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족보(族譜)가 없는 사람들(퍼온 글)

ryu하곡 2013. 5. 11. 06:00

첫 째 : 불에 타 버렸다(집에 화재가 나서)

둘 째 : 팔아먹었다(개화기 양반의 신분을 사고 팔면서)

셋 째 : 북에 두고 월남했다

넷 째 : 큰집에서 가지고 만주로 떠났다

다섯 째 : 홍수에 떠내려 갔다

여섯 째 : 원래부터 없었다

일곱 째 :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기타 등등

 여기에서는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의 고향이나 일제 때 발행된 제적등본, 혹은 호적 단자(조선조 때 호적부)와 선대 묘 소재지를 알아보면 어떤 예감이 든다. 감이 좋은 집은 몇 번씩 현지 출장으로 답사를 해 보면 다행히도 구보(舊譜)에서 본인들의 선대와 묘소 기록이 보이는데도 그 본손(本孫)들은 알아 볼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왜냐하면 제적등본(일제 때 발행)에는 그 이상의 조상들 휘, 함자가 항렬에 맞추어 적어둔 데다가 설령 제적부에까지 내려온 조상이라도 족보에 기재된 이름과 다른 경우가 많고 묘소도 수호하지 못했으니 이럴 경우 확인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된다. 예를 들어 연대 고찰과 윗대 조모님들의 본관 성씨 및 제사 날짜를 비교해 본다. 또는 20대에 자손을 생산하면 여러 대를 내려가도 그대로 유지되며 40대에 생산되면 아랫대는 거의가 계속해서 40대에 자식을 보게 되는 경우가 그 예이다.

 실제 1970년대 어느 봄날 신사분 한 분이 찾아 와 어느 지방에서 어느 지방으로 할아버지 대에 이사한 후 한번도 고향을 찾은 적이 없단다. 조부님 말씀대로 본인의 일가는 그 지방에서 땅땅한 재력과 권세를 수십대로 이어 내려온 집안으로 지금도 그 여력이 남아 있다 한다. 그러나 가지고 온 제적등본을 살펴본 결과 조부님이 말하는 어느 지방의 어느 집안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면천되어 멀리 어느 지방으로 떠나가 살았는데 아랫대에서 족보를 물어보니 알고 있는 것은 옛날에 종살이하던 상전의 가계를 손자에게 얘기해 줄 수밖에 없었다.

 300여년 전의 호적단자로 윗대를 찾으려고 모씨의 모파 회장님을 찾아가 상계보 원보를 보여 달라하니 아예 없다고 했다. 그러면 지금 나온 파보는 무엇으로 어떻게 수단 작성되었냐고 하니 6.25때 거의 소실되고 어쩌다 남은 가첩과 어느 동네는 큰집이라 하고 어느 집은 작은 집이라 하고, 영남지방은 중간집이라 하더라 하고 의견이 모아지는대로 편집을 했다고 한다. 특히 유명한 어른 뒤로는 세월이 갈수록 자꾸 자손이 많아지고 있다. 10년이 지나 다시 보면 몇 형제가 더 생겨난다. 돌아가신 어른이 무슨 재주로 살아 있는 자손을 자꾸 만들어 내는지 그 재주는 불가사의하다.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실에는 일제 때 조선 총독부에 납본했던 전국 각지에서 온 족보 13,000여권이 소장 되어 있다.그리고 지금까지 꾸준히 신보가 쏟아져 나오고 있는 중에는 오늘도 쉴새없이 족보가 위조되어 나오고 있다. 족보란 신성한 문건으로서 또한 족보란 모시는 것인 만큼 "책 가지러 간다"가 아니고 "족보를 모시러 간다"고 까지 하는 족보가 자세히 보면 뜻밖에도 사실과 다르거나 의도적으로 조작된 내용이 허다한 것이 또한 이 족보책이다. 조상들이 역임한적이 없는 관직을 적어 놓거나 문과나 생원, 진사시를 비롯한 각종과거 시험에 급제하였다고 거짓으로 기록한 부분도 적지 않다. 진실로 족보의 가치를 높이려면 사실 하나하나가 전거(典據)에서 나와야한다.

 족보에 기재 사항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문과방목" "생원진사방목" "무과방목"등과 조선왕조실록 등으로 내용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혈연관계가 없는 집안에 억지로 계보를 연결시킨 경우도 많다. 그것은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인의 대다수는 족보에 입록되지 못하였으나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은 족보를 모시고 있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현재 전하는 16-7세기 호적단자를 검토해보면 당시 성씨를 사용하지 못한 노비들이 3-40%나되었고, 그 보다 상위계층인 평민들 , 양민은 인구의 40-50%를 차지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노비제는 폐지되었으며, 노비의 폐지는 곧 신분의 폐지였다. 그러나 1894년 이전에는 족보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평민들은 신분 상승을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시골 호족은 서을의 양반과 혼인할려고 애썼고, 서울 양반은 권세가와 인척관계를 맺기위해 노력하였다.

 갑오개혁 이후에는 일명 빠꿈교지라는게 돌아 다녔는데 이는 이름이 적혀있지않아 구입하여 이름을 적어넣도록 된 것이다. 요즘 백지 수표처럼 백지 교지가 성행했다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각 성씨마다 시보(始譜)를 살펴보면 고려말(1300년대 말)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나 조선개국(1392년)이후 1400-1700년사이에 각 성씨의 시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퍼온 곳
http://user.chollian.net/~koran990/jokbocol/jokboview.html

출처 : 김해김씨족보
글쓴이 : kimheakim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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