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대동사 1946년부터 유림향사를 지냈다는 근거에 대한 자료분석

ryu하곡 2018. 4. 9. 09:05

대동사 1946년부터 유림향사를 지냈다는 근거에 대한 자료
1. 충경공파 16세 사정공 후손 세계도의 글
출처 : http://blog.daum.net/ryujeaju





2. 중문지후사공파 류한상님 1997년글
※ 류한상님 글을 보면 1997년 전후 차류종친회이후에 유림행사로 봅니다.







3. 류근창 차행렬님글




4. 성균관유도회 광주광역시 본부 연혁
1) 1945년 8월 광복 이후 10월에 전국유림 2,500여명이 성균관 명륜당에서 유도회 창립총회를 열어 유도회 총본부가 탄생되어 초대위원장에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옹을 선출하고
2) 유도회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부자(孔夫子)의 도덕사상(道德思想)을 근간 (根幹)으로 국민의 윤리도의정신을 함양하고 수제치평대도(修濟治平大道)를 천하에 선포하여 이를 실천하는데 목적을 두고 전국 500만 유림의 총의에 의하여 설립한 유자(儒者)의 총림 (叢林)이며 성균관과 지방향교(地方鄕校) 및 성균관대학교(成均館大學校)의 발전(發展)에 관한사업과 교육ㆍ교화ㆍ학술 등의 사업을 경영하였다.
3) 그 후 교육법(敎育法)에 의하여 재단법인 성균관을 설립하여 종전의 명륜전문학교를 성균관 대학으로 승격시키고 1951년 부산에서 전국유림대표자대회를 열어 전국유림 재산을 각 도별로 기부하여 본 재단을 보강하고 성균관대학을 성균관대학교로 승격하여 유학(儒學)을 교시(校是) 로 오늘에 이르렀으며, 또한 유도회 중앙위원(총회 선출)이 선출한 평의원(評議員)과 각 도에서 선정한 평의원들이 모여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를 선출하도록 하였다.
4) 1963년 교육법에 의하여 재단법인 성균관과 학교법인(學校法人) 성균관대학교가 분리되었으며 1960년대 이후 유림분규가 발생되었으나 1964년 전국유림대표자 대회에서 500만 유림의 총단결로 과거의 분규를 종식시키는 동시에 유도회를 재건하자는 결의에 따라 유도회수습위원회(儒道會收拾委員會) 가 발족 되었다.
5) 1970년 전국유림대회에서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에 이가원(李家原) 박사를 선출함으로써 과거의 분규는 종식되고 유도회업무가 정상화되었다.
6) 광주유림(光州儒林) 등은 1958년 9월에 유림총회를 개최하여 초대 광주유도회장으로 기남종(奇南鍾) 을 선정하여 유도발전에 기여하였다.
5. 결론
 류춘락님 글에 의하면 1946년 호남유림과 후손이 참여하여 향사를 지냈고(유림이 개인적으로 참여하였으나 향사 주관은 아님) 광주유림이 1958년 창립되었는데 대동사 향사를 1946년부터 76년간 유림에서 향사를 지냈다는 근거가 없다.
해방후 1945년 10월 서울에서 유림창립 총회가 열렸고 1951년 부산에서 유림 재산을 각 도에 땅과 건물을 기부했다는데 1951년은 6,25전쟁으로 광주는 인공국가 지배를 받고 있었고 전쟁중에 유림이 없어 유림 향사를 지낼 수 없으며 광주는 1958년 유림이 창립되었기에 만약 유림 향사를 지냈다면 1959년부터 일 것이다.
1946년부터 대동사 향사에 유림이 참여 하였다는 기록은 개인적인 유학자들이 참여했다는 것이며, 향교나 성균관 유림이 참여 했다고 볼 수 없고 차류종친회 이후 유림향사를 했다고 본다.(1946년이후 향사 제관분정기를 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음)

1946년 문화류씨시조 사우 대동사 건립

1964년 대동사에서 차류종친회 창립


1974년 문화류씨 대종회 창립

1991년 종보 유주춘추창간

1997년 대동사 강당건립에 차문에서 성금냄

2007528일 차류대종회 해체됨

200882일 차문의 지분을 정산하고 대승장학회재창립

2016319일 광주 대동사에서 류문주관으로 대승공 향사를 모심.

2018331일 대동사에서 차문이 불참하고 류문주관 유림향사 지냄

1 : 차문과 천년역사라고 하는 일부 종원이 있는데 1689년 기사보에 원파록이 소개되었기에 이때부터 계산해도 약 320년 되었고 10년전 해어졌기에 310년되었고, 1964년 차류종친회 결성으로 54년전부터 43년간 차문과 종사를 함께 해오다 2007년 차류대종회가 해체되었습니다.

2 : 족보를 보면 문헌록과 자손록으로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2008년 무자보까지 자손록에 류차달 시조(이하존칭생략함)의 아들은 류효금 한분입니다. 1803년 정사보 이후에 문헌록에 일명 해, 자 응통 호 아사(一諱 海 字 應通, 號 鵝沙) 표기했고 1926년 병인보에 류차달 부인을 신라김알지 후손 균 딸이라고 차문 기록을 표기하고 차원부설원기의 차효전이 큰아들아라는 내용을 표기합니다.

3 : 충경공파 충경공파 16세 사정공 후손 블로그와 류한상님글에 의하면 1997년 유림향사를 시작하여 21년간인데 대동사 창건후 1946년부터 72년 유림봉사라고 주장하는 일부 종원이 있습니다.

4 : 저의 생각은 대승공 사후 구월산 묘하에서 자손봉사하였고 해방후에는 대동사에서 자손들이 향교나 성균관 소속이 아닌 유림을 모셔다가 호남유림 향사를 지냈고 1997년부터 유림봉사를 재차 결의했다고 봅니다.

※5 : 대동사에서 차류종친회가 창립된 10년후 문화류씨대종회가 창립되었고 1990년에 종보가 발행되는데 조직정비가 부족한 생태에서 문화류씨 주관 유림봉사했다는 것은 의문가는 부분으로 종중차원이 아닌 유림인 종원이 각자 개별 참사한 듯합니다.   

호남 사학계의 학술토론지와 논문 다수에 있는 왕건과 오다련과 대승공 등 해상호족 관련과 대동사 내용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로운 내용이고 서울 사학계에서 알 수 없는 내용입니다. 제가 수년간 자료를 조사해서 블로그와 카페에 올리고 널리 알리라고 스크랩, 복사하도록 허용했지만 자기글처럼 사용하려면 출처나 인용처를 밝히는 것이 글 쓰는 기본입니다. 저의 글을 퍼 나르고 편집하는 것은 좋으나 출처를 밝혀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