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하정공후 만호선생 조선말 활동과 만암 농암 복권

ryu하곡 2017. 5. 16. 21:47

영암 신북 모산의 하정공후손 류민열과 만암 농암 복권 내용

여수독립운동과 류민열(柳敏烈)선조(선조존칭 생략)

출처 : http://cafe.daum.net/treen2445/Gbpk/10?q=%BF%A9%BC%F6%B5%B6%B8%B3%BF%EE%B5%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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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에서 류민열선조 부분만 발췌함

 

1. 삼복삼파 이후 여수 복현운동

1) 복현 운동 지사 유금(流禁)

여수현 삼복삼파 이후 1864년 운초 선생의 여수현 복현 상소가 복현 운동의 효시가 다시 되어 1887(고종24)에 맹렬한 복현 운동이 벌어졌다.

이때에도 순천부의 거센 방해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복현운동에 주동자인 최창모(崔昌模), 정동열(鄭東烈), 유봉의(兪鳳儀) 등 세 지사(志士)만 화를 입고 유금(流禁)되고 말았다.

2) 18인 동맹(同盟) 여수 복현 운동

18962월에 완도나 돌산과 같은 섬마저 군이 되었으나 유독 여수만은 그렇게 열심히 복현운동을 하였으나 결국 여수군 설군문제가 실패하여 여수는 여전히 순천부 관하에 묶어두자 형편에 맞지 않은 조정의 처사에 분개하여 1896318명이 동맹하여 이 고장의 비원을 풀기 위해 분연히 일어섰다.

이들은 만약 뜻을 이루지 못하면 고기밥이 되리라(事不若成 藏於魚腹)하는 비장한 각오로 복현 운동에 나섰다. 18인 동맹자는 정시홍(鄭時洪), 류하열(柳河裂), 정충섭(丁忠燮), 류민열(柳敏烈), 주봉성(朱鳳成), 황안성(黃安性), 김병두(金秉斗), 정지섭(丁芝燮), 류계열(柳啓烈), 정시현(鄭時鉉), 황운수(黃雲秀), 김재호(金在浩), 최현호(崔炫浩), 황의연(黃義淵), 정관영(鄭寬榮), 정관섭(丁寬燮), 주재석(朱載錫), 정시행(鄭時幸) 등이다.

이들 맹원(盟員)들은 서울로 올라가 관계 요로와 손을 잡고 맹렬하게 복현운동을 벌이는 한편 일부는 지방에 남아 진정서를 작성하여 각계에 보내고 지방여론을 환기시켰다. 이때 마침 초대 돌산 군수로 임명된 조동훈(趙東勳) 군수가 도임차 여수 종포에 도착하였는데 맹원들과 지방유지들이 합세하여 조 군수에게 성찬을 베풀어 접대하면서 이곳 여수는 보시다시피 동학란으로 시가지는 온통 불타버렸고 주민들은 생활의 터전을 잃고 허탈에 빠져 있는데다가 작년(1895)에 설상가상으로 전라좌수영마저 폐쇄돼 이곳 여수 백성들은 마치 부모잃은 자식처럼 의지할 관부가 없고 백리에 가까운 순천에 속해있으니 차라리 이 고장도 돌산군에 편입시켜 조 군수께서는 여수에 앉아 돌산까지 다스려 달라고 애원했다는 것이다.

조 군수는 여수 백성들의 처절한 호소를 차마 인정상 뿌리칠 수 없어 이곳도 다 같은 이 나라 땅이거늘 내 어찌 경계만 논할 수 있겠는가하고 이러한 애절하고 절박한 사실을 전라감사와 조정에 보고하여 여수 4(율촌, 소라, 삼일, 여수)도 돌산군에 편입시켜 줄 것을 건의하는 한편 여수에 주저앉아 백성들을 돌보고 진남관의 허물어진 부분을 손질하는 등 돌산군수보다는 오히려 여수 군수 노릇에 충실하다가 다음해 3월에 친상을 당해 조 군수가 떠나고 말았다.

3) 윤웅열(尹雄烈) 관찰사 여수복군 조정 건의

1896(건양 원년) 84일 칙령 제36호로 13도 제도가 시행됨에 따라 전라남북도가분리되어 초대 관찰사에 윤웅열이 임명되어 여수 백성들의 분군운동을 살피기 위해 여수에 도착하고 보니 갑오년 동학때 시가지는 불태워져 버리고 좌수영마저 철폐돼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이 모두 이곳을 떠나려 한다는 사정을 파악한 후 여수 백성들이 순천에서 분읍하려는 것이 마땅하다고 인정하여 여수복군을 조정에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4) 1차 설군 여론조사

이때 조정에서는 지방주민의 설군운동이 너무나 맹렬할 뿐만 아니라 군수쟁탈전까지 벌어졌으며 관찰사의 건의까지 있었으니 그대로 내버릴 수 없었던지 지리적으로 순천에 편재하지 않은 임홍준 옥과(玉果) 군수를 여수 백성들의 여론조사관으로 임명하여 여수로 내려보냈다.

임홍준(任洪準)은 먼저 여수와 순천과의 거리를 가늠해 보고 여수의 지형지세를 살펴본 다음 지방민의 숨은 뜻을 알아보기 위하여 여수(麗水), 소라포(召羅浦), 삼일포(三日浦), 율촌면(栗村面) 4개 면민을 덕양역으로 모이게 하여 순천군과 여수군의 이름을 크게 쓴 푯말을 각기 따로 세워 놓고 모인 사람들로 하여금 여수군이 새로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여수군 푯말 밑으로 가고 순천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순천 푯말 밑으로 가서 서라고 일렀다. 그러자 거기 모인 전원이 순식간에 여수푯말 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여기서 여수의 참된 민의를 파악한 임홍준은 사실대로 조정에 보고하여 여수 복군을 건의하였다.(참고 임인지(壬寅誌) 24, 25) 복군이 된 뒤 지방민은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그의 기지에 찬 조사활동을 칭송하였다.

2. 삼복삼파(三復三破)=

여수현(여수시)이 순천사람들의 방해 책동으로 세 번 폐현되었다가 네 번째 복현(여수라는 지명을 찾음)을 완성시켰다는 뜻입니다.

1392년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500년 마지막 자존을 지켜내서 1397년에 이성계 역성혁명 정부에 5년을 저항했다고 밉다고 여수라는 지명과 함께 폐현시켜서 순천부에 종노릇하게 붙여버려 그 지명을 되찾으려고 500년을 발버둥쳐서 충절 충민의 우리 조상의 피맺힌 '여수시 독립운동'이다.

그래서 1897년에 완전한 복현을 이루어서 가장 먼저 조상들이 기념하여 지은 건물이 1897년에 지은 군자동 여수향교다.

역사가 고유하고 여수민족의 자존이 서려 있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3. 류민열(보명 인봉寅鳳, 호 만호晩湖, 사헌부감찰, 대승공31, 하정공후, 1847-1909

行郡守趙公東勳永世不忘碑(행군수조공동훈영세불망비)

소재지 : 전남 여수시 군자동 472(진남관 내, 동문로 11)

여수시 군자동 여수 진남관 입구 비각 안에 있는 조선 말기 돌산군수 조동훈의 영세불망비이다.

여수가 한창 복군(復郡)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초대 돌산군수로 임명된 조동훈이 종포에 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방 유지들은 조동훈에게 돌산을 돌산군에 편입시켜 여수에서부터 돌산까지 다스려 달라고 청원하였다.

이에 조동훈은 조정에 여수 네 개 면()을 돌산군에 편입시켜 줄 것을 건의하는 한편, 주민들을 위로하고 청사 등 허물어진 건물을 손질하는 등 돌산군수보다 오히려 여수군수 노릇에 충실하였다. 그러다가 다음해 3월에 친상(親喪)을 당해 떠나자 주민들이 그의 수레를 둘러싸고 눈물을 흘리며 아쉬워하였고, 비를 세워 그의 덕을 기렸다.

장방형의 돌로 만든 비좌 위에 세워진 철비로 높이는 130이고, 너비는 32, 두께 3cm 이다.

비의 전면에 行郡守趙公東勳永世不忘碑 新郡几務 爰啓聖廟 民曰龔黃 於古有光(행군수조동훈영세불망비 신군궤무 원계성묘 민왈공황 어고유광) 그리고, 뒷면에 戊戌三月日 監董前監察柳敏烈 有司鄭時洪(무술삼월일 감동전감찰류민열 유사정시홍)이라 새겨져 있다.

건립연대는 1898(고종 광무 2)이며, 비갓의 모양은 거북이 윤곽에 기왓골무늬이다.

비문의 각법은 사각형 홈 내부에 양각으로 되어 있다.

여수 진남관 비각 안에 있는 다른 철제 비석에 비하여 상태가 제일 양호하며 비문도 전부 판독이 가능하다.

초대 돌산군수로서 여수군의 설군(設郡)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조동훈과 당시 여수 지역민들의 정서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다.

4. 류봉휘 류수원 복권

순종실록 2, 순종 1430일 양력 3번째기사 1908년 대한 융희(隆熙) 2

죽은 좌의정 한효순 외 77명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에 관하여 보고하다

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이 아뢰기를,

"삼가 지난해 1118일의 조칙(詔勅)을 받들고 죄적(罪籍)에 이름이 올라있는 사람들의 죄명(罪名)을 탕척(蕩滌)하는 사안에 대해 여러 번 주하(奏下)를 거쳤습니다. 그 가운데서 관작이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응당 벼슬을 회복시켜 주는 은전(恩典)을 베풀어야 하는데 사안이 오래되다 보니 한꺼번에 모조리 조사할 수 없습니다. 우선 고 좌의정(故左議政) 한효순(韓孝純) 77()의 관작을 회복시킬 데 대해서만 상의를 거친 뒤에 개록(開錄)하여 좌의정(左議政) 서흥 부원군(西興府院君) 한효순(韓孝純), 영의정(領議政) 정인홍(鄭仁弘),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이조 판서(吏曹判書) 문경공(文敬公) 이현일(李玄逸),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이광좌(李光佐),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조태구(趙泰耉),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조태억(趙泰億),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최석항(崔錫恒), 좌의정 충정공(忠靖公) 류봉휘(柳鳳輝),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중기(金重器), 회인 현감(懷仁縣監) 김도응(金道應), 예조 참판(禮曹參判) 정후겸(鄭厚謙),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하재(金夏材), 좌승지(左承旨) 안기영(安驥泳), 우부승지(右副承旨) 권정호(權鼎鎬), 부호군(副護軍) 조중호(趙中鎬), 선천 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이희화(李喜和),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의징(李義徵), 대사헌(大司憲) 한세량(韓世良), 승지(承旨) 신치운(申致雲), 절도사(節度使) 이징옥(李澄玉), 사옹원 판관(司饔院判官) 원용성(元用星), 감역(監役) 허욱(許煜), 군부 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 이조 참판 이진유(李眞儒), 승지 정해(鄭楷), 예조 참의(禮曹參議) 서종하(徐宗廈), 이조 참의(吏曹參議) 윤성시(尹聖時), 대사헌 박필몽(朴弼夢), 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 형조 판서 이사상(李師尙), 이조 참의 윤연(), 훈련대장(訓練大將) 윤취상(尹就商), 부제학(副提學) 이명언(李明彦), 보덕(輔德) 김중희(金重熙),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益寬), 교리(校理) 윤상백(尹尙白), 지평(持平) 윤지(尹志), 목사(牧使) 이하징(李夏徵), 동부승지(同副承旨) 류수원(柳壽垣), 대사헌 심악(), 판윤(判尹) 박찬신(朴讚新), 포도 대장(捕盜大將) 조동정(趙東鼎),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 정언(正言) 이명조(李明祚), 경무사(警務使) 권형진(權瀅鎭), 이조 판서 윤휴(尹鑴),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지평 이동양(李東讓), 정언(正言) 이범제(李範濟), 현감(縣監) 이공윤(李公胤), 승지 이중술(李重述), 진사(進士) 이하택(李夏宅), 승지 이보욱(李普昱), 승지 김호(金浩), 현감 박필현(朴弼顯), 병사(兵使) 박태신(朴泰新), 감역(監役) 정권(鄭權), 부수(副率) 조현빈(趙顯彬), 부사(府使) 심유현(沈維賢), 감사(監司) 권첨(權詹),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사로(李師魯), 밀풍군(密豊君) 이원(李垣), 승지 이재화(李在華), 정언 이우화(李宇和), 주서(注書) 권숭(權崇), 이조 참판 김정관(金正觀), 동부승지 김정리(金正履), 감사 정사효(鄭思孝), 정언 권집(權䌖), 부사(府使) 김주태(金柱泰), 통제사(統制使) 김윤(金潤), 좌부승지(左副承旨) 채동술(蔡東述), 좌의정 박홍구(朴弘耉), 승지 박홍도(朴弘道)이다.상주(上奏)합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하였다.

1 : 좌의정 충정공 류봉휘(호 만암) : 할아버지는 형조정랑 류성오이며, 아버지는 영의정 류상운으로 대승공23, 하정공후

2 : 동부승지 류수원(호 농암) : 형조정랑 류성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간 류상재이다. 아버지는 류봉정이며 우서의 저술한 실학자로 이용후생학파(利用厚生學派)의 선구자가 되었고, 또 상공업 중심의 부국안민론(富國安民論)을 주창한 대표적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