특히 왕위 계승 문제 등이 화제가 되었는데 난세에는 개국에 공이 가장 많은 왕자가 왕위를 계승해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하여”라고 하는데 고려초기에 서자라는 표기법이 없었으며 1398년 왕자의 난이 나던 해이다. 태조 이성계에게 이방원을 왕으로 하라고 하고 차원부는 궁궐을 떠났는데 궁궐을 떠난 직후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차원부가 송원과 마원 땅 부근에 이르렀을 때 이방원의 오판과 하륜의 음모가  있어 살해되었다고 한다.
  ⑤ 이성계가 배극렴을 세 번 찾아간 왕조실록 내용과 이성계가 차원부에게 벼슬로 혹은 조서를 어려 차례 보낸 것(6쪽)과 이성계 꿈결에 차원부 토옥(토담집)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고 매일 다섯 번씩 칙서가 석달이 다되도록 내려오므로(31쪽)의 차원부설원기 내용중 어느 것이 맞는 이야기인가요?
  왕조실록 내용 중 “이성계가 왕실을 한 손에 휘어잡게 되고, 자신의 정권을 위한 명분으로 고려 중신이었던 우현보, 이색, 정몽주, 배극렴과 같은 사람들의 힘이 절실하게 필요하게 되었습니다.”는 이야기와 5쪽 “이성계는 전치운용의 경험이 부족한 정도전 등 신진 소장들 만으로는 나라를 운용할 수 없어 정치 경험이 풍부한 고려 구신들을 포용하려 하였다.”는 이야기는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내용이다.
  왕위를 세상이 태평하면 적장자를 먼저 하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이 있는 이를 먼저 한다는 배극렴 조준의 왕조실록 기사와 차원부가 이성계에게 말했다는 것의 진실은 무엇이며 1차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죽은 자 중에 차원부가 없는데 차원부가 하륜에게 희생되었다고하는 근거가 무엇인가요?
4. 개성 왕씨
  편년통록(고려 의종 때 김관의가 고려왕실의 세계에 관해 정리한 역사책)의 고려 왕실 기원에 관한 글에 의하면 왕건의 6대조 호경(성골장군)→강충(송악군 거주)→보윤→딸 진의(당 숙종 부인)→작제건(용왕 딸과 결혼)→용건(송악태수)→왕건으로 이어진다.
 강충의 둘째 아들 보육은 은둔생활을 한 사람으로, 소변을 보니 삼한(삼국의 별칭)에 넘쳐 흘렀다는 꿈을 꾸어 마치 김유신의 누이와 비슷한 설화를 보여준다. 보육의 딸 진의는 당(唐)나라 숙종의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 건이었다. 그는 활을 잘 쏘아 신궁이라 불렸으며 용왕의 딸과 결혼했다고 한다. 아버지인 용건은 풍수지리설을 만든 도선의 말에 따라 성씨를 왕씨로 고치고 집을 지어 삼한을 통일할 아들을 얻었다고 한다.
  편년통록 내용이 원파록에서도 나온다.
① 보윤 딸 진의가 당 숙종 아이를 갖게 된 것을 차승색 아들이 차공숙 차공도가 있는데 차공숙은 류숙으로 차공도는 왕공도로 변하여 개성왕씨 시조라고 한다. 그러나 강충이 송학에 살았다는 것은 사실이기에 당나라에서 온 것이 아니고 송악 호족으로 보아야하고 왕건 아버지 할아버지는 왕씨가 아닌데 중국(당나라) 왕공도 후손이라고 한다.
② 조선 태조 3년 왕씨를 죽이라는 상소를 받아들여 정남진 함부림 윤방경 오몽을 손흥종 심효생 왕씨를 제거하려 보내지고 윤방경은 강화도에 있던 왕씨를 나루에 빠뜨려 죽이고 손흥종은 거제도에 있는 왕씨를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내용은 차문 70명을 조영규 정도전 함부림 하륜이 죽였다고 한다.
③ 문종은 왕씨 후예를 찾아 선조 제사를 받들게하고 공주에 숨어 살던 왕지우가 밀고 되어 붙잡혀오자 관직을 숭의전부사 관직을 내리고 왕순례라는 이름을 내려 왕씨 멸족령을 해제한 내용을 차문은 차원부에게 시호를 내렸다고한다.
  차문은 1456년 5월(경태7년) 세조2년에 받았다고 위조한 교지를 차문에서는 자랑하지만 진짜로 순조때 받은 차원부 교지는 숨기고 있는 사연을 알려 드린다.
교지에는 의정부좌찬성과 문하시중을 증직(贈職)하고,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내린다고 쓰여 있다.

  차원부 교지가 가짜라는 증거로 세조2년에 교지(문절시호)를 받았는데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 10년(1786) 9월 7일과 정조 11년(1787) 2월 6일 그리고 정조12년(1788) 4월4일 세 번 증시(贈諡: 왕이 시호를 내려주는 일)를 요청하였는데 정조가 하락하지 않았는데 정조가 죽자 정조 아들 순조가 11살(1800년 7월)에 왕위에 올랐고 순조4년 1804년 문절이란 시호를 받은 잔치를 순천에서 합니다. 그러나 차문에서는 순조때 받은 시호(교지)는 족보에서조차 숨기면서 말하지 않고 세조때 받은 위조 시호(교지)를 광고하고 있다.
  정순왕후 김씨(정조의 할머니)의 순조 수렴청정을 틈타서 차석주가 중심이 되어 시호를 받은 기록이 승정원 일기 1804년 11월 20일(순조4년) 李顯默, 以吏曹言啓曰, 贈諡文節公車原頫延諡, 來十二月十二日, 定行於全羅道順天地云矣, 散啓, 傳言, 知道.(이현묵, 이이조언계왈, 증시문절공차원부연시, 래십이월십이일, 정행어전라도순천지운의, 산계, 전언, 지도)
※해석 : 이현묵(1804년 동부승지)이 (순조에게) 이조의 일을 아뢰기를“증시 문절공 차원부의 연시가 12월 12일 전라도 순천 땅에서 행해진다고” 하여 아룁니다. (순조가) 전교하기를 “알았다”를 참조
개성왕씨중앙종친회 왕제구 사무국장은 왕씨들이 田 玉 車 申 씨로 변성 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고려 성원록을 보면 왕자들이 어머니 성씨를 따라 柳 林 李 등으로 성씨를 바꾼 내용이 나오는데 희종 손자 관평공 혜의 아들이 문화류씨 곤산곤파(본래는 약목류씨)라는 설이 있으나 개성왕씨와 문화류씨는 관련이 없다고 한다.
5. 차원부 설원기의 조작된 내용
  186쪽 “경태 7년(세조2년) 5월 17일에 가정대부 행 형조참판 신 박팽년은 하교를 받들어 삼가 기록한다”라되어 있는데 박팽년은 1456(세조2) 6월 2일 잡혀 갔으며 6월7일 옥중에서 사망하였는데 평소 세조를 '나으리'라고 부르고 주상이라 하지 않았으며 충청감사 때 올린 장계에 ‘신’자가 하나도 없었으며 1455년 세조가 왕위를 빼앗자 울분을 참지 못해 경회루 연못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였는데 세조의 명을 받아 차원부설원기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이다.
6. 결론
  류상운 선조가 차문 무자보 서문을 안 쓴 것을 썼다고 조작된 것처럼 배극렴이야기를 차원부 이야기로 조작하였고 하위지 성삼문 박팽년 등 후손들이 역적으로 몰려 살기에 힘들고 뿔뿔이 흩어져 살았기에 차원부 설원기를 왕명으로 쓰지 않았다는 것을 하위지 박팽년 후손들이 반박하지 못하는 상황과 충절을 중시하는 조선 사회 기류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사육신이 만든 것처럼 꾸민 차원부설원기 위서의 이야기를 류문이야기로 변형하여 사용하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전 보존회장 류**님의 권유로 차문관련 자료를 찾지 않았으나 2016년 대동사 향사를 지내면서 차문과 같이 좌상공종중에서 자산을 투자하여 건립한 대동사와 위토답의 등기이전 소송을 하는 것을 보면서 차문의 자료를 더 확인하여 알리고자 합니다.
  2016년 대동시 향사이후 같은 선조의 후손으로 대접하고 몇 번 만났으나 문화류가 이기를 포기한 사람에게 더 이상 대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음에 또 다른 차문 자료를 정리하여 공개할 예정입니다. 타문 자료를 공개하고 싶은 생각은 없고 공개할 이유도 없지만 일부차문에서 대동사 향사를 하고 있는 한 대응해야하는 슬픈 현실임을 이해하여 주십시오.
 한가지 제안하자면 차문글을 “뿌리깊은버드나무카패”에 자주 올리시는 얼굴과 인적사항을 모르는 류문 여러분과 류교수님이 대종회에서 만나 그간 과정과 앞으로 방안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물론 당일 식사 경비는 제가 부담합니다.

출처 :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글쓴이 : 夏谷류재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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