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Re:내용 작업(개관과 유래)

ryu하곡 2008. 9. 22. 15:49

개관

   류해(海)가 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를 정벌할 때 사재(私財)를 털어 차(車) 1천 량을 제작, 군량과 함께 보급하여 고려 창업에 공을 세우고 익찬벽상공신(翊贊壁上功臣)에 올랐으며, 태조 왕건은  <이차위달(以車爲達)>의 뜻으로 <차달(車達)>이란 이름을 하사(下賜)했다고 한다.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진 문화 柳씨의 인맥(人脈)으로는 소감(少監) 총(寵:시조의 6세손)의 아들 공권(公權)이 고려 명종(明宗)때 정당문학(正堂文學)과 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지내고 문장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언침(彦 )과 택(澤)으로부터 크게 두 갈래로 갈라져서 문화 柳씨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상장군(上將軍) 언침(彦 )의 후손에는 판관(判官) 안택(安澤:상호군 식의 아들)의 아들 관(寬)이 유명했다.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한 그는 고려조에서 20년간 벼슬하였고, 조선이 개국(開國)된후 1393년(태조 2) 병조의랑(兵曹議郞)으로 출사하여 1429년(세종 9) 81세로 치사(致仕)할 때까지 4대의 왕조를 거치면서 우의정(右議政)에 오를 때까지 동대문 밖에서 울타리도 없는 초가(草家)에 살며 청백(淸白)함으로 역사를 수(繡)놓았다.

  한편 판예부사(判禮部事) 공권(公權)의 둘째 아들 택(澤)의 아들 경(璥)이 충렬왕(忠烈王) 때 찬성사(贊成事)와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거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했으며, 문장이 뛰어나 신종(神宗), 희종(熙宗), 강종(康宗), 고종(高宗)등 4대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문하(門下)에서 안향(安珦), 이혼李混)등 많은 인재를 배출시켰다. 경의 손자 돈(墩)은 충선왕(忠宣王)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시령군(始寧君)에 봉해졌다.

  1415년(태종 16)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던 정현(廷顯)은 문화공(文化公) 진(鎭)의 아들로 세종이 즉위하자 삼군도통사(三軍都統使)로 일본 대마도(對馬島) 정벌에 참전했으며  1426년(세종 8) 다시 좌의정에 이르렸다.

 1. 문화류씨 세덕(世德) ◈

  가. 고려조 사세오공(四世五公)

     ① 염근(廉謹)과 문필(文筆)로 이세의 사표(師表)가된 문간공 공권

     ② 권신을 제거하여 정권을 왕실에 회복시킨 문정공 경(文正公 璥)

     ③ 신의를 찬술하여 예절을 바로잡은 정신공 승(貞愼公 陞)

     ④ 강직한 기개로 정령(政令)을 쇄신한 장경공 돈(章敬公 墩)

     ⑤ 충직한 말로서 국기를 진작시킨 온정공 인기(溫靖公 仁琦)

  나. 조선조 상신

     ① 상신으로는 위하도회군으로 개국의 기틀을 마련했던 좌의정 만수(曼殊)

     ② 태종을 보필하여 국기를 다진 우의정 량(亮)

     ③ 대마도의 왜구를 정벌하고 국정에 지대한공을 새운 영의정 정현(廷顯)

     ④ 국초에 청렴재상으로 백세의 추앙을 받는 우의정 관(寬)

     ⑤ 중종 반정후 인망으로 정승에 재추대된 영의정 순(洵)

     ⑥ 강직한 지절로 을사사하에 수화를 당한 좌의정 관(灌)

     ⑦ 충직으로 을사제현(乙巳諸賢)을 설원시킨 중신 영의정 전 (전)

     ⑧ 청백 재상으로 문필이 구비한 영의정 상운(尙運)

     ⑨ 건저소(建儲疏)로서 경종을 보필한 소론 사대신의 일인인 좌의정 봉휘(鳳輝)

  다. 문형(文衡) : 송암 관(松庵 灌)

  라. 호당

     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순절한 사육신의 일인인 낭간성원(誠源)

     ② 기묘사화에 조정암을 구하려다가 관직을 버리고 의리에 죽은 항재운(恒齋 雲)

     ③ 우복당 전(遇伏堂 전)

     ④ 이조참판 희발(吏曹參判 希發)

     ⑤ 제교 희량(霽嶠 希亮)

  마. 경연초선(經筵抄選) : 학문과 행의로 백세의 사표가된 백석(白石) 집

  바. 청백리

     ① 우의정 관(右議政 寬)

     ② 선산부사 희철(希轍)

     ③ 승지 혼(渾)

     ④ 영의정 상운(尙運)

  사. 절신(節臣)

     ① 낭간 성원

     ② 단종손위에 절의를 지키고 명화 지곡송학도를 남긴 서산 자미

     ③ 기묘사화에 조정암과 함께 피화되어 항리에서 여생을 마친 빙고별제 맹연 항재운. 송암 관

   아. 공신

     ① 태종조 좌명공신인 문성부원군 량

     ② 세조조 정난공신인 문성군 수, 문성군 하 , 문천군 서, 문원군 사

     ③ 성종조 좌리공신인 문양군 지

     ④ 중종조 정국공신인 문성부원군 순, 문원군 응룡과

     ⑤ 평난공신인 시령부원군 전

     ⑥ 호성공신인 문양군 희림

     ⑦ 선무공신인 문흥군 사원

     ⑧ 형난공신인 문평군 공량, 문천군 인길

2. 외사씨(外史氏)의 류씨평(柳氏評) ◈

  가. 초간 문간해(草澗 權文海)가 지은 대동운부군옥(대동운부군옥)에는 동한(동한)명벌 20성(姓)중에 류씨를 9위에 넣고 있으며,

  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 지은 이천부사 류공경소 묘갈명(利川府使 柳公景紹 墓碣名)에는 『 문화류씨는 규조가 성황하여 다른 씨족이 바래지 못하였다.』하였으며,

  다. 익익재 홍봉한(翼翼齋 洪鳳漢)등이 지은 증보문헌비고에는 『 고려 사인(士人)에 족망상고(族望相高)로 류 최 김 이 4성이 귀종(貴種)이라.』하여 고려 4대 명족중에 류씨를 으뜸으로 꼽았으며,

  라.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燃려室記鉥)에서 『 우리나라 족보(族譜) 의 효시(嚆矢)는 가정(嘉靖)년간에 간행된 문화류씨세보』라 하였다.

  마. 명나라의 학사 우신행은 『 동국의 류씨는 진나라의 왕씨(王氏). 사씨(謝氏), 당나라의 최씨(崔氏) .노씨(盧氏)에 내리지 않는다.』 하였다.

 

 

 

유래

  우리나라에서 류씨(柳氏)로서 국사(國史)나 공가문헌(公家文獻)에 처음 등재된 것은 고려사(高麗史)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이다.

  고려사 열전(列傳)의 문간공 류공권(文簡公 柳公權)의 주(註)에 『공의 6세조 차달(車達)은 고려 태조의 개국(開國)을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관직은 대승(大丞)이었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의 황해도 문화현(黃海道 文化縣)의 인물편에 『류차달(柳車達)은 고려 태조가 남방(南方)을 정벌할 때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공급함으로써 그 공으로 대승에 제수함과 아울러 삼한공신으로 사호(賜號)하였다.』고 하였으며, 그 아들 좌윤 효금(左尹 孝金)이 일찍이 구월산을 유람하다가 대호(大虎)를 만나 그 입속에 걸려있던 비녀를 빼줌으로써 그 음덕(蔭德)으로 자손이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고 산신이 현몽했다는 이야기가 실려있고, 또한 좌윤공의 5세손 문간공 공권(文簡公 公權)이하 수대의 사행(事行)이 훌륭히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류씨는 고려 개국 이후 조선을 거쳐 우금 천여년 동안 많은 명경석학(名卿碩學)이 계속 배출되어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 한 명벌(名閥)로써 옛부터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 왔다.

1. 문화(文化)라는 곳

  문화는 황해도 구월산 동남쪽의 평평한 지형에 위치한 지역의 이름이다. 서울에서 480리 떨어져 있다.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 황해남도 신천군과 삼천군에 걸친 일대인데, 그 지역은 단군조선 때 당장경(唐藏京), 고구려 때 궐구현(闕口縣), 고려초에 유주(儒州) 등의 명칭변경이 있다가, 고려 고종 때 문화라는 지명으로 바뀌었고, 이후 행정 단위의 변동은 있었지만 그 이름이 계속 이어지다가 1909년 신천군으로 편입되어 문화면이 되었다. 1952년에는 삼천군이 신설되면서 절반 정도가 삼천군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초에 유주로서 주(州)로 승격된 것이 대승공 때문이라는 견해가 있는데 설득력이 있다. 류경(柳璥)은 고려 고종 45년인 1258년 무신정권을 이어가던 최의를 제거하고 왕권을 왕실에 반환하여 나라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한 분인데, 이듬 해 나라에서는 유주를 그의 고향이라 하여 문화로 바꾸고 현으로 승격시켜 보답을 표시했다.

  구월산은 북한 5대 명산 중 하나이다. 풍광이 수려하며 영산으로 알려져 있다. 아사달산이라고도 부르며 단군이 평양에 도읍했다가 백악(白岳)이란 곳으로 옮겼는데, 그 백악이 바로 구월산 아래라 한다. 단군이 이 산으로 돌아와서 신이 되었다고도 한다. 구월산은 민족의 신성의 대상이 되었다. 문화류씨는 뿌리가 그곳에 있기에 자연스레 구월산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구월산 남쪽 산록에 대승공의 묘소가 있다. 기록에 의하면 류릉(柳陵)으로 불리며 전에는 절이었다가 경사루(敬思樓) 재실(齋室)로 변한 묵방재라는 건물이 묘소의 아래에 있다고 한다.

  묘소의 위치가 해방 전 지명으로는 황해도 초리면(草里面) 흥학동(興鶴洞)인데 2008년 7월 재일교포 종친에게 온 북한 당국의 회신에 의하면 주소의 도로명 표기에 의하여 황해남도 삼천군 달천종달로 동자구 먹대골에 위치하며 현지 주민들은〔범묘〕또는 〔효자묘〕라고 부르고 있는 곳이다.

  대승공은 구월산 아래 동네에 사시다가 구월산에 묻힌 것이다.

  문화(文化)는 황해도(黃海道) 신천(信川)에 속한 지명으로 본래 단군시대(檀君時代)의 당장경(唐藏京:단군의 네 아들이 황해도 구월산밑에 도읍을 정했던 곳)이었다.

 그 후 고구려(성종:제 6대왕, 재위기간:981∼997)때 시령(始寧)이라는 별호(別號)를 내렸다.

 1018년(현종 9) 풍주(豊州)에 예속시켰다가 고종(高宗) 때 문화현(文化縣)으로 승격하여 조선 때도 그대로 계승되었고, 1895년(고종 32) 군(郡)으로 승격하였으나 후에 신천군(信川郡)에 편입, 문화면이 되었다.

2. 문화류씨의 수호 동물

  류차달의 독자(獨子)인 효금(孝金)의 얘기에 호랑이가 등장한다. 1530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얘기가 실려 있다.

 「효금이 구월산에서 재(齋) 올리러 절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는 큰 호랑이를 만났다. 그런데 그 호랑이는 입을 벌리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입속에 흰 물건이 가로로 걸려 있었다. 효금이 그 호랑이를 보고 "네가 나를 해치지 않는다면 네 목에 걸린 것을 뽑아주겠다."고 말하니 호랑이는 머리를 끄떡였다. 그는 옷소매를 걷고 주먹을 호랑이 입에 넣어 뽑아내고 보니 은비녀였다.

  그날 밤 효금의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 말했다. "나는 산신령이다. 어제 성당리(지명)에 가서 한 부인을 잡아먹었더니 목구멍에 물건이 걸려 심히 고통을 당하였는데 그대가 나를 구해주었다. 그 보답으로 그대의 자손이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하리라."」

  한편 다른 전승에는 꿈 부분에서 조금 다르게 전개된다. 곧, 호랑이가 은혜를 갚으려고 꿈속에서 구월산 남쪽에 대대로 자손들이 높은 벼슬을 하는 명당을 점지해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족보인 영락보(1423년 간행)는 현재 서문만 전하는데, 그 시작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은 "문화류씨의 후손이 번창한 것은 좌윤공이 호랑이를 살려준 것에 대한 음덕(陰德 : 효금 이후 대대로 적선(積善)했다는 증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3.  문화류씨 인맥

  류차달의 아들 효금[孝金]으로부터 번성한 후손은 6개의 관으로 분적되는데 류차달의 10세손 자성[資成]이 풍산류씨로 10세손 성간[成澗]이 서산류씨로 10세손 양재[良梓]가 전주류씨로 10세손 인비[仁庇]가 진주류씨로 13세손 해 [해]가 선산류씨로 되었다.

  문화류씨의 인맥으로는 소감 총(寵:시조의 6세손)의 아들 공권(公權)이 고려때 정당문학과 참지정사등을 지내고 문장과 글씨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 언침(彦 )과 택(澤)으로부터 크게 두갈래로 갈라져서 문화류씨의 양대산맥을 이루게 되었다.

  상장군(上將軍) 언침(彦 )의 후손에는 판관(判官) 안택(安澤:상호군 식의 아들)의 아들 관(寬)이 유명했다.

  관(寬)의 아들중 계문(季聞)은 세종때 판한성부사와 형조판서를 거쳐 개성부 유수를 지냈으며, 그의 아들 권은 참판을 지내고, 손자 담년(聃年)은 중종때 병조판서를 거쳐 한성부 판윤에 올랐다.

  부자정승으로 유명한 상운(尙運)은 좌랑 성오의 아들로 대사간과 좌,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으며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그의 아들 봉휘(鳳輝)는 영조때 좌의정에이르렀다.

  한편 판예부사(判禮部事) 공권(公權)의 둘째 아들 택(澤)의 인맥으로는 그의 아들 경(璥)이 충렬왕(忠烈王) 때 찬성사(贊成事)와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를거쳐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했으며, 문장이 뛰어나 신종(神宗), 희종(熙宗), 강종(康宗), 고종(高宗)등 4대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문하(門下)에서 안향(安珦), 이혼(李混)등 많은 인재를 배출시켰다. 경의 손자 돈(墩)은 충선왕(忠宣王)  때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로 시령군(始寧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손자 만수(曼洙)는 위화도 회군 때 공을 세우고 일등공신으로 찬성사에 올랐다.

  사육신(死六臣)으로 유명한 성원(誠源)은 세종때 급제하고 집현전학사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탄로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스스로목숨을 끊었다.

  세마(洗馬) 사공(思恭:만수의 증손)의 아들 순(洵)은 연산군(燕山君) 때 영의정으로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공을  세워 정국이등공신(靖國二等功臣)에 올라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봉해졌다.

4. 문화류씨 족보

  한국 최초의 족보는 1423년(세종 5년)에 편찬된 문화류씨(文化柳氏) 영락보(永樂譜)인데, 아쉽게도 현재 서문만 남아있다. 그 후로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 1477년 성종 7년; 3권, 364 페이지)와 문화류씨 가정보(嘉靖譜, 1562년 명종 17년; 10권 2204 페이지)가 나왔는데 현존한다. 이 두 족보는 내외손(內外孫)을 차별 없이 동격(同格)으로 취급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사위의 경우 성명만 쓰고 본관이나 선조의 기록은 일체 쓰지 않은 반면 그 자손(외손 및 외외손)은 6-7대까지 자세히 적고 있어 핏줄을 중시하고 있다. 가정보의 경우 4만 2천명이 등재되어 있다고 하는데, 양자 기록이 나오고 서자(庶子)의 기록은 없으며, 개가한 여자의 남편을 전부(前夫)와 후부(後夫)로 기록하고 있으며, 기록의 정확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종에서 중종에 이르기까지 75년간 나라에서 89회의 문과(文科) 과거가 실시되어 1595명의 급제자가 배출되었는데 그중 1120명의 이름이 가정보에 올라 있다. 그리고 그들의 거의 대부분인 1071명이 문화류씨와 혼인관계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전체 급제자의 약 70%를 차지하는 놀라운 수치이다.

  가정보 이후 여러 차례의 족보 간행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