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Re:차원부 문절공 증시 관련(1804년 11월 20일 승정원일기)

ryu하곡 2014. 9. 3. 22:03

앞글에 덧붙이는 참고 글입니다.

 

승정원일기의 연시(延諡) 관련 기사는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역사에 자취가 없어 행적이 조작된 인물인 차원부가 조선 후기로 오면서 특히 해당 집안의 차석주 등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정몽주 같은 고려 절신에 조선 개국 공신으로 우상화되었습니다. 그즈음에 기장묘도 남의 무덤을 역시 설원기에서 꾸며진 인물인 차건신의 무덤으로 둔갑시키는 일도 일어나는 등, 대대적인 우상화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일성록에 상소를 올릴 때 참여하였던 류급(柳汲) 등이 앞장서서 순천에 있는 오천서원을 세우고 차원부를 제향한 것도 이때쯤의 일입니다.

 

연시 관련 기록은 운암선생설원록의 부록의 처음에 나오는 년고(年攷)”에 나옵니다.

순조성효숙황제 4년 갑자년(1804)에 연시를 했고, 6년 병인년에 초계(草溪)에 덕원원(德源院)을 세웠으며, 28년 무자년(1828)에 울산(蔚山)에 통천사(通川祠)를 세웠다.”

 

작년 12월초에 승정원일기에서 류차달차원부를 검색해보았던 적이 있었는데, 둘 다 한 건씩 검색이 되었습니다. 차원부의 것은 다음의 연시 관련 기록임을 확인했습니다.

* * *

1120(을사) 1804嘉慶(/仁宗) 9: 순조 4.

李顯默, 以吏曹言啓曰, 贈諡文節公車原頫延諡, 來十二月十二日, 定行於全羅道順天地云矣, 敢啓傳曰, 知道

* * *

 

그리고 어느 시기의 문헌인지 모르겠지만 연안차씨세고에도 차원부 항목에 연시 관련 기사가 들어 있습니다.

 

대개 시호(諡號)는 나라에서 시호를 결정하는 과정과 교지의 작성, 그리고 시호를 전달하고 받는 선시(宣諡: 시호 교지 전달연시(延諡: 시호를 맞아들이는 일) 행사를 거칩니다. 기록에 의하면 연시 때 큰 잔치를 벌이는 것이 예라서 집 한 채를 살 수 있는 이상의 비용이 들기도 했다고 합니다.

 

순조 4년의 차원부 연시 기록은 실록이나 일성록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연시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며, 이것은 곧 그때 나라에서 시호를 내렸다는 말이 됩니다. 아버지 정조가 직접 세 번이나 근거가 없다 하여 거절한 일을 당시 만14세였던 아들 순조가 시행한 것이 됩니다. 이때 시호를 내리는 교지가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가고 설원기가 지어진 것으로 조작된 1456년에 나라에서 시호를 내렸다고 날조된 교지만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 연유를 알 수 없습니다.

 

차석주 등이 얼마나 열성적이었는가는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기술이 되어 있습니다. 그가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여 글을 받았는데, 당연히 판서, 참판, 대사성 등의 높은 벼슬자리에 있는 인물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누차 이야기하지만 당시의 사림에서 차원부설원기차원부는 사실로 인정되었으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미 1600년 전후에도 상소에 설원기 관련 구절이 들어갈 정도였으니, 당연한 귀결이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정조대왕의 일성록에서의 세 번의 시호 거절이 놀라운 일로 느껴질 정도입니다. 학문에 큰 정열을 갖고 있던 정조의 식견이 있었기에 가능한 엄정한 판단이었을 것입니다.

 

차석주의 행적은 설원기 우상화의 길이었습니다. 그는 황윤석이 증거하듯 설원기가 의심을 받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정조에게서는 차원부의 시호 요청에 대해 근거 없음, 곧 설원기의 내용을 믿을 수 없다 하여 허락을 얻지 못했어도 설원기를 목판을 새겨 버젓이 나라에서 간행한 것으로 조작할 만큼 대담한 일을 벌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왜곡된 가문의식이란 말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족보와 문중의 부정적인 폐해의 가장 극단적인 예를 위서(僞書) “설원기에서 볼 수 있고, 그 폐해의 시작은 설원기를 날조한 어떤 사람이며, 그 폐해를 극대화시킨 사람은 차석주일 것입니다.

 

그래서 승정원일기에서 연시 기록이 나온 것도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이미 차원부를 배향하는 서원이 만들어졌고 그 이전 200여년 동안 이미 우상화가 이루어져 왔으며, 다양한 공가(公家) 문헌에서 다루어졌으며, 차원부가 언제 두문동 72에 끼어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폭넓게 충절(忠節)의 표상으로 포장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순조 이후에 헌종, 철종 때 등에도 차원부 관련 서원들이 세워졌습니다. 당연히 벼슬아치들이 관여했을 터인데, 이때는 조정과 직접 관련이 없었는지 실록은 물론 일성록이나 승정원일기에도 더 이상 기록은 없습니다.

 

승정원일기에 나온 차원부 연시 기록의 의미와 평가는 류병수님께서 잘 정리해 놓으셨기 때문에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오히려 차씨 문중에서 1456년의 교지 조작을 하지 않고, 정조대왕에게 차원부의 시호를 내려달라고 요청하지 않고, “승정원일기에도 연시 기록이 없었다면 지금 설원기를 주장하기에 훨씬 유리했을 것입니다. (시호는 원래 순서 상 자손들의 상청(上請)이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라고 함. “일성록의 상언(上言)처럼 또 시호를 내려달라는 요청을 한 결과로 연시가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됨.) 오히려 후손들이 설원기와 차원부에 대해 더 확실하게 나라의 인정을 받으려고 무진 노력한 것이 오히려 차원부의 시호와 설원기가 명백히 부인되고 나아가서 차원부의 행적까지 부인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201493

류주환

출처 :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글쓴이 : 채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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