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 릉 북한당국제작 류차달지묘 건축형성총계획도
발 간 사
우리 柳門의 조상 대승공 할아버지 묘소는 황해도 유주 구월산 남록 寅坐申向에 안치된지수백년 지나오다 조선이 개국하면서 제대로 관리 못한 것을 1681년 하정공손 尙運께서 개수하시고 1861년 정숙공 옥천손 箕榮님께서 사초한 후 후손들이 시제를 모시다가 남북분단과 전화로 60여년 간 자손들이 소식도 듣지 못하여 애타던 찰라 재일 동경 거주 정숙공 후손 옥천손 箕桓(저에게는 11촌 姪)님께서 2008년부터 북한 정부에 민간 교류차 대승공 묘소를 다녀온 후 대종회 명예회장으로 직을 갖고 드디어 2011년 북한 정부와 접촉 보존유적 1777호 1778호로 지정하는 쾌거를 우리 대종회에 기쁨을 주고 성역화 계획을 가지고 왔지만 우리들은 그분의 뜻을 일부 종원이 현 남북관계에 이해를 못하여 서운하게 보내드린 점 부덕한 회장으로서 죄송하였으나 그래도 명예회장은 위선사업을 중단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이 못난 회장의 뜻을 받들어 2013년 별지와 같은 성역화를 고려 역대 왕릉과 같은 수준으로 이룩한 것은 하늘의 도움이요 조상의 은덕 우리 대종회의 대과업을 성취한 것으로 우리 다 같이 고마움을 箕桓회장님께 잊지 말아야 하며 저 소인은 할아버지께서 다니시던 구월산에 하루속히 후손이 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2013년 말
文化柳氏大宗會長 柳 濟 求 드림
Ⅰ. 류릉 성역화의 회고와 현황
황해도 구월산 선조 묘소에 지난 2008년 9월 26일 큰아들(榮曉)을 데리고 처음 성묘한 후 2013년 10월 28일 만 5년 만에 父子가 선조 묘소 앞에 다시 나란히 서서 향사를 올리고 참배하는 순간 감개무량하여 가슴이 벅차고 눈물이 한 없이 흘렀다.
금년 4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0월 완공했다. 완공된 선조의 묘소를 바라보니 백퍼세트 만족은 못하지만 비각과 비산봉 등을 보고 납득을 했다.
또, 하나의 큰 수확은 문화류씨 후손들이 남북간의 정치적 상황을 떠나 문화적인 차원에서 선조 묘소에 참배를 드리는 것이 후손들이의 소망이자 소원입니다. 하니, 한국정부에서 허가만 해 준다면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았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고 조상 없는 자손이 있을 수 없다는 옛사람의 교훈처럼 오늘의 나를 존재하게끔 해주신 조상에 대하여 정성을 다하고 예로 모시는 것이 당연한 도리일 것이다.
갑오년은 문화 류씨 후손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을 합쳐서 성심성의 노력한다면 所望을 이룰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끝으로 우리 문화 류씨 대종회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면서 宗親의 大盛況을 빕니다.
2013년 12월 27일
명예회장 柳 箕 桓
Ⅱ. 비문(비각내에 있는 두 비석)
1. 高麗大丞柳公之墓
麗祖之南征羅濟也公出車乘克成統一之公策公壁上勳位大升卒葬文化九月山公柳氏諱車達勳業爀爀餘慶綿綿迄麗代至我 朝代有名公內外裔殆難勝記墓道舊有碑世代寖遠泯沒無傳士人有竊葬者十八代孫觀察使환掘其협後乃後孫乃囑付外孫洪按使春卿以嘉靖二十二年癸卯竪石而識其陰後四十三年萬曆乙酉十七代孫希霖按道省묘與宗人洞宦者易以他石並刻前誌今去乙酉九十有七年石又壞宗人之往省者咸來咨嗟尙運忝按關西官關守有制雖不克展掃謀易貞珉無俾연滅卽尙運責也玆乃鳩工伐石略記顚末비後之界者知前之樹立年月而若其誌文不復並刻억公之崇勳盛美照人耳目與天地同其無窮一片石亥亥足以輕重乎哉然其行者式之過者拜之知碩人之藏而寓景慕焉則碑亦不爲無助凡爲公後者尙宜勉之哉
萬曆乙酉後九十七年辛酉八月十五日立
二十一代孫嘉善大夫平安道觀察使兼兵馬水軍節度使巡察使兩西管餉使尙運敬書
고려대승류공지묘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신라(新羅)와 백제(百濟)를 정벌할 때에 공께서 수레를 내어 통일의 공(功)을 능히 이루시니 공을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책록하고 대승(大丞) 벼슬을 내렸는데 돌아가심에 문화(문화) 구월산(九月山)에 장사지냈다.
공은 류씨(柳氏)로 휘는 차달(車達)인데 공훈과 업적이 혁혁하고 후손들이 누리는 경사가 연 이어져 고려조로부터 우리 조선조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이름난 재상을 지낸 분이 내외손(內外孫)에 많아 다 기록하기 어렵다.
묘소에 옛적 비석이 있었는데 세대(世代)가 오래되어 민몰(泯沒)하고 전함이 없으므로 그 지방 사람이 몰래 장사하였거늘 18대손 관찰사(觀察使) 관(灌)이 몰래 무덤을 파내고 그 후에 외손(外孫)인 홍감사춘경(洪監使春卿에)게 부탁하여 가정(嘉靖 明 世宗) 22년 계묘(癸卯 1543) 즉 조선 중종(中宗) 38년에 비석을 세워 그 후면에 기록하였다.
그로부터 43년 후 만력(明 神宗) 을유(乙酉 1585)에 18대손 희림(希霖)이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가서 성묘(省墓)하고 종인(宗人:同族)으로서 도내에(道內)에 있는 수령(守領)으로 있는 이들과 더불어 다른 돌로 바꾸어 세우고 아울러 예전의 글을 다시 새기었다.
이제 지난 을유년이 97년이 되어 비석이 또 헐은지라 종인 중에 가서 성묘하는 이들이 모두 다녀와서 슬퍼하고 탁식하였다.
상운이 관서(關西 平安道) 관찰사로 가서 관직에 얽매여 비록 성묘는 하지 못했으나 비석을 바꿔 세워 인멸(湮滅)되지 않도록 함은 곧 상운의 책임이라 생각하고 이에 석공을 모아 돌을 다듬고 (顚末 : 始終)을 대략 기록하여 후일에 계승(繼承)하는 이로 하여금 전에 세운 알도록 하는 한편 예전 지문(誌文)은 다시 새기지 않는다.
아아! 공의 높은 공훈과 아름다운 업적은 세상 사람의 이목(耳目)에 빛나서 천지(天地)로 더불어 함께 무궁할 터이니 한조각 돌이 어찌 경중이 있으리오? 그러나 다니는 사람이 공경하고 지나는 사람이 인사하며 훌륭한 분의 묘소인줄 알고 우러러 사모하는 뜻을 부침에 이르러 비석이 또한 도움이 될 것이다. 무릇 공의 후손된 자는 마땅히 힘쓸진저!
만력 을유 후 97년 (辛酉 1681년 肅宗 7년) 8월15일 세움
22대손 가선대부 평안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순찰사 양서관향사(嘉善大夫 平安道觀察使 兩西管餉使) 상운(尙運) 삼가 씀
2. 高麗大丞文化柳公車達之墓
公姓柳氏諱車達麗祖南征白濟公出車承克贊統一之功策公壁上勳位大丞卒葬文化九月山寔爲吾柳之鼻祖焉迄麗代至我朝世有命公內外裔殆難勝記墓道舊有碑代遠泯沒土人有竊葬者十八代孫贊成灌桉本道卽令遷之仍墓地復囑外裔洪桉使春卿以嘉靖二十二年癸卯竪石而識之後三十三年萬曆乙酉十八代孫觀察使希霖易而他石竝刻前誌後九十七年辛酉二十二代孫尙運桉關西謨于宗改竪而記顚末今去辛酉殆二百餘年字阞不可讀基榮周省咨嗟不忍凐滅略修石儀仍竪短喝俾後人知大丞之葬前後蔭記記載譜諜不克竝刻于新石
時崇禎四年辛酉十月 日 二十八代孫基榮謹誌
공의 성은 류씨(柳氏)로 휘는 차달이시다.
고려(高麗) 태조(太祖 왕건)가 남방으로 백제(百濟)를 정벌(征伐) 할 때 공이 수레를 내어 통일을(統一) 힘써 도운 공(功)으로 공을(壁上功臣)에 책록하고 대승(大丞)의 벼슬을 내리셨다.
돌아가심에 문화(文化:儒州 ) 구월산(九月山)에 장사 지냈으니, 이 분이 바로 우리 류씨 시조이시다.
고려시대부터 우리 조선조(朝鮮朝)까지 대대로 이름난 관직(官職)을 지낸 내외 후손(後孫)이 많아 다 기록하기 어렵다.
묘소에 예전 비석이 있었는데 세대(世代)가 오래되어 없어짐에 이 지방에 사는 사람이 몰래 이 곳에 장사하는자가 있었다.
18대 찬성(贊成) 관(灌)이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있을 때 곧 바로 명하여 옮기고, 그 후 묘소의 복구(復舊)를 류씨의 외손(外孫)인 관찰사 홍준경(觀察使 洪春卿 )에게 부탁하였는데 가정(嘉靖) 22년 계묘(癸卯) 즉 중종(中宗) 38년(1543)에 홍춘경(洪春卿)이 그 사실을 기록하여 비석을 세웠다.
그로부터 33년 후 만력(萬曆) 을유(乙酉) 즉 선조(宣祖) 18년(158년)에 18대손 상운(尙運)이 관서(關西:平安道) 관찰사로 있으면서 일가들과 의논하고 비석을 바꿔 전후 사실을 기록하여 세웠다.
이제 비석을 바꿔 세웠던 예전 신유년(辛酉年)이 거의 200년이 됨으로서 글자가 이즈러져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기영(基榮)이 두루 살펴보고 탄식하는 한편 흔적이 모두 없어짐을 차마 그대로 둘수 없어 간략히 석의(石儀:石物)을 갖추고 전후(前後) 음기(陰記:碑文)는 이미 보첩(譜諜:족보)에 실려 있으므로 새 비석에 싣지 않는다.
때는 숭정(崇禎) 후 네 번째 신유(辛酉:哲宗 12년:1861) 10월 일
28대손 기영(基榮) 삼가 기록함
『문화 류씨 시조묘 유적발굴』보도 조선중앙통신
1. 사회과학원 력사 학자들이 황해남도 삼천군 달천리에서 문화 류씨의 시조묘 유적을 새로 발굴하였다. 크게 15개의 본을 가진 류씨 가운데서 첫 번째가 바로 문화 류씨이다. 이 문화 류씨에서 많은 류씨가 가지쳐 나왔다.
모든 류씨의 원조상이라고 하는 문화 류씨의 시조는 고려의 통일 위업에 크게 이바지한 류차달로서 그는 고려의 공신이였다.
력사 기록에는 류차달의 무덤을 류씨의 첫 조상 무덤이라는 뜻에서 【류릉】이라고 하였다.
【류릉】은 북으로 주거봉과 비산을 등지고 있고 뒤로는 아사봉 등이 있다.
망돌 유물은【류릉】을 제사내기 위하여 찾아온 사람들과 제사음식을 조리하는데 쓰였다고 추측되고 있다.
력사 학자들이 비석의 비문을 해득해본데 의하면 위의 유적들은 다름 아닌 왕건에 의한 고려의 통일에 이바지한 문화 류씨의 시조인 류차달을 제사지내기 우한 것들이였다.
비문의 내용에 의하면 류차달은 문화 일대(오늘의 삼천군 일대)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려의 국토 통일실현에 저극 이바지 하였다.
그 공로로 『삼한벽상공신』이라는 칭호를 하사 받았다 한다.
이번에 조선민족의 수백개 성씨 가운데서 저성들인 김. 리. 박. 정. 윤. 최씨 다음으로 꼽히는 대성인 류씨의 시조묘가 공화국북반부에서 발견된 사실은 매우 주목할만 하다.
사회과학원의 력사 연구소 조희승 소장은 새로 발굴된 문화 류씨 시조묘 유적을 통해 조선 성씨의 력사적 연원의 한 측면을 엿볼 수 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민족성원의 한 집단인 류씨 집단의 귀중한 역사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새로 발굴된 류씨의 시조묘는 국가보존유적으로 등록되었다.
조선성씨의 하나인 문화 류씨 시조묘 유적 발굴 『평양 1월14일발 조선중앙통신』
2. 조선에는 예로부터 혈연관계를 나타내는 성과 본이 있다. 성은 남자측의 혈족관계를 표시하는 칭호이고 본은 가문의 시조가 태어나거나 조상들이 대를 이어 살아온 고장을 말한다. 최근 사회과학원의 력사 학자들이 황해남도 삼천군 달천리에서 문화 류씨 시조묘 유적을 발굴하였다. 류씨는 15개의 본을 가지고 있는데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문화 류씨다. 여기에서 많은 류씨가 가지쳐 나왔다고 한다.
문화 류씨의 시조는 고려통일 위업에 크게 이바지한 류차달이다.
그의 묘는 구월산 기슭에 있는 달천 온천 주변 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력사 기록에 의하면 그의 무덤을 류씨의 첫 조상무덤이라는 뜻에서 【류릉】이라고 하였다.
이곳에는 류차달의 무덤과 4개의 비석들. 망돌 유적 그리고 묵방사라는 건축유적물이 있다.
학자들이 릉 비석의 비문을 해득한데 의하면 위의 유적들은 왕건에 의한 고려의 통일에 이바지한 류차달을 제사 지내기 위한 것들이였다.
비문 내용에는 류차달이 문화일대(오늘의 삼천군 일대)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고려의국토통일 실현에 이바지한 공로로 『삼한벽상공신』라는 칭호를 받았다고 씌어져 있다.
문화 류씨 시조묘는 국가보존유적으로 등록 되었다.
1, 조선신보(조총련의 기관지) 평양지국(KPM)의 기사 2011년 1월 14일부
2. 조선중앙통신 보도기
참고 : 다음을 클릭하여 보세요
1. 문화 류씨 대종회 홈페이지--종중소식---공지사항
✯ 44번. 류릉 성역화 안내문
2. 문화류씨--뿌리깊은 버드나무 카페--- 류차 문제
✯ 67번. 원파록은 진화하여 왔습니다.
✯ 90번. 대승공 류차달 시조님을 어떻게 조작하여 류효금으로 바꿔치기를 하였는가?
✯ 96번. 류차달이란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그 망발의 탐색
✯ 136번. 류차달 신분사가 차달 신분사로 복사 되었나?
☆『연안차씨약사』에서는 류차달을 삭제하고
1세 류차달 2세 차효전 연안차씨 시조
1세 류차달 2세 류효금 문화류씨 시조라고 망발합니다.
☆『고려대승공비지묘』비문과『고려대승문화류공차달지묘』비문에는『차원부설원기』 와 『원파록』에 관한 언급이 없습니다. 위서로 증명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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