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여수 반구정(伴鷗亭)

ryu하곡 2022. 6. 7. 13:20

여수 반구정 자료에서 수정보완할 부분이 있어 하정공파보 1권을 참고하여 수정합니다. 여수 신풍리 구암마을에 반구정 유허비가 있다는데 구암마을이 들리는 경우 유허비 사진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다시 수정하겠습니다

 

여수 반구정(伴鷗亭)

여수 반구정(伴鷗亭)은 여수시 율촌면 신풍리 구암마을에 구암사인(龜岩士人) 류태영(柳泰泳,1676숙종2-1760경진)이 구암 동쪽에 정자(亭子)를 짓고 반구정(伴鷗亭)이라하였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유허비(遺墟碑)만 남아 있으며 1899(대한제국 광무3,고종36) 발행된 전남 여수읍지에 伴鷗亭 在前召羅面鷗岩士人柳泰泳自號江湖處士創建今廢(반구정 재전 소라면 구암사인류태영자호강호처서창건금폐)”라는 기록으로 정자의 흔적을 알 수 있습니다.

일사(逸士) 류태영의 자는 도함(道涵) 호는 반구정(伴鷗亭)이며 조선초 청백리 하정 류관의 후손으로 모강 류용공의 아들 청계공 류몽정 6대손으로 高祖 극제(克悌,通德郞) 曾祖 (,贈掌樂院僉正) 철신(哲臣,禦侮將軍龍護衛上將軍贈戶曹叅議) 수원(壽元, 護暎花堂, 贈戶曺叅判)로 할아버지(휘 철신)가 여수시 율촌면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민열(敏烈,譜名寅鳳號晩湖,1847-1909)은 류태영의 6대손(태영재승근효문환하연동찬인봉)으로 사헌부 감찰을 역임하면서 1397(조선태조6) 폐현되어 500년된 여수현 복현운동을 합니다.

18963월 정시홍(鄭時洪) 정충섭(丁忠燮) 류계열(柳啓烈)등과 함께 18명이 복현운동한 결과 1897(고종34) 516일 여수군이 조선국 칙령 제12호로 설군하게 됩니다(18978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변경함)

갈매기와 벗한다는 반구정(伴鷗亭)이 있었던 구암마을은 광양만 해안마을로 간지동마을 앞에 거북바위 영구암(靈龜巖)은 이마을 농부가 상을 당하여 조상의 묘를 쓴자리가 거북이 등이었는데 삼우제를 지내력 성묘를 와보니 묘가 큰바위로 변했다고 합니다.

정원대보름과 단오에 거북바위에서 풍년을 점쳤습니다. 바위밑에 모래가 많이 모이면 풍년 적게 쌓이면 흉년이 든다고 합니다.

 

자료출처 : https://blog.naver.com/nox9109/221903668143

 

1. 오인교님께서 써놓은 글(여수 반구정)에 의하면 1705(숙종31)년 모산마을에서 처가인 여수 율촌면 가장리에 아양 했다는 것은 오류이며 문화류씨하정공파 족보에 의하여 추론해 보면 대승공 22세 정() 선조의 아들 주신(柱臣) 선조는 모산에 거주하고 세신(世臣) 선조는 모산에 살다가 후손인 대승공 31세 인화(寅化) 아들 봉열, 광열, 상열 들이 왕곡으로 이주합니다. 철신(哲臣) 선조가 당시 여천군 율촌면 가장촌(麗川郡栗村面佳長村)으로 이주하고 후손들이 광양, 순천, 돌산으로 이주합니다. 후신(厚臣) 후손들은 거창으로 중신(重臣) 아들이 해남으로 갑니다.

2. 기축옥사는 1589(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으로 청계공(류몽정柳夢井 1529~1590) 옥사를 하셨는데 15년후 아들 柳滸 疏(1604, 선조37년 갑진 111)에 의해 복권됩니다.

모산에서 부자정승이라는 약재 상운(柳尙運) 선조는 1636(인조14)에 출생하였는데 아직 태어 나지 않은 약재공이 영의정이면서 청계공 죄를 변호해 주지 않고 박해를 가하여 청계공 후손들이 모산에 살지 못하고 떠났다고 하는 헛소리를 하는 후손이 있습니다.

약재공 아들 만암공 좌의정 봉휘(柳鳳輝)선조는 1725(영조2)년 유배되고 17277월 관작이 회복되었으나 1755년 나주괘서사건으로 소론명문이 거의 몰락하는 가운데 다시 역율로써 추형(追刑)되되지만,

청계공 손자 정 때까지 모산에 살았고 큰아들 자손은 모산에 계속 살았고 작은 아들이 처가로 갔는데 청계공은 이미 복권되어 역적이 아니지만 만암공은 역적으로 있다가 대한제국 융희2년 복권되었는데 1725년부터 1908년 까지 역적으로 있었지만 모강공 2째아들 집안(판서공)은 역적집안이라 하지 않는데 넷째아들 집안(청계공)은 스스로 역적이라고 하는 오류가 있어 바로 잡씁니다.

3. 하정공이후 증손자 고양공(휘 순행), 고손자 부제학공(휘 희저) 까지 서울(한양)에 살았고 부제학공 아들중에 둘째 모강공(용공,대승공18)과 부제학공동생 영암공(휘 희정) 넷째아들 모헌공(휘 용강)께서 모산으로 낙향하십니다. 위 모강공 아들중에 다섯째 아들 남재공(휘 몽삼)께서 서울로 다시 올라가 살았기에 큰아들 휘 약(+)을 당시 진사 신화국딸을 며느리로 맞이하였고 손자들이 외가인 신립(한성판윤)집에서 공부하고 자라 성인이 되어 신립장군의 사돈인 이이첨(선조 때 대북의 영수)를 비난하여 체포 위기를 피하여 큰손자 (휘 인남)는 모산으로, 둘째손자 (휘 의남)은 정읍(당시 고부)으로 내려 옵니다.(만약 서울에서 내려 오지 않았다면 후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든지 역적이 되든지 했을 것입니다) 柳仁男은 훈련도감 포수(砲手)로 선조39526일 선조 아들 순화군(順和君)의 집 경비에 투입되었는데 73일 근무태만으로 부방(赴防,국경지대 파견)케 하였기에 모산으로 피난 오지 않았다면 인조반정후 선전관으로 복권된 후 부임중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현재 저희들이 서울 부근에 살 것입니다.

4. 모강공 손자중에 청계공 둘째 아들() 벌교로 이주하고 증손자중에 찬성공 아들(휘 성오)이 서울로 올라가고 남재공 아들(휘 인남)은 모산으로 낙향합니다.

5. 모산에 낙향인 선전관(휘 인남, 대승공21)은 큰할아버지 아들(당숙)들 속에서 아랫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으로 추축하는데 선전관 손자(휘 경창,모산동계도유사,통덕량)가 모산의 경작지가 부족하여 먹고 살기 어려워 셋째아들,넷째아들과 다섯째아들의 아들(휘 화세)를 이목동으로 이주시키고, 청계공 후손들은 증손자(휘 정,대승공 22)가 통덕량(휘 경창)의 아들처럼 셋째는 여수로, 넷째는 거창으로 다섯째는 해남의 처가로 보낸 것이지 역적이라 모산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