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의 족보 “가정보”는 역사학계에서도 사료로 사용하고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중요한 사료이다.
문화류씨는 가정보에서부터 현재의 족보까지 시조(1세) 대승공 류차달에서 7세
문간공(文簡公) 류공권(柳公權)에 이르기까지 독자로 내려왔고, 문간공에 이르러 두
아들이 있어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져 온 것으로 기록되어 왔다. 그 가운데
장자 류언침(柳彦沉; 彦琛으로도 씀)계는 갑파(甲派)로, 차자 류택(柳澤)계는
을파(乙派)로 불리고 있다.
그런데 2006년에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박용운 교수가 “한국사학보”
제24호(2006년 8월)에 “유주(시령 ․ 문화)류씨의 사례를 통해 본 고려사회 일단면
- ‘가정보’를 참고로 하여-”라는 논문에서 류공권의 장자는 택이며 차자는 언침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갑파와 을파가 뒤바뀌어져 있다는 주장이다.
그리고 이 주장은 2008년에 완성된 문화류씨 대동보인 “문화류씨세보”(무자보)의
총목(總目)편에 ‘문화류씨세보편수위원회’의 명의로
“문간공양자차서고증(文簡公兩子次序考證)”(p.146-147)으로 실렸다. 곧 류공권의
두 아들의 순서가 뒤바뀌었음을, 박용운의 논문 내용(그 안에 다루어진 원 자료들)을
근거로, 천명하고 있다.
그런데 확인해보니, 박 교수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이미 몇몇 학자들도 같은 견해를
갖고 있는 것임이 드러났다. 이런 것은 옛날 일이라 한 점 의혹 없이 사실을 알아내기가
어려우며, 어쩌면 끝까지 결론을 낼 수 없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류차문제가 집안의
바깥과의 문제였다면 이러한 차서(次序)문제는 집안 내부의 문제라서 접근하는 것이
그 못지않게, 아니 어떤 관점에서는 더 조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문제가
나왔을 때 가능한 한 탐구하고 조사하여 사실에 접근하는 것은 후손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학자들의 연구는 나름대로 객관성을 최대의 가치 중 하나로 삼기 때문에
더욱 경청해야 한다. 박 교수의 경우, 차서문제와 세세한 몇 부분을 제외하고는
문화류씨를 상당히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고, 위대한 집안임을 칭송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 繼高, 繼祖 문제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현재 족보에는 제대로 되어 있던데,
“가정보”에는 어떻게 나와 있는지, 마침 그 페이지가 없어서 궁금함.
고려에 대한 정사(正史)의 기록은 많지 않기 때문에 기록되어 내려오는 것보다 내려오지
않은 것이 훨씬 더 많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정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해서 반드시
없던 일로 볼 수 없으며, 정사에 기록되지 않고 사가(私家)의 자료(예: 족보)에만 기록되어
있는 경우 꾸며낸 일이라고 볼 수도 없으며, 정사의 기록과 사가의 문헌의 기록이 다른
경우 반드시 정사의 기록이 우선한다고 볼 수도 없다.
류공권의 자녀에 대한 정사의 기록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이상국집”(이규보)
등에서 몇 건 찾을 수 있다. 사가의 자료로서는 “류공권묘지명”과 족보 특히 “가정보”
등이 있다.
이 글에서는 이런 기록들을 정리한 후, 차서(次序)문제에 대해 토론하고자 한다.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 존칭은 모두 생략했다.
1. 류공권의 자식에 대한 기록
1-1. “고려사” 열전 ‘류공권’ 항목
子澤彦琛彦琛同知樞密院事 // 澤登第官至尙書右僕射翰林學士承旨
아들은 류택(澤), 류언침(彦琛)인바 유언침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종2품)이었다. //
류택은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이 상서 우복야(정2품) 한림학사 승지(정3품)에
이르렀었다.
* 택을 형으로 언침을 동생으로 기술하고 있음. 택은 과거에 급제했음을 명시.
* 류공권(1132-1196): “고려사”에 “1196년(명종 26년) 향년 65세로 사망”이라 나옴.
* 동지추밀원사: 추밀원(樞密院)의 종2품 벼슬
* 복야(僕射): 상서도성(尙書都省)·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상서성(尙書省)의 정2품 벼슬.
좌복야(左僕射)·우복야(右僕射)가 있었다. 상서 우복야는 상서도성의 우복야를 의미하는
듯. 상서도성은 백관(百官)을 총령(總領)하던 관아이다.
*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한림원(翰林院)의 정3품 벼슬.
1-2.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의 다른 기사들
명종 24년(1194), “고려사”
봉어(奉御: 정6품) 류택(柳澤)을 금나라에 파견하여 토산물을 선사하고 ....
*봉어: 상식국(尙食局) · 상약국(尙藥局) · 상의국(尙醫局) · 중상서(中尙署) 등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6품이다. 임금의 비서라 생각하면 됨.
희종 6년(1210), “고려사”
六年 六月 樞密院副使崔洪胤知貢擧秘書監柳澤同知貢擧取進士
賜金泓等三十三人明經七人恩賜七人及第
[희종] 6년 6월에 추밀원 부사 최홍윤(崔洪胤)이 지공거로 되고 비서감(종3품)
류택(柳澤)이 동지공거로 되어 진사를 뽑았는데 ....
고종 9년(1222), “고려사”
柳澤爲尙書右僕射 .... 柳彦琛爲刑部尙書判閣門事
류택(柳澤)을 상서 우복야(정2품)로, .... 류언침(柳彦琛)을 형부상서(정3품) 판합문사(정3품)로 [임명함]
고종 10년(1223), “고려사”
류택(柳澤)을 한림학사 승지(정3품)로 임명하였다.
1227년(고종 14년), “고려사”
柳彦琛爲樞密院使禮部尙書
류언침(柳彦琛)을 추밀원사(종2품) 예부상서(종3품)로 [임명함]
1227년(고종 14년), “고려사절요”
류언침(柳彦琛)ㆍ최정분(崔正份)을 아울러 추밀원사(종2품)로 [임명함]
* 추밀원사(樞密院使) = 고려 시대에, 추밀원에 속한 종2품 벼슬. 헌종 1년(1095)에 중추원사를 고친 것이다.
1-3. “동국이상국집”의 류언침 관련 글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이규보(李奎報), 1251년)
柳彥琛讓正議大夫監門衛攝上將軍不允批答
... 卿生長名家。熏習善訓。撿身持法。勿隳乃父之風。寫字綴詞。不讓文臣之手。
然不喜腐儒之挾策。乃獨希飛將之立功。早戴鶡冠。久陪龍仗。當東都之犯順也。
麾百騎而出平梟獍。及北虜之肆淫也。尹千人而往掃犬羊。載惟積累之功。
何吝甄崇之典。玆加峻級。用示異恩。秩視八座之資。班在九卿之右。是猶慊爾。何以讓爲。
류언침(柳彦琛)이 정의대부(正議大夫: 정4품) 감문위 섭상장군(監門衛攝上將軍)을
사양한데 대한 불윤비답
“.... 경(卿)은 명문(名門)에서 생장하여 가정의 훌륭한 교훈을 받았도다. 법도를 지키는
일거일동은 부친의 유풍(遺風)을 욕되게 함이 없고, 글자를 쓰고 글을 지음에 있어서는
문신(文臣)의 솜씨에 비해 손색이 없다. 그러면서도 썩은 선비처럼 책을 끼고 다니는
것을 즐기지 않고, 용맹한 장군으로서 공을 세우기를 희망하였다. 그리하여 일찍이
갈관(鶡冠=무관(武冠): 무사의 관)을 쓰고 궁궐을 호위하였다. 앞서 동도(東都 경주)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엔 1백 기(騎)를 지휘하여 역적들을 평정하였고, 뒤에 북로(北虜)가
침범했을 때엔 1천인의 병(兵)의 장(長)이 되어 오랑캐들을 휩쓸었도다. 여러 번 쌓은
공을 상고하건대 어찌 융숭한 상을 내리는 것을 아끼겠는가. 이에 높은 계급을 더하여
특별한 은전(恩典)을 보이는 바, 관질(官秩)은 팔좌(八座)*의 자급이 되고 반열은
구경(九卿)의 위에 있게 하였도다. 이것도 오히려 부족한데 어찌 겸양을 하는가.”
* 감문위(監門衛): 궁성(宮城) 내외의 여러 문을 지키는 일을 담당하였던 군대
* 섭(攝): 섭직(攝職)을 의미. 다른 관리를 대신하여 임시로 벼슬을 맡는 것.
* 팔좌(八座): 판서에 해당하는 정2품 직질의 고급 관원을 가리킴.
* 이규보는 류공권이 과거에서 뽑아주었고, 류공권의 문하생이었음.
1-4. 류공권묘지명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류공권의 지석(誌石)*이다. 사진은 구할 수 없었다.
지석 자체에는 이것이 언제 만들어지고 묘지명은 누가 쓴 것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다.
크기는 세로 35.8 cm 가로 63.6 cm이며, 글씨는 크기가 0.9 cm이고, 해서이다.
*지석(誌石): 죽은 사람의 성명·생몰 연월일·행적·무덤의 좌향 등을 기록하여 무덤 앞에
묻는 판석 또는 도판(陶板).
다음은 “朝鮮金石攷”(카츠라기 수에지(葛城末治), 大阪屋號書店, 1935, 일어로 쓰임)에
나온 설명이다.
장단(長湍) 류공권묘지(柳公權墓誌)
이 묘지(墓誌)는 경기도 장단군에 옛날에 속했던 현이었던 송림현(松林縣)*의
서산(西山)에서 출토되었는데, 지금은 이왕가(李王家)박물관[현 국립중앙박물관]에
저장되어 있다. 지석의 세로는 1자1치8푼(35.8 cm)이고 가로는 2자1치(63.6 cm)이다.
[... 류공권에 대한 설명 ....]
묘지(墓誌)를 넣은 것은 곧 매장할 때이었고, 고려 명종(明宗) 26년
병진(丙辰)(1196년)이다. 묘지(墓志: 墓誌의 잘못인 듯)의 찬자(撰者: 지은 사람),
서자(書者: 글씨를 쓴 사람)는 모두 밝혀지지 않았다. 글씨는 크기가 3푼(0.9 cm)이고
해서(楷書)이다.
* 송림군(松林郡) :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지역에 있던 고려시대의 군(郡). 당시
왕경(王京) 개성부(開城府)에 속해 있었다.
묘지명에 나온 류공권 자녀에 관한 기사:
生子男二人女子一人
長男今爲入內侍試戶部郎中兼大子內直郞
次男今爲內侍精勇攝別將
女適天水子今爲工部郎中知制誥
자녀로 2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지금 내시 시 호부낭중(정5품) 겸 대자내직랑(종6품)(內侍 試戶部郞中 兼
大子內直郞)이며,
차남은 지금 내시 정용섭별장(정7품)(內侍 精勇攝別將)이다.
딸은 윤씨 집안의 아들[天水子]에게 시집갔는데 지금 공부낭중(정5품)
지제고(工部郞中 知制誥)이다.
* 시(試): 시직(試職)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직은 벼슬아치의 품계보다 2품
이하로 낮게 임명하는 벼슬을 말한다.
* 낭중(郎中): 어사도성(御事都省) · 상서도성(尙書都省) ·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 ·
상서성(尙書省) · 육관(六官) · 상서육부(尙書六部) · 상서고공사(尙書考功司) ·
상서도관(尙書都官) · 육조(六曹) 등에 두었던 정5품 벼슬. 또는 그 벼슬아치.
* 대자: 묘지명을 읽은 두 사람의 학자가 모두 ‘대자’로 읽고 있다. 태자(太子)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 내직랑(內直郎): 동궁(東宮)에 딸린 종6품 벼슬.
* 정용(精勇): 중앙의 육위(六衛)와 지방의 주현군(州縣軍)에 두었던 병종의 하나.
* 별장(別將): 이군(二軍) · 육위(六衛)와 도부외(都府外) · 의장부(儀仗府) ·
견예부(堅銳府) · 충용사위(忠勇四衛) 및 지방 주현군(州縣軍) 등에 두었던 정7품의
무관 벼슬.
* 天水子: 천수(天水)는 중국의 감숙성(甘肅省) 동부에 있는 지명으로, 고려의
윤씨(尹氏)들이 그들의 출신지역으로 이 지명을 흔히 썼다.
* 지제고(知制誥): 임금의 조서(詔書)나 교서(敎書) 따위의 글을 짓는 일을 맡은 벼슬.
1-5. 가정보
가정보의 기록은 흥미롭게도 류공권의 사적을 다음과 같이 맺고 있다.
.... 生子左僕射澤
“아들 좌복야 택을 낳았다.”
그리고 그 다음에 ‘택’의 사적을 적고 있다. 이것만을 보면 아들이 하나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류승(柳陞)의 경우에도 여러 아들 중에 “문화군(文化君) 인기(仁琦)”만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이상한 것이 아니다. 곧 자손 중에 사적편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만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것은 사적편의 인물들의 부자관계를 확인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본문의 계보에는 당연히 딸(사위)과 두 아들이 다 나온다.
계보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柳公權 --------- (女) 尹威 ------- 尹克敏 -------- 尹敦, (女)許珙, (女)崔澄
參知政事 禮賓卿 政堂
文簡公
柳彦琛 ------- 柳淳 -------- 柳旱雲, 柳成庇, 柳資成,
密直使 密直兼翰林學士 柳良梓, 柳仁庇 **
古名英綽(영작) 監門衛上護軍
** 현재 족보에는 柳成潤, 柳元庇가 더 들어 있음.
柳澤 -------- 柳璥 --------- (女)閔萱, 柳陞
左僕射 中贊
娶內侍執奏李璘女 古名瑊(감)
卽我OO六代祖也 文正公
娶張世儀女
1-6. 류언침묘지명
이것은 “류공권묘지명”과는 달리 일반적인 고려시대의 금석문 관련 문헌에는 실려 있지
않고, 다만 문화류씨 족보에 실려 전해오고 있다. 충경공파보에도 무자보(2008년)에
실려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이 실려 있었다.
이것을 찾아낸 설명(成均館進士 李建芳)에 의하면 “1916년에 개성(開城)의 민가에서
발견했다”고 하며, “상서공(尙書公: 류언침)의 지석(誌石)은 꺼리는 자가 있어 그
드러남을 혐의(꺼리어 싫어함), 부수어 땅에 묻어버렸다”고 하며 읽을 수 있는 글자가
많지 않음을 한탄하고 있다. 이런 사정이지만 장례를 지내며 땅에 묻는 지석(誌石)이기
때문에 실제 큰 비중을 지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을 몇 가지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 류언침묘지명
- 1행. 문간공 류공권의 아들임을 밝히고 있다. 1행 하단의 “좌복야”는, 류언침의 벼슬은
3행 아래부터 계속 서술하고 있고, 류택의 벼슬이므로 류택과의 관계를 밝히고 있는
부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전후 부분은 사라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 3행. 신종(神宗) 때가 명기되어 있다. 신종 1년은 1198년이고 다음의 희종 1년은
1205년이다.
- 4행. 감찰(監察, 종6품). 감찰은 벼슬아치를 규찰하며 기율과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맡았던 관아인 어사대(御史臺) · 사헌대(司憲臺) · 감찰사(監察司) · 사헌부(司憲府)에
두었던 벼슬인, 감찰어사(監察御史) · 감찰사헌(監察司憲) · 감찰사(監察史) ·
감찰내사(監察內史) 등을 줄여서 이르는 말.
- 4행. 계해, 신종 6년(1203년), 영우군(領右軍)
* 영우군이라는 직책은 나오지 않는데, 아마도 우군을 다스리는 관원을 의미하는 듯함.
- 4행. 을축, 희종 1년(1205년), 출수(出守): 나아가서 어느 곳을 지킴.
- 5행. 신미, 희종 7년(1211년), 안렴사(按廉使): 한 지방을 맡아 다스리던 장관.
- 5행. 임신, 강종 1년(1212년), 통령(統領), 4품이라 나옴. 통령: 조운선(漕運船) l0척을
거느리는 직임. 또는 그 직임에 있는 사람.
왕이 내리는 상을 받은 듯.
-6행. 병자, 고종 3년(1216년), 찰방사(察訪使): 백성의 질고(疾苦)를 묻고 관리(官吏)의
선악(善惡)을 살피기 위하여 지방에 파견하던 임시 벼슬, 또는 그 벼슬아치.
이 부분에 능력 있게 일을 처리한 것이 표현되어 있는 듯.
- 8행, 기묘, 고종 6년(1219년)
- 9행, 경신, 고종 7년(1220년)
- 9행, 신미, 1221년, 상장(上將): 상장군을 뜻하는 듯. 상장군은 정3품의 무관직(武官職).
-10행, 을유, 고종 12년(1225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정3품) 추밀원부사
좌산기상시(정3품)
-10행, 1226년, 동지추밀원사(종2품)
-11행, 상서(尙書, 정3품)
-11행, 어느 해 가을, 위중한 병에 걸림.
* 彌留之疾: 오래 끄는 병, 위중한 병.
-12행, 무자, 고종 15년(1228년), [언침을] 전송하는 날 탄식하거나 울지 않는 이가
없었음.
* 祖送之日 = 길 떠나는 사람을 전송하는 날.
- 13행, 글씨를 잘 썼음.
其筆法殊有父兄得神OOOOO與迎賓飮OO類皆O公之筆法正所謂柳氏有子者也
- 15행, 사망시 향년 62세였다는 말인 듯.
- 16행, 자녀에 1남2녀가 있었다는 말인 듯. 가정보에는 1남(柳淳)만 기록되어 있음.
- 나머지는 명(銘)일 듯.
1-7. 기타 류언침 관련 기사들
류언침을 진주류씨의 시조로 기술하는 기록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이런 식이다.
柳氏本出文化。高麗功臣車達之後。至密直事彥沈。移籍晉州。遂爲晉人。
“류씨는 원래 문화에서 나왔다. 고려 공신 류차달의 후손이다.
밀직사*1 언침*2에 이르러 적(籍)을 진주로 옮겨서 진주류씨가 되었다.”
*1. 밀직사(密直事), 추밀원사(樞密院事) 등으로 씀.
*2. 彥沉, 彥沈, 彦琛 등으로 씀. 彦琛의 표기가 다수.
*3. 진주로 적을 옮긴 이유로 ‘공을 세워 진주에 식읍을 받았음’을 명시하는 경우도 있음.
1-8. 류공권의 사위 윤위(尹威) 관련 기록
윤위는 “고려사”에 직접 나오지는 않고,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 상세히 나오며,
“동사강목”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기사가 나오는 등, 뚜렷한 행적을 남기고 있다.
“동국이상국집”에서는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윤위를 류공권의 사위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자신을 윤위의 ‘아우뻘’이라 지칭하며 그가 손위임을 드러내고 있다.
윤위의 벼슬과 명칭은 대개 시기가 명기되지 않은 채로, 국자박사(國子博士, 정7품),
벽송거사(碧松居士), 기거랑(起居郞), 사업(司業, 종4품), 염찰사(廉察使, 1200년),
낭중(郞中, 정5품) 등이 나와 있다.
이중 주목되는 것이 낭중 벼슬인데, 이규보가 윤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동국이상국전집 제26권, 낭중(郞中) 윤위(尹威)에게 드리는 서(書):
“모월 모일에 모관(某官) 아무는 재배하며 천조 낭중(天曹郞中; 천조는 이조(吏曹)를
말함) 좌우(座右)에 짧은 글월을 올립니다. 저는 상국(相國: 재상) 하동공(河東公:
류공권)의 문하생인데, 수천 수백 명 속에서 뽑아 제일에 서치(署置 관리임명)하여
주시니 이는 특별한 대우라 하겠습니다. 각하(閣下)께서는 상국의 사위[玉潤]이시니
저를 대하기를 아우뻘로 하시는 것이 마땅하거니와, 무릇 상국께서 저를 대하시는
시종(始終)을 각하께서도 아셔야 하겠기 때문에 의심없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상국께서
한창 중직(重職)에 계실 적에 후진(後進)을 밀어 주기 좋아하셨기 때문에, 혜택을 입고
은덕[滋液] 본 선비들이 적지 않았는데, 제가 그 문하에 있으면서도 홀로 그런 은혜를
입지 못한 것은, 상국의 과실이 아니라 곧 저 자신이 저지른 것입니다. ...”
이후에는 자신이 젊었을 때 술을 많이 마시고 미친 듯이 살았음을 이야기하고, 류공권이
왕에게 추천했었으나 왕이 미치광이라는 이름을 듣고 쓰지 않았음을 밝힌다. 그러나
자신은 진짜 미친 것이 아니고 쓰임을 받을 기회를 기다리고 있기에, 윤위가 마침
전선(銓選: 인물을 전형하여 선발함)하는 소임을 맡았으니 자신을 써주기를 바란다는
말을 하고 있다.
과연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행적을 살펴보면 소년시절 술을 좋아하고
자유분방하게 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 결과 사마시(司馬試)에 세 번 낙방한 후,
1189년과 1190년에 각각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하였고, 1199년이 되어서야
전주사록(全州司錄)이 되었다고 한다. 위의 편지에 류공권이 사망한 후라는 암시는
보이지 않는다. 문과 급제 후 류공권에게도 부탁하며 몇 년을 기다리다가 마침 윤위가
이조의 낭중으로서 사람을 선발하는 직위에 있게 되자 청원의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대략 1194, 5년 즈음의 편지일 것이다.
2. 토론
2-1. 벼슬의 검토
이상의 사료들을 보면 류택은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왕 가까이 보좌하며 1194년에
봉어(奉御: 정6품)의 직책으로 금나라에 사신으로 갔고, 1210년에는 과거를 주관했다.
그리고 1222년에는 정2품의 우복야가 되고, 1223년에는 정3품의 한림학사 승지가
되었다.
류언침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 1227년 종2품의 추밀원사로 임명되는 기사가
나올 뿐이다. 한편 “동국이상국집”의 류언침 관련 “불윤비답” 글에는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 짓지만 일찍부터 무관이 되어 공을 세워 섭상장군, 곧 상장군으로 임명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이때는 정4품의 정의대부(正議大夫) 품계이었음을 보면 1227년 이전의
일이었다고 짐작된다.
묘비명은 그것이 조작되었다는 증거가 없는 한 장례시에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가장
직접적이고 정확한 사료가 된다. 류언침묘지명은 마모된 부분이 많아서 아쉽지만 남아
있는 글자들을 통해서 대략의 내용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류언침은 종6품의
감찰(監察)이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벼슬이고 그 이전의 기록도 묘지명에는 있을
가능성이 높지만 글씨가 사라져 읽을 수 없다. 감찰은 무반(武班)은 아니다. 그리고
1203년 영우군(領右軍)에서 1221년 상장군까지 무관직 내지 지방 관리를 지냈다.
그 후에는 정3품과 종2품의 문반(文班)직을 역임했다.
류공권의 사위인 윤위는 차서문제에는 직접 관련은 없는데, 다만 그에 대한 기록들은
그가 류공권의 사망 전후에 정5품 낭중을 하고 있었고 중요한 보직을 하고 있었던
중요한 인물임을 짐작케 해준다.
여기서 “류공권묘지명”에 나와 있는 사위의 낭중(郎中) 벼슬 기록이 타당함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 중요한 사실을 암시하는데, 바로 묘지석이 1196년의 류공권 사망 당시에
만들어져서 땅에 묻힌 것으로 추측된다는 것이다. “朝鮮金石攷”(1935년)의 카츠라기
수에지(葛城末治)라는 학자도 동일한 내용의 묘사를 하고 있다.
따라서 류공권의 묘지명을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사료로 삼아야 할 듯하다. 거기서
1196년에 장남은 시 호부낭중(정5품) 겸 태자내직랑(종6품)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試)’가 실제는 정5품보다 높은 품계를 갖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한 자료에 의하면 류택은 1194년에 이미 정6품의 봉어(奉御)였고,
류언침은 1198년 이후의 어느 시점에 종6품의 감찰(監察)이었다. 이를 보면 1196년에
정5품보다 높은 품계를 지니고 있었을 사람은 류택일 것이다. 그리고 1196년에 차남은
정용섭별장(정7품)이라 했는데, 이것도 류언침의 벼슬의 추이와 잘 합치한다.
박용운의 논문의 논리는 류공권묘지명에서 장남은 문반(文班) 벼슬로 나오고 차남은
무반(武班) 벼슬로 나오며, 류택은 문반 계열의 벼슬길을 따랐고 류언침은 무반 계열의
벼슬길을 따랐으니 장남은 류택, 차남은 류언침인 것이 대개 확실하다는 것이다.
류언침묘지명에서 확인되듯 류언침은 1200년 전후 언제쯤에 감찰이었는데, 감찰(監察)은
왕의 잘못할 간(諫)하고 백관(百官)의 과오와 비행을 규탄하는 일을 하던 어사대(御史臺)
· 감찰사(監察司) · 사헌부(司憲府) 등에 두었던 벼슬이다. 이것은 류언침이 반드시
전적으로 무반의 길을 따른 것은 아님을 짐작케 한다. 그가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다는
사실도 이런 짐작을 돕는다. 그러나 후에 상장군, 대장군이 되는 것과 이규보의 글을
보면 무반의 성격이 다분히 들어 있는 벼슬길을 선호하고 따랐음을 알 수 있다.
말년에는 전적으로 문반의 벼슬길을 따른다.
한편 호부(戶部)는 국가의 재정과 호구(戶口)를 주관하는 관청이었는데 지금의 재무부와
내무부를 합한 일을 하는 곳이었다. 정5품의 낭중이라면 그곳의 실무를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또 태자내직랑은 태자궁 곧 동궁(東宮)에서 업무를 보는 직책이었다. 이런
것은 류택과 류언침 가운데 문과에 급제한 류택에게 어울린다. 음서(蔭敍)로 벼슬길에
나아가기 시작했을 류언침의 경우 한때 정7품의 무관 벼슬인 별장(別將)이었으리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곧 박용운의 논리가 단순해서 수정이 필요하지만 그 결론은
주어진 정보들에 비추어 타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2-2. 류언침의 묘지명 검토
류언침의 묘지명은 흥미롭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13-14행의 다음 구절이다.
其筆法殊有父兄得神OOOOO與迎賓飮OO類皆O公之筆法正所謂柳氏有子者也
빠진 부분이 있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빠진 부분을 추정해서 대략 해석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 필법은 특히 아버지와 형으로 말미암아 신통하게 되었다. ....와 영빈(손님을 맞음) ․
잔치에서의 글들은 모두 공(公)의 필법을 따라 쓴다. 진실로 ‘류씨가 아들이 있도다’라고
일컬음을 받는다.”
류공권에는 당나라 사람 류공권도 있는데 그가 글씨로 아주 유명했다. 그러나 지금 논의의
대상인 고려의 문화류씨 문간공 류공권 역시 글씨로 크게 이름을 날렸다. 간혹 글씨에
관한 글을 읽을 때는 이 둘을 잘 구별해야 한다. 물론 이 글에서 류공권은 문간공만을
지칭한다.
류공권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서봉사(瑞峰寺)의 현오국사탑비(玄悟國師塔碑)의 글씨를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위의 글은 류언침이 그런 아버지를 빼닮은 아들임을 말하며
(‘그 아비에 그 아들’) 곧 아버지의 자랑이라는 뜻이 분명한데, 중요한 점은 ‘아버지’ 옆에
‘형’이란 말이 확실하게 붙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류언침이 누군가의 동생, 곧 류택의
동생임을 나타내는 것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 보인다.
2-3. 가정보에 관한 토론
이런 논의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가정보(1565)에 분명히 류언침이 형으로, 류택이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정보는 확실히 류승(柳陞), 류경(柳璥), 류인기(柳仁琦), 류량(柳亮) 등의 류택 계보는
그 기록에 혼란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류언침 계보는 모호한 점이 없지 않다.
가정보의 계보의 첫 페이지인 “天”쪽에서도 논하고 있듯이 진주류씨와의 관련성이 모호한
점도 그에 속한다. 가정보에서는 류언침의 증손 대(代)에서 류간(柳玕)을 중점적으로
논하고 있지만 그 논의 중에 류언침도 언급되어 불확실성이 있을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현재 앞의 1-7에서 살펴본 바대로 류언침을 진주류씨의 시조로 묘사하는 글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들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류언침의 묘지명에는
그의 자녀가 1남2녀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가정보에는 1남만 보인다. 물론 두 딸이 모두
결혼하지 않는 등의 이유로 족보에 오르지 않았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는 있다.
또 하나는 필자로서는 더 깊이 확인할 기회가 없었기에 상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족보에는 류언침의 손자이며 류순(柳淳)의 아들로서 가정보에는 나오지 않는
류성윤(柳成潤)과 류원비(柳元庇)가 들어 있는 듯하다.
가정보의 류공권 사적에는 “史官傳曰”(사관이 전하여 가로되)로 시작하는 문장이 절반쯤을
차지하는데, “고려사”에 있는 류공권 열전과 유사하다. 이로 미루어보면 가정보를 편수할
때 “고려사”를 보았음이 분명하고, 택-언침의 순서의 구절을 보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가정보의 계보를 보면 결국 그것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어쩌면 택-언침의 순서가 벼슬의 고하, 혹은 역사적 비중의 경중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남아 있는 영락보(1423)의 서문에는 몇 사람의 선조들의 이름이 언급되는데 그
부분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若論其派大提學寬與其都觀察使思訥同源於文簡公也
“[문화류씨의] 파(派)를 대략 기술하면, 대제학 관(寬)과 도관찰사 사눌(思訥)은
문간공에 근원을 같이 하였다.”
이 둘은 모두 류언침의 자손이다. 그런 다음 류택의 자손인 류량(柳亮)과 류은지(柳殷之)
등을 계속 언급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보면 영락보에서도 류언침이 류택보다 위로 기록되어
있었던 것이 대략 확실하다. 이는 당연한 것이, 가정보는 영락보를 이어 만든 것이기에
가정보의 앞부분, 곧 1420년대 즈음까지의 계보는 대략 영락보를 옮겨 적고 있을 것이라
추정되기 때문이다. 다만 가정보의 “天”쪽의 류간(柳玕)에 대한 논의에서 보듯이 새로
나타났거나 상충되는 계보들을 보완하는 일은 있었을 것이다.
“고려사”는 조선 개국 이후 60년 정도의 노력과 우여곡절 끝에 1451년(문종1년) 완성된
책이다. 따라서 영락보를 편수한 류영(柳穎)은 그 책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족보에는 그 동안 류공권의 무덤을 알지 못하다가 우연히 지석이 1915년에
박물관에서 발견된 것을 계기로 찾아내었고, 지석이 도굴된 것이라는 사연이 적혀 있다.
류공권의 지석(誌石)은 언제 발견되었는지 모르지만 20세기 초쯤의 일제시대의 일일
가능성이 높다. 또한 류언침의 지석은 1916년에 개성(開城) 한 민가에서 발견되었고, 역시
(아마도 그 주인들에게 출처를 물어) 무덤을 찾아낼 수 있었다고 적혀 있다. 따라서
이 지석들이 진짜라면 영락보와 가정보의 편수자들은 그것들을 직접 보지 못했을 것이다.
영락보와 가정보는 여러 집안에서 내려오는 보첩과 가승(家乘) 등의 기록들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임은 자명하고 그들 사이에는 혼란이 많았을 것임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묘비명이나 묘지명 등이 있다면 그것이 다른 기록들보다 우선했을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기록에 언침과 택의 관계에 대한 불명확성도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고려사”와 지석들을 보지 못한 영락보의 편자가 당시에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으로
언침을 위로 하여 계보를 정리했고, 그것이 가정보에 이르러 그 편자가 “고려사”에 그와
어긋나는 기사가 실려 있음을 보았다 해도 간과하고 (벼슬 순서라고 생각한 타당성도
있었을 것임) 영락보의 기록을 그대로 따랐을 것이라는 추정을 해볼 수도 있다.
3. 정리하는 말
필자는 차서(次序)의 상이(相異)가 “고려사”와 “가정보”(그리고 그것이 반영하는 “영락보”)
사이에만 일어났다면 오히려 “가정보”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고려사”에서 비록 택-언침의 순서로 기록했다고 해도 택이 장자, 언침이
차자라고 명시하지 않는 한, 어떤 다른 개념으로 그렇게 한 것일 수도 있고, 심지어는
그런 순서가 어떤 사료를 근거로 적힌 것인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기자(記者), 곧
사관(史官)의 판단착오이거나 정보부족에 의한 추측성 기사였을 가능성까지 생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류공권묘지명”과 “류언침묘지명”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류공권묘지명”과 몇 가지 역사적 사료들을 비교 검토하면 택-언침의
순서에 잘 부합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더구나 필자가 중요한 사료일 것으로 추정하고
상세히 살펴본 “류언침묘지명”에는 류언침이 류택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모두 이 두 묘지명을 얼마만큼 진짜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최소한
둘 중 하나, 예를 들어 “류공권묘지명”이라도 받아들인다면 차서는 택-언침으로 보야 할
개연성이 무척 높아진다. 한편 지금까지 드러난 류공권의 묘지석(墓誌石)과 그 묘비명에
대한 역사가들의 기록이나 입장, 또한 문화류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는 관련 이야기들을
보면 20세기 초쯤에 비로소 발견된, 실제 류공권의 장례 즈음에 땅에 묻혔던 지석(誌石)과
그 위에 쓰인 글임을 의심할 이유는 그다지 없어 보인다. 류언침의 지석 역시 실제
현재까지 전해오는지 어쩐지 알 수 없지만 그 지석과 글을 실체로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는 그다지 없어 보인다. 그만큼 최대한 충실하게 글씨를 읽은 기록이 여러 족보에
계속 내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보도 사람이 쓴 것이라 오류가 하나도 없을 것이라고 믿을 수는 없다. 심지어
“고려사”나 “조선왕조실록” 같은 엄밀한 사서도 특정한 부분에 따라서는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는 것이다. 만일 가정보에 차서(次序)가 바뀌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게
문화류씨 줄기 중에 맨 처음 가지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의미상으로 작은 일은
아니겠지만 다른 사람들 입장이나 기록 자체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어떤 형제가 정보의
불충분으로 잠시 뒤바뀌어 들어간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가정보의
가치는 방대한 양의 계보를 외손의 외손까지 가능한 한 검증에 검증을 거듭해서 기록한
그 엄밀성과 계보 자체에 있으므로, 근본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기록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나타난 상계의 오류가 설령 하나 있다 해도 그 순서의 오류일 뿐이지 그 사람들 존재
자체에 대한 오류는 결코 아니기 때문에 그 큰 가치가 훼손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명확히 밝혀두고 싶은 것은 이 글은 어떤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 주어진 정보들을 최대한으로 종합 정리하고 검토한 것을 객관적으로 논해본 것일
따름인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택-언침의 순서로 생각하기 시작했고 앞으로도 그런 관점을
견지해 나갈 것임은 자명하다. 그에 불구하고 문화류씨 당사자들로서는 가정보(그리고
영락보)를 신봉하여 현재대로 언침-택의 순서로 기술해 나가는 것이 타당할 수도 있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돌멩이 하나라도 뒤집어 보는 심정으로 진실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모색해 보지 않을 수 없기에 심도 있는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글 가운데
사실의 오류나 논리의 잘못이 필경 있을 것이다. 이 글에 제시한 몇 개의 내용이
토론거리가 되어 더 큰 공감대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래본다.
2008. 10. 12.
彩霞 류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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