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류관 묘·신도비

ryu하곡 2011. 1. 24. 17:30

(양평)류관 묘·신도비(柳寬 墓·神道碑)-문화류씨- 총.묘(塚.墓)

2008/03/03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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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 류관 묘·신도비(淸白吏 柳寬 墓·神道碑)

 

경기도 기념물 제62호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동오리 산157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청백리에 선정된 태종·세종 대의 문신 하정(夏亭) 류관(柳寬, 1346~1433)과 부인의 합장묘이다. 류관은 문화류씨로 자는 몽사(夢思)·경부(敬夫). 호는 하정(夏亭). 초명 관(觀). 시호 문간(文簡). 고려 명종 때의 문신 공권(公權)의 7대손이고, 삼사판관(三司判官) 안택(安澤)의 아들이며, 예조참판을 지낸 류맹문의 아버지이다.

  고려 공민왕 20년(1371)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이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었다.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태종 대에는 예문관 대제학 겸 지춘추관사로 「태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세종 6년(1424)에 우의정에 올라 「고려사」를 편찬하였다.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도 청렴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황희(黃喜)·허조(許稠) 등과 함께 청백리에 선정되었으며, 황해도 문화에 있는 정계서원(程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하정집」이 있다.

  류관 묘역 봉분의 형태는 장대석을 이용한 직사각형의 호석을 두른 길고 둥근 모양의 묘로,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무덤형태이다.

  신도비는 묘소 아래에 있고, 비문은 한말 개화파의 중심 인물인 김홍집(金弘集)이 지은 것이다.

 

▣ 문화류씨 주요 세계도 ▣

(시조)류차달(柳車達) : 대승공, 아들 - ①효전(孝全, 연안차씨) ②효금(孝金, 문화유씨)

( 2세-②)류효금(柳孝金) : 좌윤, 문화군

( 3세)류금환(柳金奐) : 중윤

( 4세)류노일(柳盧一) : 대장군

( 5세)류보춘(柳寶春) : 소감

( 6세)류 총(柳 寵) : 소감

( 7세)유공권(柳公權) : 참지정사, 문간공, 아들 - ①언침(彦沉, ‘갑파’) ②택(澤, ‘을파’)

 

■( 8세-①)류언침(柳彦沉) : 예부상서

( 9세)류 순(柳 淳) : 밀직사

(10세-②)류성비(柳成庇) : 판예빈시사, 문산군, 충성공

(11세-②)류 식(柳 湜) : 첨의평리상호군

(12세-②)류안택(柳安澤) : 삼사판관, 아들 - ①임(臨) ②관(寬)

 

▣(13세-①)류 임(柳 臨) : 형전농정, 충장공

(14세)류사눌(柳思訥) : 대제학, 문숙공[문숙공파]

 

▣(13세-②)류 관(柳 寬) : 집현전대제학, 우의정, 청백리, 문간공[문간공파], 아들 - ①맹문(孟聞) ②중문(仲聞) ③계문(季聞) ④이문(異聞)

 

□(14세-①)류맹문(柳孟聞) :

(15세-②)류 삼(柳 ?) : 한림

(16세)류순행(柳順行) : 고양군수

(17세)류희저(柳希渚) : 공조참판

(18세-②)류용공(柳用恭) : 사헌부감찰

(19세-②)류몽익(柳夢翼) : 첨정

(20세-①)류 속(柳 洬) :

(21세)류성오(柳誠吾) : 현감

(22세-①)류상운(柳尙運) : 영의정, 충간공, 아들 - ①봉서(鳳瑞) ②봉휘(鳳輝) ③봉일(鳳逸) ④봉협(鳳協) ⑤봉채(鳳采)

(23세-②)류봉휘(柳鳳輝) : 좌의정, 충정공

 

□(14세-③)류계문(柳季聞) : 형조판서, 안숙공, 아들 - ①권(睠) ②보(䀯) ③환(睆) ④잡(眨) ⑤ ⑥조(眺)

(15세-⑥)류 조(柳 眺) : 감찰

(16세)류담수(柳聃壽) : 군수, 생부-잡(眨)

(17세)류 릉(柳 陵) :

(18세)류충록(柳忠祿) : 종사랑

(19세)류 위(柳 渭) : 현령

(20세)류성민(柳成民) : 정랑

(21세)류 흠(柳 흠) : 예문검열

(22세)류형원(柳馨遠) : 실학자, 저서 《반계수록》

 

■( 8세-②)류 택(柳 澤) : 상서좌복야

( 9세)류 경(柳 璥) : 첨의중찬, 문경공

(10세)류 승(柳 陞) : 동지추밀원사, 정신공, 아들 - ①인수(仁修) ②인전(仁全) ③돈(墩) ④인기(仁琦)

 

▣(11세-①)류인수(柳仁修) : 중문지후사[지후사공파]

(12세)류 정(柳 靖) : 대언, 아들 - ①유(濡) ②홍(洪)

 

□(13세-①)류 유(柳 濡) : 목사

(14세-③)류 호(柳 滸) : 한성부판윤

(15세-②)류사근(柳士根) : 사인

(16세-③)류성원(柳誠源) : 집현전학사, 사육신, 충경공

 

□(13세-②)류 홍(柳 洪) : 개성윤

(14세-②)류중의(柳仲宜) : 중랑장

(15세)류소로(柳紹老) : 병마절도사

(16세)류승조(柳承祖) : 사헌부감찰

(17세-②)류제근(柳悌根) : 군기시첨정

(18세-①)류수천(柳壽千) : 돈령부정, 아들 - ①혼(渾) ②잠(潛)

(19세-②)류 잠(柳 潛) : 공조판서, 문녕부원군

(20세-①)류자신(柳自新) : 한성판윤, 문양부원군, 광해군 국구

(21세-)류희분(柳希奮) : 병조판서, 문창부원군

 

▣(11세-③)류 돈(柳 墩) : 도첨의찬성사예문관대제학, 시령군, 장경공, 아들 - ①총(總) ②진(鎭)

 

□(12세-①)류 총(柳 總) : 우부대언

(13세)류만수(柳曼殊) : 상의문하부사[좌상공파]

(14세-①)류원지(柳原之) : 상의중추원사

(15세-②)류 종(柳 淙) : 한성판관

 

●(16세-②)류사공(柳思恭) : 세마

(17세-②)류 순(柳 洵) : 영의정, 문성부원군, 문희공

 

●(16세-⑤)류사의(柳思義) : 군수

(17세-③)류 연(柳 演) : 진사

(18세-③)류예선(柳禮善) : 현감, 문성부원군

(19세-③)류 전(柳 琠) : 영의정, 시령부원군, 문정공

 

□(12세-②)류 진(柳 鎭) :

 

●(13세-①)류원현(柳元顯) : 첨한성사[첨한성공파]

(14세-⑥)류 형(柳 衡) : 현감

(15세-④)류효장(柳孝章) : 홍문관교리

(16세)류인호(柳仁濠) : 공조참의

(17세-①)류복룡(柳伏龍) : 현령

(18세-②)류희림(柳希霖) : 예조참판, 문양공

 

●(13세-②)류정현(柳廷顯) : 영의정[정숙공파]

 

▣(11세-④)류인기(柳仁琦) : 온정공

(12세)류보발(柳甫發) : 밀직사우부대언

(13세-②)류계조(柳繼祖) : 전법판서상호군

(14세-②)류 량(柳 亮) : 대제학, 우의정, 충경공[충경공파]

(15세)류 좌(柳 佐) : 전사령

(16세)류상영(柳尙榮) : 감찰, 배위 안동김씨 김구(金垢)의 따님

(17세-②)류 주(柳 霔) : 호군

(18세)류정수(柳廷秀) : 사헌부장령, 아들 ①엄(弇) ②관(灌)

(19세-②)류 관(柳 灌) : 좌의정, 충숙공

 

 

 

 

<신 신도비>

  ‘우의정 시 문간 ○정산사 하정 류공 휘관 신도비명’


 

 

<구 신도비문>


‘우의정 시 문간공 류공 신도비명’


  우리 장헌대왕께서 총명하시고 하염이 있으신 성인으로 창업을 계승하여 뒤로 물려 줄 즈음에 예악을 일으키고 장정을 제청했으니, 의문제도가 찬연하여 논술할 만 하였다. 재상이었던 유공이 경술의 재질로 위로 임금님의 지식에 맞아 네 임금님을 섬겼고, 삼사로 퇴직하였으니 석주보다 더 멀어 개국 초부터 백성들이 지금까지 그 혜택을 입었다.

  오! 풍성하도다! 공의 이름은 관이요, 자는 경부이다. 첫 이름은 관이요 자는 몽사이고, 호는 하정이었다. 문화류씨의 후손으로, 고려의 대승공 차달의 후예이다. 정당문학 문간공 공권이 6대조이시다. 증조 성비는 판례빈시사 문산군으로 시호는 성이다. 조부 식은 벼슬이 첨의 평리였고, 아버지 안택은 삼우판관으로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어머니 정숙부인은 동래정씨로 중추원부사 기문의 따님이시다. 지정 6년 병술 11월 임자일에 공이 낳으셨다.

  홍무 기유년에 성균시에 합격하고, 신해년에 전시에 합격했다. 처음에는 비서교감에 제수되고, 임자년에 상서주부였고 계축년에 춘추검열이고, 갑인년에 예문공봉이고, 을묘년에 진덕박사요, 병진년에 예의랑으로 비어대를 내리셨다. 정사년에 판도좌랑이고, 술오년에 전빈판관으로 자금어대를 내리셨다. 경신년에 전의시승이고, 임술년에 전리정랑이었다. 전농부정, 지제교, 문과고시관으로 이조 등 33명을 선발했다. 신미년에 전농정 겸 경력사경력을 맡다. 임신년에 병사사인이었고, 계유년에 병조의랑, 세자우병선이었다. 갑술년에 중훈대부 사헌중승으로 원종공신의 훈공을 내리니 사양하는 사연을 올렸다. 병자년에 문과고시관으로 김익정 등 33명을 선취했다. 정축년에 통정대부로 성균관대사성 세자우보덕이었고, 무인년에 가선대부를 받아 형조전서 경연시강관이 되어 상소하여 상형의 도를 극간하니 임금께서 기꺼이 받아들이셨다. 기묘년에 이조전서, 집현전직학사, 중추원부사보문각학사로 동지경연사이었다. 경진년에 가정대부 강원도관찰사이고, 계미년에 계림부윤이었다. 을유년에 전라도관찰사에 출척사를 겸했다. 병술년에 자헌대부 예문관대제학 겸 판공안부사에 경연 춘추관사를 맡고, 세자좌부빈객이었다. 10월에 하정사로 중국에 가다. 정축년에 개성유후사유후이고, 임진년에 아내가 있으면서 첩을 두는 것을 징계하는 소를 올리니 임금이 기꺼이 수납하시다. 갑오년에 사헌부대사헌이 되고, 5월에 박은을 대신하여 노비변정도감제조가 되다. 병자년에 대사헌 아무개 등이 양우의 죄를 청했으나 임금께서 살피지 않고 모두 하급하도록 하였다. 임진년에 약제를 하사하시다. 대사헌 아무개가 편지를 올려 사양하다. 을미년 정헌대부로 의정부참찬이 되어 찬성 유정현과 치용 등의 죄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1월에 숭정대부 검교의정부찬성 수문전대제학이었고 12월에 검교판좌군 도총제부사이었다.

  무술년에 세자좌빈객이고, 기해년에 숭록대부 판중군도총제부사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이 해에 공과 변계량 등에게 명하여 정도전이 지은 고려사를 고쳤다. 집현전에 공과 변계량으로 대제학을 삼아 임금께서 구언이 있으면 응지소를 썼다. 문과고시관으로 조상치 등 33인을 선발했다. 경자년의 벼슬은 전년과 같았다.

  신축년에 임금께서 궤·장을 하사하시니 감사하는 글을 올렸다. 임인년에 퇴직을 바랬으나 윤허하지 않고. 약주와 찬을 하사하시고 대언 권맹손을 보내어 의온례를 하고 파했다.

  계묘년에 고려사 수정범례로 변계량과 각기 상소함이 있다. 갑진년에 재상이 되니 임금께서 초구를 내리셨다. 을사년에 가뭄과 재해로 사직되기를 원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비답을 집현전부제학 권도에게 명하여 사제로 보내셨다. 병오년에 또 상소하여 퇴직을 원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정미년 가을 우의정에서 나이가 많아 퇴직하니 그 사택에 사과의 녹을 주게 하여 평생 계속토록 하였다. 경술년에 임금께서 술을 하사하였다.

  임자년 7월 임금께 말씀드리되, “신이 나이 80세를 지났으나 밝은 세상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신의 아들 계문에게 직첩을 내려 주소서.”라고 하였더니, 이조에게 명하여 직첩을 주면서, “계문은 일을 맡기기에는 성실하지 못하나 이제 늙은 아비를 위하여 준다.”라고 하였다. 겨울에는 임금께서 공과 황희에게 각기 노루 한 마리씩을 주셨다. 계축년 5월 7일 기미에 작고하니 향년 88세였다.

  그날 임금께서 경회루에 납시어 풍정연을 올리다가 부음을 듣고 즉시 애도를 표했다. 지신사 안숭선이 계청하되 오늘 잔치를 연 뒤에 또한 “예조에서 조회와 시가를 쉬는 장계가 아직 올리지 않았으며 날이 또한 어둡고 비가 오니 청컨대 내일 행하시지요.”라고 하였으나 따르지 않으셨다. 흰 옷과 흰 부채로 홍례문 밖에 납시어 백관을 거느리고 애도하시기를 의례대로 하셨다. 소찬을 올리고 금천교에 행차를 배설하여 제사를 내리고 친히 임하시어 슬픔을 다하시고 파했다. 시호를 문간이라 하고 청백리에 기록하였다. 양근 왕충리 신좌에 장례했으니 부인 안씨의 묘소 오른 편이다.

  광릉군부인 안씨가 3남을 두니 맏이인 맹문은 예찬이고, 다음 중문은 호군이고, 다음 계문은 판서로 시호가 안숙이다. 다음 부인 풍천부인 이씨는 호조전서 송의 따님이시다. 1남을 두니 이문이다. 맹문이 5남 2녀를 두니, 첨은 판사, 참은 한림으로 부제학에 증직되고, 노는 요절했고 졸은 예판, 이는 전구령이다. 따님 맏이는 김중손, 다음은 김확의 아내이다. 중문은 1남 2녀를 두니, 기는 무과로 부사이고, 따님은 이효양, 박계금은 판사이다. 계문이 6남 3녀를 두니, 권은 병참, 보는 무과로 부사이고, 완은 감찰로 판서로 증직되고, 정은 부사, 제는 병사, 보는 감찰이다. 따님 이상로는 판관, 정수는 증직 참의이고, 조항은 목사이다. 이문은 3남을 두니, 녹은 생원, 섭은 사직, 심은 사인이다. 후손으로 현달한 이는 부제학 희도, 영의정 상운, 부제학 상재, 교리 봉서, 이상 공량, 찬성에 증직된 몽정이다. 유현으로는 반계 형원, 사교당 준이고, 무반으로 현달한 이는 부원수 문, 병판 염, 통제사 정익이다. 이 외에도 충·효·열문·음·무를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보판을 보면, 공은 네 임금을 섬겼고, 지위가 공고에 이르렀다. 흥륭하는 시운을 도와 승평의 다스림을 이루었으니, 공렬의 뛰어남은 역사에 기록되어 지금까지 사람들의 이목에 비쳐지고 있다. 학문의 순수함과 절개의 뛰어남은 더욱 세상의 규범이 되니 비단 한 때의 사업이 칭찬될 뿐만 아니라 천고 유림의 종사가 되었다. 타고난 천품이 순수하고 도량이 넓어, 어려서부터 경학에 침잠하여 의리를 밝히니, 그 깊은 조예와 독실한 실천은 몸을 세워 국가에 봉사한 일들에 나타나 있다. 대저 배우기를 좋아하는 성실성은 늙도록 쇠하지 않고, 책 읽고 사색하기를 밤늦도록 쉬지 않았다. 평생토록 임금의 마음 일깨움을 첫째 의무라 여겨 경연에 드나들며 모시고 강의한 지 가장 오랬고 항시 ‘성·지’ 두 자로 간절히 권면하였다. 무악에 도읍을 세운다는 의론이 나왔을 때 역·순의 이치를 극언하여 감여가들에게 흔들림이 없게 하라 하여 임금께서 기꺼이 수납하여, 마침내 한양에 정도했으니, 배운 바 강령의 올바름을 미루어 알 수가 있다.

  당시는 정치적인 과도기로 서교가 성행해서 상제가 문란하였다. 공이 대헌으로서 상소로 진정하니 대략 이러했다. 3년의 상기는 천하의 통례이다. 그러므로 대소의 신료나 서민이라 하더라도 그 제도를 마치도록 허락한 것이다. 요무에 관계되어 정자를 빼앗기는 자들이 있으니, 이제 살펴보면 직수나 어떤 관계에 없는 자가 성인의 제도를 불고하고 옛 버릇에 따라 겨우 백일만에 탈상한다. 혹은 흰 옷과 백립으로 대로를 활보하면서 부끄러워 할 줄을 모르니, 성인의 제도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실로 밝은 시대의 성전에 누가 된다. 풍속의 경박함을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이제부터 만일 “상기를 마치지 않고, 멋대로 상복을 바꾸는 자는 법으로 통렬히 다스려 인륜을 돈후히 하소서.”라고 하니 임금께서 곧 허락하였다.

  승도 오교양종을 소태하기를 청하는 소에는 대략,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 날마다 경연에 납시어 요순의 다스림과 공맹의 가르침으로 앞에서 강의하시나 불교를 배척하고 성도를 옹호하는 논의에는 미치지 못하시니 신으로서는 적이 의혹스럽습니다.”라고 하고 인하여 불교가 인륜을 어지럽히고 신라 고려에서의 높았던 신앙을 극언하고, 오교 양종을 파하여 곧 속가로 돌려보내어 각기 본업에 종사하게 하기를 원했다. 또 중외에 제멋대로 머리를 깎는 일이 없게 하여 10년동안 견지하여 확고부동하게 하면 세속에서 모두 허탄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연후에 성인의 도로 가르쳐 오래 싸인 미혹을 제거하면 사람들이 쉽게 따르고 교화도 쉽게 이행될 것이다. 효과가 전보다 몇 배 될 것이고 길이 후세에 남는 말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또 상소하여 탄일재 행초례 행하는 것을 없애도록 청하였더니, 세종이 정부에 그 상소문을 보내어 논의하게 하였다. 재초와 반승의 실책을 곧 폐하게 하고, 상례와 장례의 제도는 한결같이 주문공가례를 준수하도록 하였으니, 사도를 물리치고 정도를 호위한 공이 이러하였다. 재상은 30년 하였지만 사방 어디에도 전광이 없고 사는 초가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했다. 장마가 한 달은 간 일이 있다. 손으로 우산을 잡고 앉아서 밤을 새웠다. 사람들이 어쩌다 담을 쌓으라고 권하면 이제 재상이 되어 급히 전날의 담장을 고치는 것이 옳은 일이냐 하였다. 임금께서 집에 울타리가 없다는 말을 듣고 선공감을 시켜 밤에 몰래 해서 식구들이 모르게 하라 하였다.

  금륜사에서 국사를 감수할 때에는, 짚신과 대지팡이로 마을 어린이와 휘파람을 불며 흥인문 밖을 왕래하여 홀연히 속세를 벗어난 기상이 있으니, 사람들은 그가 재상인 줄도 몰랐다. 청고하고 세속에 벗어난 지조가 이러함이 있었다. 찬성을 사양하는 소에 비답하시되, “오직 경의 학문은 이미 정주의 학에 나아가 있고, 재주 또한 반고·사마를 쫓는다. 마음가짐은 충직에서 근본하고, 행동의 제제는 안화에 적합하니 실로 조정이 규범이 되고 선비의 종사라 하겠다.” 글을 배운 선비로서 성조에 기대되었음을 말할 수 있다.『해동명신록』에 이르기를 공이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때때로 농구를 가지고 채소밭을 가꾸면서도 수고로와 하지 않고, 가르침에도 게을리 하지 않으니 배우기 위해 모이는 자가 많았다. 사람이 혹 찾아와 뵈오면 머리로 인사할 뿐 성명을 묻지 않았다.

  지봉유설에 이르기를, “하정 유정승은 곧 나의 외5대조이다. 공은 평소에 청백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흥인문 밖의 집터가 다행히 우리 집으로 전해져서, 선친께서 공의 옛집이라 하여 수리하였다. 어느 사람이 소박하고 누추함을 비웃으니 선친께서 이것도 우산보다는 사치스럽지 않는가!”라고 하시었다. 시를 지으시니 “하정의 기친 터 낙성가에 있으니 청백한 집전하여 내게 이르렀네, 어떻게 이 우산 천만리를 덮어 천하를 다 가려 젖지 않게 하랴?”했으니 공의 청백하심이 이러했다.

  대저 공은 이학의 올바름으로 전 세대의 잘못을 일소하여 우리나라 유술의 바른 길을 열었다. 청렴결백은 조정 재상들의 표준이 되어 온 세대의 모범과 경계가 되겠다. 사림들이 유성에 서원을 세우고 정계라 사액하여 제향한다. 오! 얼마나 어지셨던가. 공의 후손들이 장차 옥돌에 새기려 하나 석우에게 청하여 그 사적을 엮으라 하니 석우가 그럴만한 사람이 못된다 하여 사양했지만, 되지 않아서 마침내 이 글을 짓고 이어 명하노라.


오백년 왕업이 일어 창성한 세대 열었도다.

산천이 구름을 내어 이 시대를 맞추도다.

깊으신 학문과 맑고 순수하신 모습이로다.

그 쌓으신 덕 캐어보면 소문대로 시행하심이로다.

즐비한 한양의 도읍 신명이 터를 잡은 곳이로다.

좋은 말씀으로 도모되고 큰 바탕으로 다져졌다.

네 임금님 도우시어, 평화로운 치적 이루시다.

임금께서 말하되 나를 도움이여 네가 도와줌이라 하라.

아름답게 뛰어난 저 수여, 아름다운 몸가짐에 근원한다.

조정에서의 단정하심, 서서 밝히시는 규범이다.

예의 풍속 순박함은 이단을 물리침이다.

우산으로 지붕 삼을 사람마다 칭송하고, 헐어진 담장 관가에서 보수했네.

돌아와 집을 살피니 채소밭 비에 살찐다.

살아서 영화, 죽어서 슬픔, 임금님의 은혜와 예우도 모자람이 없었다.

은택이 흘러 널리 이로우나 백성들은 알지 못하네.

청문의 옛 집 바라보매 뒤얽히는 생각, 울창한 저 양주의 언덕 초동목수여 헐지마라.

모든 벼슬살이 이 비석에 풍부하다.


자헌대부 예조판서 홍문관제학 경연일강관 동양 신석우는 짓다.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 세자부 원임규장각직제학 경주 김홍집은 쓰다.

가의대부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의천 박용대는 전서하다.

숭정기원후 다섯 번째 신묘년(고종 28, 1891년) 2월 일 세움.

 

 

<구 묘갈>

  ‘조선국 우의정 증시문간공 류공지묘’


 

 

 

<유훈>

  “우리 집안에 길이 전할 사물은 청백이니 대대로 서로 이어 끝없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