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차원부 설원기와 조선왕조실록

ryu하곡 2013. 5. 7. 11:39

1. 권 문해(1534-1591)는 백과사전 형식의 책인 대동운부군옥을 만들면서 참고한 서적이 중국서 15종, 국내서 175종(신라시대 저서 2종, 고려시대 저서 52종, 조선시대 저서 121종)등 조선 선조에 이르기까지 공사실록,대소 가집은 물론 중국서 등 그 당시 조선에 관계 있는 건 거의 다 참고하였다고 볼 수 있고 그 안에 설원기(박팽년 承命 撰)라는 책이 들어 있다.

 

2. 권 문해가 대동운부군옥을 만들면서 참고한 서적중 중요한 우리나라 역사서는 삼국유사(僧일연), 삼국사(김부식),고려본사(정인지 奉敎 撰),여지승람(노사신, 서거정등 撰)등이 있고 육신전(남효온 1454-1492)도 들어 있다. 그런데 권 문해가 대동운부옥을 만들면서 참고한 서적에는 조선왕조실록은 없다. 왜 권문해는 대동운부옥을 만들면서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할 수가 없었을까? 조선시대에는 조선왕조실록 열람을 철저하게 금지하였기 때문에 일반 관료,학자는 물론 왕도 그 기록을 열람할 수 가 없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에는 사관이 교대로 궁중에 숙직하면서 조정의 모든 행사와 회의에 참여하여 정사의 잘잘못과 국왕의 언동, 인물의 선악등을 일정한 형식을 따라 기록하고 정부 각 기관의 공문서를 사관을 종합정리하여 춘추관에 보관하였고 새 국왕이 즉위하면 춘추관에 있는 선왕에 대한 자료를 이용하여 실록을 편찬하였고 작업이 끝나면 실록 초고본들과 함께 사초등도 물에 풀어 세초를 하였다. 따라서 같은 사건, 같은 인물등에 대하여 후대에 개인문집에 들어 있는 내용과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비교하면 일정하게 팩트(fact) 면에서 차이점이 발견되곤 한다.

3. 이러한 이유로 1456년 (음) 6월 2일 김질,정창손의 고변으로 시작된 단종복위사건(속칭 사육신사건)은 남효온(1454-1492)이 추강집에서 육신전을 쓰면서 당시에 다양한 사람들에게 구전이 아닌 문헌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기본적인 사건 관련 팩트(fact)가 조선왕조실록 정사와 맞지 않은 부분이 상당히 발견되고 있다. 예를들면 1456년 박팽년은 형조참판이라고 기술하고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박 팽년은 1456년 3월 12일 형조참판이었다가 1456년 5월 3일은 중추원부사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남효온의 육신전은 기본적인 사실관계에 대해서 몇 가지 착오 또는 오류가 있었고 이에 대하여 선조실록에도 육신전에 나오는 단종의 나이 관련해 남효온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선조가 강하게 비판한 내용이 나오고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 때문에 지금 현재에는 사육신 논쟁 - 유응부와 김문기 - 의 시초가 된다. 그리고 남효온이 생육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많다) 왜 남효온이 죽기전에 썼던 육신전의 내용이 세조실록(세조가 1468년사망한 후 신숙주,한명회,강희맹,양성지등에 의하여 1471년 12월 세조실록이 편찬됨)에 기록된 기본적인 팩트(fact)와 다른 부분이 있었을까?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남효온 또한 세조실록을 열람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발생하고 1456년에 남효온은 3살로 그 현장에 없었기 때문이다.


4. 만약 차원부 설원기가 1456년 (음) 5월 17일에 쓰여졌다면 세조실록에 나오는 내용과 기본적인 팩트(fact)와 일치 하여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에 의해 후대(1580년경)에 조작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차원부 설원 응제시 관련 48명에 대한 검증 및 고증은 이미 류주환교수님께서 하였으므로 그 구체적인은 내용은 생략하고 간단히 몇 가지만 살펴본다.

◯ 이예장 : 세조실록에 의하면 1456.(음)2.25 사망하였다.

◯ 이석형 : 세조실록에 의하면 1455.(음윤달)6월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받고 1456.(음)9월 전라도 관찰사로 있었다.

◯ 최항 : 세조실록에 의하면 1455.(음)8.18 모친이 사망하여 고향에서 3년상을 하고 있었고 3년상이 끝난후 1457.10.3 호조참판으로 제수되어 한양으로 올라왔다.

◯ 한확 : 세조실록에 의하면 1456.5.9 사은사로 명나로 갔고 1456.9월 돌아오던 도중 사망하였다.

◯ 홍유손 : 장유(1587-1638)는 계곡집에서 류몽인(1559-1623)의 어우집에 나오는 홍유손에 대한 기록은 잘못되었다하면서 홍유손의 출생년도를 1452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후 이익(1681-1763)도 성호사설에서 홍유손의 출생년도를 1452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므로 이런 기록으로 보면 1456년에 홍유손의 나이는 5살의 나이였다.

◯ 남효온 : 남효온의 출생년도는 1454년이므로 1456년에 남효온 나이는 3살의 나이였다.

5.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은 최소한 차원부 설원기 응제시를 짓을 수 없는 사람들인데 차원부 설원기에 등장하는 것을 보면 차원부 설원기는 위서임에 확실하다. 만약 차원부 설원기가 1580년대경에 누군가 왕명을 참칭하여 작성하였다면 그 작성자는 무슨 생각과 무슨 근거로 만들었을까?

6. 차원부 설원기는 신라시대의 헌덕왕이야기, 고려시대의 차씨 계보, 조선 초기 차원부 행적 및 정도전,하륜,조영규,함부림등 속칭 4얼 관계 그리고 1456년 5월 17일 차원부 설원기 찬, 48명의 응제시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차원부 설원기를 만든 사람은 최소한 삼국사기(신라시대 헌덕왕관련), 고려사(고려시대 연안차씨 계보), 남효온의 육신전 및 그 당시에 발간된 개인문집등의 책은 보았다고 할 수 있는데 차원부 설원기는 여러 가지로 문제점이 발견되는데 조선왕조실록등과 비교해보면 크게 기본적인 팩트면에서 네가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데 첫째는 고려시대 연안차씨의 계보의 비현실적, 둘째는 1398년 차원부를 비롯하여 연안차씨 70여명을 죽인사람중 그 전에 이미 죽은 정도전,조영규등을 포함시켜 언급하고 있다는 점, 셋째는 차원부가 문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고 하는데(연안차씨에서는 그 교지가 있다고 하며 인터넷에서도 검색하면 나옴) 1786년 증시를 청하는 상소를 하고 있다는 점, 네째는 응제시 명단에도 이미 죽은 사람과 상식적으로 보아도 응제시를 짓을 수 없는 사람이 다수가 포함되었다는 점이다.

7. 그러면 1580년경 누군가 차원부설원기를 왕명을 칭하여 만들면서 무슨 기준과 무슨 근거로 응제시 명단 48명을 작성했을까 궁금해진다. 권문해가 대동운부군옥을 만들면서 참고한 서적중에 “해동명신행적(이러한 기록들이 누적되어 조선 영조때 국조인물고라는 책이 발간되는 것으로 보여진다”이라는 책이 있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인물사전책으로 보이는데 아마도 그 책을 보고 1450년대에 활동했던 비슷한 인물들을 뽑아서 명단을 작성을 하였을 것이라고 추정을 해본다.

출처 :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글쓴이 : 류병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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