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문화 류씨 세보 해설"
http://jklyut.tistory.com/m/post/61
♧ 아래 글은 무수 기자 | 무수한담(無愁閑談) 이란 분이 2014/04/16일 작성한글로 참고될 내용이기에 소개합니다.
문화 류씨 세보 해설-세보는 무엇인가?
1. 족보의 구분
족보는 간행 시기별, 기술 방법별, 수록범위별, 이렇게 크게 세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2003년 간행된 '문화류씨 충경공파 대보'와 1960년대 간행된 '문화류씨 반곡공파 파보'
2. 간행시기별 구분
보통 수십년 단위로 족보를 간행했다. 이전 족보 간행 후에 생긴 변동사항(혼인, 사망, 출생, 묘소 이장, 승진이나 보직이동 등 관직 관련 사항)을 정리했다. 뒤에 나오는 문화류씨 영락보는 명나라의 연호인 ‘영락’ 연간인 1423년에 간행됐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3. 기술방법별 구분
대부분의 족보는 시조의 연원을 밝히고 후손을 세대별로 수록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장 일반적인 형태다.
거꾸로 현재의 나(집안)를 기준해 선조의 행적을 추적해 정리하는 가첩도 있다.
여기에서 더해 해당 인물에 관한 기사는 모두 삭제한 채 성명만을 계통에 따라 도표 형태로 정리한 가장 단순한 계통도도 있다.
4. 수록범위별 구분
족보에 싣는 사람들의 범위에 따라 대(족)보, 파보, 가첩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대보는 문중의 전체 선조와 후손을 모두 수록하는 방대한 문헌이다. 통상 수십년 또는 수백년 단위로 만들어졌다.
파보는 중시조를 중심으로 한 문중원을 대상으로 만든 족보이다. 지난 2003년 만들어진 충경공파 대보가 한 예이다. 충경공 이전 직계 선조에 대한 기사는 그대로 싣되 방계는 이름만 쓸 뿐 기사는 과감하게 삭제해 분량을 줄여 쉽게 계통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보다 더 세분화된 소문중별 파보도 있다. 1960년대에 만들어진 ‘문화류씨 반곡공 파보‘가 예이다. 1500년대초 함양군 안의로 퇴거한 반곡공을 중심으로 이후 안의, 거창, 합천, 남원 등지로 흩어져 세거한 후손들이 실려 있다.
2004년 8월 16일 할머니 고 오계필 장례식
5. 족보의 체제
서문, 발문, 선조의 묘소 지도나 사진, 범례, 목차, 원파록, 본문, 각종 비문이나 행장 등을 뒤에 싣는 것이 일반적이다.
2003년 간행된 충경공파 대보의 경우에는 1권에 비문과 행장, 역대 간행 세보의 서문, 족보의 이해를 돕기 위한 상식, 촌수 계산법, 친족간 호칭, 관혼상제 등 4례 편람 등을 먼저 싣고 본문을 뒤에 붙이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6. 문화류씨 세보
한국 최초의 족보는 1423년(세종 5년)에 편찬된 문화류씨(文化柳氏) 영락보(永樂譜)인데, 아쉽게도 현재 본문은 없고 족보의 서문(2003년 간행 문화류씨 충경공파 파보 1권에 재수록)만 남아 있다. 그후 안동권씨(安東權氏)의 족보인 성화보(成化譜,1477년 성종 7년, 3권, 364 페이지)와 문화류씨의 가정보(嘉靖譜, 1562년 명종 17년, 10권 2204 페이지)가 나왔는데 현존한다.
가정보는 내외손(內外孫)을 차별없이 동격(同格)으로 취급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사위의 경우 성명만 쓰고 본관이나 선조의 기록은 일체 쓰지 않은 반면 그 자손(외손 및 외외손)은 6~7대까지 자세히 적고 있어 핏줄을 중시하고 있다.
가정보에는 모두 4만 2000여명이 등재돼 있는데, 양자의 기록이 나오고 서자(庶子)의 기록은 없다. 개가한 여자의 남편을 전부(前夫)와 후부(後夫)로 기록하고 있으며, 기록의 정확성과 객관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흥미로운 점은, 조선 성종에서 중종에 이르기까지 75년간 89회의 문과(文科)가 실시돼 1595명의 급제자가 배출됐는데 그 중 1120명의 이름이 가정보에 올라 있다. 그들의 대부분인 1071명이 문화류씨의 후손이거나 혼인관계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한다. 전체 급제자의 약 70%를 차지하는 놀라운 수치이다.
특히 문화류씨 세보에는 남녀 후손에게 재산을 나눠준 내용(분재기,分財記)이 수록돼 있는데 전답, 임야, 가옥 등 부동산 뿐 아니라 노비의 숫자까지 명시돼 조선시대 사회사와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1차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가정보 이후 여러 차례 족보 간행이 있었다(2003년 간행 충경공 파보 1권 참조).
7. 족보 보는 법
시조부터 차례로 내려가 현재의 나까지 찾아보는 방법이 있으나 이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선조의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시조부터 몇대만 거치면 곧 어디로 가야할지 종잡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럴 경우에 대비해 가첩과 함께 족보를 살피면 효과적이다.
가첩을 참고해 선대로부터, 혹은 아래로부터 찾아갈 때 해당 인물의 이름 밑에 ‘아래 몇 페이지를 보라(견하見下 00)‘ 또는 '위 몇 페이지를 보라(견상見上 00)'는 문구가 있으니 참고.
2003년 간행된 ‘문화류씨 충경공파 대보’의 경우 고조부 동구(東龜)의 선조와 후손에 관한 기사는 1권 본문 1~6, 25~7페이지, 2권 1,6,11,62~63,328페이지, 3권 1611~1622페이지에 걸쳐 볼 수 있다.
집안 단위를 벗어나 대보나 파보 등 공식적인 족보 발간 때는 일정한 형식과 이를 기준으로 편집하는 편집위원이 있다. 개인의 임의로 낸 수단(개인이 족보에 수록해 달라며 내는 기초자료)은 편집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가첩에는 집안의 내력이나, 친구 뿐만 아니라 외가나 처가 쪽의 기록도 풍부히 기록해 후손의 이해를 돕는 것이 바람직하다. 표현 방식도 현대어에 가깝게 자유럽게 하는 것이 후손의 이해를 돕는다는 족보(가첩)의 원래 취지에 맞을 수 있다.
8. 원파록에 관한 문제
2003년 간행된 ‘문화류씨 충경공파 대보’를 비롯해 이를 저본으로 한 ‘반곡공파보’ 등에는 문화류씨의 시조인 대승공 류차달 이전의 일을 기록한 원파록이 나온다. 중국의 전설상 인물인 황제(黃帝) 의 성 희씨(姬氏, 4세)부터 시작해 사씨(姒氏,10세), 왕씨(王氏,57세), 차씨(車氏,32세), 류씨(柳氏,5세)의 성명과 기사를 적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는 족보가 조선 성종 때를 전후해 광범위하게 간행됐다는 점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이 시기는 각 가문이 족보를 만들면서 가문의 전통과 역사, 위세를 강조하며 정통성을 확립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중국을 연원으로 하는 상고 부문은 가문의 오랜 연원을 강조하기 위해 갖다붙인 측면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본문은 전하지 않지만 한국 최초의 족보인 문화류씨 세보 영락보 서문, 완전한 형태로 전하는 가정보 등에 이같은 내용이 없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시대와 그 이전부터 한국에 있던 성, 즉 신라왕실의 박(朴) 석(昔 또는 石) 김(金)씨와 6부의 이(李) 정(鄭) 손(孫) 최(崔) 배(裵) 설(薛)씨, 고구려 왕실의 고(高)씨, 백제왕실의 부여(扶餘)씨, 발해 왕실의 대(大)씨, 제주도(탐라국)의 토성인 고(高) 양(梁) 부(夫)씨 등이 있다. 이 외의 성은 대부분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선대가 태조 왕건에게서 성을 받았다는 사성(賜姓) 주장을 펴고 있다. 문화류씨도 이와 같다는 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나 대승공 류차달이 고려 태조의 후백제 정벌 때 수레와 군량을 지원했다는 것으로 미뤄볼 때 적어도 대승공 이전 선조부터 서해와 예성강, 대동강, 임진강을 중심으로 하는 황해도를 무대로 큰 세력을 형성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문화류씨가 연안차씨와 대승공을 아버지로 둔 형제라는 '차류동원설'은 그동안 큰 의문없이 수용돼 왔다. 서울 대방동에는 ‘차류대종회’ 회관도 있었다. 필자가 대학을 다니던 1984년 차류대종회 회관에서 장학금을 받은 적도 있다. 어린 시절 경남 거창에 세거하던 필자의 어른들이 기장 만화동의 '차릉'에서 열리는 시향에 출입했던 일도 기억한다. 그러나 연안차씨 종친회가 2001년 대전에 있는 '뿌리공원'에 '연안차씨 유래비'를 세우면서 문화류씨를 '가성(잠시 빌려쓴 가짜성)'이라고 주장하고, 문화류씨 대종회가 이에 정면으로 맞서면서 양 문중간에 '차류선계논쟁'이 격렬하게 불붙었다.
대전 중구 유천동에 본부를 둔 문화류씨 대종회는 이후 각종 문헌과 금석문에 대한 엄밀한 고증을 거쳐 '차류동원설'의 허구를 파헤치고 2004년 문화류씨와 연안차씨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공식적으로 의결했다. 2007년에는 '차류대종회'를 파기했다. 2008년 간행된 문화류씨 대동보인 '문화류씨 세보'에서 류씨와 차씨가 관계가 없음을 천명해 결론을 냈다.
한국 최초의 족보(현존 최초의 족보는 안동권씨의 '성화보')로 서문만 남아 있는 문화류씨 '영락보' 서문과, 현존하는 '가정보'에는 차류동원설에 대한 언급이 없고, 이 설의 발단이 된 '차원부 설원기'가 연안차씨 문중에 의해 조작된 위서이며, 조선 중기 권문해의 '대동운부군옥'을 비롯한 여러 문집들이 이 설을 인용해 확산시키고, 급기야 문화류씨 족보(1689년 기사보)에까지 수록되면서 정설로 굳어졌다는 것이 주장의 골자다.
영남대 국사학과 이수건 교수의 논문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의 비판'도 문화류씨와 연안차씨가 아무 관련이 없다는 문화류씨 대종회 주장의 중요한 근거가 됐다. 이 교수는 논문에서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조선에 협력하지 않고 절의를 지키며 은거하던 영남 유림이, 고려에 절의를 지키며 조선 태조를 도왔지만 하륜 정도전 등에게 희생된 것으로 묘사된 '차원부'라는 인물에 매료돼 이같은 차문의 주장을 확산하며 활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여전히 매우 예민한 사항이다. '차원부 설원기'가 위서라는 점은 학계도 대부분 인정하지만 '차류대종회'를 함께 하는 등 유대를 맺어온 양 문중의 충격과 오랜 세월 세상에 떠돈 '차류동원설'의 여파는 아직 만만치 않다.
필자가 보기에 정황상 문화류씨와 연안차씨가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 맞는 듯 하지만, 더 명확하게 입증하려면 더 많은 실증자료가 필요하다. 그동안 한 형제처럼 지내온 문화류씨와 연안차씨 양 문중이 '선계논쟁'으로 입은 상처와 반목을 치유하고 객관적인 진실 위에서 새 출발을 하기 위해 성실하고 진지한 노력을 하는 정리과정도 필요해 보인다.
참고로 이전 문화류씨와 연안차씨처럼 같은 조상을 모시면서 본이 같다고 믿어온 성씨의 관계를 포족(胞族)이라고 부른다.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 양천 허씨도 비슷한 상황이다. 과거 이들 성씨간 결혼이 금지됐다.
'문화류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차류대종회 해체의 당위성에 대한 문화류씨 대종회 2005년도 입장 내용 (0) | 2016.04.01 |
---|---|
[스크랩] 오산 차천로의 묘소의 실체를 이제야 알겠습니다. (0) | 2016.04.01 |
문화류씨세보 해설 (0) | 2016.03.29 |
[스크랩] 대동사 소유권 이전등기 소송 내용 (0) | 2016.03.25 |
의령인 문충공 약천 남구만 宜寧人 文忠公 藥泉 南九萬, 몽예 남극관. (0) | 2016.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