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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군 이달의 청백리 류관 자료 소개

ryu하곡 2013. 7. 16. 14:42

 

장성군 이달의 청백리 류관 자료 소개

4월의 청백리 류관.pptx

 

출처 청렴문화 체험교육[전남 장성군] | 청렴코디네이터(lso840)

출처1 : 4월의 청백리 하정 류관 http://blog.naver.com/lso840/60188888919

출처2 : 청백리 하정 류관 정승의 생애 http://blog.naver.com/lso840/60188888531

출처3 : 2013년 4월의 청백리 하정 류관 ppt자료http://blog.naver.com/lso840/60188887131

 

4월의 淸白吏, 하정(夏亭) 류관(柳寬) 류관 / 이달의 청백리 2013/04/01 11:56

주소 http://blog.naver.com/lso840/60188888919

淸白吏, 하정(夏亭) 류관(柳寬) 정승의 생애 류관 / 이달의 청백리 2013/04/01 11:51

주소 http://blog.naver.com/lso840/6018888853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1346년(충목왕 2) 황해도 문화현에서 삼사판관 류안택의 차자(次子)로 태어났다. 본관은 문화(文化)로, 처음 이름은 관(觀)이며, 자는 몽사(夢思)였는데 1426년(세종 8) 이름을 관(寬), 자를 경부(敬夫)로 고쳤다.

호는 하정(夏亭)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으로 1421년(세종 3) 76세에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당시 류관, 황희, 맹사성 세 사람을 가리켜서 조선 초기에 활약한 세 사람의 청백한 관리라는 뜻의‘선초삼청(鮮初三淸)’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학자가 되려고 하였으나 나라가 어렵고 백성들이 힘들 때일수록 올바른 벼슬아치가 필요하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371년(공민왕 20) 26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봉산군수, 성균관 사예, 사헌부 중승 등을 두루 거쳤다. 조선 개국에 참여하여 개국원종공신이 되었으며, 강원⋅전라도 관찰사와 계림부윤, 예문관 대제학, 형조판서, 사헌부 대사헌 등을 거쳐 79세에 우의정에 올랐다가 82세 때 55년간의 관직에서 물러났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태조실록 편찬과 고려사 개편에 참여하였고, 특히 태조가 조선 건국 시 수도를 정함에 있어 송악(개성)에 그대로 있자는 안과 한양(서울)과 계룡산으로 도읍을 옮기자는 안이 수년을 끌어오던 중 류관이 한양정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려 마침내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는 등 역시 청백리에 선정되었던 황희⋅맹사성 정승과 함께 조선 초기의 국가체제 정비에 힘썼다.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기록에 의하면 우의정이라는 높은 벼슬을 지내면서도 동대문 밖에 비가 새는 두어 칸의 초가집에 울타리도 없이 산 류관의 성품을 아껴 태종은 밤중에 몰래 선공감을 시켜 그의 집 주위에 울타리를 만들게 하면서도 그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였고, 임금이 먹던 음식을 끊임없이 내려 그가 먹을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또 세종은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종신토록 국록을 내릴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일화에 의하면「어느 때 장마 비가 한 달 넘게 내려서 집에 새는 빗발이 삼 줄기처럼 내릴 때, 공이 손에 우산을 들고 비를 피하면서 그의 부인을 돌아보고 말하기를“이 우산도 없는 집에서는 어떻게 견디겠소.”하니, 그의 부인이 말하기를“우산이 없는 집에는 다른 준비가 있답니다.”하자, 공이 웃었다.」라고 <필원잡기>에 전한다.

이후로 방안에서 우산을 펴고 비를 가리는 것을 청백리의 표상으로 삼았고, 이 같은 청빈사상(淸貧思想)을 비우사상(庇雨思想)이라고 했다.

이 같은 청렴결백한 성품 이외에도 예문관 대제학으로 있을 때 세종 임금에게 간했던 기록<조선왕조실록 세종 2년>을 살펴보면, 목민관이 갖추어야 할 덕목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수령의 어질고 어리석음에 따라 백성의 안락과 근심 걱정이 연계되어 있습니다. 근래에 수령들 대개가 직무만을 잘 처리하고자 형벌을 엄하게 써 압박하고 재촉함으로써 일을 마무리하는 것에만 힘을 쓰고, 백성의 이해에 대하여는 돌아보고 생각해 주지 않습니다. 백성이 억울함이 있어 하소연해도 억누르기만 하고 풀어주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매질까지 하여 쫓아내고서는‘형벌을 엄하게 하지 않으면 위엄이 서지 아니하며, 다급히 독촉하지 않으면 일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하니, 이러한 자들이 흔합니다. 이로 말미암아 원망과 분노의 기색이 민간에 쌓여서 평화스러운 기운을 손상시킵니다. 그런데 감사는 그러한 사람들을 일 처리 잘한다고 생각하며, 성적을 매길 때 높은 등급을 줍니다. 그러므로 후임자들도 그대로 본받아 하니, 백성들이 어떻게 편안히 생활하고, 원망도 풀 수 있겠습니까? 각도에 명령하여 수령들에게 모두 백성을 사랑할 것을 염두에 두고 각박한 짓을 하지 않도록 힘써서 원망의 기운을 해소하옵소서.”하였다.」

류관이 1433년(세종 15) 88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뜨자, 세종 임금은 어진 신하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 하였던 상황이 <조선왕조실록>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공의 부음이 조정에 전하여지자, 마침 경회루에서 열렸던 백관의 연회를 중도에 파하고 백의와 소산선(素繖扇, 하얀 일산과 부채)으로 홍화문 밖에 나와서 백관을 거느리고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여 친히 제사 드린 다음, 대소신료와 함께 큰소리로 곡(哭)을 해 그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고, 조정의 공사와 시점 상업을 3일 동안 정지하게 했다.」

류관은 유훈(遺訓)으로「吾家長物 惟淸白, 世世相傳 無限人 (우리 집안에 길이 전하는 사물은 오직 청백이니, 대대로 서로 이어 끝없이 전하라.)」을 남겼다.

저서로는 <하정집>이 전한다. - 공병주 편집 -

 

2013년 4월의 청백리 하정(夏亭) 류관(柳寛) PPT자료 류관 / 이달의 청백리 2013/04/01 11:35

주소 http://blog.naver.com/lso840/60188887131

ppt 자료는 첨부 파일로 보십시오.

※주1-  하정파보 1권 11쪽, 64쪽에 의거 “惟淸白(유청백)”이 유훈시입니다. 일부후손이 표기하고 있는 "唯淸白(유청백)"으로 표기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 주십시오.(류재균)

4월의 청백리 류관.ppt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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