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대한제국이후 모산마을에 대한 자료 1

ryu하곡 2020. 10. 22. 23:35

2020년 10월 18일 유인학대부님 페북글입니다

유인학

어제 오후 6:11 ·

 

요사이 월-금 58EDGE TV에서 [찬란한 여명]이라는 연속극을 본다. 개화기에선구자 역활을 했던 이동인 유홍기 김홍집 김옥균 서재필 어윤중 유길준등과 대원군 이하응 민비와 민씨들 그리고 고종과 이등박문 하나부사공사 이홍장등이 나온다. 여기에 내고향 영암 신북과 모산리에 얽힌 실화를 소개코저 한다. 1750년 영조에의해 좌의정에 추대된 柳鳳輝 대감이 사후노론에 의해 斧棺斬屍를 당하고 일족은 30연간 패족이되고 남자들 보인데로 참하거나 귀양 갔다. 특히 1755년 나주괘서 사건에 圓校 이광사가 우리 집안 취객이라 모산리에 왠만한 남자는 잡히는 데로 죽엄을당하니, 한무리의 사람이 순천으로 도주하였다. 그들중 금산으로 피신한 후예가 내금위장파(柳珍山 柳漢熱)이고 한가족은 차씨로개명한후 한양으로 도망 갔다. 조선조 말 차봉기라는 분이 일진회 간부로써 일제에 협력않는다는 나주로 파견 되었다. 당시나주는 전남 도청 소재지를 정할때 유림들이 극구 반대 하던때 였다. 차봉기씨는 나주에 왔다 모산리를 보고 가승보에 전해진 조상의 땅이 나주에서 분리되여 영암으로 될때 신북 초대면장을 하였다. 그리고 당시 면사무소가 우리집앞 분부제였다. 유봉기씨는 면장에 부임후 지역 발전에 무척 힘썼다. 집안의 유인구 인흥씨와 더불어 저희 아버님 赫자를 면직원으로 채용 하시고 인곤 인철씨를 와세다대등 일본 유학올 하도룩 격려 하셨다. 인철씨는 일제때 도평의원 인곤씨는 2대국회의원이 되셨다. 제선친 赫자는18세에면서기 하시다가 20세에 명치대연수부에유학 하시도록 독려 하셨다. 봉기씨는 비록 일제하 면장을 하시면서도 이버님이 일제때 세번에 걸처 8년 4개월을 독립운동으로 감옥 가실때도 우리집에 할아버님이 서당 훈장을 하시고 큰 형님이 주조장 하도록 도와 주셨다. 그리하여 일적말에는 대학생과 서울 유학생이 30여명되도룩 발전히는데 봉기씨덕이 컸다 .그러기에 인구 인흥씨가 후임 면장이 되었고 신북은 이웃마을의 劉찬종(동경대)柳종 柳근욱(경성제대)등 많은 인제가 나왔다. 그러나 이제 고향이 과거 230여호에 1500여명을넘던 주민이 이제 겨우 160여호 400여명 그것도 노인들 이다. [찬란한여명] 연속극을 보면서 피땀 흘려서 가꾸어 온 고향 신북과 모산리가 쇄퇴해 가는 모습을 보고 가슴저리는 懷恨을 삼킨다.

77회원님, 류택열, 박소영, 외 74명

댓글 17개

공유 1회

좋아요

 

댓글 달기

 

공유하기

 

​-----------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3392129464241735&id=100003341449712

-----------

2. 아래는 휘 병하(1851-1929)선조는 1891(고종28) 훈몽교관(訓蒙敎官,9)에 임명되시고, 1896(고종33)년 전남도 영암군 군참사(郡叅事)에 임명되셨고 한일합방되면서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 개편하기전까지 그 직을 유지하신 자료와 참고하려고 기록한 것이니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신북에서 장현, 서울에서 재량형님 증언을 들었는데 모산에는 일제 감점기에 이런 증언해 줄 분이 안계시기에 인학대부증언은 휘 병하선조 탐구에 소중한 증언입니다) .

3. 인흥, 인구, 혁 선조를 유봉기(차봉기) 신북면장이 면직원으로 채용하셨다니 종고조 병하선조 이후 일이며 인곤 인철선조가 와세다 대학유학을 한 내용은 숙부가 경기공전(서울공대전신) 유학하기 전 이야기입니다. 남재공후손이 일제말에 5명이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일제초기에는 증언이 없습니다.

4. 인흥선조는 1897년생으로 1948년부터 1952년까지 대한민국 신북면장과 이후 영암군교육감을 하셨고 인구선조(1895년생)는 신북면사무소 뜰에 인권부친 경연 선정비와 함께 비석이 있습니다.​

5. 유봉기님이 초대 신북면장으로 주조장하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은 당시 영암군참사 류병하 선조도 일익을 담당 한 것이기에 월산댁(주조정 사장님)께서 생전에 이동양반(병하 선조 댁호)를 자주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

6. 사교당 후손은 인흥 인구 인철선조이며 참의공 후손은 중추원 경연선조의 아들 인곤선조입니다.

7. 1960년 지방선거로 류형열 신북면장 민선으로 당선되고 류인흥선조님도 민선 영암교육감입니다.

8.인구선조 아버지 성연선조는 능참봉으로 인흥선조 인철선조는 4촌간(종형재)이며 류혁(수택조부)(류종, 류근욱은 영암공후로 류종선조는 석탄공사 감사를 하셨고 대한체육회장 조상호 처남입니다.

9. 차봉기님은 사교당 막네아들 형오선조 후로 입적하여 28세 류봉기(1914년 신북면 1대면장)가 되시고 묘는 서당동이 있으며 증손자(대승공31세)가 유명한 축구선수(보명은 인경)입니다.

10. 교보 신용호 아버지 신예범(愼禮範)은 사교당 3남 창오선조(대승공21세) 후손--22세 상범--23세 봉관--24세 경규--25세 동직--26세 경규--27세 사위 신예범(5남 신용호) 부인이름은 류매순, 신용호는 17세 희정(영암공)--18세 용강(모헌공)--19세 항--20세공인--21세 책--22세 상식--23세 봉구--24세 협신--25세 국환--26세 광태--27세 병규--28세 석영--29세 흥원--30세윤희(화수양반)--31세 종(보명근호, 경성제대졸,대한석탄공사 감사), 사위신용호(대한교육보험회장), 사위 조상호(체육부장관), 사위 김수풍(金樹豊)으로 신용호는 신예범 5남으로 조상호와는 동서간이며 외가집이 모신 처가집이 모산임

(1992년 모강공파보)

11. 하정공파보와 2008년대동보(무자보)에는 신예범이름만 있고 아들 이름은 없음

12. 이글은 "노인하나가 사라자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잔다"는 말처럼 대한제국 이후 남재공후손 자료 수집차원에서 기록해 놓은 것이오니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80세 이상 어른분의 증언을 듣고 족보를 확인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