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글에서 류병수 님께서 좋은 글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해석이 주어져 있지 않아서, 부족함이 많겠지만 제시된 글을 번역해 보았고, 몇 가지 토론을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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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의흥현감의 내외팔성족보 발
柳義興內外八姓族譜跋
의흥*1현감 류희잠 군은 금년 봄에 단양에다 사민(徙民: 먼 곳, 주로 변방으로 이주시킨 백성)을 압송하였고, 풍성*2에 머물러 있다. 하루는 수심에 잠겨 내게 말했다. “모격(어버이 봉양을 위한 벼슬살이 임명장)을 받들고 남쪽으로 와서 대가(큰 집안)를 봉양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다만 일찍이 엄한 의표(儀表)를 잃어[일찍 부친을 여읜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임] 항상 ‘하호(何怙)의 시*3에 마음 상하고 풍수(風樹)*4에 원통하여 선조를 그리는 마음이 아주 큽니다. 마침내 본종(류씨)의 계통을 그리고 다음으로 외족(外族) 7개의 성씨까지 소급했습니다. 비록 소략하고 먼 점이 있으나 살펴보면 그 처음은 곧 한 사람[대승공을 의미함]입니다.”
義興縣監柳君希潛氏。今年春押送徙民于丹陽留館豐城。一日愀然語我曰。捧毛檄南來。迎養大家。是幸。獨以早失嚴儀。每傷何怙之詩。冤于風樹。念劇追敦。遂畫爲本宗系圖。次及外族七姓。雖有疏遠。究其初則一人之身。
*1. 의흥(義興)은 경상북도 군위군(軍威郡)에 속한 지명이다.
*2. 풍성(豐城)이 어딘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의흥의 별명일 가능성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3. 《시경》〈소아(小雅) 육아(蓼莪)〉를 말한다. 여기에 “아버지가 없으면 누구를 믿으며 어머니가 없으면 누구를 믿을꼬.”(無父何怙 無母何恃)의 구절이 있다.
*4. 풍수지탄(風樹之嘆), 곧 부모가 이미 돌아가셔 효도를 다하지 못한 통한(痛恨)을 뜻한다. 춘추 시대 공자가 길을 가는데 고어(皐魚)란 사람이 슬피 울고 있기에 까닭을 물었더니,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여도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고 싶어도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하였다 한다.
책(족보)을 펴니 정(情)이 그칠 수 없는 바가 있음이 분명하였다. [애정이 넘치는 것이 절로 느껴졌다는 말]. 군(류 군)이 한 마디 한 다음 벌써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그것을 보여주고, 그 계통도를 살펴보고 그 발문을 읽으니 정의(情誼)를 도탑게 펴는 뜻이 풍성하여 공경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족보에 쓰인 말씀을 가만히 생각하니 소순(蘇洵)만큼 갖추어져 있으니 류 군이 스스로 달성한 것이 심오하다. 게다가 7개의 성씨를 포함한 족보는 소순도 미처 해내지 못한 것이다.
開卷了了。情有所不能容已者。子爲一言於後。旣還卽使人示之。考其圖。讀其跋。敦敍之義藹如也。不勝敬嘆。竊惟譜說。備於老蘇。柳君其自得者深矣。況七姓之譜。蘇之所未暇者乎。
오호라, 세상이 이런 인륜에 박절하게 된지 오래로다. 이것은 세태가 뒤틀리고 얽힌 탓이다. 한 뙤기 땅이라도 다투는 백성들은 동생은 형이 자기 아버지의 아들임을 알지 못하고, 형은 동생이 자기 어머니가 기른 자임을 생각하지 않고 서로 반목하고 원수가 되어 공공연히 관청에서 쟁송하니, 하물며 상을 당했을 때 상복을 입는 일가 중에 먼 친척은 어떻겠고, 하물며 상복을 입지도 않게 되어 서로 행인처럼 된 경우는 어떻겠는가.
嗚呼。世之薄於斯倫者久矣。此角弓葛藟之所以作也。今夫爭一田民。弟不知兄是吾父之子。兄不念弟是吾母之鞠。反眼相讎。公然鬩于庭。況於緦功之緬乎。況於無服而至於塗人乎。
들으니 류 군의 풍모는 가히 부끄러울 것이 없도다. 내가 문성류씨(문화류씨)를 보니 대대로 덕을 쌓아 왕씨의 고려의 초기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700년 동안 그 공업(功業)이 역사에 빛나 천지를 가득 채우는 이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아, 군(류 군)의 자손들로 하여금 이 족보를 보는 자는 모두, 대승공의 의(義)를 행하면 재산도 아낄 것이 없고, 좌윤공의 인(仁)을 발하면 호랑이도 두려울 것이 없음을 알게 만들 것이다.
聞柳君之風亦可以少愧矣。吾觀文城柳氏。世積其德。自王麗初年。迄于今幾七百歲。其功業光于史竹。彌天地者不可勝數。使君之子孫。閱是譜者皆知爲大丞之義。則財不足吝也。發左尹之仁則虎不足畏也。
문간공(柳公權)의 청렴하고 엄숙함, 문정공(柳璥)의 극진한 충성, 정신공(柳陞)의 극진한 효성, 장경공(柳墩)의 강직하고 굽히지 않음, 문화군(柳仁琦)*5의 정직함, 문경공(文景公)*6의 온화하고 순수함 같은 것은 주목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생각할 바가 있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본받아야 할 바가 있으니, 선조는 빛나고 후손은 유복하도다. 이 또한 심원하지 않은가. 더욱 감회가 느껴지지 않는가. 저 일곱 성 또한 모두 이름난 집안이고 그 행위도 본받을 바가 많으나 본종(류씨)만 거론한 것은 “춘추”(역사서)에서 외적인 내용은 생략하는 뜻을 따른 것이다.
廉謹如文簡。盡忠如文正。盡孝如貞愼。剛毅如章敬。正直如文化。和粹如文景。非徒目之而必有所思焉。非徒思之而必有所法焉。則其光前而裕後。不亦遠乎。尤有所感焉。若七姓者。又皆名族而其行多可法。姑擧本宗者亦春秋略外之義也。
*5. ‘문화군’으로 불리는 문화류씨 인물은 여러 명인데, 여기에 맞는 구절은 온정공 류인기(溫靖公 柳仁琦) 공이다.
*6. 원본 책자에도 원문이 ‘文景’으로 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文景公’으로 불리는 인물이 발견되지 않는다. 따라서 文景은 忠景의 오기로 생각된다. 충경공은 柳亮 공을 말한다. 이에 대한 증거로는 “가정보”의 총목 편에 하연(河演)이 지은 충경공의 묘지명이 들어 있는데, 그 끝에 붙은 명(銘)에는 위에 나온 ‘和粹如文景’의 ‘和粹’란 단어가 나온다.
덕(德)을 숭상하고 업(業)을 넓히시어 산처럼 높고 물처럼 길도다. / 德崇業廣 山高水長
맑은 기개(氣槪)와 온화한 심성(心性)은 가을 달과 봄 볕과 같았도다. / 清槪和粹 秋月春陽
(내가) 비록 류 군을 알고 지내게 된 것이 늦었지만 서로를 깊이 아는 사이여서 감히 (나의) 말씀이 도리에 어둡다 하여 사양하지 못하였다. 삼가 소폭(小幅)을 써서 책의 끝에 붙인다. 가정 갑진년(1544년) 8월 정해일, 상산 주세붕 씀.
其於柳君識面雖晩相知已深不敢以瞽說辭也。敬書小幅以附卷尾云。嘉靖甲辰八月丁亥。商山周某。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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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족보가 본종(류씨)을 포함해서 7개의 성을 망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실제 족보에 들어 있는 성씨가 다만 7개라는 말은 아닙니다. 시집보낸 딸이 많을수록 성씨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어떤 류씨의 외외손까지 기록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어떤 류씨가 아들과 딸을 한 명씩 낳고, 그들이 또 각각 아들과 딸을 한 명씩 낳는 방식으로 증손자 대까지 내려가고, 여자들은 각각 서로 다른 성씨와 결혼했다면 등장하게 되는 성씨는 류씨를 포함해서 모두 8가지입니다. 딸의 숫자가 커지면 성씨의 종류도 많아질 것입니다.)
문화류씨는 고려시대부터 문벌을 떨쳤는데 고려시대의 활약은 다음의 4세5공으로 대표됩니다. [출처: 문화류씨대종회 홈페이지 > 뿌리탐구 > 개관]
① 염근(廉謹)과 문필(文筆)로 이세의 사표(師表)가 된 문간공 공권(文簡公 公權)
② 권신을 제거하여 정권을 왕실에 회복시킨 문정공 경(文正公 璥)
③ 신의를 찬술하여 예절을 바로잡은 정신공 승(貞愼公 陞)
④ 강직한 기개로 정령(政令)을 쇄신한 장경공 돈(章敬公 墩)
⑤ 충직한 말로서 국기를 진작시킨 온정공 인기(溫靖公 仁琦)
위의 글에는 이들이 모두 언급이 되어 있고, 추가로 충경공 류량(추정)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정보”는 1541년경부터 착수되어 착수 24년만인 1565년 완성되었는데, 주세붕의 글이 1544년에 쓰인 것을 감안하면 “팔성족보”라는 것이 “가정보” 이전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팔성족보”는 “가정보”의 초기 형태였을 것으로 짐작되며, 이것은 주세붕의 글이 마치 “가정보”를 보고 쓴 듯한 것에서도 느낄 수 있습니다.
내용을 살펴보고 나니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중요한 글로 판단됩니다. 우선 “팔성족보”라는 것이 “가정보”의 초기 형태라 해도 1544년에 이미 족보로 완성되었었다는 점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두 번째로 주세붕은 문화류씨가 고려의 초에 시작되었다고 명기하고 있어서 류차문제의 발단이 된 류차동원설을 주세붕 같은 학자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이 확실히 드러나 있습니다. 류차동원설이 가정보 이후에 조작되어 세상에 나온 것이 분명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두 번째의 내용은 앞의 류병수 님의 글에서 더 자세히 토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간략하지만 문중의 소개가 훌륭합니다.
2013년 4월 23일
채하 류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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