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정씨 시조에 관한 연구 : 나주정씨 (羅州丁氏) 야은공파 종회
전성균관대 총장 정범진(丁範鎭)
여러분들이 아마도 다 한번쯤은 겪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우리 나주정씨는 약 300여년 이래로 계속해서 타관 정씨들과의 사이에서 상계문제로 인해서 난처한 일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아직도 그 실상을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왈가왈부 우왕좌왕하는 종원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라도 우리는 종론(宗論)을 통일하고, 우리 상계문제에 대해서 분명하고 정확한 인식을 가져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오늘 이 시간이 마련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겪은 일이란 바로 소위 대양군(大陽君) 정덕성(丁德盛)이라는 가공된 인물을 당나라에서 태어난 우리 나주정씨의 시조라고 말하는 황당한 경우를 당해본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지난날에는, 아니 지금도 아마 생각을 같이 하고 있을 겁니다만, 해방 후, 얼마동안은 한국에 살고 있는 모든 정씨들이 한데 모여 화수회다 친목회다 하면서 다 일가친척 못지않게 아주 정답고 화목하게 잘 지냈던 때도 있었습니다. 어디를 가나 우리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본관이 무슨 나주(羅州)든 영광(靈光)이든 창원(昌原)이든 의성(義城)이든 신령(新寧)이든 장흥(長興)이든 동래(東萊)든 간에 특별히 반가웠습니다. 그런 기분은 누구나 다 같이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300년 전의 황당했던 일이 또다시 재연되어 이제는 중국에까지 걸쳐 중국인들까지 끌어들여서 그것도 새롭게 밝혀진 아무런 역사적 증거도 없이 한반도에 살고 있는 모든 정씨는 다 같은 할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자손이고 일가들이라고 주장하면서, 한 편으로는 그 할아버지가 1000여 년 전에 중국 당나라에서 재상을 지내다가 무슨 죄를 지어 두 아들을 데리고 압해도로 유배되어 온 정덕성이라는 사람이라고 하는 마치 전설, 아니 무슨 소설 같은 이야기를 꾸며서 종원들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째서 소위 정덕성을 우리 시조로 인정해서 섬길 수 없는지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에, 느닷없이 당나라 정덕성을 시조로 하는 괴상한 족보가 나타났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조작된 것이었고, 거기에는 정덕성 이하 천수백년간의 조상들이 세세연년 연월도 맞지 않게 엉성하게 그리고 과장되게 연계되어 있었고, 뿐만 아니라 그 서문을 잘 훑어보면 누구라도 한 눈에 날조된 것임을 알 수 있을 만큼 황당한 내용으로 엮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시조(휘允宗) 이하 여러 세대의 선조들도 그 속에 교묘하게 삽입 연계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1700년경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 후, 우리 선조들 중에는 한 분도 그 괴이한 족보의 기록을 믿은 분이 없었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적어도 1690년 정도까지는 우리나라에 그런 기록이 실린 문헌이나 족보가 있지 않았습니다. 이를테면 가장 먼저 나온 창원정씨족보는 1551년도 충간공(忠簡公) 遊軒(유헌) 정황(丁熿) 선생이 서문을 썼습니다. 거기에는 대양군 정덕성에 관한 이야기는 한 글자도 들어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온 영광정씨족보는 1590년경인데 거기에도 대양군 정덕성에 관한 문구는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나주정씨 족보를 더듬어보면, 제일 먼저 월헌공(月軒公)께서 조상에 관해 간단히 기록해 놓은 일종의 메모지 형태의 월헌첩(月軒帖 1520년경)이 있었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1660년에 관운공(觀雲公)께서 나주압해정씨술선록(羅州押海丁氏述先錄)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그 후로 여러 번 족보를 내었던 근본 자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계속해서 해영보(海營譜1677), 순천보(順天譜1702), 경오보(1870) 신미보(1931) 신축보(1961) 기묘보(1999)까지 일관되게 족보가 발간되었지만 한 번도 대양군이니 정덕성이니 하는 이야기는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1701년에 이르러서 창원‧영광정씨의 합보(合譜)로 된 이른바 재신사보(再辛巳譜)가 나왔는데, 거기에 처음으로 한반도에 있는 모든 정씨는 다 정덕성의 자손이라고 하는 말이 처음으로 나타났습니다.
대양군 정덕성이란 인물을 그들의 기록에 의해 대략 간추려보면, 그는 당나라에서 원화(元和) 9년(10년으로 된 곳도 있음)에 진사에 급제했고, 서쪽 반군을 정벌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으며, 천자가 그의 생일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어주었으며, 대상에까지 올랐다가, 선종(宣宗) 때에 국사를 위해 올린 상소가 천자의 노여움을 사서 결국 두 아들을 데리고 우리나라 압해도로 유배되었는데 그 후 돌아가지 않고 영주하여, 이 땅에 모든 정씨들을 퍼뜨려 놓았다는 것입니다. 재신사보에는 또 경기남부지방에 홀연 옛 문적이 나왔는데 그 안에는 대양군 이하 세계(世系)가 잘 이어져 있고, 관함(官啣)도 분명히 나타나 있었으나 여러 차례 병화를 겪어오는 동안 많이 실전되어, 어느 한 집안의 문적만을 믿을 수는 없기 때문에 합보를 만들기가 어렵다는 말도 했습니다. 아무런 근거자료도 없이 상계의 족보를 만든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래서 그 후로 나온 그들의 여러 족보들은 내용이 수시로 바뀌고 달라지곤 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우리 문중에서는 시조 이하 6세까지의 분묘를 실전(失傳)해서 몹시 안타까워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상계 선조들의 분산이 틀림없이 압해도에 있을 터이고, 심증이 가는 분묘도 있었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관운공(觀雲公)이나 두호공(斗湖公)께서 다 압해도를 답사하고 우리 시조의 묘로 심증이 가는 분묘에 성묘도 하고 작은 묘비도 세웠지만 그러나 묘 중 인물이 누구라는 것을 확인하지는 못하고 있는 사이에, 이상에서 말씀드린 대양군이 등장하는 족보가 나왔고, 그로부터 약 20여년 사이에 우리 가문으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상계에 관한 너무도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던 것입니다. 즉 압해도에 있는 우리 선조들의 분묘로 보이는 5-6기의 묘 가운데서 2-3기가 실존인물도 아닌 대양군과 그의 두 아들의 묘로 바뀌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우리 조상들의 세거나 세장과는 아무런 상관관계도 없는 저 먼 진주(晉州)의 석갑산에서 타성 고분을 난진(亂眞)해서, 우리 시조(휘允宗)를 비롯해서 여섯 분의 정씨분묘로 날조하고, 전혀 신빙성도 글을 새겨서 석물까지 날조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왜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요? 우선 우리 선조들의 남겨놓으신 말씀과 그리고 학자들의 고증을 근거로 해서 그 이유부터 말씀드리자면, 그 당시 우리 가문은 공안공(恭安公) 충정공(忠靖公) 양대에 걸쳐 이상(貳相) 반열에 오르셨고, 그 아랫대 사형제 분은 대사헌을 위시해서 종2품에서 종4품에 이르는 사환을 지내심으로써 명실상부한 망족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향 각지에 살고 있던 다른 정씨들이 모두 우리와 일가 되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낭혜(朗慧)라는 자칭 감여술(堪輿術)에 밝다는 사람이 나타나서 앞서 말씀드린 잘못된 족보의 내용에 따라, 압해도와 석갑산의 분산을 고의로 난진했던 것입니다. 그런 연후에 이른바 시조동래설(始祖東來說)이 강하게 대두되었는데 이는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모화사상의 영향도 다소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때 낭혜는 분산(墳山)을 난진해 놓고서, 어느 날 다산선생의 증조부(휘恒愼)를 찾아와서 느닷없이 이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우리 집안에서는 모두들 상계조상의 산소가 실전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매우 송구한 심정을 가슴에 안고 있었는데, 홀연 시조의 분묘가 진주에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당황하고 놀랐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이치에 닿지도 않는 어불성설이었습니다. 우리 상계에서는 진주 근방에 가서 살았던 사실이 전혀 없었는데 어떻게 분산이 진주에 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상하다 생각하시다가 3~4년 뒤에 돌아가시고, 그 뒤 아랫대(휘志諧)에서 관심을 가지고 답사를 해보았고 기록까지 남겼습니다. 그 뒤에 다산선생의 부친(휘載遠)은 진주목사까지 지내셨는데, 그 어른이 관심을 가지고 있다가 진주목사가 되신 다음에 직접 석갑산 분산을 둘러보고, 심지어 발굴까지 해 보셨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선대의 기록을 참고해서 ‘진주석갑산정씨분산변(晉州石岬山丁氏墳山辨)’을 쓰시게 되었고, 이어 다산선생이 30세가 되던 1791년 당시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있었는데 휴가를 얻어서 진주로 근친(覲親)을 갔었습니다. 그 때 부자분이 함께 분산을 답사하고 일일이 점검했었습니다. 그 결과 “석갑산 육총은 정씨의 장분이 아니다.(石岬六塚非丁氏之葬)” 하는 결론을 내렸던 것입니다. 그 내용은 다산공의 ‘석갑산정씨육총변’에 상세하게 적혀 있습니다. 지금 시간이 없어서 더 상세한 말씀은 드리지 못하겠습니다만, 그 변증한 내용이 너무도 분명하고 정확해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중에서 한두 가지만 예로 들어보면 우선 우리 시조(휘允宗) 할아버지의 산소도 거기에 만들어 놨는데 그 앞에 세워 놓은 조그마한 비석에 새겨져 있는 음기(陰記)가 가관입니다. 지식이 있고 역사적인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그 글은 조작된 엉터리 문장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선 서두(序頭)부터가 ‘유명고려국이부상서참지정사문하시중…신도비음(有明高麗國吏部尙書參知政事門下侍中…神道碑陰)’으로 되어 있고, 지은이는 ‘…문하시중…경주최세보찬서(…門下侍中…慶州崔世輔撰書)’라고 되어 있습니다. 명나라가 세워진 태조(太祖) 홍무(洪武) 원년은 1368년이고, 우리 시조의 생존연대는 지금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지만, 생졸년이 명확한 서령공(署令公1423-1487)의 생졸년을 참작해서 위로 소급 계산해보면 약 1150년 전후로 추산되고,(이 비에는 아무런 증거도 없이 1093년에서 1173년으로 되어 있음) 지은이 최세보는 1193년에 졸한 고려인이므로, 결론적으로 명나라가 세워지기 175년 전에 이 음기를 썼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어떻게 ‘유명고려국’이란 말을 쓸 수 있단 말입니까? 여기의 기록된 우리 시조의 생졸년도 전혀 근거 없는 것이고, 또 우리 시조는 이부상서나 참지정사나 문하시중은 더더욱 지낸 일이 없었습니다. 최세보의 관직도 문하시랑(門下侍郞)은 지냈었지만 문하시중은 아니었습니다.
이 밖에도 이 음기에는 역사적 사실과 어긋나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어서 이런 위작된 장난 같은 자료를 가지고 길게 논할 가치나 의의를 느끼지도 않고, 또한 여기서 그것을 다 지적해서 설명할 시간도 없으니 나머지는 우리 종회에서 출판된 여러 책자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한편 그 무렵 장흥(長興)에 살고 있던 종원들이 한양으로 우리 해좌공(海左公)을 찾아왔습니다. 해좌공은 그 당시 판서까지 지내신 전국에서 으뜸가는 문장가였습니다. 와서 우리 정승묘 앞에 비를 세우려고 하는데 비문을 써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해좌공은 기왕에 두호공(斗湖公)께서 가서 성묘도 하신 바 있는 우리 대 선조의 분묘이니 내가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는가 하시면서 비문을 써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비문에는 대양군 정덕성에 관한 일자의 언급도 없었습니다. 그 어른이 실제 있지도 않은 대양군 이야기를 어떻게 하실 수 있었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요. 비문을 얻어 가지고 돌아가긴 했지만 장흥 종원들이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재차 해좌공을 찾아와서 대양군 정덕성의 묘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서 비문을 고쳐달라고 요청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해좌공은 그렇게는 해줄 수가 없다. 조상에 관한 사실은 모르면 모르는 대로 충실 하게 하는 것이 옳지, 분명하지도 않은 것을 근거도 없이 지어내어서 당나라에서 온 아무개라고 하는 것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비문 써주기를 거절하고, 그 거절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장흥의 종인들에게 보낸 ‘담종인서(答宗人書)’라는 제목의 편지에 소상히 설명하였습니다. ‘답종인서’는 해좌집(海左集)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잠시 소위 정덕성이란 인물의 실존여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소위 사보(私譜)에 보면 그는 당 헌종(憲宗) 원화 10년(9년으로 된 곳도 있음)에 진사에 급제했고, 후에는 벼슬이 대상에까지 올랐으며, 상소로 직언을 하다가 천자의 노여움을 사서 압해도로 유배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지위가 높은 관료가 한 때는 국가에 큰 공을 세우기도 했고, 또 언사에 연루되어 번국에까지 유배되어 왔다면 어떻게 신구 양 당서(唐書)에 한 글자의 기록도 없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고 당대에서는 죄인을 유배 보낼 때 번국(蕃國)으로 보냈다는 말은 사서(史書)에서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또 대양군(大陽君)으로 봉호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당시 국가 유공자에게 제후국의 국호를 딴 이를테면 연국공(燕國公) 한국공(韓國公) 괵국공(虢國公) 등 공호(公號)는 있었지만 군호(君號)가 있었다는 말은 별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더군다나 당 원화 10년에 진사급제한 사람은 총 30명이었는데, 그 가운데서 지금까지 14명이 확인되어 있고 그 나머지 16명에 대해서는 확인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낭혜 이후 약 300년 만에 또다시 제2의 낭혜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이제는 중국천지에서까지 역사적 사실을 왜곡 난진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가 한 사람이 중국 하남성(河南省) 당하현(唐河縣) 정영(丁營)이라는 100호도 채 못 되는 조그마한 마을을 찾아가서 여기가 시조 정덕성이 태어나신 우리의 성지라고 주장하면서 그곳 현정부(縣政府)로 하여금 정씨문화연구소(丁氏文化硏究所)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그 연구소의 위(魏) 모씨는 온갖 심혈을 다 쏟아서 정덕성이 당대의 실존인물이라는 사실과 아울러 원화 10년에 진사 급제한 사실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만, 그 사람인들 어떻게 있지도 않은 역사적 사실을 찾아낼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엉뚱하게도 다소의 연구비에 눈이 어두웠던지 급기야는 ‘당원화10년진사30인’이란 명단을 날조(捏造)해서 한국으로 보냈고, 그것을 받아본 한국의 모 정씨들은 시조의 행적 일부를 찾아냈다고 희희낙락 의기충천해서 그 날조된 명단을 넣어서 한국정씨대종회(?) 이름으로 중국 정영 마을에 높이 2미터가 넘는 큰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그 내용은 너무도 황당하고 무지해서 한국인으로서는 언급하기조차 부끄러울 정도였습니다. 반드시 그렇게까지 했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저 당대의 등과에 관한 기록은 청(淸) 서송(徐松)의 등과기고(登科記考)가 가장 방대하고 정확한데, 거기에 의하면 원화 10년에는 진사과에 모두 30인이 급제하였고, 지금까지 그 중 14명만 확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날조된 명단에는 30명, 즉 100% 다 그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그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일반 사람은 모르겠지만 당대역사를 좀 알고 당대문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금방 이 문건은 날조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간관계 상 지금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만 그 중에서 중요한 한두 가지의 예를 들어보면, 그 명단에 들어있는 심기제(沈旣濟)라고 하는 사람은 그의 증손자와 함께 이름이 올라 있는 황당한 경우이고, 또 새로 만들어낸 16명 중 15명은 다 급제한 연도를 몰라서 등과기고의 부록에 수록해 놓은 사람들이지만 오로지 정덕성 한 사람은 거기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15명은 등과기고의 부록에서 원화 년에 생존했을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 골라내고, 거기에다 정덕성을 임의로 슬쩍 끼워 넣어서 30명의 명단을 꾸며내었던 것입니다.
이상을 종합해 볼 때, 결국 당나라 때의 대양군이란 말도 그렇고, 소위 정덕성이란 인물은 생존하고 있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가공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운 이후에 원활하고 유용한 행정체계를 바로 잡기 위해서였던지 토성분정(土姓分定)을 단행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한반도에 있는 모든 성씨들을 한 마디 말로 잘라서 토성(土姓)이라고 한다든가 또는 동래(東來) 성씨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 이전 상고시대 우리나라에는 성씨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초들의 이주상황을 기록해 놓은 자료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세종실록지리지’에 토성으로 기재되어 있는 성씨, 다시 말하면 고려 초 토성분정(土姓分定) 당시에 한반도에 살고 있던 토착민들의 성씨는 다 토성으로 간주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반만년 역사상 한반도에는 그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중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그러나 한 가문에서 적어도 시조라고 운위(云謂)할 때는 반드시 역사적인 자료나 증거를 두고 이야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그 누가 임의로 문건을 날조해서 그것도 수백 년, 그리고 수십 명의 시간과 가공인물을 조작해 넣어서 족보를 위작하고, 그것을 사실화해서, 수만 아니 수십만에 달하는 종원들을 한 사람, 그것도 외국 사람의 후손이라고 우기며, 그 분을 시조로 섬기라고 한다면 그 누가 흔쾌히 따르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종원들 중에는 몽매(蒙昧)해서 아직도 시조문제를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부디 해좌공(海左公)이나 다산공(茶山公)의 글을 정독해서 조상에 대한 올바른 식견을 가져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어째서 대양군 정덕성을 시조로 모시려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없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조상을 갈아치우는 환부역조(換父易祖)의 패륜행위(悖倫行爲)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누가 난데없이 아버지나 할아버지에 대해서 친부나 친조부가 아니라고 말하거나, 또는 분명 친아버지나 친조부가 아닌 남을 친아버지나 친조부라고 말한다면 목숨을 걸고 나서서 싸우려고 하면서도, 20~30대 백년 천년 거슬러 올라가서 조상의 진위(眞僞)에 대해서 말하면 실감이 나지 않기 때문에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것은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선계조상에 대해서는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고, 아는 사실만 있는 그대로 족보에 기재했던 것입니다. 족보는 한 가문의 혈연관계를 기록해 놓은 중요한 문건이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정확해야 하고 역사적으로 봐서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을 그대로 기록해야 하는 것이며, 거기에는 추호의 거짓이나 과장이나 독선이나 편견 같은 것이 개재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선조에 대해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올바른 인식을 하는 일, 그 자체가 숭조상문(崇祖尙門)하는 일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고, 배전의 노력을 기우려서, 하시(何時) 하처(何處)에서도 우리의 주장을 자신 있고 능숙하게 표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우리 종회에서도 상계문제에 관한 한 통일된 종론을 모든 종원들에게 널리 보급 주지시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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