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원기 필사본과 학음정판
저는 지금까지 설원기의 필사본("국역 차원부설원기"의 저본(底本))이라고 하는 것과
학음정판이라는 두 가지 본(本)을 자세히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필사본은 연대를
알 수 없고, 학음정판은 1925년판인데 중간본으로 판단됩니다. 그 둘이 내용에서는
대동소이하지만 그 체재(주로 주석의 부분; 구분, 배열 등)에서 차이가 많고 글씨가
다른 부분이나 일부 문장의 유무의 차이가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특히 서문의
저자가 필사본에서는 하위지로 나와 있고 학음정판에서는 신석조(辛碩祖)로 나와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필사본: 時維 景泰七年五月二十一日嘉靖大夫行吏曺禮曺參判臣河緯地奉 敎謹序
학음정: 時惟景泰七年丙子五月二十一日臣辛碩祖奉 敎與臣河緯地謹議序
(* 維와 惟의 차이; 품계, 벼슬 기록 유무의 차이; 저자 이름 다름.)
본문의 저자는 필사본과 학음정판 모두 박팽년으로 나오며 큰 차이는 없습니다.
필사본: 時維 景泰七年丙子五月十七日嘉靖大夫行刑曹參判臣朴彭年奉 敎謹記
(* 丙子는 주석으로 작게 달려 있음.)
학음정: 時惟景泰七年丙子五月十七日嘉靖大夫行刑曺參判臣朴彭年奉 敎謹記
(* 維와 惟의 차이)
서문의 저자가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본문의 작성시기로 나와 있는
경태7년(1456년) 5월 17일에 박팽년은 형조참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설원기가
저렇게 쓰고 있는 것은 남효온의 "六臣傳"을 그대로 베꼈기 때문입니다. 박팽년이
저자일 수가 없음을 증명하고 있으며, 이것만으로도 설원기는 위서(僞書)임이 증명되며,
그 이유와 책의 내용을 고찰하면 설원기의 내용 자체가 모두 위작(僞作)이라는 결론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2. 설원기 경진본(庚辰本)
그런데 기회가 있어 설원기의 다른 판을 볼 수 있었습니다. 부천까지 갔다오는
대장정이었습니다.
사정상 표지 외에는 사진을 찍을 수 없었고, 짧은 시간에 내용도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볼 수 있었던 것들만 몇 가지 지적하겠습니다.
책은 활자본이었고 (학음정판은 목판본) 표지는 없어져서 새로 달았으며, 크기는
A4보다 크고 눈대중으로 26 cm x 35 cm 정도 되어 보였습니다. 서문, 본문,
응제시, 그리고 발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발문에 보니 1760년에 車錫兩이 만들었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대략 이전에 만든
것이 활자가 어그러져서 만들었다는 표현이 있는 것을 보니 중간본인 듯합니다.
편의상 1760년을 따서 이 본(本)을 경진본(庚辰本)이라 부르겠습니다.
경진본에는 위의 두 본(필사본과 학음정판)과 비교하면 특기할 점들이 몇 있습니다.
(1) 서문과 본문의 저자 관련
- 서문의 저자는 신석조로 나오는데, 다만 한자가 "辛石祖"로 되어있음.
- 時維(필) 혹은 時惟(학)이 時有로 나와 있음.
- 본문의 저자는 박팽년으로 나옴. 이는 필사본, 학음정판 모두 일관된 사실임.
- 서문과 본문이 쓰인 날짜는 각각 5월 21일, 5월 17일로 동일한데, 년도만
"景泰六年乙亥"로 나옴.
- 본문의 저자인 박팽년의 묘사가 "嘉善大夫行刑曹參判"으로 나옴.
(2) 응제시 관련
필사본과 학음정판에서 각각의 응제시 끝에 시의 주석이 달려 있고 그 끝에는
"奉 敎幷詩註"라 되어 있는데, 경진본에서는 대부분 시만 주어져 있고 주석이
없으며 시 끝에는 "奉 敎謹製"로 되어 있음.
필사본과 학음정판에는 이예장의 시의 주석에 류씨와 차씨의 계보가 주어져
있는데 경진본에는 역시 그 주석이 전무함.
이상의 사항 이외에는 자세히 살필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의
차이점만으로도 경진본, 나아가서 설원기 자체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문헌이라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아무리 실수를 한다고 해도 중요한 저자로 나오는 "신석조"라는 이름에서 碩자를
돌 석(石)자로 쓸 수가 있을까요. 더구나 저술 년도가 여기서는 또 "景泰六年乙亥"로
나온 것은 설원기 자체의 신뢰성을 땅바닥, 아니 땅바닥 아래로 추락시켜버립니다.
박팽년은 경태6년, 곧 1455년 5월에 충청도관찰사였습니다. 역시 남효온의
"六臣傳"을 그대로 베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그 "왕명"으로 달았다는 시의
주석들이 모두 왕명에 의해서 하늘로 날아간 것일까요. 이렇게 믿을 것이 하나도
없는 문헌이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왔다는 것이 전혀 이해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물론 사대사상과, 교묘한 성씨 역사 조작 사기극과, 충절의 맹목적
숭상(사실이 아닌 조작을 숭상한 측면만을 의미함), 비틀어진 가문의식 등 때문에
그랬음은 이제는 잘 알려진 얘기지만 너무 기가 막혀 한번 더 탄식해 보았습니다.
3. 문성인(文城人)
이것은 전에도 고찰하려 했는데, 이번 경진본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비로소
언급하게 되었습니다.
필사본: 司諫院左正言車原부文城人柳車達第一子大匡之伯孝全之後也 (*부=[兆頁])
학음정: 司諫院左正言車原부文城人,柳車達第一子大匡伯孝全後也.
다른 부분은 이미 살펴보았으니 여기서 다시 언급하지 않고, '文城人' 부분만
살펴보겠습니다. 필사본과 학음정판이 내용은 같은데 후자가 文城人과 柳車達의
사이에 구두점을 찍어놓은 것이 다릅니다. 경진본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司諫院左正言車原부文城人也柳車達......車孝全...". 확실히 학음정판과 같은 맥락의
읽기가 요구되며 효전에 車씨 성이 붙어 있습니다.
2006년에 류문(柳門)에서 차문(車門)에게 선계(先系)를 날조했다는 문건을 보냈는데,
다시 차문에서 반박문이 나왔습니다. 비공식적인 반응이었다고 하는데, 여하튼
그것이 유주춘추 2006년판에 실려 있습니다. 그 7번 항목에서 류문은 위 문장에서
"류차달"이 명확함을 지적했습니다. 차문의 답은 이랬습니다.
"(전략) "左正言 車原부는 文城人이요, 柳車達 第一子 大匡之伯孝全後孫이라"로
正하여 기록하니 올바로 번역해야 한다.
또 "柳車達"이란 류자(柳字)는 복성(複姓)되기 전 모성(冒姓)을 말하는 것이고
"車達"은 사호(賜號)이며 이름이 아니다." (그러면서 한석봉, 이퇴계, 이율곡의 예를
들면서 역사에 호로 기록되는 경우도 있다고 주장함.)
이름에 관한 억지와 그에 대한 저의 질정(叱正)은 한두 군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서는 특별히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저런 글을 쓰는 사람은
"차원부설원기"를 한번도 읽어보지 않았거나 읽었어도 가장 기본적인 내용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임이 분명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위의 답변은 차문이 확실히 학음정판이나 경진본에서의 읽기를 하고 있음을
확인해줍니다. 차원부가 '문성인'이라는 것입니다.
'문성인'에서 '문성'은 분명 지명으로 쓰였습니다. 文聖(글 천재) 같은 그런
일반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서 말입니다. 그러면 차씨들은 문성차씨로 불려도
될 것입니다. 제가 문화류씨를 문화의 아름다운 옛 이름을 따서 유주(儒州)류씨라고
불러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처럼요. (교체가 아니라 이렇게도 부르고 저렇게도
부르는 것을 말합니다.) 文城車氏, 이것도 괜찮게 보이지요? 최소한 차원부의
직계후손들은 이렇게 불리는 것에 아무런 저항이 없어야 합니다. 차문이 저렇게
해석하고 있으니까요. 위 대답을 한 것이 개인인지 단체인지 모르겠지만 위
대답에서도 분명히 '문성인 차원부'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국역 차원부설원기에서는 "좌정언 차원부는 문성인 류차달의 ...." 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이쯤 배경을 살펴보고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과연 '문성인', 그리고
'문성'은 무엇일까요?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의 문화편이나 연안편을
봐도 그 두 지방의 옛지명에는 '문성'이라는 것이 전혀 나와 있지 않습니다.
대신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평안도의 자산군(慈山郡)이 본래 고려의
문성군(文城郡)이라고 나옵니다. 그럼 그곳을 말하는 것일까요?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아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많습니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종실·외척·공신에게 군(君)이라는 작호(爵號)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성군(文城君)이라는
호칭은 태종 때 류양(柳亮), 세조 때 류수(柳洙), 중종 때 류순(柳洵) 등의 류씨에게
많이 주어졌고, 선조 때 이건(李健) 같은 종친이 또 그렇게 불리기도 했습니다.
광해군의 부인이 류씨였는데 문성군부인(文城郡夫人) 혹은 문성부인이라 불렸습니다.
벌써 눈치 챘겠지만 여기 류씨들은 모두 문화류씨입니다.
이제 설원기의 '문성인'의 '문성'이 어디인지 아시겠지요? 바로 '문화'를 별칭으로,
그것도 높여서 부른 것입니다. 잘 믿기지 않는다고요? 다른 성씨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실록의 중종 1년 9월 13일 기사에는 류순(柳洵)에게 문성부원군을 부여하면서 수십
명의 다른 신하들에게도 관작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 중 "O城"의 호칭이 류순을
포함해 8명이 있는데 그 중 네 명이 다음과 같습니다.
- 류순(柳洵): 문성(文城)府院君, 문화류씨
- 윤금손(尹金孫): 파성(坡城)君, 파평윤씨
- 윤장(尹璋): 양성(楊城)君, 양주윤씨
- 조계형(曹繼衡): 창성(昌城)君, 창녕조씨
꼭 절반입니다. 나머지 중 박원종(朴元宗)은 평성(平城)府院君인데 순천박씨이며,
순천의 옛이름은 승평군(昇平郡)입니다. '평'자가 들어 있지요. 그리고
김준손(金俊孫)은 난성(鸞城)君인데 연기(燕岐)김씨입니다. 燕은 제비고 鸞은
상상의 새 난새입니다. 대개 호칭이라는 것이 아무런 뜻도 없이 짓기보다는
뭔가 연관과 의미를 찾아 짓는 것이기에 이런 연관들이 오히려 당연한 얘기일
것입니다.
차씨들이 문화차씨로 불리고 싶어 하지 않는다면 아는 척하며
左正言車原부文城人柳車達...를 "左正言 車原부는 文城人이요, 류차달..."이라고
번역하지 말고 "좌정언 차원부는 문성인 류차달의...."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설원기의 기자(記者)는 박팽년이라고 조작되어 있지만, 원래 기자도 류차달을
가능한 한 높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또한 류양(柳亮)의 문성군(文城君) 호칭,
그리고 그 호칭과 문화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左正言 車原부는 文城人이요, 류차달..." 운운 하는 분들이 정말 제정신이 있는
사람들인가 의심이 들 때가 종종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학음정판이나 경진본을
만든 사람들도 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그렇게 한 것인지 의아할 때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류차'로 예외 없이 나와 있는 호칭을 어떻게든 반대로 쓰고, 대승공의
공로를 어떻게든 그 맏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분에게 붙이려 애를 쓰는 사람들이
어떻게 저토록 생각이 없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자, 설원기의 원래 기자도 저렇게 "문성인 류차달" 곧 문화류씨 류차달이라고
못을 박고 있는데 과연 차문의 주장대로 저 류자(柳字)가 모성(冒姓, 가짜 성)이라는
뉘앙스가 느껴집니까? 가짜 성에 본관은 왜 달아놓고 있고 그것도 높여서
'문성'이라고 달고 있는 것일까요? 높였다가 팍 땅바닥에 내치는 재미와 스릴을
느끼려고? 그리고 차원부가 그런 가짜 성 아비(류차달)의 맏아들(효전)의 후손이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하며 설원기의 서막을 열고 있는 저 구절은 설원기 기자가
장난하려고 그렇게 한 것일까요?
흥미로운 사실은 左正言車原부文城人柳車達...이 직접 나오는 글을 류차달의
이름을 논하는 어떤 차문의 문헌에서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2004년 대동보,
2007년 차문종보, 홈페이지, "의덕사: 연안차씨 사우(祠宇)", "연안차씨 대동보
백서 부록" 같은 차문의 내력과 대승공과 차원부설원기 및 차원부 등을 강조에
강조하고 있는 어떤 문헌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리고는 뒤에 나오는, 그것도
후대에 어디서 누가 그랬는지 모르게 변질된 구절들만 가지고 같은 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마치 "공은 서울보씨이고 이름은 신각이니
신각은 때가 되면 크게 울려 세상을 깨웠다." 같은 구절에서 앞을 싹 무시하고
"신각은 때가 되면..."만 들이대며 이 사람의 성명은 '신각'이고 성은 '신'이요
이름은 '각'이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말하다보니 대승공의 이름에 대해 다시 얘기가 나오고 말았네요. 그래도
약간 새로운 관점에서 나온 것이어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설원기의 판본인 경진본을 볼 수 있었고, 아쉽게도 샅샅이는 아니었지만
중요한 몇 가지는 확인하는 수확이 있었습니다. 설원기의 난맥상을 또 한번
검증할 수 있었습니다. 들여다볼수록 설원기도 미스터리, 그것을 둘러싼 사람들도
미스터리입니다. 지혜롭게 잘 대처해야 할 것입니다.
2008. 6. 29.
채하 류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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