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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누가 왕을 죽였는가 ? (6) - 제 20대 경종

ryu하곡 2011. 1. 24.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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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왕을 죽였는가 ? (6) - 제 20대 경종


6장 이복형제의 비극

제20대 경종
   1588-1724년. 재위 1720-1724(4년간)

<경종실록> 4년8월21일(사망 3일 전)
여러 의원이 임금에게 어제 게장을 진어하고 이어서 생감을 진어한 것은 의가醫家에서는 매우 꺼려하는 것이었다.

<경종실록> 4년8월24일(사망 당일)
세제世弟(영조)가 “인삼과 부자附子를 급히 쓰도록 하라”고 말하자 어의 이공윤이 “인삼차를 쓰면 안 됩니다. 제가 처방한 약을 진어하고 여기에 인삼차를 올리면 능히 기氣를 돌리지 못할 것입니다.”고 반대했는데, 세제가 “사람이란 본 시 자기의 의견을 내세울 데가 있기는 하나 지금이 어떤 때라고 자기 의견을 세우고 인삼을 못 쓰게 하는가?” 라고 하였다.

<영조실록> 31년5월21일
역적 신치운이 복주伏誅되었다. 사신史臣(실록 기록자)은 말한다.
"갑진년 8월에 경묘(경종)께서 병환이 다 낫지를 않고, 수라를 들기를 싫어하는 징후가 더했기 때문에 궁중에서 근심한 나머지 20일에 어주御廚에서 수라에 게장을 올렸다. 경묘께서 이 게장으로 수라를 많이 드셨기 때문에 궁중에서 모두 기뻐하였다.....
신치운의 게장에 대한 말에 이르러서는 비록 이천해 같은 흉역도 말하지 못한 바였다.
아! 통분스럽다. 그 역시 사람인데 차마 이런 말을 한단 말인가? 그때 동조(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김씨)께서 설사 게장을 보냈다 하더라도 이는 당연한 예삿일이요. 하물며 올린 바가 또 어주에 올린 것이겠는가...?"




<경종이 동궁시절 (1713년 3월) 부솔 김재해에게 내린 글>

경종 재위기간은 불과 4년 2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4년 세월은 격동의 시대였다. 부왕 숙종 대를 거치면서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더욱 심해졌고, 그 정쟁의 결과 서인이 승리하였다. 또 1백여 년을 집권한 서인이 몸집이 비대해져 송시열의 노론과 윤증의 소론으로 자체 분열한 시기도 숙종 때였다.

같은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갈려 서로 대립했듯이, 노론과 소론도 대립했다.
심지어 노론과 소론은 옷차림도 틀려서 멀리서 봐도 당색을 알 수 있었다. 노론은 저고리 깃과 섶을 둥글게 접었으나 소론은 모나게 접었고, 노론 아녀자의 치마 주름은 굵고 접은 수가 적었으나 소론 아녀자의 치마 주름은 가늘면서 접은 수가 많았다.

남인과 싸울 때는 다 같이 서인이었으나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서 싸울 때는 오히려 소론이 남인 편을 들 정도로, 한 번 갈라지면서 적이었고 적의 적은 동지라는 등식이 성행하던 시절이었다.

무려 45년 10개월 동안 재위에 있었던 숙종은 이런 당쟁을 왕권 강화의 기반으로 이용했고, 이를 통해 27명에 이르는 조선의 임금 가운데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왕권은 제도적인 틀로서 마련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상황을 적절히 이용하는 정치력에 의한 것이란 한계가 있었다. 숙종이 당쟁을 이용해 각 당파를 상황에 따라 치고 올리는 동안 각 당파는 서로를 저주하게 되었다. 숙종의 이런 당쟁 이용과 당파간의 싸움은 끝내 한때 왕비였던 희빈 장씨를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바로 그 장씨의 아들이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었으니 비극은 이미 싹튼 셈이었다.

남인이란 당적이 붙은 아이

15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한 숙종은 무려 15년 동안이나 후사를 보지 못했다.
숙종은 외아들인 데다가 몸도 건강하지 못했으므로 자칫하면 대가 끊길 판이었다.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숙종이 46년이란 기나긴 기간을 재위에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외아들인 숙종의 몸이 약하니 궁내에서는 종친 복창군 형제와 궁녀와의 스캔들인 홍수의 변 등 숙종의 후사를 둘러싼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다.

숙종의 가장 큰 바람은 후사를 낳는 것이었다.
숙종은  10살 때인 1670년  세자의 신분으로  서인 김만기의 딸을 맞아들였으나,  김씨는 딸만 셋을 낳았을 뿐  아들을 낳지 못했다.  게다가  그 딸들은 모두 어릴 때 죽어버렸고,  인경왕후 김씨 마저 1680년 2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숙종은 다음해 역시 서인 민유중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으나, 민씨는 혼인한 지 7년이 지나도록 아들은커녕 딸도 낳지 못했다.
그녀가 인현왕후 민씨다.

후사가 없자 숙종은 불안했다.
이 불안감을 파고든 여인이 그 유명한 궁녀 장옥정, 바로 희빈 장씨다. 그러나 자의대비 조씨의 시종으로 있으면서 숙종과 교제하던 희빈 장씨는 숙종의 모후인 명성왕후의 미움을 받아 궁 밖으로 쫓겨났다. 장씨는 숙종 9년(1683년) 명성왕후가 사망한 후에야 다시 궁에 들어와 후궁이 될 수 있었다. 흔히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 사이의 싸움을 숙종을 차지하기 위한 애정 다툼으로 생각하지만 그 이면에 감추어진 면면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인현왕후 민씨와  희빈 장씨는  단순히  애정 문제로 싸운 것이 아니라,  한 정치가로서 권력을 다툰 정적 사이였다.

인현왕후 민씨가 속한 당파는  숙종 6년(1680)의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장악한  서인이었고,  희빈 장씨가 속한 정당은 권력 장악을 위해 절치부심하던 야당인 남인이었다.
그런데 인현왕후가 7년째 아이를 낳지 못하는 상황에서 희빈 장씨의 배가 불러오자 서인들은 긴장했다. 숙종 14년(1688) 10월에 있었던 한 사건은, 희빈 장씨 뱃속에 든 아이를 서인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잘 보여준다.

궁중 안에 8명이 메는 옥교가 들어왔는데 그 옥교를 탄 여인은 지체 높은 왕가나 사대부가의 여인이 아니라 천인이었다. 이를 본 사헌부 지평 이익수와 이언기가 사헌부 금리를 불러, 감히 천인이 탄 옥교를  궁중에 출입시켰다고 호통을 쳤다.  꾸중을 들은 사헌부 금리들은  여인을 끌어내린 후  옥교를 메고 온 노비들을 치죄하고 옥교마저 빼앗아버렸으며, 나아가 옥교를 탄 여인을 꾸짖었다.

그런데 모욕을 당한 그 천인은 바로 장옥정의 모친, 즉 귀인 장씨의 모친이었다.
그녀는 딸 장옥정이 왕자를 낳자 친정어머니로서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입궁하던 중이었다. 귀인은 내명부 종1품의 품계로, 후궁 중에서는 대개 왕자의 어머니가 받는 빈 다음의 품계였다. 따라서 장씨의 모친은 일개 천인의 신분으로 옥교를 탄 것이 아니라, 종1품 후궁의 어머니로서  국왕의 외아들을 생산한  딸의 산후 수발을 위해  옥교를 타고  입궁하던 중 이런 수모를 당한 것이었다. 왕조국가에서 이는 국왕의 장모가 수모를 당한 것과 마찬가지였으니 이 소식을 들은 숙종이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
"귀인의 모친이 전교를 받고 궁중에 들어올 때 사헌부에서 이처럼 모욕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귀인의 내외 족당이  요직에 웅거한 집안이어서  그들의 세력이 두렵다면  사헌부에서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 입궁은 귀인의 본가에서 잠시 와서 귀인을 보게 한 것과는 다르다. 또 후궁에 산실을 설치하는 것은 궁중의 관례일 뿐 아니라, 본가에서 와서 간호할 수 있게 옥교를 타고 출입하는 것은 내가 허락한 바이며 이 또한 전부터 있어온 관례이다. 더구나 천인이 궁녀들도 상궁이 되면 옥교를 타는데 하물며 왕자의 외가에서 전교를 받고 출입하다가 이 같은 모욕을 당했는데도 대간의 상소는 혹은 천인이라 하고 혹은 걸어 다니라고 하니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숙종의 말대로 옥교를 탄 여인은 비록 천인이지만 한 명뿐인 왕자의 외할머니였다.
숙종은 왕자의 외할머니에 대한 사헌부의 이런 처사를 왕권에 대한 신하들의 도전으로 생각했다. "귀인의 내외 족당이 요직에 웅거한 집안이어서 그들의 세력이 두렵다면 사헌부에서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란 숙종의 말은  근거 없는 말은 아니었다.  전 영의정  김수항의 증녀인 귀인 김씨의 모친 또한 예사로 옥교를 타고 궁궐에 출입했던 것이다.

숙종은 이 사건을 갓 태어난 왕자에 대한 서인들의 위협으로 받아들였다.
이 무렵  숙종은  자신을 도와주던  쟁쟁한 척신들이 잇달아 사망하는 바람에  외로운 처지에 빠져 있었다. 현종과 숙종의 대표적인 외척이었던 청성부원군 김석주는 4년 전인 숙종 10년에 사망했으며, 첫 번째 장인 김만기도 지난해 사망했다. 김석주의 사망은 척신과 서인의 연합정권이었던 조정을 서인의 단독 조정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숙종은 이렇듯 거대 서인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런 숙종의 첫 왕자를 생산한 귀인 장씨의 친정어머니를, 서인 사헌부 관리들이 모욕했던 것이다.

서인들이 장씨의 친정어머니를 모욕한 이유는 분명했다.
서인들은 귀인 장씨를 남인 당인으로 보았다. 장옥정이 한창 숙종의 총애를 받던 재위 12년에 부교리 이징명이 올린 상소는 이를 잘 보여준다.
"폐하의 총애를 받고 있는 궁인 중의 한 사람이 역관 장현의 친척이라 하는데 현 부자는 허견의 옥사 때 사사당한 복창군 정에게 붙었던 자이옵니다. 이제 그 친족을 가까이하다가는 차후 말할 수 없는 우려가 있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장녀를 추방하소서."

장옥정의 종숙 장현이, 남인과 가까이 지내다 서인의 음모에 걸려 사사당한 복창군과 가까웠으니 장옥정도 남인이라는 논리였다. 서인들은 장옥정이 왕자를 생산하게 될까 두려워했는데 바로 그런 사태가 벌어졌으므로 왕자의 외조모를 끌어내리는 과잉 반응을 보인 것이다.

비록  후궁 소생이지만  다른 왕자가 없는 상황이었으니,  자칫하다가는  이 아이에게 보위가 돌아갈 수 있었다. 서인으로서 이는 당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어떻게든 막아야 할 사태였다. 만약 이 아이가 장씨가 아닌 인현왕후 민씨 소생이라면 서인들은 경하하면서 투옥된 죄수들을 사면하자고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는 민씨 소생이 아니라 장씨 소생이었고, 그렇다면 이 아이 역시 남인일 것이었다. 아직 젖도 떼지 못한 아이에게 당적이 붙는 상황이었다.
이렇듯 태어나자마자 남인이란 당적이 붙은 이 아이가 바로 조선의 20대 임금 경종이다.

반대하려면 물러가라.

그토록 고대하던 왕자가 태어났는데도  진하는커녕  왕자의 외할머니를 모욕하는 것을 보고  숙종은  비상한 조치를 취해놓지 않으면 태어난 왕자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겠다고 판단했다. 숙종은 일단 결심이 서면 과감하게 실천하는 임금이었다.

숙종은  왕자가 태어난 지 3개월이 채 안된 재위 15년(1689년)1월 초  갑자기 시, 원임 대신과 6조 및 3사이 장관을 불렀다. 정오까지 오지 않는 신하가 있으면 담당 승지를 엄벌에 처하겠다는 단서까지 단 명령이었다. 대신들이 모이자 숙종은 단호하게 말했다.
"국본(세자)이 정해지지 않아  민심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오늘의 계책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생 원자의 명호를 정하는 데 있다.  만약 이에 머뭇거리거나 관망하거나  감히 이의를 제기하려는 자가 있다면 관직을 내놓고 물러가라."

이는 곧 장희빈 소생의 아이를 원자로 책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조선의 후사는 ‘왕자→원자 →세자→ 국왕’의 순서로 밟게 되어 있었으므로 원자로 책봉되면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즉위까지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숙종은  집권당인 서인들이 당연히 반대할 것이라 생각하고 "반대하려면 물러가라"는 배수진을 친 것이다.
예상대로 서인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이조판서 남용익의 반대 이유는 "지금 중궁(왕비)의 춘추가 한창"이라는 것이었다.
인현왕후의 나이가  아직 젊기 때문에  후사를 낳을 수도 있다는 논리였다.  호조판서 유상운, 공조판서 심재도 인현왕후를 거론하며 반대했다. 즉위 14년 만에 낳은 왕자의 앞날을 축복해주는 신하는 한 명도 없었다. 이는 숙종의 위기감을 더하게 했다.
"내 나이 서른에 겨우 아들을 얻었는데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 ?
국세가 위태롭고 옆에는 강한 이웃이 있으니 종사의 중대한 계획을 늦출 수 없다."

숙종의 결심은 확고했으나 반대하는 서인의 당론도 확고했다.
숙종은 재차 반대하는 이조판서 남용익을 중죄로 다스린 후에야 원자 책봉을 강행할 수 있었다. 숙종은 이 문제를 처음 거론한 지 닷새 만에 장씨 소생의 왕자를 원자로 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했다.  실로 전광석화 같은 조치였다.  조선시대에  종묘에 고묘告廟하면  사태는 종결된 것이었다. 숙종의 의지가 워낙 강경하자 서인들도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미 끝난 원자 정호를 정면에서 비판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다.
바로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향리인 충청도 회덕에 은거해 있었으나, 영의정 김수홍이 사사건건 그의 지시를 받아 일을 처리할 정도로 원로 대접을 받고 있었다.
당시  그의 지위가 어떠했는가는  ‘대로大老’라는 경칭이 잘 말해준다.
그런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숙종의 원자 정호를 정면에서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송나라 철종은 10세가 되도록 번왕으로 있다가 신종이 병이 난 뒤에야 비로소 태자에 봉해졌습니다. 당시 가왕과 기왕의 핍박이 있었는데도 이처럼 천천히 태자로 봉한 것은 제왕은 큰일을 할 때 항상 여유 있게 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지금은 핍박의 염려가 없지 않습니까?"

송시열은 이처럼 중국 송나라의 예를 들어, 원자 정호가 성급한 조치였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송나라 철종은 신종의 아들이었다. 신종은 28세의 늦은 나이에 철종을 얻었으나 후궁 소생이었기 때문에  원자가 아닌  번왕으로만 책봉하였다가,  정비가 끝내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태자로 책봉했다. 송시열은 이 고사를 빗대 인현왕후가 끝내 왕자를 생산하지 못하면, 그때 희빈 장씨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라고 주장했다. 당시 인현황후의 나이 23살이었으므로, 송시열이나 서인들이 보기에는 충분히 후사를 낳을 수 있는 나이였다.
송시열의 상소 소식을 들은 서인들은 대로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감탄했다. 그러나 이상소는 송시열 자신과 서인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 상소를 계기로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들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己巳換局(1689년)이 일어난 것이다. 서인들이 경신환국으로 정권을 잡은지 9년 만이었다.

이 상소를 본 숙종은 격노했다.
설령 그의 말이 맞더라도 이미 종묘에 고묘한 사안을 재 거론하는 것은 왕권을 능멸하는 행위였다. 상소를 받은 날 이미 날이 어두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숙종은 승지 이현기와 교리 남치훈, 수찬 이익수 등을 불렀다.
"명나라 황제도 왕자 탄생 넉 달 만에 봉호封號한 일이 있다. 송시열의 주장은 이와 상반되지 않는가? 송시열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그대들에게 물어보려 부른 것이다."

숙종의 말대로 원자 정호 문제는 송시열의 주장과 다른 예도 얼마든지 있었다.
다시 말해 이 문제는 그렇게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다름 아닌 송시열이었다. 현종이 일찍이 "임금에게 박하고 누구에게 후할 것이냐. 신하들이 임금이 아닌 송시열에게 충성한다.“고 꾸짖었던 그 인물이었다.

숙종의 물음을 받은 승지, 교리 중에서 오직 남인 승지 이현기만 송시열이 틀렸다고 고했다.
숙종은 송시열을 끝까지 옹호하는 서인 수찬 이익수를 파직한 후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문외 출송시켰다. 그리고 송시열을 구하는 상소는 받지 말라고 승정원에 명했다.

숙종은 송시열의 상소에 대한 대처 여부에 원자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생각했다.
서인이 집권한 상황에서는 원자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한 숙종은, 집권당인 서인을 축출하고 반대당인 남인을 등용하는 것만이 원자를 보호하는 길이라고 믿었다.

숙종은  정권을  남인에게 주기로 결심하고  서인 영의정 김수홍을 파직한 후  남인인 목래선, 김덕원을 좌의정과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이것이 남인이 정권을 잡는 기사환국이다. 그러나 숙종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숙종은  서인가家 여인인  인현왕후 민씨가 왕비로 있는 한  원자의 앞날을 기약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민씨를 내쫓기로 결심했다. 결국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사저로 쫓겨나고  희빈 장씨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서인들에게 보복을 단행했다.
그간 서인들로부터 받은 탄압을 그대로 돌려주기로 한 것이다. 남인들의 보복의 칼끝은 당연히 서인 영수 송시열과 김수항에게 향했다.

남인들이 계속해서 송시열을 공격하자 숙종은 일단 그를 제주도로 유배 보냈다가 위리 안치시켰다.  그러나  송시열이 살아 있다는 사실자체를 불안해한 남인들은  그를 국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83살이었던 송시열에게는 국문은 죽음의 길이었다. 숙종이 송시열의 국문을 허락함에 따라  송시열이 뭍으로 올라오자  수많은 문도들이 그를 맞았다.  서인들에게  그는 죄인이 아니라 정치범이자 확신범이었다. 송시열이 국문 받을 경우 벌어질 소동이 두려워진 숙종과 남인은 그를 한양까지 끌어올리지 않고 정읍에서 사사시켰다.
전 영의정 김수항은 이미 사시된 뒤였다.

송시열이 사약을 받는 현장을 수많은 서인 문도가 눈물로 지켜보았다.
그 눈물은 남인을 향한 복수의 눈물이었고, 새로 왕비가 된 장옥정과 그녀 소생인 원자에 대한 증오의 눈물이었다.

장옥정 소생의 원자와 서인 사이의 군신관계는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만일 이후 남인이 계속 집권했거나 서인과 화해정책을 실시했으면, 희빈 장씨와 원자의 운명은 그렇게 비참하지 않았을지 모르며 죽고 죽이는 살육전 또한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인과 서인은 서로를 적당敵黨으로 규정하고 상대방을 쓰러뜨리기 위해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남인들은 집권 초반 송시열과 김수항, 이사명, 홍치상 등 무려 1백여 명의 서인들을 사형, 유배, 삭탈 관작시키는 정치보복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후인 숙종 20년 상황은 반전되었다.

두 모자의 운명

왕자 연잉군(훗날의 영조)을 낳아 새로 숙종의 총애를 얻기 시작한 숙원 최씨의 도움을 받아 서인들이 남인들을 다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갑술환국이다.
이로써  영의정 권대운,  우의정 민암,  판의금부사 유명헌 등  20여 명의 남인 중신들이 대거 삭탈 관작, 문외 출송되었다. 서인 남구만이 영의정이 된 데 이어 서문중이 병조판서, 신여철이 훈련대장을 차지해 의정부와 군사권을 서인들이 모두 차지했으며, 인사권을 지닌 이조판서도 서인 유상운이 차지했다.

갑술환국은 두 가지 점에서 이후 정치 향방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하나는  남인들이 완전히 몰락케 해  재기할 수 없게 됐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숙원 최씨 소생의 왕자와 서인들이 결합한 것이다.  즉 서인들도  희빈 장씨 소생의 원자에 맞서 지지할 왕자을 갖게 된 것이다.

서인들은 5년 전에 당한 보복을 잊지 않고 있었다.
먼저 서인들에게 강경책을 폈던 우의정 민암과 그 아들 민장도를 사형시키고 훈련대장 이의징과  전 판사 조사기 등  남인 중진들을 대거 사형시켰다.  조사기는  과거 송시열을 공격했다는 죄목으로 사형 당했으니,  그야말로  집권이 정의가 되고 실권이 불의가 되는 시대였다.
갑술환국 후 1년 동안 사형, 유배, 삭탈 관작된 남인 인사는 무려 130여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공격은 왕비 장씨에 대한 공세였다.
먼저 왕비 장씨의 친신궁녀 정숙이 간독하다는 모호한 죄명으로 사형 당했는데, 이는 왕비에게 공격의 화살이 날아올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정권을 서인으로 바꾼 숙종은,  이제  서인庶人으로 강등된 민씨를  복위시키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숙종은  첫 조치로 민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켜 별당으로 물러나게 하였다.
서인들은 민비를 다시 세우려는 숙종의 뜻을 간파하고 왕비 장씨의 오빠 장희재에게 시선을 돌렸다. 왕비 장씨를 직접 공격할 수는 없었으므로 대신 오빠 장희재를 공격하고 나선 것이다. 공격의 명분은 장희재가 포도대장으로 있을 때 사사로이 권력을 남용했다는 것이었다. 장희재는 이 죄목으로 유배되었다가 끝내 국문에 처해지게 되었다. 과거 폐위된 민씨가 복위를 도모하려 한다는 편지를 보내 국모를 모해했다는 죄목이었다. 장희재는 이 죄목으로 사형을 당할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서인들의 입장이 둘로 갈라진다.
영의정 남구만과  일부 서인들은  장희재가 세자의 외숙이므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온건론을 펼친 반면,  대다수의 서인들은 사형시켜야 한다고 나섰다. 이는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는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장희재의 사형을 주장한 노론과 장희재의 처형을 반대한 소론의 차이는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소론은 어쨌든 장씨의 아들인 세자가 다음 왕위에 오를 인물임을 인정했으나 노론은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대신 노론은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을 지지했다. 즉 소론이 남인 온건파라면 노론은 남인 강경파였던 것이다.

왕비 장씨는 끝내 쫓겨나 다시 후궁인 희빈으로 떨어졌다.
여러 의미에서 세자의 운명은 모친 장씨의 운명과 동전의 양면이었다. 서인이 정권을 장악한 이상 남인인 희빈 장씨의 운명은 순탄할 수 없었다. 장희재는 상황을 반전시키려고 부친 장형의 묘갈을 파괴하고 봉분 속에 흉물을 묻는 사건을 조작했다가 들통이 나 다시 사형당할 뻔했으나 소론의 도움으로 겨우 살아남았다. 장씨가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난 2년 후였다.

그런데  쫓겨난 장씨가  별당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인  숙종 27년 8월,  인현왕후 민씨가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민씨는 끝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장희빈과 남인이 복귀를 꿈 꿀 수 있는 단서가 열린 셈이었다. 그러나 남인 강경파인 노론은 이를 방관하지 않았다.  노론은 조정에서  장희재의 구명을 주장했던  소론을 공격하는 한편  연잉군의 어머니 최씨와 결탁해  희빈 장씨를 압박했다.  숙빈 최씨는  민비가 요절한 것은  희빈 장씨가 민비를 무고했기 때문이라고  숙종에게 밀고했고  이에 격분한 숙종은 비망기를 내렸다.
"중전이 병든 지 2년이나 되었으나 희빈 장씨는 한 번도 문병하지 않았다. 또 중전을 중궁전이라 부르지도 않고 반드시 민씨라 칭하였으며 민씨를 요망하다고 하였다. 희빈 장씨는 남몰래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매일 두세 종년과 더불어 중전을 저주했으니, 이를 누가 참을 수 있으랴?  우선 제주에 위리 안치되어 있는 장희재를 빨리 처단하라."

민비의 죽음이 장희재에게는 재기의 시작이 아니라 더 깊은 몰락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틀 후 숙종은 또다시 비망기를 내려 장희빈에게 자진할 것을 명령했다. 소론 영의정 최석정이 명을 환수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결국 장씨는 사약을 받아야 했다.
중인가의 서녀로 태어나 국모의 자리까지 올랐던 한 여인의 운명이 비극으로 마감된 것이다.

장희빈이 사약을 받게 되자 세자는 대신들을 붙잡고 호소했다.
"어머니를 살려주오."
14살 어린 세자의 이 호소에 소론 영의정 최석정은 눈물을 흘리면서 답했다.
"신이 감히 죽기로써 저하의 은혜를 갚지 않으리까."
그러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하면서 피해버렸다.
노론에게 세자는 남인이자 소론 당원일 뿐이었다.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이 사약을 받는 장면, 곁에서 지켜보고 있는 세자(경종). 드라마 장면>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이 당시만 해도 숙종은 세자를 바꿀 생각은 없었다.
숙빈 최씨 소생의 연잉군은 이제 8살이고 명빈 박씨 소생의 연령군은 3살의 어린아이였다.
숙종이  인현왕후 민씨의 빈자리를  노론이 아닌  소론 김주신의 딸로 채운 것은  이런 숙종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노론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노론에게 세자는 정적일 뿐이었다.
2백여 년 전 연산군이 생모의 원수를 갚는다며 일으킨 갑자사화가 남의 일이 아니었다.
노론은 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노론이 연잉군을 지지하는 이상 세자의 운명은 유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재위 43년(1717년) 숙종과 노론 영수 이이명은 독대 자리를 마련했다. 이 해가 정유년이기 때문에 '정유독대'라 불린다. 이 자리에서 숙종은 이이명에게 이런 부탁을 한다.
"연잉군과 연령군을 부탁한다."
세자를 부탁한다는 말은 없었다. 이는 사실상 세자를 바꾸라는 말이었다.
연잉군과 연령군이 성장하자 숙종은 노골적으로 세자를 싫어해 조금만 잘못해도 크게 꾸짖었다.  "누구의 자식인데 그렇지 않겠는가?"

생모를 죽인 아버지의 꾸짖음에 세자는 두려워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야사에는 사약을 받은 장씨가 세자의 하초를 잡아당겨, 세자가 병을 얻게 되었다고 하나, 사실 세자의 병은 14살에 목도한 어머니의 비참한 죽음과 이후 계속된 숙종과 노론의 공격이 초래한 것이었다.

숙종과 이이명은 일단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후 꼬투리를 잡아 쫓아내는 세자 축출 프로그램을 세웠다. 보통, 국왕이 대리청정을 명하면 모든 신하들이 일제히 반대하는 것이 관례이자  국왕에 대한 예의임에도 불구하고,  숙종의 대리청정 명에  노론 대신들이 환영하고 나선 것만 보아도  사전 모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리청정이 세자를 제거하려는 음모의 소산임을 안 소론은 반발했다.
심지어  향리에 은거 중이던  소론 영수  영중추부사 윤지완은  세자 대리청정을 듣자 82세의 노구로 병든 몸을 이끌고 널을 짊어지고 와서 상소를 올렸다.
"동궁께서 총명한 성품을 타고나셨고, 또 효성이 지극하셔서 생모의 변을 당하시고도 인현왕후를 섬기는 데 조그만 기미도 얼굴에 나타낸 적이 없었습니다. 이처럼 덕을 쌓은 지 30년에 온 나라 백성들이  세자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오늘날  세자께 대리청정을 시킨다 하오니 이는 반드시 음흉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사이에 끼여 나라를 망치려는 것인데 전하는 어찌 하여 이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말이 이에 미치니 온몸이 뼛속까지 떨립니다.  독대한 일은 상하가 모두 잘못한 일이옵니다.  전하께서는  어찌 상신相臣을 사사로운 사람으로 삼을 수 있으며,  상신 역시 어찌 감히 임금의 사사로운 신하가 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이런 반발에도 불구하고 당시 집권당은 노론이었기에 결국 숙종 43년 8월부터 세자는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다. 노론은 세자 대리청정을 찬성하면서도 막상 대리청정을 종묘에 고묘하는 것은 반대했다. 종묘에 고묘하면 대리 청정한 세자를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숙종과  노론은  일단 대리청정을 시킨 후  실책을 유도해  '즉위할 자격이 없다.'고 폐출시킬 생각이었으나, 숙종의 건강 악화와 소론의 반발, 그리고 세간의 의혹 때문에 쉽지가 않았다. 만약 숙종이 건강했다면 세자 폐출은 실현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숙종은 병석에 있었고 약방의 입진에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드디어 1720년 장장 46년을 집권한 숙종은 6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환국과 재환국, 폐출과 복위로 점철된 한 시대가 간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어머니 장씨가 비명에 가는 것을 목격한 세자가 즉위했다. 파란의 경종시대의 서막이었다.

왕세제를 책봉하소서.

노론이 쫓아내려던 경종이 즉위했으니 그간 탄압받던 소론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경종이 즉위하자마자 소론계 유학 조중우가 사사당한 희빈 장씨를 숭보崇報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하지만 아직 집권당은 노론이었다. 노론은 당력을 경주해 조중우를 장살해버렸다.
심지어  노론계 태학생 윤지술은  숙종이  희빈 장씨를 사사시킨 사실을  숙종의 행장에 써서 그 옳음을 증거 하자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선왕의 행적에 신사년 처분(희빈 장씨를 사사한 것)이 애매하게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예전 역사에도 드문 옳은 행적이니 행장에 기재하여 만고불변의 조처로 삼아야 합니다."

이렇듯 현왕의 모후를 사사한 것을  "역사에 드문 옳은 행적"이라고 주장하는 신하들이 노론이었다. 그러나 경종은 자신의 생모를 죽인 것이 잘한 일이라며 도전한 태학생 한 명도 처벌할 수 없었다.  김창집 같은  노론 대신들과 삼사에서  "선비들의 사기를 꺾을 것이 아니다"라며  윤지술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국왕의 생모를 숭보하자고 주장한 사람은 장하의 귀신으로 만들고, 잘 죽였다는 주장은 선비의 사기라고 옹호하는 노론에게 둘러싸인 임금이 경종이었다.  이와 같이 경종 즉위 초 권력의 중심은 경종이 아니라 노론이었다.

하지만 노론은 불안했다.
비록  허수아비 같은 임금이지만  살아 있으면  훗날 힘을 발휘할 임금이었다.  장희빈 죽음과 관련이 있는 노론으로서는  경종 존재 자체가 불안했다.  경종을 몰아내지 않는 한  언젠가는 자신들이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노론은,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몇 가지 일정을 세웠다.

그중 첫 번째 일정이 '왕세제'를 책봉하는 것이었다.
왕세제는 임금의 아들이 아닌 동생을 후사로 삼는 것으로, 비상한 상황이 아니면 있을 수 없었다.  이방원이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장악한 후  형인 정종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우고  자신이 왕세제로 있다가 즉위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비정상적인 정치 일정이  경종 축출을 향한 노론의 제 일보였다. 노론 지도부는 당인인 사간원 정언 이정소에게 왕세제 책봉 문제를 공론화하는 역할을 맡겼다.
"전하의 춘추가 한창이신데도 후사가 없어 나라의 형세가 위태롭고 인심이 흩어져 있습니다. 이를 수습하려면 후사를 빨리 정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경종 원년 8월이었다.
왕위를 이을  후사를 빨리 정하라는 상소였으니  말인즉 옳았지만,  문제는  경종에게 아들이 없다는 점이었다. 아들 없는 국왕에게 후사를 정하라는 것은 만약 숙종 때였다면 삼족이 멸족당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정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노론이 당력을 기울여 후사로 미는 의중의 인물,  즉 경종의 이복동생이자  숙빈 최씨 소생인  연잉군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경종의 나이 33,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는 16의 어린 나이였다.
장희빈이 아들을 낳았을 때 "중전의 춘추 한창"이라며 원자 정호에 반대하던 마음이 남아 있었다면  노론은 이런 주청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노론이 이런 주청을 한 이유는 경종과 선의왕후가 양자를 들이려 했기 때문이었다.
후사가 없을 경우 동생이 아니라 양자가 뒤를 잇는 것이 조선의 상속법이었으므로, 선의왕후가 양자를 들이면 노론은 끝장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다급해진 노론은 선의왕후가 양자를 들이기 전에 연잉군을 세제로 만들려고 왕세제 책봉을 주청한 것이다.

이정소가 상소한 바로 그날 밤 노론 소속의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이 입대를 요청했다. 밤늦은 시간의 청대는 국가에 위급한 일이 있을 때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이례적인 일이란 점에서 이정소의 상소와 노론 대신들의 한밤 입대는 잘 짜여진 정치 각본이었다. 드디어 새벽 2시 경종과 대신들이 만나게 되었는데, 이때 참여한 대신들은 앞의 두 정승과 판부사 조태채, 호조판서 민진원, 병조판서 이만성, 형조판서 이의현, 공조판서 이찬명, 판윤 이홍술, 대사헌 홍계적, 대사간 홍적보, 승지 조영복등 노론 일색이었다. 이들이 한밤에 청대한 이유는 소론 우의정 조태구를 배제하기 위해서였다. 명분 없는 일을 강행하려다 보니 소론 정승을 배제한 채 자당끼리만 일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의정 김창집이 경종에게 말했다.
"후사를 정하는 일은 한시도 늦출 수 없으니 빨리 허락해주시옵소서."

아들 없는 임금에게 빨리 후사를 정하라는 희한한 요청이었다.
병권을 쥔 병조판서 이만성까지 가세해 재가를 요정한 이 행위는 사실상의 쿠데타였다.
국본을 정하는 문제는, 일개 정언이 요청하고 그날 밤 대신들이 임금을 윽박질러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들이 그날 밤 우르르 몰려와 재가를 요청한 것은  소론 몰래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이 엄청난 요구에 경종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판부사 조태채가 다시 다그쳤다.
"이는 종사의 대계를 위한 것이니 허락해주십시오."

경종인들 이 주청이 종사의 대계가 아니라 노론의 대계를 위한 것임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노론은 집권당이었다. 경종은 물러섰다.
"그렇게 하라."

드디어 노론은 하루 만에 후사 책봉이란 쿠데타를 성공시켰다.
그러나 노론은 국왕의 윤허만으로 끝낼 수 없었다.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은 이 행위가 자칫 잘못되면 자신들을 죽음으로 몰아갈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대비 인현왕후 김씨를 거론했다.
"이 일은 너무 중요한 일이니 자전의 수결을 받은 뒤에야 봉행할 수 있겠사옵니다.

국왕이 미성년이 아닌 한 대비의 수결은 필요 없었다.
그럼에도 노론이 대비의 수결을 요구한 것은 이 일이 대비와도 사전 합의한 사항이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노론은 대비와 연잉군을 임금으로 추대하기로 밀약하고 이 사실을 연잉군에게도 통보했다. 연잉군에게 그 사실을 통보한 인물은 연잉군의 부인 서씨 조카 서덕수였다. 이때 연잉군은 국왕을 시켜주겠다는 노론의 제의를 거부하지 않았다. 이것은 훗날 두고두고 연잉군의 발목을 잡으면서  경종 독살설과  사도세자의 죽음 등  조선 왕가의 비극의 씨앗이 된다.

경종이  대비의 수결을 받으러  대비전에 들어간 후,  노론 대신들은 합문閤門 밖에서  대비의 윤허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대비는 자신이 미리 노론과 합의했음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끌었다. 그런데 수결이 늦어지자 갑자기 두려운 마음이 든 민진원이 전정에 나가 대비를 만나려고 했다. 한 발만 잘못 디뎌도 역적으로 몰리는 고공 외줄타기였다. 민진원은 조태채의 만류로 조금 더 기다리기로 했으나  그만큼 마음은 다급해졌다.  그때  대비전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다."
김창집과 이건명이 읽었다. 한글교서 한 장과 한문교서 한 장이 있었는데, 한글 교서에는 연잉군이 책봉되어야 하는 이유가 적혀 있었다.
"효종의 혈맥과 선왕(숙종)의 골육은 금상과 연잉군이 있을 뿐이니 어찌 다른 사람이 있겠는가?"

한문 교서에는 "연잉군'이라고 쓰여 있었다.
노론의 의도대로 연잉군이 세제로 책봉된 것이다.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쿠데타였다.
그러나 이런 비상한 쿠데타가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왕세제가 책봉되었음을 안 소론은 물론이고 온 나라가 경악했다. 별 흉흉한 소문이 다 돌았다.
소론 강경파인 사직 유봉휘는 상소를 올려 노론을 규탄했다.
"건저(세자책봉)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시임 정승들이 듣지도 못하고 여러 신하가 참여치 못한 채  깊숙한 집 속에서  한밤중에 결정하였다니 놀랍습니다.  이미 결정되었으니  다시 의논할 수는 없지만 임금을 농락하고 협박한 대신들의 죄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론은 여기에서 밀리면 끝장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임금을 협박한 죄목으로 논죄되면 사형 이외에 다른 형벌이 있을 수 없었다.

노론은 모두 들고일어나 반박했다.
"저군(세자)을 논박하는 일이 어디 있는가?"
노론의 입으로 전락한 삼사의 대사헌 홍계적 등은 오히려 유봉휘를 국문하자고 청하였다.
연잉군은 상소를 올려 자신의 심경을 표현했다.
"유봉휘의 상소에 쓰여 있는 말이 너무 위험해 심장이 떨립니다."

소론 우의정 조태구가 유봉휘를 옹호하자 삼사는 조태구마저 공격했다.
노론은  건저 문제를 논박한 유봉휘를  사형에 처하려 하였다.  이 문제에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역모로 몰릴 개연성이 충분했으므로 강경하게 나간 것이다. 그러나 유봉휘를 사형시키면 노론이 연잉군을 임금으로 삼기위해 임금을 윽박질렀다는 흉흉한 소문이 퍼질 수도 있었다. 연잉군이 다시 상소를 올려 중재에 나섰다.
"유봉휘를 너무 심히 다루면 신의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결국 유봉휘는 사형에서 한 등급 낮은 유배형에 처해졌고, 이로써 왕세제 책봉 파문도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청으로부터 왕세제를 책봉 받는 과정이 문제가 되었다.
부자상속이 아닌 형제상속은 드문 예이기 때문에 구구한 설명이 필요했다. 청의 사신이 왕자가 몇 명인지 묻자, 노론 영의정 김창집은 연잉군의 작호와 그 부인의 성관姓貫을 자세히 써서 보여주었다. 그런데 이를 본 청 사신이 연잉군을 만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소론 우의정 조태구가 상소를 올려 반발했다.
"청국에서 열국의 임금을 보면 그만이지 배신陪臣인 동생까지 보자는 것은 예에 없는 것입니다. 청국에서 행하는 것도 실례요 배신이 이를 받는 것도 혐의스러운 일이옵니다. 예에 없는 것을 왜 써서 보여줍니까?"
김창집의 변명은 궁색했다.
"나는 다만 사신이 연잉군에 대해 써 보여 달라고 간청하기에 그리 했을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왕세제 책봉을 요청하러 청나라에 사신으로 간 이건명은 청의 대신들이 경종의 병에 대해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위입니다."

중국어로 양위 또는 음위는 발기불능을 뜻한다.
이는  남자로서 치욕스러운 일이었고  확인된 사실이 아님에도,  노론은 이처럼  국왕 경종을 모욕하면서까지 연잉군을 추대하려 했다. 어쨌든 노론의 이런 기도는 성공해 연잉군은 세제가 되었다. 그러나 노론은 연잉군이 왕세제를 책봉된 것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경종의 진심

경종을 권좌에서 끌어내려야만 안심할 수 있었던 노론 수뇌부는, 두 번째 일정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정했다. 두 번째는 왕세제 연잉군을 정사에 참여시키는 것, 즉 경종을 사실상 상왕으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노론 수뇌부는  종3품 사헌부 집의 조성복으로 하여금  상소를 올리게 해 왕세제의 정사 참여를 주청했다.
"세자가 정사에 참여해야 하옵니다."

이는  사실상  정사에서 손을 떼라는 요구였으며  동시에  신하가 국왕에게 권력을 나누라고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태종 때 같았으면  당장 국청 뜰에  피비린내가 진동할 주장이었지만,  경종은 화내지 않고 선선히 받아들였다.
"내가 병이 있어 회복의 기미가 없고 만기를 친람하기 어려우니 모든 정무를 세자가 처리토록 하라."

이는 노론이 주장한 세제 참정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이었다.
어쩌면 경종은 이런 일을 예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노론의 임금은 자신이 아니라 연잉군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승지 이기익이 명의 환수를 요청했으나 경종은 거절했다.

이는 사실상의 양위 선언이었다.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다고 생각한 소론은 노론과 정면승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소론 거두 최석정의 아우인 참찬 최석항이 한 밤에 급히 입대를 청했다. 밤중에는 임금의 특명이 아니면 입궐할 수 없었으나, 소론계 포도대장 이삼이 총부에서 숙직하고 있다가 문을 열어주어 입궐할 수 있었다. 최석항은 승지 이기익이 밤이 늦어 입대할 수 없다고 거절했으나 물러나지 않고 청대를 간청하였다.  경종은  최석항의 입대를 승낙하고  문을 자물쇠로 채우라고 명령했다.  경종은  한밤의 이 입대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으며,  또한  노론이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소론 영수 최석항은 엎드려 울면서 명의 환수를 청했다.
최석항의 눈물을 본 경종이 한발 물러났다.
"내 다시 생각해보겠다."

하지만 최석항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지금  명을 거두지 않으면  내일 노론이 다른 수를 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날 중으로  명을 거두어야 한다고 생각한 최석항은 계속 명을 환수해달라고 요청했다. 시간은 흘러 새벽이 되었다. 경종은 드디어 결심했다.
"환수하는 것이 옳겠다."

그러나 노론이라고 가만있지는 않았다.
자체 정보망을 통해 최석항의 입궐 소식을 들은 노론의 이건명과 병참 김재로가 궐하로 달려왔다. 하지만 경종은 이미 명을 환수한 뒤였다. 이건명은 승지 이기익을 힐난했다.
"한 재신宰臣에 지나지 않은 최석항이 한 밤중에 입대하기를 청하였으면 승지가 들이지 말았어야 할 것 아닌가?"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고 노론은 공포에 휩싸였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명을 환수한 지 3일 후 경종이 신, 원임대신과 2품 이상 고위관료,  그리고  삼사 장관을 소집해  다시  세제 대리청정을 명한 것이다. 이 이외의 명령에 소론은 물론 노론도 혼란에 빠졌다. 경종의 진정한 의중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경종은 그대로 왕위에 있다가 목숨이 위험하겠다고 생각해 차라리 왕위를 내놓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의 명은 노론이라 해도 그대로 받을 수 없었다.
결국 노론도 명의 철회를 요청하는 정청庭請에 참여했으나 경종은 명을 철회하지 않았다.
3일 동안 정청하면서  명의 철회를 요청해도  경종이 허락하지 않자,  노론은  대리청정 명이 경종의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김창집 등 노론 수뇌부는 구수회의를 통해 정청을 중지하고 세제 대리청정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김창집, 이건명 등 노론 4 대신은, 숙종 때의 고사에 따라 세제에게 대리 청정케 하라고 요청하는 연명 차자를 올렸다. 숙종 때 경종이 왕세자로서 용인, 용병, 형인을 제외하고  대리 청정한 전례에 따라  세제 연잉군에게도  그렇게 하자는 것이었다.

숙종 때의 대리청정이 세자 경종을 내쫓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번의 대리청정은 국왕 경종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사실상  세제 연잉군과  집권당 노론이 손을 잡고 경종을 권좌에서 내모는 것과 같았다.

소론 최석항은 즉각 이를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태좌 등 다른 소론대신들과 만나 대책을 협의하였다. 또한 당시 대간들의 탄핵을 받은 소론 우의정 조태구도 즉각 입대를 요청했다.
승정원에서는 탄핵 중인 신하는 청대할 수 없다며 면담 주선을 거부했으나, 조태구는 물러서지 않고 승정원과 옥신각신하며 다투었다. 그러던 차에 경종의 전교가 내려왔다.
"우상이 들어왔다 하니 곧 인견케 하라."
관례를 무시하고 조태구를 만나겠다는 말이었다.

노론은 당황했다. 이는 곧 세제 대리청정 명령이 경종의 진심이 아니란 뜻이었기 때문이다.
경종이 조태구를 만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노론 대신들은 서둘러 대궐로 달려갔다. 영의정 김창집, 영부사 이이명, 좌의정 이건명 등이 지름길로 내달려 청대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소론 조태구가 대리청정 명을 철회하라고 요청하고 있는데, 노론 김창집이라고 세제에게 정권을 주라고 청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나는 역적입니다."라고 자인하는 것과 같았다. 결국 대리청정 명은 다시 환수되었다.

이에 분노한 노론은 경종에게 따지기까지 했다.
대간 홍석보는 "오늘 우상이 온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물었다. 이는 사전에 조태구와 교감이 있지 않았느냐는 비난이었다. 승지 홍계적은 한 술 더 떴다.
"승정원의 법이 이렇게 무시되니 더 이상 승정원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들의 주선 없이  마음대로 대신을 만나는 법이 어디 있느냐는  반발이었으니,  이 무렵의 승정원은  임금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속 정당을 위해 존재하는 셈이었다. 양사 대간들의 장계는 이보다 더했다.
"조태구가 내관과 사귀어 임금을 가만히 만나기를 꾀하였으니 이는 중종대왕 때 남곤이 밤중에  북문을 몰래 연 일과 같습니다.  여러 내관 중에  조태구와 내통한 자를 잡아서  심문해야 합니다."

탄핵을 맡은 대간들이  국왕의 권력을 빼앗으려는  대리청정 명에는 분노하지 않고,  오히려  대리청정 명을 환수하라는 요청에 분개하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경종은 이에 대해 변명해야 할 정도로 고립된 임금이었다.
"내가 진수당에 앉아 있는데 합문 밖의 길 인도하는 소리를 듣고 우상이 들어오는 것을 알았다. 내관들은 아무 잘못이 없다."
"이 역적 놈들아" 하고 분개할 일에 오히려 변명을 해야 했으니 국왕이란 이름이 무색한 지경이었다.

세제  대리청정을 둘러싸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이 소동은  소론에게  좋은 공격의 명분이 되었다. 이 소동을 통해 노론이 경종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결정된 사안에 대한 노론의 이의 제기는, 소론으로 하여금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게 하는 구실을 제공했다. 분개한 소론 강경파는 경종 1년(1721년) 거듭된 천재지변으로 구언한 것을 기회로 여겼다. 이들은 이 구언을 이용해 김일경을 소두로 삼고 서종하, 박필몽, 이명의, 이진유, 윤성시, 정해 등 7인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노론을 역적으로 규탄하고 나섰다.
대반격의 시작이었다.
"삼강 중에 군위신강이 으뜸이며 오륜의 첫머리는 군신유의인데 이것들이 오늘날같이 무너진 적이 없었습니다. 주상(경종)의 형세는 날로 어려워지고 흉한 무리는 점점 성하여 군신을 나누는 구분과 의리가 없어졌습니다. 공자는 <춘추>를 지어 임금을 섬기는 의를 엄하게 하고 신하의 분수를 한결같이 지키도록 했습니다.
오늘날 조정 신하가 목숨을 걸고 대리청정의 명을 중지시켜야 했는데 정청으로 책임이나 회피하고 3일 만에 연명 차자를 올려 '유사로 하여금 절목을 정하여 세제 대리청정을 거행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로서 감히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이겠습니까?
조성복이  상소로 시험하고  차자로 끝을 맺었습니다.  엄한 법과 형벌이  어찌 가난하고 천한 자에게만 엄하고 권세 있는 자에게는 시행되지 않는 것입니까?
엎드려 원하건대  세제 참정을 주장한  적신 조성복과  4흉을 모두 법으로 처단하여  용서하지 마소서.  임금을 업신여기고  무엄했던 승정원과  삼사의 죄를 징토하소서."

노론 4 대신들을 4흉으로 지목하는 대담한 상소였다.
이 상소에 노론은 경악했다. 자당의 영수들을 흉이라 지칭하였으니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론은 경종이 이 상소를 내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경종의 비답은 노론의 예상을 완전히 비웃는 것이었다.
"응지應旨하여 진언한 것을 내가 깊이 가납한다."

노론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당의 영수들을 '4흉', '적신'으로 공격한 상소를 가납한다는 것은, 경종이 자신들을 역적으로 여긴다는 뜻이었다. 노론계 승지 신사철, 이교악, 조영복 등이 김일경을 처벌하라고 요청했다.  이 상소에  경종은  "나의 속마음을 떠 본다'며 화를 내고 승지와 삼사 전원을 파직시켰다.

경종은 상소 당일 김일경을 이조참판으로 제수하는, 그로서는 아주 드문 전격적이고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병조판서 이만성, 예조판서 이의현, 호조판서 민진원, 형조판서 홍치중 등 노론 판서들을 대거 경질하고, 소론 최석항을 병조판서, 이광좌를 예조판서, 이조를 형조판서, 김연을 호조판서로 임명했다.

대전환이 시작이었다. 이로써 내내 노론에게 밀리던 소론이 일거에 정권을 장악했다.
이 해가 신축년(1721년)이라 하여 김일경 등의 상소를 ‘신축소’라 하고 이 정권 교체를 ‘신축환국’이라 부른다.

이에 대한 사신의 평을 보자.
"주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과묵하고 방관하는 듯하다가  하룻밤 사이에  결단을 크게 휘둘러 군흉을 물리치고 사류를 올려 쓰니, 천둥이 울리고 바람이 휘몰아치며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비로소 주상이 재덕을 숨기어 감추고 있었음을 알았다."

목호룡의 고변

노론은 경종을 만만하게 보다가 전격적으로 당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신축환국 다음 해인 1722년(임인년), 목호룡이 노론을 역모라고 몰면서 엄청난 파문이 발생했다.  목호룡은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고 고변했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자객을 보내 살해하는 대급수,  궁녀에게 어선에 독약을 넣게 하는 소급수,  숙종의 유조를 위해  경종을 폐출하는 평지수를 쓰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이를 3급수라 하는데 그 중 가장 온건한 방법인 평지수의 예를 들면, 노론이 숙종의 국상 때 상궁 지씨와 환관 장세상을 시켜 "세자(경종)을 폐위시켜 덕양군으로 삼는다."는 내용의 위조된 유조를 내리려 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평지수는 숙종 43년(정유년)숙종과 이이명 사이의 밀약인 '정유독대'의 내용을 실현하려 했던 셈이다.

이 사건에는 이이명의 아들 이기지, 이사명의 아들 이회지, 김창집의 손자 김성행, 김춘택의 종제 김용택, 정발의 손자 정인중 등 노론 4대신들의 자제들이 대부분 관련되었다. 이 사건은 정국에 엄청난 충격과 여파를 가져왔다. 노론에서는 이 사건이 소론의 정치 공작이라고 주장했고 목호룡의 출신 성분을 문제 삼기도 했다.

남인가의 천얼로서 종친 청릉군의 가노였던 목호룡은, 뛰어난 머리로 풍수를 익힌 후 지관으로 이름을 날려 세제 연잉군 사친의 장지를 정해주고, 그 대가로 속신되어, 왕실 소유의 장토를 관리하는 궁치사까지 올라 부를 축적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고변 자체가 목호룡의 완전한 창작품은 아니었다.
노론 일각에서  경종을  임금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사실이었다.  따라서  목호룡의 고변으로 시작된 임인옥사는, 노론일부의 행동이 노론 전체의 행위로 확대된 것이었다.
목호룡이 김용택, 이천기, 이회지 등을 통해 역모를 알았다고 고변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즉 목호룡이 노론이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연잉군 사친의 장지를 정해준 인물이므로 이들이 믿고 발설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역모로 몰린 노론 명문가의 자제들은 자칫 말 한마디에 멸문지화를 당할 수 있음을 알았으므로,  자백을 거부하고  고문 속에서 죽어갔다.  김용택, 이천기, 이기지, 이회지, 백망, 장세상, 홍의인, 홍철인 등  20여 명이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부인하다 죽었다. 이처럼 중요 혐의자 대부분이 장하의 귀신이 되었으나 소론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소론의 목표는 노론 명문가 자제들이 아니라 노론 4대신이었다. 대사간 이사상, 헌납 윤회, 장령 이경열 등 대간 등은  합세하여,  "4흉의 자제들이 역모에 얼키설키 관련되었으니  이들을 처형"하라고 주청하고 나섰다. 노론 4대신은 궁지에 몰렸다.

심지어  노론 4대신 중  이사명의 동생 이이명은  이들에 의해  임금으로 추대되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 깊숙이 관련된 김성행의 조부 김창집은 숙종 때 세자 대리청정을  종묘에 고묘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  역심이란 혐의를 받았고,  그 아들 김제겸은  목호룡을 죽이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또한 이건명은 대리청정 철회를 청한 최석항을 비판했던 일이 죄목으로 지적되었으며, 조태채는 세제 대리청정을 받아들이는 연명 차자에 서명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이 중 이이명이 임금이 되려 했다는 것은 조작의 의혹이 짙지만, 이미 정권은 소론에게 넘어간 상황이었다. 노론 4대신은 끝내 이 공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모두 사형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참형에서 사사로 감형되어 시체에 목이 붙어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 판국이었다.

목호룡의 고변, 즉 임인옥사로 인한 노론의 피해는 극심했다.
사형당한 인물이 20여 명, 국문을 받다 장살된 이가 30여 명, 그 밖에 이들의 가족이거나 관련이 있다는 이유로 교살된 이가 13명, 유배된 이가 114명이었다. 여기에 집안의 몰락을 보다 못해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이었고 연좌된 인물이 173명이었다. 역모로 연좌되면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노비로 삼는데, 그 치욕을 견디지 못한 명문가의 부녀자들이 자진의 길을 택한 것이다.

장희빈 사사에서 임인옥사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들은, 상대당을 소멸시켜야 할 정적으로 보게 할 정도로 노론과 소론 모두에게 뼛속 깊은 원한을 갖게 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노론은 국왕 경종에게, 소론은 세제 연잉군에게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정조 때 노론 윤구종이 경종이 묻힌 의릉 앞을 지나가다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의 의리가 없다"며 말에서 내리기를 거부한 사건은 경종에 대한 노론의 깊은 불신을 말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 임인옥사가 지닌 가장 큰 문제는, 사건 판결문인 <임인옥사>에 세제 연잉군의 이름이 역적의 수괴로 등재되었다는 사실이다. 국문 과정에서 연잉군이 서덕수와 김만기의 손자  김복택을 통해  노론이  자신을 임금으로 선택한 사실을 통보받았다는 내용이  서덕수의 입을 통해 나옴으로써 공초에까지 기록된 것이다. 연잉군이 그 제의를 거부하지 않은 것은 곧 신하가 임금을 선택하는 '택군'을 수락한 것이었다. 이는 사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만약 경종이 보호하지 않았다면 연잉군은 사형 당했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세제 연잉군의 처지는 급박해졌다.
김일경 같은 소론 강경파는 연잉군을 더 이상 세제로 인정하지 않았다. 소론 강경파는 예전에 노론이 그랬던 것처럼 연잉군을 세제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했다. 게다가 정권을 소론이 지니고 있었으니 연잉군의 처지는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연잉군 시절과 훗날 영조 시절의 어진>

적발하여 정법 하라.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양자 영입 움직임에 놀란 노론은 세제 책봉을 성공시켜 이를 저지하고 대리청정까지 나갔으나 왕조국가에서 이는 무리수였다. 그 무리수가 김일경을 중심으로 한 소론 강경파의  극단적 반발을 낳았고,  그 반발은  목호룡의 고변으로까지 이어져  결국 노론 4대신이 사형당하고 말았다.

소론은 임인옥사로 노론을 몰락시켰으나 문제는 살아남은 연잉군이었다.
정권을 잡은  소론 강경파로서는  연잉군을 세제로 놔둘 수 없었다.  훗날 연잉군이 즉위하면 자신들이 죽을 것은 불문가지였다. 더구나 연잉군은 옥사의 공초에 이름이 거론된 인물이었다. 조선의 종친 중 역안에 이름이 거론되고도 살아남은 예는 극히 드물었다. 역모에 관련되면 혐의만으로도 죽게 마련이었으니 연잉군처럼 구체적인 증거가 드러난 경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임인옥안>에 역적의 수괴로 등재된 세제 연잉군의 처지는 아주 궁색해졌다.
소론 강경파는 연잉군을 폐위시키려 했고, 소론 강경파의 권유를 받아들인 선의왕후 어씨는 다시 양자를 들이려 했다. 양자를 들일 경우 연잉군은 보위는커녕 목숨조차 보존할 수 없었다.

선의왕후 어씨가 보기에 연잉군은 얼굴로는 복종하는 척하지만 뱃속으론 배신하는 두 마음을 가진 음흉한 시동생이자 경종을 몰아내려한 역적일 뿐이었다.
김일경은 박상검, 석열, 필정, 문유도 등 세자궁의 궁인들을 시켜 연잉군 제거 작전을 개시했다. 이들은 대궐 곳곳에서 연잉군을 압박했다. 심지어 대궐 안의 여우를 잡는다는 구실로 덫을 놓아 연잉군이 경종을 만나러 가는 길을 차단하기도 했다.

위기감을 느낀 연잉군은 대비 인원왕후 김씨에게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으나 정권이 소론에게 있는 이상  대비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  대비가  경종에게 가서 고하라고 물러서자, 연잉군은 경종에게 자신이 겪은 박해를 설명하며 도움을 청했다. 비록 이복형이긴 했지만 경종은 지상에 단 둘뿐인 숙종의 아들이자 형제였다.

그런데 연잉군의 호소를 들은 경종은 아주 뜻밖의 거조를 보인다.
경종은 박상검 등을 잡아들이라고 명령을 내렸다가 돌아서자마자 이 명령을 거두어 버렸다. 이는 경종의 속마음이 세제 폐위에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연잉군에게 있어 세제 자리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곧 목숨을 잃는 것을 뜻했다. 왕비 어씨가 들인 양자가 즉위하면 한때 세제였던 그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급해진 세제 연잉군이 다시 환관 박상검 등을 처벌할 것을 주청하자 경종은 벌컥 화를 내며 연잉군을 꾸짖었다. <경종실록>에 "갑자기 감히 듣지 못한 하교를 내리셨다."고 기록할 정도로 심한 꾸짖음이었다. 경종은 연잉군을 버린 것이었고 따라서 연잉군의 폐위는 기정사실이었다. 두려움에 휩싸인 연잉군은 마지막 수단으로 세제궁의 궁관 김동필 등을 통해 세제 사부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소론이 노론인 연잉군을 도와줄 리는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소론 온건파가 연잉군의 편을 들고 나섰다. 소론 온건파인 영의정 조태구는 경종에게 박상검 등을 처벌하라고 주청했다.
"옛사람은 환관을 집안의 종에 비유하였으니 박상검 등을 시험삼아 사가私家의 예로 말한다면 지금의 형세는 종의 말을 듣고 형제가 화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면 그 집안이 흥하겠습니까? 망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어찌 집안의 종을 아끼셔서 동궁의 마음을 위로하지 않으십니까?"

역시 소론 온건파인 최석항도 이에 가세했다.
"선왕의 골육은 단지 전하와 동궁만이 계십니다. 이제 세제를 세워 국본이 안정되었는데 한두 환관이 감히 이간하여 동궁을 불안하게 했습니다. 종사가 보존되느냐 망하느냐가 호흡사이에 달려 있으니 빨리 국청을 설치하여 법을 바로잡으소서."

하지만 경종은 이들의 주청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한참 지난 후에야 무슨 말을 했는데 입 속에서만 중얼거렸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 없었다.
조태구가 다시 나섰다.
"잘 듣지 못했으니 옥음을 자세히 듣기를 원합니다."
경종이 조금 크게 말했다.
"적발하여 정법(사형)하라."

연잉군이 던진 승부수가 효과를 발휘해 폐위의 위험에서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론 강경파는  여전히  연잉군을 인정하지 않았고, 기회만 생기면 언제라도 내쫓으려고 시도할 것이었다. 김일경과 소론 강경파는 여전히 강성했다.

이제 연잉군이 믿는 바는 소론 온건파밖에 없었다.
그런데 경종 3년 소론 강경파인 김일경과 온건파인 이광좌, 조태억 사이에 내홍이 발생했다. 대제학 자리를 둘러싼 싸움 때문이었다. 문형이란 별칭으로도 불리는 대제학은 당대 제일의 학자가 맡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문신이라면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당시 후임자 추천의 임무를 맡은 전 대제학 강현이 김일경을 으뜸 후보인 수망首望으로 추천하자 부교리 정수기가 강현을 탄핵하고 나섰고,  이에  김일경이  이사상에게 정수기를 비판하는 편지를 보낸 것이 문제가 되어  이광좌, 조태억과도 사이가 벌어진 것이다. 정수기가 김일경이 자신을 무함한다며 상소를 올리자 김일경도 상소를 올려 대응했다.
"신은 어리석어 자신을 위한 계책은 생각하지 않고 망령되게 임금의 원수는 꼭 토죄하고 나라의 역적은  반드시 죽여  종사를 안정시킬 것을 기약했습니다.  한편  명문가에 죄를 얻을 것을 염려하지 않은 것이 오늘의 화가 생긴 원인이 되었습니다."

김일경은 이렇듯 자신이 공격당하는 원인이 역적을 강하게 토죄한 것과 명문가와 부딪친 것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사직을 청했다. 그러나 경종은 김일경의 사직을 허용하지 않았다. 김일경은 재차 상소를 올려 사직을 청했다.
"삼가 살펴보건대  전하께서는  위에 고립되어 계시고  국세는 아직도 위태로운 지역에 처해 있는데  흉역의 남은 무리들은 아직도 위세가 왕성합니다. 아! 4흉을 주토한 것은 모두 전하의 위단이 아닌 것이 없는데, 나라 안에서는 신이 한 것이라 하여 거실의 미움을 사고  원수처럼 여겨  덫을 만들고 함정을 파  신을 기다린 것을 하나 둘로 세기가 어렵습니다."

노론 4대신을 사형시킨 것은 경종인데 사람들이 자신을 지목한다며 사직을 청한 것이다.
그러나  경종은  이 상소에도 사직을 허락하지 않고,  오히려 두 달 후인 재위 3년6월에  그를 도승지로 삼아 최측근에 두었다. 그리고 이어 유봉휘를 이조판서, 김연을 호조판서, 김일경을 형조판서로 삼고,  김일경과 같이  상소했던 이진유를  대사헌으로 삼음으로써  소론 강경파를 전진 배치했다.

이런 공방이 계속되던 와중인 경종 4년4월, 김씨 성을 가진 궁인이 임금의 어선에 독을 탔다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삼사에서 입대하여  이 사건을 철저히 조사하고자 하였으나  경종은  "원래 그런 일이 없었다"며 조사 자체를 거부했다.

임금의 어선에 독을 탄 사건은 자칫 엄청난 파문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런데 경종이 조사 자체를 거부한 이유는 대비 인원왕후 김씨가 무마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대비 김씨는 숙명공주의 며느리인 이진유의 고모를 불러 이렇게 말한다.
"김성金姓 궁인이 정말 의심스럽다면 주상께서 어찌 윤허하지 않겠는가?
나  역시  분명히 조사해내고 싶지 않으랴만  궁중에  실제 그런 인물이 없기 때문에 찾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목호룡의 고변에서 소급수로 분류된 어선에 독을 넣은 사건은 철저히 조사해 그 진위를 가려내야만 했다.  그러나  대비는  오히려  조사 자체를 중지시키려고 했다. 대비 김씨가 이진유의 고모를 부른 것은 사건조사의 책임을 지고 있던 대사헌 이진유를 움직여 조사를 무마시키려는 의도였다. 이진유는 고모의 설명을 듣고 다시 이 논의를 주장하지 않았으나, 김일경, 신치운, 박필몽 같은  다른 소론 강경파는 사건을 계속 확대하려 하였다.  사건 3개월이 지난 경종 4년 7월에는 삼사에서 재이가 발생하는 것은 김성 궁녀를 사형시키지 않는 탓이라고 주청하기도 했으나 경종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게장, 생감, 그리고 인삼차

경종은  이렇듯 어선에 독을 넣은 사건에 관한 조사 여부로  공방이 계속되는 와중에  병석에 눕게 되었다.  그의 병환에 실제로 독약 등의 외력이 작용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우위정 이광좌는 내의원의 입진으로 계언을 올리면서 다시 김성 궁인에 대한 조사를 주장했다.
"독약을 쓰는 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데 전하를 모해한 사람이 궁중에 있는데도 조사해 법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어찌 이런 신자臣子가 있겠습니까? 그 사람은 계집종에 불과한데 전하께서는 무엇이 어려워 이렇게 해이하고 완만하게 하십니까?"

그러나 이때도 경종은 "그런 일이 없다"고만 대답했다.
물론 이는 대비를 의식한 행동이었다. 이런 공방이 계속되는 와중인 재위 4년 8월 2일 경종의 병이 갑자기 위급해졌다.  한열의 징후가 심해진 것이다.  경종의 병환이 심해지자  왕세제가  전면에 나서 병구완을 총지휘했다.

약방에서 시진탕과 우황육일산, 곤담환등 약제를 올리고, 어의 이공윤이 도인승기탕을 올렸지만 모두 효험이 없었다.
경종은  8월 6일  창경궁 환취정으로 옮겨 몸조리를 했는데,  다음날  설사 기운이 있는 데다 한열까지 겹쳐 약방에서 시호백호탕을 지어 올리고 약방제조가 본원에서 숙직하였다. 그런데도 견종이 한열 때문에 수라를 거의 들지 못하자 우선 시령탕과 육군자탕을 올렸으나 환후가 허하고 피로가 중첩되었다.

이런 와중에 두고두고 문제가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8월 20일 대비전에서 게장과 생감을 보낸 것이다. 어의 이공윤은 물론이고 다른 어의들 모두가  게장과 생감은  의가에서 꺼리는 음식이라며  올리지 말라고 권유했으나,  세제 연잉군은 어의들의 반발을 누르고 이를 진언했다. 경종은 연잉군이 올린 게장 덕택에 입맛을 조금 되찾아 평소보다 많은 수라를 들었다. 그러자 세제는 어의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다시 생감을 권했다.

바로 그날 밤부터 경종의 가슴과 배가 조이는 듯 아파왔다.
어의들은 낮의 게장과 생감이 원인이라며 두시탕과 곽향정기산을 처방했다.
그러나 복통과 설사가 더욱 심해졌고, 약방에서는 황금탕을 지어 올렸으나 설사 증후가 그치지 않아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의원에서는 탕약을 정지하고 인삼과 좁쌀로 끓인 죽을 올렸다.

이런 혼돈 속에서 다음날 또다시 연잉군과 어의들이 경종에 대한 처방을 놓고 심하게 대립한다.  경종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자  세제 연잉군이  "인삼과 부자를 급히 쓰도록 하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이 처방에 어의 이공윤은 강하게 반발했다.
"인삼차를 쓰면 안 됩니다. 제가 처방한 약을 진어하고 다시 삼다를 올리면 능히 기를 돌리지 못할 것입니다"
즉 이공윤은 조금 전 자신이 올린 마황탕과 인삼이 서로 상극이란 이유로 반발한 것이다.
‘능히 기를 돌리지 못할 것’이란 말은 세상을 떠날 것이란 극언으로, 함부로 뱉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세제 연잉군은 도리어 이공윤을 꾸짖고 나섰다.
"사람이란 본래 자기 의견을 세울 곳이 있기는 하지만, 지금이 어느 때라고 자기 의견을 세우려고 인삼을 못 쓰게 하는가?"

세제는 결국 어의의 반대를 무릅쓰고 인삼과 부자를 올렸다.
조금 후 경종의 눈동자가 조금 안정되고 콧등이 다시 따뜻해졌다.
그러자 세제 연잉군이 말했다.
"내가 의약의 이치는 알지 못하나 인삼이 양기를 회복시키는 것은 안다."

그러나 '의약의 이치'를 모르면 전문가의 말을 따라야 했다.
경종의 눈동자가 조금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진 것은 꺼져가는 촛불의 마지막 산화였을 뿐이다. 결국 경종은 그 날을 넘기지 못하고 새벽 3시경 환취정에서 승하하고 말았다.
재위 4년 8개월, 만 36살의 한창 나이였다.

대비가 극구 조사를 막았던  김성 궁인의 독약 사건,  대비전에서 나온 게장과 생감,  그리고 어의와 다투어가며 올린 인삼차,  이 세 가지 사건은 모두 경조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대비와 연잉군이 경종을 살리기 위해 게장과 생감, 인삼차를 올렸는지 아니면 죽이려고 올렸는지는 그들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경종의 병환을 둘러싼 대비와 연잉군의 이런 행적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  당대 제일의 의사였던  이공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올린  게장과 생감,  그리고 자신의 처방과  상극이라고 진단한  의원을 윽박질러가며 올린 인삼차는,  대비와  연잉군의 과거와 관련되어 무수한 뒷말을 낳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노론과 결탁해  경종을 죽이려 한 혐의로  <임인옥안>에 이름이 올라있던 연잉군은,  처방을 가지고 어의와 다툴 처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공윤은 강한 처방을 주로 사용해 명성을 얻은 의사였다. 졸지에 임금을 잃은 소론이 대비와 연잉군을 의심할 것은 분명했다. 특히 소론 강경파는 경종이 독살되었다고 확신했다.

사도세자 비극의 시작

이런 의심 속에서 세제 연잉군이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영조이다.
노론에 의해 세제로 추대된 전력이 있던 그가 소론 임금의 뒤를 이어 즉위한 것이다,
소론 강경파는  영조를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영조 4년  선왕 경종을 독살한 역적들에 대한 복수를 외치며 일어난 이인좌의 난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이런 의혹의 소산이었다. 또한 영조31년 나주 벽서 사건 때 신치운이 국문을 당하면서 "나는 갑신년(경종4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소."라고 말한 것은 경종 독살설이 얼마나 뿌리 깊은 의혹인지를 보여준다. 신치운은 경종이 죽은 갑신년에 숙종의 계비 정순왕후와 세제 영조가 공모해 경종을 죽이지 않았느냐고 직접 따진 것이었다. 영조는 신치운과 그 가족을 이괄의 예에 의거해 처리할 정도로 이 말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신치운이 삼족이 멸문당할 것을 알면서도 영조의 면전에서  사실상  "당신이 선왕을 죽인 것이 아니냐?"고 토해낼 정도로,  남인과 소론에선 경종 독살설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경종 독살설은 나주 벽서 사건에서 끝나지 않고, 나아가 조선왕실 사상 최대의 참변인 사도세자의 비극과도 연결된다. 그야말로 비극이 비극을 낳고 죄가 죄를 낳는 악순환의 고리가 경종 독살설이었다.


출처 : chungmyungsan
글쓴이 : 우곡 김덕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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