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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명문의 척도와 문형

ryu하곡 2015. 11. 24. 06:29

역사상 명문(名門)이란 오랜 세월에 걸쳐 여러 요인이 쌓여서 형성된 것이지만, 특히 그 가문에서 배출한 정승(政丞ㆍ相臣ㆍ三議政)의 수보다는 문형(文衡)이 얼마나 배출되었느냐가 명문을 따지는 유력한 기준이 된다.

정승(政丞)은 국정을 총괄하는 지위인만큼 어느 가문에서 정승(政丞)이 배출되면 그 문중의 세력이 신장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세력있는 가문이 꼭 명문일 수는 없다는 논리가 서는 것이다.


▲ 조선 후기 문형(文衡) 선발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문형록(文衡錄)은 문형권점록(文衡圈點錄)이라고도 한다.

그에 비해 대제학(大提學)은 비록 정1품인 정승(政丞)보다 한급 아래인 정2품의 관계(官階)이지만 학문과 도덕이 뛰어나고 가문에도 하자가 없는 석학(碩學)ㆍ석유(碩儒)만이 오를 수 있는 지위로써, 학자와 인격자로서의 최고 지위라고 할 수 있어 어느 가문에서 대제학(大提學)이 배출되면 당대는 물론 그 후손들도 최고의 영예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그렇게 평가해 주었던 것이다.

문형(文衡)이라면 흔히 대제학(大提學)의 별칭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제학(大提學)이라 해도 문형(文衡)의 칭호를 얻으려면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나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임(兼任)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이나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역임한 사람이라도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나 또는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임(兼任)하지 못한 사람은 문형(文衡)으로 칭하지 않았다. 이들 3관(館)의 벼슬은 학문과 문벌이 높은 사람으로서 임용되는 이른바 청환직(淸宦職)이어서 다른 어떠한 관직보다도 비중이 컸던 것이다.

홍문관(弘文館)은 궁중의 경서(經書)ㆍ사적(史籍)을 관리하며 문서를 처리하고, 경연(經筵ㆍ왕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일)을 맡았는가 하면 왕의 자문에 응하는 기관으로, 흔히 ‘옥당(玉堂)’이란 별칭으로 불리었다. 한편 예문관(藝文館)은 제반 외교문서를 포함한 왕의 칙령과 교명(敎命)을 맡았으며, 성균관(成均館)은 조선시대의 국학인 유학(儒學)을 교육하는 기관이었다. 따라서 이들 3관(館)은 어느 다른 관청보다도 중요시했다.

문형(文衡)은 바로 이들 3관(館)의 최고책임자이자 실무자로서 당대의 관학계(官學界)를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자리였다. 문형(文衡)은 역대 왕조실록의 편찬에 반드시 참여했으며, 또 과거를 주재하고 문신의 과시(課試)와 상벌, 외교사절의 접반(接伴), 각종 경적(經籍)의 편찬과 출판을 관장했는가 하면 왕세자(王世子)의 입학에 박사(博士)로서 그 의식을 주재하기도 했다. 이렇듯 문형(文衡)의 소임은 다양하고 광범해서, 일대(一代)의 유림(儒林)과 사원(詞苑)이 모두 문형(文衡)의 통할에 귀속되었다. 따라서 문형(文衡)의 자리를 최고의 영예로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형(文衡)에 이를 수 있는 자격은 첫째로 문과(文科) 출신으로서 예문관(藝文館) 관원(官員)이 되기 위한 사관시재(史官試才) 또는 한림소시(翰林召試)라는 채용시험에 합격하거나, 홍문록(弘文錄ㆍ홍문관 교리나 수찬 등 홍문관 관원을 임명할 때의 제1차 인선기록)에 뽑혀야 한다. 둘째로 반드시 호당(湖堂ㆍ조선시대에 국가의 인재를 길러 내기 위해 건립한 전문독서연구기구로 독서당 원수는 1426년부터 1773년까지 약 350년 동안 총 48차에 걸쳐서 320명이 선발되었다. 일명 讀書堂)을 거쳐야 했다. 셋째로는 반드시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와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을 역임한 사람이어야 했다. 응교(應敎)와 제학(提學)은 그 자격 및 임용 규정이 까다로워서 반드시 장래 문형(文衡)이 될 만하다고 인정되는 재학(才學)과 명망있는 사람으로서 임용되었다.

위와 같은 요건을 갖추었다고 해서 누구나 다 문형(文衡)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문형(文衡)의 임용은 반드시 전임자가 후임자를 천거하면, 이를 삼정승(三政丞)ㆍ좌우찬성(左右贊成)ㆍ좌우참찬(左右參贊)ㆍ육조판서(六曹判書) 등이 모여 권점(圈點)을 해서 결정했다. 권점(圈點)이란 관리를 임명할 때 여러 후보자의 이름을 적은 다음, 전선관(銓選官)들이 각각 자기 마음에 드는 후보의 이름에 둥근 점을 쳤는데, 이 점을 권점(圈點)이라 하며 점이 많은 사람이 관리로 뽑혔다. 권점(圈點)으로 뽑는 방식은 다른 청환(淸宦)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문형(文衡)은 반드시 전임자가 천거한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점이 특수했다.

일단 문형(文衡)이 되면 본인이 사임하지 않는 한 그 지위가 보장되는 것이 통례여서, 비록 죄를 짓거나 상(喪)을 당한다 해도 죄에서 풀리거나 상(喪)을 마친 뒤 그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문형(文衡)으로서 상신(相臣ㆍ三議政)에 임명되면 후임자를 추천하고 문형직(文衡職)을 사임하는 것이 통례였는데, 다만 신숙주(申叔舟·高靈)ㆍ어세겸(魚世謙·咸從)ㆍ이행(李荇·德水)ㆍ김안로 (金安老·延安)ㆍ성세창(成世昌·昌寧)ㆍ유성룡(柳成龍·豊山) 등은 정승이 되어서도 문형(文衡)을 겸직했었다.

역사상 3대(三代)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한 집안은, 연안 이씨(延安李氏) ‘월사(月沙)집’의 이정구(李廷龜)ㆍ이명한(李明漢)ㆍ이일상(李一相), 광산 김씨(光山金氏) ‘사계(沙溪)집’의 김만기(金萬基)ㆍ김진규(金鎭圭)ㆍ김양택(金陽澤), 달성 서씨(達城徐氏) ‘약봉(藥峰)집’의 서유신(徐有臣)ㆍ서영보(徐榮輔)ㆍ서기순(徐箕淳), 전주 이씨(全州李氏) ‘백강(白江)집’의 이민서(李敏서)ㆍ이관명(李觀命)ㆍ이휘지(李徽之) 등 네 집뿐이었다.

한편 부자(父子) 대제학(大提學)은 연안 이씨(延安李氏)의 이복원(李福源)ㆍ이만수(李萬秀),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이진망(李眞望)ㆍ이광덕(李匡德), 창녕 성씨(昌寧成氏)의 성현(成俔)ㆍ성세창(成世昌), 덕수 이씨(德水李氏)의 이식(李植)ㆍ이단하(李端夏),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김수항(金壽恒)ㆍ김창협(金昌協), 의령 남씨(宜寧南氏)의 남유용(南有容)ㆍ남공철(南公轍), 해주 오씨(海州吳氏)의 오원(吳瑗)ㆍ오재순(吳載純) 등 일곱 집이고, 형제 문형(文衡)은 광산 김씨(光山金氏)의 김만기(金萬基)ㆍ김만중(金萬重) 형제와 여흥 민씨(驪興閔氏)의 민점(閔點)ㆍ민암(閔黯) 형제뿐이다.

그러니까 연안 이씨(延安李氏) ‘월사(月沙)집’은 3대 대제학(大提學)에 부자 대제학(大提學) 등 6명의 문형(李鼎輔)과 상신(相臣) 6명(李廷龜ㆍ李天輔ㆍ李福源ㆍ李性源ㆍ李時秀ㆍ李在秀)을 배출했고, 달성 서씨(達城徐氏) ‘약봉(藥峰)집’에서는 3대 대제학(大提學)을 포함하여 5명의 문형(徐宗泰ㆍ徐命鷹)과 3대 상신相臣)을 포함한 9명의 정승을 배출했고, 광산 김씨(光山金氏) ‘사계(沙溪)집’에서는 3대 대제학(大提學)과 형제 대제학(大提學) 등 7명의 문형(金益熙ㆍ金永壽)과 3명의 상신(金相福ㆍ金陽澤ㆍ金熹)을 배출했다. 또한 전주 이씨(全州李氏) 밀성군파의 ‘백강(白江)집’에서는 3대 대제학(大提學)과 6명의 상신(相臣)을 배출했으니 단일 가계로서는 대단한 열력(閱靂)이라 하겠다.

역대 문형(文衡) 134명 가운데 35%인 47명이 상신(相臣)에 올라 높은 승진율을 보이고 있으며, 그밖의 문형(文衡)들도 좌ㆍ우찬성(左右贊成) 이나 보다 높은 품계(品階)로 오름으로서 문형(文衡) 출신들의 높은 승진율을 엿볼 수 있다.

역사상 최초로 문형(文衡)에 오른 사람은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양촌 권근(陽村 權近)이며, 최연소의 나이로 문형(文衡)에 오른 사람은 광주 이씨(廣州李氏)의 한음 이덕형(漢陰 李德馨)으로서 31세의 나이로 문형(文衡)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다.

문형(文衡)을 여러 차례 중임(重任)한 이로는 광산 김씨(光山金氏)의 김양택((金陽澤·영조조)과 장수 황씨(長水黃氏)의 황경원(黃景源·영조조)이 5번을 중임하는 기록을 세웠고, 덕수 이씨(德水李氏)의 이식(李植·인조조), 전의 이씨(全義李氏) 이덕수(李德壽·영조조)ㆍ해주 오씨(海州吳氏) 오재순(吳載純·정조조)ㆍ청송 심씨(靑松沈氏) 심상규(沈相奎·순조조), 안동 김씨(安東金氏) 김조순(金祖淳·순조조)이 각각 4번을 중임했다.

이밖에 이덕형(李德馨·광주인)ㆍ오도일(吳道一·해주인)ㆍ송상기(宋相琦·은진인)ㆍ윤순(尹淳·해평인)ㆍ이병상(李秉常·한산인)ㆍ이정보(李鼎輔·연안인)ㆍ이휘지(李徽之·전주인)ㆍ서명응(徐命膺·달성인)ㆍ김종수(金鍾秀·청풍인)ㆍ홍양호(洪良浩·풍산인)ㆍ이만수(李晩秀·연안인) 등이 3번을 역임했다.

출처 : 달성서씨를 사랑하는 사람들...
글쓴이 : 관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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