惟淸白 유훈시 기로연 기사 추가
2018년 1월 16일 “문화류씨-뿌리깊은버드나무”카페에 올린글 [惟 淸白 유훈시]
https://cafe.daum.net/moonwharyu/2i2D/803 에서 글의 출처, 첨부파일, 원문보기가 안되는 이유는 다음블로그를 티스토리로 개편되어 연결이 안되기에 다시 글을 올립니다.
저는 티스토리로 변환할 때 다운로드 받았기에 당시 원본이 있어 보충하여 다시 올립니다.
https://2642415.tistory.com/7723993
惟淸白 유훈시
※ KBS TV 2018. 1. 15일 23시부터 방영한 “특집다큐 기록의 가치 편액”에서 보백당 편액을 보면서 과거 하정공 유훈시가 생각나서 “惟淸白”을 정리한다.
1. 청백리 보백당 김계행 선생 종택 寶白堂 安東金係行
①경력 : 대사간 청백리
②요약 1431(세종 13)∼1517(중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③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김득우(金得雨)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혁(金革)이고, 아버지는 비안현감 김삼근(金三近)이며, 어머니는 김전(金腆)의 딸이다.
④생애 및 활동사항
1447년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익혔다. 그 뒤 성주·충주의 향학교수를 지냈고 1480년(성종 11)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에 제수되어 직언을 잘하였다.
이어서 고령현감이 되어 선정을 펴고 내직으로 옮겨 홍문관부수찬이 되었으며, 그 뒤 삼사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1498년(연산군 4) 대사간에 올라 권간(權奸)을 극론하였으나 훈구파에 의해 제지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풍산사제(豊山笥堤) 위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보백당(寶白堂)’이라 하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니 보백선생(寶白先生)이라 불리었다. 김종직 등과 교유한 것으로 말미암아 무오사화·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투옥되었으나 다행히 큰 화는 면하였다.
1706년(숙종 32) 지방유생들이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에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 10)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⑤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외 다수
⑥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보백당 시
조선 초기의 문신 보백당(寶白堂) 김계행은 거유(巨儒)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으로 이어지는 조선조 유교사회의 씨앗을 뿌린 인물로 평가된다. 문장과 시에 자신만만했던 하도(下道)의 이모선비가 실력을 겨루고 싶어 상도(上道)의 문향 안동을 찾았다가 실력을 겨루기도 전에 흙투성이 일꾼이 시를 짓는 것을 보고 기가 죽어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는 안동에서 은거하며 청백한 자세를 고고하게 지키면서 일생을 살았다.
그 때 국사(國師)로 있던 장질(長姪:맏조카) 학조대사가 성주를 찾아와 보백당을 만나려 했다. 고을 원은 그 뜻을 알고 [국사께서 거동할 필요는 없다]며 [자신이 보백당을 불러 오겠다]며 사람을 보냈다. 이를 듣고도 가지 않은 보백당은 [公務로 오지 않은 이상 어찌 삼촌이 조카를 보러 가겠느냐]며 학조대사의 종아리를 피가 나도록 때렸다. 당시 학조대사가 보백당에게 출세가 늦으니 자신이 힘써 보겠다고 말하자 [내가 어찌 조카의 천거로 출세를 바라겠느냐. 또한 너의 도움으로 출세를 한다한들 무슨 얼굴로 사람을 대하고 일을 처리하겠느냐]며 물리쳤다.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으니, 보물이 있다면 다만 청백이 있을 뿐... 寶白堂 金係字行字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말씀.
3. 하정공 유훈시
하정공은 62세(1407년) 조카 사눌이 32세 되던 해의 故事
태종(太宗) 7년 丁亥(1407) 4월 사눌(思訥)은 이조정량(吏曹正郞)으로 재직 중 중시(重試)에 급제 즉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특제되었을 때 예문각 대제학 하정공이 조카 사눌과 나눈 시가 유훈(遺訓)으로 전해 오고 있다.
조카 사눌에게 보임(示姪思訥)
차야등전주수순(此夜燈前酒數巡)
여년삼십이청춘(汝年三十二靑春)
오가장물유청백(吾家長物惟淸白)
세세상전무한인(世世相傳無限人)
이 밤 등불 앞에 술을 주고받으니
너의 나이 32세 청춘이로다.
우리 집안에 길이 전할 것은 오직 청백(淸白)이니
대대(代代)로 서로이어 끝없이 사람에게 전하라.
(3, 4행은 하정공의 유훈(遺訓) 시로 자주 사용 함)
4. 일부 후손들이 3행 吾家長物惟淸白을 吾家長物唯淸白로 표기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하정파보 1권 64페이지에 吾家長物惟淸白으로 써 있으며 묘비 뒷면에도 吾家長物惟淸白으로 써 있다. 唯(오직유)는 틀리고 惟(생각할 유)자가 맞다. 옥편에 보면 惟은 오직, 오로지라는 뜻이 있다는데 惟 글자를 생각할 유자로만 해석하여 오류를 범하고 있다. 앞으로는 각종 사이트에 유통되는 것을 吾家長物惟淸白로 정정하여 사용하시기를 부탁한다.
특히 2013년 11월 12일 하정종보에 모 종원이 “惟(생각할 유)자가 틀리고 唯(오직유)자가 맞다” 라고 제시한
①보백당 “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라는 것이 KBS 편액 방송을 보니 “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로 되어 있고
② 박원형 민사평시에 唯淸白도 후세인이 인터넷에 쓴글이기에 실물을 보기전에는 인정할 수 없다.
5. 결론
하정공은 한시 작법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吾家長物惟淸白”한시를 쓰셨는데 일후 후손들이 한시작법에 맞지 않고 “하정집과 하정유집”을 편찬하신 선조들이 唯(오직유)를 惟(생각할 유)로 잘 못 기록했다라고 선조를 모독하기에 하정공 이후에 청백리가 되신 안동김계행선생 한시를 근거로 제시하니 종중 출입한다면서 얄팍한 지식으로 종원을 혼란하게 만들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글을 씁니다.
-----2024년 1월 24일 추가한 자료-------------
閔思平
같은 출처 내 관련문서
閔思平 配位 彦陽郡夫人 金氏墓誌銘幷序
1. 朴元亨 題 病中示子安性
출처 : https://blog.naver.com/jaseodang/100204572561
① 병중에 아들 안성에게 보이다 (病中示子安性)
오늘 술동이 앞에서 술 몇 잔 돌리노니 네 나이 서른여섯 청춘이구나.
우리 집 보물은 오직 청백뿐이니 부디 스스로 자손들에게 전하고 전하기를.
今日樽前酒數巡 汝年三十六靑春 吾家寶物唯淸白 要自傳傳無限人 (東文選 卷22)
그는 세조에 대한 충성과 청렴함으로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이 시는 자신의 이러한 자세를 아들과 자손에게 권하는 것으로 칠언절구, 진(眞)운이다. 그는 지병이 있었던 듯 59살에 죽었는데, 병들어 누운 자리에서 자식을 불러 유언처럼 들려준 것이다. <예종실록>의 졸기에 실린 시는 글자가 조금 다르기는 하나 본지(本旨)는 같다.(至是有疾沈綿 召子安性 令進酒口號云 今夜燈前酒一巡 汝生三十六靑春 吾家舊物惟淸白 好把流傳無限人.) 기구는 아들에게 유언을 하려는 상황이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에게 술을 권하며 유언을 하려는 참이다. 승구는 아들의 나이를 환기시킨 것이다. 서른여섯 살 청춘이니 세상에 대한 입지(立志)가 섰을 때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말을 유념하라는 뜻이다. 전구에서 집안의 전통적 가치를 내세웠다. 다른 보물은 없고 오직 청렴결백이라는 정신적 가치가 집안의 보물이라고 했다. 세조의 집권에 협조하여 공신이 되었으면 권력을 휘둘러 재물을 탐했을 법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결구는 아들에게 하는 당부다. 청렴결백이라는 정신적 가치를 대대로 무한히 자손에게 전하라는 말이다. 재물과 권력은 일시적이지만 청렴결백은 명예롭고 영원한 것이라는 관념이 관료사회에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주 : 東文選은 唯淸白글자로 예종실록에는 惟淸白으로 표기 되었는데 동문선은 서거정(徐居正) 역대 시문을 모아 1478년에 편찬한 시문이고 민사평(閔思平)은 1295년(충렬왕 21)∼1359년(공민왕 8) 사람이고, 박원형은 1411`1469년 세조때 사람으로 한시작법(漢詩作法)은 신숙주 성삼문 김수산 등이 四聲通故와 東國正韻을 만들어 平聲 上聲 去聲 入聲을 과거 시험에도 사용했다는데 이색, 하정공 등 한시작법이 나오기 이전 사람 한시를 이후 기준으로 惟淸白이 아니고 唯淸白이라 함은 하정공에 대한 불효입니다.
② 출처 : https://koahn.tistory.com/3512
③ 후대 한시를 한다는 사람들이 惟淸白→唯淸白으로 변형한 사례가 수 없이 많음.
2. 閔思平 配位 彦陽郡夫人 金氏墓誌銘幷序
① 原文
彥陽郡夫人金氏墓誌銘 幷序
夫人姓金氏。彥陽郡人。高祖諱就礪。大師門下侍郞。諡威烈。曾祖諱佺。大傅門下侍郞。諡翊戴。祖諱賆。都僉議參理。諡文愼。父諱倫。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彥陽府院君。諡貞烈。母卞韓國大夫人崔氏。大儒中書令文憲公諱冲十三世孫副知密直司事諱瑞之女也。年十三。歸閔氏。盡婦職。性嚴。敎子弟必以禮。宗族至今稱之。生一女。適判軍器寺事金昴。新羅王諱傅十八世孫也。金氏子男。曰齊閔。曰齊顏。曰九德。女適密直副使金士安,前開城尹李彰路,前宗簿令崔有慶,前郞將許顥,前典客副令許誼,郞將兼博士李存斯,門下注書金贍。次未適。齊閔改九容。遣其子興威衛錄事明善。以狀徵銘。且曰。吾外祖及菴公性眞率。不立崖岸。日以詩酒自適。不問家人生產。而惟夫人之是聽。夫人議酒食。以娛外祖之心。亦惟日不足也。敎女孫必曰。事夫之禮。自始至老。唯守一敬而已。至於衣食。必精必潔。惟其時可矣。故當時語曰。閔公之放曠。夫人理於內故也。彥陽伯敬直。雖長於夫人。亦憚夫人。不敢少慢。簽書密直希祖與諸弟。皆母事之。歲己亥。及菴公旣歿。喪甫畢。避辛丑紅賊于嶺南。還居驪興。嘗自嘆曰。吾孫齊顏不得其死。吾何顏復入京邑乎。其剛烈有父風云。歲甲寅秋九月十九日。以病卒。年七十三歲也。以其年十二月十五日。葬于郡南鉢山之西。及菴之葬。子嘗以詩相其挽。夫人之墓銘。其可辭。曰。然。銘曰。驪江之西。鉢山之陽。及菴之室。金氏攸藏。威烈之風。振于貞烈。閨門肅然。有文有節。惟爾子孫。惟心之存。無墜婦則。以慰九原。
牧隱文藁卷之十六 / 墓誌銘
② 민사평배위 언양군부인 김씨 묘지명 병서(閔思平配位 彦陽郡夫人 金氏 墓誌銘 幷序)
[생졸년] 1302년(충렬왕 28) ~ 1374년(공민왕 23)
이색 찬(李穡 撰)
부인의 성은 김씨이며, 언양군(彦陽郡)이 본향이다. 고조(高祖)의 휘는 취려(就礪)이니 태사 문하시랑(太師門下侍郞)으로 시호는 위열(威烈)이요, 증조(曾祖)의 이름은 전(佺)이니 태부 문하시랑(太傅門下侍郞)으로 시호는 익대(翊戴)요, 조부의 휘는 변(賆)이니 도첨의 참리(都僉議參理)로서 시호는 문신(文愼)이요,
아버지의 휘는 윤(倫)이니 수성수의 협찬보리공신 벽상삼한삼중대광 언양부원군(輸誠守義協贊輔理功臣壁上三韓三重大匡彦陽府院君)으로 시호는 정렬(貞烈)이요, 어머니는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 최(崔)씨이니, 대유(大儒)인 중서령(中書令) 문헌공(文憲公) 충(沖)의 13세손이요, 부지밀직사사 서(瑞)의 딸이
13세에 민(閔)씨의 집으로 시집와서 며느리의 직분을 다하였으며, 천성이 엄하여 자제를 교도하는 데도 반드시 예로써 하여 친척들이 지금까지도 이를 칭도한다. 딸 하나를 낳아서 판군기시사 김묘(金昴)에게 출가시키니, 김묘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부(傅)의 18세손이다.
김씨의 자녀로 아들은 제민(齊閔)ㆍ제안(齊顔)ㆍ구덕(九德)이 있고, 딸은 밀직부사 김사안(金士安)과, 전 개성윤(開城尹) 이창로(李彰路)와 전 종부령(宗簿令) 최유경(崔有慶), 전 낭장 허호(許顥)와, 전 전객부령 허의(許誼)와, 낭장 겸 박사 이존사(李存斯)와 문하주서 김섬(金贍)에게 출가하고, 다음은 아직 출가하지 않았다.
제민이 이름을 구용(九容)이라 고치고 그 아들 흥위위 녹사(興威衛錄事) 명선(明善)을 보내어 행장에 의하여 명(銘)을 청하고, 또 말하기를, “우리 외조부 급암공(及菴公)은 천성이 순진하고 솔직하여 장벽을 세우지 않고 날로 시와 술로서 스스로 즐겼으며, 집안의 살림살이는 묻지 않고 오직 부인에게만 맡겼는데, 부인께서는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외조부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고서도 오직 날짜를 부족하게 여겼다.
또 외손녀들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말씀하시기를, ‘남편을 섬기는 예는 처음부터 늙을 때까지 오직 공경하는 마음 한 가지만 지킬 것이며, 의복과 음식에 이르러서도 반드시 정결하게 하되, 오직 그때에 맞도록 하면 될 것이다.’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 주위의 사람들이 말하기를, ‘민공이 성정에 맡겨 술 마시고 마음껏 자적하는 것은 그 부인이 안에서 집안일을 잘 다스렸기 때문이다.’ 하였던 것이다. 언양백(彦陽伯) 경직(敬直)이 비록 부인보다 연치가 많았으나 또한 부인을 꺼려하여 감히 조금도 소홀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첨서밀직(簽書密直) 희조(希祖)와 여러 아우들이 모두 어머니와 같이 섬겼다.
기해년에 급암공이 돌아가고 겨우 3년 상을 마치자 신축 년에 홍건적을 피하여 영남으로 갔다가 다시 여흥(驪興)으로 돌아와서 살았는데, 일찍이 스스로 한탄하여 말하기를, ‘내 손자 제안(齊顔)이 옳은 죽음을 얻지 못하였으니 내가 무슨 낯으로 다시 서울로 돌아가겠느냐.’ 하였으니, 그 강렬(剛烈)함이 그 아버지의 풍도에 있었다 한다.
갑인년 9월 19일에 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3세였다. 그 해 12월 15일에 고을 남방에 있는 발산(鉢山) 서쪽 기슭에 장사하였다.” 하였다. 내가 일찍이 급암(及菴)의 장사 때에 시로써 만사(挽詞)를 도운 바 있었으니 부인의 묘명(墓銘)을 어찌 사양하겠는가. 나는 대답하기를, “그렇게 하겠다.” 하였다. 명에 이르기를,
여강의 서쪽 / 驪江之西
발산 양지에 / 鉢山之陽
급암의 부인 / 及菴之室
김씨를 장사하였다 / 金氏攸藏
위열공의 가풍이 / 威烈之風
정렬공에 이르러 더욱 떨쳤으니 / 振于貞烈
규문이 엄숙하여 / 閨門肅然
문채도 있고 절조도 있었다 / 有文有節
오직 너희 자손들은 / 惟爾子孫
그이 마음을 잘 간직하고 / 惟心之存
또 부도를 실추하지 말아서 / 無墜婦則
구천의 여령을 위로하도록 하라 / 以慰九原
하였다.
③ 이색(李穡)이 쓴 글에 오직을 현대인들이 표기하는 오직유(唯)를 안쓰고 생각유(惟)를 쓰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 자손들은 / 惟爾子孫]
세종때 기로연 기사
https://brunch.co.kr/@chiprojectseoul/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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