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을병씨의 류관청백리 폄훼글 반박 기고문
2009년「월간조선」3월호 554쪽에 기고한 한국의 선비론 “청백리의 허와 실”에 대한 내용 중 세종조의 “청백리 정승 류관”에 대한 일화를 가상적(假想的)인 관점에서 아주 저속한 문구(文句)로 청백리의 본의(本意)를 격하시키고 또한 류관의 공적(명예)을 통틀어 손상시켜 폄훼한 부분을 우리 후손들은 장을병씨의 도도(滔滔)한 인품에 오점(汚點)을 남기지 않나 심히 염려하면서, 선조(先祖)의 사생활 중 유명한 일화에 잠재되어 있는 큰뜻을 재조명(再照明)하여 바르게 알리고자 하여 기고한 글과 기사화된 글의 상이점을 소개합니다.
A. 월간조선에 기고한 글
조선초 청백리 정승 류관(柳寬)의 일화(逸話)에 대한 사실(事實)
1. 조선초기의 청백리 중 정승 류관에 대한 일화를 「월간조선」에 폄훼하여 기고한 장을병씨에게 사과문과 저속한 표현으로 기고하게 된 경위를 해명해 주길 바랬는데 사과문은 커녕 후손들이 제시한 알맹이는 송두리째 삭제해 버린 채 “독자의 편지”란에 간단하게 기고되었음은 심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2. 장을병씨가 쓴 글의 내용은 “조선의 청백리”(지은이 이영춘 외)란 책에 「한국정신문화원 문학박사이며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인 이영춘 박사의 “조선시대의 청백리 정신”이란 발표문을 부끄럽게도 대부분 표절(剽竊)하여 감히 어떻게 「월간조선」지에 기고할 수 있었으며, 본 책에 실려있는 청백리 34인 중 유독 “류관”에 대해서만 폄훼하였는지 궁금할 뿐입니다. 청백리 34인 중 「비 새는 초가집에 산 정승」이란 제목으로 “류관” 선조에 대하여 기술한 이는 「이화여대 문학박사이며 국사편찬위원회 교육연구관」인 고혜령 박사로, 청소년들은 물론 성인들에게까지 교훈이 되는 당시 청백리의 생활상을 현재와 같이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각박한 시기에 생활의 양식처럼 서술하였거늘 「한국정신문화연구원」원장까지 역임한 장을병씨의 세상 보는 그릇이 고작 그 정도였단 말인가? 한심할 뿐입니다.
3. 우리 하정공 후손들은 이젠「월간조선」을 통한 사과문은 도저히 바랄 수 없으니 다른 월간지와 일간지에 기고하여 왜곡 보도된 하정선조의 “청백리 정신”을 소상하게 밝혀야 되겠습니다.
하정공 21세손 금환(譜名: 志瑛) 씀
B. 2009년 월간조선 5월호 598쪽 기사 내용
[독자의 편지] 조선 청백리 정승 柳寬의 逸話에 대한 사실
2009년 月刊朝鮮 3월호에 소개된 한국의 선비론 ‘청백리의 허와 실’을 잘 읽었습니다. 세종 때의 청백리 정승 柳寬(류관)에 대한 일화가 소개됐는데 그 속에 잠재돼 있는 큰 뜻을 제대로 밝히지 않아 ‘문화 류씨 하정공파’의 후손으로서 몇 가지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류관 정승이 활동했던 당시는 조선 개국 초기로서, 왕자의 亂(난)과 고려 遺臣(유신)들의 암약으로 나라의 기틀이 혼란한 때였습니다. 관리들에게 부여된 국가시책은 백성들의 생활향상과 화합으로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것이 제일의 시책이었습니다.
월간조선에 글을 기고한 필자는 정승 ‘류관’에 대해 ‘정치적으로 양지쪽만 찾았다’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녹봉은 어찌하고 두 칸짜리 초가집에서 비를 피할 곳도 없이 궁상을 떨며 살았는가’ ‘자력으로 가난의 해결을 강구할 줄 모르고 공짜를 바라며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 몰염치한 무능력자를 청백리로 선정해서 받들라 했으니 실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류관 정승의 ‘비 새는 지붕’ 이야기는 당시 가난한 백성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현실에 동참하겠다는 큰 뜻이 내재돼 있습니다. ‘울타리 없는 초가삼간’은 지위고하와 신분관계를 구별하지 않고 자신의 집에 언제든지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었습니다. 울타리가 마련된 뒤로는 대문을 활짝 열어 두고 사셨습니다. 여기에는 백성들에 대한 차등을 없애고 화합을 추구하는 깊은 뜻이 들어있습니다.
‘녹봉의 사용처’는 현재와 같이 불우이웃돕기, 제자양성, 각종 봉사 등으로 가족의 생활은 아랑곳없이 사회에 환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백리에 대한 辭讓(사양)’은 諡號(시호)와 동시 卒後(졸후)에 선정되었다고 보면 됩니다.
‘게으름’에 대해서는 일년 내내 비가 새는 것이 아니니 그때 그때의 집수리는 하인들의 몫이었겠지요. 류관 어른은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쳐가며 ‘집수리’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大義(대의)가 있었기에 집수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청백리의 표본이신 류관 정승의 사생활은 일반 백성 수준이었으나 公務(공무)에 임하는 자세는 최상급에 속했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 세종 17년(1435년) 류관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정승 류관은 公私(공사)를 철저히 구분해 나라에 공헌한 바가 크신 진정한 청백리입니다.
<문화 류씨 하정공파 종친회장 및 종원 일동>
※출처 : http://monthly.chosun.com/ →매거진 월간조선 검색→(청백리) 검색
C. 장을병씨가 “정치적으로 양지쪽만 찾았다.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녹봉은 어찌하고 두 칸짜리 초가집에서 비를 피할 곳도 없이 궁상을 떨며 살았는가?. 자력으로 가난의 해결을 강구할 줄 모르고 공짜를 바라며 부끄러워 할 줄도 모르는 몰염치한 무능력자를 청백리로 선정해서 받들라 했으니 실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는 등으로 국사편찬위원회에서도 모범적인 관료의 표상으로 청백리 으뜸으로 선정한 柳寬 선조를 무능력한 관료로 왜곡 묘사하여 전파한데 대하여 월간조선에서 조차 반박글로 기고한 글을 왜곡하여 소개하였기에 장을병씨의 정정 기고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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