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의 11번 글에 류재균 님께서 쓰신 글을 보고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한번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제가 아직 외국에 체류하고 있는
관계로 자료를 갖고 있는 것이 없고 경황도 없어서 답변에 있어
부족한 점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번호는 앞글의 번호입니다.)
1-3. 이수건 선생의 논문은 확실히 제자가 쓴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논문의 주석에서 밝혀 놓았듯이 이미 이수건 선생이
오래 전부터 여기저기에서 주장해온 것들 가운데 일정한 주제의
내용들만을 추린 것입니다. 따라서 이수건 선생의 주장들임은
확실합니다. 필요하다면 원 출처가 무엇인지를 그 제자에게 문의하거나
논문에 출처가 밝혀져 있으니 그것들을 직접 추적하면 될 것입니다.
한편 이수건 선생의 주장은 여러 성씨들에게 치명적인 내용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시조가 조작되었음을 암시하거나 시조의 내력이
조작되었음을 주장하곤 합니다. 참고로 이수건 선생은 문화류씨
시조인 대승공 류차달의 내력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으며,
제가 이에 대해 나름대로 반박-정리한 글도 있습니다.
( http://kenji.cnu.ac.kr/ryu/roots/seolwon-lsk-main.htm )
저는 기본적으로 이수건 선생의 관점에 적극 찬성합니다. 실상 양반이나
족보를 중심으로 한 성씨 내력 등의 조작이 극심하게 자행되어 왔기
때문에 이제 자정 노력이 제고되어야 할 시대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 동안은 자료가 일부분의 지식인들에게만 제한되어 있었고 권위가
너무나 큰 힘을 발휘해 와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들이 존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사실과 거짓을 분간할 수 있는 정보들이 많아져 누구나
스스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4.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성경(the Bible) 등은 물론 그 자체가
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그
내용에 있어 쓴 사람의 입장이나 관점에 따른 조작도 이루어져 있을 수
있고, 조작이 아니라도 꾸며낸 이야기를 쓴 것인데 그것이 후대에서는
진짜로 받아들여지는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심한 과장도 있을 수 있고
책의 집필 목적에 따라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역사적 사실들도 있을
것이고, 나아가서는 어떤 사실을 고의적으로 누락시킨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화류씨 가문사에서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는 "고려사"만 예로
들어 말하자면, 분명히 고려사는 고려를 무너뜨린 조선 왕조에서
만든 책입니다. 그래서 전 왕조를 배척하는 관점으로 쓰인 것임에
확실합니다. 그러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상당히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음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입니다. 책을 만든 후에 일부 인물들과
사실들을 왜곡시켜 놓은 것이 발견되어서 반포를 중단하고 다시 집필하여
완성시킨 것이 고려사입니다. 더구나 왕조의 정통성과 큰 관련이 없는
사실들은 왜곡의 문제에서 훨씬 더 자유로울 것입니다.
5. '류차 문제'는 차씨들이 대승공 류차달을 차씨로 표기하며 자신들의
대동보에 올렸을 때 비로소 불거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만 해도
의식적으로 류씨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그 내력에 대한 주장들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타당한지를 스스로 탐구하기 전까지는 그저
류씨와 차씨는 일가이고 차씨는 큰집, 류씨는 작은집, 하는 식으로만
알고 있었고 그 이상 혹은 이하로는 아무런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차류종친회나 문화류씨대종회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연안차씨들은 자신의 집안을 드러내려고 무진 노력을 해왔고 그것이
몇 년 전에는 문화류씨 시조를 모독하는 일로까지 발전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연안차씨들의 오판이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을 높이려다
스스로 자신들의 시조의 내력까지 송두리째 의심을 받게 만드는 상황에
몰아넣고 만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간접적으로 대종회에 관계하는 분들과 제한적으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있습니다. 나름대로 당면한 문제에 대해 많은 노력들을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대종회가 어려운 사정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그래서 종원들의 요구사항이 무엇인지도 파악은 하지만 쉽게 행동할
수 없는 상황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대동보 발간도 발목이 잡혀
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대종회에 대해서 하나 평가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류차
문제에 대해 신속히 대응했다는 것입니다. 몇 백년의 오류의 역사와
인식을 몇 년 내에 올바른 것으로 바로 잡은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제게는 차씨들이 대승공을
차씨로 만든, 류씨로서는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기에 그 반발로서
가능했던 결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6. "차원부설원기"라는 책은 류차 동원설에서 실질적으로 유일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사보 이후 우리 족보에서 문화류씨의
내력을 황제(黃帝)에까지 연결시키는 계보가 내려오고 있고, 그 계보는
몇 개의 자료에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따져보면
그 자료들은 실질적으로 거의 동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되며
그 중 확실한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차원부설원기"뿐입니다.
차원부설원기가 위서(僞書)임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다른 것은 차치하고
그 책 자체만 들여다보고 그 책이 주장하는 굵직한 몇 가지 사실들이
도무지 역사적으로 성립할 수 없음만을 보아도 자명합니다. 차원부설원기가
위서라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차원부설원기의 저작 목적의
하나인 차씨의 역사, 곧 류씨와 차씨가 같은 뿌리라는 사실이 거짓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이수건 선생의 논문에서도 명백하게 주장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남은 것은 그렇다면 문화류씨의 진짜 성씨 내력은 무엇인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연안차씨에게도 해당되며, 그들에게는 정말 큰
난관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7세 공권(公權)에
이르러서야 문화류씨가 확실하게 드러나기 시작했고 그 이전의 역사는
불분명한 점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미 공권의 비석에 그 증조인
4세 노일(盧一)까지 명시되어 있고, 그 후손의 비석에 그 선조로서
대승공 류차달이 확립되고 그 사실이 고려시대를 타고 내려와 이미
고려시대 가운데에 몇몇 금석문(비석)에 기록되었고 또 "고려사"에도
반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대승공을 문화류씨 시조로 받드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비판적으로 보자면 공권의 비석에 왜 대승공이 나타나지 않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도서관에서 그 비슷한 시기의
금석문 자료집들을 여러 권 확인한 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조상이 확실한
인물들을 주로 살펴보았는데 그 조상의 표기에 관한 한 여러 경우가 있어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없었습니다. 저로서는 바로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미 고려시대에 대승공이 시조로 명기되어 있는데 그것만 봐도 지금
대승공의 존재와 시조라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승공에 있어서는 그 존재와, 생존 시기가 고려 개국시라는 것, 그리고
고려 개국에 지방 호족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했었다는 사실 외에는
확실한 것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그 아내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족보도
있고 심지어 파평윤씨와 대승공과 관련이 있다는 기록도 있는데 제가
직접 파평윤씨 종친회와 여러 족보들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사실이
아닙니다.
이런 것만 생각해 봐도 류차 동원설에서 묘사되는 아주 구체적인 내용들이
얼마나 성립 불가능한 것들인지 느낄 수 있습니다.
성씨 내력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자면, 2세 효금(孝金)의 호랑이 이야기는
고려시대 금석문에는 대승공이 주인공으로 나오며, 그 후에 조선시대에
공식적으로 발간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효금이 주인공인 것으로 명시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실상 2세 효금에 관한 자료는 이것뿐입니다. 4세 노일은
공권의 묘지명에 등장하는데 3세 금환(金奐)은 이런 자료도 없이 족보에만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기휘(忌諱: 조상의 이름을 피하는 일) 풍습은 오래전
부터 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기휘도 하지 않은 이름입니다. 그러나
7세 공권이 이미 이름을 빛낸 인물인데 그 조상의 가승(家乘: 집안의
기록)이 그때 혹은 그 이전부터 내려오지 않았다는 것은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실상 족보에는 다른 곳에는 아무런 자취가 없이 족보에만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 허다하기에 전체적인 내력을 부정하기 전에는
그 분들의 존재를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여러 얘기를 했지만, 류재균 님의 주장은 아마도 어떻게 단지 몇 사람이
원파보를 부인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상의
얘기를 통해 "차원부설원기"의 진위 및 그 서적이 차지해온 위치, 몇 가지
역사적 사실들, 그리고 류씨와 차씨의 성씨의 발달사를 조금만 살펴봐도
누구나 같은 결론(류씨와 차씨가 동원이 아님)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임을
설파해 보았습니다.
7. 민족과 성씨들은 자신들의 내력을 꾸미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느 단체나
시작은 미화하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일단은 이것을 신화(神話)라
부르겠습니다. 신화는 부인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또 그것은
해당되는 사람들의 정체성의 일부를 구성하기까지 합니다. 그 지리적인
무대가 클수록 이런 일이 어떤 때에는 세계관과 결부되어서 더 의미 있게
발생합니다.
그러나 류씨와 차씨의 문제는 역사적으로 뚜렷한 조선 중기의 어느
시점에 한 권의 책이 생겨나고 또 같은 시기에, 아마도 그 책 때문에
생겨났을 가능성이 있는, 비슷한 이야기들이 떠돌아서 시작된 얘기입니다.
만일 그 책이 정말 어떤 의도를 가지고 조작되었다면 앞에 말한
신화하고는 문제가 전혀 다릅니다. 대승공의 활약을 신비하게 묘사하고
있는 흥률사의 자료나 효금의 호랑이 전승은 우리의 신화이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차원부설원기"와 그것이 조작해 내려한
어떤 사실(류차 동원)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거짓일 따름입니다.
조선시대가 시작할 때는 양반이 아마 10%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조선 말기에는 90% 정도는 되었을 것입니다. 그 중간 과정이 성씨의
발달사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입니다. 분명 성씨의 조작, 유력한
성씨에로의 편승 등의 일들도 자행되었음이 확실하고, 그 과정에서
부끄러운 일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같은 성씨 내에서도 유력한 파로
변경하는 일들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족보 조작이 문제가
되는 일들이 종종 발생합니다. 그런 일이 정당하게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고 부정적인 방법을 통해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권이 향상되고 개개인이 더 큰 가치를 누리게끔 인류는
발달해 왔고, 그런 관점에서 보면 어떤 일들은 그런 발달을 이루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편들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여간 이것은 류차 문제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8. 고려사에는 정주류씨가 많이 나오고 전주류씨 등의 여러 류씨가
나옵니다. 정주류씨는 고려시대에는 유력한 성씨였는데 전에 인구통계를
보니 남한에는 거의 없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 의문입니다.
정주류씨, 전주류씨 등과 문화류씨의 관계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성씨의 분정(分定: 나라에서 성씨를 정해주는 일)이 신라말과 고려초에
일어났을 때 여러 지역에서 류씨가 생겨났음만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아마 중국에도 이미 류씨가 있었고, 류는 버드나무이고 버드나무는
여기저기 많이 있기에 성씨로 자연스레 선택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과 문화류씨가 직접적인 혈연관계는 없다고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라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상상해 보면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대승공께서 스스로 자기부터 류씨라 부르자고 결정한 것이 아니고
나라에서 류씨로 정해준 것이라면 대승공의 형제나 친척들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그들이 같이 류씨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된 것인지, 또 혹시 대승공에서 7세 공권까지 현재의 족보에
공권의 직계 조상의 기록만 남은 것이라면 방계 조상이 있었을 수도
있고 그들도 류씨였을 터인데 그들 자손은 모두 사라진 것인지 등등의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문들은 이렇게 해결하면
됩니다. 곧 문화류씨의 실질적인 조상은 어떻게 보면 7세 공권입니다.
이 분을 중흥(中興)조상 심지어 중흥시조라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분 위로 계보를 추적할 수 있었던 가장 위의 선조가 대승공이며,
따라서 대승공을 중심으로 하는 문화류씨가 성립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 한 분의 직계 자손으로 현재 족보에 올라 있는 사람들의
존재는 산술적으로도 가능합니다. 다사다난한 역사를 통해 어떤 성씨는
쇠하기도 하고 심지어 사라지기도 하며, 어떤 성씨는 세가 부쩍
늘어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같은 성씨 내에서의 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정확한 숫자는 모르겠지만 현재 족보에 올라 있는 문화류씨는
아마 전체 문화류씨 중에 1/3에도 미치지 않을 것입니다. 족보에 올라
있지 않은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기록에서 누락된 경우도 있겠지만
현재 족보가 불완전하다는 근본적인 이유 때문에 그런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한편 족보에 올라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일반적인 성씨
발달사에 따라 끼어들어온 경우가 없다고 아무도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9.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좋은 관점입니다. "차원부설원기"에 나와
있는 차원부라는 인물의 행적은 대부분 설화로 생각됩니다. 아무리
잘 보려고 해도 너무나 정사(正史)뿐만 아니라 심지어 야사들과도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류차 동원설은 실질적으로 차원부설원기가
시작한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는데 그것이 완전 저자들을 참칭한
위서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제목부터 확실하게 그 의도가 드러나는
바대로 "차씨들의 한미한 가계(家系)를 돋보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설원기 자체를 보면 이미 허다한 왕들이 차원부의 설원에 애썼다고
나옵니다. 게다가 차원부가 바로 차씨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차원부는
려말선초의 인물로 나오고 차효전은 고려 초기의 인물인데, 만일 류차
동원이 사실이라면 아무리 차원부가 살해당했다 해도 (게다가 왕 자신도
아니고 그 측근에게...) 그 사건 때문에 갈라진지 몇 백년 되었을 류차
동원의 사실이 류씨 집안의 기록에서 사라진 것이라고 하면 억지스런
주장입니다.
한편 족보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5세기 전반에 비로소 제대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족보에 어떤 기록이 있다 없다가 중요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10. 류씨가 차씨와 동원이 아니라는 말은 원파보에서 주장하는 그런
식으로 계보를 공유한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일 따름입니다. 우리 민족은
실상 단일민족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게 여러 갈래의 기원이 있고
북방계와 남방계가 혼재해 있습니다. 일단 사람들이 유입해 들어오면
지정학상 나갈 곳이 없어 서로 섞이게 된 것이며, 그런 섞임의 의미에서는
단일민족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 차씨와
류씨는 조상에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선가는 혈연관계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어떤 다른 성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얘기일 따름입니다.
우리나라 성씨 중에는 황제(黃帝)의 자손이라 주장하는 성씨들이 몇몇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훨씬 많고요. 대승공의 조상도
분명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분들이 누군지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이미 고려시대의 우리 조상들에게도 같은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승공이 시조인 것이지요.
11. 저도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물론 차씨 집안의 분들의 의견도 기대합니다.
12. "차원부설원기의 조작 내용과 류차 문제는 별개"라고 생각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곧 차원부설원기의 조작이 바로 류차 동원설의 근간이기 때문입니다.
차원부설원기가 조작이라면 비슷한 시기에 나온 원파보의 다른 사료들도
같은 조작 주체들에 의한 조작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게다가 설원기가
조작이라면 바로 그 조작 의도인 류차 동원설이 거짓임이 명백해집니다.
저는 몇 년 동안 류차 동원 문제를 생각하고 탐구하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라의 역사도 아니고 성씨의 역사이기에
명확한 자료가 없는 경우가 많고, 전승이나 가승도 중요하고 구전 한
마디도 소중한 사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섣불리 차원부설원기가
위작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위작 속에도 진실이 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은데, 그리고 그 작품과 유사한 시기에 나와서 조작의 가능성이
농후하게 느껴지고 현재 남아있지도 않지만 원파보에는 다른 사료들도
언급이 되어 있는데, 차원부설원기의 류차 동원의 주장을 완전히
부인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항상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차원부설원기는 볼수록 조작에 조작이 더해져 있는 책입니다. 저자도
조작이고, 그 책이 저술되었다는 시기도 저자의 상황에 맞춘 조작이고
내용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정사 야사와 맞지 않는 것들 투성이입니다.
저는 이수건 선생의 책을 한 둘 본 것 외에는 실상 누군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 분의 주장을 그대로 신봉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 분을
포함한 역사만을 전공해온 학자들이 차원부설원기가 위작임을 명시하며
류차 동원의 사실을 조작했다고 확실하게 주장하는 것은 저의 결론과
완전 일치하기에 부인할 여지는 없습니다.
연안차씨 집안사람들이 이런 글을 보면 기분이 나쁘겠지만 저는 감정으로
접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위작이지만 차씨들이 최대 근거로
삼는 차원부설원기 자체에서 명백히 "文城人柳車達"이라고 책의 앞부분에서
선언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보지 못하는지 류차달이 차씨라고 망발을
하며 문화류씨를 모독한 것이 그들입니다. 저는 대승공이 정말 차씨였거나
류씨면서 차씨라고 부를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었거나 하면 연안차씨들의
주장을 얼마든지 받아들일 용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당한
사료들의 평가에 입각한 주장이 필요한데, 저는 일방적인 왜곡된 평가와
주장 외에는 접해본 것이 없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류차 동원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2008. 1. 7.
채하 류주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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