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영남인물] `낙동대감’ 류후조

ryu하곡 2013. 7. 16. 18:38

 


상주시 중동면에 있는 풍산류씨 우천파(遇川派)의 종택인 수암종택 전경. 수암은 류성룡의 셋째 아들인 류진의 호다. 1700년대에 지어졌는데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수암의 7세손인 ‘낙동대감’ 류후조에 의해서다.

 

열다섯살 난 신랑 류후조는 처가에서 초례를 치른 뒤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연안이씨 명문가의 규수인 신부는 첫눈에도 아리땁고 어질어 보였다. 신랑은 아직 황홀한 기분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채 싱글벙글하면서 말을 타고 있었고, 신부는 가마를 타고 뒤를 따르고 있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토진나루에서 행렬은 낙동강을 건너게 해줄 배를 기다리게 되었다.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류후조의 눈이 나루터의 언덕으로 향했다. 거기에 웬 남루한 옷을 입은 여자가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아기를 낳고서는 기진해 쓰러져 있었다.

“이보시오! 정신 좀 차려보시오!”

하인이 달려가 여자를 깨우려 했으나, 여자는 눈을 뜨지 못하고 신음소리만 내고 있었다. 신랑은 짐에서 꿀을 꺼내 물에 타서 먹이게 했다. 이어 신부가 타고 있는 가마로 다가간 그는 나직하게 바깥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했다. 이야기를 듣고 난 신부는 스스로 가마에서 내렸다. 이어 신행 짐에서 이불을 꺼내 여자와 아기를 덮어주게 하고 가마에 태웠다. 신랑은 감탄하는 눈빛으로 신부를 바라보고 있다가 아랫사람들에게 일렀다.

“저기 보이는 주막까지 얼른 저 여자와 아기를 데려다 주고 오라. 주모에게 산모를 보살펴 달라고 하고 미역이 있거든 국이라도 끓여주게 하거라. 물론 돈을 충분히 주어서 비용으로 쓰게 하라.”

산모와 아기를 주막에 데려다 주고 온 뒤 신부는 다시 가마에 올랐다. 산모가 남긴 흔적과 냄새가 있었지만,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예정보다 늦게 집으로 돌아온 신랑은 부모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구나. 하지만 무슨 일을 할 때는 늘 신중하게 생각하여 가장 바른 길이 무엇인지 판단하고 난 연후에 처신해야 한다.”

아버지 류심춘이 말했다. 류심춘은 세 세자의 스승을 맡으면서 역사상 드물게 세 임금을 가르친 학자라는 영예를 얻은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가르침은 평생 류후조의 가슴에 남게 된다. 류후조는 얼마 뒤 주막으로 다시 찾아가 산모가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것을 확인하고, 고향인 강릉까지 갈 수 있도록 노자를 보태주었다.

그로부터 40여년 뒤 강릉부사가 되어 부임한 류후조에게 머리가 하얗게 센 어떤 여자가 찾아왔다. 바로 낙동강 나루터에서 구원해 준 여자였다. 그녀는 상주에서 입은 은혜를 잊을 길이 없어 평생토록 매일 새벽에 정화수를 떠놓고 은인에게 액운이 없기를 기도했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과거를 하지 않은 내가 부사까지 된 것이 바로 이 여인의 기도 덕분이었구나.”

류후조는 웃으면서 말했다. 여자가 그때 낳은 아들은 글공부를 열심히 해 어엿한 선비가 되어 있었다. 류후조는 아들을 불러 더욱 공부에 전념하도록 해주었고, 그 아들이 통천군수가 될 때까지 돌보아 주었다. 아들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내 외가는 바로 류후조 대감 댁”이라고 했고, 후손들은 류후조 대감 댁을 외갓집으로 불렀다고 전해지고 있다.

여인의 기도 덕분인지는 몰라도 류후조는 환갑이 되던 해 외직이긴 하나 당상관인 부사로 있으면서 문과 정시에 합격하여 내직에 들어갔다. 연륜과 함께 원만한 성품, 신중함을 갖춘 그의 관직생활은 순조로워 형조참판과 대사간의 요직을 역임했다.

1863년 ‘강화도령’으로 유명한 철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고, 조 대비의 전교로 고종이 열두살의 어린 나이로 왕좌에 등극했다. 대왕대비가 잠시 수렴청정을 맡았으나, 실권은 임금의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른바 대원군의 십년 집정시대가 시작되었다. 류후조는 고종 1년에 인사권을 관장하는 요직인 이조참판, 이듬해에 청요직(淸要職)의 대표적 관직인 대사헌을 거쳐 같은 해 공조판서에 올랐다. 한 해 뒤에 드디어 우의정에 임명되어 가문의 역사로는 9대조 서애 류성룡에 이어, 두 번째로 정승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류후조는 가문과 개인의 영광인 정승의 자리를 거듭 사양했다. 이에 어린 임금이 여러 번 취임을 재촉했고, 급기야 대왕대비까지 나서서 두 번씩이나 전교를 내려 강권한 뒤에야 어렵사리 자리를 받아들였다. 정승에 취임하기로 결정하던 날 밤, 대원군이 몰래 사람을 보내 류후조를 불렀다.

“우상 대감,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타파하지 않고서는 이 나라의 장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소. 내일 대감이 주상전하 앞에 나서게 되면 반드시 정승으로서 제기할 첫 번째 건의를 물을 것이오. 첫 번째 건의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전하께서 무조건 가납(嘉納)하게 되어 있소. 안동김씨를 비롯한 척신의 붕당과 문벌의 폐해를 발본색원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모조리 척살하고 쫓아낼 수밖에 없소. 이에 대해서는 남인의 후예인 대감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난 대감을 믿겠소.”

일단 대원군 앞에서는 알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집으로 돌아온 류후조의 마음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폐단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집안의 씨를 말리는 식의 피비린내 나는 과격한 방식의 변화는 엄청난 부작용을 낳을 것이고, 새로운 원한과 폐단을 불러일으킬 게 뻔했다. 대원군은 ‘상갓집 개’로 불리며 안동김씨의 사랑방을 고개를 숙인 채 들락거리던 시절의 비분을 권력의 칼을 빌려서 해소하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이 그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그때 청지기가 낮은 목소리로 알렸다.

“대감마님, 장동에서 이판 대감이 오셨습니다.”

안동김씨의 대표적인 인물이자 이조판서인 김병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두 사람이 마주 앉자, 김병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감, 우리 두 사람 사이에 이제까지 원수질 만한 일이 있었소이까?”

류후조는 대답했다.

“없었지요.”

“그럼 앞으로도 원수가 될 일은 없겠지요?”

류후조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소. 나는 누구와도 원수를 맺고 싶지 않소.”

“고맙소. 저는 오로지 대감만 믿고 돌아갑니다.”

이튿날 조복을 차려입고 입궐한 류후조는 임금 앞에 나아갔다. 대원군은 물론이고 안동김씨로서 대신과 재상의 자리에 올라 있는 사람들이 모두 긴장된 얼굴로 그의 입만 바라보고 있었다. 관례에 따라 정승에 취임한 사람으로서 첫 번째 진언을 올릴 차례가 되었다.

“전하, 신의 고향인 경상도 상주는 임진왜란 때 온 백성이 몸을 던져 왜적과 싸워 세금을 감면받는 은혜를 입은 일이 있사옵니다. 그때 의병을 창의하고 앞장서 왜적과 싸웠던 부제학 이준(李峻)은 크나큰 전공을 세운 것 말고도 인근의 선비들과 함께 존애원(存愛院)을 세워 질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원하고 풍속을 교화하는 큰 덕을 쌓아 오늘날까지 인근의 백성들이 그 은공을 기리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준에게 시호를 내리시고, 자손의 어려움을 보살펴 주소서.”

대원군이 앞으로 불쑥 나서서 어이가 없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우상 대감, 그것 말고는 더 헌의드릴 게 없소이까?”

“지금 말씀드린 것은 제가 어릴 때부터 수십년 동안 생각해온 것으로, 이 이외에는 더 아뢸 말씀이 없습니다.”

할 말이 없다는 사람을 계속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원군은 불만스러운 얼굴로 물러났지만, 그 일을 가지고 더 이상 가타부타 따지지는 않았다. 사실 그의 수족이 될 만한 사람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건의에 따라 이준에게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날 밤 류후조를 찾아온 김병기는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멸문의 위기를 모면케 해준 은혜에 감사했다.

다음해 안동김씨 가운데 한 명인 김병학을 영의정으로, 류후조를 좌의정으로 승진한다는 교지가 내렸다. 류후조는 이번에도 한사코 자리를 사양했다. 그의 나이가 이미 일흔이었다. 그리하여 실직인 좌의정에서 물러나 명예직인 판중추부사 겸 봉조하(奉朝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상주는 교통의 요지였고, 높고 낮은 관원들이 영남을 오가노라면 반드시 낙동강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전 좌의정이자 봉조하인 류후조에게 문안인사를 드리러 찾아오는 관인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다. 그런데 그의 집은 낙동강에서 십리쯤 떨어져 있었다.

“공무에 바쁜 관원들이 여기까지 찾아오게 하느니, 내가 강가에 나가서 사는 게 낫겠다.”

낙동강의 나루터 마을로 이사한 뒤로 그는 자연스럽게 ‘낙동대감’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을에 일흔이 넘는 노인이 한 사람 있었는데, 가끔 그를 찾아와 친구처럼 이야기를 나누다 가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경상감사가 큰 행렬을 이끌고 그의 집에 다녀간 뒤로는 그렇게 높은 사람인 줄 몰랐다면서 더 이상 집에 놀러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뒤에 그는 웃으며 말하곤 했다.

“경상감사가 내 친구 하나를 떼버렸구나.”

그가 어느 주막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지방관에 임명받은 사또가 장기를 둘 줄 아느냐고 물어왔다. 그가 둘 줄 안다고 하여 장기판이 벌어졌는데, 사또가 오만방자하기 그지없어 말끝마다 야유를 하고 비아냥대더니 장을 부를 때마다 “신관 사또 장 받아라”를 외쳐대는 것이었다. 계속 참고 있던 그가 마침내 장을 부를 때가 되어 “낙동대감 장 받아라” 하자, 그제야 사또가 그를 알아보고는 납작 엎드려 죽을 죄를 지었노라고 용서를 빌었다.

한 번은 삿갓을 쓰고 낚시를 하고 있던 그에게 인근의 양반가 젊은이가 와서 자신이 발을 적시기 싫으니 업어서 강을 건네달라고 했다. 일흔이 넘은 노인이 젊은이를 업고 강을 건너면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류후조는 이처럼 범인이 오르기 힘든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언제나 남들과 같은 자리에 있는 듯 겸손하게 처신하고, 평민들 사이에 섞여 소탈하고 즐거운 삶을 살았다. 그것이 낙파(洛坡) 류후조와 관련된 일화가 세상에 널리 유전하는 이유일 것이다.


성석제◆Story Memo

상주 출신인 류후조(柳厚祖·1798~1876)는 고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8세손이기도 한 그는 벼슬에서 물러난 뒤 고향 상주로 내려와 서민들과 어울리며 소탈한 삶을 살았다. 특히 문안인사차 관인들이 그의 처소를 찾는 일이 잦아지자, 국가중책에 바쁜 선비들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보다 한가한 자신이 길가로 나와 있는 것이 낫겠다며 스스로 낙동강 나루터 인근으로 처소를 옮기기도 했다. 그후부터 ‘낙동대감’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영남일보의 ‘낙동대감 류후조 스토리’는 토진나루에 얽힌 그의 이야기와 좌의정 시절 스토리, 그리고 귀향 후 일화를 재구성했다.

성석제-소설가·:

  <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출처 : Comix Art youya Pro.
글쓴이 : youy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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