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자방아
알곡 및 가루를 내는 도구로 연자방아 라고도 부른다.
방아는 디딜방아·연자방아·물레방아의 순서로 발달해왔다. 간단한 곡식은 맷돌이나 절구, 매통을 이용하지만 대규모로 찧는 데는 방아가
필요하다. 디딜방아는 소출이 작지만 소나 물이 없어도 쉽게 설치할 수가 있어서 가장 많이 보급되었다.
반면 물레방아는 효율성은 뛰어나지만 물이 귀한 농촌에서는 설치가 어려웠다. 연자매도 윗돌과 밑돌에 쓰이는 커다란 돌을 구해야 하고
축력에 의존하는 부담이 있어 소가 귀한 농촌에서는 설치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작업량이 많기 때문에 널리 보급되어 개인이나 마을공동
소유로 이용했다. 그 원리는 윗돌의 중심에 구멍을 뚫고 나무막대를 가로질러서 소의 멍에에 고정시키면 소가 돌면서 돌을 돌리게 된다. 돌은 요철(凹凸)로 만들어져서 집어넣은 곡식이 돌아가는 돌의 압력에 눌려 으깨지면서 껍질이 벗겨지거나 가루가 나게끔 되어 있다.
보통 소를 모는 사람과 곡식을 넣는 사람 2명 정도가 있어야 작업이 가능하다. 오래 사용 하면 돌의 요철이 마모되어 작업능률이 떨어지므로 주기적으로 대장장이를 불러다가 정으로 돌을 쪼아서 요철을 보강해주어야 한다.
정미소가 발전하고 전기에 의한 정미법이 보급되면서 차츰 사라져 이제는 거의 쓰지 않는다.
<<파주시 파평면 양미골 연자방아에 얽힌 전설>>
파평면 덕천리 양미골 뒷산 비탈진 후미진 도랑에 연자방아가 있었다. 고려말 유관(柳寬)전승을 지낸 사람은 공민왕 20년(1371)에 문과급제하여 사헌중승(司憲中丞)을 역임하면서 조선이 개국하자 이성계를 도와 개국 원종 공신이 된 후 대사성 전라도 관찰사를 역임 1409년 예문관 대제학으로 지춘추 관사를 겸직하면서 태조실록(太祖實錄)을 편찬하였으며 세종이 즉위하자 좌빈객을 역임 우의정에 승진 고려사(高麗史)를 수고하는 등 학문에 뛰어나고 시문에 능한 대학자였다.
출처:다음,브리태니커,야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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