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일성록"에 나타난 차원부 관련 기사의 검토

ryu하곡 2013. 5. 6. 17:16

"일성록"(日省錄)은 1760년(영조36)에서 1910년(순종4)까지 151년간 매일 국왕의

동정과 국정의 제반사항을 기록한 일기체의 연대기이며, 1차적 사료로서 조선왕조실록

이상의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된다. 일성록에는 차원부설원기(이하, 설원기)에

대한 중요한 사실이 들어 있다. 곧 정조 10년(1786년) 9월 7일의 기사와 이듬해

정조 11년(1787년) 2월 6일의 기사이다.


둘 다 상언(上言: 백성이 임금에게 올린 글)에 대한 판하(判下 :임금의 판결) 관련

기사이다. 정조 10년 9월 7일에는 72건에 대해서, 그리고 정조 11년 2월 6일에는

86건에 대해 판하하고 있다. 정조는 대부분의 경우 담당부서에서 올린 의견을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반대의 결정을 하는 경우도 여럿 보인다. 상언들에 대한

왕의 재가(裁可)가 실질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하게 만든다. 차원부 관련해서는

전자는 광주의 류급(柳汲) 등이, 후자는 차세진(車世軫)이 상언을 올린 것인데,

모두 차원부의 증시(贈諡: 왕이 시호를 내려주는 일)를 요청한 것이다.



1. 정조 10년 9월 7일


又啓言,光州幼學柳汲等上言以爲,麗朝諫議大夫車原부請諡事,請令該曺稟處議.

盖車原부偉功盛烈,至蒙 端廟朝賜諡之命,累百年未遑之事,今不可輕議,請置之,

從之. *부[兆頁]


(예조가) 또 아뢰기를, "광주의 유학(幼學)* 유급(柳汲) 등이 상언을 올려서,

'고려조(高麗朝)의 간의대부(諫議大夫) 차원부(車原부)의 시호를 내려주길 요청한

일에 대해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차원부가

성대한 공렬*이 있어 단묘조(端廟朝)에서 시호를 하사하는 명을 입었었다는

일은 수백 년 동안 미처 다룰 겨를이 없던 일입니다. 지금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으니, 그대로 두시기를 요청합니다."고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 유학: 벼슬하지 않은 유생

   * 해조: 해당 관부(官府), 여기서는 예조를 가리킴.

   * 품처: 웃어른께 아뢰어 처리함.

   * 공렬: 큰 공적.


중간쯤에 있는 '盖' 앞까지는 상언의 내용이다. 말이 복잡하지만 간단히, 나라에서

차원부의 시호를 내려달라는 청을 하고 있는 것이다. '盖' 이하는 이런 일을 주관하는

예조의 의견이고 마지막에는 왕의 결재가 주어져 있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현재

상언의 청을 들어줄 수 없다는, 곧 시호를 내려줄 수 없다는 결론이다.


그런데 윗글의 해석은 그 뉘앙스에 따라 아주 다른 결과를 주기 때문에 엄밀해야

한다. 여기서 차원부 자신에 대한 사항은 상언에는 없고 예조의 의견에만 드러나

있다. 그것, 즉 '車原부偉功盛烈,至蒙 端廟朝賜諡之命'의 내용을 예조에서 인정하고

있는가, 곧 실제 차원부가 큰 공적이 있어 단종 때 시호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는지

여부가 관심을 끈다. 그런데 이것은 한문을 분석하면 저절로 드러난다.


한문은 일단 다음과 같이 읽힌다.

"대개 '車原부偉功盛烈,至蒙 端廟朝賜諡之命'은 수백 년 동안의 '未遑之事'이니 지금

가볍게 논의할 수 없다."


'未遑'은 '여가/틈/겨를이 없다'는 뜻이다. 뭔가가 겨를(일을 하다가 쉬게 되는 틈;

여가)이 없어 지난 수백 년 동안이나 다뤄지지 않은 것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그렇게 다뤄지지 못한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命(임금의 명령)에 주목하면 왕명이

어떤 특별한 사유 때문에 시행할 시간이 없었다는 듯이 들리기도 한다. 곧 시호를

내리라는 왕명은 이미 있었고, 차원부의 공적은 전제조건이니 그것도 물론 있었고,

그 왕명이 그동안 시행되지 못했음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문장구조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런 뜻이 아님을 명백히 알 수 있다.


곧 "'車原부偉功盛烈,至蒙 端廟朝賜諡之命'은 수백 년 동안의 '未遑之事'이니"의

구절에서 문장 구조상 주어는 命이 아니고 '車原부偉功盛烈,至蒙 端廟朝賜諡之命'

전체이다. "차원부가 ... 命을 입은 것에 이른 것"이다. 의미를 더 명확히 하면

"차원부가 ... 왕명을 입었다는 그 사안(事案)"이다. 그렇다면 시간이 없었다고 할 때의

그 시간은 '왕명을 시행할 시간'이 아니라 '그 사안을 다룰 시간'이다. 예조의 의견은

풀어보면 이렇게 된다.

"차원부가 공적을 세워 시호를 내리라는 왕명을 입게 되기까지 했다고 하는 그 사안은

지금까지 논의될 틈이 없었기에 지금 갑자기 논의해서 시호를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그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입니다." 


환언하면, "지금까지 논의되지도 않은 일을 지금 논의해서 시호를 내릴 수 없다."

말이 된다. 이런 명백한 문장 분석을 간과하고 命에서 끊어 읽고, 累百年未遑之事를

그 아래의 今不可輕議의 주어로 보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나온다.


(예조가) 또 아뢰기를, "광주의 유학 유급(柳汲) 등이 상언에서, '고려조(高麗朝)의

간의대부(諫議大夫) 차원부(車原부)를 위해 시호를 주청하는 문제에 대해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차원부의 성대한 공렬에 대해서는

단묘조(端廟朝)에 시호를 하사하는 명을 입기에 이르렀으나, 수백 년 동안 거행하지

못했던 일을 지금 가볍게 의논할 수가 없으니,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그대로 따랐다.


실제 이것은 "일성록"(국역; 민족문화추진회)의 해석인데 내용의 깊은 이해 없이

문장을 분석하고, 설원기가 철저한 위작임을 감안하지 않고, 또 아래에서 다루어질

정조 11년 2월 6일의 관련 기사와 연결 짓지 않고 단순하게 해석한 결과로 생각된다.


내용으로 봐도 '車原부偉功盛烈,至蒙 端廟朝賜諡之命'이 예조가 인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곧 여기에 '시호를 내리라는 단종의 왕명'이 언급되어 있는데

설원기 자체에서조차 "賜諡之議" 곧 '시호에 대한 의논'이란 언급은 있으나(그것도

주석에만 나옴) 시호를 내렸거나 혹은 시호를 내리라는 명을 내렸다는 단정적인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설원기에서 그 시호가 무엇인지와 함께

명확하게 밝혔을 것이다. 대신 본(本)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상이점이 큰

설원기들의 잡다한 부록이나 발문(跋文) 등에 세종, 문종, 단종, 혹은 세조가 내렸다는

중구난방의 언급들이 들어 있는데, 상언을 올린 사람들은 그 중에서 "단종 때 시호를

내리라는 명이 있었다"는 것과 흔히 그런 식의 말 뒤에 붙는, "그런데 시행되지 않았다"는

추가 설명을 취하여 상언에 표기한 것일 따름이다. 예조의 관리들이 조금이라도 문헌을

상고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런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은 없다.

다른 측면에서는, '車原부偉功盛烈,至蒙 端廟朝賜諡之命'의 구절 자체가 예조에서 스스로

쓴 구절일 리가 없고 상언의 구절을 단순 인용했음이 분명하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역시 그 내용을 예조가 인정한 것이 아니라는 동일한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이런 논의가 적절함은 "일성록"의 둘째 기사에서 재차 확인할 수 있다.



2. 정조 11년 2월 6일:


又啓言,幼學車世軫上言以爲,其先祖麗朝諫議大夫原부,有採薇歌參之苦節,

於前朝贊回軍定儲之偉烈,於我朝,請易名之典*矣.

久遠之事,無以考信,請置之,從之. *부[兆頁]


(예조가) 또 아뢰기를, "유학 차세진(車世軫)이 상언을 올려서, '자기 선조인 고려의

간의대부(諫議大夫) 원부(原부)가 고려조에 대해 백이(伯夷) 숙제(叔齊)에 버금가는

꿋꿋한 절개가 있었고, 우리 조선조에 대해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과 저위(儲位)*를

정하는 것을 도운 큰 공렬(功烈)이 있었기에, 사시(賜諡)의 은전을 청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오래전의 일이라 상고하여 믿을 수 없으니, 그대로 두시기를

요청합니다."고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다.

 

   * 易名之典(역명지전): 나라에서 시호를 내려주는 일.

   * 저위(儲位): 왕세자의 지위.


여기서 '저위'는 태조가 차원부와 만나서 왕자들에게 왕위를 돌려가며 시키겠다는

태조의 말을 듣고 차원부가 방원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표명했다는 설원기의

일화를 시사하는 단어이다.   


설원기는 차원부가 고려에 대한 절개가 높은 사람이고,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을

종용하여 조선의 개국공신 이상의 공로를 세웠으며, 태조가 왕위를 아들들에게

돌려가며 시키겠다고 말할 때 방원(태종)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보여

태종에게도 공이 있고 은인인데 그만 하륜이 홀로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되어

태조와 태종의 사이를 이간시키고 차원부를 죽이고 말았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이것을 상언과 비교해보면 상언은 설원기의 내용을 그대로 축약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에 대한 절개와 고려를 망하게 한 위화도회군의 공로가

어떻게 병치(竝置)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으며, 태조의 왕위 계승에 대한

생각이란 것도 말을 꺼내기도 어려운 치기(稚氣)의 극치이어서 실제 일어났을

가능성이 전무 하다. 더구나 설원기에서조차 차원부의 방원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충고가 있었을 뿐 그것이 실제 태조나 상황에 어떤 영향을 미쳐 태종이 왕이 된

것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 이야기에서도 태종이 왕이 된 것이 차원부의

충고와 직접 연관이 없어서 그의 공로라고 부를 수 없다. 하륜의 부분 역시

꾸며진 차원부의 가치를 더욱 높이려고 온갖 조작과 왜곡을 동원한 묘사일 따름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왕과 조정 즉 예조의 반응은 어떤가. 일고의 여지도 없이

"믿을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언들을 보면 설원기의 내용은 류씨도 차씨도 그 내용을 바탕으로 왕에게

어떤 것을 요청할 정도로 절대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필경 당시의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든다. 그리고 실제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증거는 아주 많다. 설원기는

사육신들을 저자로 참칭하고 사육신 변고를 기화로 삼고 왕명을 참칭하여 교묘한

이야기들을 꾸며낸 문헌이고, 조선의 후반에 사회와 역사를 혼란시켜왔다. 설원기가

갖고 있는 명백한 허다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지식인들이 비판의식의

부재와 진실의 왜곡도 불사하는 명분의 강조, 설원기의 이해당사자들의 극심한 숭배

등의 이유로 그 비판이 미루어지다가 겨우 몇 년래의 근자에 와서야 설원기 전체가

위서(僞書)라는 연구 결과가 확실하게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참고: "일성록"(국역; 민족문화추진회)의 해석:

"(예조가) 또 아뢰기를, "유학 차세진(車世軫)의 상언에, '선조(先祖)인 고려의

간의대부(諫議大夫) 차원부(車原부)는 은둔하여 나라가 패망해 가는 것을 가슴

아파하는 꿋꿋한 절개가 있었습니다. 고려조에서 위화도(威化島) 회군(回軍)과

저위(儲位)를 정하는 것을 도운 큰 공렬(功烈)이 있었기에, 우리 조정에서

사시(賜諡)의 은전을 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였습니다. 오래전의 일이라

상고하여 믿을 수 없으니, 그만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왕이) 그대로

따랐다."



3. 결어 


"일성록"의 1786년과 1787년의 기사는 일부 사가(私家)에서 떠받들어지는

차원부설원기가 공식적으로 부정되었음과 차원부의 시호는 내린 적이 없음을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간에는 심지어 세조가 시호를 내렸다는

교지(敎旨)가 버젓하게 선전되고 있는 실정이니 설원기의 왜곡의 실상이야

더 말할 나위 없다.


"일성록"에서 발견되는 이 의심의 여지없는 확실함 앞에 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차원부설원기에 대한 정조대왕과 조정의 공식 반응, 바로 "믿을 수 없다"는

그것이 차원부설원기에 대한 최종 결론이다.


위서(僞書) 설원기의 내용들은 현재 민족과 역사 관련을 포함한 몇몇 백과사전,

여러 성씨들의 족보를 위시한 종사(宗事) 관련 문헌들, 설원기에 참칭된 저자들의

문집과 그 주변의 출판물들, 드물지만 간혹 역사 연구물에까지 그 해독을 미치고

있으며, 최근의 인터넷의 발달과 맞물려 그릇된 정보가 거듭 재생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 소개되고 상세히 분석된 "일성록"의 기사들이 위서(僞書) 설원기가

퍼뜨린 해악들을 우리 사회에서 모두 제거하여 진실로써 거짓을 몰아내는 기폭제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2008. 6. 30.

채하 류주환


출처 : 물고기와 물병
글쓴이 : 은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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