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류씨

[스크랩] Re: 뎃글에 대한 답글(하정공 장인 자료)

ryu하곡 2016. 9. 8. 14:41

몇 년전에 답변을 드렸는데 제가 아는 것이 부족하여 제가 아는 범위에서 답변드립니다.

1. 제가 광주안씨 족보를 볼 수 없어 다른 자료인 1772년 안정복이 지은 안기(1324-1408)님 묘갈에 의하면 안유안지안수안해안기로 되어 있고 문화류씨 무자보(2008년발행)에 류관의 배 광릉군부인 안씨로 안유(안수)(安綏)5대손, 증조 안수(安壽), 조부 안해(安海), 부 안기(安器)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광주안씨의 안유, 안수 안해 안기 선조님의 휘()가 일치합니다. 그러나 광주안씨족보에 의하면 안기선조는 아들이 3명이고 딸이 없다는데 문제점인 듯합니다.

다섯분 선조 이름이 일치한 것과 안기선조에게 딸이 없다는 것 중에 어느 부분에 비중을 두어야 할지 모르겠으나 저의 짧은 생각(어디까지나 추축임)은 기선조 세분 아들중에 국주 선조는 초배 청송심씨 소생이고. 성 선조는 중배 밀양박씨 소생이고, 몽득선조는 후배 강양이씨 소생이 맞다면(안씨족보를 볼 수 없어서) 부인 3분중에 딸이 있는데 족보에 등재 하지 않을 가능성은 없는지요?

안기선조나 류관선조가 살았던 당시는 초배 후배의 차별이 없었고 서손차별이 없었으나 족보를 보면 아들 이름이 먼저 니오고 딸(사위)이 나옵니다.

족보에서 막내 아들의 자손(손자)의 숫자가 적으면 한페이지에 딸이 나오는데 손자 손녀 수가 많으면 다음페이지에 딸(사위)들이 나옵니다. 족보를 만들 때 필사로 옮겨 쓰는 과정에서 누락은 없는지요?

저의 족보를 보면 필사과정에서 오자(誤字)로 획하나 잘 못 쓴 것 같은데 그것을 가지고 후손들이 싸우는 경우가 있어 혹시나 해서 말씀드립니다.

2. 안성(1344-1421)선조와 류관(1346-1433) 이 동시대 살았다는 것은 년도로 보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의 족보에 류관 선조가 외종 사촌들과 교류한 흔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제가 시간이 허락하면 안성 류관 선조의 과거 급제년도, 류관선조처럼 안성 선조도 성균관에서 공부 했는가?와 두분의 관직년도를 비교해 보면 두분의 행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3. 조선초 시대를 보면 하정공은 불교 배척 상소를 올렸지만 장인 안기 선조는 보물 1081호 묘법연화경을 발행하였고 3남 계문(안숙공) 선조는 세종때 태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안지(安止 탐진인) 최흥효와 함께 금자법화경을 써서 세종에게 바친 일이 있습니다.

4. 조종운의 씨족원류에는 광주 안씨의 계보가 안방걸(대장군) 후손 안수(安綏 문하시중) 안지(판군기시사) 안수(安壽 판도평의사사) 안해(판전농시사) 안기(판전농시사) 안성(개성유후, 사간공)으로 되어 있고 어느책에는 안수가 있으나 안기가 없고, 다른책에는 안수가 없으나 안기가 있다고 세주를 달았다는 말이 있어 감히 안기 선조의 딸이 누락되었는가?하는 질문을 합니다

5. 경기도 양평에 류관선조 묘소에 류관선조와 후배 풍천군부인 이씨과 묘가 나란히(쌍분) 있습니다. 초배 광릉군부인 안씨는 묘소가 북한에 있어 세분이 함께 한자리에 없습니다. 당시는 묘소에 대한 개념이 지금과 다른지 몰라도 하정공은 나이 82(1427) 때 아버지 묘소를 구월산 대승공 묘소 부군으로 이장합니다.

안씨부인은 개경에서 우왕때 돌라가셨으며, 아버지 류안택선조를 82세에 이장하였던 것처럼 부인 묘를 아들들이 하정공 묘소 옆으로 옮기지 않아 묘소는 양평에 없지만 시제를 지낼 때는 하정공 시제와 두부인 세제를 따로 지내오니 안씨부인 묘소가 없는데 시제 마져 소홀하게 하는가?하는 우려는 안해도 됩니다. 안씨부인소생 이들 3명이 후배 어머니 묘갈문을 세웠지만 자기 어머니 묘소 관리는 소홀한 듯합니다 .

6. 가정보에 배위 기록이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류관선조의 부인만 없는 것이 아니고 모두 부인이 없습니다.


출처 : 문화류씨 - 뿌리 깊은 버드나무
글쓴이 : 夏谷류재균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