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차씨글

[스크랩] 연안 차씨(延安車氏)

ryu하곡 2012. 8. 1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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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차씨 유래비문(由來碑文)

目 次
Ⅰ. 머릿글.……………………………………………………………
Ⅱ. 연안차씨 종친회 상징물(象徵物)

1. 연안차씨종친회 종기(宗旗).………………………………
2. 연안차씨 유래비(由來碑).…………………………………
3. 연안차씨 종친회 회관(會館).……………………………
Ⅲ. 사당(祠堂) 위패봉안(位牌奉安) 전경(全景) 과
선조(先祖)님의 세수(世數)와 명단(名單).……………
Ⅳ. 연안차씨의 유래비문(由來碑文).…………………………
Ⅴ..차씨의 연원(淵源)과 분파도(世系分派圖).………………
1. 차씨(車氏)의 연원(淵源)
2. 차씨(車氏)의 분파도(分派圖)
Ⅵ. 의덕사(懿德祠)의 사지(史誌).
1. 의덕사 건립의 취지와 목적.……………………………………
2. 의덕사에 위패봉안 선조님 약력(略歷).………………………
Ⅶ.?류차달?이란 기록은 잘 못된 것이다.…………………
Ⅷ. 차문의 원(院).묘(廟).사(祠).선영(先塋)의
소재(所在) 및 봉제일(奉祭日)…………………………
Ⅸ. 사당규모와 건립헌금자 명단………………………………
Ⅹ. 차문중요 원·묘·사(院·廟·祠) 및 선영(先塋)의
소재급향사일(所在及享祀日).
Ⅺ. 의덕사(懿德祠) 및 재각(齋閣)의 규모(規模)
1. 건물(建物)의 동수(棟數) 및 명칭(名稱).
2. 총건평(總建坪) 및 대지면적(垈地面積).
3. 기 타(其他).
Ⅻ. 의덕사(懿德祠) 건립 헌성자(獻誠金者) 명단(名單).
ⅩⅢ. 기타(其他)
Ⅰ. 머 릿 말
연안차문은 5천년의 긴 역사를 가진 유일한 종문이다. 20만 종원을
가진 우리 차문은 시조님과 현조 명조님을 제대로 뫼시지 못하였음을
부끄럽게 생각해 왔다. 지난 천년의 긴 세월동안 정치 사회의 시류에
휩쓸리고 때로는 정치적인 회오리에 휘말려 산골짜기로 바닷가로 숨어
살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 선조님들은 명경지수(明鏡止水)처럼 지조
를 지키면서 오늘날 까지 바르게 살아왔고 우리 후손들도 앞으로 수만
년을 조상님의 뜻과 같이 면면히 이어갈 것이다.
그간에 선조님을 잘 배향치 못한 후손들이 뜻을 모아 1972년에 이
곳 평택 장안동으로 선조님의 선영을 모셔왔으며 이때부터 성역화 사
업을 추진하여 1993년부터 사당건립을 시작하여 1996년 5월에 준공
하고 득관조를 주벽으로 현조 명조님의 위패를 배향으로 봉사해 오다
가 다시 종원의 뜻을 모아 2004년도에 득성시조님을 주벽으로 신라조
의 역대 조상과 고려조의 말기까지 전조상 및 조선조(全祖上)의 명조
(名祖)님 등 102위의 선조님의 위패를 모시게 되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며 이 모두 조상님의 음덕이라 믿는 바이다.
이로서 명실 공히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명문의 위상을 갖추게 되었
다. 이일은 보람 있는 종사이며 우리 후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
요 과제이기도 하였다. 여기 102위의 선조님에 대한 약력과 차문역사
를 기록하여 자손만대에 전하고자 한다.
이 같은 훌륭한 사당과 묘역을 갖추기까지 많은 일가분들의 헌성금
과 문중의 지원이 있었음을 잊을 수가 없으며 전 종원의 이름으로 오
래 기리고자 하는 바이다. 우리 모두 힘을 다시 모아 자손만대로 이
사당과 묘역을 유지 보존하여 명문대족인 차문의 긍지를 지켜나가야
할 것이다.
연 안 차 씨 종 친 회 중 앙 본 부
회 장 車 和 俊 謹識
Ⅱ. 연안차씨 종친회 상징물(象徵物)
1. 연안차씨 종친회 종기(宗旗)
2. 연안차씨 유래비(由來碑) 전경(全景)
3. 연안차씨 종친회 회관(會館) 전경(全景)
Ⅲ. 사당(祠堂) 위패봉안(位牌奉安) 전경(全景)과
선조(先祖)님의 세수(世數)와 명단(名單)
Ⅳ. 연안차씨 유래비문(由來碑文)
황제(黃帝)의 후손인 사신갑(姒辛甲)께서 고조선 평양 일토산(一土
山) 아래에 살면서 성을 왕씨(王氏)로 하고 이름은 조명(祖明)이라 하
였다. 고조선 말 그의 후손 왕몽(王蒙)이 기자조선 준왕(準王)의 모함
을 받아 7남 왕림(王琳)과 함께 지리산으로 들어가 숨어서 살게 되었
다. 이때 몽(蒙)은 자손번창을 이유로 왕씨(王氏) 성자(姓字)를 전자(田
字). 신자(申字). 차자(車字)로 고쳐 성을 차씨(車氏)로 하고 이름은 무
일(無一)이라 하였다.
신라태조가 계림(鷄林=慶州)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울 때 차무일
(車無一)께서 공훈(功勳)을 세워 시중벼슬에 오르고 왕으로부터 차씨
성을 받게 되어 차씨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다.
차무일의 32세인 건갑(建甲)께서 신라39대 소성왕 때 승상벼슬에 있
었는데 소성왕께서 태자를 잘 보살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승상께서
왕의 유언에 따라 12세로 보위(寶位)에 오르신 애장왕을 보필 하시다
가 아들 승색(承穡)에게 다시 왕을 보필할 것을 부탁하고 별세 하시니
왕께서 왕례로서 기장 만화동에 예장케 하였다. 이때부터 차능(車陵)이
라 칭하게 되었으며 기장현도 차성(車城)이라 불렀다. 또 신위도 소성
왕 종묘에 배향 하였으며 왕의 숙부인 김언승(金彦昇)이 반역하여 왕
위를 빼앗아 스스로 헌덕왕이라 하였다.
차승색(車承穡)께서는 충성심에서 아들 차공숙(車恭叔)과 더불어 헌
덕왕(憲德王)을 암살하려다 누설되어 아들을 데리고 황해도 구월산으
로 피신, 가성류씨(假姓柳氏)로 모칭(冒稱)하고 이름을 백(栢)으로 하고
아들은 숙(淑)으로 개명(改名)하고 살았다. 둘째아들 차공도(車恭道)는
강남으로 피신하여 구성(舊姓) 왕씨(王氏)로 복성 하였는데 이분이 고
려 태조 왕건(王建)의 증조(曾祖)이신 원덕대왕(元德大王)이시다. 이러
한 인연으로 차씨는 고려 건국에 큰 공을 세웠고 고려조의 차씨는 왕
씨와 똑 같은 왕족 대우를 받았다.
고려태조 왕건께서 후삼국을 통일할 때 가성(假姓) 류씨(柳氏) 6세
인 류해(柳海)께서 장정을 수송하여 통일에 기여 하였으므로 삼한통합
벽상2등공신에 봉(封)하고 조상의 성을 따라 본성 차씨(車氏)로 복성하
여 이름은 달(達)로 사명(賜名)하였고, 가성(假姓) 류씨(柳氏) 6세는 본
성 차씨로 복성된 것이다. 큰아들 차효전(車孝全)은 통일에 필요한 향
궤(餉饋)를 헌납 하였기에 개국 수공자로 대광(大匡)의 벼슬을 제수하
고 귀족(貴族)의 작위(爵位)인 백(伯)에 봉(封)하고 왕실종적(王室宗籍)
에 입적(入籍)한 후 염주(塩州:延安)에 식읍천호(食邑千戶)를 내렸고 그
후손들은 연안군(延安君)으로 추존(追尊)하며 득관조(得貫祖)로 받들고
있다.
대광지백(大匡之伯) 연안군 차효전은 조상의 홍렬(弘烈)을 승습(承
襲)하고 종적을 연안(延安)으로 하여 연안 차씨 득관조(得貫祖)가 되었
고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의 둘째아들 효금(孝金)은 고려 태조의
명(命)으로 류씨(柳氏)로 사성(賜姓)되어 류씨의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다. 이때부터 두 형제분이 차. 류 두성으로 분성(分姓) 되었다. 차
문은 신라, 고려조에 수많은 문무장상(文武將相)이 대를 이어 배출된
교목세가(喬木世家)의 명문(名門)이다.
고려 공민왕 때 군부판서 용산군(龍山君) 차포온(車蒲溫)은 고려가
원(元)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때 국방 및 외교로 뛰어난 활약을 하신
고려의 명신이며 차문의 자랑스러운 현조이시다. 또 불의에 굴하지 않
았던 고려 말 성리학의 대가이시며 고려조 간의대부(諫議大夫)이신 운
암(雲巖) 차원부(車原頫)께서 조선 개국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와 하륜
등 사얼(四孼)들의 모략으로 억울하게 추살(椎殺)되시고 차씨 문중도
적족지화(赤族之禍)를 당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태조의 질책(質
責)으로 태종이 잘못을 뉘우치고 공(公)의 영혼을 위로하는 치제(致祭)
를 명하고 아울러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벼슬을 추증했고 그
후 가증 문하시중(門下侍中)과 문절(文節)이란 시호(諡號)도 내렸다.
다행히 세조2년에 왕명으로 박팽년(朴彭年)의 기문(記文)에 최항(崔
恒)외 4인의 주석문(註釋文)과 유신석학(儒臣碩學) 48인의 응제시(應製
詩)를 모아 예조참판 하위지(河緯地)의 서문을 지어 엮은 차운암 설원
기(車雲巖 雪寃記)에 의하여 억울한 사실이 소명되어 광명을 찾기는
하였으나 차씨 문중에 대한 수난은 계속되었으며. 차씨 문중에는 세조
13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창의(倡義)하여 순절(殉節)하신 강열공(剛
烈公) 차운혁(車云革), 임진왜란 시 평양성 수복의 로포문(露布文)으로
명나라를 놀라게 한 천하문장 오산공 차천로(車天輅)와 같은 명조 현
조님들이 많이 계셨다.
근대에는 포우단(砲牛團)을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신 차도선(車道善),
대동공보(大同公報)를 창간, 독립운동을 하신 차석보(車錫甫),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큰 활약을 하신 차이석(車利錫)외 많은 독립유
공자에게 정부 건국 훈장이 수여 되었으며 이분들이 차씨 문중을 빛내
고 있다. 차씨 문중은 절개 굳은 충신. 공신. 의사와 열사가 유달리 많
은 종문이며 명문 갑족다운 긍지를 잃지 않고 자자손손(子子孫孫) 계
승(繼承)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해(註解)
교목세가(喬木世家) : 여러대에 걸쳐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서 나라와 운명을 같이한 집안
Ⅴ. 차씨의 연원(淵源)과 분파도(分派圖)
1.차씨(車氏)의 연원(淵源)
차씨(車氏)의 근원(根源) 원파록(源派錄)과 역대(歷代) 문헌(文獻)에
의거(依據) 정리하여 다음과 같다 살펴보기로 하자.
지금으로부터 약4700년 전 BC. 2704년에 중국에서는 헌원(軒轅)께
서 나라를 세우시고 황제(黃帝)로 즉위(卽位)를 하셨는데 황제(黃帝)의
본성(本姓)은 공손씨(公孫氏)이시며 이름은 탄생하신 지명(地名)에 따
라 헌원(軒轅)이라 한 것이다.
이 시대(時代)는 모계(母系)의 사회(社會)였으므로 황제(黃帝)께서는
모후(母后)에게 성(姓)을 지어 드렸는데 본래 모후(母后)께서 희수(姬
水)의 강변(江邊)에 살았으므로 희씨(姬氏)라는 성(姓)을 지어 받치고
황제(黃帝)도 모후(母后)의 성(姓)을 따라 성(姓)을 희씨(嬉氏)로 바꾸
었고 토덕(土德)으로 제위(帝位)하여 황제(黃帝)라 부르도록 하였다.
황제(黃帝)께서는 희씨(姬氏)로 계승(繼承)하여 맏아들 소호(小昊),
둘째아들 창의(昌意)를 두시었고. 소호(小昊)는 아들 교현(橋玄)을 두시
었고, 교현(橋玄)은 아들 제곡(帝嚳)을 두시었고, 제곡(帝嚳)은 아들 4
형제를 낳으시니 페제지(廢帝址), 당제요(唐帝堯), 상조계(商祖契), 주조
기(周祖棄)이시며, 황제(黃帝)의 둘째 아들 창의(昌意)는 아들 전욱(顓
頊)을 두시고, 전욱(顓頊)은 아들 4형제를 낳으시니 궁선(窮蟬), 곤(鯀),
숭백(崇伯), 백익(伯益)이시며, 궁선(窮蟬)은 아들 구망(句望)을 두시었
고, 구망(句望)은 아들 교우(橋牛)를 두시었고, 교우(橋牛)는 아들 고수
(瞽瞍)를 두시었고, 고수(瞽瞍)는 아들 우제순(虞帝舜)을 두시었는데 이
분이 순(舜)임금이시며, 전욱(顓頊)의 둘째 아들 곤(鯀)은 아들 하후씨
우(夏后氏禹)를 낳으셨다.
순(舜)임금은 하후씨우(夏后氏禹)에게 선위(禪位)를 하시고 성(姓)을
사씨(姒氏)로 사성(賜姓)을 하시었고, 하후씨우(夏后氏禹)는 즉위(卽位)
를 하시고 하(夏)나라를 세우시고 홍수(洪水)를 다스리는 치수사업(治
水事業)을 성공적(成功的)으로 이루어 나라를 잘 다스리는 임금이 되었
으며 이로부터 사씨(姒氏)로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게 되었다.
하후씨우(夏后氏禹)는 아들 계(啓)를 두시었고, 계(啓)는 아들 두 형
제를 낳으시니 태강(太康), 중강(仲康)이시며, 계(啓)의 둘째 아들 중강
(仲康)은 아들 상(相)을 두시었고, 상(相)은 아들 소강(少康)을 두시었
고, 소강(少康)은 아들 저(杼)를 두시었고, 저(杼)는 아들 망(芒)을 두시
었고, 망(芒)은 아들 설(泄)을 두시었고, 설(泄)은 아들 불강(不降)을 두
시었고, 불강(不降)은 아들 3형제를 낳으시니 경(扃), 공갑(孔甲), 신갑
(辛甲)이시며 이3형제는 하후씨우(夏后氏禹)의 11세의 손자이며, 공갑
(孔甲)께서는 왕이 되시었고 귀신(鬼神)을 섬기기를 지극히 좋아 하시
었다.
이때에 하(夏)나라의 국운(國運)이 점점 기울어져 가는 어느 날 난데
없는 용(龍) 한 쌍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공갑(孔甲)왕께서 매우 기
이하게 여기시고 도당(陶唐)의 후손인 유루(劉累)라 하는 신하에게 어
용(御龍)이란 성을 하사(下賜)하시고 그 한 쌍의 용을 잘 기르도록 명
(命)을 내리시었다.
유루(劉累)는 왕명(王命)을 받들고 정성껏 용을 기르는데 왕제(王
弟)이신 사신갑(姒辛甲)께서 이를 신기하게 여겨 힘과 정성을 다 하여
유루(劉累)와 함께 용을 길 들려서 사육을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암 용
이 우연히 죽어 버렸다.
유루(劉累)와 신갑(辛甲)은 용을 죽인 죄로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이
를 왕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죽은 용으로 젓갈을 담구어서 왕의 수랏
상에 올리었더니 왕(王)은 그 젓갈의 맛이 좋아서 맛있게 잡수었으며,
그 젓갈을 다 잡수신 왕께서는 더 젓갈을 원하여 찾으시니 유루(劉
累)와 신갑(辛甲)은 더 구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왕께서 용의 젓갈인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이에 유루(劉累)는 노(魯)나라로 도주(逃走)해 버리자 신갑(辛甲)께
서는 혼자 중벌(重罰)을 받으실까 더욱 두려운 나머지 요수(遼水)를 건
너 동국(東國) 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亡命)하시니 이때가 BC.1878
년이었다. 사신갑(姒辛甲)께서는 고조선(古朝鮮)의 평양(平壤) 일토산
(一土山) 아래에 정착(定着)하여 사시면서 산의 이름 일토(一土)를 합
하여 왕자(王字)를 만들어 성(姓)으로 정(定)하여 왕씨(王氏)로 하고 이
름은 조명(祖明)으로 개명(改名)하시었다.
왕조명(王祖明)께서는 근원(根源)의 조상(祖上)이 중국(中國) 황제(黃
帝)임으로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뛰어 나시어 당시(當時) 단군조선
(檀君朝鮮)의 조정에서는 공(公)을 흠모(欽慕)하여 치민장(治民長)으로
추대(推戴)하시니 이에 단곤조(檀君朝)를 도와 치민치정(治民治政)에
힘쓰시게 되었다.
백성들로 하여금 띠를 베어 지붕을 덮게 하고 땅을 갈아 오곡(五穀)
을 재배하며 방아를 찧어 밥을 짓는 방법을 가르쳐 보급하였고 남녀를
구별하여 차례와 예(禮)의 범절(凡節)을 가르치시며 삼강오륜(三綱五
倫)으로 백성을 교화선도(敎化善導)를 하시었고, 그 후손인 왕수긍(王
受兢)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원년(元年) 기묘(己卯)에 기자(箕子)가
동쪽 땅에 와서 기자조선(箕子朝鮮 :일설(一說)에는 한씨조선(韓氏朝鮮))을 세우
고 팔조교(八條敎)를 만들고자 하니 풍토(風土)가 달라 국내(國內)에서
현존자(賢尊者)를 얻고자 하니 백성들이 왕수긍(王受兢)을 천거(薦擧)
하여 기자(箕子)는 왕수긍(王受兢)을 교민사사(敎民士師)로 명(命)하게
되었고 공(公)은 팔조교(八條敎)를 만들어 예락(禮樂), 문물(文物), 의관
(衣冠), 법도(法道)로 백성을 교화(敎化)하고 풍속(風俗)을 이루니 기자
(箕子) 기뻐하였다.
왕조명(王祖明)의 58세 휘 몽(諱 蒙)에 이르렀을 때 기자조선(箕子朝
鮮)의 말엽(末葉)에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이 위
만(衛滿)에게 쫓기어 왕검성(王儉城 : 지금의 평양성)을 버리고 남천(南遷)
하여 마한(馬韓)의 도읍지(都邑地)인 금마(金馬 :지금 전라북도 익산군)에 숨
게 되었는데 이 무렵「일토초가자위왕(一土草家者爲王)」이란 참언(讖
言)이 있었는데 이 말은 일토초가(一土草家)는 몽자(蒙字)의 파자(破字)
임으로 즉(卽) 왕몽(王蒙)이 왕이 된다는 뜻이며 이러 한 참언(讖言)이
동요(童謠)로 세상에 떠도니 기자준왕(箕子準王)이 이를 두려워하여 일
토산(一土山) 아래에 살고 있는 왕씨(王氏)들을 모두 잡아 죽이라는 어
명(御命)을 내림으로 왕몽(王蒙)께서는 다급한 나머지 팔형제 아들 중
에 일곱째 아드님이신 왕림(王琳)을 데리고 남쪽으로 피신(避身)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 들어 가 자취를 감추고. 은거(隱居)하여 10여년의
피신(避身)의 고난(苦難)에 어느 날 신인(神人)이 감응(感應)하시어 신
인(神人)이 나타나서 큰 소리로 외치며 가로대?너의 성(姓)인 왕자(王
字)를 세 번 글자를 고쳐 세 번째 글자로 성(姓)으로 정(定)하면 이 고
난(苦難)을 모면(謀免)하고 자손(子孫)이 크게 번영(繁榮)할 것이다.?
라고 예시(豫示)함으로 왕몽(王蒙)께서 즉시(卽時) 왕자(王字)에 동서
(東西)를 막아 전자(田字)로 또 다시 전자(田字)에 중획(中劃)을 상하
(上下)로 이어 신자(申字)로 또 다시 신자(申字)에 천지양획(天地兩劃)
을 가(加)하여 차자(車字)로 하고 이에 차자(車字)로 성(姓)으로 정(定)
한 후 무(無)의 허공(許空)에서 다시 하나로 시작한다는 뜻으로 이름을
무일(無一)로 개명(改名)하시고 아들 왕림(王琳)은 신인(神人)이 예시
(豫示)할 때 두 번째라 하여 이름을 신을(神乙)이라 개명(改名)하신 후
지리산(智異山)에서 은둔(隱遁)의 피신생활(避身生活)을 탈피(脫皮)하고
지리산(智異山)에서 떠나 교남(嶠南)의 계림(鷄林 : 지금 慶州)으로 이거
(移居)를 하였다.
주석(註釋)
위만(衛滿) : 중국 진(秦). 한(漢)의 교체기에 연(燕)나라 사람으로 무리를 거느리고 기자조
선 준왕에게 투항하였다가 그 뒤 준왕을 쫓아내고 우만조선을 세웠으며 우거왕
(右渠王) 때 3대의 88년 만에 한(漢)나라 무제(武帝)에게 망하였다.
BC.59년경에 부족(部族)의 6촌 촌장(村長)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왕(王)으로 추대(推戴)함으로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임금으로 즉위(卽
位)하시어 계림(鷄林)으로 도읍(都邑)을 천도(遷都)하시어 신라(新羅)를
개국(開國)하실 때 차무일(車無一)께서 신라 태조(太祖)이신 박혁거세
(朴赫居世)에게 지리산(智異山)의 영주권(領主權)을 내어 주시고 임금
으로 섬기어 큰 공훈(功勳)을 세우시니 신라 태조께서 벼슬 시중(侍中)
을 제수(除授)하시고 차씨(車氏)로 사성(賜姓)하시어 차문(車門)의 득성
시조(得姓始祖)가 되었고 아들 차신을(車神乙)이 또한 신라조(新羅朝)
에 승상(丞相)의 벼슬을 하였다.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의 17세 손자 차제능(車濟能)은
신라 미추왕조(味鄒王朝)에 벼슬 승상(丞相)이시며 득성시조(得姓始祖)
의 21세 손자 차휘만(車徽曼)은 신라 19대 눌지왕조(訥祗王朝)에 벼슬
이 승상(丞相)으로 눌지왕(訥祗王)의 부왕(父王)이신 내물왕(內勿王)의
동생인 실성왕(實聖王)이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는 내물왕(內
勿王)의 장자(長子) 눌지(訥祗)는 도외시(度外示)하고 내물왕의 둘째아
들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인질(人質)로 보내고 셋째아들 미사흔(米斯
欣)은 왜국(倭國)으로 인질(人質)로 보내버렸다.
이에 박제상(朴提上)이 주축(主軸)이 되어 신자천(申自天). 차휘만(車
徽曼). 배중량(裵仲良) 등이 실성왕(實聖王)의 부당(不當)한 처사(處事)
를 거론(擧論)하여 실성왕(實聖王)은 내물왕(內勿王)의 장자(長子) 눌지
(訥祗)에게 선위(禪位)를 하였다.
눌지왕(訥祗王)이 즉위(卽位)하신 뒤에 일본(日本)에 억류(抑留)된 아
우를 그리워하며 왜국(倭國)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귀환(歸還)을 여
러 차례 요청하였으나 번번이 거절을 당하였다. 이에 승상(丞相) 차휘
만(車徽曼)이 박제상(朴提上)과 함께 왜국(倭國)에 사신(使臣)으로 건
너가시어 왜왕(倭王)에게 신라조(新羅朝)의 왕제(王弟)인 미사흔(米斯
欣)을 신라로 귀환(歸還)을 청(請)하였으나 왜왕(倭王)이 거절(拒絶)을
하였다.
이에 승상 차휘만(車徽曼)은 승상 박제상(朴提上) 등의 사신(使臣)
은 논의(論議)하고 어느 날 밤에 왕제(王弟) 미사흔(米斯欣)의 숙소(宿
所)를 지키는 왜인(倭人)들이 잠든 틈을 타서 은밀히 도해구출(渡海救
出)을 시킨 뒤에 무사히 신라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하여
승상 차휘만(車徽曼)과 박제상(朴提上)은 왕제(王弟) 미사흔(米斯欣)이
감금(監禁)된 숙소(宿所)의 방문(房門) 앞을 지키고 앉아 있으면서 감
금(監禁)의 왜인(倭人)들에게 왕제(王弟) 미사흔(米斯欣)이 아직 취침
(就寢)하고 있다 속이며 무사히 신라로 귀환(歸還)을 시키었는데 이 사
실이 밝혀져서 일본의 왜왕(倭王)이 진노(震怒)하여 문책(問責)하니 승
상 차휘만(車徽曼)과 박제상(朴提上)은 왜왕(倭王)에게 굴복(屈服)하지
않으시고 일본(日本)에서 순절(殉節)하시었다. 이 사실은 동사(東史)에
기록 되어 있다.
득성시조(得姓始祖)의 32세 손자 차건갑(車建甲)께서는 신라 39대
소성와조(昭聖王祖)에 원로승상(元老丞相)으로 소성왕(昭聖王)은 친(親)
이 공(公)에게 중국의 주(周)나라 주공(周公 : 주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이
무왕(武王)의 아들이며 어린 조카인 성왕(成王)을 등에 업고 제후(諸
侯)들과 조회(朝會)를 하는 그림 족자(簇子)를 내리시면서 어린 태자
(太子)를 잘 보필(輔弼)할 것을 부탁을 하였는데 이것은 종실(宗室)의
왕족(王族)이 강세(强勢)하고 12세에 어린 세자(世子)에게 선위(禪位)
하는 것이 몹시 불안하여 원로승상(元老丞相)에게 유언(遺言)을 남긴
것이다.
서기800년 경진(庚辰)에 소성왕(昭聖王)이 서거(逝去)하시고 세자
(世子)는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卽位)하시니 신라 40대 애장왕(哀
莊王)이시며 승상(丞相) 차건갑(車建甲)은 애장왕(哀莊王)의 보상(輔相)
이 되시어 애장왕(哀莊王)을 극진(極盡)이 보필(輔弼)하시고 나라의 정
사(政事)를 섭정(攝政)을 하시며 나라에 번영(繁榮)의 대훈공(大勳功)을
세우시었다.
득성시조(得丞始祖)의 33세 손자이시고 승상 차건갑(車建甲)의 아드
님 차승색(車承穡) 신라조(新羅朝)에 출사(出仕)하시니 승상공(丞相公)
은 아드님에게 극진(極盡)히 애장왕(哀莊王)에 충성(忠誠)으로 보필(輔
弼)할 것을 부탁하시고 어느 날 드디어 별세(別世)하시니 애장왕(哀莊
王)은 만조백관(滿朝百官)에 하명(下命)하시어 승상공(丞相公)의 장례
(葬禮)는 왕례(王禮)를 갖추어 기장현(機張縣) 만화동(萬化洞) 측면(側
面)의 산록(山錄) 자좌원(子坐原)에 장례(葬禮)를 거행(擧行)케 하였다.
왕례(王禮)에 따라 석관(石棺)과 석봉분(石封墳)을 쌓고 석의(石儀=石
物)를 갖추어 세웠으며 신주(神主=位牌)는 소성왕묘(昭聖王廟)에 배향(配
享)함으로 세인(世人)들이 승상공(丞相公)의 이 묘역(墓域)을 차능(車
陵)으로 부르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차능(車陵)으로 전(傳)하고 있다.
승상공(丞相公)의 아들이신 차승색(車承穡)은 선고(先考)이신 승상공
(丞相公)의 유언(遺言)에 따라 애장왕(哀莊王)을 극진(極盡)히 보필(輔
弼)하시었고 이에 따라 서기 809년 애장왕(哀莊王) 10년에 좌승상(左
丞相)으로 승진(昇進)하였으며, 이때에 병부령(兵部令: 군사에 관한 사무를
관장한 병부의 우두머리)으로 있던 애장왕(哀莊王)의 숙부(叔父)인 김언승
(金彦昇)이 섭정(攝政)함을 기화(奇貨)로 마침내 애장왕(哀莊王) 10년
서기 809년에 반역(返逆)을 도모(圖謀)하여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
害)로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하고 스스로 즉위(卽位). 헌덕왕(憲德王)
이라 칭(稱)하니 이 분이 신라 41대 왕이 된 것이다.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은 헌덕왕(憲德王)을 임금으로 보지
않고 종자(從子 :조카)를 죽인 패륜아(悖倫兒)로 생각하고 애장왕(哀莊
王)을 죽인 원한(怨恨)의 격분(激憤)을 참지 못하고 충의지심(忠義之心)
으로 김언승(金彦昇)을 죽이고 애장왕(哀莊王)의 원수(怨讐)를 갚고 왕
실(王室)의 정통적(正統的) 질서(秩序)를 이어 나라의 기강(紀綱)을 바
로잡아 세우기 위하여 굳은 결심으로 좌승상(左丞相)의 큰 아들 신라
벼슬 사공(司空)이신 차공숙(車恭叔)과 함께 모책(謀策)을 논의(論議)하
고 옛날에 예양(豫讓)의 모책(謀策)을 본받아 헌덕왕(憲德王)이 수렵(獸
獵)하로 나감을 틈타서 다리 밑에 궁수(弓手)의 복병(伏兵)으로 시해
(弑害)하고자 하였으나 이 음모(陰謀)를 아는 자가 있어 헌덕왕(憲德
王)에게 밀고(密告)함으로 모책(謀策)의 계획(計劃)이 누설(漏泄)되어
헌덕왕(憲德王)의 시해음모(弑害陰謀)는 실패(失敗)하였다.
밀고(密告)로 음모사실(陰謀事實)을 안 헌덕왕(憲德王)인 김언승(金彦
昇)은 군병(軍兵)에 체포령(逮捕令)을 내려 차승색(車承穡)과 차공숙(車
恭叔)의 부자(父子)를 좇으니 차승색(車承穡)의 부자(父子)는 국운(國
運)이 따르지 못함을 한탄하시며 요동백(遼東伯) 김반전(金盤傳)의 아
들 김생(金生)의 집으로 도주(逃走)하여 은닉(隱匿)하였다.
차승색(車承穡)의 부자(父子)를 체포(逮捕)하지 못한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은 차승색(車承穡)의 부자(父子)를 체포(逮捕)하기 위하
여 현상(懸賞)으로 금(金) 천근(千斤)과 식읍만호(食邑萬戶)를 걸어놓고
전국에 수색(搜索)하여 찾으니 차승색(車承穡)의 생질(甥姪)인 김생(金
生)이 현상(懸賞)을 탐하여 외숙(外叔)과 외종(外從)을 밀고(密告)하고
자 하니 김생(金生)의 충복(忠僕)은 이 사실을 차승색(車承穡)에게 긴
밀히 알려서 그날 밤 찰신도주(脫身逃走)하여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아래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에 둔적은거(遁跡隱居) 차승색(車承穡)
께서 본성(本姓)을 감추고 조모(祖母)님의 성(姓)인 양씨(楊氏)를 모칭
(冒稱)하시며 이름은 백(栢)으로 개명(改名)하고 피신(避身)으로 천성
(天命)을 보존(保存)한 것이다.
헌덕왕(憲德王) 원년(元年) 서기 810년에 구월산(구월산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에 둔적(遁跡)하여 조모(祖母)의 성(姓)인 양씨(楊氏)로
모성(冒姓)한 양자(楊字)를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가성류씨(假
姓柳氏)로 하고 이름은 잣나무 숲에 몸을 깊이 감춘다는 뜻으로 백(栢)
주해(註解)
유주(儒州) : 고려8대 현종(顯宗)이 1010년에 즉위한 후 유주(儒州)를 풍주(豊州)에 예속
(隸屬)하여 유주는 없어졌고 고려23대 고종왕(高宗王) 45년 1258년에 류경(柳
璥)이 위사공신(衛社功臣)이 됨으로 그에 고향인 옛 유주(儒州) 땅을 승격(陞格)
하여 문화현(文化縣)을 만들었던 것이다.
모칭(冒稱) : 모성(冒姓)과 같음, 즉 남의 성(姓)을 가칭(假稱)함.
으로 개명(改名)한 후 유주(儒州)의 부두가(富荳家)에 고용살이를 하시
면서 천명(天命)을 보존(保存)하였다.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丞穡)의 차자(次子) 차공도(車恭道)는 득성
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님의 34세 차손(次孫)인데 아버지와 형
을 따라 피란을 가지 못하고 혼자서 강남(江南)으로 도주하여 본성(本
姓)을 감추고 옛 조상의 구성(舊姓)인 왕씨(王氏)로 복성(復姓)하여 성
명(姓名)을 왕공도(王恭道)라 개칭(改稱)하고 피신(避身)하게 되었는데
이분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증조(曾祖)이시며 고려개국(高麗開國)
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숭(追崇)하시고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
조(始祖)이시다.(開城王氏 族譜 參照)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으로부터 류씨(柳氏)로 모성(冒姓)하고
이름 백(栢)으로 개명(改名)하여 가성명(假姓名) 류백(柳栢)으로 칭(稱)
한 것이 가성류씨(假姓柳氏)의 시초
(始初)로 그의 아들 차공숙(車恭叔)
은 가성명(假姓名)류숙(柳淑)으로
개명(改名), 그의 아들 휘 진부(諱
振阜), 그의 아들 휘 무선(諱茂先),
그의 아들 휘 보림(諱 普林) 그의
아들 휘 해(諱海)까지 109년간 가
성류씨(假姓柳氏)를 전(傳)하면서 삼
한(三韓)의 제일호부(第一豪富)시다.
서기 1456년 세조(世祖) 2년(경태
(景泰) 7년에 단계(丹溪) 하위지(河緯
地) 선생께서 조선조(朝鮮朝)의 왕명
(王命)에 의(依)하여 충정공(忠正公)
박팽년(朴彭年)이 기술(記述)한 기문
(記文)에 성삼문(成三問),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등 제현(諸賢)들이 주
석(註釋)을 붙이고 유신석학(儒臣碩學)
의 48인의 응제시(應製詩)를 모아 서문(序文)을 찬(撰)하여 역은 차운
암선생 설원기(車雲巖先生 雪寃記)를 살펴보면 고려조(高麗朝)에 내사
(內史)를 역임(歷任)하신 서희(徐熙)께서 찬집(撰集)한 가사(家史)와 고
려 16대 예종(睿宗) 9년(서기1127년)에 좌정언(左正言) 정지상(鄭知常)
이 왕명(王命)을 받아 고려왕실(高麗王室)에서 신라(新羅)의 본계(本系)
를 찬술한 서경잡기(西京雜記), 또는 서경야사(西京野史) 및 고려조 장
군 김방경(金方慶)이 기술(記述)한 초당일기(草堂日記) 등의 기록을 성
삼문(成三問)과 최항(崔恒)이 입증(入證)하였다.
주해(註解)
강남(江南) : 개성왕씨(開城王氏)의 보첩(譜牒)의 문헌(文獻)에 의하면 고려 6대 성종왕(成
宗王) 14년 서기955년 7월에 처음으로 우리나라를 10도로 나누면서 대동강의
남쪽(지금의 평안남도)을 강남도(江南道) 하였다. 여기에 기록된 강남은 중국의
강남이 아니고 대동강 남쪽 강남도를 말한 것이다.
이 글의 원문(原文)은『謹

安안
司사
諫간
院원
左좌
正정
言언
車차
原원
頫부
文문城성
人인


達달
第제
一일
子자
大대
匡광
之지
伯백
孝효
全전
之지
後후
也야


達달
之지
於어
丁정
麗려
室실
輸수
勤근之지
日일


全전
之지
於어
當당
王왕
事사
靡미
盬고
之지
時시
輿

興흥
原원
賑진
貸대
之지
粟속


顯현
陵능定정
社사
之지
勞노


以이
爲위
辦판
出출
車거
乘승
繼계
粮량
道도
運운
米미
征정
南남


贈증
其기
父부
以이
車차
爲위達달
世세
績적
之지
號호


賜사
車차
氏씨
以이
表표
孝효
全전
首수
功공
之지
姓성
而이
食식
邑읍
千천
戶호
之지
封봉
仍잉宗종
籍적
延연
安안
之지
地지
. 正

言언
者자
康강
獻헌
大대
王왕
命명
起기
特특
拜배
之지
意의
今금
此차
發발
現현
而이
使사
聞문
于우
意의
也야




恒항




三삼
問문
等등
奉봉


註주


陵능
者자
高고
麗려
始시
祖조
墓묘
號호
也야


社사
者자
開개
國국
而이
定정
宗종
社사
之지
功공也야
臣신


恒항
奉봉


註주


邑읍
千천
戶호
者자
麗려
太태
祖조
之지
於어
孝효
全전
之지
爲위
王왕
室실
入입
宗종
籍적
之지
後후
塩염
州주
之지
地지下하
賜사
也야
臣신


恒항




三삼
問문
奉봉


註주

주해(註解)
판출(辦出) : 변통하여 갖추어 냄
계량(繼粮) : 한 해 농사지은 곡식으로 일 년 양식을 이어감
이 글에 고려태조 왕건(王建)께서 나라를 개국(開國)하여 종묘사직
(宗廟社稷)을 정(定)하고 남쪽 후백제(後百濟)를 정벌(征伐)할 때 가성
명(假姓名) 류해(柳海)는 삼한(三韓)의 제일호부(第一豪富)로 장정(壯
丁)을 모집하여 고려조정에 수송하여 도우시고 그의 큰아들 휘 효전
(諱 孝全)은 왕사(王事)에 미고(靡盬)를 당하였을 때 흥원(興原)에 많은
속곡(粟穀)을 진대(賑貸)하였고, 현능(顯陵)과 종사(宗社)를 정할 때 공
훈을 세웠고, 나라를 위하여 수레를 판출(辦出)하여 계량(繼粮)을 싫어
남쪽 정벌(征伐)에 미곡(米穀) 운반(運搬)을 행 하였으니 특별히 그의
아버지에게 차씨(車氏)로 내려서 세(世)를 계승(繼承)케 하여 달(達)로
이름 하였다고 계통(系統) 차씨(車氏)로 분부하여 나타낸 것은 효전(孝
全)의 수공(首功)에 성(姓)이며 식읍천호(食邑千戶)를 봉(封)하니 곧 종
적(宗籍)은 연안(延安)의 땅으로 봉(封)한 것이다.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의 38세 손자(孫子)인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의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序)를 살펴보면 그 원문(原文)
에『公

之지
配배
新신
羅라
王왕
閼알
智지
之지
孫손
金김
稛균
之지
女녀
也야


二이
男남
長장
曰왈
孝효
全전
次차
曰왈
孝효
金금


其承

蔭음
授수
封봉
之지
日일


祖조
特특
命명
曰왈
念염
昔석
車차
氏씨
之지
弘홍
烈열
旣기
不불
可가
忘망
也야


間간
柳류
氏씨
之지
冒모
稱칭
又우
不불
可가
廢폐
也야


子자
孝효
全전
爲위
上상
祖조
之지
弘홍
烈열
承승
襲습
而이
車차
氏씨
也야


子자
孝효
金금
爲위
柳류
氏씨
之지
命명
賜사
姓성
也야
』이 글의 뜻은?공(公)의 아내는 신라왕 알지(閼智)의 손자 김균(金
稛)의 딸이다. 두 아들을 낳았으니 맏이는 효전(孝全) 둘째는 효금(孝
金)이다. 그 음사(蔭仕)로 봉(封)하여 이어 주는 날에 고려 태조는 특
별히 명(命)하여 가로대 옛 차씨(車氏)를 생각하면 본래의 홍렬(弘烈)
을 가히 잊을 수 없고, 저간(這間 :이 때까지)에 류씨(柳氏)로 사칭(詐稱)
하여 부른 것을 또 버리는 것도 옳이 아니하다. 장자(長子) 효전(孝全)
은 윗 할아버지의 홍렬(弘烈)을 승습(承襲)하여 차씨(車氏)가 되고, 차
자(次子) 효금(孝金)은 류씨(柳氏)로 사성(賜姓)을 명(命)한 것이다.?이
에 형제분(兄弟分)이 차씨(車氏)와 류씨(柳氏)로 분성(分姓)하게 되어
오늘날까지 양문(兩門)으로 계승(繼承)하고 있다.
2. 왕씨(王氏).차씨(車氏).류씨(柳氏)등의 분파도(分派圖)
得姓一世 二 世 三世 四世 五世 六世 七世 八世 九世 十世
車無一 ━ 神乙(琳) ━ 夫起 ━ 惟典 ━ 茂正 ━ 介修 ━ 復 ━ 祖英 ━ 适 ━ 仁相 ┓
┏━━━━━━━━━━━━━━━━━━━━━━━━━━━━━━┛
┃十一世 十二世 十三世 十四世 十五世 十六世 十七世 十八世 十九世 二十世
┗ 甲乘 ━ 自開 ━ 武基 ━ 升閣 ━ 公乃 ━ 輔傳 ━ 濟能 ━ 登國 ━ 殷甫 ━ 延廣┓
┏━━━━━━━━━━━━━━━━━━━━━━━━━━━━━━┛
┃ 二一世 二二世 二三世 二四世 二五世 二六世 二七世 二八世 二九世 三十世 三一世
┗ 徽曼 ━ 智 ━ 溫伯 ━ 楯 ━ 渰 ━ 婁漢 ━ 盾階 ━ 段式 ━ 憲 ━ 渡江 ━ 儉夫 ┓
┏━━━━━━━━━━━━━━━━━━━━━━━━━━━━━━┛
┃ 三二世 三三世 三四世 三五世 三六世 三七世 三八世 三九世
┗ 建甲 ┳ 承穡 ━ 恭叔 ━ 振阜 ━ 茂先 ━ 普林 ━ 達 ┳ 孝全(延安車氏 得貫祖)
┃ ┃
┃ ┗ 孝金(文化柳氏 得姓祖)

┗ 恭道 ━ 不傳 ━ 隆 ━ 王建(高麗 太祖)
(開城王氏 始祖 元德大王)
Ⅵ.의덕사(懿德祠)의 사지(史誌)
1.의덕사(懿德祠)의 건립취지(建立趣旨)와 목적(目的)
연안차씨(延安車氏) 종친회(宗親會)는 전국에 종원제위(宗員諸位)의
열성어린 협조를 얻어 경기도(京畿道) 평택시(平澤市) 장안동(長安洞)
산 285-1번지에 길지(吉地)로 선정(選定)하고 선조(先祖)님을 배향(配
享)할 사우(祠宇)를 건립(建立)하게 된 것이다.
연안차씨(延安車氏)의 득관조(得貫祖) 차효전(車孝全)은 고려조(高麗
朝) 개국(開國)의 수공자(首功者)로 벼슬 대광(大匡)을 제수(除授)하고
고려왕실(高麗王室)의 종적(宗籍)에 입적(入籍)한 후 식읍천호(食邑千
戶)를 염주(塩州)로 하사(下賜)하여 귀족(貴族)의 칭호(稱號)인 작위백
(爵位伯)에 봉록(封錄)하신 선조(先祖)님을 주벽(主壁)으로 봉안(奉安)
하고 고려조(高麗朝)에 역대(歷代)의 작위선조(爵位先祖)와 각 종파(宗
派)의 파조(派祖) 및 명현(名顯)의 현조(賢祖)와 이곳 합동묘역(合同墓
域)에 4위를 배향(配享)으로 봉안(奉安)하고 사당(祠堂)의 이름 의덕사
(懿德祠)라 칭명(稱名)하고 1996년 5월 12일자로 준공전례(竣工典禮)
를 하였으며 음력(陰曆) 10월 2일에 시제(時祭)로 매년(每年) 경향각지
(京鄕各地)의 일족(一族)이 운집(雲集), 성대(盛大)히 봉향(봉향)을 하여
왔다.
2004년 7월 14일 운영이사(運營理事) 및 문헌(文獻). 보첩편찬(譜牒
編纂) 심사위원(審査委員) 등 연석회의(連席會議)에서 승인(承認)을 얻
어 차씨(車氏)의 득성(得姓祖)이신 신라조(新羅朝)에 벼슬 시중(侍中)
차무일(車無一) 시조(始祖)님을 주벽(主壁)으로 봉안(奉安)하여 득성조
(得姓祖)의 38세 손자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 = 冒姓名 柳海) 선조(先
祖)님까지 전조고조비(全祖考祖妣)와 연안차씨(延安車氏)의 득관조(得
貫祖)이신 고려개국(高麗開國)에 수공자(首功者)인 정사일등공신(定社
一等功臣) 대광지백(大匡之伯) 차효전(車孝全) 선조(先祖)님부터 고려말
(高麗末)의 득관조(得貫祖)의 20세 손자까지 전조고조비(全祖考祖妣).
득관조(得貫祖)의 21세 손자 고려조(高麗朝)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綠
大夫) 광주병마사(廣州兵馬使) 상주국(上柱國) 상장군(上將軍) 차안기
(車安耆) 선조님, 조선조(朝鮮朝)의 적개공신(敵愾功臣) 연천군(延川君)
강렬공(剛烈公) 차운혁(車云革) 선조님. 임난(壬亂)에 명(明)나라 도독
(都督) 이여송(李如松)이 평양성(平壤城)의 수복(收復)에 대한 공적(功
績)의 노포문(露布文)을 찬(撰)하여 천하문장(天下文章)으로 들난 오산
공(五山公) 차천로(車天輅) 선조님 등 102위의 선조(先祖)님 위패(位
牌) 배향봉안(配享奉安)하고 봉사(奉祀)하는 규모(規模)와 위풍(威風)을
갖춘 면모(面貌)의 사당(祠堂)으로 발전(發展)하였다.
2004년 11월 13일에 경향각지(京鄕各地)에서 운집(雲集)한 일족(一族)
의 종원(宗員)과 타성문중(他姓門中)의 래빈(來賓)이 참석한 가운데 성
대(盛大)한 위패봉안식(位牌奉安式) 겸 시제봉사(時祭奉祀)를 거행하였
다. 이로 인하여 차문(車門)의 숙원(宿願)인 삼한갑족(三韓甲族)의 위상
(位相)을 제고(提高)하게 되었다.
우리 차문(車門)의 관적(貫籍)을 연안(延安)으로 칭관(稱貫)하는 연유
를 살펴보면 고려조(高麗朝) 개국(開國)에 수공자(首功者)로 벼슬 대광
(大匡)을 제수(除授)하고 정사일등공신(定社一等功臣)에 피봉(被封)된
후 고려 태조께서 차효전(車孝全)은 혈연(血緣)의 관계(關係)가 삼당질
(三堂姪)인 연유(緣由)로 왕실(王室)의 종적(宗籍)에 입적(入籍)한 귀족
(貴族)의 작위(爵位)인 백(伯)의 칭호(稱號)를 내리고 식읍천호(食邑千
戶)를 염주현(塩州縣)에 하사(下賜)하시니 이곳에서 세계(世系)를 이어
살게 되었다.
후손(後孫)들은 신라조(新羅朝)에서 문무장상(文武將相)의 잠영(簪纓)
의 문벌(門閥)로 교목세가(喬木世家)인 차문(車門)이 신라조(新羅朝)의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의 변난(變亂)에 몰락(沒落)하여 신라
좌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께서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아
래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으로 둔적(遁迹), 조모(祖母)의 성(姓)인
양씨(楊氏)에 양자(楊字)를 인용(引用)하여 양씨(楊氏)로 모성(冒姓)하
다가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가성(假姓) 류씨(柳氏)로 정(定)하
고 이름은 나무숲에 숨어 살겠다는 뜻으로 백(栢)으로 개명(改名)하고
은거(隱居)한 것이 108년간에 6세를 류씨(柳氏)로 전(傳)하였으며 이때
태조 왕건(太祖 王建)께서 고려를 개국할 때 차효전(車孝全)께서 공훈
(功勳)을 세워 그의 6대조(代祖) 차승색(車承穡)으로부터 선고(先考)까
지 본성차씨(本姓車氏)로 시키고 차씨(車氏)의 가문(家門)을 다시 일으
킴으로 공(公)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공(公)의 식읍지(食邑地)인
염주(塩州)를 관적지(貫籍地)로 하였다.
고려조(高麗朝)의 26대 충선왕(忠善王) 때에 이르러 차효전(車孝全)
께서 식읍지(食邑地)를 연안부(延安府)로 개칭(改稱)하게 됨으로 그의
후손(後孫)이 관적명(貫籍名)을 연안(延安)으로하여 연안차씨(延安車氏)
라 하고 공(公)을 득관조(得貫祖)로 하고 오늘날까지 면면(綿綿)히 세
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자손만대(子孫萬代)에 번성(蕃盛)하고 있으
며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 선조님으로부터 한 세대(世代)도 빠
짐없이 이어 내려오고 있다.
경기도 평택시 장안동 산 285-1번지에 사당(祠堂)을 건립(建立)하고
득성시조(得姓始祖)님을 주벽(主壁)으로 102위의 선조님 위채를 배향
(배향)으로 봉안(奉安)하여 봉사(奉祀)하고 있는 의덕사(懿德祠)는 득성
조(得姓祖)와 득관조(得貫祖)의 의덕(懿德)이 자손만대(子孫萬代)에 끼
치는 음덕(蔭德)을 기리기 위하여 의덕사(懿德祠)라 칭명(稱名)하고 매
년(每年) 음력(陰曆) 9월 1일 오전(午前) 10시에 시제(時祭)로 봉사(奉
祀)하고 있는 곳이다.
2. 의덕사(懿德祠)에 배향봉안(配享奉安) 된
제선조(諸先祖)님의 약력(略歷)
1 世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 :
공(公)의 본성명(本姓名)읕 황몽(王蒙)으로 중국(中國)의 옛 하(夏)
나라에서 고조선(古朝鮮)으로 망명(亡命)하여 평양(平壤) 일토산(一土
山) 아래 정착(定着)한 사신갑(姒辛甲)은 성(姓)을 왕씨(王氏)로 바꾸
어 이름은 조명(祖明)으로 개명(改名)하고 단군조(檀君朝)에 치민장
(治民長)을 역임(歷任)하신 왕조명(王祖明)의 58세 손자이시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준왕(準王) 때 참언(讖言)의 글에『일토초가
자위왕(一土草家者爲王)』이란 말이 동요(童謠)로 세상에 퍼지니 기
자준왕(箕子準王)은 이 참언(讖言)이 두려워서 일토산(一土山) 아래
사는 왕씨(王氏)를 박살(撲殺)함으로 왕몽(王蒙)께서 황급(遑急)히 일
곱째 아들 왕림(王琳)과 함께 남쪽 지리산(智異山)으로 둔적(遁跡)하
여 십여년(十餘年)을 은거생활(隱居生活)로 피신(避身)하게 되었다.
어느날 신인(神人)이 왕몽(王蒙)의 피신고뇌(避身苦惱)에 감응(感
應)하여 나타나 큰 소리를 내어 말하기를『너에 성(姓)인 왕자(王字)
를 세 번 글자를 고쳐서 세 번째 글자로 성(姓)으로 정(定)하면 이
변난(變亂)을 피하고 자손(子孫)이 창성(昌盛)할 것이다.』함으로 왕
몽(王蒙)께서 성(姓)인 왕자(王字)를 동서(東西)를 막아 전자(田字)로
전자(田字)의 중획(中劃)을 상하(上下)로 이어 신자(申字)로 신자(申
字)에 천지(天地)에 각각일획(各各一劃)을 더하여 차자(車字)로 하여
성(姓)을 차씨(車氏)로 정하고 이름은 무(無)에서 처음 다시 시작한
다는 뜻으로 이름은 무일(無一)이라 개명(改名)하고 아들 왕림(王琳)
은 신인(神人)이 예시(豫示)할 때 두 번째 사람이다 해서 이름을 신
을(神乙)로 개명(改名)하고 지리산(智異山)의 은신생활(隱身生活)을
끝내고 계림(鷄林=지금 慶州)으로 이거(移居)하였다.
한(漢)나라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元年) 갑자(甲子:西紀前57年)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는 그 당시 부족국가(部族
國家)로 구성(構成)된 육촌(六村)의 촌장(村長)들이 왕(王)으로 추대
(推戴)함에 부족국가(部族國家)를 통합(統合)하여 신라(新羅)를 개국
(開國)하고 왕(王)으로 즉위(卽位)하여 도읍지(都邑地)를 계림(鷄林)
으로 천도(遷都)할 때 차무일(車無一)께서 큰 공훈(功勳)을 세웠기에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는 차무일(車無一)에게 벼슬
시중(侍中)을 제수(除授)하고 차씨(車氏)로 사성(賜姓)함으로 차씨(車
氏)의 득성시조(得姓始祖)가 되었다.
2 世 휘(諱) 신을(神乙) :
본성명(本姓名)은 왕림(王琳)이다. 참언(讖言)의 동요(童謠)로 인
(因)하여 기자조선(箕子朝鮮) 준왕(準王)의 박멸(迫滅)을 피하여 아
버지를 따라 지리산(智異山)에 둔적(遁跡) 하여 피신(避身)하고 신
인(神人)의 예시(豫示)에 따라 아버지와 함께 성(姓)을 차씨(車氏)로
하고 이름은 신인(神人)이 예시(豫示)한 두 번째 사람이란 뜻을 담
아 신을(神乙)로 개명(改名)하고 아버지와 함께 계림(鷄林)에 이거
(移居)하여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섬기어 벼슬
승상(丞相)을 역임(歷任)하였다.
3 世 휘(諱) 부기(夫起)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에 승상(承相)을 역임(歷任)하였으며 조부
(祖父)로부터 3대를 신라시조(新羅始祖) 박혁거세(朴赫居世) 임금을
섬기었다.
4 世 휘(諱) 유전(惟典)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다. 공(公)은 그 당시 신라
조(新羅朝)의 명현(名賢)으로 나라 사람들이 봉사(奉祀)하였다.
5 世 휘(諱) 무정(茂正) :
일운(一云) 무정(戊正)이라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사공
(司空)이며 문무(文武)를 겸비(兼備)하였다.
6 世 휘(諱) 개수(介修)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사공(司空)이며 배부인(配夫人)은 박씨
(朴氏)이며 신라조(新羅朝) 2대 남해왕(南解王)의 딸이다.
7 世 휘(諱) 복(復)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대승상(大丞相)이시며, 음변국(音汴國 :
東史의 기록에 지금 慶州에 屬한 安東縣 脫解王 乙丑(서기65년),漢明帝 永平8年에 征伐
함)의 정벌(征伐)에 큰 공훈(功勳)이 있으며. 배부인(配夫人)은 박씨
(朴氏)이며 신라조(新羅朝)의 5대 파사왕(婆娑王)의 딸이다.
8 世 휘(諱) 조영(祖英) :
일운(一云) 조영(祖永)이라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에 상주
국(上柱國)이시다.
9 世 휘(諱) 괄(适) :
일운(一云) 괄(括)이라 하며 신라조(新羅朝)의 대승상이시다.
10 世 휘(諱) 인상(仁相)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며, 호(號) 인의상(仁義相)
인 연고로 인상(仁相)으로 사명(賜名)하였다.
11 世 휘(諱) 갑승(甲乘) :
일운(一云) 갑승(甲承)이라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
(丞相)이시다.
12 世 휘(諱) 자개(自開) :
일운(一云) 자개(子開)라고도 하고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
상(丞相)이며 배부인(配夫人)은 가인(哥仁)의 딸이다.
13 世 휘(諱) 무기(武基) :
일운(一云) 무기(武奇)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대
승상(大丞相)이시다.
14 世 휘(諱) 승각(升閣)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며 감문국(甘文國 : 東史의
기록에 지금의 開寧府인데 신라 11대 助賁王 2년 辛亥(西紀231年) 卽 漢 後帝 建興9
年에 征伐함)을 정벌(征伐)할 때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5 世 휘(諱) 공내(公乃)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통독(統督)으로 사양국(沙梁國 : 東史의
기록에 지금의 尙州이며 신라 12대 沾解王 丁卯(西紀247年) 卽 漢後帝 延熙10年에 征
伐함)을 정벌(征伐)할 때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다.
16 世 휘(諱) 보전(輔傳) :
일운(一云) 보전(甫前)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집주(執奏)이며 배부인(配夫人)은 석씨(昔氏) 우로(于老)의 딸로 신
라 10대 내해왕(奈解王)의 손녀(孫女)이시다.
17 世 휘(諱) 제능(濟能) :
일운(一云) 제장(濟張)이라고 하며 벼슬은 신라 13대 미추왕
(味鄒王) 원년(元年) 임오(壬午 : 서기262년)에 대승상(大丞相)이 되
어 국정(國政)을 바로 잡았다. 고려조(高麗朝)에 벼슬 기거랑(起居
郞)을 지낸 정지상(鄭知常)이 찬술(撰述)한 서경야사(西京野史)에
유루(劉累)의 후손(後孫)과 사족(四族)이 기자(箕子)와 함께 동쪽
으로 왔는데 차제능(車濟能)의 선대(先代) 황제(黃帝) 희헌원(姬軒
轅)의 후손(後孫)도 그 중의 한분으로 왔다 하고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 선생이 찬술(撰述)한『車雲巖先生 雪寃錄』의 세계
편(世系編)을 보면 차제능(車濟能)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어 일
세(一世)로 기록되어 있다.
18 世 휘(諱) 등국(登國)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아간(阿干)이다.
19 世 휘(諱) 은보(殷甫) :
일운(一云) 은부(殷夫)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
상(丞相)이시다.
20 世 휘(諱) 연광(延廣) :
벼슬은 구보(舊譜)에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 일운(一云)
아간(阿干)이라 기록하고 있다. 배부인(配夫人)은 김씨(金氏)로 신
라조(新羅朝) 18대 실성왕(實聖王)의 딸이며, 알지(閼智)의 후손(后
孫) 눌지(訥祗) 그에 임금 실성왕(實聖王)을 죽이고 신라조(新羅朝)
의 19대 왕으로 자립(自立)함으로 공(公)께서 극간(極諫)에 눌지
(訥祗)는 노(怒)하여 공(公)을 죽였다. 동사(東史)에 진안제(晋安帝)
의희(義熙) 13년 정사(丁巳) 즉(卽) 실성왕(實聖王) 16년 정사(丁
巳 : 서기 417년)에 눌지(訥祗)가 죽였다.
21 世 휘(諱) 휘만(徽曼) :
일운(一云) 만미(曼微), 또 일운(一云) 미만(微曼)이라고도 한다.
벼슬은 (新羅朝)의 19대 눌지왕(訥祗王) 때 승상(丞相)이시다. 눌
지왕(訥祗王)의 부왕(父王)인 내물왕(奈勿王)의 동생인 실성왕(實聖
王)이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돌아다니는 내물왕(奈勿王)의 장자(長
子) 눌지(訥祗)를 도외시(度外視)하고 내물왕(奈勿王)의 둘째 아들
복호(卜好 :눌지왕의 동생)는 고구려(高句麗)에 인질(人質)로 보내고
내물왕(奈勿王)의 셋째아들 미사흔(米斯欣)은 왜국(倭國)에 인질(人
質)로 보내 버렸다. 이에 박제상(朴提上)이 주축(主軸)이 되어 신
자천(申自天). 배중량(裵仲良) 등이 실성왕(實聖王)의 부당(不當)한
처사(處事)를 거론(擧論)하여 실성왕(實聖王)이 눌지(訥祗)에게 왕
위(王位)를 양위(讓位)하게 되었다. 서기 417년 정사(丁巳)에 눌
지왕(訥祗王)이 즉위(卽位)한 후 왜국(倭國)에 인질(人質)로 가 억
류(抑留)된 동생 미사흔(米斯欣)이 그리워서 왜국(倭國)에 사신(使
臣)을 여러 차례 보내어 귀환(歸還)을 요구(要求)하였으나 번번이
거절(拒絶)을 당하였다. 승상(丞相) 차휘만(車徽曼)은 박제상(朴提
上)과 함께 왜국(倭國)에 사신(使臣)으로 들어 가 미사흔(米斯欣)의
숙소(宿所)의 경비(警備)하는 왜인(倭人)들이 잠이 들은 틈에 미사
흔(米斯欣)을 구출(救出)을 하기 위하여 선박(船舶)으로 신라조(新
羅朝)로 귀환(歸還)하고 왜왕(倭王)에 이 사실을 감추었다. 이 사
실(事實)이 밝혀져 왜왕(倭王)이 승상(丞相) 차휘만(車徽曼)과 박제
상(朴提上)에게 재물(財物)의 욕심으로 항복(降伏)을 받으니 승상
(丞相) 차휘만(車徽曼)과 박제상(朴提上)은 굴(屈)하지 않고 마침내
왜왕(倭王)에게 죽임을 당하여 왜국(倭國)에서 순절(殉節)하였다.
동사(東史)를 살펴보면 박제상(朴提上)과 함께 왜왕(倭王)에게 죽
었다고 기록이 있다.
22 世 휘(諱) 지(智) :
일운(一云) 지아(智阿)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이손(伊飱) 또는 승상(丞相)이시다.
23 世 휘(諱) 온백(溫伯)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아손(阿飱) 또는 승상(丞相)이라 하며
배부인(配夫人) 명성(明城) 복씨(卜氏)이며 문감흘(門監乞)의 딸이
시다.
24 世 휘(諱) 순(楯) :
일운(一云) 륜(輪) 또 일운(一云)에 식(植)이라 하고 또는 일운
(一云) 욱(栯)이라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承相)이며.
공(公)은 사인(士人)의 명습자(明習者 :똑똑하고 분명하게 익히는사람)를
취(取)하여 날로 유도(儒道)를 강론(講論)하였다.
25 世 휘(諱) 엄(渰) :
일운(一云) 엄(弇)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상대
등(上大等)이다.
26 世 휘(諱) 루한(婁漢) :
일운(一云) 루한(婁翰)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사공(司空)이시다.
27 世 휘(諱) 순계(盾啓) :
일운(一云) 순계(盾階)라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대승상
(大丞相)이시다. 공(公)은 신라 27대 여왕(女王) 선덕왕조(善德王
朝)에 벙(病)으로 물러나서 은거(隱居)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28 世 휘(諱) 단식(段式) :
일운(一云) 개식(改式)이라고도 하고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대승상(大丞相)이시며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 2년 임오(壬午 : 서
기682년)에 상소(上疏)로 청(請)하야 국학(國學)을 세우니 설총(薛聰)
과 고질(高秩) 등은 예절(禮節)을 물으며 공(公)을 곧 스승으로 섬
기게 되었다.
29 世 휘(諱) 헌(憲)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시며, 신라 35대 경덕왕
(景德王)은 승상(丞相) 차헌(車憲)을 촉중(蜀中)에 사신(使臣)으로
보냈다. 동사(東史)를 살펴보면 당(唐)나라 천보(天寶) 15년 병신
(丙申)에 현종(玄宗)이 록산(祿山)의 난(亂)을 피하여 촉(蜀)으로
행차한 연고로 조정(朝廷)에서 차헌(車憲)을 보내어 현종(玄宗)을
알현(謁見)하니 현종(玄宗)은 친(親)히 지은 십운시(十韻詩)와 수찰
(手札)을 차헌(車憲)에 부치어 경덕왕(景德王)에게 내렸다.
30 世 휘(諱) 도강(渡江) :
일운(一云) 도강(渡康)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전의(典儀)시다. 김양상(金良相)이 그에 임금 신라 36대 혜공왕(惠
恭王)을 죽이고 자립(自立)하고자 함으로 차도강(車渡江)은 김양상
(金良相)을 죽여 막을 것을 공(公)은 스스로 도모(圖謀) 하였으나
실패(失敗)하였다. 동사(東史)를 살펴보면 당(唐)나라 덕종(德宗)
건중원년(建中元年) 경신(庚申 :서기 780년)에 김양상(金良相)은 왕
(王)을 죽이고 자립(自立)하였다. (※김양상(金良相)은 신라 37대 선덕왕(宣
德王)이다.)
31 世 휘(諱) 검부(儉夫)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丞相)이시다. 승상(丞相) 차검부
(車儉夫)는 상소(上疏)로 학교(學校)에 과목(科目)을 설립하여 인재
(人材)를가려 뽑았다. 배부인(配夫人)은 익원양씨(益原楊氏)이며 상
장군(上將軍) 양인방(楊仁芳)의 딸이다. 동사(東史)를 살펴보면 신
라 38대 원성왕(元聖王) 4년 무진(戊辰 : 서기 788년). 당(唐)나라 덕
종(德宗) 정원(貞元) 4년에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설립하였다.
32 世 휘(諱) 건갑(建甲)
일운(一云) 건신(建信)이라고도 하며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승상(承相)이며 신라 39대 소성왕조(昭聖王朝)의 원로신(元老臣)이
며 배부인(配夫人)은 신라 4대 왕 석탈해니사금(昔脫解尼師今)의
후예(后裔)인 국성석씨(國姓昔氏)이다. 소성왕(昭聖王)은 친(親)히
주(周)나라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엎고 제후(諸侯)와 조
회(朝會)하는 그림 한 폭을 주시며 공(公)에게 어린 태자(太子)를
부탁함은 애장왕(哀莊王)이 어린 까닭이다. 소성왕(昭聖王)이 서거
(逝去)한 후 소성왕(昭聖王)의 유언(遺言)에 따라 12세에 즉위(卽
位)하신 애장왕(哀莊王)의 보상(輔相)이 되시어 애장왕(哀莊王)을
보필(輔弼)하시고 나라의 정사(政事)를 섭정(攝政)하시어 대훈공(大
勳功)을 세우시고 별세(別世)하시니 애장왕(哀莊王)은 만조백관(滿
朝百官)에 왕례(王禮)를 갖추어 예장(禮葬)하고 공(公)의 신주(神
主)는 소성왕묘(昭聖王廟)에 배향(配享)케 하명(下命)하고 공(公)의
묘역(墓域)을 기장현(機張縣) 만화동(萬化洞 :일운(一云)에 만화동(滿花冬)
이라 함) 측록(側麓)의 자좌원(子坐原)에 매장(埋藏)하고 사포숙석(四
舖宿石)의 비갈(碑碣)이 있어 세인(世人)들이 차능(車能)이라 말하
며 오늘 날까지 보존(保存)되고 있다. 신라 42대 흥덕왕(興德王서
기826년~836년)은 기장현(機張縣)에는 소성왕조(昭聖王朝)의 로신
(老臣)이며 애장왕(哀莊王)의 보상(輔相)의 묘역(墓域)을 세인(世
人)들이 능(陵)으로 칭존(稱尊)하는 차능(車陵)이 있는 지방(地方)
이라 하고 현명(縣名)을 승격(陞格)하여 차성(車城)으로 개칭(改稱)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 날에 기현군(機張郡)의 고호(古號)
차성(車城)인 것이다.
33 世 휘(諱) 승색(承穡) :
벼슬은 당(唐)나라 헌종(憲宗) 원화(元和) 4년 기축(己丑 :서기
809년). 즉(卽) 신라 40대 애장왕(哀莊王) 10년에 승상(丞相)이 되
어 선고(先考)이신 승상(丞相)의 유지(遺志)에 따라 애장왕(哀莊
王)을 극진(極盡)히 보필(輔弼)하였으며 배부인(配夫人)은 우씨(禹
氏)이다. 왕숙(王淑)인 김언승(金彦昇)이 애장왕(哀莊王) 10년 기
축(己丑 : 서기 809년)에 반역(返逆)하여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
하고 김언승(金彦昇)은 자립즉위(自立卽位)하여 신라 41대 헌덕왕
(憲德王)이 되었다. 그러나 좌상(左相) 차승색(車承穡)은 왕(王)로
인정(認定)하지 않고 왕(王)을 시해(弑害)한 역적(逆賊)이며 친질
(親姪)을 죽인 패륜아(悖倫兒)라 하며 헌덕왕(憲德王)을 시해(弑害)
로 나라에 원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법통(法統)을 바로 세
우기 위하여 공(公)의 큰 아들 벼슬 신라 사공(司空) 차공숙(車恭
叔)과 함께 동지(同志)들과 모의(謀議)하여 예양(豫讓)의모략(謀略)
을 본받아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이 수렵(狩獵)의 떠남을
엿보아 다리 밑에 복병(伏兵)한 궁수(弓手)로 시해(弑害)하고자 하
였으나 이 계략(計略)을 아는 자가 헌덕왕(憲德王)에게 밀고(密告)
함으로 이 계책(計策)이 누설(漏泄)되었다. 이에 헌덕왕(憲德王)이
공(公)의 부자(父子)를 체포(逮捕)하기 위하여 나라에 체포령(逮捕
令)을 내리고 병리(兵吏)를 풀어 찾으니 공(公)의 부자(父子)는 요
동백(遼東伯) 김반전(金盤傳)의 아들 김생(金生)인 생질(甥姪)의 집
으로 둔적(遁迹)하여 피신(避身)하였다.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
彦昇)은 공(公)의 부자(父子)가 체포(逮捕)되지 못 함으로 이 부자
(父子)를 체포(逮捕)하기 위하여 현상(懸賞)으로 금(金) 천근(千斤)
과 식읍만호(食邑萬戶)를 걸어 놓고 공(公)의 부자를 찾으니 공
(公)의 생질(生姪) 김생(金生)은 현상금(懸賞金)을 탐하여 외숙부자
(外叔父子)를 밀고(密告)하고자 하였다. 김생(金生)의 충복(忠僕)이
김생(金生)의 계략(計略)을 미리 공(公)의 부자(父子)에께 알려 그
날 밤 위험을 벗어나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아래 유주(儒
州) 묵방동(墨坊洞)으로 둔적(遁迹)하여서 조모(祖母)의 성(姓)인
양씨(楊氏)로 모칭(冒稱)하며 피신은거(避身隱居)하였다. 공(公)은
모성(冒姓) 양씨(楊氏)의 양자(楊字)를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
꾸어 가성(假姓)으로 류씨(柳氏)라 정(定)하고 이름은 잣나무 숲에
깊이 은신(隱身)한다는 뜻을 담아 백자(栢字)를 택(擇)하여 백
(栢)으로 개명(改名). 가성명(假姓名) 류백(柳栢)으로 하여 유주(儒
州) 고을에 부두가(富荳家)로 이름 난 집에 고용(雇傭)살이로 피신
(避身)하여 천명(天命)을 보존(保存)하게 된 것이다. 신라 34대
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 : 서기 918년)에 왕건(王建) 태조(太祖)
께서 고려조(高麗朝)를 개국(開國)한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
日)에 고려태조(高麗太祖)의 특명(特命)으로 본성차씨(本姓車氏)로
109년만에 복성(復姓)을 한 것이다.
34 世 휘(諱) 공숙(恭叔) :
벼슬은 신라조(新羅朝)의 사공(司空)이시며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의 변난(變亂)에 아버지이신 신라
좌상(左相) 차승색(車承穡)과 함께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한
나라의 원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법통(法統)을 바로 세울
계략(計略)이 누설(漏泄)로 실패(失敗)하고 아버지와 함께 황해도
(黃海道)로 둔적(遁迹)하여 아버지를 따라 본성명(本姓名)을 감추
고 임시로 성명(姓名)을 류숙(柳淑)이라 하며 피신(避身)을 하게
된 것이며, 공(公)의 친제(親弟)이신 차공도(車恭道)는 신라조(新羅
朝)의 벼슬 사공(司空)이며 호(號) 미도(彌道)는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의 변난(變亂)에 강남(江南= 고려의 강남도(江南道 : 지금
평양남도)를 말함)에 들어 가 피신(避身)하면서 구성왕씨(舊姓王氏)로
복성(復姓) 왕공도(王恭道)로 살게 되었으며 그의 증손(曾孫)이 고
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은 고려개국(高麗開國)한 후 증조(曾
祖)이신 왕공도(王恭道)님을 추숭칭호(追崇稱號) 고려국조(高麗國
祖) 원덕대왕(元德大王)이라 하여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始祖)
가 되었다.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 : 서기918년)에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고려조(高麗朝)를 개국(開國)한 후 승음수
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고려태조의 특명(特命)으로 가성명(假姓
名) 류숙(柳淑)은 본성(本性)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본성
명(本姓名)을 복원(復元)하였다.
35 世 휘(諱) 진부(振阜) :
본성씨(本姓氏)를 감추고 가성명(假姓名) 류진부(柳振阜)로 세상
(世上)을 속여 사는 처지(處地)라 은사(隱士)로 유주(儒州)에서 가
성류씨(假姓柳氏)를 3세(世)로 이어 받아서 성명(姓銘)을 류진부
(柳振阜)로 세상(世上)을 등지고 살았으며 배부인(配夫人)은 조씨
(趙氏)이며 생일남(生一男)하였으니 이름 무선(茂先)이시다. 서기
918년 신라 54대 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에 고려태조(高麗
太祖)께서 나라를 세운 후 특명(特名)으로 가성류씨(假姓柳氏)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復姓)케 하여 가성명(假姓名) 류진부(柳
振阜)로 세상을 살아오신 분을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復姓)하
게 되어 차진부(車振阜)로 성명(姓名)을 바로잡게 된 것이다.
36 世 휘(諱) 무선(茂先) :
공(公)은 해평산장(海平山長)이라 칭(稱)하며 가성류씨(假姓柳
氏)를 4세(世)로 이어받아 성명(姓名)을 류무선(柳茂先)이라 하며
세상을 살았으며 배부인(配夫人)은 유씨(劉氏)이며 생일남(生一男)
하였으니 이름 보림(普林)이시다. 그 후 서기 918년 신라 54대 경
명왕(景明王) 2년 무인(戊寅)에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나라를 세
운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태조(太祖)의 특명(特命)으로
가성류씨(假姓柳氏)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케 하여 가
성명(假姓名) 류무선(柳茂先)으로 세상을 살아오신 분을 본성차씨
(本姓車氏)로 복원(復元)케 되어 차무선(車茂先)으로 성명(姓名)을
바로잡게 된 것이다.
37 世 휘(諱) 보림(普林) :
공(公)은 월흑산장(月黑山長)이라 칭(稱)하며 가성류씨(假姓柳
氏)를 5세(世)로 이어받아 성명(姓名) 류보림(柳普林)으로 세상(世
上)을 살았으며 배부인(配夫人)은 길씨(吉氏)이며 생일남(生一男)을
하였으니 휘(諱)는 해(海)이시다. 서기 918년 신라 54대 경명왕
(景明王) 2년 무인(戊寅)에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나라를 세운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태조(太祖)의 특명(特命)으로 가
성류씨(假姓柳氏)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케 되어 차보
림(車普林)으로 성명(姓名)을 바로 잡게 되었다.
38 世 휘(諱) 달(達) :
묵방사기(墨坊寺記)에 말하기를 공(公)은 모성류씨(冒姓柳氏)로
휘(諱)는 해(海)요 자(字)는 응통(應通) 호(號)는 아사(鵝沙)이며 배
부인(配夫人)은 신라조(新羅朝)의 알지(閼智)의 후손(后孫) 김균(金
稛)의 딸이며 생이남(生二男)과 생일녀(生一女)를 하였으니 맡아들
효전(孝全), 둘째 아들 효금(孝金)이며 딸은 고려조(高麗調)의 벼슬
삼중대광(三重大匡)이며 통합삼한.(統合三韓) 익찬벽상공신(翊贊壁
上功臣) 윤신달(尹莘達)에게 출가(出嫁)하였다.
공(公)의 5대조(代祖)이신 신라(新羅) 애장왕조(哀莊王朝)의 좌
승상(左丞相) 차승색(車承穡)께서 신라 39대 애장왕(哀莊王) 10년
기축(己丑 : 서기809년)에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 김언승
(金彦昇)의 변난(變亂)에 헌덕왕(憲德王)을 시해(弑害)로 나라의 원
수(怨讐)를 갚고 왕실(王室)의 법통(法統)을 바로 세울 모의(謀議)
가 누설(漏泄)되어 실패(失敗)하고 둔적(遁迹)하여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아래 유주(儒州) 묵방동(墨坊洞)에 들어 가 조모(祖
母)의 성(姓)을 딸아 모성양씨(冒姓楊氏)라 하며 은거(隱居)하였다.
그 후 양자(楊字)와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모성류씨(冒姓
柳氏)로 6세를 전(傳)하여 공(公)에 까지 이어받게 된 것이다. 이
때 공(公)은 삼한(三韓)의 제일호부(第一豪富)이며 고려태조
(高麗太祖) 왕건(王建)께서 남정(南征)을 하게 되었다. 여기에 조선
조(朝鮮朝)의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
彭年) 선생께서 조선 6대 단종왕(端宗王)의 어명(御命)을 받아 태
허정(太虛亭) 최항(崔恒), 보한재(保閑齋) 신숙주(申叔舟), 매죽헌
(梅竹軒) 성삼문(成三問) 등 제현(諸賢)들과 함께 기술(記述)한
『車

雲운
巖암
先선
生생


寃원
記기
』의 기록(記錄)에〔車

達달
之지
於어
丁정
麗려
室실
輸수
勤근


日일


全전
之지
於어
當당
王왕
事사
靡미
盬고
之지
時시
輿

興흥
原원
賑진
貸대
之지
粟속


顯현
陵능
定정
社사


勞로


以이
爲위
辦판
出출
車거
乘승
繼계
粮량
道도
運운
米미
征정
南남


贈증
其기
父부
以이
車차
爲위
達달
世세


之지
號호
〕라 하였다 이 문장(文章)의 뜻은『차달(車達)은 장정(壯
丁)을 려실(麗室)에 날로 헌납(獻納) 도하여 도웁고. 효전(孝全)은
왕사(王事)이 어려움을 당(當)하였을 때 흥원(興原)에 많은 속곡(粟
穀)을 진대(賑貸)하였고 현능(顯陵)과 정사(定社)에 공(功)을 세웠고
나라를 위(爲)하여 수레를 판출(辦出)하여 계량(繼粮)을 싫어 남쪽
정벌(征伐)에 곡식의 운반(運搬)을 행하였더니 특별히 그의 아버지
에 차씨(車氏)로서 세대(世代)를 이어라 달(達)로 이름을 하였다.』
하였고,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은 나라를 세워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한 후 승음수봉지일(承蔭受封之日)에 태조(太祖)께서는
차달(車達)에게 대승(大丞)을 제수(除授)하시고 통합삼한(統合三韓)
익찬벽상이등공신(翊贊壁上二等功臣)에 봉(封)하시고 특명(特命)의
말씀이『念

昔석
車차
氏씨
之지
弘홍
烈렬
旣기不불
可가
忘망
也야


間간
柳류
氏씨
之지
冒모
稱칭
又우
不불
可가


也야
』라 이 문장(文章)의 뜻은〔옛 차씨(車氏)를 생각하면 원래
의 홍렬(弘烈)을 가히 잊을 수 없고. 근간(近間 =저간(這間))에 류씨(柳
氏)로 모칭(冒稱=모성(冒姓))한 것을 또 그만두는 것도 옳지 않다.〕고
하시며 모성류씨(冒姓柳氏 =假姓柳氏)의 6세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원(復元)하여 공(公)의 사성명(賜姓名)은 차달(車達)로 하시고 공
(公)의 장자(長子)인 효전(孝全)은 조상(祖上)의 홍렬(弘烈)을 승습
(承襲)케 하여 본성차씨(本姓車氏)를 계승(繼承)케 하시고 공(公)의
차자(次子) 효금(孝金)은 태조(太祖)의 특명(特命)으로 류씨(柳氏)로
사성(賜姓)하여 형제분(兄弟分)이 차류양성(車柳兩姓)으로 분성(分
姓)하게 된 것이다.
1 世 휘(諱) 효전(孝全) : (大丞公 車達의 長子)
자(字) 양운(良運) 호(號) 강촌(江村) 시호(諡號) 무열(武烈)이
시며 벼슬은 대광(大匡)에 귀족(貴族)의 작위(爵位) 백(伯)이시며
고려개국(高麗開國)의 수공자(首功者)로 정사공신(定社功臣)에 봉
(封)하고 태조왕건(太祖王建)은 차씨(車氏)의 묘예(苗裔)라 휘(諱)
효전(孝全)은 왕실종적(王室宗籍)에 입적(入籍)한 후 식읍천호(食邑
千戶)를 염주(塩州 : 연안부(延安府))에 하사(下賜)를 받았다. 공(公)은
연안차씨(延安車氏)의 득관조(得貫祖)이시며 공(公)의 초휘(初諱)는
효생(孝生)인데 대승(大丞) 차달(車達)의 장자(長子)로 조상(祖上)
의 홍렬(弘烈)을 승습(承襲)하고 생자(生字)에 한 획(劃)을 가(加)
하여 전자(全字)로 하여 휘(諱) 효전(孝全)으로 하였다. 전자(全字)
를 파자(破字)로 인왕(人王)이 되는 고(故)로 사인(邪人 : 사심(邪心)
을 품은 사람)의 참설(讒說 : 거짓 꾸며서 남을 헐뜯는 말)로 화(禍)를 입었
고 또 인왕(人王)의 불행(不幸)으로 참사(讖史 : 뉘우친 사기(史記))에
그의 행적(行跡)이 소멸(消滅)하였으나 현재(現在) 내사(內史) 서희
(徐熙)가 찬집(撰集)한 가사(家史)에 지난 말을 바로 말 하였고, 복
성(復姓)의 상세한 까닭은 정지상(鄭知常)이 찬집(撰集)한 서경야
사(西京野史)에 있다. 조선(朝鮮) 단종(端宗)의 어명(御命)을 받아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이 기문(記文)을 찬술(撰述)하고 이
기문(記文)에 태허정(太虛亭) 최항(崔恒). 보한재(保閒齋) 신숙주(申
叔舟), 매죽헌(梅竹軒) 성삼문(成三問) 등 제현(諸賢)들이 교령(敎
令)을 받들고 주해(註解)를 붙이고 유신석학(儒臣碩學)의 48인(人)
의 응제시(應製詩)를 모아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선생께서 서
문(序文)을 찬(撰)하여 엮은【車

雲운
巖암
先선
生생


寃원
記기
】에 이르데
【車

達달
之지
於어
丁정
麗려
室실
輸수
勤근
之지
日일


全전
之지
於어
當당
王왕
事사
靡미盬고
之지
時시
輿

興흥
原원


貸대
之지
粟속


顯현
陵능
定정
社사
之지
勞노


以이
爲위
辦판
出출車거
乘승
繼계
粮량
道도
運운
米미
征정
南남


贈증
其기
父부
以이
車차
爲위
達달
世세
績적
之지
號호
顯현
陵능者자
高고
麗려
始시
祖조
墓묘
號호
也야


社사
者자
開개
國국


定정
宗종
社사
之지
功공
也야


崔최
恒항
奉봉


註주 】

이문장의 뜻은【
차달(車

)

려실(麗室=高麗朝)에 장정(壯丁)을 날로 헌납(獻納)하여 도우며 효전
(孝全)은 왕사(王事)에 미고(靡盬)를 당하였을 때 흥원(興原=구월산
주변 지명)의 뭇 사람에게 식량(食糧)을 진대(賑貸 :재물을 베풀어 구제함)
하였고 현능(顯陵)과 정사(定社)에 공(功)을 세웠고 나라를 위하여
수레를 판출(辦出 : 갖추어 구해냄)하여 계량(繼粮)을 싫어 곡식을 남
쪽 정벌(征伐)에 운반(運搬)을 행하였더니 특별히 그의 아버지에게
차씨(車氏)로 세대(世代)를 잇게 하고 이름을 달(達)로 내렸다. 현능
(顯陵)이란 고려시조 무덤의 이름이요 정사(定社)란 것은 나라를 세우고 종묘사직(宗
廟社稷)을 정함의 공(功)이다 신(臣) 최항(崔恒)은 교령(敎令)을 받들어 주석(註釋)함
라고 되어 있다.
공(公)의 묘역(墓域)은 연안부(延安府) 금의면(今宜面) 금암리(金
巖里) 자좌원(子坐原)이 현지명(現地名)은 연백군(延白郡) 해용면
(海龍面) 방양동(放羊洞)이며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개성최씨
(開城崔氏)이며 부(父)는 통합삼한(統合三韓) 익찬벽상일등공신(翊
贊壁上一等功臣) 최응(崔凝)의 딸이다.
※ 최응(崔凝) 시호(諡號) 희개(熙愷)는 오경(五經)에 밝고 문장(文章)이 뛰어나 궁예(弓裔)
밑에서 한림랑(翰林郞)으로 있으면서 신임을 얻었다. 915년 신덕왕(神德王) 4년에 궁예
(弓裔)가 왕건(王建)에게 모반(謀反)의 누명(陋名)을 씌울 때 왕건이 변명하자 장주(掌奏)
로 그 자리에서 붓을 일부러 뜰에 떨어뜨리고 주우러 내려가 왕건에게“굴(屈)하지 않으
면 위태롭다”고 귀띔하여 화(禍)를 면하게 하였다. 918년 신라 경명왕(景明王) 2년 무인
(戊寅)에 왕건이 고려를 개국(開國)하고 즉위(卽位)하자 지원봉성사(知元鳳省事)를 지내
고, 이어 광평랑중(廣評郞中)· 내봉경(內奉卿)· 광평시랑(廣評侍郞) 등을 지내면서 왕건태
조의 총애(寵愛)를 받았다. 대광태자태부(大匡太子太傅)·사도(司徒)에 추증(追贈)되어 태
조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대광(大匡) 차효전(車孝全)은 식읍천호(食邑千戶)를 하사(下賜)
받은 염주(塩州)를 종적지(宗籍地)로 하여 득관일세(得貫一世)로
세계(世系)를이어 이곳에서 세거(世居)를 하였다. 그 후 고려 23대
고종왕(高宗王)이 거란병(契丹兵) 방어(防禦)에 공(功)이 있는 곳이
라 승격(陞格)하여 영응현(永膺縣)으로 개칭(改稱)하였고, 고려 24
대 원종왕(元宗王)이 또 이곳 사람인 이분희(李汾禧)가 위사공신
(衛社功臣)이 됨으로 이곳을 승격(丞格)하여 석주현(碩州縣)으로
개칭(改稱)하였고,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이 즉위(卽位)하여 이
곳을 또 승격(陞格)하여 온주목(溫州牧)으로 개칭(改稱)하였으며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이 즉위(卽位)하여 사치(奢侈)한 목(牧)을
낮추어 부(府)로 하여 연안부(延安府)로 개칭(改稱)하여 그의 후손
(後孫)들은 관적명(貫籍名)을 연안(延安)으로 개칭(改稱)하여 연안
차씨(延安車氏)로 세계(世系)를 이어 왔으며 고려 31대 공민왕(恭
愍王)이 즉위(卽位)한 후 귀족(貴族)에게 내리는 작위(爵位) 명칭
(名稱)“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을 제도(制度)를 통합(統
合)하여 군(君)으로 제도(制度)로 시행(施行)에 따라 그의 후손들은
득관조(得貫祖)를 연안군(延安君)으로 칭존(稱尊)하여 오늘날까지
세계(世系)를 면면(綿綿)히 이어 오고 있다.
2 世 휘(諱) 수비(秀毗) : (大匡之伯 車孝全의 子)
자(字)는 정보(挺輔)요 벼슬은 고려 4대 광종조(光宗朝 :
949~975)애 태보(太保) 정일품(正一品)이며 시호(諡號)는 정도(正
度)이시다. 공(公)은 부조(父祖)의 고려개국(高麗開國)과 삼한통합
(三韓統合)의 대훈(大勳)을 계승(繼承)하여 말의 법도는 준걸(俊
傑)하며 이에 훈신(勳臣)의 후손(後孫)의 자리는 권력(權力)이 오
만(傲慢)하고 사치(奢侈)함이 예부터 있으나 그대는 이제 직위
(職位)는 경상(卿相)의 사람이 신하(臣下)의 노릇을 다하였다. 또
요승(妖僧)이 들어와 왕사(王師)가 되니 사대부(士大夫)는 몇 번
을 간(諫)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으니 후세(後世)에 반드시 승
(僧)이 있으면 망국(亡國)할 것이다. 하고 내 원(願)을 좇아 전민
(田民 : 농시짓는백성)으로 돌아가 옛집에 은거(隱居)하며 천년(天年)
을 마칠 것이다. 하고 인(因)하여 조정(朝廷)에 들어가 해골(骸骨
: 신체(身體))의 귀향(歸鄕)을 청(請)하여 왕(王)은 허락(許諾)하고
거마(車馬)를 내려서 돌아가서 졸(卒)한 후 임금은 정도(正度)로
증시(贈諡)하였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장씨(張氏)이다.
3 世 휘(諱) 계인(季隣) : (太保 車秀毗의 子)
자(字)는 태화(太和), 호(號)는 용문(龍門)이며 벼슬은 고려 6
대 성종왕조(成宗王朝 : 981~997)에 광평시랑(光評侍郞) 종일품(從
一品)이며 그 후 문흥후(文興候)에 추봉(追封)되었다. 공(公)은 십
세(十歲)에 글을 지어 조년(早年)에 등과(登科)하였고 개국(開國)
하고 오래지 않아서 사대부(士大夫)의 기풍(氣風)이 떨쳐 일어나
지 않아 나라의 법이 서지 않으니 극간(極諫)으로 청(請)하여 복
시(覆試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아 다시보는 과거)를 세워 베풀고, 기곡
(祈穀 : 풍년을기원하는 제례)하는 사직(社稷)을 설립(設立)하고 오복
(五服 : 왕기(王機) 밖 5백리 마다 차례로 구역을 정해 5등으로 나누었던 지역 즉
상고(上古)의 구복(句服)·후복(侯服)·수복(綏服)·요복(要服)·황복(荒服) 등)에 국자감
(國子監 : 고려 성종 11년 임진(壬辰 992년)에 설치한 국립대학) 및 문신(文
臣)의 월과(月課 : 다달이 보는 시험)를 법(法)을 정하였다. 인(因)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향(歸鄕)하여 스스로 호(號)를 용문(龍門)이라
하고 문인(門人 : 문하생(門下生 : 제자)임) 최충(崔沖)과 함께 경리(經
理)를 궁구(窮究)하여 풀고 세속(世俗)에 종주(宗主)의 선비로 졸
(卒)하였다. 고려 조정에서 문흥후(文興侯)로 추봉(追封)하고 조정
(朝廷)이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하고저 하였으나 무신(武臣) 김
훈(金訓)등의 저지(沮止)하여실행하지 못하였다. 공(公)의 배부인
(配夫人)은 라주정씨(羅州丁氏) 묘(墓)는 웅천(熊川) 있다.
4 世 휘(諱) 용기(用杞) : (廣評侍郞 車季隣의 子)
자(字) 경하(擎厦) 벼슬은 고려 8대 현종왕조(顯宗王朝
:1009~1051)에 내사(內史), 혹은 문하시랑(門下侍郞)이라고 말한다.
무신(武臣) 김훈(金訓) 등이 문신(文臣)을 대살(大殺)하고 황보유의
(皇甫兪義 :高麗朝의 官職 平章事를 역밈)을 차례로 죽일 때 무신(武臣)이
삼사(三司 : 고려 때 전곡(錢穀)의 출납(出納), 회계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를
표열(布列 =포진(布陳) : 여기저기 늘어놓음)하여 조정(朝廷)의 기강(紀
綱)이 불고(不古 : 순박((淳朴)하지 않음)하니 공(公)은 분개(憤慨)를 이
기지 못하여 이자빈(李子彬)과 함께 임금의 수레를 경호(警護)하고
서경대연(西京大宴)에 문무백관(文武百官), 김훈(金訓)이 술 취함을
틈타 김훈(金訓) 등을 죽이고 조정기강(朝廷紀綱)을 바로 세웠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장씨(張氏) 묘(墓)는 웅천(熊川) 미좌원
(未坐原)에 공(公)과 함께 선영하(先塋下)에 있다.
5 世 휘(諱) 백소(伯炤) : (內史門下侍郞 車用杞의 子)
자(字) 여명(汝明) 호(號)잠연(潛淵) 벼슬은 고려 11대 문종왕
조(文宗王朝 : 1048~1083)에 시어중승(侍御中丞)이며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에게 수업(受業 : 기술이나 학업의 가르침을 받음)하였으며 만세
(晩歲 = 晩年)에 퇴거(退居 : 벼슬에서 물러남)하고 스스로 호(號)를 잠
연(潛淵)이라 하고 조객(釣客 : 낙시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고려 13대
선종왕(宣宗王)이 공(公)에게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봉(追封)하였
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김씨(金氏)이며 묘역(墓域)은 성남
(城南) 적현(赤峴)이라 구보기록(舊譜記錄)이 있다.
6 世 휘(諱) 무강(茂鋼) : (禮部尙書 車伯炤의 子)
자(字) 양기(良器) 시호(諡號) 문숙공(文肅公)이며 벼슬은 고려
13대 선종왕조(宣宗王朝 : 1083~1094)에 평장사(平章事)요 나라에
서 송(宋)나라와 더불어 오래 관계를 끊을 때 공(公)은 일상(日常)
한스러워 하고 통호(通好 : 친교를 맺음)를 원대(遠大 :규모나 생각 따위가
큼)히 주장(主張)하고 은밀(隱密)히 수서(修書 : 편지를 씀)하여 사람
을 보내어 항주(杭州 : 절강성(浙江省)) 지사(知事) 소식(蘇軾)에 이르
러 송(宋)나라가 먼저 관리를 보내어 오면 일국(一國)이 기뻐할 경
사(慶事)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 하니 이로부터 송(宋)나라가 정월
(正月) 초하루에 곧 통신(通信)을 하여 행(行)하였다. 공(公)의 배
부인(配夫人)은 문씨(文氏) 묘역(墓域)은 성남(城南) 적현(赤峴)이
라 구보기록(舊譜記錄)하고 있다.
7 世 휘(諱) 계한(稽漢) : (平章事 車茂鋼의 子)
자(字) 청숙(淸肅) 벼슬은 고려 15대 숙종왕조(肅宗王朝 :
1095~1105)에 서평백(西平伯)이시며 공(公)은 당시(當時)애 현재(賢
宰)로 백성을 다스리고 군(郡)을 다스릴 때 청백(淸白)하여 사람들
이 조광한(趙廣漢)의 경조(京兆 : 한(漢) 때 경기(京畿)의 별칭(別稱)임)를
다스림을 일컬어 말 하였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정씨(鄭氏)
이다.
8 世 휘(諱) 자순(子順) : (西平伯 車稽漢의 子)
자(字) 배천(配天) 호(號) 추강(秋江)이며 벼슬은 고려 16대 예
종왕조(睿宗王朝 :1105~1122)에 유주백(儒州伯)이며 공(公)은 곽여(郭
輿 : 자(字) 몽득(夢得) 시호(諡號) 진정(眞靜) 관직(官職)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다.)
와 벗으로 사이가 좋았으나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하였다. 공
(公)의 배부인(配夫人)은 밀양이씨(密陽異氏)이며 정승(政丞) 이유충
(異惟忠)의 딸이며,
※ 이유충(異惟忠)은 1060년(문종14년)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서 중추원사(中樞
院使)가 되고 이듬해 형부상서(刑部尙書)·참지정사(參知政事)·상주국(上柱國)을 지내고,
1962년(문종16년)에 판삼사사(判三司事)· 서북면(西北面)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에 올라
서여진(西女眞)의 영원장군(寧遠將軍) 고지지(高之智)와 그 무리에게 향연(饗宴)을 베풀어
위무(慰撫)했으며, 그 뒤 수사공(守司空)을 거쳐 문종(文宗) 26년에 중서시랑(中書侍郞)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러 그해에 죽었다.
9 世 휘(諱) 유개(幼塏) : (儒州伯 車子順의 子)
자(字) 이선(而善)이며 벼슬은 고려 17대 인종왕조(仁宗王朝 :
1122년~1146년)에 간의대부(諫議大夫) 평장사(平章事)이다. 이자겸
(李資謙)· 척준경(拓俊京)이 조정(朝廷)을 선동(煽動)할 때 사특한
내란(內亂)을 미루어 헤아릴 수 없으며 공(公)은 정언(正言) 정지
상(鄭知祥)과 함께 직간(直諫)으로 가로대 척준경(拓俊京) 등는 나
라로부터 방자(放恣)하여 군명(君命)을 경멸함이 있으니 만세(萬
世)의 죄(罪)라 죽일 것을 청(請)하여서 이에 척준경(拓俊京)을 쫓
아 내었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수녕위씨(遂寧魏氏)이며 정
승(政丞) 위계정(魏繼廷)의 딸이다.
※ 위계정(魏繼廷)은 시호(諡號) 충렬(忠烈) 관직(官職)은 수태보(守太保)이며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좌보궐지제고(左輔闕知制誥)·어사중승(御史中丞)을 지내고
1085년 선종(宣宗) 2년 왕(王) 총희(寵姬) 만춘(萬春)이 집을 크게 짓는 것을 규탄(糾
彈), 이를 허물 것을 청했다. 1091년 예부시랑(禮部侍郞)으로서 사은겸진봉사(謝恩兼進奉
使) 이자의(李資義)와 함께 송(宋)나라에 다녀왔다. 숙종초(肅宗初)에 예부(禮部)·이부(吏
部)의 상서(尙書), 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를 거쳐, 1101년에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
문하(同中書門下)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뒤 1104년 문하시랑(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겸(兼) 태자소사(太子少師), 다듬해 태자태부(太子太傅)가 되었다. 1105년에 예종(睿宗)이
즉위(卽位)하자 수태위(守太尉)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주국(上柱國)을 역임한 후 수태보
(守太保)로 승진, 그후 누차 퇴관(退官)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을 받지 못 하여T으며
죽은 후 예종(睿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10 世 휘(諱) 중규(仲規) : (諫議大夫平章事 車幼塏의 子)
자(字) 이칙(彛則) 시호(諡號) 충간(忠簡)이시며 벼슬은 고려 18
대 의종왕조(毅宗王朝 : 1146년~1170년)에 삼한대장군(三韓大將軍)이
며, 고려 19대 명종왕조(明宗王朝 : 1170년~1197년)에 병마사(兵馬
使)이다. 려사강목(麗史綱目)에 운(云)하데 1174년 고려 19대 명
종왕(明宗王) 4년 병오(兵午) 추(秋) 9월에 서경유수(西京留守) 조
위총(趙位寵)이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을
죽이고 동북양계(東北兩界)의 군사를 격문(檄文)으로 불어니 절령
이북(岊嶺以北)의 40여성(餘城)이 모두 향응(響應 :찬성함)를 하는데
홀로 연주(延州)사람 현덕수(玄德秀)는 그 아버지 도령(都領) 현담
윤(玄覃胤)과 함께 조위총(趙位寵)을 성죄(聲罪 : 상대방의 죄(罪)를 세상
에 발표함)하고 주장(州將)들을 권유(勸誘 : 권장하여 유도함)하여 굳게
지키고 응(應)하지 아니 하였다. 때마침 서북면(西北面) 병마사(兵
馬使) 차중규(車仲規)는 연주(延州)로 나아가 운반역(雲畔驛)에 이
르러루일(累日)을 거전(拒戰 : 항거하여 싸움)하였으나 원병(援兵)이
이르지 아니하고 적(賊)에 급박(急迫)한 바 곧 순절(殉節)하였고
그 휘하분대(麾下分隊 : 장수의 깃발 아래 분대)에 어사(御史) 임성재(林
惺材)·록사(錄事) 이당취(李唐就) 등은 인(印)을 감추고 연주(延州)
에 들어가 말하기를 병마사(兵馬使) 차중규(車仲規)는 이미 죽었으
니 우리들은 돌아갈 곳이 없다고 운운(云云 : 이러이러함)하니 조정
(朝廷)에서 평장(平章) 윤인첨(尹鱗瞻)을 파견(派遣)하여 조위총(趙
位寵)의 병사(兵士)를 격파(擊破)한 후 조정(朝廷)에서 병부상서(兵
部尙書)로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 충간(忠簡)을 내렸다. 공(公)
의 배부인(配夫人) 동주최씨(東州崔氏)이며 평장사(平章事) 문숙공
(文淑公) 최유청(崔惟淸)의 딸이다.
※ 최유청(崔惟淸)은 자(字) 직재(直哉) 시호(諡號) 문숙(文淑) 관직(官職)은 평장사(平
章事)로 고려 16대 예종왕조(睿宗王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1132년 인종(仁宗) 10년 임자(壬子)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 진주사(陳奏
使)가 되어 송(宋)나라에 다녀왔다. 1149년 의종(毅宗) 3년 기사(己巳)에 지추밀원사(知
樞密院事)· 판삼사사(判三司事)·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판상서
(判尙書)·형부사(刑部 事)가 도었고 1150년 의종(毅宗) 4년 경오(庚午)에 중서시랑동중
서문하(中書侍郞同中書門下)·평장사(平章事)로 1151년에 판병부사(判兵部事)를 겸직(兼
職)했다. 1161년에 봉원전대학사(奉元殿大學士)를 거쳐 1172년 명종(明宗) 2년 임진(壬
辰)에 수사공(守司空)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 판예부사(判禮部事)로 치임(致任)했
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불경(佛經)에 조예(造詣) 깊으며 글씨도 잘 썼다.
11 世 휘(諱) 거수(擧首) : (三韓大將軍兵部尙書 車仲規의 子)
자(字) 원좌(元佐)이며 벼슬은 고려 19대 명종왕조(明宗王朝 :
1170년~1197년)에 태복시사(太僕侍事)이다. 려사(麗史)에 가로대 공
(公)은 평소(平素)에 지식(智識)과 식견(識見)이 있어서 일찍 사관
(史館)에 있을 때 어린 아들 약춘(若椿)과 약송(若松)에게 가로대
약춘(若椿)은 문예(文藝)로 입신(立身)할 것이니 근학(勤學)하고,
약송(若松)은 무재(武才)로 이름이 들어날 것이라 하였다. 그 후
에 약춘(若椿)은 벼슬에 등과(登科)하여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이
르렀고 약송(若松)은 금위(禁衛)에 출신(出身)하여 평장사(平章事)
에 올랐다, 고려열전(高麗列傳)에 의하면 차거수(車擧首)는 사관(史
館)의 국사(國史)를 감수(監修)하고 시중(侍中) 겸(兼) 정이품(正二
品)이 되어 있으니 공(公)은 또 재상(宰相)이 하는 근본(根本)을 가
히 알더라. 태복시사(太僕侍事)를 추측(推測)한즉 공(公)의 중년(中
年)에 경력(經歷)이다. 다만 고려멸망(高麗滅亡)으로 가문(家門)의
적족지화(赤族之禍)로 문헌(文獻)의 유일(遺佚 : 흩어져 없어짐)한 연
고(然故)로『車

雲운
巖암
先선
生생


寃원
綠록
』에 겨우 태복시사(太僕侍事)
로 쓴 것이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남평문씨(南平文氏)이며
부(父)는 평장사(平章事) 충숙공(忠肅公) 문극렴(文克謙)이다.
※ 문극겸(文克謙)은 자(字) 덕병(德柄) 시호(諡號) 충숙(忠肅) 관직(官職) 평장사(平章事)
이며 음보(蔭補)로 산정도감판관(刪定都監判官)으로 있다가 고려 18대 의종왕(毅宗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及第),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환자(宦者) 백선연(白善淵)을 탄핵(彈劾)
하다가 도리어 황주판관(黃州判官)·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 좌천(左遷)되었으나 이는 언
로(言路)를 막는 일이라는 유사(有司)의 상주(上奏)로 합문지후(閤門祗候)로 전임(轉任).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로 승진되었다. 1170년 의종(毅宗) 24년경인(庚寅)에 정중부(鄭仲
夫)의 난(亂) 때 앞서 좌정언(左正言)으로 직언(直言)하여 좌천된 일로 해서 화(禍)를 면
했고 의종왕(毅宗王) 역시 그의 말을 쫓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였다 하며 이 해에 고려
19대 명종왕(明宗王)이 즉위(卽位)하자 우승선(右承宣)·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어 많은
문신(文臣)들을 화(禍)에서 구해내고, 무신(武臣)들로부터는 고사(故事)의 자문(諮問)을
받았고, 용호대장군(龍虎大將軍)을겸임(兼任), 후에 상장군(上將軍)까지 겸(兼)하여 문무
(文武) 겸직(兼職)의 시초(始初)가 되었다. 대부소경(大府少卿)·예부시랑(禮部侍郞)·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태자태보(太子太保)를 거쳐 1183년 명종(眀宗) 13년 계묘(癸卯)에 중서
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판호부사(判戶部事)가 되고, 1187텬 명종(眀宗) 17년 정미
(丁未)에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가 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고려 23대 고
종왕조(高宗王朝)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추증(追贈), 고
려 19대 명종왕(眀宗王)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12 世 휘(諱) 약춘(若椿) : (太僕寺事 車擧首의 長子)
자(字) 교년(喬年)이며 벼슬은 고려 20대 신종왕조(神宗王朝 :
1197년~1204년)에 병부시랑(兵部侍郞)이며, 공(公)은 특히 품행(品行)
이 정직(正直)하였고 최충헌(崔忠獻)이 조신(朝臣)을 크게 죽이는
변난(變亂)을 당하여 공(公)은 조신(朝臣)을 힘써 구(救)하였고, 최
충헌(崔忠獻)을 깊은 밤에 자객(刺客)으로 하여금 살해(殺害)하였
다. 그리고 송경야사(松京野史)를 살펴보면 병부시랑(兵部侍郞) 차
약춘(車若椿) 자(字) 교년(喬年)은 권신(權臣) 최충헌(崔忠獻)을 살
해(殺害)하였다라고 기록(記錄)되어 있다. 공(公)의 배부인(配夫
人) 파평윤씨(坡平尹氏)이며 부(父)는 정승(政丞) 윤인첨(尹鱗瞻)이
시다.
※ 윤인첨(尹鱗瞻) : 자(字) 태조(胎兆) 시호(諡號) 문정(文定) 관직(官職) 태사(太師)이다.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고려 18대 의종왕조(毅宗王朝)에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1153년
의종(毅宗) 7년 계유(癸酉)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금
(金)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기거주(起居注)를 거쳐 형부시랑(刑部侍郞)으로 서북면병마부
사(西北面兵馬副使)가 되고 1169년 의종(毅宗) 23년 기축(己丑)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
夫)가 되었다. 1171년 신묘(辛卯)에 고려 19대 명종왕(眀宗王)이 즉위(卽位)하자 국자감
대사성(國資監大司成)·참지정사판병부사(參知政事判兵部事)를 거쳐 중서시랑평장사(中書
侍郞平章事)로서 1172년 명종(眀宗) 2년 임진(壬辰)에 동북면병마판사(東北面兵馬判事)
겸(兼) 중군병마판사(中軍兵馬判事)가 되었다. 그후 상장군(上將軍)·수태사(守太師)를 거
쳐 조위총(趙位寵)의 난(亂)에는 원수(元帥)가 되어 삼군(三軍)을 이끌고 절령(岊嶺)에서
반군(叛軍)과 싸워 패퇴(敗退)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기탁성(奇卓城)·진준(陳俊) 등과 출정
(出征)하여 서경(西京)을 평정(平定)하고 조위총(趙位寵)을 죽였다. 그 공(功)으로 추충정
난광국공신(推忠靖亂匡國功臣) 상주국감(上柱國監) 수국사(修國史)가 되었다. 수태사문하
시중(守太師門下侍中)에 추증(追贈) 명종묘정(眀宗廟庭)에 배향(配享)하였음.
12 世 휘(諱) 약송(若松) : (太僕寺事 車擧首의 次子)
자(字) 대년(大年) 호(號) 호암(虎巖)이며 벼슬은 고려 19대 명
종왕조(明宗王朝 :1170년~1197년)에 장군(將軍), 고려 20대신종왕조
(神宗王朝 : 1197년~1204년)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사공(司空)·개
봉의동삼사(開封儀同三司)·수태위(守太尉)·중서시랑(中書侍郞) 동평
장사(同平章事)이며 고려 21대 희종왕조(熙宗王朝 :1204년~1211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이다.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려사(麗史)에 가로
데 고려 19대 명종(明宗) 16 병오(丙午) 1186년 10월에 장군(將
軍) 차약송(車若松) 등 43사람이 무관(武官)으로서 모두 문간(文
官)을 겸직(兼職)하였고 명종(明宗) 17년 정미(丁未) 1187년 1월
에 장군(將軍)으로서 김진방(金進方)과 같은 권세(權勢)이며, 1197
년 정사(丁巳) 11월 계사(癸巳)에 고려 20대 신종왕(神宗王 :1197
년~1204년)이 즉위(卽位)하고, 채순희(蔡順禧)와 함께 아울어 추밀
원부사(樞密院副使)가 되었고, 신종(神宗) 4년 신유(辛酉) 1201년
12월에 기홍수(奇洪壽)와 함께 같이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평
장사(同中書平章事)가 되었고, 1203년 신종(神宗) 6년 계해(癸亥)
12월에 중서시랑(中書侍郞) 동평장사(同平章事)가 되었다. 1204년
갑자(甲子)에 고려 21대 희종왕(熙宗王 :1204년~1211년)이 즉위(卽
位)하고, 8월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어 죽었다. 공(公)의 배부
인(配夫人)은 소씨(邵氏)이며 부(父)는 병마사(兵馬使) 소억(邵億)
이며 조(祖)는 소사석(邵師奭)이다.
13 世 휘(諱) 덕위(德威) :(兵部侍郞 車若椿의 子)
자(字) 영국(寧國) 벼슬은 고려 21대 희종왕조(熙宗王朝 : 1204
넌~1211년)에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이다.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살펴보면 고려 23대 고종(高宗) 3년 병자(丙子 :1216년) 7월에 거
란(契丹)이 끼친 종족(種族) 금산왕자(金山王子) · 금시왕자(金始王
子)가 서변(西邊)을 침략(侵略)하니 임금은 삭주(朔州) 분도장군(分
道將軍) 노인수(盧仁綏) · 창주(昌州) 분도장군(分道將軍) 차덕위
(車德威)의 병사(兵士)로서 능히 방어(防禦)를 못하니 그에 아들
차척(車倜)을 우군병마사(右軍兵馬使)로 하고 거란(契丹)을 격파(擊
破)하여 북경(北境)을 안정(安定)케 하였다. 공(公)의 배부인(配夫
人)은 양천허씨(陽川許氏)이며 부(父)는 중찬(中贊) 허승(許升)의
딸이다.
13 世 휘(諱) 덕재(德載) : (中書侍郞同平章事 車若松의 長子)
자(字) 후국(厚國) 시호(諡號) 충장(忠莊) 벼슬은 고려 21대 희
종왕조(熙宗王朝)에 병부상서외랑(兵部尙書外郞)으로 국학(國學)에
들어가서 보복(補服 : 청대(靑代에 문무관(文武官)의 예복(禮服)을 말함)을 재
계(齋戒 :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부정을 멀리함)하고 받아 들렸다. 공(公)
의 배부인(配夫人)은 조씨(曺氏)이며 부(父)는 조장(曺璋)이다.
13 世 휘(諱) 덕련(德連) : (中書侍郞同平章事 車若松의 次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류품(流品)인데 고려 멸망(滅亡)하고
조선개국(朝鮮開國)의 초기(初期)에 사얼(四孼 : 鄭道傳·咸傅霖·趙英珪·河
崙)의 음모(陰謀)로 왕자난(王子亂)에 연루(連累)시켜 역적누명(逆
賊陋名)으로 적족지화(赤族之禍)를 당할 때 보판(譜版) 및 문헌(文
獻)의 분탕(焚蕩)으로 사적실전(事蹟失傳)하였음.
14 世 휘(諱) 척(倜) : (樞密院副使御史大夫 車德威의 子)
자(字) 사고(士固) 호(號) 불기당(不羈堂)이며 벼슬은 고려 21대
희종왕조(熙宗王朝 : 1204년~1211년)에 참정(參政)이며, 고려 22대
강종조(康宗朝 :1211년~1212년)를 거쳐 고려 23대 고종조(高宗朝
:1213년~1259년)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어사대부(御史大夫)·좌승
선(左丞宣)·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를 역임(歷任)하였다. 려사(麗史)
에 살펴 가로대 고려 23대 고종왕(高宗王) 3년 병자(丙子 :1216년)
8월에 거란병(契丹兵)이 침범(侵犯)해 오니 상장군(上將軍) 노원순
(盧元純)·오응부(吳膺富)·김취려(金就礪)로 삼군병마사(三軍兵馬使)
로 하여 거란병(契丹兵)을 막게 하였다. 또 노원순(盧元純)이 조정
(朝廷)에 제사(濟師 :군대를 증원(增援)함)를 청(請)하여 좌승선(左丞宣)
차척(車倜)으로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로 하고 김취려(金就礪)로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로 하고 상장군(上將軍) 송신경(宋臣卿)으
로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하였더니 거란병(契丹兵)은 창주(昌
州)로부터 연주(延州 :지금寧邊)로 옮겨 주둔(駐屯)하여 개평(開平)·원
림(原林)의 양역(兩驛)에서 삼군(三軍)이 함께 싸움을 하였다. 연주
(延州) 신리(新里)에서 이백급(二百級)을 참수(斬首)하였고 익일(翌
日)의 싸움에 조종술(朝宗戌 : 귀복(歸服)하는 병사)를 칠백육십여급(七
百六十餘級)을 참수(斬首)하고 축산(畜産)과 병장(兵仗)을 얻음을
승리(勝利)의 기록(記錄)에 감당(堪當)하지 못 하드라. 이로부터 적
(賊)은 다시 분병(分兵)을 못하고 개평역(開平驛)에 모아 주둔(駐
屯)하니 격파(擊破)하고 북경(北境)을 안정(安定)하였다. 고종(高
宗) 7년 경진(庚辰 : 1220년) 3월에 차척(車倜)을 양이(量移 : 멀리 유
배(流配)된 사람이 사면(赦免)으로 감형(減刑)되어 가까운곳으로 옮김)하였는데 이
것은 먼저 공(公)은 최우(崔瑀)에 입이(立異 : 배반함)로 더불어 라주
(羅州)로 귀양을 입었던 것이다. 고종(高宗) 17년 경인(庚寅 : 1230
년) 춘(春) 1월 경오일(庚午日)에 차척(車倜)은 추밀원어사대부(樞
密院御史大夫)가 되었고 추(秋) 9월 무신일(戊申日)에 임금이 묘통
사(妙通寺)에 거동(擧動)에 제왕(帝王)이 문밖에 이르러 말이 놀
래어 땅에 떨어졌다.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왕유(王猷)는 용행(龍
行 : 매우빠름의 비유)으로 끌어서 임금의 수레에 호종(扈從)이 삼가
지 못하여 하옥(下獄)하였고, 어사대부(御史大夫) 차척(車倜)은 파
직(罷職)되었다. 려사(麗史)를 살펴보면 고종(高宗) 21년 갑오(甲午
: 1234년)춘(春) 2월에 임금이 봉은사(奉恩寺)에 거동(擧動)하여 연
등(燕燈)을 본 사찰(寺刹)은 곧 참정(參政) 차척(車倜)의 옛 집이
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언양김씨(彦陽金氏)이며 부(父)는
평장사(平章事) 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이며 조부(祖父)는
예부상서(禮部尙書) 김부(金富)요 증조부(曾祖父)는 중랑장(中郞將)
김언연(金彦連)이다.
※ 김취려(金就礪) : 시호(諡號) 위열(威烈) 관직(官職) 수태위(守太尉)이며 음보(蔭補)로 정
위(正尉)·동궁위(東宮衛)를 거쳐 대장군(大將軍)이 되었다. 1216년 고종(高宗) 3년 병자(丙
子)에 거란병(契丹兵)이 침입하자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로 그들을 크게 물리쳐 금오위상
장군(金吾衛上將軍)이 되고, 1217년 고종(高宗) 4년 정축(丁丑)에 거란병(契丹兵)이 다시
침입하자 2년간에 걸친 격전(激戰) 끝에 거란(契丹)의 유종(遺種: 끼친 종족)을 분쇄(粉碎)했
다. 1222년 고종(高宗) 9년 임오(壬午)에 참지정사(參知政事)·판호부사(判戶部事)를 지냈
으며 그 후 수태위(守太尉)·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판병부사(判兵部事)에 이르렀
다.
14 世 휘(諱) 신(信) : (兵部尙書外郞 車德載의 子)
자(字) 사인(士仁) 호(號) 연주(烟洲)이며 고려조(高麗朝)에 병
부상서외랑(兵部尙書外郞) 차덕재(車德載)의 아들이며 벼슬은 고려
25대 충열왕조(忠烈王朝 : 1274년~1308년)에 첨의찬성사(僉議贊成
事)·검교사도자정원사(檢校司徒資政院事)·상장군시랑(上將軍侍郞)이
다. 려사(麗史)에 가로대 1276년 충열왕(忠烈王) 2년 병자(丙子)
추(秋) 7월 정유일(丁酉日)에 장군(將軍) 차신(車信)은 원(元)으로
부터 돌아올 때 원나라 임금은 정중(正重)한 비단 70필(匹)을 내렸
고. 1277년 충열왕(忠烈王) 3년 정축(丁丑) 6월 경신일(庚申日)에
또 장군(將軍) 차신(車信)은 원(元)나라에 가서 호피(虎皮)를 헌납
(獻納)하였고, 1277년 정축(丁丑) 윤(閏) 11월 병자일(丙子日)에
장군(將軍) 차신(車信)을 안동(安東)에 보내어 세자(世子)의 태(胎)
를 감추었고, 1287년 충열왕(忠烈王) 13년 정해(丁亥)10월 경오일
(庚午日)에 공주(公主)·세자(世子)는 장군(將軍) 차신(車信)의 집으
로 거처(居處)를 옮기었고, 충열왕(忠烈王) 14년 무자(戊子 : 1288
년) 11월 경자일(庚子日)에 차신(車信)은 상장군(上將軍)으로 원
(元)나라에 갔으며, 충열왕(忠烈王) 16년 경인(庚寅 :1290년)9월 무
진일(戊辰日)에 또 상장군(上將軍)으로 원(元)나라에 갔었다. 충열
왕(忠烈王) 23년 정유(丁酉 : 1297년) 8월 신축일(辛丑日)에 차신(車
信)은 찬성(贊成)으로 세자(世子)를 보좌(輔佐)의 스승이 되었고,
충열왕(忠烈王) 24년 무술(戊戌 :1298년)2월 을사일(乙巳日)에 임금
의 욕심(欲心)으로 차신(車信)의 집을 궁(宮)으로 할려고 이미 일
을 일으키니 상지자(相地者 :지질(地質)이나 지형(地形)을 관찰하는 사람)가
불길(不吉)하다. 하나 첨의밀직사(僉議密直司)에 명(命)하여 왕궁
(王宮)으로 하였고 1298년 5월 신묘일(辛卯日)에 이지저(李之氐)
와 함께 아울러 검교사도자정원사(檢校司徒資政院事)가 되었고,
1298년 7월 무술일(戊戌日)에 관제(官制)를 고쳐 첨의찬성사(僉
議贊成事)로 하였다. 충열왕(忠烈王) 28년 임인(壬寅 :1302년) 추
(秋) 7월 신축일(辛丑日)에 시랑찬성사(侍郞贊成事)가 되었다. 공
(公)의 배부인(配夫人)은 곡부공씨(曲阜孔氏)이며 부(父)는 판삼사
사(判三司事) 공유(孔愉)이며, 공(公)의 서랑(婿郞)은 교동인(喬桐
人) 좌정승(左政丞) 인승단(印承旦)이며 그에 아들은 병마사(兵馬
使) 인 당(印 璫)이며 그에 아들 장자(長子)는 전리판서(典理判書)
인 안(印 安)·차자(次子) 좌윤(左尹) 인 장(印 章)·삼자(三子) 이부
시랑(吏部侍郞) 인 해(印 海)이다.
※ 공 유(孔 愉) 고려 관직(官職) 판삼사사(判三司事)이며 1270년 원종(元宗) 11년 경오(庚
午)에 삼별초(三別抄)의 난(亂) 때 장군(將軍)으로서 라주(羅州)가 7일간이나 공격(攻
擊)을 당함에도 이를 구(救)하지 않았다 하여 파직(罷職)을 당했다가 1272년 원종
(元宗) 13년 임신(壬申)에 다시 기용(起用)되어 안남도호부사(安南都護府使)가 되었
으나 삼별초(三別抄)에 피체(被逮)되었다. 1273년 원종 14년 계유(癸酉)에 돌아와
충열왕초(忠烈王初)에 대장군(大將軍)이 되고, 그 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에
올라 1284년 충열왕(忠烈王) 10년 갑신(甲申)에 성절사(聖節使)로 원(元)나라에 다
녀왔으며, 1287년 충열왕 13년 정해(丁亥)에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이르렀다.
※ 인승단(印承旦): 자(字) 여옥(汝玉) 관직(官職) 좌정승(左政丞)이며 음보(蔭補)로 만호(萬
戶)를 거쳐 1345년 고려 29대 충목왕(忠穆王) 원년 을유(乙酉)에 좌정승(左政丞)이
되었다. 공민왕초(恭愍王初)에 연안부원군(延安府院君)에 봉(封)해졌을 때 전민변정
도감(田民辨整都監)이 설치(設置)되어 권호(權豪)들이 사취(私取)한 공전(公田)이 회
수(回收)되자 막대(莫大)한 토지(土地)를 소유(所有)한 그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
監)의 폐지를 건의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그후 연안백(延安伯)에 봉해졌다.
인 당(印 璫) : 관직(官職) 병마사(兵馬使)이며 좌정승(左政丞) 인승단(印承旦)의 아들이
다. 공(公)은 고려 충혜왕(忠惠王)에서 공민왕(恭愍王)까지 4대왕조에 걸쳐 문과대언
(文科代言)·참지정사(參知政事)·만호(萬戶)·포왜사(捕倭使) 등 요직(要職)을 역임한 공
신(功臣)이다. 1345년 충목왕(忠穆王) 1년 을유(乙酉)에 밀직사(密直使)가 되었고,
서남면령만호(西南面令萬戶)로서 1351년 충정왕(忠定王) 3년 신묘(辛卯)에 이권둔
(李權屯)과 함께 자연도(紫燕島)·삼목도(三木島)에 침입(侵入)한 왜구(倭寇)를 서강(西
江)에서 막았다. 1354년 공민왕 3년 갑오(甲午)에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에봉(封)해
져 내란중(內亂中)인 원(元)나라에 원군(援軍)으로 파견되었다가 평정(平定)한 후 귀
국(歸國)하여 전라도만호(全羅道萬戶)가 되어 왜구(倭寇)를 격파(擊破)하였고, 1355
년 공민왕 4년 을미(乙未)에 정남만호(征南萬戶)로 원군(元軍)을 따라 홍건적(紅巾
賊)을 격퇴(擊退)했으며, 1356년 공민왕 5년 병신(丙申)에첨의평리(僉議平理)가 되었
다. 이 해에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쌍성(雙城)을 수복(收復)하고, 파사
부(婆娑府)의 3첨(站=驛)을 무찔러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으나 원제(元帝)가 국
경소요(國境騷擾 :국경을 어지럽힘)를 이유로 80만 대군(大軍)으로 문책하겠다고 위
협해 오자 왕이 이에 굴복하여 사죄로서 전책임을 지고 사형(死刑)을 당했다.
인 안(印 安) : 관직(官職) 전의판서(典理判書)이며 병마사(兵馬使) 인 당(印 璫)의 장자(長
子)이다. 1354년 공민왕 3년 갑오(甲午)에 연안군(延安君)에 봉(封)해졌고 원(元)나
라에 원군(援軍)으로 나가고 우적(高郵賊)을 토평(討平)했다. 1361년 공민왕 10년
신축(辛丑)에 홍건적난(紅巾賊亂) 때 방어(防禦)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理由)로 감찰
사(監察司)의 탄핵(彈劾)을 받아 유배(流配)되었다.
인 장(印 章) : 관직(官職) 이부판서(吏部判書)이며, 병마사(兵馬使) 인 당(印 璫)의 차자(次
子)이다. 우왕(禑王) 때 양평원수(楊廣道副元帥)가 되어 왕안덕(王安德)·홍인계(洪仁
桂)·김덕제(金德齊) 등과 함께 영주(寧州)·아주(牙州) 등지에서 왜구(倭寇)를 격퇴(擊
退)하고 공(功)을 세웠다.
인 해(印 海) : 관직(官職) 이부시랑(吏部侍郞)이며, 병마사(兵馬使) 인 당(印 璫)의 삼자
(三子)이다.
14 世 휘(諱) 항(伉) : (流品 車德連의 子)
고려멸망(高麗滅亡)과 조선개국(朝鮮開國)의 초(初)에 사얼(四孼
: 鄭道傳·咸傅霖·趙英珪·河崙)의 음모(陰謀)하여 이태조(李太祖) 7년 무
인(戊寅)에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실세(實勢)인 이방원(李芳遠)에게
하륜(河崙)이 무고(誣告)하여 왕자난(王子亂)에 연루(連累)시키고
역적누명(逆賊陋名)으로 적족지화(赤族之禍)로 보판(譜版) 및 문헌
분탕(文獻焚蕩)으로 공(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으로 알 수 없다.
15 世 휘(諱) 수하(受河) : (樞密院副使御史大夫 車倜의 長子)
자(字) 성청(聖淸)이며 차척(車倜)의 큰 아들이며 고려 23대 고
종왕조(高宗王祖 :1213년~1259년)에 중랑장(中郞將)이시다. 구보(舊
譜)에운(云)하데 장군(將軍) 노지정(盧之正)은 바른 도리(道理)인데
최우(崔瑀)에게 해(害)함을 입었으나 중랑장(中郞將) 차수하(車受
河)는 구조(救助)함을 얻지 못하여 마침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歸
鄕)할 때 왕후류씨(王后柳氏)는 중랑장(中郞將) 차수하(車受河)를
초친(椒親 : 초방지친(椒房之親) 즉 후비(后妃)의 겨레붙이)인 내시(內侍)로 하
여금 밀유(密諭 :밀지(密旨))로 나라를 돕는 것이 옳다하여 중랑장(中
郞將) 차수하(車受河)는 부득이(不得已) 임금이 탄 수레의 수행(隨
行)에 교목(喬木)으로 통하였다. .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안동
권씨(安東權氏)이며 부(父)는 지추밀(知樞密) 권준(權濬)이다.
15 世 휘(諱) 수동(受童) : (樞密院副使御史大夫 車倜의 次子)
공(公)은 고려 때 차척(車倜)의 차자(次子)이며 벼슬은 고려조
(高麗朝)에 시중(侍中)인데 고려멸망(高麗滅亡)과 조선개국(朝鮮開
國)의 초(初)에 정도전(鄭道傳)이 국사판(國史版)을 천삭날조(擅削
捏造)하고 사얼(四孼)들의 음모(陰謀)와 무고(誣告)로 왕자난(王子
亂)에 연루(連累)시켜 적족지화(赤族之禍)를 당할 때 보판(譜版) 및
문헌분탕(文獻焚蕩)으로 공(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 함.
15 世 휘(諱) 수락(受洛) : (僉議贊成事上將軍侍郞 車信의 子)
공(公)은 차신(車信)의 아들이며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의 총
제(摠制)이며 적족지화(赤族之禍)를 당할 때 보찬(譜版)과 문헌분
탕(文獻焚蕩)으로 공(公)의 행적(行蹟失傳).
15 세 휘(諱) 수홍(受泓) : (車伉의 長子)
고려멸망(高麗滅亡)과 조선개국초(高麗開國初)에 사얼(四孼 : 鄭
道傳·咸傅霖·趙英珪·河崙)의 음모(陰謀)와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실권자
(實權者) 이방원(李芳遠)에게 하륜(河崙)의 무고(誣告) 왕자난(王子
亂)에 연루(連累), 역적누명(逆賊陋名)으로 적족지화(赤族之禍)로
보판(譜版) 및 문헌분탕(文獻焚蕩)되어 공(公)의 행적실전(行蹟失
傳)함.
15 世 휘(諱) 수택(受澤) : (車伉의 次子)
위의 기록(記錄)과 같이 공(公)의 행적(行蹟)은 실전(失傳)되
었다.
16 世 휘(諱) 송우(松祐) : (中郞將 車受河의 子)
자(字)는 정좌(廷佐) 시호(諡號)는 세은(世恩)이시며 벼슬은 고
려 23대 고종왕조(高宗王朝 : 1213년~1259년)에 판사복시사랑장(判司
僕寺事郞將) 동정내시윤(同正內侍尹) 중흥백(中興伯)이며, 고려 고
종왕조(高宗王朝)에 훈노(勳老)이다. 1258년 고종(高宗) 45년 무오
(戊午) 3월 병자일(丙子日)에 최충헌(崔忠獻)의 손자(孫子) 최의(崔
竩)는 조정(朝廷)의 기강(紀綱)을 문난(紊亂)케 하고 신하(臣下)가
아닌 싹이 이미 국중(國中 : 나라 안)에 들어 나서 중흥백(中興伯)
차송우(車松祐)는 대사성(大司成) 류경(柳璥)·별장(別將) 김인준(金
仁俊) 등과 함께 최의(崔竩)를 소제(掃除=소탕(掃蕩)함)하여 무단정권
(武斷政權)을 타도(打倒)하고 다시 왕실(王室)을 바로 잡으니 중흥
백(中興伯) 차송우(車松祐)는 위사훈(衛社勳)에 기록(記錄)하고 사
는 곳 염주현(塩州縣)을 높여 주(州)로 하였다. 중흥백(中興伯) 차
송우(車松祐)게서 원조(元朝)에 들어가 도적(盜賊)을 토벌(討伐)한
공(功)이 있어 금은제기(金銀祭器)를 은사(恩賜 : 임금이 내려줌)하였
고 특별히 도총제(都摠制)를 명(命)하여 시호(諡號) 세은(世恩)을
내렸다. 1258년 고종(高宗) 45년 무오(戊午) 추(秋) 7월 을해일(乙
亥日)에 병마재추소(兵馬宰樞所)에 아뢰어 위사공신동력보좌(衛社
功臣同力輔佐) 차송우(車松祐) 이하(以下) 19인(人)을 승질(陞秩=승
자(陞資) : 3품 이상의 품계(品階)이름)하고 한 아들은 9품직(品職)을 허락
했다. 1262년 고려 24대 원종왕(元宗王) 3년 임술(壬戌) 동(冬)
10월 기미일(己未日)에 다시 미륵사(彌勒寺)에 공신당(功臣堂)을
경영(經營)하여 임진일(壬辰)에 천도공신(遷都功臣)·무오(戊午)에
위사공신(衛社功臣) 추밀원사(樞密院使) 김인준(金仁俊) · 상장군
(上將軍) 박희실(朴希實)·이인항(李仁恒)·김승준(金承俊)·박송비(朴
松庇) · 추밀원사(樞密院使) 류경(柳璥) · 장군(將軍) 김대재(金大
材)·차송우(車松祐) · 상장군(上將軍) 임 연(林 衍) · 장군(將軍) 이
공주(李公柱) · 대장군(大將軍) 김홍용(金洪龍)은 아울러 도형벽상
(圖形壁上)하고 1266년 원종(元宗) 7년 병인(丙寅) 8월 계해일(癸
亥日)에 장군(將軍) 차송우(車松祐)는 송(宋)나라 적선(賊船) 1소
(艘=척)를 탈취(奪取)하여 70여명(餘名)을 죽이고 다섯 사람을 사로
잡았다. 1268년 원종(元宗) 9년 무진(戊辰)에 시중(侍中) 이장용
(李藏用)은 몽고(蒙古)로부터 강화도(江華島)에서 출륙환도(出陸還
都)의 독촉(督促)을 받고 환도(還都)를 위해 출배도감(出排都監)을
송도(松都)에 설치(設置)하려 했을 때 장군(將軍) 차송우(車松祐)는
해양후(海陽侯) 김준(金俊)과 함께 이를 반대하였다. 1268년 4월
에 몽고(蒙古)에서 사신(使臣)을 파견(派遣)하여 왕(王)이 옛 서울
로 돌아가지 않음을 꾸짖고, 또 해양후(海陽侯) 김준(金俊)의 부자
형제(父子兄弟) 및 시중(侍中) 이장용(李藏用) 등에 힐문(詰問 : 따지
고 물음)하니 장군(將軍) 차송우(車松祐)는 해양후(海陽後) 김준(金
俊)과 함께 임금에게 아뢰어 몽고사신(蒙古使臣)을 살해(殺害)하고.
고려의 주권(主權)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임금이 이를 듣지 않으므
로 드디어 김준(金俊)에게 이르기를 “왕은 금상(今上)뿐이 아니오,
제왕(諸王)은 진실로 많으오, 하물며 태조 역시 장군(將軍)으로서
일을 일으켰으니 무슨 의심이 있으리오”하고 왕을 제거(除去)를
도모(圖謀)할 것을 생각하고 몽고사신(蒙古使臣)을 죽이자고 말 하
였더니 김준(金俊)은 장군(將軍) 차송우(車松祐)의 말을 듣고 마
침내 결의(決意 : 어떤 목적을 위하여 굳게 마음을 먹음)하고 몽고(蒙古) 사
신(使臣)을 죽이려 하였다. 왕명(王命) 불복죄(不服罪)로 임연(林
衍)·죄은(崔恩)·김준(金俊)·최휘(崔暉)·강보충(康保忠)·강현수(康玄
壽)·박승익(朴承益)·방중산(方中山)·지준(池濬)·문성주(文成柱)·갈남
보(葛南寶) 등과 공(公)은 함께 주살(誅殺)되었다. 장군(將軍) 차송
우(車松祐)는 왕명(王命)을 불복(不服)하고 몽고사신(蒙古使臣)을
죽이고, 몽고(蒙古)에 복속(服屬)하려는 원종왕(元宗王)을 제거(除
去)하려다가 주살(誅殺)되었으나 고려의 주권(主權)을 견지(堅持)
하려 했던 공(公)의 기개(氣槪)와 충정(忠情)은 참으로 역사에 길
이 남을 것이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능성구씨(綾城具氏)이
며 부(父)는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판전의사(判典儀事) 구예(具
藝)요 조부(祖父)는 도감판관(都監判官) 구연(具珚)이며 증조부(曾
祖父)는 평장사(平章事) 구민첨(具民瞻)이다. 세은공(世恩公) 차송
우(車松祐)의 서랑(婿郞)은 고려조(高麗朝)의 랑장(郞將 :一說 門下平
理) 김포인(金浦人 : 一說 金川人) 공순영(公純永)이며 그의 서랑(婿郞)
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택인(平澤人) 임언수(林彦脩)이며 그에
아들은 장자(長子) 우사(右使) 임성미(林成味)·차자(次子) 문하시중
(門下侍中) 인견미(林堅味)·삼자(三子) 개성판윤(開城判尹) 임제미
(林齊味)·사자(四子) 좌복사(左僕射) 임세미(林世味)이다.
※ 구 예(具 藝) : 관직(官職) 판전의사(判典儀事)로 1317년 고려 27대 충숙왕 4년 정사
(丁巳)에 구제삭시(九齋朔試)에 장원급제하여 관직이 중대광판전의시사(重大匡判典儀
寺事)에 이르렀으며, 면주(沔州)에 사패지(賜牌地)를 받으시고 면성무원군(沔城府院
君)에 봉(封)하였다.
임언수(林彦脩) : 호(號) 주헌(柱軒) 시호(諡號) 충정(忠貞) 관직(官職) 문하시중(門下侍中)
고려말(高麗末)에 벽상삼한삼중대광대위찬성사(壁上三韓三重大匡大尉贊成事)·문하시중
(門下侍中) 동평장사(同平章事)에 오르고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봉(封)해졌다.
임성미(林成味) : 시호(諡號) 충간(忠簡) 관직(官職) 우사(右使)이며 1378년 우왕(禑王) 4
년 무오(戊午)에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서경도순문사(西京都巡問使)가 되어 연산(連
山)·이산(尼山)·공주(公州) 등지(等地)에서 왜구(倭寇)를 격파(擊破)하였고, 1382년 우
왕(禑王) 8년 임술(壬戌)에 판밀직(判密直)으로 영해군(寧海郡)에서 왜구(倭寇)를 무
찔렀으며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이르렀다.
임견미(林堅味) : 관직(官職) 문하시중(門下侍中)이며, 공민왕(恭愍王) 때 다루하치(達魯花
赤)에 속해 공(功)을 세우고 중랑장(中郞將)에 등용(登用). 1361년 공민왕 10년 신축
(辛丑)에 홍건적난(紅巾賊亂) 때 나주도도병마사(羅州道都兵馬使)로 왕을 호종(扈從)하
여 1362년 공민왕 11년 임인(壬寅)에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었다. 1368년 공민왕
17년 무신(戊申)에 명(明)나라 군대(軍隊)가 원(元)나라 연경(燕京)을 포위했다는 급
보(急報)가 있자 암주순무사(安州巡撫使)가 되었고, 1370년 공민왕 19년 경술(庚戌)
에 부원수(副元帥)로 원(元)나라 동녕부(東寧府) 토벌(討伐)에 참가했으며 밀직부사(密
直副使)가 되었다. 1374년 공민왕 23년 갑인(甲寅)에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
使)에 이어 부원수(副元帥)로 제주(濟州) 목호난(牧胡亂)이 일어나자 토벌전(討伐戰)
에 출던(出戰)했다.1375년 우왕(禑王) 1년 을묘(乙卯)에 심양왕(瀋陽王) 터터부카(脫
脫不花)의 모자(母子)가 왕위(王位)를 노리고 들어온다는 소식에 지문하부사(知門下府
事)로 서경상원수(西京上元帥)가 되어 출전(出戰)하여 이에 대비하였고, 1377년 우왕
(禑王) 3년 정사(丁巳)에 왜구침입(倭寇侵入)할 때 동강부원수(東江副元帥)·서해도조전
원수(西海道助戰元帥)로 출전(出戰)했다. 1380년 우왕(禑王) 6년 경신(庚申)에 이인임
(李仁任)과 함께 경복흥(慶復興)의 그 일당(一黨)을 숙청(肅淸). 1383년 우왕(禑王)
9년 계해(癸亥)에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정방재조(政房提調)를 겸임(兼任),
1384년 우왕(禑王) 10년 갑자(甲子)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이인임(李仁任)·지
윤(池奫)·염흥방(廉興邦) 등과 함께 정권(政權)을 잡았다.
임제미(林齊味) : 관직(官職) 개성판윤(開城判尹)이며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개성판윤(開
城判尹)을 지냈으며 관산군(冠山君)에 봉(封)해졌다.
임세미(林世味) : 관직(官職) 좌복사(左僕射) 조양임씨(兆陽林氏) 분관조(分貫祖)이다. 고려
말(高麗末)에 좌복사(左僕射)에 오르고 조양군(兆陽君)에 봉(封)해졌다. 삼공(三公)의
지위(地位)에 올랐을 때 참소(讒訴)를 받아 조양(兆陽 :보성(寶城)의 속현(屬縣)됨)으로
퇴거(退居)하였다.
17 世 휘(諱) 득규(得珪) : (中興伯 世恩公 車松祐의 長子)
자(字) 이서(履瑞)이며 벼슬은 고려 24대 원종왕조(元宗王朝
:1295년~1274년)에 도총제(都摠制)이다. 1278년 고려 25대 충열왕
(忠烈王:1274년~1308년) 4년 무인(戊寅) 11월에 내료(內僚=내신(內臣)
: 대궐안의 근신)의 구전(口傳 : 임금이 말로 내린 전교(傳敎))과 내시원(內侍
院 :고려 때 임금의 근시(近侍)와 숙위(宿衛)에 관한 일을 하는 관청)이 전(傳)하
여 아뢰기를 부장(府藏 :나라의 곳간)이 탄갈(殫竭 : 남김없이 모두 써 버
림)하여 주부(主簿 : 각 관서(官署)의 문서(文書)·장부(帳簿)를 맡은 벼슬)는
견디지 못함에 이르러 체발(剃髮 :머리을 깎음)하고 승(僧=중)이 된자
가 있다 하였다. 김주정(金周鼎)은 지후(袛侯 : 관직(官職)의 이름)가
되어서 윤해(尹諧)는 오래 내시(內侍)를 하였으니 그 전(傳)여 아
뢴 것을 반드시 능(能)히 출납(出納)의 준철(撙節 : 절제함·억제함. 또
는 절약함)할 것이며 대장군(大將軍) 김자정(金子廷) · 장군(將軍)
차득규(車得珪)는 내료(內僚)의 수장(首長)이 되면 군수(群竪 : 환관
(宦官=內侍)의 무리)의 구전(口傳)의 폐단(弊端)을 막을 것이라 하고,
임금에게 세 사람을 청(請)하여 별감(別監)이 되었다. 1281년 고
려 25대 충열왕(忠烈王) 7년 신사(辛巳) 12월 경술(庚戌)일에 유
지(有旨 : 임금의 특별한 명령이 있음)의 말씀이 과인(寡人)이 일찍 입조
(入朝)하여 경사(京師 : 임금의 군대)에 나유(羅裕)·지윤보(池允輔)·김
응문(金應文)·차득규(車得珪)·정인경(鄭仁卿)·김부윤(金富允)·이지
저(李之氐)·황용(黃龍)·김의광(金義光)·양저(梁貯)·주석(周碩)·김위
양(金位良) 등은 시종(侍從)에 있어 노공(勞功=功勞:공을 이르는 데 들
인 노력이나 수고)이 사직(社稷)에 있으니 그것을 아울러 상전(賞典 :
상을 주는 의식)을 의론(議論)하였다. 1282년 충열왕(忠烈王) 8년
임오(壬午) 하(夏) 5월에 교령(敎令)에 가로대 1269년 고려 24대
원종왕(元宗王) 10년 기사년(己巳年)에 동쪽으로 돌아가서 마을
에 이르러 배회(徘徊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님)하드니 변(變)을
알고 조정(朝廷)으로 돌아 와서 시종보좌장군(侍從輔佐將軍) 정오
부(丁伍孚)·차득규(車得珪)·정인경(鄭仁卿)·이지저(李之氐)·대부윤
(大府尹) 김응문(金應文)·랑장(郞張) 김의광(金義光)은 일등공신
(一等功臣)으로 하고, 대장군(大將軍) 나유(羅裕)·지윤보(池允輔)·
장군(將軍)임비(林庇)·총랑(緫郞)이승연(李承衍)·장군(將軍) 김부윤
(金富允)·중랑장(中郞將) 황룡(黃龍)·랑장(郞將) 주석(周碩)·양저(梁
貯)·백좌명(白佐明)·전우(田佑)·김위량(金位良)은 이등공신(二等功
臣)으로 하여 각각 전민(田民)을 내리고 그 나머지 종신자손(從臣
子孫)은 아울러 록용(錄用 :임용(任用))하였다. 려사열전(麗史列傳)살
쳐서 가로데 고려 25대 충열왕(忠烈王)이 민간(民間) 가옥(家屋)
을 취(取)하여 집비둘기를 기르게 궁중(宮中)에 바치라 하니 차득
규(車得珪)는 불가(不可)하다 하고 이에 간(諫)하여 마침내 돌려
주었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안동왕씨(安東王氏)이며 부
(父)는 왕중귀(王重貴)이며 조부(祖父)는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충헌공(忠獻公) 왕후(王煦)이다. 왕후(王煦)는 본성명(本姓名)은
권재(權載)인데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의 아들로 하여 왕씨(王
氏)로 사성(賜姓)하여 이름은 후(煦)로 하였다. 증조(曾祖)는 정
당(政堂)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국재선생(菊齋先生) 문정공(文正
公) 권부(權簿)이다. 도총제(都摠制) 차득규(車得珪)의 장서랑(長
婿郞)은 선관서승(膳官署丞) 영천인(永川人) 이약(李 約)이며 그의
서랑(婿郞)은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연일인(延日人) 정운권(鄭云
瓘)이며 그의 아들 장자(長子) 대제학(大提學) 문충공(文忠公) 정
몽주(鄭夢周)·차자(次子) 정 과(鄭 過)·삼자(三子) 정 후(鄭 厚)·사
자(四子) 사재령(司宰令) 정 도(鄭 蹈)이며, 도총제(都摠制) 차득
규(車得珪)의 차서랑(次婿郞)은 보재(輔宰) 강화인(江華人) 위득유
(韋得儒)이며 그의 아들 위수번(韋守全)이며 그의 서랑(婿郞)은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 시호(諡號) 공희공(恭僖公) 보성인(寶城
人) 오사충(吳思忠)이다.
※ 권 부(權 簿) : 자(字) 재만(齋萬) 호(號) 국재(菊齋) 시호(諡號) 문정(文政) 관직(官職) 첨
의정승(僉議政丞)이며 1280년 고려 25대 충열왕 6년 경진(庚辰)에 문과(文科)에 급제
하고 첨의사인(僉議舍人)을 거쳐 1289년 충열왕 15년 기축(己丑)에 밀직사(密直使)
우부승지예빈윤(右副承旨禮賓尹) 지공조사림시독학사(知工曹詞林侍讀學士)가되었다.
1302년 충열왕 28년 임인(壬寅)에 성절사(聖節使)로 원(元)나라에 다녀온 후 밀직사
사(密直司使)·조첨의참이(都僉議參理)를 역임,1309년 고려 26대 충선왕(忠宣王) 원년
(元年) 기유(己酉)에 정조사(正朝使)로 다시 원(元)나라에 다녀왔다. 1310년 충선왕 2
년 경술(庚戌)에 찬성사판총부사(贊成事判摠部事)가 되고, 1313년 충선왕 5년 계축
(癸丑)에 영가군(永嘉君)에 봉(封)해졌다. 고려 27대 충숙왕(忠肅王) 때 태조이래(太祖
以來)의 실록(實錄)을 약찬(略撰)했고, 첨의정승판총부사(僉議政丞判摠部事)·영도첨의
사사(領都僉議司事)를 지냈으며 부원군(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추성익조동덕보리
공신(推誠翊祚同德輔理功臣)이 뇌었다.
※ 왕 후(王 煦) : 호(號) 희당(浠堂) 시호(諡號) 정헌(正獻) 관직(官職) 도첨의정승(都僉議政
丞) 이며 첨의정승(僉議政丞) 권부(權簿)의 아들로 본성명(本姓名)은 권재(權載)이다.
충선왕의 신임을 받아 14세 소년으로 랑장(郞將)에 오르고 일약 삼사판관(三司判官)
에 특진(特進)되었다. 충선왕이 원(元)나라에 있을 때 불려가서 아들로 입적 왕후
(王煦)라는 성명을 하사(下賜)받았으며 1308년 충열왕 34년 무신(戊申)에 충열왕이
죽음으로 충선왕과 함께 귀국(歸國)하여 사복시부정(司僕侍副正)·사헌부집의(司憲府
執義)등을 역임하였다. 1314년 고려 27대 충숙왕(忠肅王) 원년(元年) 갑인(甲寅)에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封)해지고, 1316년 충숙왕 3
년 병진(丙辰)에 부원대군(府院大君)에 진봉(進封), 왕제(王弟)라고까지 불러왔다.
1320년 충숙왕 7년 경신(庚申)에 충선왕과 함께 다시 원(元)나라에 가서 충선왕의
요청으로 원나라 황제로부터 원나라 황태자(皇太子)의 시그루치(速古赤 :시자(侍者)
임)가 되고 계림군공(鷄林郡公)의 직위와 땅과 집을 하사받았고, 1320년에 환관(宦
官) 바앤투그스(伯顔禿古思)의 모함으로 티뱃(西藏)으로 귀양 가게 된 충선왕을 대
신하여 귀양을 가겠다고 청함으로 원나라 황제(皇帝)를 감동케 하였다. 1342년 고려
28대 충혜왕(忠惠王) 복위(復位) 3년 임오(壬午)에 원나라에 가서 서거(逝去)한지 오
래 된 충선왕의 시호(諡號)와 충숙왕의 시호(諡號)를 받아 가지고 돌아 왔으며,
1344년 충혜왕 5년 갑신(甲申)에 성절사(聖節使)로 또다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44년에 우정승(右政丞)에 기용(起用)되고 1345년 고려 29대 충목왕 원년(元年)
을유(乙酉)에 정방(政房)을 폐(廢)하고 과전(科田)을 복구(復舊)했다가 탕학(貪虐)한
무리들의 미움을 발아 파직(罷職)되었다. 1347년 충목왕 3년 정해(丁亥)에 원나라
황제(皇帝)의 입조명령(入朝命令)을 받고 들어가 좌정승(左政丞) 김영돈(金永旽)과 함
께 조칙(詔勅)을 가지고 돌아 와서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였고, 김영돈(金永
旽)과 함께 판사(判事)가 되어 전제(田制)를 정비하였다. 기황후(奇皇后)의 친척(親
戚)인 기삼만(奇三萬)이 기황후(奇皇后)의 세력(勢力)을 믿고 남의 땅을 빼앗은 등
불법을 자행(自行)하자 그를 순군옥(巡軍獄)에 가둔 것이 옥사(獄死)하여 문제(問題)
가 일어나기도 하였으나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司事)에 올랐다. 1348년 충목왕 4년
무자(戊子)에 정승(政丞)이 되어 기철(奇轍)과 함께 정동성(征東省)의 일을 섭행(攝
行)했으며 1349년 고려 30대 충정왕(忠定王) 원년(元年) 기축(己丑)에 성절사(聖節
使)로 원나라에 다녀오던 중 창의현(昌義縣)에 이르러 병사(病死)하였다. 공민왕(恭
愍王)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되었다.
※왕중귀(王重貴) :건직(官職)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정승(政丞) 왕후(王煦=本名權
載)의 아들, 공민왕(恭愍王) 초(初)에 좌부대언(左副代言)이 되고, 1356년 공민왕 5
년 병신(丙申)에 기철(奇轍) 등이 제거(除去)될 때 유배(流配)되었다가 1364년 공민
왕 13년 갑진(甲辰)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365년 공민왕 14년
을사(乙巳)에 신돈(辛旽)에 의해 파직(罷職). 국가의 비밀을 원나라에 누설(漏泄)했다
는 무고(誣告)로 유배(流配)되었다가 곧 풀려 나와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었다.
※ 정몽주(鄭夢周) : 자(字) 달가(達可) 호(號) 포은(圃隱) 시호(諡號) 문충(文忠) 관직(官職)
대제학(大提學)이며, 1360년 공민왕 9년 경자(庚子)에 문과(文科)에 장원(壯元)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1376년 우왕(禑王) 2년 병진(丙辰)에 대사성(大司成)으로 이인임
(李仁任)이 주장(主張)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방침(外交方針)을 반대하다가
언양(彦陽)으로 유배(流配)되었다. 1377년 우왕 3년 정사(丁巳)에 풀려나와 사신(使
臣)으로 구주(九州)의 지방장관(地方長官) 영천료준(令川了俊)에게 가서 왜구(倭寇)의
단속을 청하여 응락을 얻고, 왜구(倭寇)에게 잡혀간 고려민(高麗民) 수백명(數百名)
을 귀국(歸國)시컸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보문각제학지제교(寶文閣提學知製敎)를
거쳐, 1379년 우왕 5년 기미(己未)에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
의판서(禮儀判書)·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전법판서(典法判書)·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1380년 우왕 6년 경신(庚申)에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이성계(李成
桂) 휘하(麾下)에서 왜구토벌(倭寇討伐)에 참전(參戰)하고, 이어 보문각제학상호군(寶
文閣提學上護軍)이 되었다. 1381년 우왕 7년 신유(辛酉)에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
臣)에 봉(封)해지고, 1384년 우왕 10년 갑자(甲子)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성
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가서 세공(歲貢)의 삭감(削減)과 5년간 미납(未納)한
세공(歲貢)을 면제(免除)받고 긴장상태에 있던 대명국교(對明國交)를 회복하는데 큰
공(功)을 세웠다. 1387년 우왕 13년 정묘9丁卯)에 수원군(水原君)에 봉(封)해지고
그 후 삼사좌사(三司左使)·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등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
成事)가 되어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공양왕(恭讓王) 영입(迎立)했으며, 1390년 공양
왕 1년 경오(庚午)에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구문하시중(守門下侍中)·우
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익양군충의백(益陽君忠義伯)이 되었다. 이성계(李成桂)의
위망(威望 : 우세(威勢)와 명망(名望)을 말함)이 날로 커가서 조준(趙浚)·남언(南誾)·
정도전(鄭道傳) 등이 그를 추대(推戴)하려는 음모(陰謀)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
(肅淸)할 기회(機會)를 노렸으나 이를 눈치 챈 이방원(李芳遠)에 의해 조영규(趙英珪)
가 선죽교(善竹橋)에서 격살(擊殺)되었다.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貧民)을 구제(救
濟)했으며, 불교(佛敎)의 피해(被害)를 없애기 위해 유학(儒學)을 보급하였고,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始祖)로 추앙(推仰)되었다. 영의
정(領議政) 추증(追贈),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고 문묘(文廟)에 배
향(配享)됨을 비롯하여 개성(開城)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 서원(書院)에 제향
(祭享)하고 있다.
※ 오사충(吳思忠) : 시호(諡護) 공희(恭僖) 관직(官職) 조선조(朝鮮朝)에 판사평부사(判司平
府事)이며 고려조(高麗朝)의 관직(官職) 보재(輔宰) 강화인(江華人) 위득유(韋得儒)의
아들 중랑당(中郞將) 위수전(韋守全)의 서랑(婿郞)으로 1355년 공민왕 4년 을미(乙
未)에 문과급제(文科及第), 헌납(獻納)·집의(執義) 등을 역임하고 후에 대사성(大司成)
을 거쳐 잠시 유배(流配)뇌었다가 1392년 공양왕(恭讓王) 4년 임신(壬申)에 복직(復
職), 좌상시(左常侍)가 되었다. 이해에 도선이 개국(開國)되자 호조전서(戶曹典書)에
개국공신(開國功臣) 3등이 되고 이어 덩당문학(政堂文學)·관찰사(觀察使) 등을 역임
한 뒤 1404년 태종(太宗) 4년 갑신(甲申)에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에 이르렀다.
17 世 휘(諱) 덕규(德珪)(中興伯 世恩公 車松祐의 次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 중랑장(中郞將) 송림백(松林伯) 광주병
마사(廣州兵馬使)이며, 고려멸망(高麗滅亡) 후 조선초(朝鮮初) 가문
(車氏家門)의 사얼(四孼:鄭道傳·咸傅霖·趙英珪·河崙)들이 역성혁명(易姓革
命)으로 조선개국(朝鮮開國)의 실세(實勢)인 이방원(李芳遠)에게 무
고(誣告)로 역적누명(逆賊陋名)으로 왕자난(王子亂) 연루(連累)되여
적족지화(赤族之禍)로 보판(譜版) 및 문헌소실(文獻燒失)로 공(公)
의 행적실전(行蹟失傳)됨.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안동권씨(安
東權氏)이며 부(父)는 권석(權碩)이며, 공(公)의 서랑(婿郞)은 찬성
사(贊成事) 정선인(旌善人) 전영보(全英甫)이다.
※ 전영보(全英甫) : 관직(官職) 찬성사(贊成事)이다. 공(公)은 충열왕(忠烈王) 때 랑장(郞將)
을 거쳐 1310년 충선왕(忠宣王) 2년 경술(庚戌)에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1320년
충숙왕(忠肅王) 7년 경신(庚申)에 밀직부사(密直副使). 1321년 충숙왕 8년 신유(辛酉)
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대사헌(大司憲)이 되고, 1324년 충숙왕 11년 갑자(甲
子)에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역임. 1326년 충숙왕 13년 병인(丙寅)에 원(元)나라가 고
려를 그들의 한 성(省)으로 만들려는 것을 김이(金怡)·전언(全彦) 등과 함께 극력 반대
하여 물리침으로써 일등공신(一等功臣)에 올랐다. 1321년부터 충숙왕을 원(元)나라에
서 시종(侍從)했던 공(功)으로 1327년 충숙왕 14년 정묘(丁卯)에 찬성사(贊成事)로서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었고, 1339년 충숙왕(忠肅王) 복위(復位) 7년 기묘(己卯)에 삼
사사(三司事)가 되고, 1341년 충혜왕(忠惠王) 2년 신사(辛巳)에 순군마호(巡軍萬戶)가
되었다.
17 世 휘(諱) 복규(復珪)(中興伯 世恩公 車松祐의 三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의 중랑장(中郞將)이다. 공(公)은 고려조
(高麗朝)의 멸망(滅亡) 후 조선개국초(朝鮮開國初)에 가문(家門)의
사얼(四孼 : 鄭道傳·咸傅霖·趙英珪·河崙) 들의 무고(誣告)로 왕자난(王子
亂)에 연루(連累)되어 적족지화(赤族之禍)를 당할 때 보판(譜版)과
문헌분탕(文獻焚蕩)으로 공(公)의 행적(行蹟) 실전(失傳)됨. 공(公)
의 배부인(配夫人)은 송씨(宋氏)이며 부(父)는 송군수(宋君秀)이며
조부(祖父)는 송유인(宋有仁)이다, 공(公)의 서랑(婿郞) 곡주인(谷州
人) 상장군(上將軍) 척순(拓純)이며 그의 부(父)는 시중(侍中) 척준
경(拓浚京)이다.
18 世 휘(諱) 포온(蒲溫)(都摠制公 車得珪의 長子)
자(字) 군거(君擧) 호(號) 송일당(松日堂) 시호(諡號) 문목(文
穆)이시며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군부
판서(軍簿判書)·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사도중서시랑(司徒中書侍
郞)·지도첨의(知都僉議)·동경유수(東京留守)·용산군(龍山君)·동중서
평장사(同中書平章事)를 역임. 려사(麗史)에 가로데 1352년 공민왕
(恭愍王) 1년 임진(壬辰) 6월 임인(壬寅)일에 연저수종(燕邸隋從)의
기록(記錄)에 찬성사(贊成事) 조일신(趙日新)·첨의평리(僉議評理)
김보(金普)·밀직사사(密直司事) 김일봉(金逸逢)·전대언(前代言) 류숙
(柳淑)·상호군(上護軍) 정환(鄭桓)·환관(宦官) 대호군(大護軍) 신소
봉(申小鳳)·평해부원군(平海府院君) 손기(孫琦)·판삼사사(判三司事)
이몽가(李蒙哥)·찬성사(贊成事)조익청(曺益淸)·지밀직사사(知密直司
事) 정오(鄭䫨)·전동지밀직사사(前同知密直司事) 홍유도(洪由道)·판
개성부사(判開城府事) 한가귀(韓可貴)·전평양윤(前平壤尹) 홍원철
(洪元哲)·밀직부사(密直副使) 강천유(姜千裕)·밀직제학(密直提學) 이
제(李濟)·판도판서(版圖判書) 이종(李宗)·전보문(全普門)·지신사(知
申事) 최덕림(崔德林)·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裝軍) 김용(金鏞)·판
사복시사(判司僕寺事) 차포온(車蒲溫)·대호군(大護軍) 정세운(鄭世
雲)·중랑장(中郞將) 목인길(睦仁吉)·랑장(郞將) 김서(金湑)·전이도
(全以道)는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하고. 상호군(上護軍) 이야선
(李也先)·상호군(上護軍) 강중경(姜仲卿)·대호군(大護軍) 손습(孫
襲)·친종장군(親從將軍) 이양(李陽)·중랑장(中郞將) 정진(鄭鎭)· 시
승(寺丞) 왕석(王碩)·별장(別將) 임석(任碩)·임용(任用) 등은 이등공
신(二等功臣)이 되고. 판사(判事) 김원(金元)·호군(護軍) 현근(玄
瑾)·감찰장령(監察掌令) 허유(許猷)·중랑장(中郞將) 정선(鄭璇)·주부
(主簿) 신염(辛廉) 등은 삼등공신(三等功臣)으로 하여 모두 전민(田
民 : 토지(土地)와 노비(奴婢)를 말함)을내렸다. 1352년 공민왕(恭愍王) 1
년 임진(壬辰) 9월 임자(壬子)일에 차포온(車蒲溫)은 군부판서(軍
簿判書)가 되었고, 1354년 공민왕 3년 갑오(甲午) 7월 신사(辛巳)
일에 용산군(龍山君)이 되었고, 1354년 공민왕 3년 갑오(甲午) 12
월 을사(乙巳)일에 용산군(龍山君)으로 왕에게 내리는 의주(衣酒)
를 받들고 원(元)나라로부터 돌아왔다. 1257년 공민왕 6년 정유
(丁酉) 3월 신묘(辛卯)일에 동경유수(東京留守)가 되었다. 원(元)나
라 사신(使臣) 야사불화강향(野思不花降香)이 본국(本國)에 이르러
정지상(鄭之祥)이 욕(辱)을 당하여 야사불화강향(野思不花降香)을
잡아 가두고 그 금패(金牌)를 빼앗으니 왕은 경악(驚愕)하여 공
(公)을 보내어 하사품(下賜品) 내온(內醞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으
로 야사불화강향(野思不花降香)을 위로(慰勞)하고 그 패(牌)를 돌
려주었다. ○숭영만록(崇陽謾錄)·목옹설등기(牧翁雪燈記)에 이르데
공(公)의 나이 19세에 임이 전례좌랑(典禮佐郞)에 여럿이 천거(薦
擧)하여 대사간(大司諫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의 일을 맡은 사간원(司諫院)의
정3품 으뜸 벼슬)이 법(法)을 지키지 않고 아! 권귀(權貴 : 지위가 높고 권
세가 있는 사람)를 어지럽히는 바라 벼슬을 버리고 칠팔년(七八年) 성
현(聖賢)의 글을 많이 읽고, 김양간(金良簡)·최인제(崔仁齊)·안회헌
(安晦軒)과 함께 친하였다. 1263년 충열왕 9년 계미(癸未)에 안회
헌(安晦軒)과 함께 건국학(建國學)을 말하여 원(元)나라로부터 선
성(先聖 :옛 성인(聖人)을 말함) 및 70노사(老師)의 화상(畵像)을 받들고
돌아왔다. ○안주읍지(安州邑誌)에 이르데 려계(麗季)에 차포온(車
蒲溫) 귀양자리 안주(安州)에 임시로 살면서 부(府 :관청)의 서쪽
40리 떠러진 휴암(鵂岩) 오리(五里)쯤에 땅에 못을 파낸 주위(周
圍 :어떤 곳의 바깥 둘레)가 사백보(四百步)요 모양은 제비꼬리 같은 까
닭으로 연동방(燕垌坊)이라 이르더라. 공(公) 용서함을 받아 상락
(上洛 :서울로 올라감) 후 모든 자손(子孫)이 못위에 비갈(碑碣)세워
명(銘) 가로대 보감(寶鑑)이 다시 열렸으니 운영(雲影)이 배회(徘
徊)하고, 어니(淤泥 : 짙흙탕)가 다시 맑으니 금인(錦鱗)이 해엄치고
놀며 선인(先人)의 유택(遺澤 : 남아 있는 은택(恩澤)을 말함)은 영세(永世
: 세대(世代)가 영원히 이어짐)에 궁(窮)하지 않을 것이다. 목동(鶩洞)에
단(壇)을 세워 드디어 이제 망향(望享)하오라 하였다. ○려조야사
(麗朝野史) 및 송경지(松京誌)에 이르데 공(公)은 덕행(德行)과 문
장(文章)이 특출(特出)하여 같은 또래의 여러 명사(名사)는 한때
문하(門下) 머물러 있으면서 항상 국세(國勢)의 불고(不古 :순박하지
않음)로 나라 다스림의 대의(大義)를 후회(後悔)하드라. 공(公)의 묘
역(墓域)은 장단(長湍) 대덕산(大德山) 묘좌원(卯坐原)이라 하고.
또는 임피(臨陂) 월포동(月浦洞)이라 하나 실전미상(失傳未詳)이며
1859년 조선철종(朝鮮哲宗) 10년 기미(己未)에 지석(誌石)이 현출
(現出 : 드러남)하였고, 그 55년 후 1913년 왜정(倭政) 4년 계축(癸
丑)에 그의 후손(後孫) 차덕모(車德模)는 공(公)의 신도비(神道碑)
를 수립(竪立)하였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단양우씨(丹陽禹
氏)이며 부(父)는 제주(祭酒) 역동선생(易東先生) 문희공(文僖公)
우탁(禹倬)이요 조부(祖父)는 전서(典書) 우천규(禹天珪)요 증조부
(曾祖父)는 시중(侍中) 우중대(禹仲大)이며, 문목공(文穆公)의 서랑
(婿郞)은 파평인(坡平人) 윤번(尹番)이며 그의 장서랑(長婿郞)은 경
주인(慶州人) 김신(金信)이며 그의 아들은 김천서(金天瑞)이며, 문
목공(文穆公)의 차서랑(次婿郞)은 장흥인(長興人) 판서(判書) 주언
방(周彦邦)이며, 그의 서랑(婿郞) 번남인(藩南人) 평도공(平度公)
박은(朴訔)이며, 그의 아들 장자(長子) 예조판서(禮曹判書) 박규(朴
葵)·차자(次子) 금천군(錦川君) 세양공(世襄公) 박강(朴薑)·삼자(三
子) 경주부윤(慶州府尹) 박훤(朴萱)이며, 문목공(文穆公)의 서서랑
(庶婿郞)은 진주인(晋州人) 강승유(姜承裕)이며 그의 서랑(婿郞)은
진주인(晋州人) 하윤린(河允潾)이며 그의 아들 하륜(河崙 : 자(字)대림
(大臨), 호(號) 호정(浩亭) 시호(諡號) 문충(文忠) 관직(官職) 영의정(領議政))이다,
※ 우 탁(禹 倬) : 자(字) 천장(天章) 호(號) 역동(易東) 시호(諡號) 문희(文僖) 명유(名儒)이
며 1290년 충열왕(忠烈王) 16년 경인(庚寅)에 문과(文科)에 급제, 영해사록(寧海司
錄)이 되어 요신(妖神)의 사당(祠堂)을 철폐(撤廢)하고, 이어 성균관(成均館) 제주
(祭酒)·감찰규정(監察糾正)을 지내었고, 1308년 충열왕 34년 무신(戊申)에 충선왕
(忠宣王)이 숙창원비(淑昌院妃 :父王의 後妃)와 밀통(密通)하자 감찰규정(監察糾正)
으로 이를 극간(極諫)하였으나 듣지 않자 고향(故鄕)으로 돌아갔다. 여러 차례에
왕의 소명(召命)을 듣지 않고, 원(元)나라를 통해 정주학(程朱學)에 관(關)한 서적
(書籍)을 들여왔으나 이를 해득(解得)하는 자가 없자 이를 연구해득(硏究解得)하고
후진(後進)을 가르쳤다. 경사(經史)·역학(易學)은 물론 복서(卜筮)에도 통(通)했다.
우리나라에 주역(周易)이 전래(傳來)된 것은 이때부터이며 그의 호(號)의 뜻이 또한
그러하다. 오담(鰲潭)의 역동서원(易東書院)은 퇴계이황(退溪李滉)이 역동(易東)을
숭앙(崇仰)하여 창건(創建)하였고, 그밖의 여러 서원(書院)에서 제향(祭享)하고 있다.
※ 박 은(朴 訔) : 자(字) 앙지(仰止) 호(號) 조은(釣隱) 관직(官職) 조선조(朝鮮)의 좌의정(左
議政)이며 1385년 우왕(禑王) 11년 을축(乙丑)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권지전교시
교감(權知典校寺校勘) 등을 거쳐 1386년 우왕(禑王) 12넌 병인(丙寅)에 개성부소윤
(開城府少尹)이 되었다. 1392년 조선개국(朝鮮開國) 후 사헌중승(司憲中丞) 등 여러
벼슬을 거쳐 1398년 이태조(李太祖) 7년 무인(戊寅)에 제1차 왕자(王子)의 난(亂)에
이방원(李芳遠)을 도와 공(功)을 세우고 태종(太宗)이 즉위(卽位)하자 좌명공신(佐命功
臣) 3등으로 번남군(藩南君)에 봉(封)해졌으며, 한성부윤(漢城府尹)·승추부제학(承樞府
提學)·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병조판서(兵曹判書)·호
조판서(戶曹判書)·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한 뒤 1412년 태종(太宗) 12년 임진(壬辰)에
금천군(錦川君)에 피봉(被封)되었다. 그 후 이조판서(吏曹判書)·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
軍都摠制府事)를 거쳐 우의정겸수문관대제학(右議政兼修文館大提學)에 이어 좌의정(左
議政)을 지낸 뒤 금천부원군(錦川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 박 규(朴 葵) : 관직(官職) 예조참판(禮曹參判)이며 공(公)은 음보(蔭補)로 여러 벼슬을
거쳐 1429년 세종(世宗) 11년 기유(己酉)에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예조참판
(禮曹參判)을 지내고1430년 세종(世宗) 12년 경술(庚戌)에 형조참판(刑曹參判)이 되
었다.
※ 박 강(朴 薑) : 시호(諡號) 세양(世襄) 관직(官職)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이다.
※ 박 헌(朴 萱) : 관직(官職) 부윤(府尹)이다.
※ 하윤린(河允潾) : 문목공(文穆公) 차포온(車蒲溫)의 서녀(庶女)의 부군(夫君)은 진주인(晋
州人) 강승유(姜承裕)이며 강승유(姜承裕)의 서랑(婿郞)이 하윤린(河允潾)이며 그에
아들이 하륜(河崙)이다.
※ 하 륜(河 崙) : 자(字) 대림(大臨) 호(號) 호덩(浩亭) 시호(諡號) 문충(文忠) 관직(官職)
영의정(領議政)이며 문목공(文穆公) 차포온(車蒲溫)의 서녀(庶女)의 부군(夫君) 진주
인(晋州人) 강승유(姜承裕)의 서랑(婿郞) 진주인(晋州人) 하윤린(河允潾)이며 그의
아들이다. 1365년 공민왕(恭愍王) 14년 을사(乙巳)에 문과(文科)에 급제, 감찰규정
(監察糾正)으로 신돈(辛旽)의 비행(非行)을 공박(攻駁)하다가 지영주사(知榮州事)로
좌천(左遷)되었고, 1371년 공민왕 20년 신해(辛亥)에 안염사(按廉使) 김주(金湊)가
그의 치적(治績)을 제1로 보고(報告)하여 고공좌랑(考功佐郞)에 올랐다. 그 후 어려
벼슬을 거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1392년 조선개국(朝鮮開國) 후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어 계룡산(鷄龍山) 천도(遷都)를 반대, 한양(漢陽)
천도(遷都)를 적극 주장을 하였고,1393년 태조(太祖) 2년 계유(癸酉)에 첨서중추원
사(簽書中樞院事)로 전임(轉任), 명(明)나라 태조(太祖)가 표전문(表箋文 : 왕실(王
室)의 경사에 올리는 축하의 글)이 불손(不遜)하다는 이유로 문책(問責)하자 1396
년 태조(太祖) 5년 병자(丙子)에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명
(明)나라에 가서 표전문(表箋文) 작성(作成)의 전말(顚末)을 보고(報告)함으로써 해
명(解明)이 되었다. 1398년 태조 7년 무인(戊寅)에 차문(車門)의 외얼(外孼) 하륜
(河崙)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서 조선개국(朝鮮開國)의 실권자(實權者) 이
방원(李芳遠)에게 무고(誣告)로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를 제1차 왕자난(王子
亂)에 연루(連累)시켜 1398년 음9월 15일 막료(幕僚) 이숙번(李叔蕃)과 이방원(李
芳遠)의 사병(私兵)을 송원(松原)과 마원(麻原)에 파견(派遣)하여 운암(雲巖) 차원부
(車原頫)와 차문(車門)의 내외친족(內外親族) 70여인(餘人)을 일시(一時)에 추살(椎
殺)로 적족지화(赤族之禍)를 당하고 신광사(神光寺)에 소장(所藏)된 판각보판(板刻譜
版)과 문헌(文獻)들을 분탕(焚蕩)하고 차문종족(車文宗族) 은 역적누명(逆赤陋名)으
로 유배(流配)되었으며, 하륜(河崙)은 제1차 왕자(王子)의 난(亂)에 이방원(李芳遠)
을 도와 공(功)을 세우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진(昇進), 정사공신일등(定社功臣
一等)으로 진산군(晋山君)에 봉(封)해졌다. 1400년 정종(定宗) 2년 경진(庚辰)에 제
2차 왕자(王子)의 난(亂)에도 이방원(李芳遠)을 도왔고, 판의흥삼군부사(判義興三軍
府事)를 거쳐 우정승(右政丞)이 되어 진산백(晋山伯)으로 진봉(進封), 1401년에 태
종(太宗)이 즉위(卽位)하자 좌명공신일등(佐命功臣一等)에 책록(策祿). 1402년 태종
2년 임오(壬午)에 좌정승(左政丞)이 되어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를 겸임(兼任),
1302년에 등극사(登極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409년태종 9년 기축(己丑)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어 군정(軍政)을 개정(改定)하였고, 영춘추관사(領春秋
館事)로《太祖實錄》의 편찬(編撰)을 지휘(指揮)했다. 1412년 태종 12년 임진(壬辰)
에 다시 좌의정(左議政)을 지내고, 1416년 태종 16년 무술(戊戌)에 치사(致仕 :나
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함)하고,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진봉(進封)되어 왕명(王
命)으로 함길도(咸吉道)에 있는 선왕(先王)의 능침(陵寢)을 순심(巡審)하였다. 시문
(詩文)에 능하고, 음양(陰陽)·의술(醫術)·성경(星經)·지리(地理)에도 정통(正通)했고,
태종묘정(太宗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
18 世 휘(諱) 만온(滿溫)(都摠制公 車得珪의 次子)
고려조(高麗朝) 관직(官職) 좌대언(左代言)이나 고려멸망(高麗
滅亡)하고 조선개국(朝鮮開國)한 후 사얼(四孼)의 무고로 척족지화
(赤族之禍)와 하륜(河崙)의 무리들이 차문(車門)의 보판(譜版) 및
문헌분탕(文獻焚蕩)과 정도전(鄭道傳)이 국사판(國史版)의 천삭날
조(擅削捏造)로 인하여 공(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되어 알수 없
으며,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임씨(林氏)이며 부(父)는 시중(侍
中) 임언인(林彦仁)이다, 좌대언(左代言) 차만온(車滿溫)의 장서랑
(長婿郞)은 창녕인(昌寧人) 성여완(成汝完)의 알들 장자(長子) 영의
정(領議政) 성석린(成石璘)·차자(次子) 대제학(大提學) 성석용(成石
瑢)·삼자(三子) 호조판서(戶曹判書) 성석연(成石珚)·사자(四子) 랑장
(郞將) 성석번(成石璠)이며, 좌대언(左代言) 차만온(車滿溫)의 차서
랑(次婿郞)은 좌정승(左政丞) 백인훈(白仁勛)이며, 그의 아들 장자
(長子) 대제학(大提學) 백 장(白 莊) 그의 아들 장자(長子) 전문형
(典文衡) 백명옥(白明玉)·차자(次子) 참지(參知) 백여옥(白如玉)·삼자
(三子) 예조판서(禮曹判書) 백형옥(白荊玉)이며 좌정승(左政丞) 백인
훈(白仁勛)의 차자(次子) 백 온(白 蘊)이다.
※ 임언인(林彦仁) : 관직(官職) 시중(侍中)으로 되어 있으나 사적(事蹟)은 미상(未詳). ?
※ 성여완(成汝完) :호(號) 이헌(怡軒) 시호(諡號) 문정(文靖) 관직(官職) 정당문학(政堂文學)
이며, 1336년 충숙왕(忠肅王) 복위(復位) 4년 병자(丙子)에 문과(文科)에 급제, 예문
춘추검열(藝文春秋檢閱)을 거쳐 군부정랑(軍簿正郞)이 되어 양광도(楊廣道) 안렴사
(按廉使 :고려 때 지방장관)를 하였고, 상서우승(尙書右丞)·지형부사(知刑部事)·어사
중승(御史中丞)·전법판사(典法判事)를 지냈다. 그 후 해주(海州)·충주(忠州)의 목사(牧
使)를 역임하고, 공민왕 때 민부상서(民部尙書)를 거쳐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商議)
에 이르러 창녕부원군(昌寧府院君)에 봉(封)해 졌다. 1302년 공양왕(恭讓王) 4년 임
신(壬申)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살해(殺害)되자 국운(國運)이 기울어졌음을
개탄(慨歎)하고 포천(抱川) 왕방산(王方山)에 들어가 은거(隱居)했다. 조선개국(朝鮮
開國) 후 노인직(老人職)으로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창성부원(昌城府院君)으
로 봉(封)해졌으나 사퇴(辭退)하고 절개(節槪)를 지켰다. 창녕(昌寧) 물계서원(勿溪書
院)에 배향(配享)하고 있다.
※ 성석린(成石璘) : 자(字) 자수(自修) 호(號) 독곡(獨谷) 시호(諡號) 문경(文景) 관직(官職)
조선조(朝鮮朝) 영의정(領議政)이며, 1357년 공빈왕 6년 정유(丁酉)에 문과(文科)에
급제, 학론(學論)·직사관(職史館)·삼사도사(三司都司)·전의주부(典儀主簿)·전리총랑(典
理摠郞) 등을 지낸 뒤 성균사성(成均司成)이 되고 지신사(知申事)에 올랐다. 1384년
우왕(禑王) 10년 갑자(甲子)에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있을 때 왜주(倭寇)가 침입
(侵入)하자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원수(元帥) 양백연(楊伯淵)과 함께 출전(出戰)하
여 적(賊)을 격퇴(擊退)하고, 륜성좌리공신(輪誠佐理功臣)이 죄었으며, 동지밀직사사
(同知密直司事)에 올랐다. 그 후 창원군(昌原君)에 봉(封)해지고, 정당문학(政堂文學)
을 거쳐 문하평리(門下評理) 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창
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세워 그 공(功)으로 찬화공신(贊化功臣)에 창성
군충의군(昌城郡忠義君)에 봉해졌으며, 예문대베학(藝文大提學)·문하찬성사(門下贊成
事)에 올랐다. 1392년 조선이 개국(開國)되자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판한
성부사(判漢城府事)를 거쳐 1399년 정종왕(定宗王) 때 평양부윤(平壤府尹)을 지내고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으로 창녕백(昌寧伯)에 봉해졌으며, 좌정승(左政丞)에 올랐다.
1401년 태종(太宗) 1년신사(辛巳)에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으로 창녕부원군(昌寧府
院君)에 진봉(進封)되고, 1415년 태종 15년 을미(乙未)에 양의정(領議政)이 되었다.
※ 성석용(成石瑢) : 자(字) 자옥(自玉) 호(號) 회곡(檜谷) 시호(諡號) 문숙(文肅) 관직(官職)
은 조선조에 대제학(大提學)이며 1376년 우왕(禑王) 2년 병진(丙辰)에 문과(文科)에
급제, 밀직부사(密直副使)·제학(提學)을 거쳐 1392년 공양왕(恭讓王) 말기(末期)에 형
(兄) 성석린(成石璘)과 함께 이색(李穡)의 일파(一派)로 몰려 한때 귀양살이를 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으로 책록(策祿)되어 개성유후
(開城留後)·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고, 대제학(大提學)에 이르렀다.
※ 성석연(成石珚) : 자(字) 자유(自由) 호(號) 상곡(桑谷) 시호(諡號) 정평(靖平) 관직(官職)
은 조선(朝鮮)의 호조판서(號曹判書)이며, 1377년 우왕(禑王) 3년정사(丁巳)에 문과
장원(文科壯元), 지평(持平)·경연강독관(經筵講讀官)을 지내고, 1392년 조선개국(朝鮮
開國) 후 예조판서(禮曹判書)·대제학(大提學)을 거쳐 강원도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
使)·충청도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우군총제(右軍摠制) 등을 역임했다. 1406년 태
종(太宗) 6년 병술(丙戌)에 사신(使臣)으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대서헌(大司憲)·
우정승(右政丞)·예조판서(禮曹判書)·호조판서(戶曹判書) 등을 지냈다.
※ 성석번(成石璠) : 조선관직(朝鮮官職) 랑장(郞將)이다.
※ 백인훈(白仁勛) : 고려관직(高麗官職) 좌정승(左政丞)이다.
※ 백 장(白 莊) : 자(字) 명윤(明允) 호(號) 정신재(靜愼齋) 관직(官職) 대제학(大提學)이
며 좌정승(左政丞) 백인훈(白仁勛)의 장자(長子)로서 진사(進士)로 원(元)나라 과거
(科擧)에 급제, 공민왕 때 이부전서(吏部典書)·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을 역임.
1392년에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되자 수원(水原)으로 낙향(落鄕)했다. 그 후 태
종(太宗)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고, 선산(善山)으로 옮겨 길재(吉再)와
교유(交遊)하면서 숨어 살다가 다시 대구(大邱)로 이거(移居)하였다. 그 후 세종(世
宗)때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追贈)하였다.
※ 백명옥(白明玉) : 고려도(高麗朝)에 관직(官職) 전문형(典文衡)이이며 대제학(大提學) 백
장(白 莊)의 장자(長子)이다.
※ 백여옥(白如玉) : 고려조(高麗朝)에 관직(官職) 참지(參知)이며 대제학(大提學) 백 장(白
莊)의 차자(次子)이다.
※ 백형옥(白荊玉) : 예조판서(禮曹判書)이며 대제학(大提學) 백 장(白 莊)의 삼자(三子)이
다.
※ 백 온(白 蘊) : 좌정승(左政丞) 백인훈(白仁勛)의 차자(次子)이다.
18 世 휘(諱) 진(珍) (中郞將公 車德珪의 長子)
공(公)은 고려조(高麗朝)에 벼슬 시중(侍中)인데 고려멸망(高麗
滅亡)과 차문외얼(車門外孼)들이 조선초(朝鮮初)에 무고(誣告)로 왕
자난(王子亂)에 연루(連累), 적족재화(赤族災禍)를 당하고 정도전
(鄭道傳)이 국사판(國史版)을 천삭날조(擅削捏造)와 하륜(河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車門)의 보판(譜版) 및 문헌분탕(文獻焚蕩)으
로 공(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
18 世 휘(諱) 진(瑧) (中郞將公 車德珪의 次子)
고려조(高麗朝)에 벼슬 영동정(領同正), 고려멸망(高麗滅亡)과
차문외얼(車門外孼)들이 조선초(朝鮮初)에 무고(誣告)로 왕자난(王
子亂)에 연루(連累)되어 적족재화(赤族災禍)를 당하고 정도전(鄭道
傳)이 국사판(國史版)을 천삭날조(擅削捏造)와 하륜(河崙)의 막료
(幕僚)들이 차문(車門)의 보판(譜版) 및 문헌분탕(文獻焚蕩)으로 사
적실전(事蹟失傳).
18 世 휘(諱) 공윤(公胤) (中郞將公 車德珪의 三子)
벼슬은 고려 25대 충열왕조(忠烈王朝 :1274년~1308년)에 중랑장
(中郞將)이며 1280년 충열왕(忠烈王) 6년 경진(庚辰) 11월 기유
(己酉)일에 우승지(右承旨) 조인규(趙仁規)를 대장군(大將軍) 인후
(印 侯)와 같이 파견(派遣)하여 상서(上書)로 청(請)하여 중랑장(中
郞將) 류보(柳普)·김천록(金天錄)·이신백(李臣伯)·신혁(辛奕)·최공절
(崔公節)·여문취(呂文就)·안흥(安興)·이순(李淳)·김복대(金福大)·차공
윤(車公胤) 등은 총파(總把)가 되었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은천오씨(銀川伍氏)이며 부(父)는 오부순(伍夫順)이다. 중랑장(中郞
將) 차공윤(車公胤)의 서랑(婿郞)은 단양인(丹陽人) 우 연(禹 淵)이
며 그의 아들은 우제강(禹濟江)이며 그의 아들은 우극관(禹克寬)이
다, 단양인(丹陽人) 우 연(禹 淵)의 서녀(庶女)의 부군(夫君)은 봉
화인(奉化人) 정운경(鄭云敬)이며 그의 아들이 정도전(鄭道傳)이다.
※ 정운경(鄭云敬) : 호(號) 염의(廉義) 관직(官職) 형부상서(刑部尙書)이며 단양인(丹陽人)
우연(禹淵)의 서녀(庶女)의 부군(夫君)이다. 충숙왕(忠肅王) 때 문과급제(文科及第),
상주사록(尙州司錄)·전교교감(典校校勘) 등을 역임, 충혜왕(忠惠王) 때 지밀성사(知
密城事)를 거쳐 복주판관(福州判官)에 전임(轉任)된 후 송사9訟事)를 잘 다스려 이
름이 높았으며 충목왕(忠穆王) 때 서운부정(書雲副正)이 되어 서상관(書狀官)으로
원(元)나라에 다녀와서 양광도(楊廣道)·교주도(交州道)의 안렴사(按廉使)·전법총랑
(典法摠郞) 등을 역임했으며, 공민왕(恭愍王) 때 전주목사(全州牧使)를 거쳐 병부시
랑(兵部侍郞으로서 강능도(江陵道)·삭방도(朔方道)의 존무사(存撫使)가 되고, 지형부
사(知刑部事)·형부상서(刑部尙書)를 거쳐 검교밀직제학(檢校密直提學)에 이르렀다.
※ 정도전(鄭道傳) : 자(字) 종지(宗之) 호(號) 삼봉(三峰) 시호(諡號) 문헌(文憲) 관직(官職)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이며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인(門下人)으로
1362년 공민왕(恭愍王) 11년 문과급제(文科及第), 전교주부(典校注簿)와 여러 관직
(官職)을 거쳐 예조정랑(禮曹正郞) 겸 성균태상박사(成均太常博士)가 되어 전선(銓
選 :인물의 재능을 심사하여 합당한 관직을 줌)을 관장(管掌)했다. 1375년 우왕(禑
王) 1년 을묘(乙卯)에 성균사예(成均司藝)·예문응교(藝文應敎)·지제교(知製敎) 등을
역임하고,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경복흥(慶復興) 등의 친원배명정책(親元排明政
策)을 반대하다가 유배(流配)되었고 1377년 우왕(禑王) 3년 정사(丁巳)에 풀려 나
왔으며, 1383년 우왕 9년 계해(癸亥)에 동북면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 이성계(李
成桂)의 참모(參謀)가 되었으며, 1384년 우왕 10년 갑자(甲子)에 전교부령(典校副
令)을 거쳐 성절사(聖節使) 정몽주(鄭夢周)의 서상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
다. 1385년 우왕11년 을축(乙丑)에 성균제주(成均祭酒)·남양부사(南陽府使)를 지내
고 성균대서성(成均大司成)에 승진(昇進), 1388년 우왕 14년 무진(戊辰)에 위화도
(威化島)의 회군(回軍)을 계기로 신진세력(新進勢力)이 집권(執權)하게 되자 이성계
(李成桂)의 우익(右翼)으로 지공거(知貢擧)·지신사(知申事)를 역임, 조준(趙浚)의 전
재개혁안(田制改革案)을 시행(施行)토록 건의(建議)하고, 척불(斥佛)을 주장(主張)하
며 조민수(曺敏修) 등의 구세력(舊勢力)을 탄핵(彈劾)하여 조선개국(朝鮮開國)의 정
지작업(整地作業)을 시작하며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다. 1389년 창왕(昌王) 1
년 기사(己巳)에 이성계(李成桂)·조준(趙浚)·심덕부(沈德符) 등과 함께 창왕(昌王)은
왕씨(王氏)가 아니고 신돈(辛旽)의 아들로 모함(謀陷)하여 강화도(江華島)로 추방(追
放), 공양왕(恭讓王)을 추대(推戴)하고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어 봉화현충의군(奉
化縣忠義君)에 봉(封)해진 뒤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올랐다. 1390년 공양왕(恭讓王)
2년 경오(庚午)에 지경연사(知經筵事)를 지낸 뒤 성절사(聖節使) 겸 변무사(辨誣使)
로 명(明)나라에 가서 이성계(李成桂)가 명나라를 침범(侵犯)하려고 한다는 윤이(尹
彛)·이초(李初)의 무고(誣告)를 밝히고, 동판평의사사사(同判評議使司事) 겸 성균대
사성(成均大司成)·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겸 대사헌(大司憲)·삼사부사(三司副使) 등
을 역임했다. 1391년 공양왕(恭讓王) 3년 신미(辛未)에 이성계(李成桂)가 군사권(軍
事權)을 장악(掌握)하여 삼군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를설치(設置)하자 우군도총제(右
軍都摠制)가 되었고, 이어 문학정당(文學政堂)으로 재직중(在職中) 구세력(舊勢力)이
득세(得勢)하자 삭직(削職)되여 유배(流配)되었다가 정몽주(鄭夢周)가 살해(殺害)된
뒤 충의군(忠義君)에 복직(復職)되고, 1392년 임신(壬申)에 조준(趙浚)·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李成桂)를 왕으로 추대(推戴)하여 조선(朝鮮)을 건국(建國)한 후
개국공신(開國功臣) 1등으로 문하사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가 되어 사은(謝恩) 겸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394년 태조(太祖) 3년 갑술(甲戌)에 한양천
도(漢陽遷都)를 주장(主張)하여 실현(實現)케 했다. 1395년 태조(太祖) 4년 을해(乙
亥)에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내세워 민심수습책(民心收拾策)
으로 정실(正實)의 고려사(高麗史)를 없세는 등 천삭날조(擅削捏造)하여 정총(鄭摠)
과 함께 날조(捏造)된 고려사적(高麗史籍) 37권을 찬진(撰進)하면서 고려조(高麗朝)
의 교목세가(喬木勢家)인 차문(車門)을 시기(猜忌)하여 차문선대(車門先代)의 사적행
적(史績行蹟)을 말살(抹殺)하고 차문(車門)의 운기(運氣)를 없에기 위하여 주역(周
易)의 학설(學說)을 인용(引用). 고려태조께서 모성류씨(冒姓柳氏)로 이어온 대승공
(大丞公)에게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사명(賜名) 달(達)로 한 성명(姓
名) 차달(車達)의 위에 류자(柳字)를 올려 놓고 류차달(柳車達)이라 조작(造作)하였
다. 1397년 태조(太祖) 6년 정축(丁丑)에 동북면도선무순찰사(東北面都宣撫巡察使)
가 되어 성(城)을 수축(修築)하고 역참(驛站)을 신설(新設)했으며 성균제조(成均提
調)가 되었다. 1398년 태조(太祖) 7년 무인(戊寅)에 명나라에서 정조사(正朝使)가
올린 표전문(表箋文)이 잘못되었다 하여 기초자(起草者)를 잡아오라 하자 그는 명나
라와 실력(實力)으로 항쟁(抗爭)할 것을 주장(主張). 군비확보(軍備確保)에 전력(全
力)하다가 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방석(李芳碩)을 옹호(擁護)하고 정실소생(正室所
生)의 왕자(王子)들을 죽이려 한다는 협의(嫌疑)로 이방원(李芳遠)에게 죽었다.
18 世 휘(諱) 세윤(世胤) (中郞將公 車復珪의 子)
벼슬 고려조(高麗朝)의 감찰(監察) 고려멸망(高麗滅亡)과 차문
외얼(車門外孼)들이 조선초(朝鮮初)에 무고(誣告)로 왕자난(王子亂)
에 연루(連累)되어 적족재화(赤族災禍)를 당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국사판(國史版)을 천삭날조(擅削捏造)와 하륜(河崙)의 막료(幕僚)들
이 차문(車門)의 보판(譜版)과 문헌분탕(文獻焚蕩)으로 사적실전(事
蹟失傳).
19 世 휘(諱) 수동(壽童) (文穆公 車蒲溫의 長子)
벼슬은 고려 31대 공민왕조(恭愍王朝 :1351년~1374년)에 정당문
학(政堂文學) 종이품(從二品)이며, 려말충의렬전(麗末忠義列傳)에
의(依)하면 승국명유표방록(勝國名流標榜錄)의 기록(記錄)에 고려
조(高麗朝)가 멸망(滅亡)하였으나 조선(朝鮮)의 신복(臣僕)을 수락
(受諾)하지 아니하고, 조운흘(趙云屹)·장하(張夏)·김광서(金光敍)·이
중인(李中仁)·임득충(林得忠)·염저(廉詝) 등과 함께 팔판사동(八判
寺洞)에 은거(隱居)하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사수
(死守)하고 그 후에 공(公)은 성거산(聖居山)으로 들어가 분신자살
(焚身自殺)을 모의(謀議)하였으나 자손(子孫)들의 만류로 실패하였
고 그 후 공(公)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동생 정과(鄭過)와
함께 팔판사(八判寺)의 근처(近處)에 은거(隱居), 망국(亡國)의 신
하(臣下)로 충절(忠節)을 온전히 하였다 하나 차문외얼(車門外孼)
의 무고(誣告)로 왕자난(王子亂)에 연루(連累). 적족재화(赤族災禍)
를 당하고 하륜(河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車門)의 보판(譜版)
및 문헌분탕(文獻焚蕩)으로 사적실전(事蹟失傳)과 배부인(配夫人)
미상(未詳). 공(公)은 문학공파(文學公派)의 파조(派祖)이다.
19 世 휘(諱) 명동(命童) (文穆公 車蒲溫의 次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의 전서(典書)이며 고려멸망(高麗滅亡)
후 조선초(朝鮮初)에 차문외얼(車門外孼)들의 무고(誣告)로 왕자난
(王子亂)에 연루(連累)되어 적족재화(赤族災禍) 때『車雲巖先生
雪寃錄』의 기록(記錄)은 대언(代言) 차공질(車公質)과 함께 멀리
남주(南州)에서 스스로 향리(鄕吏)를 원(願)하였다고 하나 하륜(河
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보판(車門譜版) 및 문헌분탕(文獻焚蕩)으
로 행적실전(行蹟失傳)으로 자세히 알 수 없으며, 공(公)은 전서공
파(典書公派)의 파조(派祖)이다.
19 世 휘(諱) 종로(宗老) (文穆公 車蒲溫의 三子)
호(號) 월파옹(月波翁)이며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지방어사
(知防禦使) 정사품(正四品)이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아름답고
학문(學文)이 뛰어나며 조년(早年)에 지방어(知防禦) 직무소(職務
所)의 일을 진력(盡力)하더니 문덕 권신(權臣)과 간신(奸臣)들의
그릇된 것을 보고 벼슬을 벌이고 산야(山野)로 둔적(遁迹)하여 자
신(自身)의 뜻한 바를 밝히고 인덕(仁德) 쌓으며 처사(處士)로 은
거(隱居)하며 여생(餘生)을 명철(明哲)하게 보신(保身)하였다. 공
(公)은 후손(後孫)들이 월파공파(月波公派)의 파조(派祖)로 받들고
있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 파평윤씨(坡平尹氏)는 생일남(生一
男) 차숭부(車崇頫)· 배부인(配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 부(父)는
김재안(金齊顔)이며 생일남(生一男) 차숭질(車崇質)·생일녀(生一
女) 서랑(婿郞)은 성주인(星州人) 찬성(贊成) 도길부(都吉敷)이며
그의 부(父)는 대광보국(大匡輔國) 문하시중(門下侍中) 칠곡부원
군(七谷府院君) 도홍정(都洪正)이며·배부인(配夫人) 능성구씨(綾城
具氏) 부(父)는 문하좌시중(門下左侍中),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문정공(文貞公) 구의(具禕)·조부
(祖父)는 판서(判書) 구영검(具
榮儉)·증조(曾祖)는 판사(判事)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 구예
(具藝)이며, 생사남(生四男),
차원부(車原頫)·차원명(車原
命)·차견질(車堅質)·차견명(車
堅命), 생일녀(生一女) 서랑(婿
郞)은 탐진인(耽津人) 안정(安
定)이며 그의 부(父)는 평장사
(平章事) 안우(安祐)이며 그의
아들은 안지(安止)이다. 월파옹
(月波翁)의 생서자일남(生庶子
一男) 차원석(車原碩)·생서녀일
녀(生庶女一女)의 부랑(夫郞)안
동인(安東人) 권중화(權仲和)며
부(父)는 정승(政丞) 권한공(權
漢功)이며 아들은 권방위(權邦
緯)이다. 공(公)의 묘역(墓域)은
양주(楊州) 봉황산(鳳凰山) 곤좌(坤坐)인데 1972년 임자(壬子) 2
월말(末)일에 평택시(平澤市) 장안동(長安洞) 월운산(月雲山) 자좌원(子
坐原)에 이장면례(移葬緬禮)를 하였다.
※ 김제안(金齊顔) : 자(字) 중현(仲賢) 관직(官職) 추밀원사(樞密院事)이며 월파옹(月波翁)
차종로(車宗老) 배부인(配夫人)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친부(親父)이다. 1364년 공민
왕(恭愍王) 13년 갑진(甲辰)에 좌정언(左正言)으로 있을 때 변공(邊功 :변경(邊境)의
싸움에서 세운공)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에 특진(特進)된 한휘(韓暉)·이귀수(李龜壽)
의 고신(告身 :임관(任官)하는 사람에게 주는 사령서(辭令書). 직첩(職牒))에 서명(署
名)하지 않았다가 왕명(王命)으로 강재서명(强制署名)을 마치고 파면(罷免)되었다.
1366년공민왕 15년 병오(丙午)에 군부좌랑(軍簿佐郞)으로 전록생(田祿生)의 서장관
(書狀官 :사신을 따라가는임시벼슬인 기록관)이 되어 하남왕(河南王) 퀴퀴티무르(공
곽처첩목아(壙廓帖木兒))에게 사신(使臣)으로 가던 도중 연경(燕京)에 이르렀으나 양
국수교(兩國修交)를 반대하는 원(元)나라 황태자(皇太子)에 의해 귀환명령(歸還命令)
이 내렸다. 이에 전록생(田祿生)을 돌려보낸 뒤 병(病)을 핑계하여 연경(燕京)에 머
물다가 홀로 하남(河南)에 가서 국서(國書)를 전달하고 하남왕(河南王)의 상주(上奏)
에 의하여 중서병부랑중첨서(中書兵部郞中僉書) 하남강북등처앵(河南江北等處行) 주
밀원사(樞密院事)가 되었다. 그 후 본국(本國)에 돌아오자 공민왕은 노고(勞苦)를 치
하(致賀)하여 대언(代言)에 임명(任命)하려 했으나 신돈(辛旽)의 저지로 내사사인(內
史舍人)이 되었으며 그 뒤 김정(金精) 등과 함께 신돈(辛旽)을 죽이려고 모의(謀議)
하다가 누설(漏泄)되어 잡혀 죽었다.
※ 도길부(都吉敷) :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문하시붕(門下侍中)·첨의찬성사(僉
議贊成事)이며, 벽상공신(壁上功臣)·삼한삼중대광(三韓三重大匡)·문하시중(門下侍中)·
칠곡부원군(漆谷府院君) 도홍정(都洪正)의 아들이며, 월파옹(月波翁) 차종로(車宗老)
의 서랑(婿郞)으로 1380년 우왕(禑王) 6년 경신(庚申)에 이성계(李成桂)와 더불어 지
리산(智異山) 운봉(雲峰)에서 왜구(倭寇)를 격파(擊破)한 황산대첩(荒山大捷)의 8원수
중(元帥中) 한 사람이며, 1383년 우왕(禑王) 9년 계해(癸亥)에 왜구(倭寇)를 토벌(討
伐)할 때의 전공(戰功)으로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봉(封)해졌다.
※ 구 의(具 禕) : 시호(諡號) 문정(文貞) 관직(官職) 대제학(大提學)이며, 월파옹(月波翁) 차
종로(車宗老)의 배부인(配夫人)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친부(親父)이다. 공(公)은 문과
(文科)에 급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판의금부사
(判義禁府事)·지이조사(知吏曹事) 등을 역임하고 면성부원군(沔城府院君)에 봉(封)해
졌다. 사후(死後)에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에 추증(追贈)하였다.
※ 구영검(具榮儉) : 관직(官職) 전리판서(典理判書)이며, 문정공(文貞公) 구의(具禕)의 선고
(先考)이며 월파옹(月波翁) 차종로(車宗老)의 배부인(配夫人) 능성구씨(綾城具氏)의
친조고(親祖考)이다. 공(公)은 벼슬이 전리판서(典理判書)에 이르렀으며 공민왕 때
면성군(沔城君)에 봉(封)해졌다. 1354년 공민왕 3년 갑오(甲午)에 원(元)나라의 장
사성(張士誠)이 고우성(高郵城)에 웅거(雄據)하여 난(亂)을 일으켰을 때 원(元)나라의
요청(要請)으로 류탁(柳濯)·최영(崔瑩) 등과 함께 출전(出戰)했다. 기철(奇轍)의 일파
를 숙청(肅淸)할 때 기철(奇轍)의 잔당(殘黨)을 체포(逮捕)하지 않았다는 무고(誣告)
로 투옥(投獄)되어 참살(斬殺)되었다.
※ 구 예(具 藝) : 관직(官職) 판전의사(判典儀事)이며, 월파옹(月波翁)의 배부인(配夫人) 능
성구씨(綾城具氏)의 친증조고(親曾祖考)이다. 공(公)은 문과(文科)에 급제, 판전의사
(判典儀事)를 지내었고 면천(沔川) 사패지(賜牌地 : 나라에서 내려준 땅)를 받았다.
충효(忠孝)가 구전(俱全)하여 후세(後世)에 박팽년(朴彭年)이 칭찬(稱讚)하기를『이조
계효(履祖繼孝)하고 도광보신(鞱光保身)함이 신차덕의(神且德矣)라』하였으며 면성부
원군(沔城府院君)에 봉(封)해 졌다.
※ 안 우(安 祐) : 탐진안씨(耽津安氏)로 관직(官職)은 도원수(都元帥)이며 그에 아들 안정
(安定)은 월파옹(月波翁) 차종로(車宗老)의 서랑(婿郞)이다. 도원수(都元帥) 안우(安
祐)는 1352년 공민왕 1년 임진(壬辰)에 군부판서(軍簿判書)·응양군상호군(鷹揚軍上
軍)이 되고. 뒤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를 거쳐 1358년 공민왕 7년 무술(戊戌)에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로서 안주군민만호(安州軍民萬戶)가 되었다. 1359년 공
민왕 8년 기해(己亥)에 홍건적(紅巾賊)이 침입(侵入)하여 의주(義州)·정주(靜州)·인주
(麟州) 등지(等地)가 함락(陷落)되자 이방실(李芳實) 등과 함께 홍건적(紅巾賊)을 대
파(大破)하였고, 홍건적(紅巾賊)이 서경(西京)으로 진출(進出)하자 이를 크게 무찌르
고 적장(賊將) 심척(沈刺)·황지선(黃志善)을 생포(生捕)하였다. 그 후 다시 패잔병(敗
殘兵)을 소탕(掃蕩)하고 돌아와 중서평장정사(中書平章政事)에 추충절의정난공신(推
忠節義定亂功臣)이 되었다. 1361년 공민왕 10년 신축(辛丑)에 20만의 홍건적(紅巾
賊)이 침입(侵入)하자 상원수(上元帥)가 되어 김득배(金得培)·이방실(李芳實) 등과 함
께 홍건적(紅巾賊)을 대파(大破)하고 도원수(都元帥)에 올랐다.
※ 안 지(安 止) : 호(號) 고은(皐隱) 시호(諡號) 문정(文靖) 관직(官職) 대제학(大提學)이며
월파옹(月波翁) 차종로(車宗老)의 외손자(外孫子)이다. 1414년 태종(太宗) 14년 갑오
(甲午)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를 거쳐 1416년 태종
(太宗) 16년 병신(丙申)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했다. 1420년 세종(世宗) 2년
수찬(修撰)이 되었고, 1441년 세종(世宗) 23년 신유(辛酉)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
提學)을 역임, 1442년 세종(世宗) 24년 임술(壬戌)에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정인지
(鄭麟趾)와 함께『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받쳤다. 1446년 세종(世宗) 28
년 병인(丙寅)에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와
서 집현전부제학(集賢殿副提學)·이조참판(吏曹參判)·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1449년 세종(世宗) 31년 기사(己巳)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영중추원사(領中
樞院事)를 지내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詩)에도 능하고 해서(楷書)를 잘 써
서 세종(世宗)의 어명(御命)으로 태종(太宗)을 위해『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썼
다.
※ 권중화(權仲和) : 자(字) 용부(容夫) 호(號) 동고(東皐) 시호(諡號) 문절(文節) 관직(官職)
영의정(領議政)이며 월파옹(月波翁) 차종로(車宗老)에 서녀(庶女)의 부랑(夫郞)이다.
1353년 공민왕(恭愍王) 2년 계사(癸巳)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우왕(禑王)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어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라
1396년 태조(太祖) 5년 병자(丙子)에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다.
1407년 태종(太宗) 7년 정해(丁亥)에 영의정(領議政)이 되고 예천백(醴泉伯)에 봉
(封)해졌다.
※ 권한공(權漢功) : 호(號) 일재(一齋) 시호(諡號) 문탄(文坦) 관직(官職) 도첨의정승(都僉議
政承)이며 월파옹(月波翁)의 서녀부랑(庶女夫郞) 권중화(權仲和)의 선고(先考)이다.
권한공(權漢功)은 충열왕(忠烈王) 때 분과(文科)에 급제, 직사관(直史館)을 거쳐,
1294년 충열왕(忠烈王) 20년 갑오(甲午)에 성절사(聖節使)로 원(元)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밀직부사(密直副使)·첨의평리(僉議評理)를 거쳐 충숙왕(忠肅王) 초(初)에 삼사사
(三司事)·찬성사(贊成事)를 지내었고, 그후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러 예천부
원군(醴泉府院君)에 봉(封)해졌다.
19 世 휘(諱) 안노(安老) (文穆公 車蒲溫의 四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의 상장군(上將軍)이며 상장군공파(上將
軍公派)의 파조(派祖)이다. 공(公)은 고려멸망(高麗滅亡)하고 조선
개국초(朝鮮開國初)에 차문외얼(車門外孼)들의 무고(誣告)로 왕자
난(王子亂)에 연루(連累)되어 적족재화(赤族災禍)를 당하고 정도전
(鄭道傳)이 고려국사판(高麗國史版) 천삭날조(擅削捏造)와 하륜(河
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보판(車門譜版)과 문헌분탕(文獻焚蕩)으
로 공(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되어 알 수 없으며 공(公)의 배부
인(配夫人)은 흥주안씨(興州安氏)이며 친부(親父)는 상장군(上將軍)
안 휴(安 休)이다.
19 世 휘(諱) 중문(仲文) (侍中公 車 珍의 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의 예빈경(禮賓卿)이며 고려멸망(高麗滅
亡)하고 조선개국초(朝鮮開國初)에 차문외얼(車門外孼)들의 무고
(誣告)로 왕자난(王子亂)에 연루(連累)되어 적족재화(赤族災禍)를
당하여 시중(侍中) 이세옹(李世翁)과 함께 귀양 간 후로 알지 못
하고 정도전(鄭道傳)의 국사판(國史版) 천삭날조(擅削捏造)와 하륜
(河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보판(車門譜版)과 문헌분탕(文獻焚蕩)
으로 공(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
19 世 휘(諱) 인수(仁守) (領同正公 車 瑧의 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의 현감(縣監 : 領同正)이며 고려멸망(高麗
滅亡)하고 조선개국초(朝鮮開國初)에 차문외얼(車門外孼)들의 무고(誣
告)로 왕자난(王子亂)에 연루(連累), 적족재화(赤族災禍)를 당하고 정도
선(鄭道傳)의 국사판(國史版) 천삭날조(擅削捏造)와 하륜(河崙)의 막료
(幕僚)들이 차문보판(車門譜版)과 문헌분탕(文獻焚蕩)으로 공(公)의 사
적실전(事蹟失傳)됨.
19 世 휘(諱) 안도(安道) (中郞將公 車公胤의 子)
버슬은 고려 31대 공민왕조(恭愍王朝)에 판사복시사(判司僕寺
事)이며 호종일등공신(扈從一等功臣) 도형벽상(圖形壁上)으로 자손
(子孫)은 음직서용(蔭職敍用)하고 전결노비(田結奴婢)를 내렸다, 고
려멸망(高麗滅亡)하고 조선개국초(朝鮮開國初)에 차문외얼(車門外
孼)들의 무고(誣告)로 왕자난(王子亂)에 연루(連累), 적족재화(赤族
災禍)를 당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국사판(國史版)을 천삭날조(擅削
捏造)하고 하륜(河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보판(車門譜版)과 문헌
분탕(文獻焚蕩)으로 공(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 공(公)의 배부인
(配夫人)은 홍씨(洪氏)이며 친부(親父)는 홍륜(洪倫)이며 공(公)의
서랑(婿郞) 경주인(慶州人)최습(崔隰)이며 그의 서녀부랑(庶女夫郞)
이 봉화인(奉化人) 청도전(鄭道傳)이다.
19 世 휘(諱) 중문(仲文) (監察公 車世胤의 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예빈경(禮賓卿)이며 고려말망(高麗滅
亡)하고 조선개국초(朝鮮開國初)에 차문외얼(車門外孼)들의 무고
(誣告)로 왕자난(王子亂)에 연루(連累), 적족재화(赤族災禍)를 당
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국사판(國史版)을 천삭날조(擅削捏造)하고
하륜(河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보판(車門譜版)과 문헌분탕(文獻
焚蕩)으로 공(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되었다.
20 世 휘(諱) 밀부(密頫) (政堂文學公 車壽童의 長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밀직(密直) 또는 시중(侍中)이라 하
며, 고려멸망(高麗滅亡)하고 조선개국초(朝鮮開國初)에 차문외얼(車
門外孼)들의 무고(誣告)로 왕자난(王子亂)에 연루(連累), 적족재화
(赤族災禍)를 당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국사판(國史版)을 천삭날조
(擅削捏造)하고 하륜(河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보판(車門譜版)과
문헌분탕(文獻焚蕩)으로 공(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 공(公)의 묘
역(墓域)은 양주(楊州) 봉황산(鳳凰山) 곤좌원(坤坐原)을 1972년 2
월 말(末)에 평택(平澤) 장안동(長安洞) 산92번지 합동묘역(合同墓
域)에 면례이장(緬禮移葬)하였다. 공(公) 배부인(配夫人) 실전(失傳)
으로 미상불지(未詳不知)이며 공(公)에 장자(長子)는 고려조(高麗
朝) 중랑장(中郞將) 좌대언(左代言) 송림백(松林伯) 차륜(車輪), 차
자(次子) 차전(車轉) 두 아들이 있다.
20 世 휘(諱) 종부(宗頫) (政堂文學公 車壽童의 次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의 참정(參政)이며, 고려멸망(高麗滅亡)하
고, 조선개국초(朝鮮開國初)에 차문외얼(車門外孼)들의 무고(誣告)
로 왕자난(王子亂)에 연루(連累), 적족재화(赤族災禍)를 당하고, 정
도전(鄭道傳)이 국사판(國史版)을 천삭날조(擅削捏造)하고 하륜(河
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보판(車門譜版)과 문헌분탕(文獻焚蕩)으
로 공(公)의 사적(事蹟) 및 묘역실전(墓域失傳),『차운암선생 설원
록(車雲巖先生 雪寃錄)』에 일어기를 참정(參政) 종부(宗頫)는 마
원(麻原)에서 하륜(河崙)의 막료(幕僚)들에 추살(椎殺)하였다. 하며
공(公)의 배부인(配夫人)과 묘역(墓域)은 실전미상(失傳未詳)이다.
20 世 휘(諱) 형부(亨頫) (政堂文學公 車壽童의 三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부사(副使)이며, 고려멸망(高麗滅亡)하
고 조선개국초(朝鮮開國初)에 차문외얼(車門外孼)들의 무고(誣告)
로 왕자난(王子亂)에 연루(連累), 적족재화(赤族災禍)를 당하고, 정
도전(鄭道傳)이 국사판(國史版)을 천삭날조(擅削捏造)하고 하륜(河
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보판(車門譜版)과 문헌분탕(文獻焚蕩)으
로 공(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차운암선생 설원록(車雲巖先生
雪寃錄)』에 일어기를 부사(副使) 형부(亨頫)는 마원(麻原)에서 하
륜(河崙)의 막료(幕僚)들에 추살(椎殺)하였다. 하며 공(公)의 배부
인(配夫人) 및 묘역(墓域)은 실전미상(失傳未詳)이다.
20 세 휘(諱) 강질(剛質) (典書公 車命童의 長子)
초휘(初諱)는 상질(尙質)이며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총제(摠
制)라고 하며, 고려멸망(高麗滅亡)하고 조선개국초(朝鮮開國初)에
차문외얼(車門外孼)들의 무고(誣告)로 왕자난(王子亂)에 연루(連
累), 적족재화(赤族災禍)를 당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국사판(國史
版)을 천삭날조(擅削捏造)하고, 하륜(河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
보판(車門譜版)과 문헌분탕(文獻焚蕩)으로 공(公)의 사적실전(事蹟
失傳),『차운암선생 설원록(車雲巖先生 雪寃錄)』에 일어기를 총제
摠制) 강질(剛質)은 윤안명(尹安命)과 함께 서수(西陲)로 유배(流
配)되어 우졸(郵卒)을 면하지 못했다고 하였다. 공(公)의 배부인(配
人)과 묘역(墓域)은 실전미상(失傳未詳)이며 공(公)에 장자(長子)
고려조(高麗朝) 전서(典書) 차덕륜(車德輪), 차자(次子) 고려조(高麗
朝)의 무과등제(武科登第) 별장(別將) 차연(車衍), 삼자(三子) 차지
보(車止輔) 등이 있다.
20 世 휘(諱) 공질(公質) (典書公 車命童의 次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대언(代言)이며, 고려멸망(高麗滅亡)
하고 조선개국초(朝鮮開國初)에 차문외얼(車門外孼)들의 무고(誣
告)로 왕자난(王子亂)에 연루(連累), 적족재화(赤族災禍)를 당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국사판(國史版)을 천삭날조(擅削捏造)하고 하륜
(河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보판(車門譜版)과 문헌분탕(文獻焚蕩)
으로 공(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차운암선생 설원록(車雲巖先生
雪寃錄)』에 일어기를 대언(代言) 공질(公質)·전서(典書) 명동(命
童)은 먼 남주(南州)에서 향리(鄕吏)를 자원(自願)하였다하고. 공
(公)의 배부인(配夫人)과 묘역(墓域)은 실전미상(失傳未詳)이며 아
들은 장자(長子) 차지안(車止安), 차자(次子) 차지순(車止順) 등이
있다.
20 世 휘(諱) 보명(寶命) (典書公 車命童의 三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참정(參政)이며, 고려멸망(高麗滅亡)
하고 조선개국초(朝鮮開國初)에 차문외얼(車門外孼)들의 무고(誣
告)로 왕자난(王子亂)에 연루(連累), 적족재화(赤族災禍)를 당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국사판(國史版)을 천삭날조(擅削捏造)하고 하륜
(河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보판(車門譜版)과 문헌분탕(文獻焚蕩)
으로 공(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차운암선생 설원록(車雲巖先生
雪寃錄)』에 일어기를 문학(文學) 수동(壽童)· 참정(參政) 보명(寶
命)은 려흥(驪興)의 근처(近處)에서 스스로 인노(人奴)로 기탁(寄
托)했다하며, 공(公) 배부인(配夫人)과 묘역(墓域)은 실전미상(失傳
未詳)이며 아들은 장자(長子) 차종혁(車從革), 차자(次子) 차종경
(車從慶) 등이 있다.
20 世 휘(諱) 보륜(寶輪) (典書公 車命童의 四子)
벼슬은 고려조(高麗組)에 감무(監務)이며 고려멸망(高麗滅亡)하
고, 조선개국초(朝鮮開國初)에 차문외얼(車門外孼)들의 무고(誣告)
로 왕자난(王子亂)에 연루(連累), 적족재화(赤族災禍)를 당하고, 정
도전(鄭道傳)이 국사판(國史版)을 천삭날조(擅削捏造)하고 하륜(河
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보판(車門譜版)과 문헌분탕(文獻焚蕩)으
로 공(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차운암선생 설원록(車雲巖先生
雪寃錄)』에 일어기를 감무(監務) 보륜(寶輪)는 다시 남평(南平)에
서 장사(長沙)로 옮겨 굶어 죽었다하나 공(公)의 배부인(配夫人)과
묘역(墓域)은 실전(失傳)으로 미상불지(未詳不知)이며 아들은 장자
(長子) 차을봉(車乙鳳), 차자(次子) 기봉(己鳳) 등이 있다.
20 世 휘(諱) 숭부(崇頫) (知防禦使 月波翁 車宗老의 長子)
벼슬은 참정(參政)이며 고려멸망(高麗滅亡)하고 조선개국초(朝
鮮開國初)에 차문외얼(車門外孼)들의 무고(誣告)로 적족재화(赤族
災禍)를 당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국사판(國史版)을 천삭날조(擅削
捏造)하고 하륜(河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보판(車門譜版)과 문헌
분탕(文獻焚蕩)으로 공(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차운암선생 설
원록(車雲巖先生 雪寃錄)』에 일어기를 그 형(兄) 참정(參政) 숭부
(崇頫)·밀직부사(密直副使) 숭질(崇質)은 마침내 송원(松原)에서 추
살(椎殺)되었다. 하며 공(公)의 묘역(墓域)은 실전(失傳),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심씨(沈氏)이며 부(父)는 지군사(知郡事) 심입인
(沈立仁)이며 아들은 장자(長子) 고려조(高麗朝) 정당문학(政堂文
學) 차철(車轍), 차자(次子) 고려조(高麗朝) 정당(政堂) 차식(車軾)
이 있으며 서랑(婿郞)은 랑장(郞將) 연안인(延安人) 전취천(田就阡)
이다.
20 世 휘(諱) 숭질(崇質) (知防禦使 月波翁 車宗老의 次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밀직부사(密直副使)이며, 고려멸망(高
麗滅亡)하고 조선개국초(朝鮮開國初)에 차문외얼(車門外孼)들의 무
고(誣告)로 왕자난(王子亂)에 연루(連累), 적족재화(赤族災禍)를 당
하고 정도전(鄭道傳)이 국사판(國史版)을 천삭날조(擅削捏造)하고
하륜(河崙)의 막료(幕僚)들이 차문보판(車門譜版)과 문헌분탕(文獻
焚蕩)으로 공(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차운암선생 설원록(車雲
巖先生 雪寃錄)』에 일어기를『그 형(兄) 참정(參政) 숭부(崇頫)·밀
직(密直) 숭질(崇質)은 마침내 송원(松原)에서 운명(殞命)하였다.』
하며 공(公)의 배부인(配夫人) 파주염씨(坡州廉氏)이며 부(父)는 정
승(政丞) 염정수(廉廷秀)이며 생이남(生二男)에 장자(長子) 차 유
(車 有)·차자(次子) 차 인(車 轔)이며, 생이녀(生二女)에 장서랑(長
婿郞) 소 호(蘇 浩), 부(父)는 소 담(蘇 覃)·차서랑(次婿郞) 행주인
(幸州人) 은 현(殷 顯), 부(父)는 이조판서(吏曹判書) 은여림(殷汝
霖)이다, 밀직부사(密直副使) 차숭질(車崇質)의 양위묘역(兩位墓域)
은 실전미상(實傳未詳)이다.
※ 염정수(廉廷秀) : 자(字) 민망(民望) 호(號) 의정(萓庭) 관직(官職) 대제학(大提學)이며
밀직부사(密職副使) 차숭질(車崇質)의 배부인(配夫人) 파주염씨(坡州廉氏)의 친부(親
父)이다. 공(公)은 1371년 공민왕(恭愍王) 20년 신해(辛亥)에 문과급제(文科及第),
1383년 우왕(禑王) 9년 계해(癸亥)에 지신사(知申事)로서 한 때 전주(銓注 : 인물을 심
사하여 알맡는 일자리에 배정함)를 맡아보았으며,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호복(胡服)을 폐
지하고 중국제도(中國制度)를 따르자고 건의(建議)했다. 그 후 동지밀직(同知密直)·대
제학(大提學)에 이르렀으나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에 의(依)해 형(兄) 염흥방
(廉興邦)과 임견비(林堅味) 등과 함께 처영(處刑)되었다.
※ 은여림(殷汝霖) : 행주인(行州人)이며 조선조(朝鮮朝)에 이조판서(吏曹判書)이며, 밀직부
사(密直副使) 차숭질(車崇質)의 차서랑(次婿郞) 은 현(殷 顯)의 선고(先考)이다.
20 世 휘(諱) 원부(原頫) (知防禦使 月波翁 車宗老의 三子)
자(字) 사평(思平) 호(號) 운암(雲巖) 시호(諡號) 문절(文節)이며
1320년 고려 27대 충숙왕(忠肅王) 7년 경신(庚申)에 탄생(誕生)하
시고 1364년 고려 31대 공민왕(恭愍王) 13년 갑진(甲辰)에 문과(文
科)로 등용(登用), 벼슬은 간의대부(諫議大夫)·보문각직제학(寶文閣
直提學) 겸(兼) 지국평장사(知國平章事)이며 참증(參證 :참고가 될만한
증거)의 예도(禮度)를 풀이하여 사전(祀典 :제사지내는 의식)의 조리(條
理)를 만들고 정도(正道)를 지키고, 불교(佛敎)를 물리치며 포은(圃
隱)·야은(冶隱) 선생과 함께 제명(齊名 : 명망(名望)이 서로 비섯함)하였으
며 한 때 명사(名士)가 많이 그 문하(門下)에서 나왔다. 공(公)은 마
음대로 정권(政權)을 희롱(戱弄)하는 신돈(辛旽)을 죽이고, 임견미
(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은 권귀(權貴)로 임금을 속이고 백성(百
姓)의 민재(民財)와 민전(民田)을 탈취(奪取)하는 간신(奸臣)으로 제
거(除去)하자는 정대(正大)한 지론(持論)을 폈으며 사전개혁(私田改
革)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친근한 사이라도 편들지 않았다. 1285년
고려 32대 우왕(禑王) 11년에 불의(不義)의 무리들로 정국(政局)이
위험지경(危險地境)에 빠지자 임금에게 이들을 제거(除去)할 것을
극진(極盡)이 간언(諫言)하였으나 임금의 불응(不應)으로 도저히 정
국(政局)을 구제(救濟)할 수 없음을 알고 공(公)께서 벼슬을 버리고
평산 수운암동(平山 水雲巖洞)으로 퇴거(退居)하여 토옥(土屋)에 살
면서 고석(苦席)에 주역(周易)의 이치(理致)에 침잠(沈潛)하고, 망국
(亡國)의 죄인(罪人)을 자처(自處)하며 불의(不義)와 부귀(富貴)는
초개(草芥)같이 보았다. 1386년 우왕(禑王) 12년에 공(公)은 가문
(家門)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을 자신(自身)에게 주어진 사명(使命)
으로 여기고 왕(王)·차(車)·류(柳) 삼성(三姓)의 역사를 정리하여 왕
차류보판(王車柳譜版)을 판각간행(板刻刊行)하여 해주(海州) 신광사
(神光寺)에 소장(所藏), 이 판각보판(板刻譜版)이 우리나라 족보(族
譜)의 효시(嚆矢)이다. 1388년 우왕(禑王) 14년 무진(戊辰)에 명
(明)나라가 요동(遼東 :만주에 옛 고구려 땅)에 철령위(鐵嶺衛)를 설치함
에 우왕(禑王)은 이성계(李成桂)를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로 조민
수(曺敏修)를 좌군도통사(左軍都統使)로 최 영(崔 瑩)을 팔도도통사
(八道都統使)로 삼고 요동(遼東)을 정벌(征伐), 환수(還收)하라고 명
하였다. 이에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성계(李成桂)는 좌군도통사
(左軍都統使)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요동정벌(遼東征伐)의 행군(行
軍)을 하였으나 우번(憂煩)의 진퇴유곡(進退維谷)이라 압록강 위화
도(威化島)에 이르러 행군(行軍)을 멈추고 군사를 쉬게 하고 평원
(平原)에 수렵(狩獵)을 빙자(憑藉)하고 이성계(李成桂)는 이방원(李
芳遠)과 같이 평산(平山) 수운암동(水雲巖洞) 공(公)의 토옥(土屋)을
방문(訪問), 요동정벌(遼東征伐)의 계책(計策)을 물으니 공(公)의 대
답(對答)은『以

外외
服복犯범
中중
國국
一일
不불
可가
也야


陪배
臣신
犯범
天천
子자
二이
不불
可가
也야
』라 하였
더니 이에 이성계(李成桂)는 이 말에 크게 깨닫고 위화도(威化島)로
부터 회군(回軍)하는 의성(義聲)이 천하(天下)에 알려져서 마침내
대업(大業)을 창건(創建)하여 만년종사(萬年宗社)로 조선(朝鮮)을 개
국(開國)하였다. 1392년에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李成桂)는 조선(朝
鮮)의 왕으로 즉위(卽位)하여 공선(功選)하는 날 조 준(趙 浚)과 이
양우(李良佑) 등을 공(公)에게 보내 공선(功選)에 참여하자고 불렀
지만 공(公)은『차라리 다섯말의 식초는 마실망정 공선(功選)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말한 것은 망복(罔僕)의 절의(節義)를 온전히
하고자 한 뜻이며 이 뜻은 송산(松山) 조운흘(趙云仡)과 더불어 야
은(冶隱) 길 재(吉 再)와 같았다. 이태조(李太祖)는 처음 공(公)에게
정언(正言)을 제수(除授)하였으나 받지 않으므로 다시 평의랑중(評
議郞中)을 삼고 또 전농시사(典農寺事)를 삼았으나 모두 거절하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니 세인(世人)들이 밝은 구슬과 맑은 서리와
같다고 칭하였다. 여말선초(麗末鮮初)에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이 원주(原州) 치악산(雉嶽山) 정상(頂上)에 제단(祭壇)을 만들고 단
군(檀君)·기자(箕子)·고려태조(高麗太祖) 등 열성(列聖)과 공민왕(恭
愍王)·우왕(禑王)·창왕(昌王)·공양왕(恭讓王) 등 변혁(變革)을 낭한
왕들을 비롯하여 고려조(高麗朝)에 충성(忠誠)하다가 살신성인(殺身
成仁)의 충신(忠臣)들을 매년춘추(每年春秋)로 제사를 드렸는데 여
기에 공(公)도 의리(義理)를 같이 하는 동지들과 단사(壇祀)에 종참
(從參)하였다. 공(公)은 조선조(朝鮮朝)에 불복(不服)하고 오직 고려
조(高麗朝)를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사모(思慕)하며 그강
개(慷慨)한 충성으로 일월(日月)같이 밝은 절의(節義)를 온전히 하
였음은 이미 무너진 천지(天地)에 강상(綱常)을 수립(樹立)하고 혼
란한 풍속(風俗)에 하늘이 정한 떳떳한 윤리(倫理)를 밝게 하신 두
문동(杜門洞) 72현(賢)의 한분으로 추앙(推仰)을 받고 있다. 이태조
(李太祖)가 만년(晩年)에 이르러 나라의 근본(根本)을 정하고자 노
심초사(勞心焦思)하던 중 문득 꿈에 공(公)의 토옥(土屋)으로 태조
(太祖)께서 들어가는 꿈을 얻음으로 드디어 태조(太祖)께서 공(公)
을 모셔오도록 하루에 다섯 번씩 명하고 한 달에 3번이나 칙사(勅
使)를 보내 군신간(君臣間)이 아닌 고구(故舊)로서 불으므로 부득이
응소(應召)하여 여러 날을 머무니 이태조(李太祖)가 미복(微服)차림
으로 공(公)을 옛 친구로 대접하였다. 태조(太祖)께서 공(公)이 머물
지 않을 것을 알고 여러 왕자들에게 왕위(王位)를 돌려가며 전위(傳
位)하는 저위륜전책(儲位輪轉策)을 물으니 공(公)께서 놀라며 말 하
기를『옛날 당(唐)나라 조조(高祖)가 창업(創業)하여 건성(建成)과
원길(元吉)을 세웠으나 모두 죽었는데 이것이 비록 태종(太宗)의 허
물이나 고조(高祖)의 가르침이고 또 현종(玄宗)이 즉위(卽位)할 때
그의 형(兄) 영(寧)이 왕위(王位)를 사양(辭讓)하며 이르기를 시국
(時局)이 평탄(平坦)하면 먼저 적실(嫡室)의 큰 아들이 왕위(王位)를
잇는 것이며, 시국(時局)이 어지러울 때면 공훈(功勳)이 있는 아들
을 먼저 세움이 옳은 것이며 이것이 실권(實權)을 옳게 하는 처변
(處變)의 길이요 변란(變亂)을 막는 처사(處事)입니다. 여러 왕자(王
子)들이 비록 부녕(父命)에 따라 형제(兄弟)가 서로 왕위(王位)를 전
한다고 하더라도 모든 신하들이 다투어 서로 그의 주인을 왕으로
세우고저 반드시 난(亂)을 일으킬 것인 즉 난(亂)이 일어나면 만대
(萬代)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하고 이방원(李芳遠)의 공적(功
績)을 말 하는데 끝나지 않았는데 태조(太祖)는 이방원(李芳遠)이
저위륜전(儲位輪轉)할 생각이 없을 것을 크게 깨달았다. 조선조(朝
鮮朝)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인 정도전(鄭道傳)·함부림(咸傅霖)·조영
규(趙英珪)·하 륜(河 崙) 등은 차문(車門)에 외얼(外孼)들인데 공(公)
께서 1386년에 판각간행(板刻刊行)한 보판(譜版)에 그들의 출생신
분(出生身分)을 직서(直書)한 것을 원망(怨望)하였으며 특히 하 륜
(河 崙)은 신덕왕후(神德王后) 의 친척인 강 호(康 昊)와 강 민(康
旻)은 하 륜(河 崙)이 화방(花房=花冠)을 더럽힌다는 이유로 절교(絶
交)하는 처지라 차문외얼(車門外孼)들과 공모(共謀)하여 강·차(康·
車) 두 집안을 몰락(沒落)시키고자 기도(企圖)하던 중 제1차 왕자난
(王子亂)을 틈을 이용하여 1398년 태조(太祖) 7년 무인(戊寅) 음 9
월 15일에 막료(幕僚) 이숙번(李叔蕃)과 사병(私兵)을 시켜 공(公)께
서 한양(漢陽)에서 귀향(歸鄕)한다는 소식 듣고 내외친족(內外親族)
들이 마중을 나왔는데 송원(松原)과 마원(麻原)에서 70여인을 일시
에 추살(椎殺)하고 공(公)도 참화(慘禍)를 당하고 해주(海州) 신광사
(神光寺)에 소장(所藏)되어 있는 공(公)께서 만든 판각보판(板刻譜
版)과 문헌(文獻)들이 분탕소실(焚蕩燒失)되었다. 이태조께서 공(公)
이 참화(慘禍)를 당한 소식을 듣고 진노(震怒)하여 이방원(李芳遠)
을 질책(質責)으로 이방원(李芳遠)이 잘못을 회개(悔改)하고 공(公)
의 치제(致祭)를 명하고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증직(贈職)
한 후 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가증(加贈), 전민(田民)과 가사(家
舍)를 모두 돌려준 후 다시 녹봉(祿俸)을 주었다. 1313년 태종(太
宗) 13년 계사(癸巳)에 좌명공신(佐命功臣) 소정공(昭靖公) 윤 곤(尹
坤)과 좌명공신(佐命公臣) 평도공(平度公) 박 은(朴 訔) 등 제현(諸
賢)들이 차례로 공(公)의 억울함을 태종(太宗)에게 진백(陳白)하여
신원(伸寃)을 청하였고, 1427년 세종(世宗) 9년 정미(丁未)에 좌대
언(左代言) 이맹진(李孟畛)이 스스로 소장(疏章)을 올려 공(公)의 무
고(誣告)함을 변론(辯論)을 하였고, 1447년 세종(世宗) 29년 정묘
(丁卯)에 충정공(忠定公) 황보인(皇甫仁)과 충정공(忠正公) 박팽년
(朴彭年) · 성삼문(成三問) · 신석조(申碩祖)가 공(公)은 억울하다고
설원(雪寃)을 청하였다. 1453년 단종(端宗) 1년 계유(癸酉)에 선왕
(先王) 문종(文宗)의 명을 받들어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박팽년
(朴彭年)에게 전(田) 50결(結)을 내리고 설원기문(雪寃記文)을 찬
(撰)하라 명하고 하위지(河緯地)와 성삼문(成三問) 등 44인이 교령
(敎令)을 받들어 서문(序文)과 시(詩)에 주해(註解)를 지어 붙이고
1356년 세조(世祖) 2년 병자(丙子)에《車

雲운
巖암
先선
生생


寃원
記기
》를 찬진
(撰進)하였으며, 미기(未幾)에 단종(端宗)의 복위사건(復位事件)으로
인하여 사장(死藏)되었다가 1791년 정조(正祖) 15년 신해(辛亥)에
정헌대부(正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지경연춘추관동지(知經
筵春秋館同知) 성균관사(成均館事)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오위도
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 홍양호(洪良浩)께서 말문(跋文)을
찬(撰)하여 신해판(辛亥版) 책명(冊名)을《車

雲운
巖암
先선
生생


寃원
錄록
》이라
하여 세상(世上)에 반포(頒布)하였다. 공(公)은 일찍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시사(時事)를 탄식(歎息)하며 지은 시(詩)에
《황애막막창첨민 거선서풍염오인 다사만운능작우 반도전세만의진》
이라 찬역(簒逆)의 무리를 단번에 소탕(掃蕩)코저 하는 격분(激憤)
한 심정(心情)을 표현(表現)하였다. 공(公)은 두문동(杜門洞) 서원(書
院)에 봉안(奉安)된 72현(賢)중의 한분이며, 공(公)의 아들은 차안경
(車安卿)이며 공(公)의 서랑(婿郞 :長女)은 생원(生員) 인동인(仁同人)
유인수(兪仁守)이며 그의 아들은 부정(副正) 유흥준(兪興俊)이며 차
서랑(次婿郞 :次女)는 조선조(朝鮮朝)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 나주
(羅州人) 전삼달(全三達)이며 충혜왕(忠惠王) 복위(復位) 2년 신사
(辛巳) 1341년에 조적(曹頔)의 난(亂)에 공을 세워 나성군(羅城君)
에 봉(封)해진 전경(全卿)의 후손(後孫)이며, 삼서랑(三婿郞) 황보림
(皇甫琳)은 공민왕(恭愍王) 때 홍건적(紅巾賊)을 격퇴한 공으로 일
등공신이 되었고, 우왕(禑王) 때는 여러번 왜구(倭寇)를 막아 공을
세웠다. 1388년 우왕
14년에 요동정벌(遼
東征伐) 부원수(副元
帥)로 이성계(李成桂)
의 위화도(威化島) 회
군(回軍)에 가담하여
일등공신 (一等功臣)에
올랐다. 그후 삼도도체
찰사(三道都體察使)가
되어 광주(光州)·남원(南
原)등에 침입한 왜구(倭
寇)를 격퇴하고, 서북면
도절제사(西北面都節制
使)가 되었다. 그 후 밀직사(密直使)로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
(明)나라에 다녀왔으며, 조선개국(朝鮮開國 후 지중추원사(知中樞院
事)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 황보인(皇甫仁)은 1414년 태종 14년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고, 세종(世宗) 때 장령(掌令)·강원도
(江原道) 관찰사(觀察使)를 거쳐 1436년 세종 18년에 병조판서(兵
曹判書)가 되었으며, 1440년 평안(平安)·함길도체찰사(咸吉道體察
使)가 된 후 약 10년간에 걸쳐 절제사(節制使) 김종서(金宗瑞)와 함
께 육진(六鎭)을 개척했다. 그 후 좌우찬성(左右贊成)을 거쳐 1447
년 세종29년에 우의정(右議政)에 승진했으며, 1452년 문종(文宗) 2
년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문종의 고명(顧命)을 받들어 단종(端宗)
을 보좌(輔佐)하다가 1453년 단종 1년 계유정난(癸酉靖亂) 때 김종
서(金宗瑞)와 함께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살해(殺害)되고 두 아들
및 손자도 이때 같이 화(禍)를 입었다. 숙종(肅宗) 때 복관(復官)되
었고, 영천(永川)의 임고서원(臨皐書院)과 종성(鍾城)의 행영사(行營
祠)에 제향(祭享)하고 있으며, 공(公)의 사서랑(四婿郞 :四女) 파평인
(坡平人) 윤희제(尹希齊)는 1380년 우왕 6년~1467년 세조(世祖)
13년에 정헌대부(正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이르고, 보국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증직(贈職)되고 그의 선고(先考)는 소정
공(昭靖公) 윤곤(尹坤)으로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윤승순(尹承順)
의 아들이며, 고려말 문과(文科)에 급제, 그의 동생 윤향(尹向)과 함
께 문학(文學)으로 기용(起用)되고, 1400년 정종(定宗) 2년에 동지
총제(同知摠制)로서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李芳遠 : 태종)에 가
담하여 1401년 태종 1년 좌명공신(佐命功臣) 3등이 되고, 파평군
(坡平君)에 봉해졌으며, 이해에 사은부사(謝恩副使)로 명나라에 다
녀왔으며 1408년에 사은사(謝恩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오고
1418년 세종이 즉위하자 평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로 기악(妓
樂)을 폐지하고 풍속(風俗)을 바로잡는 등 치적(治績)을 남겼으며,
1219년에 우찬성(右贊成)·이조판서(吏曹判書)를 역임했다. 공(公)의
오서랑(五婿郞 :五女)은 파평인(坡平人) 윤태산(尹太山)이며 그의 증
조(曾祖)는 영평군(領平君) 윤척(尹陟)이요 조고(祖考)는 판도판서
(版圖判書) 윤승례(尹承禮)요. 선고(先考)는 부윤공(府尹公) 윤보노
(尹普老)이다.
20 世 휘(諱) 원명(原命) (知防禦使 月波翁 車宗老의 四子)
벼설은 고려조(高麗朝)에 도총제(都摠制)이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초(朝鮮初)에 사얼피무지화(四孼被誣之禍)로 선산(善山)으로
귀양을 갔다는 기록이「車

雲운
巖암
先선
生생


寃원
錄록
」에 있으나 사얼(四孼)
들이 국사판(國史版)의 천삭날조(擅削捏造)와 차문(車門)의 보판(譜
版) 및 문헌분탕(文獻焚蕩)으로 공(公)의 행적(行蹟)이 실전(失傳)
되고 가문(家門)의 적족지화(赤族之禍)로 귀양을 간 후 행적(行蹟)
은 미상(未詳)이며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해평인(海平人) 길원
진(吉元進 :자(字) 고천(高薦) 호(號) 송고(松皐) 벼설은 보성판관(寶城判官))의 딸
이며 아들 차현경(車顯卿)은 숙부(叔父) 차견명(車堅命)과 족형제
(族兄弟)인 차안혁(車安革)·차안성(車安性)·차종혁(車從革)·차종경
(車從慶)·차운혁(車云革)·차운포(車云苞)·차지안(車止安)·차지순(車
止順) 등과 함께 일시(一時)에 북변(北邊)으로 유배(流配)했다는 기
록이「車

雲운
巖암
先선
生생


寃원
錄록
」에 있다.
20 世 휘(諱) 견질(堅質) (知防禦使 月波翁 車宗老의 五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찬성(贊成)이며「車

雲운
巖암
先선
生생


寃원
錄록

의 기록(記錄)을 살펴보면, 고려멸망(高麗滅亡)과 조선(朝鮮)의 개
국초(開國初)에 사얼(四孼 : 정도전·함부림·조영규·하륜)들의 피무지화(被
誣之禍)로 그의 동생 차견명(車堅命)과 제질(諸姪 :차안혁·차안성·차종
혁·차종경·차운혁·차운포·차지안·차지순·차현경) 등 10여인이 일시(一時)에 북
변(北邊)으로 유배(流配)하여 초배(初配)는 쌍성(雙城)에 관노(官
奴) · 재배(再配)는 길주(吉州)에 관노(官奴) · 삼배(三配)는 회령
(會寧)의 관노(官奴)에 있다가 마침 은명(恩命)을 받아서 귀양에서
풀려났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벼슬 밀직(密直)을 지낸 청풍
인(淸風人) 김의지(金義之)의 딸이며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대
유(金大猷)의 후예(后裔)로 장자(長子) 차안기(車安耆)·차자(次子)
운혁(云革)·삼자(三子) 운포(云苞) 등 생삼남(生三男)하였고 공(公)
의 서녀(庶女)의 부군(夫君)이 조영규(趙英珪 :사얼중(四孼中)의 한 사람)
이다.
※조영규(趙英珪) :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武臣)이며, 이성계(李成桂)의 천거로 벼슬에
나가 1371년 공민왕 20년 신해(辛亥)에 위위시판사(衛尉寺判事) 때 이성계(李成桂)의
휘하(麾下)에서 함주(咸州) 일대의 왜구(倭寇)를 토벌(討伐)하여 전공(戰功)을 세웠으
며 수차에 걸쳐 왜구(倭寇) 토벌전(討伐戰)에 참전(參戰)하고 이성계(李成桂)가 세력구
축(勢力構築)을 하는데 신진세력(新進勢力)의 무장(武將)으로 크게 활약하였으며,
1392년 공양왕 4년 임신(壬申)에 이방원(李芳遠)과 모의(謀議)하여, 이성계(李成桂)의
문병(問病)을 마치고 돌아가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를 개성(開城)의 선죽교(善
竹橋)에서 격살(擊殺)하였고, 그 해 조준(趙浚)·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이성계(李成
桂)를 추대(推戴)하여 조선개국(朝鮮開國)에 공(功)을 세워 예조전서(禮曹典書)에 승진
(昇進), 개국공신(開國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차문(車門)의 멸문지화(滅門之禍)에 원
흉(元兇)의 일당(一黨)이며, 사후(死後)에 문하부참찬사(門下副參贊事)가 추증(追贈).
신창조씨(新昌趙氏)의 시조(始祖)라 한다.
20 世 휘(諱) 견명(堅命) (知防禦使 月波翁 車宗老의 六子)
벼슬은 대명국(大明國) 진사(進士)이며「車
차 雲운巖암
先선
生생


寃원
錄록
」의
기록(記錄)을 살펴보면 고려멸망(高麗滅亡) 후 조선개국(朝鮮開
國)의 초(初)에 사얼(四孼)들의 피무지화(被誣之禍)로 그의 형(兄)
차견질(車堅質) 및 그에 아들 안혁(安革)·안성(安性)과 제질(諸姪 :
차동혁·차종경·차운혁·차운포·차지안·차지순·차현경) 등과 함께 일시(一時)에
북변(北邊)으로 유배(流配)하였다 하고, 족보를 살펴보면 귀양 후
대명국(大明國)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세거(世居)하였다 하고, 공
(公)의 배부인(配夫人)은 왕우(王瑀)의 딸이며 아들 장남(長男) 차
안혁(車安革)·차남(次男) 차안성(車安性)과 장서랑(長婿郞)은 단양
인(丹陽人) 우의(禹義)이며 그의 부(父)는 우원광(禹原光)이며 차서
랑(次婿郞)은 단양인(丹陽人) 우제(禹磾)이며 그의 부(父)는 우천계
(禹天啓)이다.
20 世 휘(諱) 원석(原碩) (知防禦使 月波翁 車宗老의 庶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시어사(侍御使)이며 일명(一名) 자남(自
南)이며,「車

雲운
巖암
先선
生생


寃원
錄록
」의 기록을 살펴보면 차원석(車原碩),
일명(一名) 자남(自南)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개국(朝鮮開國)의
초(初)에 사얼(四孼)들의 피무지화시(被誣之禍時)에 귀양을 간 북
변(北邊)에서세번 옮긴 후 대명국(大明國)의 초친(椒親)이라 중국
(中國)으로 도입(渡入)하였다 하며, 공(公)의 배부인(配夫人) 지씨
(池氏)의 부(父)는 지득청(池得淸)이며 서랑(婿郞)은 강릉인(江陵人
: 동원인(東原人)이라 함) 함부림(咸傅霖)이며 그의 조고(祖考)는 판도판
서(版圖判書) 함주(咸柱 : 字는 石柱)이며. 선고(先考)는 고려조(高麗
朝)의 제학(提學) 함승경(咸承慶)이며 차문(車門)의 사얼중(四孼中)
한 사람이다.
※함부림(咸傅霖) : 자(字) 윤물(潤物) 호(號) 란계(蘭溪) 시호(諡號) 정평(定平) 관직(官職)
형조판서(刑曹判書)이다. 1385년 우왕(禑王) 11넌 을축(乙丑), 문과(文科)에 급제(及
第). 검열(檢閱)·좌증언(左正言) 등을 거쳐, 1389년 공양왕(恭讓王) 즉위(卽位)에 우헌
납(右獻納)이 되었다. 그후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1392년 공양왕 4년 임신(壬
申)에 병조정랑(兵曹正郞) 겸 도평의사사(都評議司使) 경역사도사(經歷司都事)가 되고,
이해에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조선개국(朝鮮開國)으로 개국공신(開國功臣) 3등에 책
록 되었다. 그후 예조의랑(禮曹議郞)에 이어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상서소윤(尙瑞
少尹)을 겸임(兼任)했으며 명성군(溟城君)에 봉(封)해졌다. 1403년 태종(太宗) 3년 계
미(癸未)에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어 동원군(東原君)으로 개봉(改封)되었
고, 1404년 태종 4년 갑신(甲申)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 1408년 태종 8년 무자
(戊子)에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오르고 병(病)으로 사직(辭職)했다가 다시 경기(京畿)·
충청(忠淸)·경상(慶尙)·황해(黃海) 등 각도(各道)의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동북면
순문찰리사(東北面巡問察理使)를 역임(歷任)했으며, 차문(車門)의 피무지화(被誣之禍)의
원흉(元兇)의 일당(一黨)이다.
20 世 휘(諱) 의남(倚南) (上將軍 車安老의 長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별관어사(別官御史)이며 고려멸망(高麗
滅亡)과 사얼(四孼)들의 무고(誣告)로 조선초(朝鮮初)에 왕자(王子)
의 난(亂)에 연루(連累)되어 적족지화(赤族之禍)를 당하여 그에 자
손(子孫)과 사적실전(事蹟失傳)으로 알 수 없으며 공(公)의 배부인
(配夫人)은 남평인(南平人) 문달한(文達漢)의 딸이며, 공(公)의 장
서랑(長婿郞)은 온양인(溫陽人) 정득진(鄭得珍 ; 先考 少尹 鄭淳祐·祖考
監務 鄭 年이며 아들은 鄭 夏이다)이며 차서랑(次婿郞)은 연안인(延安人)
김 회(金 瀤)가 있다.
20 世 휘(諱) 지남(指南) (上將軍 車安老의 次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총제(摠制)이며,「차운암선생 설원록」
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한 초에 사얼
(四孼)들의 무고(誣告)로 왕자(王子)의 난(亂)에 연루(連累)되어
적족지화시(赤族之禍時)에 전서(典書) 차덕륜(車德輪)과 총제(摠
制) 차지남(車指南)은 의친(懿親 :황실(皇室)의 종친(宗親)이나 외척(外戚)
을 말함)이 있으나 남쪽으로 귀양가 마침 남쪽에서 죽었다 하나
그에 자손(子孫)과 행적실전(行蹟失傳)되어 알 수 없으며 공(公)
의 서랑(婿郞)에 상주인(尙州人) 시정(寺正) 주상빈(周尙彬)이며
그에 선고(先考)는 진사(進士) 주유(周瑜)요 그의 아들은 주장손
(周長孫)이며 그의 손자(孫子)는 주문좌(周文佐)·주문우(周文佑)·
주문보(周文俌) 등 3형제이다.
※주 유(周 瑜) : 주상빈(周尙彬)의 선고(先考)로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
로 길재(吉再)·김자수(金自粹) 등과 함께 벼슬을 마다하고 초계현(草溪縣)에 은거(隱
居)하였고 세칭(世稱) 포번삼절사(逋幡三節士)로 불리었던 진사(進士) 주유(周瑜)를 시
조(始祖)로 하고 선대(先代)들이 세거(世居)해온 상주(尙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
계(世系)를 이어오며, 그의 손자 참의공(參議公) 주장손(周長孫)이 안동목사(安東牧使)
권우(權虞)의 따님과 혼인(婚姻)하여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자(長子)는 성균관생원(成
均館生員) 주문좌(周文佐)요, 차자(次子)는 호군(護軍) 주문우(周文佑)이며 삼자(三子)는
이조참판(吏曹參判) 주문보(周文俌)이다.
20 世 휘(諱) 인부(仁頫) (禮賓卿 車仲文의 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 시중(侍中)이며, 고려(高麗)가 멸망(滅
亡)하고 조선개국(朝鮮開國) 후 서얼(四孼)들의 무고(誣告)로 왕자
(王子)의 난(亂)에 연루(連累)되여 적족지화(赤族之禍)를 당할 때
행적신전(行蹟失傳)으로 알 수 없으며 그의 아들은 차치남(車致
南)이다.
20 世 휘(諱) 성부(聖頫) (縣監(領同正) 車仁守의 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좌우위보승랑(左右衛保勝郞), 시호(諡
號) 문양공(文襄公)이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개국(朝鮮開國) 후
사얼(四孼)들의 무고(誣告)로 왕자(王子)의 난(亂)에 연루(連累)되
여 적족지화(赤族之禍)를 당할 때 행적실전(行蹟失傳)으로 알 수
없으며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가조인(加祚人 : 居昌人) 은자광
록대부(銀紫光祿大夫) 사 순(史 淳)의 따님이며 아들은 차중남(車
仲南)이다.
20 世 휘(諱) 중부(仲頫) (判司僕寺事 車安道의 長子)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참정(參政)이며「車

雲운
巖암
先선
生생




錄록
」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개국(朝鮮開國)
후사얼(四孼)들의 무고(誣告) 왕자(王子)의 난(亂)에 연루(連累),
적족지화(赤族之禍)를 당할 때 정당(政堂) 차중부(車仲頫)는 시중
(侍中) 차인부(車仁頫)는 남황(南荒)으로 귀양을 갔으나 죽은 곳
을 알지 못 한다 하였고, 1915년에 전서공(典書公) 차명동(車命
童)의 후손(後孫)인 진사(進士) 차병관(車炳觀)이 간행(刊行)한을
묘보(乙卯譜)에 기록은 삼종형(三從兄)인 문절공(文節公)이 피무
지화(被誣之禍)로 인(因)하여 장성(長城)으로 귀양을 가서 그 곳
에서 별세(別世)로 망산하(望山下)에 장례(葬禮)하였다. 그 후 장
성(長城) 북삼면(北三面) 봉상곡(鳳翔谷) 신흥리(新興里) 후 중등
(中嶝) 갑좌(甲坐)로 이장(移葬)하였다고 기록(記錄). 공(公)의 배
부인(配夫人)은 미상(未詳) 아들은 차우경(車宇卿)이 있다.
20 世 휘(諱) 인부(仁頫) (判司僕寺事 車安道의 次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시중(侍中)이며 공(公)의 고조(高祖)는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 랑장동정내시윤(郞將同正內侍尹) 중흥백
(中興伯) 세은공(世恩公) 차송우(車松祐)요 증조(曾祖)는 중랑장(中
郞將) 송림백(松林伯) 광주병마사(廣州兵馬使) 차덕규(車德珪)요 조
고(祖考)는 중랑장(中郞將) 차공윤(車公胤)이며 선고(先考)는 판사
복시사(判司僕寺事) 호종일등공신(扈從一等功臣) 차안도(車安道)의
차자(次子)이다.「車

雲운
巖암
先선
生생


寃원
錄록
」의 기록(記錄)을 살펴보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개국의 초에 사얼(四孼)들의 무고(誣告)로 왕
자(王子)의 난(亂)에 연루(連累)되어 적족지화시(赤族之禍時)에 친
형(親兄) 정당문학(政堂文學) 차중부(車仲頫)와 시중(侍中) 차인부
(車仁頫)는 남황(南荒)으로 귀양 가서 죽은 곳을 알지 못 한다하
고, 일민전(逸民傳)과 중경지(中京誌)의 충신편(忠臣編)에 기록(記
錄)은 시중(侍中) 차인부(車仁頫)는 혁세(革世) 후 배록동(排祿洞)
에 은거(隱居)하고 벼슬을 하지 않았고, 사얼(四孼)들의 무고(誣告)
로 적족지화(赤族之禍)의 참화(慘禍)를 당할 때 산산(善山)으로
귀양을 갔다가 늙어서 송경(松京)의 옛 집에 돌아왔다 하였으나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에는 마친바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공
(公)의 사적실전(事蹟失傳)으로 배부인(配夫人)은 미상(未詳)이며
아들은 차선경(車善卿)이 있으며, 려말충신(麗末忠臣)으로 고려대
전(高麗大殿)에 위패봉안(位牌奉安)하여 향사(享祀)하고 있다.
21 世 휘(諱) 안기(安耆) (贊成 車堅質의 長子)
벼슬은 고려조(高麗朝)에 은청대부(銀靑大夫) 광주병마사(廣州
兵馬使) 상주국(上柱國) 상장군(上將軍)이며 공(公)의 고조(高祖)
는 총제(摠制) 시종보좌일등공신(侍從輔佐一等功臣) 차득규(車得
珪)요 증조(曾祖)는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군부판서(軍簿判書)·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지도첨의(知都僉議)·동경유수(東京留守)·
용산군(龍山君)·좌승상(左丞相), 문목공(文穆公) 차포온(車蒲溫)이
며, 조고(祖考)는 지방어사(知防禦使) 월파옹(月波翁) 차종로(車宗
老)요 선고(先考)는 찬성(贊成) 차견질(車堅質)이며,「車

雲운
巖암
先선
生생


寃원
錄록
」의 기록을 살펴보면 차견질(車堅質)의 아들 병마사(兵馬
使) 차안기(車安耆)는 안주(安州)로 귀양을 가서 죽었다 하였고, 공
(公)의 배부인(配夫人)은 청송인(靑松人) 심도원(沈道源)이며 아들
은 장자(長子) 차진의(車眞義)·차자(次子) 차정의(車定義)와 서랑
(婿郞) 고흥인(高興人) 류우생(柳偶生)이다.
21 世 휘(諱) 운혁(云革) (贊成 車堅質의 次子)
연천군(延川君) 시호(諡號) 강렬공(剛烈公)은 초휘(初諱) 운남
(云南) 자(字) 홍기(弘器) 호(號) 쌍청당(雙淸堂) 또는 송암(松菴)
이며 벼슬은 증(贈) 자헌대부(資憲大夫)·호조판서(戶曹判書)·어모
장군(禦侮將軍)·행충좌위좌부사직(行忠佐衛左部司直)이며 또 겸사
복장(兼司僕將)에 천거(薦擧)하였다. 공(公)은 1393년 이태조(李
太祖) 2년 계유생(癸酉生)으로 성품(性品)은 강개(慷慨)하고 대철
(大節)에 많이 기뻐하며, 춘추(春秋 :펀년체로 기록한 역사의 통칭)와 병
학(兵學)을 통달(通達)하였다.「車

雲운
巖암
先선
生생


寃원
錄록
」의 기록을 살
펴보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한 초에 사얼(四孼)들의 무
고(誣告)로 왕자(王子)의 난(亂)에 연루(連累)되어 적족피화(赤族
被禍)를 당할 때 공(公)은 아버지 찬성(贊成) 차견질(車堅質)·숙부
(叔父 : 三寸) 진사(進士) 차견명(車堅命)과 친제(親弟) 차운포(車云
苞)와 함께 여러 족형제(族兄弟)인 차안혁(車安革) · 차안성(車安
性)·차지안(車止安)·차지순(車止順)·차현경(車顯卿) 등 십여인(十餘
人)이 일시(一時)에 북변(北邊)으로 유배(流配)되어 초배(初配)는
쌍성(雙城)의 관노(官奴), 재배(再配)로 길주(吉州)에 관노(官奴),
삼배(三配)로 회령(會寧)의 되어 치욕적(恥辱的)의 수난(受難)을
당하다가 마침내 운암(雲巖) 차원부(車原頫)의 억울한 누명(陋名)
이 단종조(端宗朝) 신원(伸寃)되어 은명(恩命)으로 풀려난 후 벼
슬을 하지 않고 용수동(龍水洞)으로 물러나 은거(隱居), 세조조(世
祖朝)의 특별한 수용(收用)의 명(命)을 받고 상락(上洛)하여 춘
추(春秋 : 역사)와 병서(兵書)를 통달(通達)한 어모장군(禦侮將軍 :
무신(武臣)을 말함)으로 충좌위좌부사직(忠佐衛左部司直)·겸사복장(兼
司僕將)을 역임(歷任)을 하였다. 1457년 세조(世祖) 3년 정축(丁
丑) 10월 24일에 단종(端宗)의 승하(昇遐)하신 소식을 듣고 벼슬
을 사직(辭職)하고 양주(楊州) 도봉산 아래 은거(隱居)하였다.
1467년 세조(世祖) 13년 정해(丁亥) 5월에 회령(會寧)의 전 절제
사(前節制使)인 이시애(李施愛)는 그의 동생 이시합(李施合) 이시
백(李施伯) 등과 함께 길주(吉州)에서 반역(叛逆)하여 난(亂)을 일
으켜서 1467년 5월 18일에 조정(朝廷)에서 명(命)하여 구성군(龜
城君) 이준(李浚)의 장병(將兵)으로 토벌(討伐)하라 하고, 세조(世
祖)는 구성군(龜城君) 외(外) 36명 문무백관(文武百官)을 불러 이
시애(李施愛)의 난(亂)에 대한 방략(方略 :일을 괴하는 책략(策略))을 전
(傳)했다. 공(公)은 1467년 세조(世祖) 13년 정해(丁亥) 음(陰)6
월에 창의(倡義)하여 의병장(義兵將)으로 구성군(龜城君) 이준(李
浚)을 따라가서 종성인(鍾城人) 정휴명(鄭休明)·부녕인(富寧人) 조
규(曺糾)·경성인(鏡城人) 박성장(朴成章) 등과 함께 적중(賊中)에
들어가서 역순(逆順 : 거꾸로 된 순서)을 효유(曉喩 : 깨우쳐 줌)하고, 이
시애(李施愛)의 동생 이시합(李施合)과 이시백(李施伯)을 사로잡
아 관군(官軍)으로 전송(縳送)하는 중로(中路)에서 그 무리들이
풀어 탈거(脫去 = 탈출(脫出))하였다, 공(公)은 또 정휴명(鄭休明)과
함께 종성(鍾城)·회령(會寧)의 병사(兵士)를 거느려 마운령(磨雲
嶺)을 끊으니 적군(賊軍)이 귀의자(歸義者)의 낙역(絡繹 : 왕래가 끊
이지 않는 모양)하니 이시애(李施愛)는 이에 동(東)에 모여서 장구
(長驅 : 앞을 향하여 계속 달림)를 얻지 못 하였는데 이때 최윤손(崔潤
孫)이 배반하여 이시애(李施愛)에게 붙으니 공(公)은 정휴명(鄭休
明)·조규(曺糾)·박성장(朴成章)과 하께 이시애(李施愛)에게 잡혀서
모두 단천(端川)의 옥중(獄中)에서 1467년 세조(世祖) 13년 정
해(丁亥) 음(陰)8월 초(初)7일에 순절(殉節)하였다. 적(賊)을 평정
(平定)하고 그 시신(屍身)을 얻어 보니 시신(屍身)에 가쇄(枷鎖 :
죄인의 목에 칼을 씌움을 말함)를 풀지 않고 두로(頭顱 : 두뇌(頭腦)를 말함)
는 추쇄(椎碎 : 몽치로 째려서 부서짐)하고 칼자루는 손에 잡은 채로 있
으니 세조대왕(世祖大王)은 그 충절(忠節)을 가상(嘉尙)이 여겨 종
사관(從史官 : 장관(長官)에 속하는 벼슬)을 보내어 삼목원혼(三木寃魂)의
차운혁(車云革)·정휴명(鄭休明)·조규(曺糾)·박성장(朴成章) 등을 예
장(禮葬)하고 제문(祭文)을 지어 치제(致祭)를 올리고, 살신성인(殺
身成仁)의 충절(忠節)을 기리어 공(公)에게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
(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가정대부(嘉靖大夫)·병조참판(兵曹參判)·연
천군(延川君)을 추증(追贈)하였다.
1514년 중종(中宗) 9년 갑술(甲戌)에 어제시(御製詩)「兇

醜추
稱칭
兵병
叛반


州주


雲운
以이
北북
骨골
成성邱구
, 獨

將장
忠충
義의
摧최
鋒봉
銳예


死사
英영
名명
萬만
古고
留유
. 功

如여
張장
許허


城성
日일


似사
顔안袁원
罵매
賊적
時시
, 乘

勝승
官관
軍군
齊제
致치
死사


方방
尙상
有유
四사
男남
兒아
」두수를
내리고 우찬성(右贊成) 신용개(申用漑)께서 연천군(延川君)의 토적
도(討賊圖)를 그려서 포전(褒箋)을 올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충신편(忠臣篇)에 입속(入續)하였다. 2702년 숙종(肅宗) 28년 임오
(壬午)에 묘전(墓前)에 신도비(神道碑)를 세웠고, 1792년 정조(正
祖) 16년 임자(壬子)에 호남사림(湖南士林)에서 순천(順天) 오천서
원(鰲川書院)에 문절공(文節公)과 아울러 배향(配享)하였고, 1806
년 순조(純祖) 6년 병인(丙寅)에 교남(嶠南-영남)의 장보(章甫=유생
(儒生)임)는 초계(草溪)에 덕원서원(德源書院)을 세워 문목공(文穆
公)·문절공(文節公) 등과 함께 배향(配享)하였고, 1827년 순조(純
祖) 27년 정해(丁亥)에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가증(加贈)하였고, 1828년 순조(純祖) 28년에 또 울산(蔚山) 통천
사(通川祠)에 배향(配享)하였고, 1841년 헌종(憲宗) 7년 신축(辛
丑)에 강렬(剛烈)로 사시(賜諡)하였고, 1856년 철종(哲宗) 6년 병
진(丙辰)에 유상(遺像)을 칠곡(漆谷)의 연계사(鉛溪祠)와 서흥(瑞
興)의 토동사(吐洞祠)에 봉안(奉安)하였고, 1860년 철종(哲宗) 11
년 경신(庚申)에 관북(關北)의 유생(儒生)이 영흥(永興)에 정충원
(精忠院)을 세워 배향(配享)하였고, 1861년 철종(哲宗) 12년 신유
(辛酉)에 통천사(通川祠)를 자암원(紫巖院) 변경되어 이안(移安)하
였다. 1876년 고종(高宗) 13년 병자(丙子)에 정여(旌閭)를 수원(水
原)의 남산(南山)에 명(命)하였고, 1884년 고종(高宗) 21년 갑신
(甲申)에 묘갈(墓碣)을 개수(改竪)하였고, 1897년 광무(光武) 1년
정유(丁酉)에 함남(咸南)의 사림(士林)에서 충효사(忠孝祠)를 정평
(定平) 비석동(碑石洞)의 묘하(墓下)에 세워 동시(同時)에 순절(殉
節)한 장양공(莊襄公) 이종생(李從生)과 효자(孝子) 성암공(誠菴公)
한사철(韓思喆)을 함께 배향(配享)하였고, 1899년 광무(光武) 3년
기해(己亥)에 유상(遺像)을 본떠서 초계(草溪) 여심당(如心堂)에 봉
안(奉安)하고 사림(士林)에서 3월과 9월의 상정일(上丁日)에 봉향
(奉享)하였으며, 실기집(實記集) 2권(卷)을 간행(刊行)하여 세상(世
上)에 있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 정부인(貞夫人) 광산김씨(光
山金氏)이며 생삼남(生三男)하니 장자(長子) 차의중(車義重)·차자
(次子) 차지중(車智重)·삼자(三子) 차신중(車信重)은 다 음직(蔭職)
으로 첨정(僉正)이며, 차의중(車義重) 아들 장자(長子) 차득평(車得
平)은 성균생원(成均生員)·벼슬은 첨정(僉正)이며, 차자(次子) 차득
안(車得安)은 벼슬 부정(副正)을 지내였고, 삼자(三子) 차득연(車得
連) 사자(四子) 차득소(車得沼)이며, 차득평(車得平)의 아들 장자
(長子) 차윤원(車允元)은 남양부사(南陽府使)를 지냈으며 이조판서
(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였고, 차자(次子) 차윤형(車允亨)과 삼자
(三子) 차윤상(車允尙)은 통정(通政)이며, 사자(四子) 차사대(車思
戴)는 진사(進士)요 차득안(車得安)의 아들 차전원(車轉遠)은 문행
(文行 : 문학과 덕행)이 현양(顯揚)하며, 차지중(車智重)의 장자(長子)
차득행(車得行)이며, 차자(次子) 차유정(車有精)은 성균진사(成均進
士)로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추증(追贈)되었고, 삼자(三子) 차득성
(車得成), 사자(四子) 차득상(車得祥), 오자(五子) 차득귀(車得貴)는
음직(蔭職)으로 참봉(參奉), 육자(六子) 차득은(車得殷)은 성균진사
(成均進士)이며, 차신중(車信重)의 장자(長子) 차득림(車得琳)은 성
균진사(成均進士)요 차자(次子) 차득간(車得玕)은 부위(副尉)를이지
내였고, 삼자(三子) 차득서(車得瑞), 사자(四子) 차득정(車得貞), 오
자(五子) 차득언(車得彦), 육자(六子) 차치운(車致運)이다.
27 世 휘(諱) 천로(天輅) (頤齋公 車軾의 三子)
공(公)의 자(字)는 복원(復元) 호(號)는 오산(五山) 또는 귤실(橘
室)이며 1546년 명종(明宗) 1년 병오(丙午)에 이재공(頤齋公) 차식
(車軾)의 삼자(三子)로 출생(出生)하여 1577년 선조(宣祖) 10년 정
축(丁丑)에 알성문과(謁聖文科)의 병과(丙科)에 제칠(第七)로 등과
(登科)하고 1590년 선조(宣祖) 23년 경인(庚寅)에 제술관(製述官)
으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을 따라 송당(松堂) 황윤길(黃允吉)
과 함께 일본(日本)에 사신(使臣)을 갔다 왔으며, 그 후 조정의 요
청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外交文書)를 작성하여
문명(文名)이 명나라에 떨쳤고, 1592년 선조(宣祖) 25년 임진(壬
辰)에 왜적(倭敵)이 우리나라의 사도(四都)를 함몰(陷沒)할 때 명나
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원군(援軍)으로 평양성(平壤城)을
수복(收復)한 공훈(功勳)에 대한 로포문(露布文)을 지어 국내(國內)
와 명나라를 놀라게 하여 천하문장(天下文章)으로 동방문사(東方文
士)의 칭호(稱號)를 받았으며 1595년 선조(宣祖) 28년 을미(乙未)
에 교지(敎旨)를 받들어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에게 장률백운
(長律百韻)을 사률백수(四律百首)로 한 주야(晝夜)에 입초(立草 : 강
경이 맞서 꺾이지 않는 사람에 비유)로 지어 보냈으며. 1597년 선조(宣祖)
30년 정유(丁酉)에 중시을과(重試乙科)에 급제(及第) 봉상시정(奉
常寺正)·교리(校理)·접반사(接伴使)·삼척안찰사(三陟按察使)를 지냈
으며 1599년 선조(宣祖) 32년 기해(己亥)에 통진현감(通津縣監)을
지냈으며,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서경(西坰) 류근(柳根)과
함께 조서(詔書)를 맞는 종사(從事)가 되고, 또 월사(月沙) 이정구
(李廷龜)와 지봉(芝峰) 이수광(李晬光)과 석주(石洲) 권필(權鞸)과
석봉(石峰) 한호(韓濩)와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과 간이(簡易)
최립(崔岦)과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과 학곡(鶴谷) 홍서봉(洪瑞
鳳)은 많은 수창(酬唱 : 시사(詩詞)를 서로 주고 받음)이 있었으며 상소
(上疏)로 청(請)하여 영남오현(嶺南五賢)을 문묘(文廟 : 공자를 모신 사
당)에 종사(從祀=配享)하였으며 임금의 존호(尊號 : 제왕·후비·선왕 등을
존숭(尊崇)하는 칭호)로 종묘구실(宗廟九室)에 고(告)하는 글과 왕세자
(王世子)를 책봉(冊封)에 정국(定國 :나라를 안정시킴) 본표(本表 :근본의
표문(表文))와 문묘(文廟)의 중수기(重修記)를 지었고, 애강남부(哀江
南賦 : 북주(北周)의 유신(庾信)이 지은 부(賦), 양(梁)의 멸망을 슬퍼하여 지음)를
주석(註釋 : 낱말이나 문장의 뜻을 풀이 함)을 하였고, 월사(月沙) 이정구
(李廷龜)의 변무소(辨誣疏)를 공(公)이 대작(代作)하였고 귀양을 갈
때 공주(公州)의 공산팔회(公山八會)의 서문(序文)과 시(詩)를 찬술
(撰述=著述 : 지음)하였으며, 1615년 광해(光海) 7년 을묘(乙卯) 3월
삭(朔)일에 규성(奎星)의 해를 나누어 먹으니 개성유수(開城留守)
조진후(趙振候)가 말하데 문장(文章)의 선비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
고 하더니 1615년 광해(光海) 7년 을묘(乙卯) 3월 5일에 오산공
(五山公)이 죽었으며 묘(墓)는 과천(果川) 동문원리(東文院里=舊別央
里)에 있으며 죽은 후에 임진난(壬辰亂)에 호성(扈聖)의 원종공신
(原從功臣 : 각 등급의 주(主)되는 공신 이외에 작은 공이 있는 사람에 주는 칭호)
으로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추증(追贈)하였고, 1790년 정조(正祖)
14년 경술(庚戌) 2월 12일에 정조(正祖)께서 륭릉(隆陵 : 정조의 아버
지의 릉)에 거동(擧動)하여 환궁(還宮) 할 때 명령(命令)하여 가로대
옛 첨정(僉正) 차천로(車天輅)의 묘(墓)가 고을 동쪽에 있다고 말
하고, 문장(文章)의 외(外)에 뛰어난 공(功)이 있으니 년전(年前)에
수습(搜拾)한 유집(遺集 : 남긴 시문을 역은 책)이 오히려 각중(閣中 : 대
궐 안)에 있으니 내각(內閣 : 규장각(奎章閣)의 별칭)에 령(令)으로 알려
맏기어 이를 속히 간행(刊行)하여 헌납(獻納)하고 그 자손(子孫)
을 관대(寬大)이 관청(官廳)에서 방문(訪問)하여 가려쳐 인도하라
하였다. 영상(領相) 채제공(蔡濟恭)과 대제학(大提學) 홍양호(洪良
浩)는 교령(敎令)을 받들고 삼세오문장(三世五文章)의 유고(遺稿 :
전인(前人)이 써서 남긴 원고)를 내각(內閣)으로부터 찾아 모아 교정(校
正)하고 팔편(八編)을 쪼개서 중국(中國)의 취진당(聚珍堂) 활자(活
字)에 법첩(法帖 : 습자(習字)에 본이 되는 명필의 서첩(書帖))으로 하여 바치
었다. 후손(後孫) 진사(進士) 차두영(車斗永)은 유일(遺佚 : 빠뜨림)을
널리 모아서 속에 합(合)하여 별록(別錄) 4권 설림(說林) 1권을 넓
혀서 정수(整修 : 매만져 고침)하였고, 12세손 진사(進士) 차일용(車一
龍)은 원집(原集) 4권 속집(續集) 2권을 간행(刊行)하고 장판각(藏
板閣)을 세웠다. 공(公)의 배부인(配夫人)은 정부인(貞夫人) 전주이
씨(全主李氏)로 금천정(錦川正) 이보(李俌)의 따님이며 아들 차전
곤(車轉坤)은 문과병과(文科丙科)에 등제(登第)하여 선균전적(成均
典籍)·봉상시정(奉常寺正)·유곡찰방(幽谷察訪)·결성현감(結城縣監)·
하동군수(河東郡守)·양산군수(梁山郡守) 등을 지내었다.
Ⅸ.【柳車達】이란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나라 관례상(慣例上) 성씨(姓氏)에 이름대신 호(號)를 붙여서
호칭(呼稱)하며 기록(記錄)한 것이 많이 있다. 예(例)를 들면 본성명(本
姓名)이 한호(韓濩)인데 한석봉(韓石峰)으로 호칭(呼稱)하며 그렇게 기
록을 하였다. 그래서 조선조(朝鮮朝)에 글을 쓰는 분들이 이름과 호
(號)를 혼돈(混沌)하여 류해(柳海)를 류차달(柳車達)로 기록을 하였는지
는 알 수 없으나『柳海』의 경우( 境遇)는 일반관례(一般慣例)에 따라
『柳車達』로 호칭(呼稱)하거나 기록할 수 없는 연유(緣由)가 아래와
같이 있다.
첫 째 : 차자(車字)는 우리 차류양문(車柳兩門)의 원조(元祖)이신 왕몽
(王蒙)께서 신라태조(新羅太祖) 박혁거세(朴赫居世)로부터 차씨
(車氏)로 사성(賜姓)을 받으신 차씨(車氏)의 득성조(得姓祖) 차무
일(車無一)로부터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하여 33세 차승색(車
承穡)에 이르러 신라(新羅)의 애장왕(哀莊王)을 시해(弑害)한 헌
덕왕(憲德王)을 시해(弑害)하여 왕실(王室)의 기강(紀綱)을 잡을
도모(圖謀)가 누설(漏泄)되어 황해도(黃海道) 유주(儒州)로 둔적(
遯迹) 모성류씨(冒姓柳氏)로 하고 이름을 백(栢)으로 피신(避身)
6세 류해(柳海 :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의 직계손자(直系孫子)이다)에
이르러 모성류씨(冒姓柳氏)의 6세를 본성차씨(本姓車氏)로 복성
(復姓)하여 달자(達字) 사명(賜名)하였으며 득성조(得姓祖)로부터
대대손손(代代孫孫)이 이어 내려온 조상(祖上)의 혼지(魂志)와
충정(忠貞)이 담겨 있는 성자(姓字)로 가문(家門)을 상징(象徵)하
는 것이기 때문에 자손(子孫)이 성자(姓字)를 이름자로 쓸 수 없
는 것이다. 만일 성자(姓字)인 차자(車字)를 이름자로 쓴다면 이
것은 조상(祖上)과 가문(家門)에 모욕죄(侮辱罪)를 범(犯)하는 불
효행위(不孝行爲)로 불공(不恭)의 중죄(重罪)를 짓는 것이다.
두번째 :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족보(族譜)를 살펴보면 고려조(高麗朝)
에 국조(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을 추숭(追崇)된 왕공도(王恭
道)는 신라(新羅) 애장왕조(哀莊王朝)에 좌승상(左丞相)을 지낸
차무일(車無一)의 33세 손자(孫子) 차승색(車承穡)의 차자(次子)
차공도(車恭道)로 애장왕(哀莊王)과 헌덕왕(憲德王)의 변난(變
亂)에 강남(江南)으로 피신(避身), 옛 원조(遠祖)의 성(姓) 왕씨
(王氏)로 복성(復姓) 개성명(改姓名)을 왕공도(王恭道)한 것이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께서 고려개국(高麗開國) 후 국
조(國祖) 및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始祖)로 추숭(追崇)한
왕건태조(王建太祖)의 증조(曾祖)로 본성(本姓)이 차씨(車氏)인
데 증조(曾祖)의 본성(本姓)인 차자(車字)를 신하(臣下)인 대승
공(大丞公)의 이름자에 차자(車字)를 내려 줄 수 없는 것이며,
공신(功臣)인 대승공(大丞公)이 원덕대왕(元德大王)의 본성자(本
姓字)를 이름자로 사용하면 원덕대왕(元德大王)을 능멸(凌蔑)하
는 역적(逆賊)의 죄인(罪人)이 되는 것이다.
셋 째 : 연안(延安) 차씨(車氏)의 득관조(得貫祖) 차효전(車孝全)의 친
제(親弟)인 휘(諱) 효금(孝金)인데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고려를
개국(開國)한 후 모성류씨(冒姓柳氏)의 6세를 본성(本姓)인 차씨
(車氏)로 복성(復姓)하면서 대승공(大丞公)에게 복성명(復姓名) 차
달(車達)로 내리고 휘(諱) 효금(孝金)에게 류씨(柳氏)로 사성(賜
姓)하였는데 조상(祖上)과 가문(家門)을 상징(象徵)하는 차씨(車
氏)의 위에 류자(柳字)를 올려 복성명(復姓名)인『車達』을 사명
(賜名)으로 날조(捏造)하여『柳車達』이라 하는 것은 조상(祖上)
과 종가(宗家)를 능멸(凌蔑)하고 친형(親兄)의 후손(後孫)인 연안
(延安) 차문(車門)을 모욕(侮辱)하는 처사(處事)라 용납(容納)할
수 없는 것이다.
넷 째 :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류씨(柳氏)로 모칭(冒稱)한 류백(柳栢 :
一云 柳穡)으로부터 류해(柳海)까지 조상(祖上)의 성(姓)인 차씨(車
氏)로 복성(復姓)을 시키고 류해(柳海)는 고려개국(高麗開國)의 공
신(功臣)이므로 사명(賜名)을 달(達)로 하여 성명(姓名)이 차달(車
達)인 것을 고려(高麗)가 멸망하고 조선개국(朝鮮開國)한 초기(初
期)에 하륜(河崙)이 운암공(雲巖公) 차원부(車原頫)를 무고(誣告)
하여 왕자(王子)의 난(亂)에 연루(連累)케 하여 역적누명(逆賊陋
名)으로 차문(車門)이 적족피화(赤族被禍)로 차문(車門)이 합문몰
락(闔門沒落)의 기화(奇禍)로 류문(柳門)에서 대승공(大丞公) 차달
(車達)을『柳車達』로 날조(捏造)하여 대승공(大丞公)의 성(姓)은
류씨(柳氏)이며 사명(賜名) 차달(車達)로 고려태조(高麗太祖)가 내
렸다 하여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유생(儒生)들이 글을 쓰면서 이
렇게『柳車達』로 기록(記錄)하였다 사료(思料)되나 이것은 인륜
사회(人倫社會)에 큰 오류(誤謬)를 범(犯)하는 처사(處事)이며 차
문(車門)과 류문(柳門)의 선대조상(先代祖上)과 가문(家門)을 능욕
(凌辱)하고 고려국조(高麗國祖)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숭(追
崇)된 왕공도(王恭道)의 본성명(本姓名)이 차공도(車恭道)인데 원
대왕(元德大王)의 본성차자(本姓車字)를 그 나라 공신(功臣)이 이
름의 글자로 쓴다면 이는 원덕대왕(元德大王)과 고려조(高麗朝)를
능멸(凌蔑)하는 역적행위(逆賊行爲)가 됨으로 할 수 없는 것이다.
다섯째 : 근대(近代)에 와서 우리 차문(車門)의 선대조상(先代祖上)의
행적(行蹟)을 기록한 문헌(文獻) 및 족보(族譜)를 살펴보면 우리
차문(車門)은 고려개국(高麗開國)의 공신후예(恭臣後裔)로 왕건
태조(王建太祖)는 차문묘예(車門苗裔)인 인연(因緣)으로 교목세
가(喬木世家)로 려말(麗末)까지 잠영세가(簪纓勢家)로 계승(繼承)
하였으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조(高麗朝)가 멸망(滅亡)
하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한 초(初)에 적족재화(赤族災禍)로
합문두적(闔門遯迹)하여 숨어 살면서 세인(世人)들은 이씨조선
(李氏朝鮮)을 아조(我朝)라 불렀지만 우리 차문선대(車門先代)들
은 이씨조선(李氏朝鮮)이라 호칭(呼稱)하여 온 것을 보아도 우리
차문후예(車門後裔)들은 고려조(高麗朝)를 능멸(凌蔑)하고 욕(辱)
되게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복성명(復姓名)으로 성씨(姓氏)는
차씨(車氏) 휘(諱)는 달(達)로 사성명(賜姓名)한 차달(車達)을 사
명(賜名) 차달(車達)이라 하여 대승공(大丞公)의 차자(次子) 효금
(孝金)에게 왕건태조(王建太祖)가 사성(賜姓)한 류자(柳字)를 성
씨(姓氏)하여【류차달(柳車達)】이란 성명(姓名)을 사용함은 불
가(不可)함을 알면서 차문(車門)의 옛 보첩(譜牒) 및 문헌(文獻)
에【류차달(柳車達)】로 기록된 것은 차문(車門)이 역적누명(逆
賊陋名) 휘말려 조선조(朝鮮朝)에서 서인(庶人)으로 전락(轉落)하
여 힘없이 숨어 살면서 시대적여건(時代的與件)에 따라 불가피
(不可避)한 사정(事情)으로 선대(先代)들이 류문(柳門)의 보첩(譜
牒)과 문헌(文獻)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 잘못된 내용(內容)을 탓
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引用)하여 기록해 온 것은 문맥(門脈)을
보존(保存)하는 차원(次元)에서 세상(世上)을 속이며 차문(車門)
의 후예(後裔)들이 좋은 세상(世上)이 오면 왜곡(歪曲)돤 차문(車
門)의 보첩(譜牒) 및 문헌(文獻)을 바로 잡을 수 있게 보첩(譜牒)
과 문헌(文獻) 등 여러 곳에 암시(暗示)하여 진실(眞實)들을 감
추어 기록(記錄)을 남겨 오늘날 까지 전하여 온 것에 차류양문
(車柳兩門)은 유의(留意)해야 할 것이다. 이제 차류양문(車柳兩
門)의 후예(後裔)들은 조상(祖上)과 가문(家門)을 욕(辱)되게 왜
곡(歪曲)된 사적(史籍)을 바로잡는 일들을 근대(近代)에 주워진
사명(使命)으로 여기고 가문사(家門史)를 바로 세워야 할 것이며
특히 차문(車門)의 후손(後孫)들은 선대(先代)들이 알면서도 올
바로 기록하지 못하고 왜곡(歪曲)된 기록을 인용(引用)해야 했던
시대적여건(時代的與件)의 수모(受侮)의 한(恨)을 풀어 지하(地
下)의 선대(先代)들이 영면(永眠)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찬문
(車門)의 자존심(自尊心)을 짓밟고 모욕적(侮辱的)인 왜곡(歪曲)
된 내용(內容)의 보첩문헌(譜牒文獻)을 과감(果敢)히 바로잡아
정리(整理)해야 하고 완건태조(王建太祖)께서 대승공(大丞公)에
게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사명(賜名) 달(達)로 하였으니
성명(姓名)을 차달(車達)로 바로 고쳐 사용(使用)하고 모순(矛盾)
된【류차달(柳車達)】은 사용(使用)하지 않아야 한다.
여섯째 : 왕건태조(王建太祖)께서 대승공(大丞公)에게 차씨(車氏)로 복
성(復姓)하여 내린 성명(姓名) 차달(車達)의 “차자(車字)는 성
차”로 곧 차자(車字)는 성(姓)이란 뜻이며, “달자(達字)는 연결할
달”로 연결한다는 뜻이라 곧 차씨(車氏)로 연결한다는 뜻이 됨
으로 곧 이것은 대승공(大丞公)께서 본성(本姓)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연결한다는 뜻이 된다. 이것을 뒷받침 하는 내용
은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선생이 기술(記述)한『車雲巖
雪寃記』의 응제시편(應製詩編)을 살펴보면 이예장(李禮長)의 시
주 (詩註)에【言

雖수
運운
粮량
之지
功공
而이
特특
贈증
車차
達달
之지
號호
原원
其기
意의
則즉
不불
忘망
上상
祖조
本본
姓성


義의
也야
】라 한 구절(句節)을 번역하면 “말은 비록 양식을 운반
한 공으로 차달(車達)이란 성명을 내렸다 하나 그 근본의 뜻은
곧 조상의 본성의 옳음을 잊지 않게 한 것이다.” 또【其

子자
孝효
全전


爲위
生생
字자
別별
賜사
姓성
氏씨
不불
是시
他타
全전
意의
也야


其기
長장
而이
承승
襲습
上상
祖조
之지
弘홍
烈열
也야
】라
한 구절(句節)의 번역은 “그 아들 효전(孝全)은 글자를 생자(生
字)로 특별히 성명(姓名)에 내리지 않고 이것을 다른 전(全)으로
한 뜻은 그 맏이로 조상(祖上)의 홍열(弘烈)을 승습(承襲=承繼)케
한 것이다.” 여기에 승습(承襲)이란 두 글자는 승계(承繼)와 같
은 뜻인데 이것은 시조(始祖)로부터 한 대(代)도 끊어짐 없이 이
어감을 말하는 것이며 중간에 끊어진 사실이 있다면 이 승습(承
襲)이란 말을 쓸 수 없는 것이니 이 승습(承襲)의 두 글자는 모
성류씨(冒姓柳氏)의 6세는 본성(本姓)인 차씨(車氏)로 복성(復姓)
하여 차씨(車氏)의 세계(世系)를 계승(繼承)함을 입증(立證)하고
있음으로 대승공(大丞公)의 성명(姓名)은 차달(車達)이고【류차
달(柳車達)】은 조작(造作)된 것을 밝히고 있는 것이므로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일곱째 : 1769년 영조(英祖) 45년 기축(己丑)에 간행(刊行)한 보첩(譜
牒)의 서문(序文)을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홍문관대제학(行 弘
文館大提學) 장수인(長水人) 황경원(黃景源)이 찬술(撰述)한 서문
(序文)을 살펴보면【自

承승
穡색
五오
世세
至지
車차
達달
佐좌
王왕
氏씨
有유
大대
功공
復복
姓성
車차
氏씨
車차
達달


孝효
全전
】이란 구절(句節)을 번역은 “승색(承穡)으로부터 오세(五
世)에 이르러 차달(車達)은 왕씨(王氏)를 도우셔 큰 공(功)이 있어
차씨(車氏) 복성(復姓)하였고 차달(車達)의 아들 효전(孝全)”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구절(句節)의 차달(車達)이란 것은 즉 복성(復
姓)은 차씨(車氏)요 이름은 달(達)이며 그 차달(車達)의 뜻을 풀
이하면 차씨(車氏)로 연결(連結=承繼)한다는 것이며 대승공(大丞
公)은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승계(承繼)하라고 내린성명(姓
名)이 차달(車達)이란 것을 확실(確實)하게 뒷받침 하고 있는 증
거(證據)인데 대승공(大丞公)께서 남정(南征)할 때 향궤(餉饋)를
수레로 운반하여 영달(榮達)했다는 뜻으로 차달(車達)로 사호(賜
號)했다고 주장(主張)을 하면서【유차달(柳車達)】라 기록(記錄)하
고【류차달(柳車達)】이 류씨(柳氏)의 시조(始祖)라 하고 고려태
조(高麗太祖)로부터 류씨(柳氏)로 사성(賜姓)을 받은 류효금(柳孝
金)을 류씨이세(柳氏二世)라 하는 것은 류씨(柳氏)의 시조(始祖)인
류효금(柳孝金)을 모욕(侮辱하고) 역대조상(歷代祖上)과 가문(家
門)을 능멸(凌蔑)하는 오류(誤謬)를 범(犯)하는 것이다.
여덟째 : 조선(朝鮮)에 단종(端宗)의 명(命)을 받아 집현전학사(集賢殿
學士)인 취금헌(醉琴獻) 박팽년(朴彭年)이 기술(記述)한 기문(記
文)과 유신(儒臣)들의 응제시(應製詩)를 모아서 단계(丹溪) 하위지
(河緯地)께서 서문(序文)을 찬(撰)하여 편집(編輯)한【車

雲운
巖암
雪설
寃원


】을 살펴보면【車

達달
丁정
麗려
室실
輸수勤근
之지
日일
孝효
全전
當당
王왕
事사
靡미
盬고
之지
時시
輿여
興흥
原원


貸대
之지
粟속
樹수
顯현
陵릉
定정
社사
之지
勞노
國국爲위
以이
辦판
出출
車거
乘승
繼계
良량
道도
運운
米미
征정
南남
特특
贈증
其기
父부
以이


爲위
達달
世세
績적
之지
號호
】란 구절(句節)의 번역은 “차달(車達)은 장정(壯
丁)을 려실(麗室 : 고려 조정)에 나날이 운송(運送)하는데 도우고,
효전(孝全)은 왕사(王事)에 미고(靡盬)를 당하였을 때 흥원(興原 :
구월산 주변)에 많은 속곡(粟穀)으로 진대(賑貸 : 구휼(救恤)를 배품)하였
고, 현릉(顯陵 : 고려 시조 묘호(墓號))과 정사(定社 : 개국하고 종묘사직(宗
廟社稷)을 정함의 공(功)임)의 공(功)을 세웠고, 타라를 위하여 수레를
판출(辦出 : 변통하여 갖추어 냄)하여 계량(繼粮 : 한 해에 농사지은 곡식으
로 한 해 동안 양식을 이어 감)을 실어서 미곡(米穀)을 정남(征南 : 남쪽
을 침)에 옮김을 실행하여서 특별히 그 아버지에게 차(車)와 달
(達)로 한 것은 세적(世績 : 세계를 이어감)의 성명(姓名)으로 내린
것이다.” 라 하였는데 이 또한 차달(車達)은 차씨(車氏)로 복
성(復姓)하여 이름은 달(達)로 내린 것이 확실(確實)한데 조상(祖
上)과 가문(家門)을 상징(象徵)하는 성씨(姓氏)인 차자(車字) 위에
류자(柳字)를 올려놓고 류차달(柳車達)이라 하는 것은 조상(祖上)
을 능멸(凌蔑)하는 불공(不恭)의 중죄(重罪)를 범(犯)하는 만고(萬
古)에 불효(不孝)이다.
맺는 말
차문(車門)은 신라조(新羅朝)의 시조(始祖)인 박혁거세(朴赫居世)로부
터 사성(賜姓)을 받으신 득성시조(得姓始祖)이신 차무일(車無一)로 시
작하여 34세 휘(諱) 공숙(恭叔)이 이르러 애·헌(哀·憲)의 국난(國亂)을
만나 득성조(得姓祖)의 33세 휘(諱) 승색(承穡)·34세 휘(諱) 공숙(恭叔)
등 부자(父子)는 황해도(黃海道) 구월산(九月山) 밑에 유주(儒州) 묵방
동(墨坊洞)으로 둔적(遁迹)하여 신라조(新羅朝)의 좌상공(左相公) 휘
(諱) 승색(承穡)은 피신(避身)의 목적(目的)으로 본성명(本姓名)을 감추
고 할머니 군부인(郡夫人) 양씨(楊氏)의 성(姓)을 따라 양씨(楊氏)로 모
칭(冒稱)한 후 다시 양자(楊字)와 뜻이 같은 류자(柳字)로 바꾸어 모성
류씨(冒姓柳氏)로 좌상공(左相公)의 6세인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公臣)
대승(大丞) 휘(諱) 해(海) 선조(先祖)까지 109년간을 모성류씨(冒姓柳
氏)로 내려온 것을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
無一)로부터 모성명(冒姓名)인 류해(柳海)까지 6세를 본성(本姓)인 구
성차씨(舊姓車氏)로 복성(復姓=還姓)하여 차달(車達)로 성명(姓名)을 내
린 것이며, 대승공(大丞公) 차달(車達)의 사자(嗣子)인 차효전(車孝全)
은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의 39세로 애·헌(哀·憲)의 국난
(國亂)으로 물락(沒落)한 차문(車門)의 문벌(門閥)을 고려개국(高麗開
國)의 수공자(首功者)로 벼슬 대광(大匡)에 귀족(貴族)의 칭호(稱號)인
백작(伯爵)의 작위(爵位)에 피봉(被封)되고 태조왕건(太祖王建)이 차씨
(車氏)의 묘예(苗裔)인 연유(緣由)로 차효전(車孝全)은 왕실(王室)의 종
적(宗籍)에 입적(入籍)한 후 식읍천호(食邑千戶)를 염주(塩州)로 하사
(下賜)를 받아 문벌(門閥)을 다시 일으켜 세운 충시조(中始祖)로 그의
후손(後孫)들 식읍지(食邑地)를 관향지(貫鄕地)로 삼았는데 이곳 염주
(塩州)가 연안(延安)으로 개칭(改稱)함에 따라 처음으로 연안차씨(延安
車氏)로 호칭(呼稱)을 하면서 득관조일세(得貫祖一世)하여 연안군(延安
君)으로 추촌(追尊)하고 있으며,【車

雲운
巖암
雪설
寃원
記기
】를 살펴보면【車

氏씨
以이
其기
長장
而이
承승
襲습
上상
祖조
之지
弘홍
烈열
也야
】라 한 구절(句節)의 번역은 차씨(車氏)의 맏
이로서 조상(祖上)의 홍열(弘烈)을 승습(承襲)이라 한 것은 득관조(得貫
祖)이신 차효전(車孝全)께서 득성시조(得姓始祖) 차무일(車無一)로부터
한 세대(世代)도 끊지 말고 모성류씨(冒姓柳氏)의 6세를 차씨(車氏)로
복성(復姓)하여 득관조(得貫祖) 차효전(車孝全)까지 계승(繼承)하였다는
말인데 득성조(得姓祖)의 34세 차공숙(車恭叔)에 이르러 차문(車門)이
없어지고 대승공(大丞公)이 류씨(柳氏)를 창성(創姓)하여 장자(長子)인
효전(孝全)은 차씨(車氏)로 사성(賜姓)을 받아 분성분가(分姓分家)하고
차자(次子)인 효금(孝金)이 류씨(柳氏)로 부계(父繼)한 것 같이 말하는
자가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옛날부터 우리나라 관례(慣例)에 장
자(長子)가 부계(父繼)하여 사자(嗣子)가 되고 차자(次子)는 분가(分家)
하는 것이 상례(常例)인데 이는 역사(歷史)와 관례(慣例)의 상례(常禮)
잘 모르고 하는 말이며 이는 선조(先祖)에 대한 불공(不恭)의 범죄행위
(犯罪行爲)가 되는 것이다.
이상(以上)과 같은 연유(緣由)로 대승공(大丞公)은 복성차씨(復姓車
氏)하여 고려태조(高麗太祖)께서 차달(車達)로 성명(姓名)을 내린 것이
며 득관조(得貫祖) 차효전(車孝全)은 차문(車門)의 문벌(門閥)을 다시
부흥(復興)시킨 중시조(中始祖)로 관향(貫鄕)을 연안(延安)으로 한 득관
조(得貫祖)이며 사성(賜姓)을 받은 시조(始祖)가 안이다. 우리 차문(車
門)의 사성(賜姓)을 받은 득성조(得姓祖) 차무일(車無一)께서 차씨시조
(車氏始祖)임을 다시 밝혀 두는 바이다.
【車

雲운
巖암


寃원
記기
(錄

)】와 차문(車門)의 보첩(譜牒) 및 문헌(文獻)들은
차문(車門)이 신라조(新羅朝) 및 고려조(高麗朝)에 잠영문벌(簪纓門閥)
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기술(記述)한 서적(書籍)이며 타문(他門)을 위해
서 만들어진 서책(書冊)이 아닌 만큼 선대(先代)들이 기록한 사적(史
籍)의 내용(內容)에 대하여 보는 시각(視覺)에 따라 번역(飜譯)을 달리
할 수도 있으나 문중(門中)에 위상(位相)의 제고(提高)를 위하여 그에
합당한 번역(飜譯)이 타당(妥當)한 것이라 생각하며 특히 지난날의 역
사에 오기(誤記)와 오역(誤譯)이 있다면 반드시 고쳐 정리(整理)하는
것이 발전(發展)된 내일의 역사(歷史)를 위해 필요한 작업(作業)이요
과제(果題)라고 믿는 것이다.

출처 : 음악의 시조 루시퍼
글쓴이 : 南宮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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